자유라는 선고

5. 내가 너와 함께할 것이니. (2)

응, 괜찮아.

짧은 촉수 여덟 개를 위아래로 까닥였다.

크라켄은, 자신이 사랑하는 아이가 다른 동물을 들여도 괜찮았다.

네가 좋다면 나도 좋아.

그냥, 나는 네가 좋아…….

그러나 건물만큼이나 거대해진 문어는 때로 자문했다.

그것은, 질투는 아니나 오만이었던가?


품속의 오만은 인형과는 달리 온전히 멈춘 채 있지만은 못했다.

‘가만히.’ 그런 말을 전하려 한다 해도 지금의 그는 일어나 수첩과 펜부터 들어올려야 한다. 그것이 귀찮아 문어를 몇 번 토닥였다. 그러나 잠시 얌전했던 크라켄이 재차 숨쉬기 위해 꿈틀거렸다. 결국 한숨 쉰 아이가 손바닥을 펼쳐 문어의 몸통 어드메를 밀어냈다.

천에 난 보이지 않는 수많은 구멍의 존재 때문에 빨판이 쉽사리 밀착되지 않는다. 늘어진 크라켄은 쉽사리 주욱 밀려났다.

실은 그것보다는 크라켄이 크게 저항하지 않은 것에 가깝지만.

그러고서 아이는 막상 품이 허해 인형을 찾았다.

하지만 인형은 오만이 저 멀리 밀어두어 손에 닿지 않았다.

다시 몸을 움직여 끌어오기에는 졸린 몸이 노곤했으므로,

잠이, 들었다.

탁, 그리고 탁. 톡톡톡…… 툭.

굵은 비가 땅에 닿아 부서지는 소리를 닮은 소음이 귓가를 울렸다. 창문을 연 적 없으니 빗소리가 이리 선명히 들릴 리는 없음에도 아주 잠시 비를 떠올렸다.

사망할 땐 시각보다 청각을 느리게 잃는다던데. 깨어날 때에는 반대로 시각보다 청각을 먼저 되찾고는 한다.

시끄러워.

이불을 더 위로 올려 덮었다. 이마에 닿을 만큼 위로. 그러나 소음은 계속해 이어진다.

탁, 끄응……. 그리고 때로는 ‘구워.’까지.

눈썹 사이를 구겼다. 이쯤 되면 눈치를 챌 수밖에 없었다.

그의 오만과 토끼가 체스를 두고 있는 것이다.

이제는 이불을 머리끝까지 올려 덮었음에도 소리가 귀를 파고들었다. 싫다……. 솜과 천이라는 필터를 거친 소음은 보다 빗소리를 닮았다.

아이가 두 발 사이에 이불을 두고 꿈틀거리듯 비볐다. 발목에 닿는 천의 부드러운 감촉에 다시 몸이 늘어진다.

그런 생각을 했다. ​아마 크라켄은 ‘그와’ 체스를 두고 싶었던 것이 아니라 ‘체스를 두고’ 싶었던 것일지 모른다. 그것까지 생각이 미치자 잠이 더 쏟아지는 듯했다.

——하지만 저것은 그의 소유인데. 절로 눈이 뜨였다.

다쳤을 때엔 치료하고. 좋은 것을 먹이고. 생사를 함께하며 서로 목숨을 빚진 동물이 그의 것이 아닐 수 있던가.

더 이상 탑의 지배자가 아니게 된 ‘로 포 비아 트로이메라이’조차 저것의 소유권을 주장할 권리는,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아주 오랜만에 발로 땅을 짚었다.

졸린 눈을 약하게 비볐다. 그러고도 잠이 깨는 일은 없었다.

새삼스러우나 따스한 바닥이 매끄러웠다. 넘어지지 않기 위해 허리에 힘을 주었다. 그러자 목덜미가 따끔했다.

대충 일어선 탓에 바닥을 딛은 발에 이불이 딸려 왔다. 보지도 않고 발만 몇 번 툭툭 털어 떼어내려 했지만 손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뒤늦게 데구르 눈을 굴렸다. 그냥, 다시 누울까…….

그리고 토끼와 눈이 마주쳤다.

그것에 관심 두지 않고 재차 고민했다. 그러니까, 이대로 누울지 걸을지에 대하여.

그렇게 눈만 끔뻑이고 있자 토끼가 다가왔다. 트로이메라이가 그녀에게 어떤 의사 표현도 전하려 하지 않았음에도.

당연하다는 듯 다가온 토끼가 아이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바닥에 무릎이 닿으면서는 아주 작은 삐걱대는 소리조차 울리지 않았다. 트로이메라이가 그 모습을 흘끔 내려다보았다. 손끝을 어디에 둘지 잠시 허공을 배회하던 소녀의 손이 아이의 발에 가 닿았다. 곧이어 토끼가 아이의 발에서 이불을 떼어낼 때쯤, 작은 하품을 한 아이가 고민을 끝마쳤다.

……역시 귀찮다. 누워야겠어.

그렇지만 아이가 손을 휘적임과 동시에, 토끼가 아이의 팔과 몸 사이에 제 손을 넣어 들어 올렸다.

말을 할 수 있다면 내려놓으라 뱉었을 테지만 그는 고개를 젓지는 않았다. 졸려 거절할 의지조차 소멸했다…….

아직 덜 뜨인 눈으로 토끼의 눈을 응시했다. 그것에 담긴 것이 첫날 목격했던 경멸은 아니나 긍정적인 어떤 감정을 찾기도 어려웠다. 아이는 뜨다 만 눈을 다시 감았다.

너는 너도 싫은 것을 왜 하려는 것인지.

머지않아 아이가 의자에 온순하게 앉혀졌다.

토끼가 직전까지만 해도 앉아 있던 탓에 아직 온기가 배여 있다.

졸려……. 아래로 떨어뜨리려던 고개를 뚝 멈췄다. 자연스레 시야에 두다 만 체스판이 들어온다.

희뿌옇던 시야가 보다 선명해져 간다. 잠이 깨려 했다.

그러고도 눈앞엔 여전히 체스판이.

단지 그러고 싶었기 때문에 그렇게 했다. 체스말을 움직여 토끼가 미처 두지 못했던 다음 수를 두었다.

토끼가 수첩과 펜을 가져오던 틈, 트로이메라이가 손을 움직인 것이다.

촉수 하나가 탁자 위로 뿅 튀어나오더니 좌우로 휘저어졌다. 의자에 앉은 크라켄의 몸통은 대부분이 탁자 아래에 있다.

아이는 체스말을 본래 위치로 돌려두었으면 한다는 의미를 이해했으나 단순히 그렇게 하고 싶지 않다는 이유로 그것을 깔끔히 외면했다.

탁자에 팔꿈치를 기대어 턱을 괴고선 눈만 굴려 토끼를 확인했다. 그가 계속해 체스를 둘 것이라 여기는 듯 탁자 옆에 손을 모으고 선 토끼를.

체스판을 다시 확인했다. 잃은 말은 이미 토끼가 더 많았다. 토끼의 흰 체스말 몇몇이 지금의 토끼처럼 체스판 옆을 지키고 섰다.

그런데도 질 것 같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크라켄과 두었던, 잠들기 전의 체스와는 다르게.

의자에 앉아 촉수만을 위로 주욱 뺀 크라켄을, 트로이메라이는 기다렸다.

이전이나 지금이나, 그에게 시간이야 넘칠 듯 많다.

가만 숨을 들이쉬고, 내쉰다. 가슴과 어깨 역시 작게 움직였다. 침묵 속 그러한 삶의 소리만이 방을 채워 간다.

때문에 아이는 다시금 실감했다. 이 방은 밝고 따스하다.

뻗었던 촉수로 제 머리를 긁적인 오만이 마침내 제 체스말을 옮겼다.

탁, 소리가 났다. 이제 그것은 빗소리처럼은 들리지 않았다.

토끼는 여전히 두 손을 모으고서는 자리를 지키고 있다.

눈을 몇 번 깜박인 아이가 손에 흰 나이트를 쥐어 까닥였다.

탁, 툭, 데구르……. 이어지는 소음은 길지 않았다.

그리고 몇 번을 돌아와, 다시 트로이메라이의 차례가 되었을 때.

룩을 쥔 작은 손이 자리를 찾지 못하고 방황했다. 그것이 놓여아 할 자리를 앎에도.

아이가 한쪽 눈을 찌푸렸다. 피곤해 떨리는 것처럼 눈 아래가 옅게 떨렸다.

괜스레 숨을 쉬는 작은 행동마저 어렵게 느껴진다. 손끝에 힘이 들어가지 않나 싶더니 졸린 것조차 아님에도 시야가 뿌옇다. 돌연 숨을 헉, 크게 들이쉬었다. 눈앞이 일렁였다…….

그리고 직전까지의 그것들이 모두 환상이었다는 듯 순식간에 선명해졌다. 시야도. 손에 들린 룩도. 그리고 그 자신의 들숨과 날숨까지.

다시금 체스판을 눈에 담았다. 흑과 백이 교차하는 그것을.

숨을 고르며 손에 쥔 흰 룩을 느릿느릿 앞뒤로 흔들었다. 체크메이트 직전. 이 룩만 옮기면 그의 승리.

이보다 더 명확한 자리는 있을 수 없다.

검은 킹을 응시했다. 그것은 왕. 그러니까, 자하드를 닮은…….

탁, 툭. 어느새 흰 룩이 체스판 위를 굴렀다. 이번에는 시야가 흔들리거나 한 것조차 아니었음에도 손끝에 실려 있던 힘이 모두 사라졌던 것이다. 별안간 아이는 눈이 부시지 않음에도 눈이 시렸다. 손등으로 눈가를 문질러 닦았다. 그러고도 똑같이 시려웠다. 눈을 세게 눌러 감고서야 조금 진정이 되는 것도 같았다.

시린 눈을 멍하니 달래고 있으니 바로 옆에서 기척이 느껴진다. 문어의 것이 아닌 사람의 것이다.

토끼…….

그가 떨어뜨린 흰 룩을 토끼가 들어 올리는 것을 묵묵히 지켜보았다.

토끼는 그것을 ‘제자리’에 두었다. 본래 놓였어야 했을, 무엇보다도 명확한 자리에. 그리고 소녀가 웃었다. 아이와 눈을 마주치지 않기 위해 노력하며,

“이기셨네요.”

소녀가 뱉은 것은 감탄이나 칭찬이 아닌, 담담한 사실의 나열이었다.

아이가 탁자를 힘주어 짚었다. 그의 키에 맞추어져 적당히 낮은 그런 탁자가 작게 덜컹댔다.

이런, 쓸데없는 배려.

일어서 물러섰다. 간지러워……. 거즈 위를 손톱으로 긁듯 문질렀다. 갑작스럽게 들어간 힘에 목이 욱신거렸다. 거즈 아래가 완벽히 아문 것이 아니라면 필경 덧났을 테다. 피가 맺혔는지 아닌지. 상처가 재차 벌어졌는지 그렇지 않은지. 그런 것들은 중요하지 않았다.

다만 아팠다. 그것도 너무.

시린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점차 채워져 가는 방이 눈에 가득 담긴다.

빛으로 시작해, 토끼와, 인형과, 구석에 놓인 책장과, 체스판과, 그리고 그의 동물로까지 채워져 가는 방을, 눈 감지 않고 오래 바라보았다.

시린 눈에 눈물이 맺혔다. 거즈 아래에 맺혀 스미는 피를 모르는 아이가, 제 눈물만은 인지했다.

흘러내리지 않는 엷은 눈물을.

문득 알아차렸다.

아이가 무엇도 하지 않았음에도 계속해 무언가는 바뀌어 왔다.

아니다, 무엇도 하지 않았다는 표현에는 어폐가 있다. 아이는 ‘무엇도 하지 않는다’는 행위를 이행했던 것이다.

흘러가는 대로, 둔다는.

그러므로 완벽하게 아무것도 하지 않을 수는 없다고.

하다못해 그가 ‘살아 있는’, 그리고 ‘사람’인 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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