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의탑

[화이밤]귀환 - 4

접촉


화이트는 미미한 갈증과 함께 눈을 떴다. 강하지 않지만 신경쓰이는 정도의. 태어나 존재하는 동안 단 한 번도 호아퀸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던 그것이다. 몸의 갈증이 아니었다. 저와 동시에 태어난 정신의 결핍. 잠잠했던 식혼의 저주가 다시 눈을 뜬 것이다.

이 힘을 얻었음에도 악마는 만족할 줄을 모른다. 아마 이 탑을 전부 가진다 해도 화이트가 갈증에서 자유로워 지지는 못할 것이다. 한동안 그것을 느끼지 못한 것 또한 이상했다. 무언가가 저를 족하게 했고 그 무언가가 또다시 저를 갈하게 만들었다. 그것을 찾고 싶었다.

비가 이렇게 오는데 조금도 축여지지 않는 마음은 이상하다. 끝도 없이 내리는 비는 조금도 마음을 축여주지 않는다. 이 비는 대체 어디에서 이리 세차게도 내리는 건지. 긴 한숨은 덧없다.

마르다면 잠깐이라도 축여 해결할 일. 화이트는 침상에서 일어나 고개를 돌렸다. 그 끝에 이 마음을 축일 존재가 있다고 생각했다. 볼라이트의 미광이 그 실루엣을 비추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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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이 납치된 당일

로 포 비아의 모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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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스트앙은 어렵지 않게 눈앞에 나타난 현상을 파악할 수 있었다. 형태로 보아 로 포 비아의 것은 아니다. 높은 확률로 자하드군의 함. 그렇다면 이 워프함은 둥지에서 왔을 가능성이 크다. 구스트앙이 고개를 꺾어들었다. 그리고 이 덩치만 큰 청백색 진. 기동성이 무엇보다 중요한 상황에서 자하드군이 진과 함께 움직일 리는 없으니 둥지에서 워프할 때 함께 들고 온 트로이메라이의 물건이라는 결론이 선다.

그때 워프함의 문이 벌컥 젖혀졌다. 게이트 뒤편의 하얗고 파란 벌레는 빠르고 거친 신수에 당혹스러워했으나 곧 펄럭이는 옷자락을 붙잡고 포 비더의 가주를 향해 외쳤다.

"당신에게 부탁이 있어!“

“쿤의 아들이군. 아비에게서 바람직한 간원의 태도는 사사받지 못했나? 어리석은 벌레구나."

사람을 사람 취급하지 않는 건 가주 공통인가. 화련에게 등을 떠밀려 상공을 날고 있는 워프함의 문을 여는 미친 짓을 감행한 쿤은 어지럽게 날리는 머리카락 사이로 백정장의 남성을 가늘게 쳐다보았다. 압박감에 절로 울대가 울렁인다. 저 남자의 눈에 저와 같은 선별인원은 벌레 정도로 보이겠지. 다시입을 떼기도 전에 존재가 사라져버릴지도 모를 일이다. 그것은 그의 뒤에 나뒹구는 전함의 잔해로도 알 수 있었다. 그래도 해야만 해. 최대한 빨리 밤을 구하려면 이 수가 최선이야.

“우리는 밤의 동료야. 당신들이 원하는 비선별인원의. 밤은 지금 퍼그로 잡혀갔어. 당신이 밤을 구할 수 있게 도와줬으면 해!”

그 대가로 자신들도 무엇인지 모를 이 진을 가져왔다는 건가. 가당치도 않다.

뛰어난 주술사이기도 한 구스트앙은 진의 개괄적인 정보를 읽어냈다. 진의 종류, 원래 있었던 위치, 봉인한 것의 크기, 시기, 주술사의 술파術派, 강제로 파훼했을 때의 패널티. 군더더기가 너무 많군. 봉인하는 데에 필요하지 않은 술식과 더 간략히 쓸 수 있는 내실 없는 자구가 만연했다. 구스트앙이 손끝을 까닥여 재를 털어냈다. 작은 불꽃은 진에 닿아 아름답지 않은 부분을 좀먹어가기 시작했다.

여기부터는 단순한 장난. 그의 전략적 한계치- 진심을 확인하는 절차다.

"그 비선별인원은 퍼그의 슬레이어 후보일 텐데. 퍼그로 잡혀갔다니 어불성설이지 않나."

어디까지 알고 있으며 어디까지 말해야 하는가. 가주라는 애매하고 모호하고 측정 불가한 불가사의의 존재 앞에서 쿤은 식은땀을 흘렸다. 기분을 거슬렀다는 이유 하나로 워프함째 찌그러트릴 수 있는 남자의 앞에서 평소와 같은 도발이 먹힐까. 게다가 상대는 탑 제일의 현자다.

그러나 강력하게 주의를 끌 필요는 반드시 있었다. 그것은 연설-화련이 말한 반장 선거의 기본. 에라 모르겠다. 쿤은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밤은 슬레이어 화이트에게 잡혀갔어. 그 녀석은 밤을 이용해 당신들을 죽이려 할 거야. 밤을 녹여 무기로 쓴다는 말을 똑똑히 들었으니까."

외적인 진실과 내적인 과장. 두려워하든 불쾌해하든 어느 한쪽만 걸리라는 심정이었다.

“밤은 비선별인원이야. 우리는 상상도 못한 기적을 몇 번이고 일으켰지. 당신들을 정말 죽이지 못할 리도 없어.”

눈짓만으로도 이깟 진을 파괴하고 패널티를 무시하는 건 간단하다. 그럼에도 불필요한 부분을 지워가며 완벽한 형태로 진을 해체하려는 까닭은 구스트앙의 학자적 욕구, 단순한 만족감이었다. 혹은 주제넘게도 가주인 자신에게, 기특하게도 친우를 구하기 위해 원하는 바를 역설하는 비선별인원의 동료에 대한 존중이거나.

‘어디… 군더더기를 삭제하면 실속은 이 정도인가.’

구스트앙이 무언가 말하려는 듯 입을 벌렸다. 그 짧은 순간에 쿤위 뇌리로 수많은 불안이 스쳤다. 그러나 가주의 음성이 내리기도 전에 진에서 고고한 빛이 흐르는 것은 예상에도 없던 갑작스러운 현상이었다. 정작 가주는 쿤의 설득에는 조금도 관심이 없었는지 연관 없는 말을 내뱉었다. 미천하고 하잘것없는 존재의 이름이 가주의 입에 오른 순간이었다.

리바이어던.”

순간 허공에 떠있는 평면의 진에서 무언가가 쏟아졌다. 문틀 뿐인 입구처럼 작용해, 뿜어지다시피 한 아름다운 비늘을 가진 그것은 거대한 용과 같은 모습이었다. 끊임없이 토해져 꼬이고 휘며 또아리를 튼 그것은 둥지 중앙의 부유석을 감고 있던 코브라보다도 거대했으나, 그 뒤쪽에서 진이 무효화되는 광경을 지켜보던 쿤은 그 리바이어던이라는 것이 구스트앙에 비하면 한없이 작다고 느꼈다.

구스트앙이 거대한 바다뱀은 올려다보았다. 그것이 무언의 신호, 혹은 작용이었는지 리바이어던은 몸을 뒤틀고 짐승의 울음을 내다 거대한 존재에게 달려들었다. 두려움을 이기지 못한 것이다.

“시끄럽다, 뱀장어야.”

구스트앙은 체신없이 파도를 일으키는 그에 안경을 추켜올리며 책 한 권을 마주들었다. 굵은 뱀(가주의 앞에 용은 그 정도 위신이었다)은 달려드는 건지 빨려들어가는 모를 모양새로 책 안으로 모습을 감췄다. 그 거대한 것의 육체가 진심으로 달려들었는데도 구스트앙은 반동의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다. 순식간에 넘실대던 신수가 잠잠해지고 사위가 고요해졌다. 펼쳐진 동화책 속의 세계에 심취해있다 막 현실로 되돌아온 것처럼.

흡수한 존재를 한 권의 책으로 만들어 읽을 수 있도록 하는 구스트앙의 능력.

정사만을 기록하려는 구스트앙에게 적합한 능력이다. 구스트앙은 표지를 넘겼다. 가장 첫 페이지에 내용을 간략하게 요약한 삽화-리바이어던의 포효가 그려져 있었다. 구스트앙은 한 장 더 페이지를 넘겼다.

구스트앙은 책의 첫 줄에서 ‘아므즈’라는 단어를 읽을 수 있었다.

“이 책의 이름은… 증오로군.”

사위는 고요해졌다. 그 누구도 구스트앙이 책을 읽어나가는 것을 방해할 수 없었다. 차륵, 차륵, 페이지가 넘어갈 때마다 파충류의 비늘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구스트앙은 그제야 쿤의 주장에 대한 이견을 내밀었다.

“칼을 들어봤자 벌레는 벌레. 자네의 주장도 상대가 될 때나 통하는 얘기야.”

구스트앙이 어떤 내용을 읽었는지, 혹은 읽지 않았는지는 누구도 모를 일이다. 곧 모함으로부터 구스트앙에게 포켓으로 연락이 왔다.

“부근에 정박 시켜놨던 도크함을 최대한 가까이 이동시킨 후에 좌표를 보내라.”

쿤을 응시하는 구스트앙의 표정은 미묘했다. 그 평이한 고압의 시선은 절로 미물을 압도하는 것이었다.

“이쪽도 부유선을 하나 데리고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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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현시점

화이트의 거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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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닥, 가볍게 바닥을 디디는 소리. 눈꺼풀 사이로 어느새 오전의 활기가 비져들어오고 있었다. 그날 이후로 구속은 없었다는 사실에 안도를 느껴도 되는 걸까. 잠들어있던 밤은 화이트가 움직이는 소리라고 생각했다. 무신경하게, 무례하게 밤의 공간에 침입해오던 것과 달리 사뿐한 발걸음은 소파를 향했다. 특이한 일이었다.

“잘 지냈냐는 말은 너무한 농담이려나.”

알지만 한동안 듣지 못했던 목소리. 어떤 유쾌함이나 조심스러움은 없지만 그 안에는 섬세함과 신비로움이 공존하고 있었다. 화이트 이외의 존재. 밤이 벌떡 몸을 일으켰다.

"화련 씨?! 어떻게···!"

밤이 소파로 달려갔다. 잠깐은 꿈인 줄 알았다. 그녀는 그 자체로 꿈과 같은 존재. 밤이 화련의 맞은편 소파를 붙잡았다. 무기질적인 공간에 유채색 기척을 가지고 소파에 앉아있는 그녀는, 분명 실재해 밤의 눈앞에 있었다. 하나뿐인 붉은 눈에 비치는 금빛은 당혹과 반가움, 기쁨, 절절한 희망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변함없네. 화이트가 좀처럼 자리를 비우지 않아서 곤란했어."

화련은 눈을 내리뜨고 작게 웃었다. 그리곤 또렷한 목소리로 밤이 가장 듣고 싶었던 소식을 전해주었다.

"하진성 씨는 탈출했어."

"사부님이요?! 무사하신 겁니까?"

"괜한 걱정이야. -로 포 비아의 가주와 함께 있긴 하지만."

차가 한 잔 마시고 싶네. 노려보면 찻잔이 생기기라도 할 것처럼 화련이 테이블을 내려다보고 있는 사이 밤이 바닥으로 스르륵 주저앉았다.

며칠간 밤을 가장 괴롭히던 생각이었다. 모두를 끌어들인 주제에 결국에 스승을 구하지 못했고, 전장에서 납치까지 당해 아무것도 하지 못하게 됐다는 무력감. 그 무력감은 언제까지고 밤을 괴롭힐 듯 무거웠다. 결국 동료들이···.

화련이 아무리 테이블을 쳐다봐도 차는 생기지 않는다. 화련은 밤의 떨리는 숨결을 느끼고 밤에게 손을 내밀었다. 단순히 다 큰 사내애가 질질 짜는 꼴이 보기 싫었던 것이겠지만.

"나도 나름대로 전장에서 탈출한 사람인데 말이야."

내 걱정은 않는구나.

스승의 걱정으로 다리에 힘을 풀어버린 밤의 성격을 찌르는 짓궃은 말. 밤은 어색하게 웃으며 화련의 손을 잡았다. 밤이 길잡이의 존재에 익숙해졌음을 알기에 할 수 있는 또다른 장난.

"다들···."

끝을 흐린 짧은 물음엔 화련에 대한 염려 또한 있었을 터다.

"무사해. 걱정할 만한 일은 일어나지 않아.“

화련은 밤의 길잡이. 그러니 그녀의 말은 밤의 운명에 해악을 끼치지 않는다. 밤은 안심하고 웃었다.

그녀의 말은 밤의 운명을 이끌지라도 밤에게 거짓이 되기도 한다. 아직 거기까지는 적응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다시 바닥을 딛고 일어선 밤의 표정이 화악 밝아지는 것으로 역시 모든 것을 맡기고 자신을 믿는 바보는 비올레밖에 없다고 화련은 생각한다.

"···!"

기척에 두 사람이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발소리가 가까워진다. 이곳에서 발소리를 내고 걸을 수 있는 사람은 한 명뿐이다. 밤이 다급히 속삭였다.

"화련 씨, 피해야···!"

그러나 화련의 자리는 이미 비어있었고 창문만이 덜컥 열려 문짝을 휘청거리고 있을 뿐이었다. 밤이 창틀을 붙잡았을 때는 금빛 곤봉의 끄트머리가 막 아래로 사라져가고 있었다.

창문이 일으키는 거친 파도로 협탁에 놓인 제비난이 살랑 흔들렸다. 이상한 일이지만 밤은 그때 처음으로 이 공간에 존재하는 창문이라는 요소를 인지에 포함했고 비로소 바깥의 풍경에 눈을 돌릴 수 있었다. 뒤늦게 허용된 한 조각의 여유가 밤에게 바깥에 대한 인식을 가져다 준 것이다.

높은 수직의 단애에 고아한 주렴처럼 늘어진 거대한 청라무리. 몇 겹의 단애가 단애 너머에 있었고 그 아래는 안개의 파도로 끝을 알 수 없었다.

아득한 진경眞景은 또다른 감옥. 청노로 탈출한다 해도 진정한 의미의 탈출은 이룰 수 없음을 그 기묘하고 경외감이 느껴지는 풍경에서 깨달았다. 정말로 화이트는 이곳에서 밤을 내보내줄 생각이 없었다. 처음부터.

밤의 등뒤에서 기어코 문이 열렸다. 무심하다기엔 조용한 소리였다.

살짝 놓았던 긴장의 끈이 팽팽해진다. 최대한 자연스러워 보여야 해. 화련 씨가 들렀다는 걸 들키면 앞으로는 이 정도의 자유도 주어지지 않을 거야. 밤은 작게 목을 울리며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그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도록. 밤은 아까의 소식에 들떴던 마음을 가다듬지 못하고 자신도 모르게 목소리의 톤을 높이며 문가를 돌아보았다.

“오셨어요?”

나직해서 듣기 좋은 음성. 잔잔하지만 화창하게 갠 감정이 묻어난다. 은은한 파도에 머리칼이 생기 있게 흔들리고 창가에 선 밤의 얼굴은 볼라이트의 빛으로 말갛게 빛났다. 미묘한 간극을 눈치챈 화이트가 가만히 서서 밤을 응시했다.

“···.”

설마 누군가 다녀간 걸 눈치챘나? 최대한 자연스럽게 굴어야 했다. 밤이 묻듯 고개를 기울이자 그제야 화이트는 손을 내저으며 발을 뗐다.

“…아. 좋은 일이라도 있나?”

밤은 그제야 화련이 전해준 소식이 밤의 기분을 띄워버렸음을 눈치채고 흠칫 표정을 굳혔다. 연기가 도통 늘지를 않는 자신을 자책하면서. 어떻게든 말을 돌려야 한다. 화련 씨에 대해 숨겨야 해. 밤은 소재를 찾아 자신의 머리를 헤집고 다니기 시작했다.

“대련장, 다녀오셨나봐요.”

“아아, 그랬지. 살을 베니 좀 낫군. 기분이 쳐지던 것도 한동안 피를 보지 않아서였어.”

그 어떤 배려도 없는 답에 밤의 얼굴이 다시금 어두워졌다. 밤은 대꾸 없이 침대로 자신을 유배했다. 대화할 기분은 아니라는 뜻이다. 환했던 얼굴이 시들고 자리를 피하는 것을 흘긋 가는 눈으로 보고 있던 화이트에게 또다시 변덕의 기색이 찾아왔다.

따라붙는 화이트에게 밤이 뼈 있는 말을 던졌다.

“가시죠. 여기에 당신이 벨 수 있는 건 없으니까.”

얼마 전의 실책을 지적하는 말. 화이트는 기회를 스스로 저버렸고 밤은 그의 패배를 못박았다.

그러나 화이트는 오히려 당당했다.

“짐은 피곤하다. 짐의 베개가 돼라.”

유쾌한 명령조에 눈가가 어그러진다. 화이트는 무방비할 정도로 편안하게 밤의 무릎에 머리를 댔다. 설백의 고운 실비단이 침대 위에 넓게 퍼졌다.

밤은 화이트의 접촉을 거부하지 않았다. 지금과 같은 비일상적인 접촉은 물론 나란히 앉는 것, 마주앉아 차를 마시는 것, 오로지 밤의 불쾌하단 반응을 이끌어내기 위해 흘러내린 옆머리를 넘겨주거나 턱을 쓰다듬는 것까지. 그럴 때면 밤은 받아들이지도 밀어내지도 않고 가만히 앞을 바라보고 있었다. 순응이 아니라 흘려보내는 것, 무시에 가까운 태도였다.

“더는 목숨을 취하지 않기로 하는 조건이었을 텐데요.”

“네가 자고 있었으니 어쩔 수 없지. 아님 눈을 뜨자마자 눈앞에 짐이 있길 바라나?”

“···.”

며칠 간 화이트가 알게 된 것이라면 비올레와 가까이 있으면 갈증이 잠잠해진다는 것이었다.

물론 처음에는 밤 역시 몸에 손을 대려는 화이트에 불쾌감을 느끼고 거부했다. 그것은 핑계 같은 이유를 듣고서도 마찬가지. 화이트는 끈질기게 같은 이유를 대며 밤에게 접촉을 요구했고 밤은 그에 상응하는 요구를 내걸었다. 손길을 거부하지 않을 테니 저번과 같이 그를 따르는 신도들을 무의미하게 베어 넘기지 않는 것으로.

그리고 돌아온 답은 예상밖이었다. “그러도록 하지.” 라고 간결히 답하는 것으로 권리를 얻어낸 화이트는 곧장 밤의 어깨에 등을 기대고 그 채로 오후의 무료한 시간을 보냈다.

타인의 목숨을 함부로 거두지 않도록 하는 것은 분명히 밤이 원하는 바였지만 화이트는 애초에 말이 통하지 않는 살인귀였다. 말을 꺼내는 밤도 큰 기대는 걸지 않았었다. 다만 자신에게 손을 대는 것이 너무도 거북해서, 노리개처럼 다뤄지는 것이 지긋지긋해서 정당하게 거부하기 위한 조건을 내건 것에 불과했다. 무력해져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신이 이렇게까지 이기적일 수 있다는 사실에 밤은 스스로를 경멸하고 책망했다.

“햐- 좀 살겠어.”

밤이 눈만 데굴 굴려 내려다본 화이트는 정말 오랜 목마름을 씻어낸 것 같은 개운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접촉을 요구하는 이유로 ‘네가 짐을 해갈解渴한다’는 말만 들었던 밤으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의 갈증과 허기는 영혼으로 채워야만 해결되는 식혼의 저주에 의한 것. 밤이 지옥열차에서 호아퀸을 마주한 건 그보다 한참 뒤였다.

화이트가 자세히 말해주지 않았기에 밤을 문자 그대로 옆에 두려는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다. 그리고 화이트 역시, 그 이유를 아직 찾고 있었다. 밤에게는 짚이는 구석이 있는 듯했으나 그것이 화이트가 숨기는 바는 아니었다.

급기야는 긴 머리카락과 손톱 끝을 매만지며 밤이 모르는 노래를 흥얼거리는 화이트를 두고 밤은 자신의 상념의 세계로 빠져들었다.

그 '자신'이라는 건 호아퀸을 말하는 겁니까, 화이트를 말하는 겁니까.

자신이 왜 그런 말을 했는지는 밤도 혼란을 겪고 있었다. 화이트에게서 무언가를 겹쳐 보았기 때문일까. 자신의 속내를 어림짐작하는 것이 전부다.

자신에게 있는 두 모습. 밤은 원치 않은 이면을 가지게 되었다. 나아가기 위해 두 존재는 함께하게 되었고 지금의 자신은 밤이자 비올레, 비로소 분리하지 않아도 되는 온전하고 완전한 자신의 모습이 될 수 있었다.

화이트에게도 있었던 호아퀸의 모습. 어린아이의 독단성 이상으로 절박한 무언가가 둘을 분리해 밤은 무심코 화이트와 호아퀸을 구분했다. 한심할 정도로 단순한 이유에서 굳이 그것을 본인에게 확인하려 했다. 쿤에게서도 당사자인 화이트에게서도 들었던 필요 이상의 관심. 그에게 한 질문은 증오를 거두고 그를 용서하고자 베푼 기회의 단초. 이런 상황에서, 이 상황에 이르게 한 자에게까지 불필요한 관심과 불가능한 구원을 베풀고자 하는구나, 나는.

“오늘의 너는 정말 이상하군.”

차가운 손끝이 밤의 턱을 쓸어 주의를 요구한다. 밤이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는 하얀 눈동자 두 개가 밤을 빤히 올려다보고 있었다. 붉은 눈가는 공작처럼 화려하고 미려한 낯은 품위가 서려 고아하다. 얼음처럼 반듯하고 무너질 듯 아슬한 미소를 입술에 건 채다.

지금 고개를 돌릴 수 없는 이유는 화이트가 원하고 있다는 방증이다.

단지 화이트라는 사람이 싫어서, 그런 이유로 택한 외면. 기실 그의 접촉이 가시의 반응을 이끌어내기 때문이었다. 심장이 멈추는 듯한 감각을 들키고 싶지 않았다. 증오인지 혐오인지, 무기된 몸으로서 바치는 충심인지는 알 수 없다. 밤은 무언가를 보고 싶지 않아 화이트를 피했고 화이트는 무언가를 찾아 밤의 눈을 응시했다. 밤에게는 참을 수 없이 불편한 시간이었다.

밤은 오래도록 자신에게서 떠나지 않는 시선에 의아함을 넘어 불쾌한 감정을 숨기지 않았다.

“···.”

화이트가 입맛을 다시며 고개를 돌렸다. 허탈하고 아득해서 도무지 이해가 안 된다는 투다.

“너는 혹시 감정이 없는 공방의 발명품이냐?”

그 취급은 공방전에서 시동무기가 될 뻔한 일로 넘치게 겪었다. 실례되는 표현에 당사자의 금안은 싸늘해졌다.

“…그 눈깔귀신이 환장하는 것도 이해가 가는구나.”

···지적하고 싶었던 건 다른 부분이었지만, 이 부분을 저 목석 같은 녀석에게 설명하려면 아직 한참은 먼 듯했다.


1. 치명적으로 잘생긴 얼굴을 했는데 반응이 없자 뚱해진 화이트씨… 연애파트에서 극도로 눈치가 사라지는 밤 모먼트 웃겨서 좋아하는 편이에요

2. 밤이 기대 없이 누군가를 구하려는 말을 꺼냈다는 서술이 설정 붕괴가 아닐까 오래 고민했습니다만, 「귀환」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끌고 갈 중요한 배경 중 하나는 밤의 정신이 지쳐있다는 점인지라 원작보다 밤의 인간성을 부각하는 장치로 남겨두기로 했습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나중에 조금 더 얘기하고 싶어요

3.사이 안 좋던 두 사람이 신체접촉을 할 수 있게 되는 이유는… 사이가 나빴기 때문에 오히려 가능할 수 있는 ‘그것’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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