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내가 너와 함께할 것이니. (3)
이겼다.
승리하고자 한 적 없음에도.
……겨우 눈을 깜박였다.
맺혔던 눈물이 눈꺼풀에 짓눌리는 감각이 그리 좋지만은 않았다.
그러나 그것은 동시에 따스했다.
그런데도 추웠다.
혹은 그러했기 때문에 한기가 들었거나.
물러선 그대로 멈춰 체스판 위에 시선을 고정했다.
쓰러진 검은 킹 체스말이 유난히도 거대해 보이는 것도 같았다. 멀쩡히 서 있을 때엔 자하드처럼도 보였던 듯한 그것에, 이제는 그 자신이 겹쳐 보였다.
위장 어드메가 울렁거렸다.
꼭 오랜만에 먹은 음식에 몸이 망가졌을 때처럼.
왜인지 열이 오르는 듯도 해 손등으로 제 이마를 짚었다.
뜨거운 것, 같기도 하고…….
그때에도 지금도, 그 스스로는 자신의 상태를 알 수 없다. 설령 뜨겁다 해도 이미 함께 열이 올랐을 제 손과 이마의 온도는 비슷할 수밖에.
정확하게는, 혼자서는 알 수 없는 것이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오만이나 토끼를 통해 제 몸을 확인할 마음은 전혀 들지 않았으므로, 아이가 천천히 손을 다시 허리 아래로 내렸다.
문득 후드 앞을 힘주어 쥐었다.
그러니까, 이겼다.
역시 승리하고자 한 적 없음에도.
또다시…….
로 포 비아 트로이메라이는 승리자였다.
무수한 시간을 그렇게 내내.
그것은 패배란 허락되지 않았기 때문에.
이기지 못하면 죽는, 난관을 해결해내지 못하면 언제고 죽음으로 내몰리던, 그런 승탑의 시간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이겨야 했던 것이다.
시간이 지나며 오르는 층이 높아질수록 더욱 거대한 고난과 위험이 그들을 기다렸다.
그는 삶이 곧 승리의 대가이며, 승리가 곧 삶의 형태였던 시간을 견뎌왔다. ‘개척’의 영광이 어떤 상처도 지워내는 마법을 부리지는 못했으므로.
그러나 그 시절의 그는 자신을 그저 생존자라 여겼던 것 같다. 단순히 자신은 살아남은 것뿐이라며…….
다만 언제부터인가의 그는 자신을 생존자보다는 승리자로, 승리자보다는 지배자로 여기기로 했었다.
지배자로 여기기로 했던 것은 탑과의 계약 후 자하드와 뜻을 함께하게 되었을 때부터였던 듯하다. 그리고 승리자로 여기게 되었던 때는……. 그것은 떠오르지 않는다.
단지 기억하는 것은, 레버를 내렸을 때의 그는 그렇지 못했다는 어렴풋한 사실뿐이다.
그러므로,
지배자 아닌 그가 승리자일 수 있던가.
승리자 아닌 그가 생존자일 수 있던가.
그런데도 그는 여전히 생존자였다.
——왜?
아무것도 하지 않을 수는 없다면.
그러나 동시에 방을 나서는 것조차 버겁다면.
허리를 숙여 구석진 곳 쌓여 있던 책 하나를 들어 올렸다. 다른 한 손은 아직 목덜미를 긁는 채다.
틈틈이 토끼가 하나씩 가져와 쌓아두고는 하던 책들이 무엇인지, 트로이메라이는 알고 있었다.
그것들을 들인 토끼가 막상 손도 대지 않을 때부터, 그 책들이 누구를 위해 들인 것인지 모를 수는 없던 것이다.
이것은 아마…… 규모는 작으나 그가 익히 아는 ‘책의 미로’와 크게 다르지는 않을 테다.
다만 지금의 몸만큼이나 작을 때에도 책의 미로는 이것보다 컸던 것 같은데. 이제는 구스트앙이 소꿉장난을 넘어 놀리기라도 하는 것인지.
들어 올린 그 한 권을 뒤집어 가며 살폈다.
제목조차 없이, 아무것도 그려지지도 쓰이지도 않은 그 표지를 손가락으로 밀듯이 쓸었다. 착 감기는 듯한 촉감이 나쁘지 않았다. 그 질감만으로 이 표지가 레트헨테론 레이스네리라는 신해어 종의 거죽이라는 정보를 뇌가 출력해냈다. 몸이 길며 매끈한, 입이 유난히 크고 아가미가 원시적인 형태의 구멍인지라 제법 아끼던…….
그 생각에 이르니 조금 울적해졌다.
책장도 없이, 세우지 않고 눕혀 쌓인 책들을 눈에 담았다. 제목은 없으나 표지의 색은 가지각색이다. 검은색, 밝은 주황색, 짙은 푸른색. 그중 같은 것은 없었다. 동화책만큼 얇은 것도, 사전보다도 두꺼운 것도 있다. 눈으로 대강 세어 보니 그런 책들이 20권쯤.
그러고도 책은 펼치지 않았다.
손에 쥔 책을 아래로 늘어뜨렸다.
과연, 귀찮다…….
구스트앙의 설계인지 장난인지 모를 것에 어울려 줄 이유 같은 것은, 전혀 없… 지금의 몸으로는 전혀 없다고는 말할 수 없었지만.
여튼 아무것도 강제하지 않는 척 굴며 결국 무언가를 유도하는, 그 낯짝이 정말이지 ‘깐깐한 머저리’라는 자신의 포켓 저장명과 어울리지 않나.
물론 그 낯짝을 다시 보기는 자신이 먼저 이 방을 나서지 않는 이상 어려울 수 있다. 저가 사과할 마음이 들 때쯤 오겠다 했으니 아무래도 그렇겠지.
멍하니 천장을 향해 시선을 올렸다.
그 시선이 닿는 곳에 신 따위는 없다. 이렇게나 밝은 빛에도 신은 없다. 눈에 닿는 것이 천장이 아닌 하늘이었더래도 마찬가지였을 테다.
목 어딘가를 일렁이는 부정적인 감정을 명확히 규정하기 싫어 단순한 짜증이라 정의하며, 거즈 위를 긁던 손을 뚝 멈췄다. 직전까지는 고통스럽지 않던 목덜미가 그제야 시큰거렸다. 하지만 후회는 언제라도 늦다. 손가락을 확인하니 굳다 만 피가 엷게 버석거렸다.
그 별것도 아닌 피에 흐려진 눈앞에, 엇나간 초점으로 되짚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을 수는 없다. 그는 쉬이 마음을 여는 사람이다. 감정을 되찾은 지금은 한층 그러하겠지. 언젠가, 지금은 아니더라도, 이름 모를 토끼와 작은 문어에게 마음을 열게 되면, 혹은 이 방을 제멋대로 열고 들어오는 또 다른 누군가에게 마음을 열게 되면.
결국 그 자신을 흔들 ‘무언가’를 하게 될 것임을 아이는 알았다.
생존자란 그런 것이지 않던가. 살아 있는 이상…….
문을 열고 들어오는 그것을 쫓아내지도 죽이지도 못할 것을 트로이메라이는 이미 이해하고 있었다. 토끼를 죽이지 못한 아이는, 다른 누구도 죽이지 못할 것이므로.
검은 후드에 손가락의 핏자국을 문질러 닦았다. 어두운 색 덕에 그다지 티도 나지 않았다.
그리고는 두 손으로 다시 책을 잡았다. 이 중에서는 두껍지 않은 편인 책을 노려보듯 바라보았다.
원한과, 인과와, 돌이킬 수 없는 일들과, 어쩌면 조금쯤은 다시 그러모을 수 있을 일들에 대해 생각했다. 새로이 얻을 수도 있을 어떤 것과, 잃을 것들을 생각했다. 그가 해치고 죽인 사람들과 그들의 증오에 관해 생각했다. 그를 배신한 자들과 그가 배신한 자들, 그리고 앞으로의 배신을 생각했다. 외로움과 고독에 대하여 생각했다. 그를 기다릴, 승탑의 고난과는 다른 종류의 고난에 대하여 생각했다.
그렇다, 문을 열고 나서면.
자신을 기다릴 일들에 대해 생각했다.
——외로울까?
그러자 덧난 목덜미가 고통스럽지 않았다.
그것이 싫은 것인지 두려운 것인지.
열이 오른 이마에의 인식만큼이나 그 자신은 알 수 없었다.
별안간 발등에 무게감이 얹혔다. 그 꾸물거리는 움직임이 익숙했다. 그의 오만이 어느새 자신의 발 위에 몸을 뉘고 있다.
오만한 나의, 크라켄.
그리고 자신이 웃었던가? 알 수 없었다.
이어 책은 놓지 않고 몸을 빙 돌려 토끼를 보았다. 굳은 어깨와 어색한 미소로, 겁먹지 않은 척하며, 기색이 달라진 자신을 관찰하는, 아므즈를 닮은 토끼.
——외롭다.
서둘러 토끼로부터 시선을 떼어내고는 오만에게 들고 있던 책을 건넸다. 꿈틀이는 촉수들이 그것을 익숙하게 받아들였다. 구스트앙의 귀찮은 수수께끼들을 오늘도 네가 풀어주었으면 한다고, 말하지 않아도 크라켄은 이해했다.
하지만 크라켄은 채 한 장을 넘기지 못했다.
“네가 읽어야지.”
담담한 음성이 귀를 파고들었다. 그 음성의 주인이 문어로부터 책을 빼앗아 들었다.
구스트앙, 오지 않는다더니.
그런 함의를 담아 등 뒤의 남성을 손바닥으로 툭 밀었다. 어차피 밀리지 않을 것을 알아 아주 살짝.
그러자 그가 몸을 살짝 뒤로 물렸다. 그것에 열이 받아 휙 몸을 돌려 구스트앙을 마주했다. 여전히 아이의 눈에 담긴 감정은 같다. 오지 않는다더니…….
“사과하고 싶어졌을 텐데.”
아닌데.
“하지 않으면 하게 만들어줄 거라는 내 다정한 의도를 알아채지 못했을 거라고는 생각지 않지만.”
억지로 찻잔이 입에 대어졌을 때의 굴욕이 잠시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애초 그런 차나 사과에 무슨 의미가 있다고. 샐쭉한 입으로 책을 더 힘주어 쥐었다.
물러난 구스트앙 덕에 시야가 조금 트여 토끼가 무얼 하고 있는지 시야에 들어온다.
그러니까, 아이는 그 자리에서 서둘러 무릎을 꿇은 토끼가 보다 짜증이 났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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