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랙배저 2차

[예현힐데] 산군 - 1

조금씩 올립니다... 유사조선AU

두시전에자자 by 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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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임 현감 이예현이 그를 처음 만난 것은 부임을 하고 열흘이 채 되지 않은 어느 날의 저녁이었다.

저녁상을 물리고 곡식 비축량과 세액을 정리한 서책을 뒤적이는데 바깥에서 재차 인기척이 들렸다. 이전 현감이 술을 좋아한 모양인지 행랑어멈은 습관적으로 술상을 내오곤 했다. 몇 번이나 거절했기에 그 정도면 된 줄 알았건만. 예현은 서책에서 눈을 떼지 않고 문 밖에서도 들릴 수 있도록 적당히 소리를 내어 답했다.

“술상은 되었다 하지 않았어.”

“술상이 아닙니다, 나으리.”

대답한 이는 아는 목소리가 아니었다. 사내의 목소리인데 퍽 간드러지고 듣기가 좋았다. 누구지? 예현은 옷매무새를 가볍게 다듬고 창호문을 열었다. 툇마루 너머에 흑청색 도포를 깔끔하게 차려입은 사내가 반듯하게 서 있었다. 색목인… 아니, 회회인¹인가? 피부가 거뭇하고 코가 우뚝한 사내의 눈이 금빛으로 형형하게 빛나고 있었다.

정체 모를 사내는 예현에게 가볍게 목례했다. 갓 아래로 얼핏 보인 머리는 또 노인처럼 희었다. 예현은 엉겁결에 마주 인사했다.

“저… 누구십니까?”

“힐데베르트 탈레브라고 합니다… 이름이 어렵지요. 힐데라고 불러주시면 됩니다. 대단한 사람은 아니고, 서역에서 건너와 공부나 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회회인이 맞았구나. 우리말이 유창하여 큰 걱정을 덜었다. 예현은 허리를 펴며 답했다.

“아, 예… 이예현이라고 합니다. 이 시간에 어인 일로… 급한 일인지요?”

“새 원님께서 부임하셨다기에 늦게나마 와 보았습니다. 혹시… 전임 현감께 말씀 들으신 것이 없으신지요? 제가 종종 자잘한 업무를 돕고는 했는데….”

없었다. 전임 현감은 조세를 뒤로 빼돌리다가 삭탈관직을 당했기 때문이었다. 휘말린 이방이며 호방까지 싹 다 끌려갔기에 당장에도 말 전해줄 이 하나 없어 서책이나 뒤적이는 판이었다. 예현이 멍하니 대답이 없자 상대가 뒷목을 긁적였다.

“하긴, 제가 일을 도우러 온 지 조금 되긴 했습니다만은…”

“아이고, 어르신!”

뒤에서 행랑어멈이 헐레벌떡 달려왔다. 이예현이 아니라, 힐데베르트 탈레브를 향해서였다. 남자 또한 반가워하는 눈치였다.

“내주댁. 오래간만입니다.”

“어르신, 이게 얼마만이어요! 서역으로 돌아가신 줄만 알았습니다!”

“아닙니다. 그간 고향의 친우들과 볼일이 좀 있어 방문이 뜸했어요. 잘 지냈지요?”

“아유, 난리도 아니었습니다. 그 전에 계시던 곽 사또께서… 어마나, 나으리가 먼저 나와 계셨어요.”

뒤늦게 예현을 발견한 행랑어멈이 포드득 놀라 어쩔 줄을 몰랐다. 여기서 스무해 넘게 일곱이 넘는 현감을 모셨다는 내주댁이 이렇게 반기는 사람이면 나쁜사람은 아닐 터였다. 예현은 웃으며 두 사람에게 말했다.

“아직 밤바람이 찬데, 잠시 들어와서 이야기하시지요. 어멈, 상을 내올 수 있겠는가.”

“여부가 있겠습니까! 금세 내오겠습니다.”

행랑어멈이 분주하게 부엌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예현은 문에서 한 발짝 물러나 손을 방에 들였다.

“이거, 정말 잠깐 인사만 드리려고 했는데요… 실례합니다.”

손님은 정말 길게 이야기를 나눌 생각은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그러나 이야기를 하다 보니 그는 지금의 예현에게 꼭 필요한 사람이었던지라, 자연히 질문도 꼬리에 꼬리를 물게 되었다. 

“이 고을에서만 서른 해 가까이 도움을 주셨다니… 선배님 아니십니까. 말씀 편히 하시지요.”

많이 보아도 저와 동년배로 보였는데, 그는 벌써 서른 해 넘게 이 곳에서 지냈다고 했다. 색목인은 나이를 가늠하는 것이 어렵구나, 하고 예현은 생각했다. 아무튼 이야기를 하다 보니 힐데 공公의 자세한 자기 소개를 들을 수 있었는데, 고향에서부터 학자였던 그는 조선이 궁금해 상인들과 함께 서역에서 먼 길을 건너왔다고 했다. 고향에서 가져온 금붙이가 떨어진 뒤 공부를 하는 틈틈이 셈이나 지혜를 빌려주는 방식으로 먹고 살다가, 기회가 되어 당시 호방의 일을 도와준 것을 계기로 종종 관의 일을 돕게 되었다는 이야기였다.

“아니, 그렇게 대단하지 않습니다. 그냥 제가 계산이 빠르고 잡다히 아는 것이 많다 보니 그리 되었을 뿐인데…”

“그러지 마시고 말씀 낮춰주십시오. 그 편이 오히려 제 맘이 더 편할 것 같습니다.”

“그리 청하시니… 그… 노력은 하겠습니다.”

“…….”

“알겠으니 그렇게 보지 말고….”

그제야 예현이 방긋 웃었다. 고을 사정에 훤한 사람이 먼저 저를 도와주러 오다니, 천군만마가 이보다 좋으랴.

힐데는 그전 현감에 대한 이야기를 듣곤 눈을 둥그렇게 뜨더니 이내 제가 아는 만큼의 고을 사정을 읊어 주었다. 드물게 가뭄이 올 때가 있다거나, 다른 고을보다 가을이 이르게 오는 편이라 수확이 일주일 쯤 이르니 세금을 걷을 때 미리 준비를 해야 한다거나…

“또 어디 보자… 산세가 험한 편이긴 한데, 행상이나 마을 사람들은 안전한 길을 다 알아서 크게 문제가 없어. 다만 외부인은 길을 잃기 쉬우니… 언제 시간을 비울 수 있으면 같이 한번 돌아보는 게 어떤가.”

“저야 감사하지요. 산에 짐승도 많습니까?”

“많지. 토끼, 산양도 많고… 호랑이도 있고.”

“호랑이요?”

예현이 깜짝 놀라 소리를 높였다. 비스듬하게 앉아 턱을 괴고 있던 힐데가 소리 내 웃었다. 

“하하, 겁 먹었나?”

“그런 건… 저, 그럼 호환도 있었습니까?”

“아니, 호환은 한 번도 없었어.”

힐데가 눈을 길게 휘며 웃었다.

“내가 이 고을에 머무는 동안에는 단 한번도 없었지.”


퓨랑님 커미션입니다 ^0^ 게시 허락 감사합니다!


1)  回回/회흘; 중동, 아라비아~페르시아 지역을 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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