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랙배저-윤힐데

[윤힐데] 장송 중편

신목에 기대어 잠드는 것을 좋아했다.

좋은 습관은 아니었다. 벌레들이 동물을 가려가며 물어뜯을 이유는 없었으니까. 신관분들은 기겁해서 자신을 떼어내기도 했다. 신벌을 두려워 하라 거듭 충고하면서. 그럴 땐 겨우 나무에 등을 기댄 정도로 신목을 상처 입힐 일이 생길까 싶었지만.

눈을 뜨면 마주치는 녹음과 탁 트인 장소에서 휘휘 불어오는 바람이 좋았다. 손등 위에 내려앉은 나비가 피부를 살살 간지럽히는 감각도.

평생 이렇게 살 수 있으면 좋을 텐데.

[메에에―.]

연신 머리를 꾸벅이며 한가로움을 즐기던 힐데는 양들의 비명 같은 울음을 듣자마자 자리에서 일어나 미친 듯이 뛰었다. 생을 홀로 살아갈 수 있는 게 아닌 이상, 세상사 다사다난하기 마련임을 반강제로 되새기면서.

헛간엔 입이 새빨개진 늑대가 두 마리 있었다.

힐데는 늑대들이 단말마의 비명을 내뱉기도 전에 깔끔하게 놈들을 베어내고 상황을 파악했다. 양 두 마리가 살점이 뜯어져서 쓰러진 채였다. 이미 사망해 손 쓸 도리도 없었다. 그저 살아남은 양들만 공포에 질려 울음을 터뜨릴 뿐.

“아. 씨….”

눈물이 핑 돌았다.

힐데는 손등으로 액체를 훔쳐냈다.

허나 울고 있을 수만도 없었다. 일단 양들 숫자를 확인해야 했다. 무리 생활을 하는 늑대가 둘만 남아 있었던 게 퍽 이상했다. 이미 몇 마리 입에 물고 도망쳤을지도 모른다. 힐데베르트는 양을 부지런히 세어보다 멈칫했다.

“이오!”

그는 늑대들이 파손해 들어온 듯한 구멍으로 급히 빠져나왔다. 공교롭게도 이틀 전 부상 입은 늑대를 살려보내고, 헛간을 바로 쌓아올릴 순 없어 판자로 대강 덧댄 자리였다. 그때 살려주는 게 아니었는데 괜히 마음이 약해져서!

눈치를 보고 있었을 늑대들은 쏜살같이 도망쳤다.

[메에에―.]

불운하게도 한 마리만 그렇지 못했다. 다리를 절뚝거리는 녀석. 놈의 입에 등가죽을 물린 채로, 이오가 버둥거렸다. 새빨갛게 물든 하얀 털들. 피비린내.

눈이 뒤집힌 힐데베르트가 달려갈 때였다.

[찾았다.]

탕―!

처음 듣는 굉음이 깔끔하게 터지며, 옆구리 살점이 후둑 떨어져 나간 늑대가 양을 놓쳤다. 거대한 몸을 비틀거리던 녀석은 두 차례 더 굉음과 엮이자 얼마 지나지 않아 풀썩 쓰러졌다. 뭔가 타는 듯한 냄새를 남기고.

어떻게 된 일이지. 아무도 화살을 쏘지 않았는데.

눈만 깜빡이던 중 그가 다가와서 말했다.

[겨우 늑대 갖고 뭐 하냐? 가자.]

“…마법사?”

“허?”

새까맣고 창백하며 수상하게 잘생긴 남성.

그것이 흑마법사에 대한 첫인상이었다.

양들의 죽음을 신관분들과 함께 애도하고 고기를 마을 사람들에게 나눠준 뒤. 힐데는 제가 겪은 일에 대해서 노신관과 대화를 나누었다. 그녀는 팔을 뻗어 저보다 쭉 키가 큰 소년의 머리를 헤집더니―힐데는 부러 고개를 숙였다― 다정하게 말했다.

“그래도 난 네가 그놈에게 베풀었던 게 잘못 같진 않구나. 너는 어차피 놈에게 은혜를 돌려받고 싶어서 베푼 것도 아니었잖느냐? 네 양심에 따랐을 뿐이지.”

“….”

“잘했다. 선은 그 자체로 숭고한 법이다. 입이 불어터지게 잔소리 한 보람을 느끼게 해주는구나, 힐데.”

“하지만 신관님. 제 실수로 죽은 양들이 꿈에 계속 나오는데도요.”

힐데는 눈시울이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러자 십오 년이 넘게 힐데베르트를 지켜봐온 신관은 짧은 숨을 내쉬었다.

“얘야. 생각해 보렴. 놈을 죽였어도 그 무리는 여기 찾아왔을지도 몰라. 우리에게도 놈들은 위협이지만, 늑대들에게도 우리는 여간 부담스러운 존재가 아닐 게다. 힐데베르트 탈레브처럼 용감한 기사가 있다면 더욱―.”

“신관님!”

“헌데도 네 양들을 노리러 왔단 건, 그만큼 밖에서 사냥하기가 어려워졌단 뜻 아니겠느냐? 우리도 이번 태풍을 수습하기 여간 힘든 게 아닌 것처럼 늑대들도 그랬던 거겠지. 모든 일이 네 실수 탓에 빚어지는 건 아니다! 그리 여기고 목숨 며칠 붙여준 셈 치자꾸나.”

그녀가 아이의 어깨를 도닥였다.

“그리고 이별은 항상 갑작스러운 법이란다. 하루 아침에 많이 배웠구나.”

힐데는 여전히 모든 일이 자신 때문에 벌어진 듯했지만 노신관의 마음씨와 정성을 무시할 수도 없었다. 그는 애써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문제는 하나 남았다.

허나 그것을 문제라고 일컬어도 될진 의문이었다. 그걸 이 세상에서 문제라고 인식하는 사람이 자신뿐이라면, 저만 미쳐버린 것일 수도 있지 않겠는가?

그런 식으로 힐데는 남들처럼 그자를 호의적으로 여기고자 사고의 전환을 여러 번 시도했으나, 골백 번 생각해도 놈은 수상쩍기 만할 따름이었다.

문제의 명칭은 최윤이었다.

낯선 이름이었다. 다만 그게 잘못된 건 아니었다. 제 이름도 힐데베르트 탈레브라는, 이 근처에선 듣도 보도 못한 말이었으니. 이오의 응급 치료를 도와줬단 점에서 최윤은 제 은인이기도 했다. 힐데는 지금도 그 부분엔 깊은 고마움을 느꼈다.

허나 그, 인간을 최소 수십은 담가본 듯한 시선과 명백히 보통 사람과는 다른 감성이. 흑마법사가 아무것도 없는 마을에서 굳이 지내려는 이유는 또 뭐란 말인가!

이런 의심을 알리자 한 신관은 손을 저었다.

“수십 명? 으하학!”

“아무리 봐도 평범한 마법사는 아니라니까요! 흑마법사? 그런 걸지도 몰라요. 막, 사람들을 세뇌해서 제물로 바치고, 여기 고립돼 있으니까 그러기 딱―”

“딱 봐도 수백은 담가봤을 것 같지 않던? 하하!”

원래 이런 분이었나? 아니면 벌써 세뇌에 성공한 건가! 힐데는 머리털이 쭈뼛 서는 듯했지만, 그렇다 해서 대머리가 된 그분의 머리까지 세울 순 없었다. 

힐데베르트가 제 설득력에 대한 무력감에 허우적대던 동안, 윤은 마을에서 입지를 빠르게 넓혀갔다. 최근에는 신전에서도 가장 좋은 방에 묵으면서.

최윤은 마을의 물레방아를 사흘 만에 뚝딱 개선해주고는―이때는 제 눈에도 광채가 보였다― 말했다. 제가 그를 수상하게 여김을 알면서도 비죽 웃으며….

“고도로 발달한 [과학]은 마법과 같단 말도 있지.”

“수도에선 흑마법을 [과학]이라고 부릅니까? 그게 뭔데요. 저도 배울 수 있을까요?”

윤은 혀를 차곤 남의 머리를 멋대로 헝클어뜨렸다.

“너는 평생 업 삼을 일 없는 학문이니 신경 꺼라.”

힐데는 충고를 그러려니 넘겼다. 마법 같은 학문엔 특별한 재능이 필요하단 사실 정도는 자신도 알았기 때문이다. 어차피 검술 연습하느라 바쁘기도 했고.

진실을 깨닫는 덴 긴 시간이 들지 않았다.

힐데도 남자가 수상해 그를 주시하는 편이었지만, 윤도 왜인지 힐데베르트를 자주 찾아오는 편이어서 힐데는 상대를 쉽게 관찰할 수 있었다.

그날도 그랬다.

힐데는 헛간에서 이오를 쓰다듬는 윤을 발견하고 물었다.

“오. 동물 좋아하십니까?”

아니면 그래도 제가 살린 생명이라고 신경 쓰였나. 어느 쪽이든 의외였지만, 상대에게 기대해본 적 없는 귀여운 모습이라 힐데는 환히 웃었다.

반면 최윤은 평소처럼 무심하게 말했다.

“아니. 너 닮아서.”

그리고 볼 일을 마쳤단 듯 사라져버렸다.

힐데베르트는 한 템포 느리게 입을 벌렸다. 말인즉 최윤은 나를 저 양들처럼 멍청한 생명체로 보고 있단 뜻 아닌가?

내가 마법은 못해도 검술은 꽤 하는데도!

허나 붙잡아 족치기에도 늦은 뒤였다.

힐데는 결국 며칠 뒤 새참을 들고 헛간을 찾아온, 마을의 또래 친구에게 제 상황을 털어놓았다. 이제 신관분들중엔 의논할 수 있는 상대가 전무했다.

친구는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물었다.

“그러니까 그 마법사가 힐데 널 멍청하게 보는 게 문제란 거야?”

적절한 요약이었지만, 타인의 말로 듣자니 고자질하기에도 멍청한 사유였다. 힐데는 아닌 척 주제를 바꾸었다.

“아니. 그 인간 자체가 수상하다고! 보면 그렇게 사람들과 내외하면서 나만 힐데베르트라고 막 불러대는 것도 이상해. 무슨 수작이지?”

“그건 그냥 너랑만 친하다고 생각해서인 거 아냐? 나도 딱히 그 마법사를 이름으로 부르진 않는 걸.”

“…그런가?”

“아니면 이런 얘긴 거지? 남들이 그 수상한 마법사한테 호감을 잘 느끼는 건 최윤이 흑마법을 써서고, 근데 넌 이상하게 마법이 잘 안 먹혀서 공을 들이는 것 같다, 이런? 흑마법사가 아무것도 없는 이 마을에 머물러야 할 이유도 없으니까 사람들을 모아서 뭔가 하려는 게 아닐까 싶은 거고!”

힐데는 박수를 칠 뻔했다. 그게 제가 정확히 의심하던 부분이었기에. 하지만, 듣고 보니 그 말은 윤을 지나치게 사악한 존재로 묘사하는 것 같기도 했다.

그 인간이 그 정도는 아니지 않나?

이오도 살려줬고 친절할 때도 꽤 있는데.

“나도 들어본 적은 있는 것 같아. 악마들이 그렇게 한다지? 인간 영혼을 단체로 뽑아서 제를 지내면―.”

아니나 다를까 그 단어가 튀어나왔다.

힐데는 부리나케 양손을 휘저었다.

“그건, 아닐 걸! 신관님들이 악마는 사람의 소원을 들어주는 대신에, 인간 영혼에 낙인을 찍어서 평생 사역해 부려먹는다고 했거든. 윤은 나더러 이거 해라 저거 옮겨라 굴려대는 걸 보면 날 노예로 여기는 건 분명하지만! 딱히 사역하려 든 적은 없다고.”

“무슨 차이야?”

“내 소원은 이뤄지느냐의 차이….”

친구의 떨떠름한 눈이 유독 아팠다. 힐데는 슬픔을 겨우 삼켰다. 그녀가 고맙게도 화제를 옮겨주었다.

“근데 너도 소원이랄 게 있었어?”

“음? 어. 당연하지.”

“오. 뭔데. 세계 최고의 검사 되기?”

“그건, 되면 좋겠지만 그렇게까진. 난 그보다 남이 해준 맛있는 면 요리를 매주 먹고 싶어.”

“뭐? 아하하!”

친구가 배를 잡고 폭소했다. 그 맛있는 면 요리의 이름을 떠올릴락 말락 하던 힐데는 묘한 부끄러움에 본주제로 돌아와 중얼거렸다.

“아아무튼 윤이 당장 하는 짓도, 심심할 때 주변에 너를 골탕 먹이고 싶단 감정을 날리는 것정도잖아? 최윤은 그냥 좀, 이상한 사람이야.”

그러자 처음으로 친구가 정색했다. 힐데는 뒤늦게 뭔가가 잘못됐음을 눈치 챘지만 그게 뭔진 짐작하지 못했다.

불행히도 그녀가 설명했다.

“와…. 너 그 마법사랑 전이해봤구나.”

힐데베르트는 입을 벌렸다.

나한테만 그랬다고! 진짜 왜?

친구는 힐데의 등을 연신 두드리곤 웃었다.

“역시! 널 좋아하나 봐! 난 그거 같애!”

그녀는 여느 때보다도 행복해 보였다. 이 한적한 마을에서 드물게 나오는 재미란 이런 것정도였는데 이번엔 대상이 제 친구가 된 덕이다. 마침 그런 얘길 선호할 나이기도 했고, 아니, 무슨 이런 늙은이 같은 생각을?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힐데가 팔을 허우적거리며 말했다.

“조, 좋, 세상 어느 ‘좋아’가 그렇게 싸가지 없이―”

“아하. 싸가지가 없었구나!”

“따라하지 마!”

“이름도 막 부르고 성격은 말아먹고 전이도 맘대로 했는데 힐데는 그걸 다아 봐줬구나. 이거 혹시?”

“잠깐. 이상한 얘기 퍼뜨리지 마! 이제 안 봐줘. 안 봐줄 거라고!”

그녀가 헛간 출구로 달려갔다. 놀란 이오가 메에, 하고 곁을 서성거렸다. 힐데는 대강 이오를 달랜 뒤 헛간을 빠져나왔다.

친구는 이미 없었다.

대신 문제가 있었다.

칠흑 같던 눈에 즐거움을 실실 담은 채였다. 왜일까. 분명 남의 얘길 멋대로 들은 건 저쪽인데 힐데는 자신이 창살에 꿰인 물고기가 된 기분을 느꼈다.

“어떻게 안 봐주려고?”

“…어디부터 들은 겁니까?”

“요리라도 해줘?”

다 들었구만!

“남의 말 좀 몰래 듣고 다니지 마세요!”

여기서 떠드는 게 아니었는데.

왜 이렇게 자주 찾아오는 거냐고!

힐데는 좌절했다. 절망했다가, 논리적 사고 과정을 가뿐히 뛰어넘어 소문의 대상쯤 제거하면 헛소문도 사라지리라는 결론에 다다랐다.

그는 윤의 엉덩이를 차버리고자 발을 뻗었다.

허나 예상한 듯 놈이 발길질을 피하는 게 아닌가.

심지어 효율적으로 한 걸음만 움직여 벗어난 꼴이 얄밉기 그지 없었다. 최윤은 그도 모자라 혀를 살짝 내밀었다. 인내심이 뚝 하고 안에서부터 끊어졌다.

지옥 같은 추격전이 시작되었다.

소년은 언덕에 있었다.

양들을 돌보고, 노래 연습을 하고, 대부분의 일을 마치면 그는 거의 그곳에 있곤 했다. 사람들이 드문 한적한 장소에서 검을 익히기 위해.

힐데베르트를 오래 지켜봐 왔음에도 저 날카롭고 긴 철덩어리만을 그가 유독 편애하는 이유를, 윤은 이해하지 못했다.

어차피 다 같은 사람 멱 따는 도구 아닌가. 무기는 다른 생명에 상해를 입히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 그 목적만 이룰 수 있다면 형태는 무엇이 되든 상관 없는 것이다. 인류가 검과 창 같은 냉병기에 특별히 집착했다면 화기가 만들어질 일도 요원했을 터다.

뭔가를 파괴하는 힘에 대한 인간의 집착은 지독한 것이어서 현재도 무기는 다양한 모습으로 발전하고 있었다. 버튼 형태로 한 도시를 박살내는 핵에서부터 이예현이 다루는 형체변동무기까지. 최윤은 도구를 가리지 않고 그때그때 효율적인 것을 썼다.

힐데베르트처럼 특정 무기만 선호하는 자는 배저중에선 거의 없었다.

그러니 흥미로울 수밖에. 일평생 파괴력만을 추구하며 연구를 거듭해온 배저들과 과학자들의 노력을, 저것은 별 생각도 없이 쓰레기장에 처박고 있잖은가. 정작 본인은 제 검을 아낄 뿐, 뭔가를 찢어발기는 덴 관심 두지 않음에도.

뭐, 지금은 그래봤자 참새 날갯짓에 불과하지만.

윤은 자신이 알던 모습보다 어색한 몸짓으로 검을 휘두르는 힐데를 즐겁게 관찰했다. 저래서야 막는 건 물론이고 파트너를 빼앗을 수도 있겠는데. 무도회에 갓 데뷔한 소년이 왈츠의 모든 순간을 엇박으로 추는 꼴이었다. 그것도 재주라면 재주일 터.

저토록 미숙함에도.

검과 섹스를 할 순 없어서 다행인가? 최윤은 심술 맞게 생각했다. 그는 여전히 검술에 대한 부사수의 애정을 이해하지 못했으나….

소년은 뿌듯한 표정으로 검을 집어넣었다.

동시에 아득히 먼 곳에 자리한 금빛을 응시했다.

어깨가 호흡에 따라 오르내린다. 허나 이 세계의 신을 마주한 방향엔 흔들림이 없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힐데베르트가 대단한 고찰을 하진 않을 터다. 어쩌면 렉시크를 먹고 싶단 생각이나 하고 있겠지. 명칭은 기억 못하는 듯하지만.

다만 그 의도가 본인에게는 무엇이었다 해도, 저 모습을 발견한 이들은 어떤 운명을 직감했던 것이다. 그의 미래가 실제로 그러했듯이….

세상이 소년을 필요로 하게 될 터임을.

“그렇게 궁금하면 한 번 끝을 보러 가지 그러냐.”

윤이 다가가 말했다. 힐데베르트의 금안은 살기로 일렁였다. 본인 눈 색이 최초엔 어땠는지도 잊어버린 모양이지. 장난 수준의 기백이라, 최윤은 무시했다.

“기왕 검을 쥐었으면 용 정도는 베어야지.”

이 마을은 특별할 게 없는 시골이었지만 큰 신전이 위치한 덕에 인구는 꽤 되는 편이었다. 하여 순회차 지나간 음유시인이 어제 읊은 노래가 그것이었다. 

그리고 최윤은 이 제안이 괜찮은 편이라 여겼는데, 연인이 매실주에 취할 때마다 제가 용을 잡은 위업을 떠들어댄 덕에 그 신화에 강제로 익숙해진 탓이었다. 본인이 자랑스러워 할 일을 미리 알려주는 게 문제가 되겠는가? 이게 욕도 아닌데.

허나 힐데베르트는 뒷목을 잡았다.

“하.”

그리고 오늘 아침 노신관이 써준 성기사 견습후보 추천장을 박박 찢어버렸을 때처럼―여기서 본 광경중에 제일 재밌었다― 퉁명스럽게 말했다.

“윤. 소드마스터도 용은 쉽게 못 벱니다. 애초에 전 기사나 용병도 아니고요.”

“왜. 검사와 마법사면 요정이랑 트롤 끼워서 마왕 멱을 따러 가기도 괜찮은 조합 아니냐?”

“어디서 트롤이 끼는데.”

힐데베르트는 헛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양심 챙기십쇼. 그 조합이면 솔직히, 댁은 용사쪽보단 마왕이 훨씬 잘 어울린다고요.”

“일리는 있군. 이 세계가 멸망하길 바라는 개체를 악마라고 정의한다면.”

“…비꼬려고 한 얘기였는데요. 안 쪽팔립니까?”

“힐데베르트. 너는 말로는 안 된단 사실을 깨달을 때도 되지 않았냐?”

“본인 입으로 지가 악마라고 떠들고 다니는 놈이 어딨는데.”

“여기. 더불어 진심이야.”

최윤은 눈 한 번 깜빡이지 않았다. 힐데는 결국 제 능력의 한계를 느꼈는지 불만만 꿍얼거리다 입술을 다물었다.

그리고 윤의 곁에 풀썩 주저앉았다.

이 세계는 세탁도 불편하던데. 귀찮게 굳이 수풀에 앉는군. 윤은 그리 생각하면서도 장단을 맞춰 소년과 나란히 앉아주었다.

풀벌레 우는 소리.

힐데베르트의 머리카락이 윤의 어깨를 간질였다.

속삭이는 듯한 감촉.

노을이 내려앉고, 이내 그마저도 자취를 감췄다. 그럼에도 암흑 속에서 빛을 발하는 황금색 잎사귀와 그것이 자아내는 선형은 얼핏 경이로운 풍경이었다. 마치 하늘에 걸린 수많은 별처럼 저곳만이 이 세계의 목적지인 양 사람들을 유혹하는 것이다.

허나 누군가에게는.

“윤. 그러면 말입니다.”

여기 있지 않은가?

힐데베르트 탈레브가 이 세상을 점등한다.

약소히, 무한하게.

“대체 왜 아무런, 수작도 부리지 않는 겁니까? 전 당신같이 성실한 자가 여기서 가만히만 있는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이 마을은 연구에만 집중하기에도 별거 없는 곳 아닙니까?”

그리 긴 시간을 침묵하며 고민해놓고 묻는 게 겨우 이런 것이라니. 이놈의 바보짓엔 이제 익숙해졌다고 확신했는데. 최윤은 다시금 황당해졌다. 제 성격에 이곳에서 시간을 쓰는 이유가 달리 무엇이 있겠느냔 말이다.

“넌 그걸 물어봐야 아냐?”

윤은 무작정 손을 뻗어 놈의 목선을 꾹 눌렀다.

갑작스러운 접촉에 힐데는 어깨를 움찔거렸다.

“그만. 좀 진지하게 대화로, 그만 하라고요. 진짜!”

결국 힐데베르트가 일어나 줄행랑을 쳤다.

자극이 과했나. 고작 이 정도로. 윤은 그 뒤꽁무니를 보며 웃음을 터뜨렸다. 하여간 재밌는 놈이었다. 사람 지루해지게 두질 않으니.

변경 마을은 빠르게 황폐해졌다.

대륙 통일을 위한 전쟁이 계속되던 중에 가뭄으로 작황도 부진해진 까닭이었다. 중앙의 지원이 끊겼고, 이런 사정은 다른 신전도 마찬가지였기에 도움 구할 곳도 없었다. 최윤이 아무리 뛰어난 흑마법사라 한들 식량을 창조해내진 못했고.

결국 양 몇 마리가 도축되었다.

윤이 보기에 도축안은 합리적인 것이었다. 신전은 사람들을 부양해야 할 의무가 있었다. 이 시대에는 종교 시설이 곧 행정 기관이다. 즉 신전은 십일조란 명목으로 거둔 세금의 값을 치러야 했다. 마을 사람들에겐 다행히도 이곳 신관들은 사회 계약을 지켰다.

게다가 양 자체도 그냥 두기엔 곤란한 것이었다. 가뭄이 농작물뿐만 아니라 목초지도 말려죽인 탓에. 목축을 이어가려면 몇 마리는 정리해야만 했다.

와중에 생활고에 시달리다 못한 이들이 각지에서 도적이 되고 있었으니 신전에서 결단을 내린 것이다. 마을에 언제 도적단이 처들어올지 모른다 하니, 미리 배라도 채워 든든히 방비를 해보자는 의미로. 당연히 아무도 반대하지 않았다.

모든 사정을 아는 힐데베르트 또한.

허나 그는 이오의 도축을 지켜보진 못했고 그것을 섭취하지도 않았다. 윤은, 뭐, 배가 고팠지만 애인 된 죄로 힐데의 고집에 동참해주었다.

직후 윤은 방에 침울히 누워 있던 상대를 찾았다.

“그렇게 마음에 안 들면 엎지 그랬냐.”

힐데베르트는 답하지 않았다. 대신 몸을 일으켜서 침대에 걸터앉더니, 추억에 빠진 듯 고개를 숙였다. 최윤은 별수 없이 그 곁에 앉아 울먹임을 들었다.

“윤. 이오는 오래 살았습니다.”

“그러냐.”

“저와 함께 오래 살았었다고요.”

눈물이 방울이 아닌 선처럼 흘러내렸다. 최윤은 그 절절한 아픔을 이해하기 어려웠다. 자신과 닮긴 했다지만, 어차피 가축 아닌가. 처음부터 인간의 쓸모를 위해 사육된. 힐데베르트의 이름조차 외우지 못하고 대화도 불가능한 어리석은 생물. 그럼에도.

윤은 이 바보 같은 모습에서 눈을 뗄 순 없었다.

“죽을 것 같습니다. 정말 너무….”

힐데가 몸을 기대왔다. 어깨가 덜덜 떨렸다. 윤은 그 진동 또한 납득하기 어려웠다. 최윤이 제 아픔에 공감하지 못하는 생물임을 알면서 끝없이 손을 뻗는 이것은 대체 무엇을 찾아 헤매고 있나. 적어도 자신에게선 구하지 못할 것을.

그럼에도 윤은 힐데의 등을 도닥였다.

힐데베르트가 제 옷자락을 적시게 두었다. 놈이 제 품 안에서 고통에 허우적대게 했다. 명료하지 못하게 흐느끼는, 답답한 웅얼거림에 귀를 기울여도 보았다. 상체의 무게를 단단히 지탱했다. 그리고 손가락으로 눈물을 닦아주었다. 

그 모든 일이 조금도 피곤하지 않았다.

마침내 놈이 감정을 어느 정도 추스르고 일어났을 때, 윤은 깨달았다. 힐데베르트의 마음을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제가 본인이 아닌 이상 당연한 일이고.

사실 정말로 헤아릴 수 없는 쪽은 자신임을.

꼭 미친 것 같지 않은가.

이게 뭐라고….

“진정됐냐.”

“옙. 감사합니다.”

힐데가 손등으로 눈가를 벅벅 닦곤 말했다.

“그리고 죄송합니다…. 이제 정신이 들긴 했는데. 어쩌죠?”

“네가 끌어들여놓고 나한테 묻냐?”

“윽. 입이 두 개여도 할 말이 없습니다. 근데 제가 고의로 끌어들인 게 아닌 건 아시잖아요.”

“네 입은 세 개쯤 되나 보다.”

힐데베르트 탈레브의 세 입이 드물게 의견을 통일했다. 동시에 입을 꽉 다문 것이다. 최윤은 코웃음을 쳤다.

어쨌든 갑자기 기대며 울 때부터 예상했지만 놈은 막대한 충격을 받고 정신을 차린 모양이었다. 이제 이곳을 어떻게 나갈지만 고민하면 될 텐데. 윤은 늘 걱정을 사서 하는 연인을 흘끗했다. 아직 불안하게 흔들리는 동공이, 일이 금세 해결될 것 같진 않았다.

하여간 자신 만한 애인도 없다.

힐데에게 과거사를 전해 들은 적도 있고, 마을에서 지내며 얻은 지식도 있어서 윤은 그 불안이 무엇에 기인하는지 바로 알아챘다. 이제 일어날 일을 어떻게 대응할지, 자신이 원하는 대로 했다간 귀환에 문제가 되진 않을지 걱정중인 거겠지.

그러면 선택지를 밟아 치워주면 되는 것 아닌가?

최윤은 어젯밤 세운 계획을 실행에 옮기기로 했다. 이게 친구가 조언했던 바람직한 방식은 아니겠지만, 힐데베르트 탈레브에게 필요한 일임은 확신하면서.

윤이 유리병 하나를 들고 온 천가방에서 꺼냈다.

“일단 마셔라. 처울었으면 수분 보충을 해야지.”

“아. 넵.”

힐데는 의심도 없이 병을 기울였다. 목이 말랐는지 망설이지도 않았다. 액체가 목울대로 완전히 넘어간 뒤에야 그가 말했다.

“근데 이거 뭡니까? 맛있긴 한, 데―.”

황금안이 순식간에 배신감으로 가득 찼다. 단순히 놈 특유의 생존감각 때문은 아니었다. 윤은 알았다. 그 분노가 지독한 경험에서 비롯되었음을.

알았으나, 최윤은 차분히 설명했다.

“도적단이 빠르면 오늘 밤에 올 것 같으니 너한테 먹일 수면제를 만들어 달라던데.”

근대 이전의 사회에서 주술사는 늘 의사를 겸했다. 마을에 유능한 마법사가 있다면 찾는 게 당연했다. 그가 이놈의 안위에만 미쳐 있는 듯 보인다면 더욱.

“씨, 발….”

“잘 듣냐?”

힐데베르트가 입술을 짓씹었다. 윤은 그 위로 제 입술을 살풋 붙였다. 미뢰에 도는 비린 맛을 느끼며, 그는 연인이 전이하는 극한의 분노를 감지했다.

과연. 이런 감각이었나?

이것을 시시때때로 느끼고도 제 사수에게 한 마디 언급을 하지 않았나. 넙죽 알렸으면 가능한 원하는 대로 맞춰주었을 것을.

윤은 배신의 대가를 기껍게 받아들였다.

어쨌든 그 어떤 경우에도, 타자에 대한 눈물보다는 자신에 대한 증오가 훨씬 가치 있는 것이므로.

최윤은 연인을 침대에 부드럽게 눕히며 속삭였다.

“아껴 마지 않는 내 부사수. 긴히 악몽이나 꿔라.”

“유….”

“그 나이면 사실 남탓이나 하기 좋을 때 아니냐.”

머리카락을 쓸어 넘겨주자 완전히 눈이 감겼다.

꿈조차 꾸지 못했다.

대신 잠들기 직전까지 결심한 단상은 남아 있었다. 힐데는 그를 여러 번 되짚었더랬다. 깨어나면 최윤을 죽여버려야지. 어차피 여긴 환상 속이니까 그런다고 진짜 윤이 사망하진 않을 것이다. 혹 죽는다면 그도 업보 아닌가?

하여 입가에 짜증나게 번들거리는 촉감이 느껴진 순간. 힐데는 주먹부터 날렸다.

“깼냐?”

빡!

막히는 소리. 처맞을 짓을 했단 건 아나 보지! 힐데베르트는 신경질적으로 눈을 떠서 곧 헤어질 예정인 연인을 마주했다.

그러다 멈칫했다.

몸이 가뿐했다.

이상한 일이었다. 왜냐하면, 예전엔 이렇지 않았기 때문이다. 깨어난 뒤에도 한동안 몽롱했는데. 힐데는 무심코 마른침을 삼켰다.

“#&%*@!”

끔찍하게 신맛이 느껴졌다!

최윤이 폭소했다. 힐데베르트는 지렁이처럼 팔을 꿈틀거리고 헛기침을 몇 번 뱉은 뒤에야 원 상태로 돌아왔다. 꼴을 즐겁게 구경하던 현행범이 말했다.

“잘 듣는 모양이다. 정신 차렸으면 일어나.”

“예, 예?”

“내가 아는 약이어야 해독도 하겠지.”

힐데는 입을 벌렸다.

말인즉 본인이 각성시키기 위해 수면제를 만들어 먹였단 것 아닌가! 병 주고 약 주는 셈이었지만, 그가 하지 않았으면 남이 제조해 들이부었을 테니까. 물론 이번엔 무슨 액체든 쉽게 마셔줄 생각은 없었으나, 그건 왜 그렇게 막 마셨었지?

하필 그때 목이 말랐었다. 진짜. 힐데는 변명하다가, 윤을 내심 욕하다가, 일단 상황부터 파악하기로 했다.

“그럼 지금은―.”

“다들 신전 내부로 도피했다. 아직 사망자는 없고. 곧 생길 수도 있겠다만.”

“아. 미친 놈….”

힐데는 마른 세수를 했다. 왜 일이 이렇게 됐는지 알 듯했다. 이 근면하고 게으르며 성격 나쁜 군인은 신관들에게 고작 둘이서 도적단 세 자릿수를 상대할 수 있단 사실을 꾸역꾸역 설명하고 증명하기가 너무 귀찮았던 것이다!

“저한텐 알려줄 수 있는 것 아닙니까?”

“그래서 지금 하고 있잖아.”

이 새끼가 이 지랄을 해 얻은 게 뭐지. 저건 핑계고 분명 뭔가를 가지려 했었을 터다. 힐데는 침착하게 머리를 굴리다 깨달았다. 최윤이 조금 전에 제게서 얻어간 것은 감정으로 된 욕 열 사발뿐이란 사실을. 그게 알고 싶었다고!

“궁금한 게 있으면 얘기부터 하세요. 좀!”

“오. 덜 멍청해졌네.”

“똑똑해졌다고 하면 안 되는 겁니까? 물론 댁 눈엔 세상 사람들이 다 멍청해 보이겠지만―”

“무슨 소리지? 존 뮐른은 예외야.”

“인간아….”

“그리고 말했으면 들어줬겠냐.”

“당연히 안 하죠! 전 최윤처럼 문란하게 살고 싶진 않단 말입니다. 윤도 이제는 알겠지만 이게 얼마나 예민한 문젠데요.”

“그 문란한 인간과 매일 음란한 성생활을 하는 게 남인 것처럼 말씀하십니다.”

“악!”

“뭐야. 미쳤냐?”

차라리 미쳐버렸으면 했다!

제정신이라 괴로웠다, 정말로. 최근의 고민거리를 사정 없이 찔린 힐데는 영혼이 베인 감각에 낯짝을 가렸다. 당장 이 방만 나가도 신관분들이 계실 텐데.

황당하게도 힐데를 구해준 것은 도적단이었다.

“가자.”

육감에 수상한 기척들이 잡혔다. 먼저 눈치를 챈 윤이 특정 방향을 가리켰다. [인간]일 때도 다른 강화신체 소유자보다 감각이 예민하더니 여기서 재능이 더 트인 것 같았다. 할 말은 아직 한둘이 아니었으나, 힐데베르트는 결국 인정했다.

무장을 갖춘 사수보다 든든한 동료는 거의 없음을.

“서둘러야겠습니다. 엄호해주십쇼. 내 마법사.”

“지금 사수한테 명령질이냐? 끝나고 보자.”

최윤이 픽 웃었다. 등이 섬찟했지만, 일단 힐데는 신전 정문으로 미친 듯 뛰어갔다. 심장이 전과 달리 즐겁게 뛰었다.

전투가 시작되었으나 솔직히 싱거웠다.

숙련된 배저 두 명을 고작 세 자릿수 민간인들이 제압 가능할 리 없었다. 그들이 무장을 갖췄건 제법 전투 경험이 생겼건 간에. 애초에 흉작이 아니었다면 도적단이 되지 않았을 이들이 대부분이었다. 싸움이 성립되겠는가.

허나 이번엔 인명 피해가 없었다 할지언정 그들이 이 마을에 오기까지 벤 사람 수는 그들도 기억 못할 정도였으므로.

힐데는 망설이지 않았다.

언젠가처럼, 당시의 사감까지 담아.

구경꾼들의 눈치를 보느라 검기를 쓸 순 없었으나 명백히 쉬운 전투였기에 힐데는 잡생각도 꽤 했다. 자신은 역시, 사랑으로 키워주신 분들껜 죄송하지만, 무엇이 옳다는 이유만으로 선함을 추구하는 인간은 못 되겠다고.

이 세계에선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과거의 일까지 벌레들에게 청구하는 것은 분명 지양해야 할 일이다. 허나 이 정도 무력을 쌓아놓고서 제 주변 사람들을 우선하지 않는다면 선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아. 지구에선 사적 제재에 한계를 두긴 하던데.

그가 도끼 쥔 남성을 무심히 벤 뒤였다.

쉬익―.

“힐데!”

근접전으론 안 되겠다 싶었나.

피아의 비명 사이로 화살 비가 날아왔다.

“죽여어!”

슈슈슉, 슉!

힐데베르트는 거듭 날아오는 살을 가뿐히 피했다. 총탄도 피하는데 화살쯤이야 웃기지도 않았다. 그럴 듯하게 연기하는 게 더 힘들지.

그리 생각할 즈음.

“헉. 마법사님!”

“…어?”

부리나케 돌아보자 허벅지에 화살이 꽂힌 최윤이 보였다. 분명 고통스러울 텐데 그는 신음 한 번 내지 않고 총을 연사하는 중이었다. 당연히 자신보다 적을 죽이는 속도도 빨랐으나. 힐데베르트는 조금 어이가 없어졌다.

왜 맞았지?

“힐데, 피해! 악!”

친구의 공포가 무색하게도 힐데베르트의 숙련된 무의식은 화살을 깔끔히 피하거나 제거해갔다. 그는 그러면서도 상념에 빠져 있었다. 정말 왜 당해줬냔 말이다. 흑마법사가 몸이 날랜 건 남들 보기에 이상하니까? 고작 그런 이유로?

“윤!”

그 와중에도 최윤은 그의 방향으로 오는 화살을 몇 대 더 맞아주었다. 무슨 과녁도 아니고, 저를 여전히 즉시 회복이 가능한 배저로 착각하는 양.

물론 최윤이 그리 멍청할 린 없었다.

대체 저 새낀 왜 저러는 거야? 힐데는 짜증이 머리 끝까지 솟는 것을 느꼈다. 아프긴 뒤지게 아플 텐데! 자해 공갈중인 상대에겐 과분한 감정임을 알면서도 개미 눈꼽만큼 걱정도 들었다. 힐데베르트는 적들을 베는 속도를 급히 높였다.

전투가 순식간에 종결되었다.

당장 캐물어야지. 힐데는 달려갔다. 허나 정당히 화내기도 전에 몸이 핏빛이 된―치명상이 될 부위는 싹 피했지만― 윤이 상체를 비틀거리더니 속삭였다.

“치료부터. 내 방으로 가.”

이게 목적이었구만!

이 몸짓마저도 내숭이 분명했다. 힐데는 오래 전 이승현의 내숭을 역겨워 하던 윤을 떠올렸다. 대체 누가 누굴 뒷담하는 건가. 저도 마찬가지면서.

기가 찼으나 치료가 우선이란 말도 옳았다. 힐데는 고민 끝에 금쪽 같은 애인을 적당히 아프도록 부축한 뒤 외쳤다.

“저, 윤의 방에 약이 있대서. 먼저 가보겠습니다!”

즉시 도망치는데 얼핏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바로 자리를 피할 명분이 생겨 다행이라고. 제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도적들을 망설임 없이 죽인 자신을 어떻게 대해줘도 그게 진실은 아닐 테니까.

윤이 그것까지 노리진 않았겠으나. 아닌가.

힐데는 아픈데 좀 똑바로 들라고 구시렁대는 놈을 찝찝하게 노려본 뒤, 최윤을 여전히 대충 들고 본인 방으로 옮겼다.

윤은 도착하자마자 멀끔히 직립보행했다.

“애인 죽게 내버려둘 셈이냐? 이전을 해.”

심지어 예상한 요구까지. 힐데는 울컥했다.

“이 뻔뻔한 인간아. 자기 몸 갈아서 호기심 채우는 짓 좀 하지 말라고요!”

이 자식 지금 낯선 환상에 빠진 위급 상황을 너무 본인 호기심 해결 찬스로 보는 것 아닌가? 이 가정에 전재산―마이너스 nnn억―을 걸 수도 있을 듯했다.

그래도 다친 꼴을 보면 치료를 하긴, 해야겠는데. 힐데는 망설였다. 최윤이 여기선 감정 전이도 가능한 인간이긴 하지만….

“별 문제 없을 거다. 이 세계에선.”

이 자는 너무 제 표정을 읽는 데 능하다.

힐데베르트 탈레브는 두 손을 들었다.

방 안엔 흡수 가능한 생명체가 달리 없었으므로, 힐데는 이전할 생명력을 멀리서부터 끌고 와야 했다. 게다가 힐데는 이 고집쟁이를 위해 흡입에 거부감을 느끼는 제가 크게 희생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결국 윤의 치료는 굼벵이 기는 속도로 진행되었다.

눈치는 보는지. 피로한 안색으로 침대에 누운 윤은 불평하지 않았다. 애인을 못마땅하게 보던 힐데는 곧 그 모습이 아주 조금 대견하게 느껴졌다. 현실로 돌아가면 생선이라도 사와서 회를 떠줄까. 내가 썰어준 회는 그래도 꽤 좋아하던데.

느리게 나아가는 상처를 보자 묘한 생각도 들었다.

최윤이 저와 같은 인간이라.

언젠가는 두려워했을 대답이 이젠 그리 걱정되진 않아서, 힐데는 연인의 손에 깍지를 낀 채로 덤덤히 물었다.

“윤. 전부터 궁금했는데 입은 왜 닫았던 겁니까? 제가 인간 비슷한 종이란 거요.”

최윤은 드물게 눈을 깜빡이더니 혀를 찼다.

“해야 하나? 너도 내가 그냥 이상한 사람이라며.”

남의 사생활을 멋대로 캐놓고도 이토록 당당할 수 있는 인간은 세상에 정말 몇 없을 터다. 황당했지만, 적어도 그 답엔 어떤 울림이 있었다.

최윤이란 인간의 위로가 늘 그랬듯이.

그냥 이상한 사람. 힐데는 제가 뱉은 말을 속으로 되뇌어 보았다. 아니, 다시 생각해 보면 그런 것 같진 않았다. 최윤이란 인간은 그냥 정도가 아니라 아주 무지막지하게 이상해 보인다. 역시 동일종은 아닌 게 정신 건강에 낫겠다.

“무슨 소리예요. 언제는 제 입으로 악마라더니.”

감히 남의 영혼에 멋대로 손자국을 남기질 않나.

어쩐지 쑥스러워 손을 떼자 윤이 미간을 찡그렸다.

힐데는 핀잔이나 줬다.

“공갈하는 버릇 좀 고치려고요. 나머지는 알아서 나으십쇼.”

“언제는 이전을 해서라도 살려주겠다며.”

그 얘길 지금 써먹다니 양심이 있나 없나. 당연히 없겠지만. 힐데베르트는 당시와 반대로 자신이 윤의 이마에 딱밤을 때렸다. 속이 후련했다.

“이젠 살 만해 보이는데 좀 참아보시죠.”

“독화살이면 어떡해.”

애도 아니고 아닌 거 알면서.

“제국에서 쓰인 독이면 진작 알아봤습니다.”

근무 연수만 백 년이 넘어가는 전 직장을 세계수에 걸고 맹세할 수도 있었다. 힐데는 코웃음을 쳤다. 그러자 윤은 돌연 느리게 숨을 내쉬었다.

“좀 졸리는데.”

이건, 정말 졸린 증상이었다. 최윤이 피곤해 하는 꼴을 한두 번 본 것도 아니니까. 진짜 수면제가 묻어 있었다고?

시선이 마주치자 최윤이 픽 웃었다.

“얼마 못 자서그래. 한숨 자야겠다.”

힐데는 잠깐 짜증을 느꼈지만 순순히 이불을 그의 목선까지 끌어올려주었다. 제가 잠든 동안 윤은 신전 분들과 상황도 파악하고 도적들의 기척도 확인했을 테니 실제로도 분주했을 것이다. 힐데는 연인과 달리 양심을 지켰다.

윤은 곧 이불에 감싸인 채로 속삭였다.

“힐데베르트. 난 신은 믿지 않지만….”

언젠가 나눈 시간을 조곤조곤 불러내며.

“너는 믿으니까, 깨어날 때까지 알아서 고쳐놔라.”

그리곤 둘만의 추억에 멋대로 가슴 뛰게 해놓더니 잠드는 것 아닌가. 힐데는 윤이 완전히 잠들었는지를 확인한 뒤에야 손으로 낯을 가리고 깊이 탄식했다.

“하. 최윤….”

끔찍하게 사랑스러운 인간 같으니.

힐데베르트는 확신한다. 설령 윤이 자신을 믿는다 해도, 그것은 자신이 세계수를 믿듯 신앙하는 형태는 아닐 거라고. 최윤은 힐데베르트 탈레브가 사망해도 절망하진 못할 것이며 여생을 제게 기대 살아가지도 못할 터다.

그럼에도 윤이 제게 믿음을 언급하는 이유는, 그도 그 사실을 아는 까닭이다. 최윤이 아닌 힐데베르트 탈레브는 여생을 기댈 곳이 필요함을 확신한 탓이다. 보호대상이란 이름의 신념과 신앙이 있어야만 살 수 있는 존재임을 아니, 저가 그리 되어주겠단 것이다.

아. 진실로.

최윤은 힐데베르트 탈레브를 사랑하진 못할 터다.

힐데베르트 탈레브가 최윤을 사랑하듯이는.

그럼에도 이 자의 기묘한 다정함을 마주하노라면, 힐데는 종종 소유와 사랑엔 한 가지 공통점이 있음을 깨닫곤 했다.

왜 그렇게 나를 당신인 양 여기십니까?

너와 내가 다른 인간임을 그토록 잘 알면서도.

그대처럼 똑똑한 사람이….

밤은 새까맣고 세상은 조용했다. 힐데베르트의 삶 또한 시체처럼 잠들었다. 허나 힐데는 적막 속에서 두드림을, 고독 속에서 그리움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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