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랙배저-윤힐데

[윤힐데] 장송 하편

“윤!”

눈을 뜨자 힐데베르트의 초조한 목소리가 들렸다. 이번엔 또 웬 호들갑이지. 윤은 의아해 하며 자신의 배부터 만졌다. 음.

“소리 낮추고 도적들 짐부터 털어와라. 이러다간 렉시크누들까지 먹겠어.”

그놈의 연애가 뭔지. 자신만 양고기를 먹지 않은 채로 피를 꽤 흘렸더니 뱃가죽이 등에 달라붙을 지경이었다. 윤은 진지했다.

“굶어 죽으십쇼. 제발.”

힐데베르트는 이마만 짚었으나.

이건 사람이 렉시크를 먹을 수도 있단 소리가 무슨 뜻인지 왜 아직도 모르는가. 지나치게 좋은 시력은 어째서 유독 그 가게의 평점 앞에선 장님이 되는가. 궁금했으나 그 질문에 대한 답은 수십 년이 지나도 얻지 못할 듯싶었다.

쓸모 없는 연구를 부러 하는 취미도 없다. 최윤은 이내 눈앞의 현실에 집중했다. 힐데베르트 탈레브가 팔을 바보처럼 파닥거렸다.

“그보다 잠든 동안 생각해 봤는데요. 저희 이렇게 여유 부릴 때가 아니지 않습니까? 하루도 안 남았었잖아요!”

“이제 동료들 걱정도 좀 되나 보지?”

윤은 감탄했다. 그걸 방금 떠올리다니. 힐데는 낯이 벌게져서는 짓밟힌 롤휴지처럼 질량을 보존한 채로 쪼그라들었다.

“…예. 납니다. 용케 머리를 안 치셨네요.”

단순히 머리를 가격한다 해서 정신이 들었겠냐만, 됐다. 확실히 중요한 문제라 부사수를 골리고만 있을 수도 없었다. 윤은 선선해졌다.

“아직 문제 없다. 빨리 귀환하면 좋긴 하겠지만.”

“다행이긴 한데 어떻게 확신하십니까?”

힐데가 눈을 깜빡였다. 해당 부위를 만져주기까지 했는데 이건 여전히 눈치를 못 챘군. 윤은 픽 웃으며 침상 옆 애인을 당겨와서는 쇄골 부근을 눌러주었다.

“네 목에 울혈이 남아 있고, 미세하게 나아가길래.”

“―예?”

“보통 하루 가거든.”

힐데베르트가 만화 캐릭터처럼 팔짝 뛰었다.

“왜, 왜 말을 안 해주신 겁니까! 신관님들이 그간 저를 어떻게 보셨겠어요?”

“알 바냐.”

“이 $#^ 미친 %#^!”

최윤은 다시 감탄했다. 자신 정도의 천재도 발음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할 정도로 속사포 같은 랩이었다. 하여간 재능은 많은 녀석이란 말이야.

허나 계속 듣기에도 귀가 피곤해 윤이 말했다.

“눈치 못 챘을 테니까 법석 떨지 마. 너 눈도 금색이잖아. 여긴 네 의식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세계니, 너도 몰랐던 걸 그 사람들이 알아봤을 린 없겠지.”

“아!”

“이젠 알겠다만.”

“으악. 좀 나간 뒤에 말했어야죠!”

“네가 물어봐놓고?”

힐데베르트 탈레브는 합죽이가 되었다.

하여간 웃긴 놈.

최윤은 코웃음을 치곤 생각했다. 이제 놈도 정신을 차렸으니 이 환상에서 나갈 방법을 논의할 차례였다. 아쉽게도 힐데베르트가 기억을 되찾는 것은 조건이 아니었던 듯하지만, 문제엔 답이 있기 마련이니 이걸 어떻게든 털면 단서가 나올지도 몰랐다.

그 즈음 힐데가 윤의 손등을 검지로 툭 건드렸다.

시간이 있단 소식에 안심했나. 조금 전보다 낯빛은 좋아진 모습이었다. 표정에 감정이 다 드러나는 놈. 그게 늘 흥미로워 윤은 놈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이번엔 호기심이군.

과연 힐데베르트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윤. 그러면 말입니다. 사실 제일 궁금했던 건데요. 마을 분들이나 신관님들께 왜 답지 않게 친절히 대해주신 겁니까? 아, 싫었단 건 아니고요! 전부 사망한 분들인 거…. 처음부터 아셨잖습니까. 평소라면 시간 낭비처럼 여겼을 것 같아서요.”

“내가 친절했다고.”

“물레방아도 고쳐줬고요.”

“아.”

최윤은 헛웃었다. 어디서 오해가 발생했는지 알 듯했다. 그는 상황을 힐데베르트에게 어떻게 설명하면 좋을지 고민했다.

기실 친절했던 쪽은 자신이 아니었다.

따지자면 이 세계였지.

그것은 제가 이 낯선 세상이 힐데의 의식 기반으로 형성되었음을 확신하게 한 계기기도 했다. 아마 힐데베르트의 과거에서 실제 존재했던 마을의 인물들은, 최윤이란 이방인에게 본래 그토록 호의적일 부류는 아니었을 터다.

오히려 모두가 아이를 싸고 돌기 바빴단 점에서 더 적대적으로 나왔을 가능성이 높았다. 최윤의 신원이 보통 수상해야지. 제 인상이 대개 좋은 편도 아니고.

따라서 윤이 그들에게 보여준 태도는 상호주의에 기반해 그들이 제게 건넨 인사를 어느 정도 선에서 돌려준 것정도에 불과했다. 물레방아만 해도, 힐데의 친구란 여자애가 여기저기 돌리며 준 빵이 너무 맛이 없길래 제분 품질을 개선해준 게 전부였으니.

당연히 최윤은 이 마을의 누구에게도 정을 붙이지 않았으며―어차피 환상이고―, 여전히 힐데베르트 탈레브를 제외한 아무도 기꺼워 하지 못했다.

다만 무시해도 됐을 일도 차분히 접근했던 까닭은.

그 또한 이 세계의 대전제 탓이다.

이 마을이 실로 제 연인의 일부라면. 반쯤 고장난 물레방아가, 목초를 뜯어먹던 어린 양이, 수다스럽던 여자애와 꼬장꼬장한 할멈이 힐데베르트가 맞다면.

전부 제거할 시 환상도 자연히 무너질지 모르지.

허나 그렇게 했을 때 이 섬세한 놈의 뇌에 타격이 되지 않으리란 보장은 어디 있는가. 괜찮은 도박이었지만 그럼에도 잘못 걸었을 경우 잃을 게 너무 컸다.

최윤은 이 세계가 환상임을 깨달았음에도 여전히 이곳 사람들에 대한 제 친절에 기뻐 하는 힐데베르트 탈레브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한다. 어차피 거짓이며 자기 위안 아닌가. 현실에서 좀체 눈 돌리지 못하는 본인부터 인지했을 사실이다.

윤은 힐데에 대한 자신의 욕망이 그가 살아 있어 이 형태로 존재하며, 변화하고, 의미 있는 것임을 안다. 그래서 놈을 살려내려 더욱 애를 쓰게 됨을 안다. 혹 연인이 저보다 먼저 죽는다면 소중한 것은 여전히 과거의 힐데일 뿐, 그 형상을 딴 거짓은 아닐 터다.

다만 힐데베르트는 자신과 다른 존재이므로.

윤은 또한 안다. 제 연인은 생을 살아감에 따뜻한 온도와 부드러운 바람, 과실을 얻고 그늘이 되어줄 사과나무와 하늘을 수놓는 별을 필요로 한단 것을. 그리고 함께 했던 이들이 전해준 기쁨과 아픔을 그는 망각이란 축복으로 덮어 생존할 수 없는 생명임을.

이 세계가 진실로 죄 소멸된 것에 불과하다 해도, 그럼에도 힐데베르트에게는 이곳이 소중할 것임을 윤은 이해할 수 없었으나 받아들여야 했기에.

최윤은 그 사실을 간단명료하게 설명했다.

연인이 아무리 멍청해도 알 수밖에 없도록.

“하루가 다 되도록 네가 그대로면 나도 어떻게든 수를 써봤겠다만. 일단 저 시체들은 네 것이고 너는 내 거니까.”

힐데베르트가 입을 살짝 벌린다.

이 상처투성이의 감성 넘치는 외계인과 연애라는 명목으로 교제하는 것은 최윤의 명확한 세계엔 불쑥불쑥 난제로 다가왔으나.

글쎄. 시간 낭비라기에도 지나치게 곱지 않은가.

윤은 그에게 제 입술을 맞물렸다.

마을을 떠날 때가 되었다.

윤과 대화하면서 귀환할 가능성이 높은 안이 하나 생겼다. 시도해볼 만하다 느낀 힐데는 마을 분들께 이별 인사를 건네기로 했다.

만약 그 안마저 실패로 돌아간다면 새 방법을 찾아봐야겠지만 그건 그때 고민할 일이고. 실패한대도 이 마을을 떠나긴 해야 했다. 제 과거엔 이곳의 미래가 없었으니까. 이 거짓된 세계에 기쁘게 눌러 앉기엔, 이후 만난 이들도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다.

모두가 소중했다.

하루 아침에 열 배를 넘어가는 나이를 먹으니 알던 사실도 새롭게 느껴졌다. 삶이 고단했던 것은 너무 많은 이들을 사랑하게 되어서지만 풍부했던 것또한 그들 덕이었음을. 하여 자신은 넘치는 욕심으로 길을 다시 걸어가야 할 것임을.

윤은 먼저 그곳으로 보내고, 힐데는 신전 앞에서 저를 배웅하러 모인 이들과 차례로 인사했다. 마을 분들이 전부 와주었기에 이별엔 꽤 시간이 걸렸다.

허나 힐데는 그들과 부지런히 이별을 나누면서도 묘한 불안감을 느꼈다. 그래도 한두 명은 말려주겠지 싶었는데 누구도 제 가출을 제지하지 않았다.

인생 잘못 살았나? 아니죠?

슬슬 노인처럼 눈이 떨려오는데―사실 여기에서 실제 나이는 자신이 가장 많았기도 했다― 누군가가 힐데의 팔을 두드렸다.

“얘야. 가져가거라.”

머리카락이 희끗희끗한 여성이 부드럽게 말했다. 언젠가 자신이 그녀에게 선물한 뒤로 매일 같이 짚고 다니던 지팡이를 내밀면서.

“길을 인도하는 덴 지팡이만한 물건이 없지 않든. 내 지팡이는 새로 사면 그만이다만, 세상에 신목으로 만든 지팡이가 얼마나 되겠느냐? 험난한 길을 가게 됐으니 운이 필요한 너에게 주고 싶구나. 무거우면 팔아 여비로 쓰거라.”

아.

힐데는 눈물을 겨우 참았다.

역시 이해되지 않았다. 이토록 신실하고 선량했던 이들이 없었는데 대체 어째서. 왜 불운은 하고 많은 마을중에서 이곳을 찾아왔는가.

보낼 수가 없어.

보내고 싶지 않다.

아직은, 영원히….

“아이고. 좋은 날에 왜 이리 울어! 키는 다 컸는데 눈물만 많아서는.”

그녀가 멀대같이 커버린 자식을 끌어안고 등을 도닥였다. 옆에서는 오랜 친구가 코를 훌쩍이는 소리가 들렸다. 힐데베르트는 신관의 어깨에 투명한 액체만 떨어뜨리다, 어렸을 때처럼 그녀가 눈물을 닦아주자 정신을 차렸다.

그럼에도 가야 했다.

이들이 이렇게 고마운 사람들이어서.

더는 그들을 기만해선 안 됐다.

“감사합니다. 하지만 이건 역시 당신께서 쓰세요.”

힐데는 지팡이를 다시 여성의 주름진 손 안에 쥐어주었다. 그리고 여태 먹은 나이만큼 의젓하게 웃으려 애쓰며 덧붙였다.

“전, 이제 기댈 수 있는 사람이 있어서 괜찮습니다. 조금만 더 멀리…. 세상을 보고 돌아올게요. 잘 지내시고요!”

힐데베르트는 인사를 마치자마자 미친 듯 뛰었다.

한번이라도 돌아보면 멈출 것 같아서.

언덕 위에선 윤이 나무에 등을 기대고 있었다.

검은색 배저 군복을 깔끔하게 입은 남자. 기억을 잃고 만날 때면 지독히 잘생겼단 인상만을 남기는. 그의 팔을 힐데는 무작정 잡고 끌어당겼다.

“왔, 어쭈?”

“좀 비켜보십쇼!”

재회의 기쁨이나 아련함은 없었다.

심장이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았으니까!

지독한 거부감이 심장을 쥐어짤 정도였다. 힐데는 그 덕에 확신했다. 이것을 해하면 이곳에도 종말이 찾아오리란 사실을!

힐데베르트가 발검했다.

최윤은 신목이 가짜 세계수처럼 나무 형태이며, 이 마을에서도 가장 신성시 되는 나무이고, 환상 속 제 기억도 여기서 시작되었음에 주목했다.

허나 자신이 믿음을 얻은 근거는 그와 달랐다.

이제는 까마득하게 오래된, 미숙했던 시절의 저도 이것에서 힘을 얻어내며 끝을 고했으니, 나아가려면 신목을 죽여야만 하는 것이다!

힐데베르트 탈레브가 제 미성년을 베었다.

먼저 정신을 차린 쪽은 최윤이었다.

그는 지독한 두통에 드물게 두 눈을 깜빡이면서도 상황을 파악하려 노력했다. 일단 앞엔 거대한 나무 뿌리에 몸의 반 이상이 구속되어 있는 힐데베르트가 있었다. 그래. 저게 흡수당하는 중이 아닐까 싶어서 형체변동무기로 만든 칼로 뿌리를 베어내려다가….

힐데베르트부터 깨우는 게 나을 것 같길래 얼굴에 손이 닿자마자, 인간의 시간 감각을 무너뜨리는 징그럽게 긴 환상에 잠식되었다.

윤은 어느새 나동그라져 있던 칼을 다시 쥐었다.

분명 녀석이 신목을 가른 덕에 환상에서도 벗어난 듯한데 정작 놈은 아직도 잠식되어 있다니. 이상이 발생했는가? 윤은 미간을 찡그렸다.

어쨌든 힐데를 떼어내는 게 우선일 성싶었다.

최윤은 다시금 제 연인에게로 다가갔다.

그 순간 힐데베르트 탈레브가 고요히 눈을 떴다.

화려한 광경이었다. 분명 나무 밑동의 틈새로 진입했건만 위쪽 공간은 뚫려 있었다. 빼곡하게 들어찬 황금빛 잎새들이 중력을 받고 하나둘 솔솔 떨어진다. 별만이 헤이는 밤이란 이런 것인가. 그럼에도 가장 선명한 빛은 이 팔을 뻗으면 닿을 곳에 존재한다니.

그것이 자신을 마주하며 말했다.

“아. 윤. 괜찮으십니까?”

최윤은 어이가 없어졌다. 지금 누가 누구한테 할 소린지. 여전히 뿌리에 묶인 힐데를 향해 턱짓하자 당사자가 눈을 접어 푸스스 웃었다.

“전 괜찮습니다. 걱정되면 도와주시고요. 당분간은 별 일 없을 거라 다가오셔도 됩니다.”

“어떻게 알지?”

“비명을 지르고 있어서요. …사역 실패의 반작용이 꽤 고통스러운 모양입니다.”

이젠 감정 전이를 다신 못하게 됐음에도 윤은 납득했다. 이 나무가 폐령을 사역하다 놓친 잭 블랙처럼 줄다리기의 대가를 치르고 있단 뜻 아닌가.

“반응만 보면 치명상 같으니까, 당장은 절 어떻게 못할 겁니다.”

“그러냐.”

윤은 형체변동무기를 날카롭게 벼려 힐데를 뿌리에서 떼어냈다. 녀석은 유려하게 발을 디뎌 제 곁에 착지했다. 비록 승자치고 유쾌한 안색은 아니었지만.

최윤은 놀라지 않았다.

윤은 힐데가 그곳에서 신목을 벗 삼았음을 안다.

그것이 일전에 재를 얻은 나무는 아니었다 해도.

최윤은 형체변동무기를 다시 약지에 반지 형태로 수납한 뒤, 언제나처럼 팔짱을 끼곤 연인에게 차분히 물었다.

“힐데베르트. 시간이 지나면 이 나무도 네가 신앙해온 모습이 될지도 모르지. 원하냐?”

최윤은 그 말을 꺼내면서도 전혀 죄책감을 느끼지 않았다. 이걸 결국 처리하지 못해 센터코어가 엉망이 된다 한들 그게 자신이 신경 쓰는 이들의 위협으로 직결될 린 없을 테니까. 이미 주요 코어마다 안가를 두어, 상황을 외면하는 것도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힐데베르트는 눈을 크게 뜨다 푸핫 웃었다.

“예. 원합니다.”

“그렇군. 도와줘?”

힐데가 다가와 손끝으로 윤의 이마를 밀었다.

“아니요.”

장난스러운 표정. 최윤은 긴 숨을 내쉬었다.

“그럴 줄도 알았다.”

“댁은 몰라도 저한텐 이 도시에 소중한 사람들이 수백 명은 있다고요! 센터코어가 최적방어선입니다. 무조건.”

“용케 다 챙기고 산다.”

“그중에 제일 잘 챙겨드리잖아요. 질투하십니까?”

“어.”

“…할 말 없게 만들지 좀 마십쇼.”

힐데가 뒷목을 긁었다. 윤은 내심 헛웃었다.

좋아하면서.

힐데베르트는 열이 오른 낯짝을 숨기려는 듯 돌아서더니 일부러 호들갑을 떨기 시작했다. 얼핏 장사꾼처럼 보일 만큼.

“그러면! 일단 나가서 사령관님께 상황 보고하고 폭탄도 추가로 설치해야겠습니다. 얼마 안 됐겠죠? 너무 지났으면 예현이랑 아미도 걱정중일 텐데요.”

최윤은 모든 일이 끝나고 이예현에게 깨질 자신이 더 걱정된단 말은 굳이 하지 않았다. 상호 친구도 없는데 죽이기야 하겠나. 이게 날 지켜주기도 할 테지.

지켜줄까?

저쪽에 낼름 안 붙으면 다행인데.

“윤?”

의심스럽게 보는 시선을 눈치 챘는지 힐데가 턱을 갸웃거렸다. 이젠 놈이 자신만큼 정력 좋은 애인은 다시 만나기 어렵다는 사실을 적절할 때 기억해내길 바라야 했다. 지금 고민한다고 해결될 일도 아니고. 최윤은 고개를 내저었다.

“아무것도 아니다.”

“그럼, 갈까요.”

멈칫하던 힐데가 먼저 발을 디뎠다.

윤은 그 뒤를 한 걸음을 두고 따라가며 확신했다. 평소였다면 왜 그러냐고 짧게라도 확인해 봤을 텐데. 아무렇지 않은 척하지만 여전히 속은 썩어가는 중인 것이다. 주변 사람의 보행 속도를 신경 쓰지 못하는 점도 그렇고….

힐데베르트 탈레브라는 개체에 대해 생각해 본다.

그는 연약한가. 그럴 터다. 이백 년이 넘는 세월을 생존해 왔음에도 저토록 감정에 쉽게 휩쓸리고 자주 눈물을 흘리는 이가 많진 않을 테니까. 

그렇다면 나약한가. 문제는 이곳에서 시작된다. 힐데베르트가 삶을 살아가는 태도가 나약하다 표현되는 것이었다면, 그와 자신은 영원히 환상 속 세계에서 빠져나오지 못했을 테니. 그토록 안온하고 정교하며 그에게만 친절한 세상이 또 어디 있으랴.

적어도 현실에는 없다.

오랜 친구중 하나를 죽여야만 했던 이곳엔 없다. 소중한 전우들을 떠나보내야 했던 이곳에는 없다. 그 정도 강함을 지니고도 낯선 언어와 맞지 않는 문화, 개인의 힘으론 해결 불가능한 인과에 스스로를 구겨넣어야 했던 이 세계에는 없다.

그럼에도 힐데베르트가 택한 세상은 이곳이다.

그렇다면 힐데베르트 탈레브는 단단한가. 그보다 강한 이도 드물긴 하겠지. 허나 그것이 그가 아픔을 느끼지 못한단 뜻은 될 수 없다는 점에서.

끝없는 모순. 어리석음. 미련함.

최윤은 자리에 멈춰 섰다.

손이 많이 가는 놈이다, 정말로. 하지만 이번에도 그것이 귀찮지는 않았다. 되려. 최윤은 풀리지 않는 문제를 붙든 채로 끙끙대는 제 꼴에 황당해 하면서도 그를 받아들였다. 왜냐하면, 윤은 제 연인의 모습이 이토록 다양해서 그가 매혹적인 존재임을 알기에.

힐데베르트 탈레브가 돌아 섰다.

윤은 과학동에서 자신이 종종 보여주던 모습대로 주머니에 손을 찔러넣었다. 그리고 평소처럼 덤덤한 목소리로 말했다.

“힐데. 이 대륙엔 ‘판도’란 이름의 거대한 사시나무 군락이 있는데.”

힐데베르트가 눈만 깜빡였다. 갑자기 무슨 소린가 싶으면서도 저 치라면 어련히 할 말이 있겠거니 하고 기다리는 것이다. 윤은 가볍게 웃곤 덧붙였다.

“사시나무는 무성 생식을 하는 대표적인 식물이지. 쉽게 말하자면 군락의 많은 나무들이 대지 위에서는 독립된 개체처럼 보여도, 유전자적으론 거대한 뿌리에서 뻗어져 나온 단일 개체란 뜻이다.”

“….”

“세계수엔 짝이 있었냐?”

힐데베르트가 일순 멈칫했다. 윤은 제 연인이 사실 보통 이상의 지성을 지녔음을 안다. 힐데가 주저하다 결국 답했다.

“아, 니요.”

“그렇다면 너의 생존이 곧 그 나무의 생존임을 뜻하기도 하겠군.”

힐데베르트 탈레브가 감히 세계수의 자식이라면.

말도 안 되는 논리적 비약이다. 힐데베르트는 인간에게서 태어났으며, 그와 세계수 간의 유전자 격차는 그와 자신 간의 격차를 우습게 넘어설 터다.

허나 그것이 당사자에게 중요한 문제는 아니겠지. 힐데베르트 탈레브는 세계수를 나무가 소멸한 지금까지도 신앙하며, 그의 자손 됨을 자랑스러워 하고, 무엇보다도 그 자신이 늘 기적을 이뤄온 초인임에도 항상 기적을 염원하는 인간이고자 하였으므로.

금색 눈에 점점 생기가 도는 꼴을 보는 게 즐거웠다. 윤은 연인의 부스스해진 머리를 귓가로 넘겨주곤 언젠가 노신관이 신전에서 읊던 경구를 들려주었다.

[네가 누군가의 자손이라면 너는 그의 뿌리 혹은 가지일 터다.]

“….”

[고통과 기쁨으로 얻은 연륜은 나이테일 것이다.]

“….”

[그러니 너는 두려워 마라. 아이가 그 자신으로서 자립하는 것은 부모의 서글픈 기쁨이니.]

힐데베르트는 입술을 깨물었다.

연인의 감정 상태를 이젠 오랜 관찰로 인한 귀납적 추론으로 확률 높게 분석할 줄 안다고 여겨왔으나, 윤은 드물게 그 표정을 분별하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웃는 것 같기도 하고, 우는 것 같기도 하고.

고아에 뇌에 문제도 있는 제 애인이 마음에도 없고 근거조차 부족한 말을 저에게 미쳐 떠들어대는 꼴이 이상한가. 그러면서도 눈시울이 붉어진 모습은 어떤 감동을 받은 듯싶기도 했다. 와중에 입가는 바보처럼 올라가 있질 않나.

볼수록 평소의 명징한 감정 표현과는 달랐다.

우스꽝스러운 얼굴.

윤은 그 멍청한 낯짝이 묘하게 성에 차서 힐데의 턱을 손끝으로 단단히 잡은 뒤 그를 뇌리에 새겼다. 정신을 차린 놈이 제 손을 멋대로 떼어낼 때까지.

“아, 좀요.”

투덜거리던 힐데가 또 한 번 윤을 끌어 안았다.

기실 힐데의 기쁨과 슬픔의 정도를 이해하는 것이 어려울 때는 이번 외에도 종종 있었지만, 놈의 마음 자체를 정의하는 것은 아주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촉감과 체온을 공유하노라면 그 욕구는 누구라도 알 수밖에 없는 것이었으므로.

언젠가 서로 이마를 맞닿았을 때부터 그러했듯이.

최윤은 만족스럽게 결론내렸다.

이건 나를 너무 사랑하는군….

묘한 식욕을 느끼며, 윤은 힐데베르트의 엉덩이를 툭툭 두드렸다. 놈은 이제 와 엉덩이의 순결을 보호하려는지 손을 뒤로 뻗었다.

웃음을 겨우 참고 최윤이 속삭였다.

“자. 이제 네 혈육의 심장을 칼로 찌르러 가자고.”

“근데 꼭 그런 식으로 말해야 합니까?”

“인간은 원래 가족과 상잔하면서 크는 법인지라. 너도 봐서 알겠다만.”

“…하지 마십쇼.”

“이예현처럼.”

“하지 말랬지.”

힐데베르트 탈레브가 정색했다.

최윤은 맑게 웃었다.

폭탄이 계속해서 터졌다. 화약 냄새와 연거푸 이어지는 굉음은 일반인이라면 감당하지 못할 수준으로 감각기관을 자극했다. 이런 상황에 익숙한 윤에게도 고역일 정도였지만 나무가 죽음을 직감한 듯 마물을 끌어들이고 있었기에 반드시 오늘 끝은 봐야 했다.

힐데베르트와 함께 나무 밑동을 나왔을 때만 해도 여유 시간을 열두 시간 정도로 짐작했으나, 현재는 메인 코어 장치가 박살날 때까지 다섯 시간이 남아 있었다. 그 전에 나무를 제거해 크리처들의 사역이 풀리면 모두 살겠지만 아니라면….

예현은 무전으로 온갖 사이비 종교에서 종말설을 떠들어댄다며 신경질을 냈다. 폭탄 설치가 완료되자 현장에서 그가 할 일도 소멸돼 기민하게 여론 관리로 목표를 변경한 것이다. 윤은 난생 처음으로 사이비 종교에 고마움을 느꼈다.

이예현은 지금은 상황이 안 좋으니 넘어가겠지만 나중에 두고 보자는 말로 일단 힐데에 대한 안건을 넘겼다. 이젠 그 안 좋은 상황이 벅찰 만큼 오래 지속되어 이예현이 문제를 자연스럽게 잊길 바라야 했다. 가능성이 높진 않겠으나.

어쨌든 상황은 그럭저럭 괜찮았다.

고온에 나무가 타들어가진 못했지만 폭발로 인한 물리적 파괴력은 영향을 준 게 보였다. 나무가 연신 흔들리며 땅이 울었다. 저 나무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쓰러지는 게 문제가 아니었다면, 동시에 모든 폭탄을 터뜨려 임무를 끝낼 수도 있었을 터다.

윤은 배저로선 친구와 마찬가지로 무용지물이 된 채였으나 과학자로서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현장에 남아 있었다. 뭐, 개인적인 용무도 있었고.

—솨악!

마침 그 개인적인 용무가 또 한 번 날뛰었다.

오러는 상당한 거리를 두고서도 바람을 일으켰다.

바람이 실어온 고온은 윤의 머리를 삶는 듯했다. 제 애인이 삶은 계란이 되었으면 하나 보지. 최윤은 짜증이 났지만 검술 연습에 심취한 게 분명한 놈을 영 말리진 못했다. 넓은 공터와 거대한 과녁. 힐데의 실력에 이 정도로 맞는 장소는 한동안 없었을 테니.

오로지 힐데베르트 탈레브만이 폭탄보다 파괴력 있는 무기였기에 전장에의 사용도 허가되었다. 윤은 도끼처럼 나무에 흔적을 내는 검을 조용히 관찰했다.

오러가 폭발을 안고 목표로 달려간다.

최윤은 그것에서 무기로서의 살상력을 발견하기 전에 우선 존재감을 느꼈다. 화재가 나면 그 위험을 깨닫기 전에 일단 불을 마주하게 되듯이.

그 직후에야 윤은 아름다움을 보았다.

저것을 상대하는 게 자신이었다면 당연히 위협을 느꼈겠으나. 여직 원한을 사진 않은 입장에서 힐데의 오러는 시선을 떼지 못하게 하는 구석이 있었다. 

새하얀 광채와 우아한 궤적. 날개에 붉은 빛무리가 섞인다. 어루어져 타오르고 점점이 떨어지는 불티를 보면 신이 힐데베르트를 대리 삼아 불꽃놀이를 하는 듯했다. 갓 재투성이에서 피어오른 불사조의 모습이 저러했을까.

경이가 춤을 춘다.

최윤은 헛웃음을 터뜨렸다. 분명 자신은 신을 믿지 않음에도 이 순간만은 무엇을 확신하게 되는 까닭에. 이토록 사람들을 취하게 할 이야기도 없으리란 것을.

저것이 이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괴이다.

최윤은 문득 잭 블랙과 임무 전에 나눴던 대화를 떠올렸다. 사역의 과학적 원리에 대해서는 저도 잘 모르겠지만, 그것이 개체간에 정신적인 서열을 확립하는 투쟁일 순 있을 듯하다고. 사역에 조예가 깊은 자의 의견이었기에 유념했었다가 방심하긴 했으나.

돌이켜 보면 힐데가 그 환상에서 빠져나오는 데에 윤이 결정적으로 제 연인을 도운 부분도 없었던 것이 사실이다.

신목을 제거한 것도 놈의 개인적인 판단에서였고, 그 세계에서 정신을 차린 것도 제 수작이 아닌 양 한마리의 죽음 덕이었으며, 이전에도 힐데는 정신적인 공격에 자주 휩쓸리는 편이었지만 어떻게든 그것을 헤쳐나오곤 했으니.

처음부터 크게 걱정되지 않았다.

힐데베르트 탈레브가 더 위대하다.

그 사실을 모르는 자는 본인뿐이다.

스스로 무너질지언정 누구도 그를 꺾어낼 순 없는 것이다. 불사조 같은 오러가 몇 번이고 다시 무에서 태어나듯이.

윤은 한 신화를 고요히 관찰했다.

어쩌면 놈이 검에 홀린 것처럼….

임무는 새벽이 다가오기 전에 종료되었다.

타이탄들은 일부 크리처를 사역해 바람을 잡아서 크리처들을 흩어지게 했다. 다만 잭은 예외로, 그는 나비 형태의 기후 조정 크리처를 동원해 현장에 비를 퍼부었다. 저건 마음만 먹으면 소방관들을 죄 실업자로 만들 수도 있겠군. 윤은 그런 생각이나 했다.

쏴아아―.

힐데는 폭우가 쏟아지는 내내 자리를 지켰다.

덕분에 놈을 수거하는 것이 남아 있는 목적이었던 윤도 처량하게 현장에 머물러야 했다. 물론 그는 제 멍청한 애인처럼 빗물에 얼굴을 때려맞아줄 생각은 없어 거대한 우산을 든 채로 힐데베르트가 돌아오길 기다렸다.

집에 돌아가서 샤워나 하고 쉬고 싶은데 말이지.

연애란 역시 쉽지 않은 것이다. 윤은 그렇게 결론지으면서도 이틀 연속으로 힐데에게 렉시크누들을 만들어주기로 결정했다. 그 냄새가 고역인 저로서는 많이 양보한 셈이다. 힐데베르트는 제 고충을 영원히 이해 못하겠지만.

사실 내 이해력이 더 높은 것 아닌가?

몇 차례 이상한 생각을 하던 중 비가 멎었다.

허나 힐데는 여전히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못했다. ‘인류를 구원한 용사 힐데베르트 탈레브’ 란 팻말을 만들어 근처에 설치하면 괜찮은 동상이 되겠는데.

애도 시간을 적게 주진 않았지.

판단 내린 윤은 우산을 정리한 뒤 힐데베르트에게 다가갔다. 전혀 미안하진 않게 됐다만 놈을 영원히 이곳에 둘 수도 없는 노릇이었으니까.

진흙탕이 된 공원 땅을 밟는 군화가 걸음마다 철퍽 소리를 냈다. 시민들을 대피시키고 폭탄으로 일대가 정리되지 않았다면 홍수로도 일이 크게 터졌을 터다.

힐데베르트는 예리한 감각으로 그 소리를 들었을 만한데도 미동하지 않았다. 저건 이번에 애인을 죽은 나무로 갈아치울 셈인가. 최윤은 의심하며 놈의 옆에 멈췄다. 힐데베르트 탈레브는 여전히 기둥 꺾인 나무 곁에서 크리처 사체에만 눈을 고정한 채였다.

귀신 같은 몰골이군.

이토록 어두운 곳에서도 명확히 드러나는 파리한 안색을 관찰하며 윤은 판단했다. 엉망이 된 머릿결과 특유의 광채 덕에 영영 괴로움을 가리지 못할 금안.

최윤은 드물게 긴 숨을 내쉬었다.

“죽기 전에 감정이라도 쏟아붓던?”

힐데베르트 탈레브가 움찔했다.

“딱 그런 몰골이다만.”

힐데는 겨우 고개를 내저었다.

“아뇨. 감정은, 오히려 제가….”

다물리는 입.

허나 엎어진 물이었다. 최윤은 상황을 눈치 챘다. 아니, 사실 임무 전에 힐데가 보여준 태도에서부터 이렇게 될 줄을 어느 정도 짐작했더랬다. 이놈이 늘 무엇에 약하며, 무엇이 그를 망설이게 하는지정도는 지켜보는 누구에게나 명백한 것이었으므로.

우리Cage를 사랑하는 괴물.

결국 최윤이 말했다.

[그대에게 영원한 축복을.]

“…윤?”

[영원한 휴식을.]

읊조리듯 장송이 이어진다. 허나 윤은 나무를 보지 않았다. 그는 나무가 지겨웠고, 실험실에서가 아니면 한동안은 이 크리처를 다시 볼 생각이 없었다.

힐데가 이것을 쉬이 놓지 못할수록 더욱.

 대신 윤의 시선을 독차지한 것은 힐데베르트였다. 머리를 손수 넘겨 정리해주는 수고의 대상도, 최윤이 진실로 소유한 것도.

진심이라곤 죄 갖다 버린 장송이었으나.

[모든 뿌리가 안식의 장소에 이르느니.]

“….”

[편히 잠드소서.]

그것이 문제 되진 않았다.

윤은 조용히 입술을 짓씹는 연인에게 물었다.

“하고 싶은 말 아니었냐?”

이 장송을 건네는 이는 자신이 아니므로.

힐데는 그렁그렁해진 눈으로 애인을 마주하다가, 고개 숙여서 밭은 호흡을 연신 내뱉다가, 한 손으로 얼굴을 가린 뒤에야 중얼거렸다.

“이걸, 댁이 장송해도 되는 겁니까?”

흐느낌 섞인 목소리. 윤은 팔짱을 꼈다.

“문제가 되나? 애인이 영 심약해서 못한 말 대신 해줬을 뿐인데.”

“이것의 죽음을 슬퍼해도 된다고요. 제가.”

그렇게 많은 사람이 죽었는데도.

윤은 연인이 추하게 덮은 말을 분명히 짐작했지만, 무시했다. 자신에겐 그게 늘 힐데베르트만큼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기에.

“무슨 상관이야. 이런다고 죽은 놈들이 따지러 올 것도 아닌데.”

이런 인간도 있는 법이다.

성에 안 차도 어쩔 텐가, 몸도 마음도 다 섞었는데.

힐데가 돌연 윤을 껴안고 중얼거렸다.

“진짜 단순한 인간….”

빗물에 몸을 담근 성인이 자신을 끌어안는 감각을 학습한다. 분명 군복에 방수 처리가 되어 있음에도 축축했다. 녀석이 어깨에 떨어뜨리는 눈물 또한.

사랑이란 축축한 것인가?

그냥 봐도 멀쩡한 추론 같지는 않았으나. 윤은 이 가설이 의외로 마음에 들어 마찬가지로 힐데를 끌어안고 놈의 등을 두드려주었다.

그렇게 얼마쯤 시간이 지났을까.

힐데베르트가 고개를 들었다.

허나 그 시선은 윤과 눈이 마주치기 전에 어딘가로 향했다. 뭐지. 최윤은 살짝 고개를 돌려 자신도 그를 확인했다.

여명이 밝아 오고 있었다.

그렇다 해도. 잠을 적게 자는 윤은 흔히 봐온 자연 현상에 감명받지 못했다. 대신 사람을 껴안고서 저 외의 무언가에 집중하는 애인에게 괘씸함을 느꼈다. 이게 남의 옷자락은 눈물 콧물 빗물로 물들여놓고. 침대 위였으면 바로 해결했을 것을.

윤이 심통 맞게 말했다.

“뭐 하냐.”

힐데베르트는 머리를 움직이지도 않고 답했다.

“아. 느낌이 좀 간질간질해서요. 밤이 오는 건 자주 봤었는데. 아침 해를 같이 보는 건 처음이지 않습니까?”

“나랑 했던 숙영은 다 잊었냐?”

“그땐 이런 사이는 아니었으니까. 기억 안 나죠.”

역시 이거랑 사귀어서 손해를 보는 건 전적으로 나 같은데 왜 다들 반대로 확신하는 거지. 윤은 어느 날 반지의 상대가 힐데베르트임을 알게 된 과학자들이 보여준 경악스런 반응을 떠올렸다. 당시에는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았으나.

조금 짜증이 난 윤이 말했다.

“새삼. 난 너 잠든 동안 수백 번은 봤어.”

“그건 댁이 사람을 너무 괴롭혀서잖아요!”

힐데베르트가 붉어진 낯짝으로 항의했으나 알 바 아니었다. 그는 으 소리를 내며 윤에게서 떨어지더니 돌연 화제를 바꾸었다.

“저희 여행이라도 가죠.”

“갑자기?”

“전부터 같이 바다를 볼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단 말입니다. 고생 좀 했으니 휴가도 길게 나올 것 같고요.”

“너는 그렇게 세상을 많이 봤으면서 아직도 보고싶냐?”

그건 나쁜 제안은 아니었다. 평소와 다른 환경에서 업무를 중단하고 쉬는 것이 리프레쉬에 도움이 됨은 윤도 알고 있었으므로. 다만 그건 기능적인 면이고. 힐데도 그런 이유에서 한 제안일 리는 없었다. 윤은 순수하게 신기해졌다.

힐데베르트는 드물게 코웃음을 치더니 대답했다.

“하지만 윤과 본 적은 없으니까요.”

최윤은 두 눈을 깜빡였다.

그리고 찰나에 판단했다. ‘졌다’고. 허나 승부에서 이겼음에도 시선을 마주치지 못하는 쪽은 힐데였다. 놈은 성급히 윤의 손목을 붙들었다.

두 손이 뿌리처럼 얽히고….

힐데베르트는 무작정 앞을 향해 뛰어갔다.

일도 끝났는데 갑자기 왜 뛰는 거지?

윤은 그런 생각도 들었으나.

이 비정형적인 찬란에 어울리지 못할 것도 없었다.

고작 새벽이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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