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의탑

귀환 -2

불온소강

전편에서는 화이밤이라면서요

└둘이 한 마디도 안 하는데 이게 맞나 싶어서요


찰칵거리는 마찰음은 그치질 않는다. 신해어의 이빨이 부딪히는 것 같은 그 거슬리는 소리가 잦아듦은 밤이 외부로 연락을 시도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밤은 침대 위에 무릎을 세우고 앉아 가시모드로 전환한 포켓을 멀거니 쳐다보았다.

[ Bad Connection ]

포켓 방해라도 되어 있는 건지, 아무리 동료들에게 연락을 해봐도 신호조차 잡히질 않는다. 자신은 살아있고 다친 곳도 없다고, 이쪽은 걱정 말고 사부님을 구하는 데에 전력을 다해달라고 전해야 하는데. 밤은 한숨을 꾹 삼키고 눈만 흘끗 돌려 소파쪽을 쳐다보았다.

밤을 불편하게 하는 대상이 거기에 늘어져 있었다.

화이트는 전례없이 흐뭇한 기분을 느끼며 쭉 뻗은 검신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좋은 명검을 숯돌에 갈고 눈에 찰 만큼 날을 세워 막 검집에 넣어두었을 때처럼 후련하기까지 했다. 한동안은 만족감으로 식혼의 갈증도 잠잠해질 정도였으니까. 주술서를 건네준 악마가 소근대는 소리도 들리지 않았고, 자격을 운운하던 푸른 힘도 화이트의 본질을 확인하자 이제는 완전히 입을 다물고 복종했다. 무엇도 거리낄 것 없이 순탄하다. 오직 넘치는 힘만이 무디게 출렁이며 적합한 자의 사용을 바라고 있었다. 볼라이트의 빛이 여러 갈래로 번져 첨예한 끝에 맺힌다. 그 빛을 바라보는 화이트의 백안에서 초점이 흐트러졌다. 천벌이라도 내릴 듯 어린 날의 자신을 비난하던 신수의 물결은 이제 와 말이 없다. 신수조차 자신의 발 아래.

화이트는 검을 쥔 팔을 떨어트리고 천장의 어딘가로 시선을 내던졌다. 빙빙 도는 순백색 눈동자에는 황홀한 때의 순간이 비치고 있었다. 홀린 사람처럼, 화이트의 머릿속에는 오로지 그때의 충격만이 돌고 돌았다. 아무런 훼방도 없이 만찬을 열게 된 기대감, 결국엔 입안에 들어왔을 때의 오싹한 쾌감. 빼앗기는 듯한 정신은 눈꺼풀로 덮어 누른다.

보고만 있어도 배가 부르다는 게 이런 건가. 화이트는 고개를 틀어 밤의 침대쪽을 넘겨보았다. 뒤척임에 소파 아래로 머리카락이 흘러내리는 것은 문제 삼지 않았다.

그러다 운 나쁘게 시선이 마주치거든 밤은 금안에 조금의 불경도 들일 수 없다는 듯 기색 없던 눈을 경멸조로 벼리고 그를 외면했다. 밤은 깨어난 이후 한번도 먼저 화이트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초조함이 밤의 입을 막은 탓이다.

몇 번째인지도 모를 연결 실패 끝에 밤은 무릎 사이로 고개를 숙였다. 꼼지락대는 자신의 발끝을 쳐다보는 것 이상으로 생산적인 일은 할 수 없었다.

가장 난처한 점은 감금되어 있는 며칠 동안 화이트가 방밖으로 나가거나 밤이 혼자 있는 시간을 두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밖으로 나가지만 않으면 방안을 돌아다니든 구속구에 신수를 주입하든 그는 신경쓰지 않았다. 신원류로 구속구를 부수려다 먼저 지쳐버린 밤을 보며 비웃기도 했고, 방안을 탐색하는 밤에게 거처에 정취가 있지 않으냐며 묻지 않은 자랑을 늘어놓았다. 지금도 백날 연락해보라는 양 밤을 방치해두고는 시루떡처럼 소파에 누워 빈둥대고 있으니 말 다 했지. 저 사람은 일도 없나. 혼을 계속해서 먹어야 하는 저주에 걸렸다고 들었는데, ‘영혼 먹으러 안 가세요’라고 자신의 입으로 물어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화이트는 권좌를 되찾았다고 했다. 슬레이어는 퍼그에서도 최고 간부의 자리. 슬레이어 후보가 도구가 아닌 퍼그의 또다른 세력으로서 승탑하길 원하는 원로와의 견제도 각오하고 있을 것이다. 게다가 화이트 역시 밤을 이끄는 길잡이의 존재를 알고 있다. 혼자 두지 않는 것은 화련을 의식해서겠지. 길잡이는 갈 수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갈 수 있는 존재. 하지만··· 이런 상태라면 화련 씨도 들어오기 어려울 거야. 바깥은 전쟁중이었다. 이쪽으로 전력을 분산시켜서 발목을 잡을 수는 없어. 역시 나 자신의 힘으로 빠져나가야만 해.

“비가시모드.”

구속구를 아무리 흔들고 비틀어봐도 풀릴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더는 한숨은 쉬지 않기로 했다.

그리고 어째서인지 밤의 초조함에 전염된 화이트 또한 같은 답답함을 느껴야 했다.

———————

둥지 내부

밤 일행의 부유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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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선별인원의 힘이라면 가능하지 않겠어. 저 부유석 안에 들어가서 무언가를 빼내 오는 일.’

‘이봐, 할망구. 애석하지만 밤은 지금 힘을 쓸 수 없는 상태야.’

‘그럼 어쩔 수 없지. 예정대로 하진성은 봉인되겠군. 수고하렴, 꼬꼬꼬마들아.’

부유선 내의 분위기는 그다지 화목하지 않았다. 아센시오가 미적대며 포켓을 비가시모드로 전환했다.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고 서로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이 어색한 분위기는 아센시오에게 축객령을 내리는 것이나 다름없었으므로 하이랭커는 선별인원들의 눈치를 보더니 슬그머니 자리를 피해주었다. 밤을 강탈당한 건은 함구해달라고 사전에 입단속을 하긴 했지만, 아마 아센시오가 돌아간 즉시 마스체니의 귀에도 들어갈 터였다.

팔짱을 끼고 생각에 잠겨있던 쿤은 언제나처럼 알 수 없는 표정을 한 화련에게 턱짓했다. 체념한 것 같기도, 초연한 것 같기도 한 단정한 얼굴은 대화 상대인 쿤이 아닌 먼 운명을 바라보고 있는 듯했다.

“야, 화련. 넌 밤이 어디에 있는지 알지. 넌 밤을 올바른 길로 인도하는 길잡이 아냐?”

“결론만 말하자면, 알아. 하지만 갈 수 없어.”

“그게 무슨 소리야.”

“검은 거북이가 어디로 갔는지 안다고?!”

“좀 조용히 해봐, 악어!”

또다시 밑도 끝도 없는 만담이 시작되려 한다. 화련은 이를 외면하고 조곤조곤 말을 이었다. 이번 일은 화련에게도 마냥 기다릴 수 있는 건이 아니었다.

“말대로야. 나는 비올레가 어디에 있는지 알아.”

“그럼 왜 밤을 빼내오지 않은 건데? 너도 퍼그라 이건가?”

“비올레가 잡혀간 방에 화이트가 있어. 그것도 볼라이트가 켜지던 꺼지던 24시간.”

“그 자식, 감시를···.”

쿤이 턱끝을 매만졌다. 입을 틀어막아 숨기고 싶었던 모양이지만, 결국에는 조바심이 작은 신음으로 화해 새어나온다.

“어떻게 밤의 상태만 확인해볼 순 없어?”

“죽으란 말을 너무 쉽게 하는군. 걱정 마, 거기가 그의 죽을 자리는 아니니까. 지금은 당신의 죽을 자리를 골라보는 게 어때.”

조금 이성적인가 싶으면 금세 밤에 대한 사적 주의를 내보이는 것이 이 남자의 장점이자 약점. 전자는 화련에게 있어, 후자는 이 남자 자신에게 있어 그러했다. 그는 화련의 신에겐 둘도 없이 헌신적인 아군이었으니 말이다.

“우리 붉은 마녀들은 미래의 길을 보지만, 가리킨다고 모두 갈 수 있는 건 아냐. 갈 수 없는 길은 우리도 갈 수 없다. 새로운 길을 개척하는 건 우리에게 주어진 권한밖.”

화련은 몸을 돌려 투명한 유리 너머를 정면으로 향했다. 마스체니의 부유선을 보고 있는 것인지 천장을 보고 있는 것인지, 혹은 천장 너머로 권한 있는 자를 보고 있는 것인지는 알 수 없다.

“다만··· 그에게 계속 연락은 취해봐.”

“안 그래도 할 거야. 이대로 손 놓고 있을 수만은 없으니.”

굽이치는 물빛을 늘어뜨린 공주가 부유선의 통창 너머를 관조했다. 밖은 소강된 전장. 깊은 신해의 눈동자 위에 꺼지지 않은 잔불이 반사된다. 소사된 시체와 함선 조각이 신수 속을 나뒹굴며 그녀의 피를 뜨겁게 했다. 경치 한번 끝내주는군. 그녀는 막 소박한 부유선과의 교신을 마친 참이었다.

“건망증이 심한 소년이로군.”

반바퀴 턴에 드레스 자락이 살랑이며 고운 발목을 훔친다. 그녀는 테이블에 올려진 니들의 늘씬한 외견을 음미하며 전략적·효율적 외교술에 대한 심도있는 고찰에 들어갔다.

“어디- 뭐라고 보내야 우리 유리가 미쳐 날뛰고 공주에서 파면될까.”

고민은 길지 않았다. 연락을 취한 후 그녀는 가시모드를 해제했다.

[ 유리야 검은 삼월 잘 쓸게^^ ]

“방법이 있어. 비올레를 구하고 하진성 씨도 구할 수 있는 방법.”

“방법? 말해봐, 당장.”

“죽는 방법과 크게 다르지도 않지만.”

붉은 눈동자가 새파란 표면을 꿰뚫어 보았다. 길잡이는 길을 가리키는 존재. 길을 걷는 자 없이는 스스로 그 길을 이끌어 나가지 않는다. 그러니 지금 그녀가 적극성을 보이는 것은 길잡이의 순리에서 벗어난 길이었다.

하지만 지금 그녀가 바라보는 곳은 존재 자체가 특혜인 귀빈의 행차길. 이 정도 교시는 오히려 그의 운명을 직조한 자의 계획 중 하나일 터다. 그녀의 표정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지만 쿤의 눈에는 그녀가 묘하게 재미있어 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불쾌하다기보다는, 불안해진다.

“길잡이들의 히치하이킹을 보여주지.”

눈꺼풀을 드리워 바깥의 일을 덮어버리고 나면 검은 장막에는 지워버리고 싶은 잔상이 투영됐다. 강렬해서 며칠째 사라지지 않는 장면이다.

밤이 마주봤던 화이트는 몽중의 도취된 눈을 하고 있었다. 밤은 그때 진정으로 '미친' 사람의 얼굴을 처음 보았다. 그것은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인간의 얼굴이었다. 그 어떤 말도 통하지 않고 그 어떤 감정의 공유도 불가능하다. 그 자신의 안에서 완전무결한 행복을 거머쥔 채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승리감에 차 있었다. 밤은 이 사람이야말로 인도의 길에 다시 돌아올 수 없는 죄인이라는 것을 실감했다. 그토록 미쳐있다는 것을 도리어 자랑스러워 하는 듯한- 완전히 사리를 잃어버린 존재가 눈앞에 있다는 것은 두려운 일이었다. 그 어떤 일이라도 일어날 수 있고 그 어떤 일도 예상할 수 없어 미지의 존재란 공포였다. 무엇이 그를 미치게 만들었는지 알고 싶었고, 동시에 알고 싶지 않았다.

어쩌면 그의 말을 들어보고 싶다는 마음이 남아있을지도 모른다. 처음부터 나쁜 사람은 없다고, 설득하면 누구나 친구가 될 수 있을 거라고 믿는 과거의 자신이라면 그랬을 것이다. 그리고, 지금도 그러고 싶었다. 증오는 너무도 오래도록 밤을 지치게 했으니까.

하지만 화이트는.

그는 용서할 수 없다. 그를 용서해서는 안 된다. 밤의 마음과 신념만에 관한 문제는 아니었다. 그는 이미 그런 존재다.

불편한 꿈에서 깬 것 같은 피로감이 밤에게 살며시 휴식을 권했다. 그러나 밤은 볼라이트가 꺼질 때까지 느리게 눈을 명멸하고 있었다. 그는 그런 존재여야 했다.


/em 밤 SanC 1D5

시간차가 안 맞긴 하지만 밤이 납치된 if세계관이니 이런저런 이유로 시간선이 엮일 수 있는 거 아닌가 구차하게 변명해보아요

어떤 방법을 쓰면 이 난관을 헤쳐나가고 사부님도 구하고 밤도 구할 수 있을까 3일 정도 고민해봤는데 결국 제대로 된 방법은 못 찾았습니다 부탁해 화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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