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랙배저 2차

[예현힐데] 파도의 행로 - 2

9디페 예정

예현이 혼자 잠들지 못하는 탓에 힐데는 예현의 방에 임시로 매트리스 하나를 옮겨 두었다. 

집에 돌아온 첫날, 오두막으로 돌아가려던 힐데베르트는 맨 발로 그를 쫓아 나온 예현을 보고 기함했다. 어르고 달래 침실에 아이를 넣어둔 힐데베르트는 오두막에 돌아와 밀린 연락을 처리한 뒤 기절하듯 잠들었다. 생각보다 퇴원 절차가 피곤했던 건지 꿈 한조각도 없었다. 짧지만 깊은 잠을 자고 일어나 예현의 집에 돌아온 힐데는 한숨도 자지 못한 듯 수척한 얼굴로 소파에 옹송그리고 있는 예현을 보고 이마를 짚었다.

“너무 넓어요.”

허스키한 목소리가 더 잠겨 있었다.

오두막에 아이를 데려오는 것보단 이 곳에 있는 게 기억이 돌아오는 데에 더 도움이 되지 싶었다. 며칠 같은 방을 써 보니, 예현은 금세 잠들지만 잠귀가 예민했다. 힐데베르트가 핸드폰을 만지거나 잠깐 물이라도 마시려고 일어날라 치면 눈을 반짝 뜨기 일쑤였다. 게다가 아이는 깨면 아침까지 다시 잠들지 못했다. 힐데베르트는 엉겁결에 통잠을 자게 되었다. 하소연을 들은 카이로스는 ‘효자 아닌가!’ 같은 반응이나 해댔다.

그 밖에도 힐데베르트가 예상치 못한 육아적 난관은 순차적으로 찾아왔다. 예를 들면 섭식 문제 같은 것이었는데, 한번 맛을 보더니 자꾸 초콜릿만 먹으려 들어서 설득에 애를 먹었다.

아니면, 청결 문제라거나… 그 녹음을 듣고 났더니 직접 씻겨준다는 건 상상을 할 수가 없어서 대충 비누칠과 헹궈내는 방법을 알려주고 욕실에 밀어 넣었는데, 물소리만 들리고 한참을 나오지 않기에 문을 두드려보니 등을 못 닦아서 몇분째 버둥거리고 있었다. 비누칠을 하는 동안은 수돗물을 꺼두라고 가르치며 하얀 등을 살살 문질러 주었다. 근육이 조금 빠진 살갗이 말랑하게 눌렸다…. 정말 잘못하는 기분이 들어 아이의 몸을 제대로 보지 못했다. 예현이 말은 안 했지만, 얼굴이 시뻘게졌을 것이다.

새뮤얼의 말이 맞았다. 살면서 겪으리라고 생각하지 못한 종류의 일들 투성이었다.

그래도 힐데베르트는… 싫지 않았다. 

그런 하나하나를 배워가면서, 예현은 정말 본 적 없을 만치 맑게 웃었다. 짜장면을 먹다 입가에 묻힌 것에 웃고, 초승달 모양 단무지가 여러 개 쌓이는 것에 웃고, 오래된 영화를 보다가도 웃었다. 망해버린 힐데의 요리에도, 언젠가 아미가 장난으로 사두었을 것이 분명한 우스꽝스러운 스웨터에도….

한 번도 보지 못한 이십 대 언저리의 미소가 아름다웠다.

미래의 자신이 지금을 생각하며 웃으리라고 확신할 만큼….

부끄럽게도, 대자의 망각은 자신에게까지도 축복일지 모른다고, 힐데베르트는 생각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하루 종일 집에서 예현을 돌보고만 있을 순 없었다. 

요우가 모든 일을 계속 떠맡을 순 없기 때문이었다. 물론 무엇보다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는 것이 바로 힐데베르트였다. 요우는 그답게 짜증을 내면서도 나름 그를 배려하여 힐데가 결정해야 할 일들을 최소한도로 남겨두는 식으로 일을 처리했다. 덕분에 힐데베르트가 직접 일을 처리해야 할 시간은 확연히 줄었다. 예현은… 대외적으로는 아직 혼수상태로 되어 있었다. 힐데는 예현에게 상황을 간략히 설명하며, 답답하더라도 집에서만 머물어 달라고 부탁했다. 예현은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침에 일어나 예현이 간단히 데워 먹을만한 음식을 해 두고, 아이의 배웅을 받으며 배저 본부에 마련된 임시 타이탄 사무실로 출근해 최대한 일 처리를 끝낸다. 동료들의 배려 덕에 늦어도 서너시면 집에 돌아올 수 있었다. 복도에서 마주친 새뮤얼은 ‘육아 단축 근무’ 같은 얘길 하며 웃었다. 그렇게 귀가해서 문을 열면 소파에서 뒹굴뒹굴하며 책을 읽거나 게임을 하던 예현이 벌떡 일어나 그를 반겼다.

같이 가사를 하고 잡담을 하며 시간을 보내다 보면, 예현은 한 두 가지 씩 제 과거나 시대에 대한 질문을 했다. 힐데는 그때마다 예현이 납득할 수 있을 수준의 대답을 했다. 강화신체(제 나이를 듣고 지은 표정을 찍어놨어야 했다), 인맥(“친구가… 저는 대체 어떤 인간이었던 거예요?” “그게 네 잘못은 아닐거야….”), 세 번의 전쟁(“맙소사…”), 그리고… 가족관계.

“아버지는 이승현, 어머니는 사샤.”

“이승현, 사샤… 어떤 일을 하셨어요?”

“이승현은… 그러고 보니 걔 요즘 뭐 하지? 신경을 못 썼네. 사샤는…”

그래도 사실만을 말해야지.

“생전에 어떤 일을 했는지는 잘 모르겠다. 오래 전에 세상을 떠났거든.”

아이가 커다란 눈을 깜빡였다.

“아버지는 그럼 살아 계신 거예요?”

아, 이런 부분이 있군.

“음, 맞아. 녀석도 강화신체를 받았으니까.”

“전쟁 때문에요?”

“그렇지.”

예현은 소매를 조금 만지작거리다 물었다.

“만나 뵈면 안 될까요?”

싫었다.

그리고 그 생각을 하고 힐데베르트는 스스로에게 조금 놀랐다. 자신이 싫고 말고가 여기서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음, 기억이 돌아온 뒤가 좋겠어.”

그래도… 그 놈은 갱생이 덜 됐다. 감히 예현을 보일 순 없다! 설령 애비라 해도!

“…네… 아무래도 걱정하시겠죠. 알겠어요.”

글쎄다… 그러나 별로 더 이야기 하고 싶은 주제가 아닌지라 힐데는 예현의 머리만 복복 쓰다듬었다.

“힐데는요?”

“나? 가족? 음… 난 신전에서 자랐어. 그러니까… 종교시설. 부모님이 일찍 돌아가셨거든.”

“그럼 가족이 엄청 많았겠네요.”

그런가?

“너무 오래되어서 기억이 잘 안 나.”

“어, 그럼…… 아니, 아니에요.”

“왜? 궁금하면 뭐든 물어도 돼.”

“아뇨… 이건 좀 여쭤보기 무서워서….”

“뭔데 그래?”

예현은 잠깐 눈을 굴렸다.

“…힐데는… 그럼 몇 살이에요?”

“어, 나?”

어쩐지 예현은 긴장한 듯 침을 삼키고 있었다.

“나는……”

“…….”

“…그, 미안. 진짜 기억이 안 나거든. 근데 200살은 넘었을걸….”

“…….”

“…….”

“…와.”

그 한 마디를 하곤, 예현은 얼떨떨한 표정을 하고 한참을 조용히 앉아있었다. 힐데베르트는 괜히 머쓱해져서 예현의 주변을 서성거렸다. 

그 외에 특이한 점이라면, 예현이 곧잘 게임을 즐긴다는 것이었다. 지난 3년간 본 적 없었던 모습이라 퍽 새로웠다. 주로 캐주얼한 퍼즐게임이나 복잡하지 않은 어드벤처 게임을 좋아했는데, 실력은 딱 꼬집어 말하기 애매했다. 머리를 써서 해결하는 거라면 손쉽게 해냈지만, 타이밍을 맞춰 누르는 것은 쥐약이었다. 그렇게 스테이지가 막혔을 때마다 예현은 게임기를 들고 힐데에게 달려왔다. 대부가 가뿐히 클리어해내는 것을 보며 예현은 연신 탄성을 내뱉었다.

“어떻게 이렇게 잘 해요?”

“버튼을 빨리 누르면 돼.” 

“안 되던데….”

눈썹이 축 처지는 예현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웃었다.

“컨트롤러에 익숙하지 않아서 그래. 넌 운동신경이 좋으니까 익숙해지면 쉬울걸.”

“운동신경이… 좋았어요?”

힐데베르트는 어떤 영상을 떠올리곤 머릿속에서 흩어버린다.

“응. 너는 검도 잘 다뤘어. 총이나 체술도 뛰어났지만.”

“검… 이요? 전쟁에서 검을 썼어요?”

의문을 갖는 것이 당연하다. 열병기의 시대에 냉병기를 들고 설치는 사람? 힐데베르트는 과거에 제가 포탈에 떨어진 직후 검을 뽑을 때마다 들었던 이야기들을 기억했다.

“쓰긴 썼는데, 항상은 아니었을 걸. 확실치 않네. 1차, 2차 전쟁 땐 나는 너를 몰랐거든.”

“그러면… 힐데와 제가 만난 뒤에, 제가 검을 쓴 적이 있나요?”

아이의 질문은 또 다른 기억을 불러낸다. 음. 희미하지만 짜릿한 기억이군.

“직접 봤지. 한 번이나마 나를 이긴 적도 있어.”

예현이 말도 안 된다는 표정으로 힐데를 바라보았다. 

“힐데가 해주는 이야기가 거짓말 같을 땐… 어떻게 해야 할지 정말 모르겠어요.”

“정말인데. 검을 쥐면 기억이 날지도 모르겠다.”

“진심이세요…?”

“물론이지. 나는…”

힐데베르트는 말을 고른다. 그러고 보면, 그때…

‘그럼 저 은퇴한 다음 알려주십시오. 꼭.’

그 부탁에 제대로 된 대답을 했던가?

“확신하거든.”

너도 검격을 피워낼 수 있을 거라고.

그 모든 것을 잊었을 아이는 그저 순하게 대부를 바라볼 뿐이다.

“어떤…?”

“예현. 바쁜 게 마무리 되면… 검을 가르쳐줄게.”

그 말을 들은 예현의 얼굴에 보드랍게 미소가 물들었다.

“…힐데가 가르쳐주는 거면, 좋아요.”

그날 저녁은 렉시크 누들 기본맛 밀키트였다. 분명 레시피를 잘 따라 만든 괜찮은 한 그릇이었는데, 예현의 표정은 전자렌지에서 타버린 냉동 피자를 보았을 때보다 좋지 않았다. 이상하다, 예전에 같이 갔을 땐 잘만 먹었는데…. 기억을 잃으면서 입맛이 좀 바뀐 걸까?


카테고리
#2차창작
페어
#BL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