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完)
문고리를 잡았다.
회전해 움직여도 물리적으로 걸리는 것이 없다.
문은 열려 있었다.
트로이메라이는 언제나 그 사실이 가장 견디기 어려웠다.
문고리를 끝까지 돌렸다. 차가운 금속에 닿았던 손을 떼어냈다. 무게중심을 앞으로 옮겼다. 발끝으로 문턱을 밟았다. 발에 닿는 딱딱한 모서리의 촉감이 선했다. 열린 문 너머의 어둠을 향해 숨을 들이쉬었다.
그러나 단지 코끝에 닿는 공기가 너무나 시렸기 때문에,
더는 움직이지 않았다.
나가지,
아니하였다.
끼익, 쿵.
다시 문이 닫혔다.
구스트앙은 그런 말을 했던 것이다.
이곳에 무력하게 머문다면 그것만으로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 고.
심심할 것도 없었다. 무료한 것은 익숙했다. 신수로 식사를 해결했던 경험 덕택에 배가 고파도 그 때문에 새삼 고통스러울 일 또한 전무했다.
그저 가만히 쭈그려 앉아 시간을 보내는 것이야말로 몇만 년간의 삶 그 자체였으므로.
방이 밝다면 또 어떠한가. 상관없다. 눈을 감고 이불 속을 파고들면 그가 익히 아는 어둠이 그를 기다렸다.
다만 이불 속의 텁텁한 공기가 목구멍을 타고 흐를 때마다 그 감각이 지나치게 생생했다는 것이, 그것만이 거슬렸을 뿐이다.
아니다. 실은 눈꺼풀이 눈 아래에 닿는 감촉과, 옷이 살갗에 스치는 촉감과. 그러한 모든 것들이…….
세계가 더없이 선명했다.
눈앞을 가리던 천을 걷어낸 듯했다. 보다 정확하게는, 세계와 그 사이에 씌워져 있던 두꺼운 막이 걷어내어진 것처럼.
지배자의 가호를 잃은 트로이메라이를 세계가 맞이하는 방식은 그러했다.
그러니까, 단지 어지럽고 역겨웠다. ‘살아 있다’ 고 느껴지도록 하는 모든 것들이 거북했다. 그러나 그보다도 끔찍했던 것은 그런 분명한 감각 탓에 아주 느리게 흐르는 것처럼 느껴지는 시간.
그리고 그 늘어진 테이프를 닮은 시간 속에서 그를 끌어내리는 그리움과 후회가.
외면하고 싶어도 외면할 수 없다. 단절되려 해도 단절되지 않는다.
평범한 하나의 ‘사람’인 그는 그러할 수밖에 없었다.
“외로워.”
입 밖으로 낸 말에 그 스스로 놀라 움츠렸다. 작아진 손으로 이불을 그러쥐었다. 손에 닿은 그것은 포근했고, 트로이메라이 자신의 체온과 입김으로 따뜻했다.
그렇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을 듯한 기분에 문득 거칠게 이불을 걷어냈다. 어떤 해방감인지 패배감인지 모를 것에 휩싸인 것도 잠시, 곧 땀과 습기가 날아가며 순식간에 몸이 식었다.
추워. 짧게 중얼거린 그가 다시 이불을 어깨에 걸쳤다. 체온이 식던 속도보다는 느리게, 온기가 피부를 타고 퍼졌다.
쭈그려 앉은 것이 아닌 편하게 기대어 고쳐 앉고, 눈만 데굴 굴려 창문을 바라보았다. 닫힌 창문 너머의 풍경은 짐작할 의지도 확인할 마음도 들지 않았으나, 그것만은 떠올랐다. 지워내고 싶어도 자신의 의지로는 지워지지 않는 기억이 그를 맴돌았다. 푸른 하늘과,
아므즈.
그녀는 창 너머를 바라보는 걸 참 좋아했는데 말이야.
과거의 그도 지금의 그도 그런 그녀를 완벽히 이해할 수는 없었다. 로 포 비아 트로이메라이라는 사람의 본질이 그러했다. 밖보다는 안을, 변화보다는 평온을 택하는 사람.
그러나 이해할 수 없는 무언가에도 추억은 담겨 있어서.
눈을 빠르게 몇 번 깜박였다.
이불을 걷어내는 것만으로는 사라지지 않는 감정에 손톱으로 손등을 긁어냈다. 그러고도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심장의 고통이란 고작 피부를 파내는 것으로는 희석되지 않는다는 것을 트로이메라이는 오랜만에 알아차렸다.
다시 식은 차가 탁자 위, 그대로 놓여있었다.
일어섰다.
누가 시키지도, 부탁하지도, 무언가를 해야 하지 않음에도 일어섰다. 단지 일어서고 싶었기 때문에 일어섰다. 보들한 맨발이 딱딱한 바닥을 짚어냈다. 신발이 없어도 발을 질질 끌며 걸었다.
탁자 앞에 다시 섰다. 이번에는 맞은편에 구스트앙이 없다.
작아진 키에 비해 탁자가 높았다. 의자에 몸을 올려 앉지 않고, 손만 쭉 위로 뻗어 찻잔의 손잡이를 잡았다.
샛노란 차가 찻잔을 동그랗게 채우고 있었다. 그것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입술에 대고, 천천히 기울여 털어 넣었다.
글쎄. 차는 더럽게 쓰기만 했다.
역시 너와 나는 맞지 않아, 구스트앙. 차 취향까지도.
그러나 뱉기에는 무엇인지 모를 자존심이 상해서, 오기로 겨우 끝까지 삼켜냈다. 절로 손끝이 오므라들고 이를 악물게 된다. 몇 번 기침하다 붉어진 손등으로 입가를 닦아냈다.
아무도 지켜보지 않지만 그는 찻잔을 굳이 조심스레 탁자에 다시 올려뒀다.
―그는 누구인가?
위대한 모험가, 탑에 문명을 가져다준 개척자. 탑 최강의 부리미. 비선별인원. 가문의 주인. 직전과 달라진 것이라고는 가장 마지막의 한 가지뿐이다. 그는 패배했음에도 여전히 ‘그’였다. 여전히 사람보다는 동물이 좋았고, 시끌벅적한 것보다는 고요가 편했으며, 친구들을 소중하다고 여기는.
―그리하여, 그는 이제 무엇을 하고 싶은가?
아무것도.
감정은, 인간성은 필요에 의해 버렸다. 다시 필요해질 일이란 없다고, 확신하고 다짐했던 것이다. 그러나 원치 않던 그것이 돌아왔다. 그것은 관심을 둘 필요도, 신경을 쓸 필요도, 마음에 담아둘 필요도 없던 것들에 가치를 부여한다. 하여 필요케 한다.
잘린 살덩어리를 다시 가져다 댄다고 해서 그것이 다시 제 살이 되는 일은 없다. 그것도 이미 흘릴 피를 모두 흘려내고 아문 흉터 위라면 더더욱 그러하지 않겠나. 트로이메라이에게 ‘인간성’이란 그런 것이었다.
찻잔을 탁자에 올려두고도 문을 바라보기를 한참. 문득 바닥의 한기가 스멀스멀 다리를 위협했다. 그는 자살 희망자이나 그와 동시에 산다면 따스하고 편안하게 살고 싶었으므로, 침대로 돌아가기 위해 발걸음을 돌렸다. 온기가 조금 식은 이불을 몸 위에 얹으며, 단지 자문했다.
―그는 무엇인가?
때로 누군가는 그를 괴물 보듯 했으며, 또 누군가는 그를 신 대하듯 했다. 괴물과 신. 두 가지 모두 본질적으로는 크게 다르지 않은 것들이다. 다른 점을 굳이 하나 찾아야만 한다면, 괴물은 상대적인 개념이며 신은 절대적인 개념이라는 것 정도일 테다. 괴물은 누구나 될 수 있지만 신은 누구나 될 수 없다.
가호 잃은 그는 이제 신이라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는 이제 온전한 괴물인가.
덜컹,
문이 열렸다.
그 소리에 이불을 세게 잡아당겼다. 구스트앙인가. 멀뚱히 그곳을 눈에 담았다.
아니다. 기척이 달랐다. 이런 몸으로도 친우의 기척을 알아보지 못하는 일은 없다. 그 안경이 허락하지는 않았을 듯하니 아끼던 자식들 또한 아닐 것이고.
상대는 열린 문틈으로도 쉽사리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누구냐?”
적의 아닌 순수한 궁금증을 담은 질문이었음에도 문이 한 번 덜컹댔다. 여태 문고리를 잡고도 들어오지 못하는 누군가. 직전보다 넓어진 문틈에 이제 보인다. 키도 체구도 큰 편은 아닌 생명체 하나.
“무슨 일이지?”
재차 묻고서야 조심스레, 천천히 문이 열렸다. 트로이메라이는 쭈그려 앉은 모습 그대로, 하인인지 손님인지 모를 그 누군가를 맞이했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던 것은 샛노랗던 차를 닮은 옅은 금발. 턱보다 조금 긴 길이의 머리카락. 그리고 하늘색 눈. 묘하게 익숙한 색과 생김새를 살피다 토끼 귀를 단 수인이라는 것을 뒤늦게 알아챘다.
그런 소녀였다.
아마 강하지는 않을. 지금의 저조차 해칠 수 없을 정도로 약한 소녀.
입가에는 사력을 다한 미소를 띠고서, 그 하늘색 눈에 경멸을 담은.
―재차 되뇐다. 그는 무엇인가?
트로이메라이는 이해했다.
적어도 저 소녀에게, 그 자신은 괴물도 신도, 그리고 사람조차 아니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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