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힐데] 사랑, 사람 3(완결)
‘내가 너를 늘 더 아끼는 건 사실이니.’
부정하지 못했다.
왜 부정 못했는지 의심할 여지도 없었다, 당시에는.
지나치게 선명해서….
힐데는 새벽부터 홀로 해파리와 마주했다.
들키면 이번엔 정말 목숨이 위험하겠는데. 힐데는 장난스럽게 생각했다. 그나마 ‘되도록’이라는 단서를 달아둔 게 다행일까. ‘한 번만, 한 번만 살려주자!’ 고 면피용으로 외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최윤이? 선임 말 좆으로 들었다가 박제당한 후임 배저 실존.
아니, 윤은 힐데베르트를 죽이지 못한다.
기실 문제는 그것이다.
우스운 생각은 우스운 과정에서 끝나야 재미있다. 헌데 이렇게 남의 즐거움을 툭 끊어버리다니. 예전부터 고민도 제멋대로 썰고 다녔을 때 악취미를 알아봤다. 뭐랬더라…. ‘그게 타의냐, 그럼?’ 이라고 했던가.
과분한 사수지.
힐데는 인정했다.
그리고 인정으로 인해 외로워졌다.
한심하게도 세상에 홀로 던져진 기분이었다. 다소 정이 없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 인간은 원래 인간이 매몰차긴 하지만. 내가 당장 죽겠단 것도 아니고 상황이 걷잡을 수 없어지면 그때만 곁에 있어달라는 건데. 카일도 날 버려서 더는 부탁할 상대가 없단 말이다.
아니, 사실 타인이 저를 안 죽여준다고 최윤이 자신을 버린 기분이 드는 것은 제정신이 아니다. 힐데는 판단을 객관적으로 내리려 애썼다. 그가 자신을 예상보다 훨씬 아껴서 이렇게 된 셈이니 원망할 일은 더 아니고. 어떻게 이 나이를 먹고도 채신머리가 없냐.
방법은 내일 천천히 생각해 봐야지.
힐데는 수조를 고요히 바라보았다.
베이지 색 해파리가 버섯 같은 모자를 쓰고서 세상을 둥둥 떠다녔다.
머리가 멍해지는 기분.
그간 힐데가 이 해파리를 찾아온 까닭은 물론 대부분이 이브에 대한 그리움이었지만, 의외로 다른 이유도 있었다. 종종 제 키의 두 배쯤 되어 보이는 해파리가 거대한 수조를 유영하는 꼴을 보면 사고가 둔해지는 느낌이 들 때도 있었는데, 그게 좋았기 때문이다.
계속 저걸 지켜보며 뇌를 비우고 싶어져서….
[나를 죽여줘야지!]
아. 너는 언제나 날 깨우는구나.
시야가 흐려졌다. 아직도 잊히지 않는 이브에 대한 원망은 아니었다. 그저 창자처럼 꼬인 덩어리로 부유하던 오랜 친구를 떠올린다.
[나는 네 손에, 저 권총으로 모든 걸 끝내고 싶어.]
내가 죽인, 너무나 그리우며, 동시에 조금 부러운.
윤에게의 요청은 이브의 안식이 저 또한 탐이 났던 탓이다. 힐데는 그 자신으로서 그녀가 제게 최후를 요청해온 심정을 이해했다. 하지만.
‘그 여자도 네 안에서 영원히 살겠군.’
그 말을 듣던 순간.
힐데베르트는 여전히 죽음이 끝이며 안식이라 판단한다. 부정하기에는 너무 많은 증빙을 직접 보고 겪어왔다. 다만 찰나. 윤의 속삭임에 심장이 뛰었음을 부정할 순 없었다. 그것이 너무도 오랜, 뭉그러진 욕망을 안고 있었기에.
그 자신이 아닌, 상대를 아끼는 사람으로서….
쿠콰콰쾅―!
일반인이었으면 고막이 터졌을 수준의 충격음이었다.
힐데는 반사적으로 그것을 확인했다.
높이는 7미터 정도. 걱정한 것보다는 조그만 개체다. 이 연구실은 높이가 10미터 정도 되는 듯하니 여기 묶어두면 다른 덴 피해가 생길 일도 없을 것 같았다.
그러나.
힐데는 놈이 제게로 다가오는, 아니, 다가오는 길목에 제가 서 있을 뿐인 상황을 일단 무시하고 파괴된 벽체를 흘끗했다.
뚫린 자리로 바닷물이 미친 듯이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다. 저 속도면 연구실에 물이 가득찰 때까지 5분은 걸릴까 싶은데. 충격에 깨어난 윤이 엘리베이터를 타고 연구실까지 내려오는 데만도 5분은 소요될 터다. 상황 끝내주는군.
힐데는 휴대폰의 전화 버튼을 누른 뒤 적당히 챙기고, 3미터 남짓한 거리에서 무아에게 검격을 날렸다.
쾅―!
거리가 8미터쯤으로 벌어졌다.
소드마스터의 검격으로 놈을 제거할 수는 없지만, 힘대힘으로 밀어내는 것은 가능하다. 그렇지 않으면 녀석을 기사들이 밧줄을 들고 대기중인 자리에 어떻게 유인하겠나. 사실 병력만 많다면 무아를 제압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고, 자신이라면 혼자여도 시간을 끌 순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시간이 없군. 윤이 빨리 산소통을 들고 와줘야 할 텐데. 여기에도 있으려나? 넓어서 뭐가 어딨는지 모르겠어, 미리 물어볼 걸.
힐데베르트는 주변을 둘러보며 무아를 몇 번 더 막아낸 뒤 시험 삼아 오러를 날렸다.
콰앙―!
오. 타격음부터 달랐다. 체액이 터져 나오지는 않았으나 강철 같던 껍데기가 살짝 파였다. 이제 파인 자리를 집중해서 공격하면 될 터다. 힐데는 곧 물이 코로 들이닥칠 상황에도 오랜 친구들을 떠올리고는 환호했다.
아싸, 내가 해냈다!
그게 숨이 곧 막혀오는데도 되긴 되더라니까?
힐데는 연말 송년회에서 일부러 매실주를 마신 뒤 동족들에게 무용담을 쏟아낼 계획도 다졌다. 자랑 한 번은 해야지. 키시스에게도 없던 얘긴데!
물이 허리까지 찬 상황이었으나 오러가 먹히자 긴장감이 풀렸다. 아마 그래서였을 터다. 아직도 수조 안을 둥둥 떠다니던 해파리가 눈에 띈 것은.
멍청한 생각이지. 저걸 풀어주는 건.
힐데는 마른침을 삼켰다.
지금 수조 속 해수까지 터져나오면 답이 없어. 내 폐활량이 남들보다 좋고 바다 수영도 잘하는 편이긴 해도, 윤이 아직 도착하지 못한 상황에.
하지만….
모르겠다.
하늘 같은 선배님. 제가 신뢰하는 거 아시죠?
힐데는 무아의 반대편으로 미친 듯이 달려가 놈에게 오러가 실린 검격을 날렸다. 수조를 박살낸 것이 자신이 아닌 크리처처럼 보일 수 있도록.
와장창!
압도적인 질량에 수조 대부분이 폭삭 무너졌다. 힐데는 범람한 바닷물이 입에 들어오기 전에 외쳤다. 천장에 보안 카메라가 있었기 때문이다.
“헉! 수조가!”
즉시 후회했다.
자신은 연기엔 재능이 없는 모양이다.
쏴아아―.
정수리보다 훨씬 높이 물이 찼다. 힐데는 일단 위로 올라갔다. 최대한 늦게까지 숨을 확보해야 했다. 천장까지 여백이 2미터도 남지 않았으니 이래도 얼마 못 버티겠지만.
그 순간 해파리가 곁을 유유히 지나갔다.
우연이었다. 해파리는 스스로 잘 헤엄치지 않는다. 상황을 헤아릴 지능도 없을 터다. 제가 그를 꾸준히 찾아왔단 것도, 구해주었다는 것도 알 리 없다. 그리고 힐데는 이 친구의 이름조차 모른다. 영원을 살아갈 그에게도 이름처럼 하찮은 문물이 필요하진 않겠지만 말이다.
허나 어쨌든 그 아름다운 생물은 몸체를 움츠렸다가 펴길 반복하며 나아가고 있었다. 무아가 들어온 곳을 통과해서 저 멀리, 그의 고향으로….
힐데는 언젠가의 부탁을 떠올렸다.
[나를 죽여줘야지!]
동시에 이번에는 부탁을 거절했다.
하지만 이브. 난 널 살리고 싶었어.
늘 그랬어.
“안녕, 나의 세상….”
곧 방이 완전히 물에 잠겼다.
힐데는 바닥으로 내려와 갖고 다녔던 추적기를 무아에게 붙였다. 이제 녀석도 눈치껏 떠나주면 좋을 텐데. 물론 그렇게 운 좋은 일이 두 번 일어나길 바랄 만큼 어리석진 않아서, 힐데는 차분히 무아를 제압해갔다.
타격은 확실히 있었으나 수중 공격이어서인지 위력이 반감돼 진압하려면 시간이 걸릴 듯했다. 그리고 자신이 숨을 참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이 방은 수조 범람을 대비한 차폐 설비가 돼 있으니 잠깐은 무사하겠지만, 바닷물의 수압과 무아의 무게를 언제까지 버텨줄진 모르겠고.
어떻게 하지.
고민하는데 어디선가 작은 빛이 깜빡였다.
언제 나가 떨어졌는지도 모를 휴대폰이었다. 검과 위치추적기만 생각하느라 전화는 아예 잊은 채였다. 처음 연락을 시도하며 실수로 영상통화 버튼을 눌렀던가. 윤이 입술을 뻐끔거렸지만 물 속이라선지 내용이 들리질 않았다. 그러자.
지나치게 낯선, 동시에 익숙한 모습이 보였다.
힐데베르트는 언젠가 이브를 구하러 갔을 때 봤던 그녀의 얼굴을 기억한다. 항상 쾌활할 줄만 알았던 이브의 놀라움과 아픔, 미안함, 망설임이 한 데 섞인 표정. 그 모든 게 그저 상황과 목숨이 위급해서만은 아니었음을, 이제 힐데는 알았다.
그리고 지금.
‘내가 너를 사랑하는진 모르겠다만….’
최윤의 사랑은 무엇일까.
소시오패스에게도 사랑이란 게 실재하긴 하는 감정인가.
아마도 소유욕 혹은 흥미겠지.
힐데베르트는 자신이 윤에게 특별한 존재 중 하나가 되었음을 모르진 않았지만, 그동안 그의 감정을 간결하게 도식화했다. 머리가 빠개지게 고민해봐야 윤이 저를 이해하는 데 한계를 느낄 것처럼, 자신 또한 최윤을 이해할 순 없음을 아는 까닭이다.
서로가 서로에게 불가해한 존재란 점에서 누가 우월하고 열등한 관계는 아니다.
다만 자신과 대부분 사람들의 기준에서, 아니, 윤의 기준에서도 그의 감정을 사랑이라고 일컫진 않을 터였다. 그건 확실했다. 최윤의 애정은 사실 완전한 소유욕이나 흥미라고 하기도 어려웠지만, 공감력에 기반한 보통의 사랑이라고 보긴 더욱 힘들었다.
하지만 정말로 그런가?
힐데베르트는 뒤늦게 눈치챘다. 제 시력으론 윤의 얼굴이 잘 보이지만, 상단 카메라의 위치와 전화의 각도상 윤은 물만 가득찬 연구실을 보고 있으리란 사실을.
그런 얼굴을 하나, 나를 …하면?
'처음부터 저를 죽일 생각은 없으셨군요.'
'맞아.'
'내가 너를 늘 더 아끼는 건 사실이니.'
아. 저렇게 두고 싶지 않다.
저토록 외롭게만은.
힐데는 휴대폰으로 다가가려다 정신을 차렸다. 돌연 수류가 발생한 탓이다. 무아가 전속력으로 발악하듯 헤엄치자 압도적인 질량과 힘에 파생해 흐름이 생겼고….
빌어먹을. 생각을 너무 많이 했어.
힐데베르트는 찰나에 먼 바다로 흘러갔다.
힐데는 악몽 속을 헤맸다.
처음엔 지옥에 도착한 줄 알았다. 저를 찾아온 이가 너무 새까맣고 분위기도 음침해서, 일전에 아미가 보여준 웹툰 속 저승사자 같았던 탓이다.
지구에도 신이 있긴 했구나.
생각하다 악몽임을 알게 된 까닭은 저승사자가 산소마스크를 친절히도 신경질적으로 씌워주며 한 말 덕분이다.
‘돌아가면 두고 보자.’
그도 마스크를 착용중이었는데 그 말이 들려올 리 없잖은가.
―없어야지 않을까?
힐데는 몸을 부르르 떨며 잠에서 깨어났다.
그리고 즉시 눈을 감았다. 자자, 자야 한다.
하지만 무언가가 딱, 하고 이마에 닿는 감촉이 느껴졌기에 가만 있을 수도 없었다. 딱밤 치곤 안 아픈 게 의외로 봐줄 생각인 것도 같았고….
힐데는 몸을 일으키며 조심스럽게 눈을 뜨다 기겁했다.
“억!”
최윤이 개 가까웠다!
힐데는 반사적으로 머리를 뒤로 물리려 했다. 허나 반응을 예상한 윤이 먼저 뒤통수의 반란을 막았다. 그는 아예 작심했는지 손가락을 펼쳐서 손끝으로 힐데의 머리를 지탱했다. 힐데베르트는 농구가 취미인 동기 덕에 농구공을 쥐는 자세가 그러함을 알았다. 그렇게 잡으면 공이 웬만해선 빠져나가지 못한다는 것도.
최윤이 이마를 맞댄 채로 서늘하게 말했다.
“할 말이 있지 않나?”
금방이라도 누구든 묻어버릴 듯한 시선이었다. 공포영화도 이보다 무섭진 않겠다. 힐데는 흠칫 떨며 답했다.
“서, 설쳐서 죄송합니다. 혼자서 거기 있었던 것도요. 알려주셨던 토벌 지침을 무시한 것도….”
“힐쪽아. 작작해라. 스스로 죽기 전에 죽여버릴지도 모르니까.”
힐데는 콧등을 부딪히며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의 윤은 역대급으로 무서웠지만 그 협박은 두렵지 않아 힐데는 곧 정신을 차렸다. 그는 물러나는 윤에게 물었다.
“근데 그 ‘쪽이’는 무슨 뜻입니까? 아미가 쿠도 선배님을 쿠쪽이라고 부르는 건 들었습니다만.”
최아미와 최윤은 근본 성격이 완전히 달랐으나 표정과 언어에서 남매임이 자연스럽게 드러나곤 했다. 윤은 멈칫하다 말했다.
“네가 금덩어리같이 소중하다는 뜻이지.”
힐데는 윤에겐 없는 양심으로 확신했다.
“절대 아니겠네요.”
아미에게 조나단이 그리 소중해 보이진 않는다는 점을 차치하고도, 이 상황에도 힐데베르트가 윤에게 소중할 리는 없었다.
최윤은 코웃음을 쳤다.
그리고 입을 다물었다.
힐데는 당황하지 않았다. 윤은 원래 말이 적은 사람이었다. 자신이나 다른 사람들이 말을 걸면 평범하게(?) 대화했지만, 기본적으론 쓸데 없는 말과 행동을 귀찮게 여기는 성미였다. 힐데는 긴 세월을 살아오며 그보다 효율적으로 사는 이를 보지 못했다.
윤은 대신 힐데의 정수리를 쓰다듬었다.
힐데베르트는 이 사람의 손이 어떻게 생겼는지 안다. 마디가 굵고, 손바닥엔 사선으로 길게 뻗은 흉터가 나 있다. 언젠가 ‘상처를 한 번 더 찢고 이전하면 완전히 낫지 않을까요?’ 라고 깝죽대기도 했던 것. 농담이었으나 이후로도 상처를 볼 때면 묘한 기분이 들었더랬다.
그리고, 그 손은 의지의 표상이다. 최윤이 효율적인 인간이라 함은 움직임 하나하나에 마음이 담겨 있단 뜻이다. 특히 최윤이 뻗는 손길이라면.
정말로 …이 아닌가? 이것이?
전염된 것처럼 저도 말이 나오지 않았다.
다행히 윤이 침묵을 깼다.
“그래서 어떻게 버틴 거냐? 꽤 늦게 갔는데.”
“아. 저 대박 신기한 거 알아냈습니다!”
힐데가 부러 부산스럽게 말했다.
“오러를 머리에 두르니까 방수가 되더라고요!”
“역시 한 번만 열어보자. 꼼꼼히 잘 닫아줄게.”
“어떻게 지켜온 몸인데 웃기지 마십쇼.”
힐데는 과장되게 몸을 뺐다. 윤이 미간을 찡그렸다.
“허. 너희 사전엔 보은이란 단어는 없나 보지?”
“아니, 은혜도 다른 방식으로 갚을 순 있는 것 아닙니까. 이브만 해도 사람을 가르려 들진 않았다고요.”
힐데는 불현듯 서러워졌다. 어째서 하늘은 이브를 낳고 윤도 낳았는가. 최윤이 제가 처음 만난 과학자였으면 저는 과학자들을 사는 내내 원수로 여겼을 터였다.
“너와 친구가 되고 싶은데 어떻게 친구를 괴롭히냐고도 했단 말입니다. 인성도 지성도 이브가 위란 뜻이죠.”
“그렇겠지.”
“그렇게 순순히 인정하지 마세요.”
“어쩌란 거냐?”
힐데는 윤의 시선을 슬쩍 피했다.
그 순간 최윤이 물었다.
“힐데베르트. 사랑했냐?”
힐데는 윤의 흑안을 마주했다. 일견 무감정하지만, 구분하기도 무척 어렵지만, 묘한 호기심이 엿보였다. 아미 말대로 미미한 차이가 있긴 하구나. 이번은 그 ‘호기심’이라는 감정이 학자인 윤을 이루는 축이라 저도 발견할 수 있었던 것 같지만.
어쨌든 신기한 일이었다. 새로이 생긴 연구 주제에 제대로 꽂힌 듯했다. 마침 그 주제는 힐데도 근래 열심히 고민해본 것이라, 그는 의견을 교환하려는 차원에서 말했다.
“윤. 사랑이 뭘까요?”
힐데는 숨을 길게 내쉬었다.
“저는, 사실 이브를 그리 좋아하지 못했습니다. 지나치게 똑똑했는데 눈치는 모자라서, 너무 빠르게 방아쇠를 당겨버렸거든요.”
“….”
“하지만 이브를 싫어하지도 못했죠. 순진하고 악의를 잘 모르던 사람이라, 싫어할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래도 이브와 키스하고 싶다거나 하는 생각은 해본 적 없고….”
최윤은 침묵했다. 정확히는 학자답게 대상을 관찰했다. 하여 힐데는 그를 신경 쓰는 일 없이, 제 내면과 진실하게 접할 수 있었다.
“해서 사랑하진 않았다고 판단했었습니다만, 생각할수록…. 그런 것만을 사랑이라고 여기는 것도 편견 아닐까 싶어서요.”
아. 힐데는 고개를 숙였다.
진실은 이토록 간단한 것을.
투명한 액체가 이불 위로 뚝뚝 떨어졌다.
“저 이브를 사랑했었네요. 하하.”
힐데는 입술을 짓씹었다. 지독한 후회가 몰려왔다. 실제로 마음을 알릴 만한 상황은 아니었음에도. 자신이 그녀를 성애적으로 연모한 것 또한 아님에도. 말해봤자 관계가 변하는 일은 없었을 텐데도. 그래도, 나 또한 널 좋아한다는 감정만은 제대로 전할 걸.
인사라도 할 걸….
눈가 아래에서 촉감이 짧게 느껴졌다가 떨어졌다. 힐데는 고개를 들어올렸다. 최윤은 평소처럼 무감정한 낯짝이다.
하여 그가 손끝으로 찍은 눈물을 혀로 핥았을 때, 놀란 이는 힐데뿐이었다.
“…그걸 왜 먹습니까?”
“존나 짜. 염도는 인간과 비슷하군.”
힐데베르트는 폭발했다.
“눈물은 당연히 짜죠! 제가 김치입니까? 지금 김장하시냐고요? 염도니 뭐니―”
그러다 어떤 결론에 다다랐다.
“인간은 어떻게 알아.”
“최아미 어릴 때 찍어서 핥아봤는데.”
“미친, 네가 울렸지?”
“아. 들켰네.”
윤이 피식 웃었다.
힐데는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새뮤얼이 따로 필요 없었다.
이틀 뒤 힐데는 병상에서 완전히 벗어났다.
무아는 자신이 반으로 동강냈고 발전기 고장도 잘 해결되어, 그는 내일이면 센터코어로 귀환할 예정이었다. 장기 업무였으니 휴가도 일주일은 주어지겠지.
힐데는 저번엔 불청객 덕에 못 잡은 게임 팩을 잡을 생각으로 만족, 하지 못했다. 누구와는 달리 존재하는 양심이 몹시 찔렸기 때문이다.
그 양심 없는 인간이 입을 싹 닫아서 더.
왜 한 마디도 안 하냐고? 눈치챘을 텐데!
적반하장이었으나 진심 죽을 맛이었다.
힐데는 결국 가책을 못 이기고 귀환 하루 전, 윤의 객실을 찾았다. 최윤도 돌아갈 짐을 꾸리고 있었는데 저와 달리 처음부터 장기로 머물 예정이었던 것치곤 단출했다. 하긴 알래스카에 별장이나 스포츠카를 갖고 다닐 순 없을 테니….
“무슨 일이냐.”
아. 아니다. 도망치지 말자. 힐데는 떠나려는 정신을 겨우 붙잡았다. 그리고 ‘윤은 힐데베르트를 죽이지 못한다’ 란 명제를 수십 번 속으로 되뇐 뒤 말했다.
“그게, 화 안 내십니까?”
“뭘.”
덤덤한 목소리. 설마 진짜 모르나? 그러면 이대로 모르는 척 덮는 게 낫지 않을까, 마침 나도 병자였고. 힐데는 혹했지만 겨우 양심을 지켰다.
“보안 카메라 보셨을 것 같아서, 요…?”
“아. 그걸 이제 사과하십니까. 영감님.”
할 말이 없었다. 윤이 차분히 덧붙였다.
“보지도 않았어. 백 퍼센트 네가 놓아줬을 테니. 내 몇 주간의 고생을 뭘로 갚을 셈이냐? 힐데베르트.”
주인 나리께 감사하게도 생각보다 너무 선선했다! 힐데는 환히 주인님께 달려가 떨어진 목줄을 쥐여주었다.
“어, 아무거나요? 기라면 기겠습니다. 아니면 육체 노동은 자신 있으니 틈틈이 새우잡이 배라도 알바로 나가서 통장 잔고를 보태드리거나―”
“진심이냐? 네가 백 번을 다시 태어나서 쓰리잡을 해도 내 통장엔 기별도 안 가.”
최윤은 어이가 없다는 듯 혀를 찼다.
음. 사과하고 싶던 마음이 싹 사라지는군.
솔직히 애초부터 타인의 일을 멋대로 망쳐놓은 상황이었으면 죄송하다고 머리부터 박았을 터다. 윤에게만 이런 식으로 반응하게 된다면 문제는 최윤에게 있는 것 아닌가? …라는 얘기는 당장은 목숨이 소중했는지 나오지 않았다.
힐데는 대신 튀어나온 입으로 대꾸했다.
“옙. 더 생각해보겠습니다.”
“그래서.”
“네?”
“그건 내가 화를 내려면 진작에 냈을 일이고. 진짜는 뭐냐.”
최윤은 느긋하게 팔짱을 꼈다.
시선은 칼날 같았으나.
힐데는 멈칫했다. 하여간 윤은 공감력은 떨어져도 직감이 맹수같이 빨랐다. 힐데는 이번에야말로 도망치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그 말을 뱉는 순간 어떤 식으로든 관계가 뒤틀릴 수 있음을 아는 까닭이다. 좋았던 관계가 변화되는 것은 아직 공포에 가깝다.
하지만.
어쩌면 최윤이라면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아니, 윤이 아니면 누구에게도 이런 말은 전할 수 없을 터다. 힐데는 확신하면서도 의아해졌다. 왜일까. 그는 제 주변에서 심적으로 가장 강한 이도 아니고, 제 아픔에도 거의 공감해주지 못할 텐데.
깨달은 그는 쓰게 웃었다.
사실은 공감해주지 못해서 윤이 편한 것이다.
이 사람만은 상처받지 않을 테니까.
않았으면 해서….
힐데는 결국 비겁하게 자신을 드러냈다.
“윤. 혹시 제가…. 이브를 그리워하는 게 불편하진 않으십니까?”
입안이 텁텁해졌다. 사람이 이리 치졸해도 되는가. 힐데베르트는 이제 윤의 감정을 어느 정도 짐작했다. 그리고 제가 한 말은 결코 자신을 …하는 이에게 할 이야기가 아니었다. 그럼에도 터뜨린 것이다. 최윤의 선천적인 장애를 수단 삼아.
이브가 단순히 소중한 친구였으면 괜찮았을 터다. 허나 관계가 그렇게 단순하지 못했다. 힐데는 오래도록 그녀를 보호하고 싶었고, 이브는 이 세계를 힐데에게 전달해주었다. 심지어는 최후에 그녀를 쏘아죽임으로써 제 심장에도 그녀를 탄환처럼 박지 않았나.
보통의 연인이라면 결코 반갑지 않을 감정.
더욱이 그 감정은 이브에 대해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었다. 힐데는 제가 죽인 오랜 친구들에 대해서도 그리 생각했다. 앞으로 수십 수백 년이 지나도 그 흔적을 지워낼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힐데는 그들을 만나 살아남았다. 레이와 카일이 제 생존이었다.
망각은 축복이나 동시에 저주다. 힐데베르트는 그들과 주고받은 아픔만큼의 행복을 영원히 잊고 싶지 않았다. 지울 바엔 죽는 게 낫겠지.
그 모든 기억이 저인 것을.
힐데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돌아온 것은 상상 이상의 답변이었다.
“무슨 상관이지? 그건 네 마음이지 내 마음이 아닌데.”
힐데는 눈꺼풀을 들었다. 최윤이 고개를 2도 정도 기울인 채였다. 그러니까, 답지 않게 귀여운 모습을 보일 만큼 그는 진심으로 의아해 했다.
동시에 이렇게 말한 것이다.
어쩌라고?
힐데베르트는 안심했다. 고백부터 하지 않아 다행이었다. 제가 무슨, 거대한 착각을 했는지도 모른다. 하하. 잘 됐어.
잘 되진 않았지만, 힐데는 기분이 편안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러니까 최윤은 제 마음이 지옥을 헤매든 말든 알 바 아닌 것이다. 하긴 내가 뇌만 남아도 상관 없다 했었으니까, 그때부터 살아만 있으면 그만이라고 판단한 거겠지.
그저 살아가는 것.
그 정도라면 어떻게든 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허나 문득 양심이 찔렸다. 정말 그래도 되나? 한 사람을 붙잡고서 다른 사람들을 놓지 못하는 것은 인간쓰레기 아닌가? 게다가 다른 누구도 아니고 ‘최윤’을 보험 삼는다고? 내가? 상대의 일방적인 양보를 저 편하자고 받아들여도 되는지.
그러나 돌이켜 보면 나를 죽여달라던 부탁부터 저 편하자고 한 짓이었다.
힐데는 허둥지둥한 기분에 무심코 말했다.
“그야, 외로울 테니까요. 보통은….”
“힐데베르트. 보통을 원하나?”
최윤이 픽 웃었다.
“알겠지만 그것만은 나한테 기대해선 안 될 텐데.”
그리고 최윤은 거침없이 방을 나갔다. 힐데는 그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다 깨달았다.
아. 실수했다.
최윤은 발전기와 시추시설을 최종 정비한 뒤 방으로 돌아왔다.
잘 돌아가던 것을 오래 강제로 멈추기도 했고, 이참에 노후화된 부분은 없는지 제대로 확인하는 게 좋을 듯해 시간이 꽤 걸렸다. 기분 탓이겠지만 샤워를 해도 몸에 기름과 먼지 냄새가 남아 있는 것 같았다. 집에 가면 한동안은 푹 쉬어야지.
계획을 세우며 침실 문을 열자, 소파에서 몸을 웅크리고 잠든 후임이 보였다.
이 멍청이는 진짜 수면용으로 놔둔 침대는 안 쓰고 뭐 하는 거지. 헛웃음이 나왔지만 무슨 생각이었는진 알 듯했다. 이 걱정을 사서 하는 괴물이 요령이라곤 없이 오해를 지독히 한 것이다. 제가 윤에게 상처를 주었다며. 그리고 저를 기다리다 잠든 거겠지.
결론적으로 최윤은 조금도 상처 받지 않았다.
놈의 이 미련한 모습에 대해서도, 사실 일부러 오해하게 둔 셈이었고.
힐데베르트 덕에 실험은 깨지고 고생이란 고생은 다 했으니 그도 저로 말미암아 고생을 해보는 것이 공평하지 않은가.
그리고 생각대로 된 꼴은, 마음에 들었다.
최윤은 미동 없이 상대를 내려보았다.
힐데는 직업상 인기척에 예민한 편이었지만, 윤도 은닉엔 재능이 있어 잠든 이를 구경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그는 이 고요에 자연스럽게 깃들었다.
힐데베르트는 상당한 시간이 지난 뒤에야 잠에서 깨어났다. 태양처럼 빛나는 보석안을 촘촘한 속눈썹 사이로 드러내며.
미감을 자극하는 눈이었다.
죽으면 박제하고 싶을 만큼.
“아. 오셨습니까. 몇 시지.”
허둥지둥 시간부터 확인하는 이유는 몰랐지만 윤은 선선히 답했다.
“10시.”
“오로라.”
힐데는 제가 사준 휴대폰을 찾아 쥐고 소파에서 일어나 말했다.
“9시부터 오로라가 뜬다고 했는데 같이 보러 가주시면 안 됩니까?”
오로라 예측 앱을 설치해뒀던 모양이다. 해파리도 그렇고 제보다 젯밥에 관심이 많았군. 윤은 코웃음을 쳤다.
“이 야밤에 말이냐?”
이제 10월 말이었다. 이 시간에 나간다면 한국의 한겨울 못지 않게 추울 것이다. 애초에 한국인이라 버티지 못할 일은 아니나.
“본 적도 있던 풍경을 굳이 보자고.”
극광은 빙룡과도 본 적 있었다. 윤은 공감력이 떨어질 뿐 미감이 뒤떨어지는 것은 아니라, 그도 꽤 인상적으로 그것을 본 기억이 났다.
하지만 그 덕에 같은 풍경을 두 번 볼 의욕은 나지 않았다. 윤은 힐데의 영롱한 황금안을 흘끗하며 판단했다. 심심하면 본인 눈을 거울로 보는 게 낫지 않은가 하고. 사실 힐데는 그 자신의 미적 가치에 대해서도 잘 알지 못할 만큼 미적 추구에 관심이 없어서, 이런 요청은 의외기도 했다.
그러나 힐데베르트는 완강했다.
심지어 평소보다도 뻔뻔했다.
“예. 저는 윤이 꼭 오로라를 봐주셔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제 유일한 퇴로가 윤이었는데 윤은 퇴로를 아예 끊어버렸잖습니까. 그러면 사실상 최윤이 제게 진 위약금이 제가 해파리를 놔줘서 진 빚보다 크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요?”
“논리가 미쳤군.”
“싫진 않으시죠.”
생떼를 쓰는 게 재밌기는 했다. 억지를 부리는 이가 다른 배저였으면 총을 갈겼을 텐데 자신이 놈에게 약한 것도 같았고.
윤은 외투를 갖춰 입었다.
해양기지는 꽤 넓고 복잡했기에, 힐데가 원한 천장까지 도착하는 데는 15분쯤 시간이 걸렸다. 다행히 시간을 쓴 보람은 있어 밤하늘엔 웅장한 녹색 커튼이 걸려 있었다. 윤이 주변 조명을 켜자 힐데는 만족한 듯 드물게 사진을 찍었다.
윤은 충동적으로 하얀 머리를 흩날리는 그를 촬영했다.
힐데베르트가 작게 입술을 벌리고 자신을 마주하던 모습까지도.
그는 자신이 찍은, 오로라와 힐데가 어우러진 사진을 내려보았다. 훗날 자신이 이 사진을 어떻게 이해할진 미지수였으나, 그 마음이 무감정은 아닐 듯싶었다.
최윤은 픽 웃었다.
윤은 이후 힐데베르트에게 이끌려 함께 사진을 찍기도 했는데, 상대가 촬영이란 행위에 의미를 둬본 적이 없어 결과물이 괜찮게 나오진 않았다.
상관 없었지만, 힐데는 아미에게 사진 찍는 기술을 배워 오겠다며 열의를 불태웠다. 하긴 아미는 꽤 잘 찍는 편이었다. 특히 음식을.
최윤은 불길함에 미간을 잠깐 찡그렸다.
힐데베르트는 윤이 봐도 일부러 부산을 떨고 난 뒤에야, 차분해진 음성으로 정상까지 올라온 목적을 밝혔다.
“윤. 전 사실 이런, 쪽은 잘 모릅니다만…. 제가 좀 보수적으로 자라서요.”
그걸 알려줘야 알 거라고 여기나? 황당했지만 진지한 기색이라 윤은 일단 지적을 삼켰다.
“그래도 나름대로 생각을 해봤는데, 보통이란 건 이런 행위를 보통이라고 하는 것 같습니다…. 아니, 해야지 않을까요?”
힐데가 쓰게 웃고는 덧붙였다.
“누구도 재단할 수 없는 마음이 아니라요.”
재단이라. 그 잘라내지 못하는 것이 네 이브에 대한 감정인지, 아니면….
어느 쪽이든 알 바 아니었다. 제 수수께끼 같은 감정이라면 당연히 부사수따위가 꺾을 수 없었고, 힐데 본인의 감정은 그냥 신경 쓰이지 않았다.
사실 이브가 아니어도 놈의 성격상 잘라내지 못할 것은 넘치게 존재했으므로, 그를 신경 썼다면 윤은 굳이 힐데의 삶에 개입하려 들진 않았을 터다. 여기서야 해파리 덕에 청승을 부렸지만 그 이상으로 본인이 죽인 친구들을 사랑하고 있을 테니까.
하지만 어차피 다 사라진 것들이지.
최윤은 객관적인 사실을 입에 담진 않았다.
윤은 여전히 힐데의 아픔에 도달할 수 없었으나, 제 말을 들은 그가 어떤 낯빛을 할지는 예상할 수 있었고, 그 모습을 마주하는 것은 다소 짜증이 날 듯했기에….
결과적으로 그는 힐데베르트의 삶을 헤아리듯 상처를 감싸줄 수 있게 된 것이다.
“힐데베르트.”
“예.”
“손 내놔라.”
힐데는 고개를 기울였지만 순순히 손을 내밀었다.
최윤은 힐데베르트 탈레브의 손을 맞잡는다. 언젠가 부사수가, 너무 긴 시간 검을 잡아 감각이 둔해졌다 고백했던 손이다. 윤은 그 말만은 뜻을 정확히 이해하고 있었다. 제 손도 사선으로 그인 흉에선 감각이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허나 그렇다면 깍지를 끼면 되는 것 아닌가?
이 정도의 감각이라면 느낄 수밖에 없도록.
이 정도의 감정이라면 닿을 수밖에 없도록.
밤하늘 위로 초록색 커튼이 폭죽을 터뜨리는 소리를 내며 흘러간다. 그 너머로 빛나는 별들이 광활하게 어두운 장막에 펼쳐져 있다.
다만 그중에도 가장 찬란하게 움트는 것은….
내게서 시선을 흩뜨리지 않는 너의 눈이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최윤은 다시금 고찰한다.
사실 그 답은 간단한 것이다. 인간 유전체로 구성된 호모 사피엔스. 그 유전체가 99% 일치하는 인류의 집합명사. 유전체는 아주 작은 부분까지 세분화될 수 있으므로, 타이탄과 인간의 차이를 구분하는 것은 기술적으로 어려운 일은 아니다.
허나 인간답다는 것은 무엇인가.
물론 최윤은 이제 자신 또한 철저히 인간다운 동물임을 인식하고 있었다. 그것은 선악 모두를 포함한 개념이며, 기실 선악으로 정확하게 구분되지도 못했다.
그렇다면 저는 왜 예현이나 아미를 유독 인간답게 느끼는가.
이 부분에 대해서는 고민 끝에 내렸던 결론이 있었다. 그냥, 취향이었던 것이다. 군탈체포조가 말했던 동족혐오처럼. 세상에 널린 무수한 인간중에서도 둘이 유독 마음에 들어서. 그리고 그들만이 제 성에 찼던 이유는….
세상엔 의외로 선한 인간들이 많다. 능력 있는 이도, 다정한 사람들도. 따라서 모든 성분을 쳐낸 뒤 남는 공통점은 하나뿐이었다.
그들만이 최윤을 포기하지 못했다.
본인들의 선 안으로 끌어당기고 싶어 했다. 그것이 고맙진 않았으나 미련하고 재밌었다. 상대의 교정이 불가능함을 알면서도 기어코 교정을 시도하는 것이. 제 속이 근본적으론 전혀 바뀌지 않았음을 알면서도 ‘최윤’이라는 소시오패스와 함께 살아가길 원했다.
따라서 힐데베르트 탈레브라는 지나치게 ‘인간다운’ 타이탄이 자신에게 뭔가를 전하고 싶어 이 시간에 데이트를 요청해온 것도, 최윤에겐 놀랄 일이 아니었다.
윤은 늦은 밤, 힐데와 오로라를 보고 돌아오는 길에 감상을 그렇게 정리했다. 이 모든 행적은 제 부사수가 지나치게 인간다운 괴물이어서 벌어진 것이라고….
과연 그런가?
힐데베르트가 제 객실 앞에서 인사했다.
“그럼 내일 뵙겠습니다. 윤.”
최윤은 그를 다짜고짜 방에 처넣었다.
“윽. 뭡니까?”
“앉아.”
힐데베르트가 미간을 찡그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윤은 어깨를 눌러 그를 소파에 앉혔다. 그리고 구시렁대는 힐데의 턱을 손끝으로 들어올리고는 가늠했다.
정말로 그뿐인지.
사실 이것은 애초부터 ‘인간 탐구’란 논의에서 벗어나 있는 존재다. 아무리 의미를 끼워맞춰도, 가장 똑똑한 유인원이 인간과 닮은 행동을 한다 해도, 결국 인간일 수는 없듯이. 생각이 다른 게 아니라 윤은 이브도 내심 이 사실을 알았으리라 확신했다.
그럼에도 그녀 또한 이러고 싶었던 것이다.
어차피 이해할 수 없음을 알면서도 곁을 내어주고 관찰하고 싶은 것. 포기하고 싶지 않은 것. 어떤 꼴이 되어도 살려내 두고 싶은 것.
이 불가해한 욕구가 사람인가?
혹은 사랑인지.
최윤은 망설일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이미 결론을 내린 게 분명함에도 머뭇거리는 등신과 달리. 윤은 참을성에 하자가 있었다.
“힐데베르트. 내가 널 사랑하는 건가?”
손끝에서 떨림이 느껴졌다.
최윤은 헛웃음을 터뜨렸다. 이 새끼가 이렇게 쫀 건 처음 보는데. 그럼에도 시선에서 도망치진 않는 꼴이 재미있었다. 지독할 만큼 힐데베르트다운 모습에, 최윤은 듣기 전부터 답을 눈치챘다. 먼저 그것을 꺼내진 않았지만.
힐데베르트의 목소리로 듣고 싶었던 까닭에.
“그게, 무서워서요. 윤이 아니라….”
마침내 힐데가 말했다. 윤은 손을 내리고 최대한의 인내심을 발휘했다. 힐데베르트는 숨을 푹 내쉰 뒤 덧붙였다.
“말하면 감당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무얼 감당해야 할지도, 당장은 감이 안 잡히는데도요. 하지만....”
힐데가 씩 웃었다.
“예. 전 최윤이 저를 사랑한다고 판단합니다. 그게 보통의 사랑과는 거리가 멀다 해도요.”
의외로 선선한 미소였다.
“아닙니까?”
윤은 힐데의 뒷목을 붙잡았다.
순식간에 혀가 엉켰다.
감각은 엉망이었다. 이 정도라면 이백 년 묵은 산삼이나 다름없었다. 힐데베르트는 혀를 얽으려 시도할 때마다 상대의 혀를 끊어먹으려 들었다. 윤은 의도가 의심스러워졌으나, 힐데는 민망한지 입술 사이로 헛숨을 터뜨렸다.
아무래도 고쳐 쓰려면 오랜 시간이 필요할 것 같았다.
그러나, 그럼에도 기분은 유쾌했다. 여기 답이 있었던 것이다. 모든 문제들이 명쾌하게 풀리는 해답이. 학자로서 찾아헤맨 그 순간이.
윤은 이물감을 견디지 못한 힐데가 손바닥으로 제 이마를 밀어내자 잠깐 밀려나 주었다. 그리고 숨이 오가는 거리에서 속삭였다.
“어. 맞네.”
“…윤.”
“사실 목을 졸랐을 때부터 꼴렸거든.”
습기 어린 금색에 짜증이 깃들고….
다시 입술이 부드럽게 맞닿았다.
<윤ha - 별의 조각> 들으며 썼습니다
제가 들어본 노래 중에선 힐데와 가장 잘 어울리니까 한번 들어보세요ㅎㅎ
끝까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__)
+일리님이 그려주신 팬아트를 첨부합니다
저도 제일 좋아하는 장면인데 넘 멋진 아트가 되엇어요ㅠㅠ 다들 봐.. 꼭 봐..
- ..+ 2
댓글 6
전설의 족제비
또 보러 왓어요 ㅠㅠ 이 글이 제 윤힐 근간이에요 윤힐의 신 윤힐의 제왕 윤힐의 군림자 윤힐마스터님 감사합니다
민첩한 새우
아니, 윤은 힐데베르트를 죽이지 못한다. 기실 문제는 그것이다. - 심장이 찌르르 울림🥹👍 윤에게의 요청은 이브의 안식이 저 또한 탐이 났던 탓이다. 힐데는 그 자신으로서 그녀가 제게 최후를 요청해온 심정을 이해했다. - 🥲🥲😢 아싸, 내가 해냈다! 그게 숨이 곧 막혀오는데도 되긴 되더라니까? 일부러 매실주를 마신 뒤 동족들에게 무용담을 쏟아낼 계획도 다졌다. - 2nn년 묵은 철부지 영감 실존. "헉! 수조가!" 즉시 후회했다. 자신은 연기엔 재능이 없는 모양이다. - 바보영감탱 차라리 말 안 하고 놀라는 척만 했으면 그나마 실감났을텐데 그 순간 해파리가 곁을 유유히 지나갔다. - 왔다...내 억장버튼............ 우연이었다. 해파리는 스스로 잘 헤엄치지 않는다. - 글 읽다 지식 얻어걸림 늬 덕질이 머에 도움되드나! 예 새로운 지식을 얻기도 합니다 어머니 힐데는 언젠가의 부탁을 떠올렸다. (중략) "안녕, 나의 세상...." - 또 내 세상도 무너지다.... 읽을 때마다 울게 돼요 안녕...나의 세상.....안녕.........난 널 살리고 싶었어...늘 그랬어..............억장이 무너지다..... 글리프야 닉 바꿔줘 민첩한 새우가 아니라 억장 무너진 새우로... 최윤의 사랑은 무엇일까. 소시오패스에게도 사랑이란 게 실재하긴 하는 감정인가. - 힐데야......이미 최윤은 사랑 고백 진득하게 했다.....최윤 본인 스스로도 몰랐겠지만 발전기가 터졌다고 거짓말했을 때부터.. 널 죽이지 않을 거라고 인정했을 때도, '네 삶이 계속되듯이' 이게 고백이 아니면 먼데ㅠ 그런 얼굴을 하나, 나를 ...하면? 아. 저렇게 두고 싶지 않다. 저토록 외롭게만은. - 벅차올라서 걍 또 하늘 쳐다봄.......🥹 이 상황에도 힐데베르트가 윤에게 소중할 리는 없었다. - 아 답답한 바보 영감탱!! "아. 저 대박 신기한 거 알아냈습니다!" "오러를 머리에 두르니까 방수가 되더라고요!" - 2nn살 영감탱이랑 1/10 쫌 넘게 산 나랑 말투 차이 안 난다는 게 ㄹㅈㄷ 방정맞음 영감님 철 좀 드세요 힐데베르트. 사랑했냐? (중략) "저 이브를 사랑했었네요. 하하." - 🥹......정말정말 좋아하는 대목이에요 중략으로 줄이는 게 아까울만큼 정말 좋아해요.. 얘네는 성애적인 사랑이 아니기에 관계성이 더더욱 아름다운 것임......... "존나 짜. 염도는 인간과 비슷하군." - 내 감동 돌리도. "미친, 네가 울렸지?" "아. 들켰네." - 이 부분 읽다가 포타에도 감상 덧글 남겼덤 것을 떠오르다.ㅋㅋ(기억력 붕어) 개그 정말 좋아합니다..👍 주인 나리께 감사하게도 생각보다 너무 신선했다! 힐데는 환히 주인님께 달려가 떨어진 목줄을 쥐여주었다. - 머슴힐데 보고 싶어지다.(ㅋㅋㅋ) "진심이냐? 네가 백 번을 다시 태어나서 쓰리잡을 해도 내 통장엔 기별도 안 가." - 너무 사실이긴 함. 심져 원작에서 팔콘네 (스포일러)해서 더더욱 거지가 되었기에 더...🥲 이 사람만은 상처받지 않을 테니까. 않았으면 해서.... - 😢........ 심지어 최후에 그녀를 쏘아죽임으로써 제 심장에도 그녀를 탄환처럼 박지 않았나. - 또 봐도 또 제 심장에도 탄환처럼 박히는 문장🥹👍 지울 바엔 죽는 게 낫겠지. 그 모든 기억이 저인 것을. 그저 살아가는 것. 그 정도라면 어떻게든 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 😢😢...... 윤은 충동적으로 하얀 머리를 흩날리는 그를 촬영했다. (중략) 그 마음이 무감정은 아닐 듯싶었다. - 아름답다.......... 허나 그렇다면 깍지를 끼면 되는 것 아닌가? (중략) 이 정도의 감정이라면 닿을 수밖에 없도록. - 너무 맛있어요......음미 중😋👍 다만 그중에도 가장 찬란하게 움트는 것은.... 내게서 시선을 흩뜨리지 않는 너의 눈이다. - ㅎ ㅏ아........매우 음미 중 너무 맛있음 "힐데베르트. 내가 널 사랑하는 건가?" " 예. 전 최윤이 저를 사랑한다고 판단합니다. 그게 보통의 사랑과는 거리가 멀다해도요." - 맛있다.....미슐랭 맛집 안 가봐도 됨 여기있는데 머하러 멀리까지 갑니까? 이 정도라면 이백 년 묵은 산삼이나 다름없었다. 시도할 때마다 혀를 끊어먹으려 들었다. 윤은 의도가 의심스러워졌으나 - ㅠㅠㅠㅠㅠㅠ으구 이 귀여운 영감.. "사실 목을 졸랐을 때부터 꼴렸거든." - 윤힐 브컨의 가능성(이거아님) 이번에도 잘 봤습니다. 글리프에선 123 다 합해 읽는 시간을 약 61분으로 측정했는데 저는 6시쯤 시작해서 10시가 되었군요... 믿기지가 않는 달팽이 속도🙄 선생님 글리프 발췌 기능이 아주 재미있더군요 혹시 다른 글들도 글리프에 백업해 주실 수 있을까요?🥺
전설의 족제비
포타에서도 열심히 읽었는데 또 읽어도 너무 좋네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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