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명의 붉은 실 (2)
신분차 사랑을 하는 루카슈와 거기 얽히기 시작한 복사이크
여기서 이어지는 썰입니다
썸네일 출처:
루카와의 첫 외출이 그런 식으로 끝나버린 이후 야미노 재봉소에는 두 가지 변화가 생김. 하나는 루카의 출입이 뚝 끊겼다는 점이었고 다른 하나는 슈의 미소에 조금씩 그늘이 가기 시작했다는 점임. 아직 루카와 슈에 얽힌 사정을 모르는 손님들은 슈의 안색이 안 좋다며 걱정만을 했고 슈도 그걸 웃으며 얼버무리는 데 어느 정도 익숙해졌음. 자신의 태도가 확연히 이상함에도 루카의 이름과 얽힌 소문이 돌지 않는 것에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 돌이킬 수 없는 시점까지 오지 않았으니 좁혀질 뻔했던 거리를 원래대로 되돌리기 적당한 시기라 스스로를 달래면서, 자신이 왜 그런 기분을 품는지도 알지 못한 채.
이런 슈의 태도에 루카와 슈의 관계를 알고 있던 점원 둘의 반응은 정반대였음. 우키는 슈가 스스로를 달래며 했던 말들을 정확하게 반복하며 일이 커지기 전에 카네시로 가문 쪽에서 제지가 들어왔으니 거기 따르는 게 좋다고 말했지만 다른 한 명인 복스는 달랐음. 처음에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슈의 반응을 살피는 듯했지만 슈의 미소에서 힘이 없어질수록 복스의 표정에는 불만이 늘어났고 그 상태가 일주일 정도 지났을 때쯤 진지하게 물어보았음. 슈, 너 이대로도 괜찮아? 그 질문을 받았을 때 슈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음. 괜찮냐니, 뭘 말이야? 란 생각과 괜찮지 않대도 이제 와서 어떡하면 되는데? 란 생각이 머릿속에 뒤섞였기 때문임. 간신히 그게 무슨 뜻이냐고 묻자 복스는 살짝 인상을 찌푸렸음.
“그 도련님과 말이야. 시작조차 못 해 보고 관계가 끝나버리는 게 아쉽지 않느냔 질문이다만.”
“……네 말대로 시작조차 못 했는걸. 끝이 있겠어?”
“그 말을 들어보는 한, 아쉬움은 남아 있는 거로군?”
그렇게 말하며 씩 웃는 복스를 보고 슈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음. 일단 복스가 왜 이 ‘시작도 못 해본 관계’ 에 개입하는가. 루카가 처음 가게에 드나들기 시작했을 때부터 흥미를 가지고 루카와의 만남을 은근히 종용하기는 했지만 이렇게 적극적으로 나선 적은 없었음. 카네시로 가문의 사람이 직접 나서서 교제를 가로막은 이상 더는 어떻게 해볼 구석이 없다는 걸 모를 만큼 복스가 어리석은 이는 아니었기에 더욱 그랬음. 게다가 아직 내가 그 도련님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그런 것도 잘 모르겠는데. 그냥 루카 카네시로의 새로운 면모를 보았고, 잡아준 손은 따뜻했고, 그전까진 매일같이 가게에 찾아오는 점은 조금 부담스럽고 나한테 왜 이런 호의를 보이나 싶어 의문이었고 루카를 어떻게 상대하느냐에 따라 운명이 달라질지 모르는 가게 걱정도 됐고 해서 영 진정이 안 됐었는데 그날 처음으로 좀 더 오래 같이 있고 싶다고 느꼈던 게 끝인걸. 갑작스레 집으로 먼저 돌아오게 되어서 착잡했던 건 사실이지만… 이게 아쉬움인 걸까?
“네가 아쉽지 않다면 우키가 말하는 대로 고객을 대하는 태도를 유지하는 게 좋겠지. 하지만 예전의 관계가 그립다는 마음이 조금이라도 있으면 넌 이걸 읽어 봐야 해.”
그렇게 말하며 복스가 품에서 뭔가를 꺼내 건네주었음. 곱게 접힌 종이 위에는 카네시로 가문의 인장이 찍혀 있었고 그 시점에서 그걸 보낸 이가 누구인지는 명백했음. 이게 왜 복스한테? 의문을 담아 고개를 들자 복스는 어깨를 으쓱하며 설명해주었음.
슈가 일주일 내내 착잡한 기분을 버리지 못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루카 역시 고민이 많았음. 후계자 책봉식이라는 중요한 행사를 앞둔 시점에서 네 입장을 잘 생각해 보라는 아이크의 충고는 언제나 그래왔듯 옳은 말이었고, ‘생각할 시간’ 을 주면서도 아이크는 루카가 혼자 카네시로 저택을 빠져나가거나 볼일이 있어 나갈 때도 딴데로(=슈의 가게로)몰래 새버릴 틈을 주지 않았음. 아이크 본인이 루카의 외출에 동행할 때는 물론이고 자기가 일이 있어서 따라가지 못할 때도 감시원을 붙였을 정도임. 아이크의 그 행동이 주는 경고는 명백했음. 마음이 더 커지기 전에 접어라. 루카도 자기가 온당히 그래야 한다는 걸 알고 있었고 아이크의 감시망을 뚫기 어려울 거라는 것도 잘 알고 있었음.
하지만 슈의 얼굴을 떠올리면 도저히 여기서 끝내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곤 했음. 처음 만난 날 긴장을 날려버릴 만큼 예쁘다고 생각했던 모습이나, 가게에 찾아가 이야기할 때마다 크고 작게 웃던 모습이나, 그러면서도 가게의 주인이라는 자기 입장에 충실하게 일하던 모습이나, 처음으로 단둘이 외출했을 때 정말로 예쁘게 차려입고 왔던 거나, 딱 한 번 잡아본 보드라운 손의 감촉이라던가. 루카에게는 이제 자신이 슈를 좋아한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는 명제였고 매우 놀랍게도 그것은 루카의 첫사랑이었기에 자꾸만 한 발자국 더 내딛어보고 싶은 충동을 감출 수가 없었음.
결국 루카는 결심했음. 딱 한 번만 더 슈를 만나 보자. 슈에게 내 마음을 전하는 거야. 생각해 보면 루카는 슈를 좋아한다지만 슈가 루카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둘이 같은 마음인지 아닌지는 모르는 것 아니겠음? 만약 슈가 거절한다면 깨끗이 잊고 야미노 재봉소의 주인을 대하는 마음가짐으로 넘어가자고 생각하며 루카는 슈에게 보내는 편지를 썼음. 날을 잡아 한 번 만나 주지 않겠느냐는 편지였음. 물론 직접 야미노 재봉소에 보내라고 할 순 없었음. 아이크는 루카가 보내는 편지, 루카에게 오는 편지를 모두 조사하고 자기가 보기에 올려도 괜찮겠다 싶은 것만 루카에게 전해주었음. 아이크가 직접 가르쳐 루카에게 붙여놓은 수행원들도 감시의 눈을 빛내고 있었음. 방법이 없을까, 어떻게든 슈에게 편지만 전해줄 수 있다면. 그런 생각을 하면서 일주일을 보냈던 것임.
그리고 일주일 뒤 기회가 왔음. 아이크가 아버지의 심부름을 받고 외출하며+루카 자신도 일이 있어 외출해야 하는 날이 온 것임. 이 날을 놓치면 슈에게 언제 편지를 전해줄 수 있을지 모름. 루카는 긴장을 삼키며 쓴 편지를 품에 넣고 주어진 일을 마친 뒤 살 게 있다는 구실을 대고 상점가까지 찾아오는 데는 성공했지만, 품에 안고 있는 편지를 어떻게 야미노 재봉소까지 보낼지는 대책이 서지 않는 상태였음. 다른 가게 주인에게 맡기기는 불안하고(어디서 언제 소문이 돌아 아이크 귀에 들어갈지 모르니까) 재봉소 방향으로 가기만 해도 눈을 빛내는 수행원을 옆에 끼고 가까이 가기도 뭐하고, 수행원이 볼일은 다 보셨는지 물어볼까봐 잔뜩 긴장한 상태에서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리는데,
“오, 카네시로 가문의 루카 님이시지요?”
낮고 깊으며 귀에 들리는 것만으로 심장을 움켜쥐는 듯한 매력적인 목소리가 들려왔음. 붉은색 민무늬 기모노에 동백이 수놓아진 검은 하오리를 걸친 남자. 어딘가 낯이 익은데, 하고 루카가 생각하는 사이 남자는 생긋 웃었음.
“오랜만에 뵙습니다. 야미노 재봉소에서 경리를 맡고 있는 복스 아쿠마입니다.”
아, 그러고보니 그런 사람이 있었지. 재봉소에 가면 슈에게만 정신이 팔려서 다른 점원들은 대충 소개만 받고 말았었고 그나마 기억에 남은 게 수석 재봉사인 우키 정도였던 루카는 어색하게 복스의 목례에 답해주다, 그에게 편지를 맡기면 된다는 생각을 뒤늦게 떠올렸음. 주문하신 옷은 정성을 다해 재봉 중이라며 웃는 복스에게 맞장구를 쳐주며 수행원의 눈이 벗어나기를 기다렸지만 역시나 아이크가 교육시킨 수행원은 쉽게 시선을 떼지 않았음. 설상가상으로 대화거리도 떨어져 감. 어쩌지, 하고 군침을 삼키는데 갑자기 복스가 어이쿠, 하는 소리를 냄. 복스가 신고 있는 게다의 끈이 어느새 끊어진 거였음. 실례합니다, 하고 몸을 숙여 게다 끈을 묶는 복스의 모습에 기회는 이때다 싶어 루카도 복스에 맞춰 몸을 숙였음. 말로는 괜찮으냐, 갑자기 무슨 일이냐고 친절하게 물어보며 품에서 꺼낸 편지를 복스의 손등 위에 재빨리 올려놓고, 슈에게 전해줘, 라고 속삭인 뒤 루카는 자리에서 일어섰음. 그럼 가는 길 조심하고, 다음에 또 보지. 최대한 자연스럽게 말을 건넸을 때 복스에게 건넸던 편지는 어느새 복스의 품안으로 전달된 뒤였음.
사정을 듣고 난 슈는 기가 막히다는 눈으로 복스를 바라보았음. 원래 경리는 가게 안을 벗어날 일이 잘 없는 직책임. 그런데 마을을 한가로이 거닐다 우연히 루카를 만나서 편지를 받아왔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얘기고, 혹여나 루카가 재봉소 근처에 오지 않을까 신경을 곤두세우고 살펴보다 겨우 만나게 됐다는 쪽이 설득력 있었음. 대체 왜 그렇게까지 하는 거냐고 묻기도 전에 복스가 뒤돌아섰음. 슈의 신경을 온통 편지에 쏠리게 만들 한 마디를 남기고.
“도저히 아쉬움을 해소 못 하겠다면 읽어 봐. 그 뒤에 어떻게 행동할지는 온전히 네 선택이지만, 그 아쉬움을 오래 끌지 않는 방향으로 잘 선택하리라고 믿어.”
복스가 방을 나서고, 더욱 혼란스러워진 채 슈는 루카가 보냈다는 편지를 채 펼치지 못한 채 바라보다 시선을 창밖으로 뒀다가 다시 편지를 바라보기를 반복했음. 여긴 대체 뭐라고 쓰여 있을까? 그렇게 엄중한 감시를 뚫고 복스에게 간신히 전한 편지임. 분명 중요한 말이 적혀 있을 것임은 틀림없었지만, 자신이 이걸 열어 봐도 되는 걸까? 한참을 계속된 고민 끝에 슈는 새벽이 다 되어서야 루카의 편지를 펼쳐 보았음.
[슈에게.
전에는 실례가 많았어. 같이 더 오래 있고 싶었는데 그렇게 헤어지게 되어서 많이 아쉬워.
그래서 말인데, 한 번만 더 단둘이 만날 수 없을까? 슈에게 꼭 하고 싶은 이야기와 물어보고 싶은 말이 있어.
언제가 괜찮을지 답장을 주면 그 날은 어떻게든 아이크를 따돌려 볼게. 반드시, 반드시 슈를 만나러 갈게. 약속해.
카네시로 가문으로 들어오는 편지는 전부 아이크가 검사하니까 다른 방식으로 답변 주면 좋겠어.
여러모로 폐를 끼쳐서 미안해.
루카 카네시로.]
급하게 쓴 것이 티가 나는 문장과 곱게 접혀 있기만 한 줄 알았는데 군데군데 구겨진 종이를 보니 루카가 이 편지를 어떤 마음으로 썼고 이걸 슈에게 전하기까지 또 얼마나 오래 품고 있었을지가 엿보였음. 몇 줄 되지도 않는 문장을 읽고 또 읽다가 아침이 밝아오고 나서야 슈는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를 정했음. 다음날 아침 졸린 눈을 하고 방에서 나오는 슈를 복스가 기다리고 있었음. 아침 인사 대신 복스가 한 말은 이랬음. 마음은 정했어? 슈는 고개를 끄덕였음.
“딱 한 번만 더 둘이서 이야기를 하고 싶대. 나는… 만나볼 생각이야.”
결연한 표정의 슈를 보고 복스는 어깨를 으쓱했음. 얼굴에는 잔뜩 만족스러운 미소를 띤 채로.
“그렇다면 두 팔 걷고 도와야지. 방법은 나한테 맡겨, 슈.”
그로부터 이틀 정도 지났을까. 카네시로 가문에 손님이 찾아왔음. 야미노 재봉소에서 사람이 찾아왔다는 말에 설마 하고 객을 확인하러 간 아이크는 대기실에서 정좌하고 앉아 있는 낯선 남성 두 명을 마주했음. 야미노 재봉소에서 왔다기에 당연히 슈 야미노가 찾아온 거라고 생각했는데. 한 명은 재봉소의 수석 재봉사인 우키 비올레타라는 걸 알았지만 다른 한 명은 아이크가 처음 보는 사람이었음. 안도와 경계를 동시에 드러내는 아이크를 향해 낯선 남자 쪽이 먼저 고개를 숙였음.
“언제나 신세를 지고 있습니다. 야미노 재봉소에서 일하는 복스 아쿠마라고 합니다. 오늘은 루카 님의 의상 가봉을 위해 찾아뵈었습니다.”
그 말대로 남자의 옆에는 비단 꾸러미가 하나 놓여 있었음. 가봉을 하기에 적절한 시기인 것은 맞지만 어딘가 수상쩍었음. 경계를 늦추지 않으면서도 일단 차를 내오라고 시킨 아이크는 둘을 마주보고 앉았음.
“오시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지금 도련님께서는 볼일이 있어 자리를 비우신 터라, 돌아오실 때까지 잠시만 기다려 주시지요.”
“오, 전혀 문제없습니다.”
“미리 연락을 주셨으면 좋았을 텐데요.”
“그렇지요. 대단히 폐를 끼쳤습니다. 실은 저희 가게 주인이 얼마 전 갑자기 쓰러지는 바람에요. 일정 관리는 모두 주인이 하고 있는지라 상황을 뒤늦게 파악하고 대리로 제가 오게 되었습니다.”
“…야미노 씨가 쓰러지셨다고요? 무슨 일이 있었나요?”
“오, 별일은 아닙니다. 전부터 감기 기운이 있더니 꽤 오래 가는 모양입니다. 그런 상태로 귀하신 분 앞에 설 수는 없어서요. 아, 걱정은 마십시오. 수선해야 할 부분이 있으면 반영하기 위해 수석 재봉사가 동행했습니다.”
그럼 재봉사만 오면 될 것이지 이 남자는 왜 따라왔을까. 맞은편에서 사람 좋게 웃고 있는 이 복스라는 남자가 아이크에게는 영 수상쩍게 느껴졌음. 아이크가 나타났을 때 가볍게 고개만 숙였을 뿐 아까부터 한 마디도 하지 않고 있는 수석 재봉사를 보면 원활한 교류를 위해 따라왔나 싶기도 하면서, 가게의 주인이 직접 해야 할 일을 재봉사 한 명만 보내서 처리하기는 좀 민망했을까 싶기도 하면서, 잘은 모르겠지만 뭔가 꿍꿍이가 있는 것처럼도 보였음.
반면 복스는 온화하게 웃고 있으면서도 두 눈은 경계심을 풀지 않는 아이크를 보며, 딱히 슈나 루카에게 이야기를 들은 건 아니지만 그 날 슈를 억지로 돌려보낸 건 이 사내로구나 하는 확신을 했음. 이 예쁘장한 얼굴에 대체 얼마나 박력이 있었기에 슈가 아무 말도 못 하고 돌아와서 몇날 며칠을 끙끙댔을까. 루카와 슈의 연애사정과 마찬가지로 이 귀여운 인상의 청년에게도 관심이 갔음. 어쨌든 이 자를 돌파하지 않으면 슈가 원하는 대로 루카와 만나게 해줄 수 없는 것임. 자, 그럼 어떤 방법을 쓴다.
이윽고 시녀가 와서 루카가 돌아왔다는 소식을 전하자 아이크는 복스와 우키를 데리고 루카의 방으로 향했음. 야미노 재봉소에서 사람이 왔다는 소리는 전해 들었는지 잔뜩 긴장하고 있던 루카는 아이크의 뒤로 따라오는 두 사람을 보고 대놓고 실망한 표정을 지었음. 표정 숨기는 법을 다시 교육해야 하나. 냉정하게 판단한 아이크는 복스와 우키가 찾아온 목적을 고했고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섰음. 일단 가봉을 위해 찾아왔다니 들여는 놓았지만 뭔가 딴 얘기를 하려고 하면 아시죠, 도련님? 이라고 말하는 것 같은 미소를 앞에 두고. 우키가 다가와 가봉을 도와주는 가운데 루카는 자신이 보낸 편지가 슈에게 전해졌을지, 전해졌다면 슈의 답장은 뭐였는지, 신경 쓰여 견딜 수가 없었음.
그 때.
-생각이 딴 데 쏠려 있는 게 다 보입니다, 도련님.
갑자기 누군가의 목소리가 머릿속에 울려퍼져서 깜짝 놀라고 말았음. 저도 모르게 터져나온 우왓, 하는 소리에 옷을 입혀주던 우키가 놀라 물러서고 문앞에 있던 아이크가 정색하면서 품에 손을 넣는 가운데 루카의 시선은 이 목소리의 주인, 대화를 나눠본 건 딱 한 번이지만 한 번 귀에 담으면 결코 잊을 수 없는 목소리의 주인을 바라보고 있었음.
-자, 자. 이쪽에 시선 주지 마시고. 아무것도 못 들은 것처럼 행동하지 않으시면 당신의 예리한 측근이 저를 방에서 내쫓고 말 겁니다.
머릿속에 울려퍼지는 목소리는 분명 복스 아쿠마였지만, 그의 입은 미소를 띤 채 꾹 다물려 있었음. 내가 환청을 듣나? 생각했지만 곧 똑같은 목소리로, 결코 환청이 아닙니다. 라는 부정의 말이 돌아왔음. 뭐야, 이게? 얼떨떨한 기분이 되어 루카는 우키와 아이크에게 힘이 없는 목소리로 괜찮다고 말했음.
-이 현상의 원인은 나중에 천천히 추측해 보시지요. 정 궁금하시다면 다음에 알려드릴 수도 있지만, 지금은 그것보다 중요한 게 있을 테죠. 단도직입적으로 말해서, 슈의 답변을 가져왔습니다.
슈의?! 그렇다면 복스에게 전해준 편지가 슈에게 전달된 것은 확실했음. 슈는 뭐라고 했을까. 긴장하여 쿵쿵 뛰기 시작한 심장 소리를 우키가 듣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루카는 복스의 답을 기다렸음.
-만나겠다. 날은 언제든 좋다. 기다리겠다고 하더군요.
‘저, 정말이야? 슈가 날 만나주겠대?’
-예. 그래서 그 만나는 날에 대해 제게 하나 제안이 있는데요.
‘제안…?’
-우선 제 옆에 있는 이 무서운 측근을 하루 정도 구실을 붙여 집 밖에 내보내실 수 있겠습니까? 일을 부탁하고 외출을 시킨다던가.
‘그거야 명령하면 되겠지만… 그래도 다른 수행원이 날 하루 종일 따라붙을 텐데.’
-이 사람의 눈이 없으면 밤에 빠져나오실 순 있으시겠죠? 아니, 반대군요. 슈를 만나고 싶으시다면 그 정도의 위험 부담은 감수하실 수 있겠지요?
‘…해볼게.’
-오, 훌륭합니다. 그 정도의 용기도 없으셨다면 저는 슈의 보호자로서 이 만남을 반대할 수밖에 없었으니 말입니다.
‘슈의… 보호자?’
-오해는 마십시오. 저는 슈의 부모에게 그 아이를 보살펴 달라고 부탁받은 몸일 뿐이거든요. 뭐, 굳이 따지자면 큰형님 같은 거죠. 그 아이를 행복하게 해 주는 것이 저의 책무랍니다. 과연 당신이 슈를 행복하게 해줄 수 있을지 기대가 큽니다.
‘…….’
-어쨌든 날을 정하시면 전갈을 주십시오. 제가 여기 뭘 하나 흘리고 갈 테니, 날을 정하시거든 사람을 보내 두고 간 물건을 찾아오라고 하시면 찾아와서 다시 말씀 여쭙겠습니다.
상황은 모르겠지만 도와주겠다는 뜻이었음. 루카가 간신히 상황을 이해한 사이 우키가 가봉을 끝내고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섰고 가슴 둘레를 좀 더 넉넉하게 고쳐야겠다는 결론을 내린 뒤 복스는 우키를 데리고 루카의 방을 나갔음. 요괴에게 홀리기라도 한 듯한 기분으로 두 사람이 떠난 자리를 바라보고만 있는 루카와, 루카의 태도가 뭔가 석연찮은데 그 원인을 알 수 없어 눈만 부라릴 수밖에 없는 아이크를 남겨두고.
여튼 복스의 협력을 얻게 된 루카는 슈를 만나기 위해 아이크를 어떻게 따돌릴지 궁리하느라 사흘을 더 보냈음. 아이크는 루카의 직속 수행원이자 교육담당이라 루카가 어디 다녀오라고 명령하면 거부하지 못하겠지만, 밤에 몰래 빠져나가 슈를 만나려면 아이크의 경계심을 낮춰서 다른 수행원들의 감시의 눈을 조금이라도 피해야 했음. 결국 좋은 방법이 떠오르지 않아서 원래 외출 예정이 있던 날 꾀병을 부리기로 함. 몸이 아파서 도저히 밖에 못 나가겠다, 대리로 인사하고 오라고 아이크를 내보내는 방법이었음. 과연 이런 걸로 아이크가 속아줄까 싶으면서도 온 영혼을 끌어모아 꾀병을 부리자 아이크는 이마도 짚어보고 열은 없는데 이상하다며 미심쩍어하는 표정을 지으면서도 기꺼이 루카 대신 심부름을 다녀오기로 했음. 그럼 도련님, 다녀올 테니 몸조리 잘 하고 계십시오. 정중하게 인사하고 떠나는 아이크를 보고 죄책감을 안 느낀 것은 아니었지만 꼭 필요한 일이기는 했음.
다음으로 루카가 한 일은 복스가 그날 흘리고 간 것, 어째서인지 루카 자신의 눈에만 보였던 염주를 우연히 발견한 척 하면서 하녀를 야미노 재봉소로 보내는 일이었음. 아이크가 있었다면 염주만 전해주고 문전에서 쫓아냈을 테지만 그게 아니어서 복스는 문안을 올리겠다며 넉살맞게 루카의 방까지 들어왔음. 이 사람 경리가 아니라 다른 일을 해도 좋았던 거 아니야…? 루카는 문득 그렇게 생각했음.
“전갈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 무서운 측근이 곁에 없는 걸 보니 결행일은 오늘이라고 생각해도 되겠습니까?”
“으응. 부탁해.”
“그럼 돌아가서 주인에게 전해 드리겠습니다. 아, 그리고. 방해가 들어올 걱정은 하지 않으셔도 될 듯 합니다.”
“뭐…? 그거, 아이크 얘기야? 뭘 어떻게 하려고?”
“그것은 제게 맡겨주시면 됩니다. 나쁘게는 하지 않을 테니. 그럼 앞으로도 야미노 재봉소를 잘 부탁드립니다.”
알쏭달쏭한 말과 함께 염주를 챙겨서 나가는 복스를 루카는 미심쩍게 바라보았지만, 이렇게까지 일을 벌인 이상 물러설 수는 없었음. 그날 밤 루카는 시중을 들러 온 하녀에게 (정말 미안한 일이지만)짜증을 내서 내일 아침이 될 때까지 아무도 방에 접근하지 말라고 엄포를 놓고는 아이크의 눈을 피해 빼돌려두었던 고용인 의상으로 갈아입고 몰래 방을 나섰음. 어두운 밤이었고 잘 테니 방에 접근하지 말란 명령을 내린 것도 있어서 생각보다 쉽게 안채를 벗어날 수 있었고, 슈와 단둘이 외출할 때도 이용했던 통로를 통해 카네시로 저택에서도 무사히 빠져나왔음. 아무도 곁에 없는 어둠을 달리는 순간은 마치 해방감마저 들었음. 조금만 서두르면 슈를 만날 수 있다. 그런 생각이 들었기 때문일까.
한편 슈는 복스가 나서서 루카와의 만남을 주선하는 동안 정말 이래도 될까, 일이 잘못되어 경을 치게 되면 어쩌지, 하고 걱정하는 한편으로도 루카가 무모한 짓을 하면서까지 자신을 만나러 오겠다는 데 두근거림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음. 내가 왜 이러지. 이래서는 안 되는 건데. 생각하면서도 해가 지고 노을이 사라지고 밤이 찾아오는 순간 초야를 맞이하는 신부처럼 설렜음. 복스가 뒤처리는 나한테 맡겨 두라면서 어디론가 나가버린 뒤로는 더더욱 그랬음.
얼마나 기다렸을까. 창문을 똑똑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음. 방 안에는 아무도 없음에도 주변을 둘러보며 눈치를 한 번 살핀 슈가 창문을 조심스레 열었을 때 밖에는 힘껏 뛰어온 듯 땀범벅이 된 루카가 서 있었음. 그 얼굴에 어린 절실함을 보자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음. 왜 그 카네시로의 도련님이, 그저 손님이었을 뿐인 이 사람이, 나를 만나기 위해 이렇게까지 하는 걸까? 오늘 하루 종일 고민했던 문제를 전부 해결해주는 듯한 표정이었음. 그 때문에 슈가 입을 꾹 다문 사이 루카는 슈의 표정이 너무 좋지 않아서 가슴이 철렁했음. 역시 너무 부담스러웠던 걸까? 하지만, 하지만, 슈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었는걸.
“…미안해, 슈. 갑자기 이렇게 찾아와서. 또… 그날 아이크가 무례하게 군 것도 미안해. 기분… 안 좋았지? 하지만 아이크는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을 거야. 지금은 중요한 시기고, 나는 카네시로의 후계자가 되어야 할 몸인데, 아직 그 자리를 확실히 받아낸 것도 아니니까. 그러니까… 그날 아이크가 한 말이 슈를 상처 입혔다면, 그건 내 잘못이야. 미안해.”
“아, 아닙니다. 도련님이 사과하실 일이…….”
“아냐! 내가 사과해야 할 문제야. 왜냐면… 왜냐면, 아이크가 그렇게 행동한 건… 내가, 너를. 슈를 마음에 두고 있기 때문이니까…….”
창틀을 붙잡고 방에 들어오지도 못한 채 루카가 덜컥 뱉어버린 말은 분명 연모의 정을 의미하는 말이었음. 창문을 열었을 때 가장 먼저 본 루카의 표정에서 그의 의도와 행동원리를 짐작하고 있었던 슈였지만 진짜로 루카가 그렇게 말해버리자 아무 반응도 보일 수 없었음. 슈가 할 말을 잃은 사이 루카는 작정한 듯 고백을 쏟아내기 시작함.
“처음에는, 정말 예쁜 사람이라고 생각했어. 한 번만 더 보고 싶다는 생각에 가게로 찾아갔고, 슈가 웃으면서 맞이해 주니까 괜히 또 기분이 좋았고, 그래서 계속 가게에 다녔어. 넌 분명… 난처했을 거야. 그래도 어쩔 수 없었어. 널 만나고 싶은데 그것밖에는 방법이 생각 안 나서. 단둘이 외출하자고 몰아붙인 것도, 그 땐 자각하지 못했지만, 슈랑 있으면 편안하고 즐거우니까 그런 시간을 다른 곳에서 한 번 같이 누려보고 싶었기 때문이야. 그 날 너한테 했던 말도 모두 내 진심이었어. 나랑 비슷한 나이에 한 가게의 장이 된 슈를 보고 있으면 존경스러웠고, 닮고 싶었고, 슈가 스스로를 높이 평가하지 않고 있단 걸 알았을 땐 안타까웠고, 넌 대단한 사람이라고 꼭 말해주고 싶었어. 그 날 손을 잡은 것도… 너무 잡아보고 싶어져서 그랬던 거고…….”
“…….”
“그렇지만 나는 너도 알다시피 카네시로의 후계자가 될 몸이야. 이런 나하고 얽혀 봤자 슈한테는 좋을 일이 별로 없을 거란 것도 알고. 그렇지만… 꼭 묻고 싶었어. 슈는 나를 어떻게 생각해?”
“어떻게… 냐니…….”
“네가… 나를 같은 마음으로 바라봐 주는지, 아닌지…….”
덜컥 하고 심장에 뭔가가 걸렸음.
사실 루카가 고백을 쏟아내기 시작했을 때만 해도 슈의 머릿속은 아직 어지러웠음. 우키가 말한 대로 슈가 루카의 사랑을 받아들이면 해결해야 할 문제가 너무도 많음. 슈는 짊어지고 있는 것이 많은, 이 가게의 주인이니까. 루카 역시 자신의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사람임. 고백을 하는 와중에도 자신은 카네시로의 후계자가 되어야 한다고 끊임없이 말하는 것을 보면 그 책임을 버리고 슈와 함께 도망친다는 둥의 선택을 할 사람은 결코 아니었음. 동시에 카네시로의 후계자는 집안의 유대를 위해 성주의 딸과 결혼해야 할 운명이고, 그럼 이 사랑을 받아줘 봤자 슈에게 남은 길은 말 그대로 음지에서 루카의 애인으로 사는 것밖에 없었음. 어찌보면 루카는 굉장히 잔혹한 운명을 슈에게 들이대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음.
하지만, 왜일까.
간절하게 사랑을 담고 자신을 바라보는 루카의 눈동자를 마주한 순간 슈는 생각해 버리고 말았음.
어쩌면 그런 삶을 살아도 괜찮겠다는.
“도련님이 어떤 분인지… 어느 정도는 안다고 생각해요. 이런 말을 한순간의 변덕으로 꺼내실 분이 아니죠. 이렇게… 무리를 해서 만나러 와주셨으니, 진심이라는 것도 압니다. 그러나… 저는 그 마음이 제게는 과분하다는 것도 잘 압니다. 입장 차이라는 게 있으니까요. 그러니까… 저는 분명 당신을 거절해야 하는 것이겠죠. 그건 알아요. 알고 있는데…….”
도저히 당신이 싫다는 말이 나오지 않아.
“…전에 복스가 물어본 적이 있었어요. 도련님과의 관계가 이대로 끝나도 괜찮겠느냐고. 저는… 그 때 제대로 대답하지 못했습니다. 제가 도련님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복스가 말하는 관계란 게 무엇인지, 도저히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거든요.”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고, 이 일이 어떤 식으로 굴러가든 자신이 정말로 행복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하지만… 지금은 알아요. 역시 시작도 해보지 않고 끝나는 건 싫다는 것을요.”
우리의 결말이 어떻게 되든, 시작해보고 싶다.
이 빛나는, 자신에게는 과분한 사람을, 아주 잠시라도 좋으니 곁에 두고 싶다.
“조금 더… 같이 있고 싶어요, 루카.”
처음으로 슈가 이름을 부른 순간 루카의 눈은 휘둥그레졌음. 그러나 곧 그 말의 의미를 깨닫고 창틀을 붙잡은 손을 뻗어 만져볼 수 있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슈의 뺨을 감싸고, 창틀 너머로 몸을 기울여서, 살포시 입맞췄을 때 루카는 자신과 슈의 마음이 하나가 된 것을 알았음. 창틀에 걸치고 앉아 슈의 어깨를 끌어안았을 때는 전에도 맡아본 적 있었던 좋은 냄새가 났고, 그들은 그렇게 오래오래 서로 끌어안고 있었음.
그리고 루카 카네시로와 슈 야미노가 서로의 마음을 확인한 바로 그 시각.
주인의 심부름을 마치고 초롱 하나만 밝힌 채 카네시로 저택으로 돌아가던 아이크 이브랜드는 저 앞의 어둠 속에서 누군가 자신에게 접근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음. 호신용으로 차고 온 칼을 발도할 준비를 하고 자리에 멈춰서서 그 누군가를 기다리던 아이크는 어둠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복스 아쿠마를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음. 야미노 재봉소의 점원이 왜 여기에? 우연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음. 잔뜩 경계하고 선 아이크의 앞에 복스가 완전히 모습을 드러냈음.
“좋은 밤입니다, 아이크. 잠시 시간을 내 줄 수 있을까요? 할 얘기가 있습니다.”
“…무슨 얘기죠.”
“시치미 떼시기는. 할 이야기라면 뻔하죠. 나와 당신의 주인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꿍꿍이속으로 가득해 보이는 복스의 웃음을 보고 아이크는 요괴를 떠올렸음. 왜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눈앞의 남자가 평범한 인간은 아니리라는 확신이 들었고, 그 확신을 증명하듯 복스는 생긋, 웃었음.
그것은 너무나도 먹음직스러운 먹잇감을 앞에 둔 악마의 웃음이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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