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랙배저-윤힐데

[윤힐데] 시절인연 상편

타임슬립 소재

어릴 적 최윤은 식사중에 물었다.

“소름이 끼친다는 건 무슨 뜻이에요?”

여자는 곤혹스러워 했다. 그녀가 입을 살짝 벌리고 제 눈을 피할 때의 감정을 대개는 ‘곤혹스러움’이나 ‘당황’, ‘두려움’ 쯤으로 서술한다는 것을 윤은 모르지 않았다. 사실 그는 ‘소름이 끼친다’는 문장과 그 외 많은 단어의 뜻도 이미 알곤 있었다.

말들 대부분이 최윤을 지칭하는 데 쓰였기에.

여자는 마른침을 삼킨 뒤 상대를 마주보았다.

“그건 그러니까…. 내 팔에 바퀴벌레가 붙어 있단 사실을 깨달으면 느끼는 감정이지. 근데 누가 그런 말을 했니?”

“당신이 나를 보며 느끼는 감정이란 거군요.”

최윤은 단조롭게 정리했다.

여자는 침묵했다.

그녀가 한쪽 눈썹을 꿈틀했다. 화가 난 듯보였다. 최윤은 버릇처럼 그 모습을 따라했다. 그는 이것이 그녀가 강조하는 ‘학습’이라 여겼고, 특유의 기억력 덕에 ‘보통 사람들의 그럴 듯한’ 반응을 녹화 및 재생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하여 윤은 금세 이 쉬운 문제에 대한 관심을 잃었다. ‘곤혹스러움’과 ‘두려움’에 대해서도. 기실 그가 최근 흥미가 생긴 난제는 ‘사랑’이었다.

그 보통명사는 쓰이는 빈도에 비해 윤이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그는 많은 감정 명사를 남이 제게 보이는 반응으로 갈음하는 편이었는데, 최윤을 곤혹스럽게 여기는 이들은 많았어도 사랑스럽게 여기는 이는 거의 없었던 까닭이다.

지금 입을 닫은 한 사람을 제외하고는.

허나 보통 사람인 그녀의 사랑은 매체에서 나오는 ‘보통의 사랑’과는 또 달랐다. 매체 속 연인과 가족은 누구도 상대에게 바퀴벌레를 발견했을 때의 감정을 느끼진 못했던 것이다. 받아들이기 힘든 것을 마주할 때의 두려움도.

어느 한쪽이 거짓을 읊고 있었는데, 여자일 확률이 높았지만, 확실히 하려면 찔러 정리할 필요가 있었다. 물론 윤은 수 년간의 경험으로 이런 행동이 상대에겐 괴롭힘으로 느껴질 수 있음을 인지했으나 그로 인해 제 호기심이 충족된다면 그게 알 반가 싶었던 것이다.

마침내 여자가 말했다.

“윤. 아는 걸 물어볼 필요는 없어. 그리고 엄마라고 해야지.”

“소름 끼치실 텐데. 굳이?”

“그래도.”

본인이 배려가 필요치 않다면야. 윤은 선선히 턱을 끄덕여주었다. 그리고 제 괴롭힘에 피치 못하게 어울리는 그녀와 호혜적인 관계를 맺는 차원에서 말했다. 

“안심하세요, 엄마. 저 같은 게 다시 생길 확률은 극히 낮을 테니까.”

윤은 그게 그녀와 친부에겐 최근 가장 큰 고민거리임을 알았다. 그는 호기심 해소를 위해 책과 논문을 뒤져 얻어낸 결론을 공유했다.

허나 여자는 그 부분엔 반응하지 않았다.

“저 같은 게, 란 말은 또 누가 했니. 네 아빠?”

윤은 픽 웃었다. 정말로 흥미롭지 않은가.

“저는 그런 말을 앞으로도 계속 들을 텐데 누가 한 소린지를 일일이 알아내 따지는 건 비효율적인 행동 같은데요.”

“…네가 괜찮다면 다행이지만.”

여자는 숨을 푹 내쉰 뒤에야 겨우 말했다.

“어쩔 수 없어. 너를 사랑하니까.”

중얼거림에 가까운 낮은 목소리. 대화라기보다는 자신에게 주입하는 세뇌 같았다. 그리고 그게 그녀의 사랑이 재미있는 이유였다.

그가 듣기로 사랑이란 감정에는 반드시 두 사람이 필요했던 탓에.

“다 먹었으면 그릇 주렴.”

최윤은 선선히 식기를 넘겨주었고 그날은 말을 더 하지 않았다. 그는 원래 필요한 얘기가 아니면 자주 떠들지 않는 편이었으므로.

며칠 뒤 윤은 밤에 화장실을 가던 중 어떤 소리를 듣게 되었다.

“윤 아빠. 나 오늘 아침에 무척 사랑스러운 아이를 봤어….”

태몽인가. 곧 동생이 생기려나 본데.

예상대로, 얼마 뒤 윤은 아미라는 이름의 혈연을 얻었다.

어느 날 힐데베르트 탈레브는 붉어진 눈가를 손등으로 훔치고 있었다.

별일 없던 하루였기에 그 모습을 마주한 순간 윤은 멈칫했다. 그는 오두막에 들어오자마자 빠르게 상황을 셈했다. 휴대폰에 새로 설치한 해킹앱도, 이곳의 보안시스템도 들킨 것 같진 않았다. 애초에 존재가 노출되면 제게 알람이 오게 돼 있었으니.

오늘은 그 좆같은 음식이 맛없다는 말도 안 했고. 찰나에 하루간 제 잘못이 있었는지를 돌아본 최윤은 꿀릴 게 전무하다는 확신이 들자 물었다.

“뭐냐? 왜 울어.”

그러자 힐데베르트는 멎었던 눈물을 다시 조용히 흘리기 시작했다. 이미 푹 젖어서 투명하게 반짝이던 하얀 속눈썹을 연신 깜빡이며.

윤은 황당해졌다.

야근을 마치자마자 애인과 관계도 하고 노가리도 깔 겸 찾아온 차였다. 헌데 애인은 한 마디 인사 없이 사람을 보자마자 열린 수도꼭지처럼 눈물만 흘리기 바빴다. 이게 울 일이 잦긴 해도 이유 없이 울 녀석은 아닌데 무슨 일이지.

친구들 생각이라도 났나.

기실 최윤은 힐데베르트 탈레브가 우는 것을 싫어하진 않았다. 따지자면 선호하는 편이었다. 대체로 제 아래에서 흐느낄 때 한정이었지만.

같은 이유로 원인 모를 감정을 닦아내려 윤이 소파 앞 탁자로 다가가 티슈를 두 장 뽑을 때였다. 힐데는 소파에 앉아 지친 목소리로 말했다.

“윤. 이리 와보십쇼.”

최윤은 부탁대로 옆에 앉았다. 티슈로 연인의 눈을 부드럽게 누르는 것도 잊지 않았다. 눈물의 무게만큼 무거워진 티슈를 치우자 상대도 다소 진정된 듯했다.

힐데는 윤의 어깨를 양팔로 꼭 끌어안았다.

섹스하잔 뜻인가….

손이 슬금슬금 연인의 허리 아래로 내려갔다. 힐데베르트는 윤이 따라잡지 못할 속도로 애인의 손등을 쳤다. 일반인 상대였으면 뼈가 부러졌을 힘이었다.

“가만 있으라고요! 하여간 매번.” 

멀쩡했으나 윤은 보란 듯이 충격받은 손등을 다른 손끝으로 쓸어만졌다. 힐데는 헛웃음을 터뜨렸다.

“안 다친 거 알거든?”

최윤은 화제를 돌리면서도 손을 계속 주물렀다.

“야근하느라 사흘은 못했는데 고문하냐? 뭔데.”

힐데베르트는 미간을 찡그리더니 결국 윤의 손을 가져갔다. 이후 일 초만에 어깨를 씩씩거리곤 언성을 높였다.

 

“멀쩡하잖아요!”

“또 속냐.”

윤은 혀를 낼름했다. 힐데가 주먹을 쥐었다.

“이 사기꾼아.”

“난 웬만한 사기는 당한 놈 잘못이라고 본다.”

“하…. 자랑입니다.”

힐데베르트가 뒷목을 잡았다.

윤은 다시 물었다.

“그래서 무슨 일인데.”

그제야 평소 모습으로 돌아온 힐데는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그게, 저한테 갑자기 이상한 힘이 생겼거든요.”

“어.”

“특별한 예고 없이 시간을 이동하는 능력인데요. 하루가 지나면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오고요…. 안 따집니까?”

‘웬 만우절 헛소리냐’ 정도의 두드러지는 반응을 예상한 듯 힐데가 눈을 깜빡였다. 허나 윤은 놀라지 않았다. 힐데베르트 탈레브는 이 정도 거짓을 지어낼 창의력은 없는 존재였고, 오히려 애인이 울던 이유가 짐작되어 머리가 가벼워진 감도 있었기에.

윤은 코웃음을 쳤다.

“크리처 제압한다고 노래부터 불러제낄 때 네가 이상한 놈인 건 알아봤다. 그래서.”

“가끔 하루쯤 사라져도 놀라지 마시라고요.”

힐데는 불퉁하게 투덜거리곤 입을 닫았다. 그래도 얘길 마치니 전보단 속이 시원해진 기색이라, 최윤은 어이를 잃었다.

정말 이게 전부란 말인가?

인생을 대충 사는 놈인 건 알았지만.

“그리고.”

“네?”

“그게 다냐?”

윤은 혀를 찼다. 힐데는 제 실수를 인지조차 못한 듯 눈을 깜빡였다. 최윤은 힐데베르트 탈레브가 업을 완수하는 과정에서 지능을 상당 부분 잃은 듯하다는 오래된 추측에 힘을 보탰다. 결국 윤이 상황을 정리했다.

“갑자기랬지. 너 그 능력 몇 번 써봤냐.”

“어…. 방금 한 번이요.”

“사라지는 것의 범위는?”

“예?”

“나체냐, 피부로 접촉한 부분까지냐고.”

힐데베르트의 귓가가 벌겋게 달아올랐다. 윤은 늘 그랬으나 이번에도 제 말의 어디에 민망해 할 구석이 있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저런 면이 관계할 땐 재밌어 불만은 없었지만.

“좀 돌려 말해주면 안 됩니까? 접촉, 이던데요.”

“여기서 어떻게 돌려 말해. 그러면 공연음란죄로 잡혀갈 일은 없겠군.”

“으악!”

“접촉이 인정된다면 몸 안의 위치추적기도 너로 인정될 테고.”

“예?”

얼굴을 가리던 손바닥이 멈칫했다. 윤은 그 반응을 무시하고 휴대폰을 켜 하루간 힐데의 위치와 일정을 확인했다. 힐데베르트의 좌표는 몇 시간 동안 집에 고정되어 있었다. 최윤은 그것을 증빙으로 보여주며 심드렁하게 말했다.

“봤냐? 한동안 네가 이 집에서 사라진 적은 없어. 방금이랬지? 네가 이동해서 도착한 시간에서 하루를 써도 돌아오는 시간대는 고정되나 보다.”

“아니, 모른 척하지 마세요. 위치추적기는 또 언제 심은 건데.”

“기회라면 수천 번은 있었지.”

“사과를 할 때 아닙니까?”

“불만이면 너도 심든가.”

윤이 팔짱을 낀 채로 말했다. 힐데베르트는 으으, 하고 신음하더니 선택지가 그것뿐임을 깨달았는지 상황을 받아들였다.

“…생각해 봐야겠네요. 그게 나을 것 같기도 하고. 무르기 없깁니다.”

“어.”

“하아. 그래도 감사합니다. 어떻게 발현되는 능력인지 함께 확인해주신 거죠. 사실 지금도 좀 정신이 없어서, 거기까진 생각 못했습니다.”

“….”

“여기선 시간이 아예 안 흘렀다니 괜히 말했네요. 신경만 쓰이게.”

“바보냐. 얘긴 해야지.”

윤이 손끝으로 힐데의 이마를 툭 짚었다. 상념에 빠지는 듯하던 힐데의 금안이 다시 초점을 잡았다. 윤은 시선을 뚫어지게 마주하며 덧붙였다.

“처울고 있었잖아. 이유는 알아야 할 것 아냐.”

“….”

“수고했다.”

최윤이 연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힐데베르트 탈레브는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기실 윤은 능력의 발현 방식보단 그 능력을 상대가 어떻게 얻었는지를 상세히 듣고 싶었지만, 그 정도는 언젠가 알 수 있을 터였기에 당장은 흐느끼던 연인을 자극하지 않기로 했다.

 

힐데는 곧 윤의 어깨에 옆머리를 기대더니 말했다.

 

“생각해봤는데요.”

“또 뭘.”

“제가 혹시 최윤이 어렸던 시절로 가게 되면 윤의 시험지를 훔쳐야겠습니다. 예현이 한 번은 1등 할 수 있게요.”

“오.”

윤은 감탄했다.

그짓을 했으면 역사가 진작 바뀌었으리란 점에서.

“무능 자랑하냐?”

힐데베르트는 이번엔 윤의 발등을 밟았다.

그날 힐데베르트는 늦은 밤 오두막으로 돌아왔다. 윤은 문이 열리는 소리를 듣자마자 연인에게로 다가갔다. 전화하면 마중 나가겠다 했는데 그냥 수거해 올 걸 그랬나. 상대에겐 얕은 수준의 술내음이 남아 있었다.

“왔냐.”

“예. 기다렸습니까? 자도 됐는데요.”

허나 의외로 예상보다는 멀쩡한 기색이었다. 눈물 자국조차 보이지 않았다. 취할 때면 드러나는 특이한 말투도 헤픈 웃음도 전무했다.

그 사실이 믿기지 않아 윤은 애인의 턱을 잡았다. 그리고 우부붑 소리 내는 힐데의 고개를 멋대로 돌려 상태를 완전히 확인했다. 역시 나쁘지 않았다.

다행이긴 한데.

“괜찮아 보인다?”

윤이 외투를 받아들곤 물었다.

힐데베르트는 푸스스 웃었다.

“뭡니까. 괜찮으면 안 된다는 것처럼.”

“어. 괜찮을 리 없다고 확신했었다만.”

“….”

“숨기는 게 있으면 빨리 불어.”

“푸핫, 진짜. 귀엽네요, 윤.”

힐데가 미소 지으며 속삭였다. 취기가 뒤늦게 올라오는 모양이라 윤은 헛웃음을 흘렸다. 힐데는 발치에 다가온 티그를 밀크 대하듯 쓰다듬은 뒤―네 주인이 너를 마틴과 변신, 합체시켜도 널 아끼겠다고 연신 장담했다― 소파에 앉았다.

힐데는 꼴을 보다 못한 윤이 목구멍에 다이렉트로 꽂아넣은 숙취해소제를 마시고도 삼십 분이 지나서 정신을 차렸다.

“으으. 기다려주셔서 감사합니다. 티그를 안고 잘 뻔했네요…. 갑자기 너무 귀여워 보이더라고요.”

“나는.”

“취했습니까? 윤도 귀엽기는 한데 자신감이 너무 넘치는 것도 좀.”

“애인 놔두고 뭐하냔 뜻이었다만. 덜 깼냐?”

힐데는 멈칫하더니 가볍게 웃었다.

“그런가 본데요. 그래도 전부터 그리 생각했으니 거짓말은 아닙니다. 아시죠.”

윤은 연인이 술에 취했을 때 거짓을 지어낼 능력은 부족함을 알았다. 힐데베르트의 연기력은 평소에도 형편 없다는 것도.

됐다. 어차피 상대를 취조하는 데는 감정에 솔직한 현재가 편하기도 할 터였다. 결론을 내리는데 힐데가 선수를 쳤다.

“윤. 걱정한 거죠.”

“알긴 아냐.”

“하하. 그래도 생각보단 괜찮았습니다. 정말로요. 좋은 죽음이란 게 있을까 늘 의문이었는데…. 다행히 좋은 상은 있더라고요. 분위기가 나쁘진 않았어요.”

힐데베르트는 그렇게 동족의 장례식을 묘사하기 시작했다. 이야기를 면밀히 듣진 않아도 기억할 수는 있었기에, 윤은 그보단 연인의 상태를 확인하는 데 집중했다. 힐데는 사실을 알고 괴로워 하던 몇 개월 전에 비하면 그럭저럭 멀쩡해 보였다.

여자의 이름은 칼리. 삼백쯤 산 것으로 추정되며 살아 남은 이중에선 가장 장수한 동족이었다고 했다. 당연히 삼백 년을 산 타이탄이 지복을 받지 않았을 린 없으므로, 그녀 또한 영생을 누릴 예정이었으나, 칼리를 통해 모두 알게 된 것이다.

지복에도 한계는 있었음을.

칼리는 일 년 전부터 경미한 치매를 앓았고, 뇌의 노화를 스스로 인식한 네 달 전부턴 그게 신호가 된 듯 신체도 급속도로 노화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어제 사망한 것이다.

윤에겐 놀라운 소식은 아니었다.

힐데베르트가 ‘뇌만 멀쩡하면 복구할 수 있다’고 제 신체의 비밀을 알렸을 때 가설을 세운 까닭이다. 말인즉 뇌의 손상만은 세계수의 능력으로도 회복이 어렵단 뜻 아닌가? 회복이 불가한 장기에서 노화가 진행되지 않을 확률이란.

사실 지복에서 영감을 받아 인간에게 이식한 강화신체부터 결과물은 비슷했다. 인간은 회복력과 체력, 근력 등 거의 모든 부분에서 제 성능을 환골탈태하듯 끌어올릴 수는 있었지만, 지능지수나 인격이 바뀌는 수준으로 뇌를 고쳐낼 순 없었다.

강화신체를 이식한 뒤면 인간은 바뀐 체력과 힘을 뇌에 적응시키려 몇 년은 적응 훈련을 거쳐야 했다. 인간은 크리처와 싸울 인간형 무기를 수천 수만 명 양산할 수 있었으나, 이브나 뮐른 급 두뇌를 양산해내진 못했다.

따라서 지복을 받았든 강화신체를 이식했든, 뇌를 정복하지 못한 탓에, 수명이 수백 년 늘어나더라도 인간이라는 종의 최후는 분명했던 것이다.

누구도 도망칠 수 없는 필멸이란 운명에….

그리고 처음 그 사실을 알게 됐을 때 힐데베르트는 극도로 불안정한 모습을 보였다. 빙제는 원로가 될 그가 영원히 군림할 것을 경계하였기에, 그 전제가 잘못됐다면 서로를 그토록 찍어누를 필요도 없었던 것이다.

반면 윤은 진실에 연연하지 않았다. 처음부터 바라서 얻은 영생도 아니었다. 연인의 종족과 인간 사이의 알력 다툼으로 전쟁이 터져 저도 죽을 뻔하긴 했으되, 어차피 죄 과거사였다. 당시의 빙제와 힐데는 윤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 이들도 아니었다.

그러나 힐데베르트 탈레브가 진실에 고통스러워 하였으므로, 그 상처는 최윤의 삶에도 어떤 흔적이 되었다.

그것은 바다에서 익사하는 인간이 무턱대고 곁의 구조자를 붙잡아 동반 사망에 이르는 행위와 비슷했다. 힐데는 온몸을 허우적거렸고 길지 않은 손톱으로 자꾸만 생채기를 냈다. 필멸 자체보다는 그게 미뤄 온 정신적인 고통을 죄 터뜨리는 트리거가 된 탓에.

다만 최윤은 날 때부터 타인의 아픔을 제것 삼진 못하는 인간이어서, 연인을 익사시키려 드는 해수를 강제로 몇 바가지 퍼마셔도 짜증만 날 뿐, 타격받진 않았다. 물론 정신을 차린 힐데는 성격상 그조차도 미안해 했지만.

최윤은 연인에게 그건 제대로 된 의식 없이 표현한 울화였을 뿐이니 신경 쓸 필요도 없단 결론을 분명히 했으나 그가 제 말을 이해하진 못했을 터다.

기실 힐데베르트 탈레브의 진짜 불치병은 다정일 터이므로.

그리고 그게 늦은 밤이 되도록 윤이 힐데베르트를 기다린 이유였다. 지복을 받은 동족의 첫 자연사가 연인에게 어떤 영향을 끼쳤을지 몰라서.

허나 덤덤히 장례를 설명하는 힐데는 본인 말대로 그럭저럭 괜찮아 보였다. 오히려 그는 눈가를 접어 미소 짓더니 중얼거렸다.

“델테이가 얻은 유언을 자리에서 읽어줬는데…. 오래 살았으니까 만족한다더라고요. 좀 부러웠습니다. 저도 그럴 수 있어야 할 텐데.”

“죽으면 끝인데 만족은 무슨.”

“하지만 괜찮아 보이던 걸요. 윤이 저보다는 많이 어리니 웬만하면 제가 더 일찍 죽지 않겠습니까.”

하. 윤은 코웃음을 쳤다. 혹시 싶었던 의혹이 역시였던 까닭에. 연인은 그 가능성이 마음에 들어서 제 기분을 갈무리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 말은 곧 자신은 그가 즐겁게 떠난 시간을 오래도록 무료히 보내야 한단 뜻임에도. 취기에 진심을 툭툭 떨궈내며….

최윤은 짜증을 섞어 말했다.

“힐데베르트. 차라리 멀쩡할 때 백 년간 냉동되는 게 어떠냐. 그쯤 지나면 기술이 해결해줄 것 같다만.”

“그 말 언제 하나 했네요. 백 년 뒤에 깨어났는데 아는 사람이 윤뿐이면 바로 댁부터 죽이고 저도 죽을 겁니다. 진심이라고요.”

그럼 거짓일까.

윤은 침묵했다. 예상한 답이었기에 분노할 까닭은 없었다. 제 연인이 지나치게 강해서 제 통제 바깥에 있음은 처음부터 아는 사실 아니었나. 이 고집쟁이가 본인이 생각하는 가장 중요한 문제에 있어서는 전혀 물러서지 않는 등신임도.

“윤. 화났습니까?”

허나 취한 힐데가 뒤늦게 연인을 흘끔거리자, 윤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안 날까?”

“…죄송합니다. 제가 잘못했네요.”

“그래도 맞춰줄 생각은 없겠지.”

“예. 윤은 저 없이도 살아갈 수 있으니까요.”

힐데베르트 탈레브는 쓰게 웃으면서도 단언했다.

최윤은 아주 오랜만에, 성교완 조금도 상관 없이, 이것의 목을 졸라버리고 싶다고 생각했다. 당사자가 원할 일이라 하진 못했지만.

힐데는 몇 달간 한국어를 배우고 있었다.

한국인 애인과 친구들이 주변에 존재하긴 했으나 그건 필요나 강요에 의한 행동은 아니었다. 연인인 최윤은 과거에 의미를 두지 않는 부류였고, 전세계에 공용어와 번역 앱이 도입된 지도 한참 지나 모국어를 익히는 이들은 거의 사라진 상황이었다.

힐데베르트를 움직인 것은 순전히 제 욕망이었다. 약지에 반지를 끼워주며 제국어로 미래를 속삭이던 연인을 마주한 순간 발현된.

결혼은 지구에서도 제국에서도 오랜 시간 보편적으로 존재해온 제도였다. 그러므로 윤이 제게 청혼을 제국어로 하든 자신이 상대에게 공용어로 속삭이든, 힐데는 결과에 차이가 날 거란 가정조차 떠올린 적이 없었다.

허나 실제로 얻은 약속은.

망치로 머리를 두들겨 맞은 듯 뇌리가 하얗게 비는 감각이었다. 제국어의 어감은 공용어와는 완전히 달랐다. 말들이 제 심장을 두드리며 다가오는 느낌도.

이 감각을 저 또한 전해주고 싶었다….

그런 의도로 시작된 학습은 연인만큼은 아니어도 꽤 성과를 얻은 상황이었다. 원래도 기억력이 좋아서 언어 공부엔 재능이 있는 편이었는데다, 영어와 달리 한국어는 의욕이 바탕되다 보니 남는 시간에만 공부해도 진도가 쭉쭉 나갔다.

하여 힐데는 새 책을 구할 겸 센터 코어의 코리아 타운을 찾았다. 귀신처럼 검고 하얗고, 아무튼 굳이 따라오진 않았으면 했던 잘생긴 짐덩어리와 함께.

힐데는 서점 내부 거울을 보자마자 탄식했다.

“역시 먼저 돌아가시죠. 너무 눈에 띕니다.”

둘 다 선글라스를 꼈는데도 최윤 특유의 아우라는 전혀 숨겨지지 않았다. 힐데베르트는 거울 속 연인의 날렵한 턱선을 불만스럽게 손가락질했다.

윤은 코웃음을 치고는 선글라스를 벗은 뒤 힐데의 것도 벗겨내 장바구니에 넣었다. 붙어다니니 평소만큼 효과도 없는데다 쓰고 다니기도 불편해서 힐데는 그가 알아서 하게 두었다. 결국 평소대로 눈이 마주치자 최윤이 말했다.

“본인이 문제란 생각은 안 들고?”

“제가 왜요.”

“난 한국인이라 피부색이라도 맞춰지지…. 아니다, 아무튼 피하기만 하면 네가 노래를 부르던 데이트는 어떻게 할 건데? 집에 틀어박혀서 섹스만 하잔 뜻이었으면 찬성이다만 그게 불만인 거 아니었냐?”

“장소 좀 가리십쇼!”

“본인이 열 배는 시끄러우면서?”

휴일 아침부터 침상을 빠져나온 게 그리 불만인가.

입꼬리가 심술맞기 그지 없었다. 동시에 힐데는 제게 집중되는 시선을 느꼈다. 이 시대엔 서점을 찾는 인구가 한정되어 있어 그나마 다행이었다.

“…책이나 빨리 사야겠습니다.”

할 말이 없어진 힐데는 예리한 눈썰미로 살 예정이던 책을 쓸어모았다. 그리고 재주 좋게 책장 사이를 지나가던 중 멈칫했다.

“아.”

“넌 이 책이 그렇게 좋냐?”

마찬가지로 책을 발견한 윤이 그것을 집어들었다. 표지엔 삐뚤빼뚤한 그림체로 그려진, 왕관 쓴 금발 소년이 있었다.

[어린 왕자].

힐데는 살풋 웃었다.

“그렇게까진 아닙니다만, 다정하잖아요.”

이걸로 영어를 배운 추억도 있고 내용도 다정해서 아끼는 책이긴 했다. 하지만 ‘그렇게’ 라고 할 만큼은 아니었는데, 윤은 요즘 시대에 영어로 된 출판본이 제 책장에 꽂혀 있는 걸 눈 여겨 본 듯했다. 그는 근처의 판본도 몇 권 확인한 뒤 하나를 장바구니에 집어 넣었다.

“이걸로 사라. 문장이 제일 깔끔해.”

본인이 다정하다고 한 건 아니었는데 말이다.

힐데는 키득거리다 물었다.

“윤은 좋아하는 책 없습니까? 한 권 사드릴게요.”

“됐다. 여기엔 없어서.”

“뭔데요?”

“전공책은 공용어로 보는 게 낫거든. 신간은 요샌 번역도 안 돼.”

“…갑자기 하나도 안 궁금해졌습니다.”

힐데가 혀를 내둘렀다.

윤은 짧게 눈을 깜빡였다.

“유용하지 않나? 모르던 지식을 알게 되면.”

“지식도 지식 나름이죠. 전 핵 관련 책들을 읽는 게 고역이었단 말입니다.”

상황에 떠밀려 강제로 읽은 책이었기에 더 불편할 수밖에 없었다. 힐데는 결국 그 책들을 읽기 위해 ‘핵 관련 도서는 재밌다’는 자기최면을 걸었는데, 의외로 효과가 있어 정보는 다 수집하긴 했지만, 제정신으로 돌아온 지금 그런 경험을 다시 하고 싶진 않았다.

어깨를 떨자 윤이 픽 웃었다.

“고생 좀 했겠다.”

그러다 의아해진 듯 물었다.

“그러면 이 동화책은 왜 좋아하는데? 더 배울 것도 없잖아.”

“책을 꼭 배우려고 읽는 건 아니잖아요?”

“아니면 책을 왜 읽어.”

도돌이표였다. 힐데베르트는 웃음을 겨우 삼켰다. 유익하지 않으면 책을 왜 읽냐는 의문이 소시오패스 다워서. 힐데는 윤이 쥔 장바구니에서 그가 집어넣은 책을 꺼내 표지를 툭툭 두드렸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좋았던 점을 말했다.

“뭐, 제가 이방인이어선지 인물에 이입되는 부분도 있고…. 배울 점도 많은데요. 좋아하는 문장도 몇 개 있고요. ‘누군가에게 길들여진다는 것은 눈물을 흘릴 일이 생긴다는 것을 뜻할지도 모른다’ 라거나. 멋지지 않습니까?”

힐데베르트는 이유를 설명하고서야 제가 이 책을 ‘그렇게’ 좋아한단 사실을 알았다. 이번에도 최윤이 옳았던 것이다.

이 인간은 어떻게 나를 이렇게 잘 알지.

놀라움에 연인을 뚫어져라 볼 때였다.

“울어줘?”

“예?”

말릴 시간도 없었다. 최윤은 낌새도 없이 평소처럼 무감한 낯짝으로 눈물 한 줄기를 주륵 흘렸다. 맑은 뺨 위를 투명한 액체가 스쳐갔다.

“미친, 소름 돋으니까 그만하십쇼.”

“그래.”

힐데는 부리나케 제 소매로 윤의 눈가를 훔쳤다. 연인은 자신이 언제 울긴 했냐는 듯 눈물을 그쳤다. 진기명기가 따로 없었다….

허나 어쨌든 그것은 장난일 터였지만, 남의 눈치를 지독히 안 보는 소시오패스에겐 부조리하게도―혹은 본인은 이 상황도 신경 쓰이지 않을 테니 제게만 부조리하게도―, 곁에 관중이 있어 장난을 넘어서는 행위가 되어버렸다.

힐데는 수군수군 커지는 음성 사이로 ‘힐데베르트 탈레브가 1기 배저 최윤에게 이별을 요구했다’는 소문이 득세하는 것을 듣곤 양팔을 크게 내저었다.

“아니, 아닙니다! 전부 오해라고요!”

“헛소문 정정해서 뭐하게. 다 샀으면 가지.”

“일 치고 가자 하면 답니까. 이거 어쩔 거, 어?”

힐데는 눈을 깜빡였다.

군중 속에 아미가 있었다.

이, 이런 한심한 꼴을 최윤보다 365배 소중한 내 빛과 소금에게 보이다니. 식은땀까지 흐르는데 윤은 친동생을 발견하지 못한 듯 한 술 더 떴다.

“윤. 저기―”

그가 힐데의 턱을 붙잡고는 입술 사이로 혀를 밀어넣은 것이다. 당황해서 으악, 하고 터질 뻔한 목소리마저도 잡아먹는 딥키스였다.

윤은 몇 분이 지나서야 연인을 놓아주었다.

[씨, 발….]

힐데는 번들번들해진 입술을 손등으로 닦아내며 자괴감을 느꼈다. 어떻게 이런 파렴치한 짓을 남들 다 있는 곳에서 하는지 몰랐다! 저승에 계실 신관분들은 나중에 어떻게 보라고? 특히 억울한 부분은, 이 노출증과 다름 없는 행위가…. 꽤 좋았단 사실이었다.

제 도덕성에 낙담한 힐데는 성을 냈다.

“지금 공공장소에서 무슨 짓입니까?”

허나 최윤은 뻔뻔했다. 그에겐 의외로 명분이 존재했던 것이다.

“해결했잖아. 그리고 이 정도는 다들 해. 네 친구들도 너만큼 고리타분하진 않던데 영감님도 그 나이쯤 드셨으면 뻔뻔해지시죠.”

힐데베르트는 그제서야 곁을 둘러보았다. 금방이라도 튀어나올 것처럼 커진 눈들 사이로 ‘그냥 사랑 싸움이었나 봐’ 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정말 이렇게 해결됐다고?

황당했지만 그것이 진실이었다. 모인 이들은 딴엔 낮은 목소리로 의견을 주고받았으나 감각이 예민한 힐데에게 그 소리는 명확히도 잡혔다.

와중에 아미는 사라진 채였다. 아마 오빠와 후배가 부끄러워서였겠지만, 힐데는 자신을 위해 이 사태를 덮어두기로 하고 윤의 손을 잡아챘다.

“일단 계산하고 튑시다.”

머리가 어지러웠다. 힐데가 부산스럽게 카운터로 다가갔다. 최대한 빨리 도망칠 셈이었다. 허나 평소의 무감정한 표정으로 돌아온 윤은 차분히도 말했다.

“힐데베르트. 이런 상황을 한국어 속담에선 뭐라 하는지 아냐.”

“뭔데요.”

[안에서 새는 바가지 밖에서도 샌다.]

[자랑이다, 인간아.]

최윤이 피식 웃었다.

빌어먹게 잘생긴 낯짝이었다.

모든 일이 잘 풀릴 것만 같던 청명한 하루. 힐데는 크리처 소재가 잔뜩 들어 있는 포대 자루를 어깨에 멘 채로 과학동에 들어왔다. 

개간 업무를 나가기 전에 퀘스트를 살펴 보고, 돌아와서 과학자들에게 샘플을 건네주는 일은 힐데의 습관이 된 지 오래였다. 급전이 필요하진 않았으나 어차피 시간상 손해 볼 일도 아니었고, 받은 상대가 유쾌해진 게 보이면 자신도 즐거웠던 까닭이다.

기실 힐데베르트 탈레브는 과학자라는 명찰을 단 인간들을 유독 아끼는 편이었다. 누구에게도 설명할 순 없었지만 그들은 독특하게 사귀는 재미가 있었다. 수많은 인간중에서도 첫 친구가 이브였던 게 우연일 리가.

최초의 연인도….

“오랜만입니다. 힐데!”

디스코볼이 불쑥 다가왔다. 그것은 힐데베르트가 맞인사를 하기도 전에 행성처럼 몸체를 빙빙 돌리며 조명을 쏘아댔다. 이곳이 콘서트장이라도 된다는 듯.

배저 업무완 일 그램도 상관 없는 기능이었다.

예현이 시큰둥할 법했다. 하지만 과학자들은 좋아했다. 그들은 직장생활로 수면장애를 얻은 현대인이 ‘잠 잘 자는 법’을 검색했다가 발견한 영상에 취한 듯 조명에 몽롱히 홀려갔다. 깨워야겠는데. 힐데는 내심 웃으며 인사했다.

“마틸다. 잘 지냈어?”

디스코볼은 조명을 끄고 말했다.

“저야 늘 그렇지요! 힐데는 퀘스트를 끝내러 왔군요?”

“응. 이 정도 상태면 될까?”

힐데는 포대를 내려놓은 뒤, 자루를 살짝 열어서 인공지능에게 보여주었다. 디스코볼은 몸체의 가장자리에 붉은 원을 그렸다.

“충분하죠! 다들 힐데가 의뢰를 맡아주면 얼마나 좋아하는지 모른답니다! 드물게 샘플을 섬세히 다뤄준다면서요. 저기 오네요!”

“힐데. 오랜만이에요!”

힐데는 몸을 돌렸다. 의뢰주인 여성 과학자가 팔을 흔들며 다가왔다. 힐데베르트는 당연히, 인사를 받은 상대로서 그녀에게 인사하려 했다.

하지만….

“고마워요. 잘 받았어요.”

포대 속 샘플의 상태를 확인한 과학자가 싱글벙글 웃었다. 허나 힐데베르트는 연기로도 웃을 수 없었다. 겨우 결정을 내린 그가 입을 열 때였다.

“리사. 그거 바로 뮐른한테 갖다 줘.”

“아. 넵!”

“왔냐. 가자.”

소리 없이 다가온 최윤이 단단히 손목을 붙들었다. 상황을 파악한 힐데는 반항하지 않고 그를 뒤따랐다. 그리고 빈 회의실에 도착하자마자 말했다.

“윤. 저 고장났군요. 언제부터였습니까?”

조금 전, 리사의 이름이 전혀 떠오르지 않았다.

힐데베르트는 기본적으로 사람을 외는 기억력엔 자신이 있었다. 그쪽이라면 윤과도 경쟁할 만하다고 내심 가늠해봤을 만큼. 물론 범죄자의 이름을 헷갈린 적은 있었으나 그처럼 수십 년만에 본 것이 아닌, 일주일 전에도 만난 이의 인적은 기억하는 게 ‘옳았다.’

허나 그러지 못했다.

최윤은 헛웃음을 흘렸다.

“웬 추측이냐. 사람 기억은 원래 불안정해.”

남자는 찰나에 평소처럼 무감정한 낯짝이 되었다.

힐데는 연인이 왜 자신더러 연기력이 형편 없다는 평을 내렸는지 알 듯싶었다. 이건 자신이 따라잡을 만한 기술이 아니었다. 어쩌면 힐데베르트 탈레브의 시한부 선고를 앞두고도, 최윤은 적어도 겉은 평안해 보였다.

그러나 힐데는 오늘 이전에도 최근 미묘한 기억의 누수를 느꼈었고, 그때마다 윤이 묘하게 화제를 돌린 것도 떠올랐으며, 무엇보다도 한 가지를 확신했다.

“리사와 바람이라도 피십니까?”

최윤의 연인으로서.

“전 윤이 남의 이름을 그렇게 쉽게 부르는 인간인 줄은 몰랐는데요. 임무를 몇 번 뛰었는데도 여전히 릭을 소르디라고 부르잖아요.”

윤은 혀를 찼다.

“그건 소르디가 따질 일이겠지.”

“아니면 마틸다와…. 마틸다는 진짜 오래 전부터 수상하긴 했습니다. 절 팽개치고 끌어 안고 잔 적도 있었잖아요. 모를 줄 알았나?”

힐데는 부러 윤을 흘겨보았다.

최윤은 백기를 들었다.

답지 않게 한숨을 크게 내쉰 것이다.

“반 년쯤 됐다. 그건 마틴이고.”

아. 결국. 힐데는 주먹을 꽉 쥐었다. 부러 장난쳐서 끌어올렸던 분위기가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힐데는 아주 오랜만에 숨통이 조이는 듯한 초조감을 느꼈다.

“…내일 검사를 받아봐야겠네요.”

그게 급한 대로 끌어모아 발휘한 용기였으나 사실 힐데베르트는 알았다. 윤의 미동 없이 가라앉은 검은 눈에서, 결과를 기다릴 필요는 전무하리란 것을.

최윤은 예상 외로 힐데베르트 탈레브를 자유롭게 풀어두었다.

검사 결과를 알게 된 뒤로 연인이 자신을 감금한다거나―‘해줘?’라고 했다―, 냉동한다거나―‘마음에 든다’고 웃었다―, 도청기를 심을지도 모른다는―‘안 했을까?’ 라고 되물었다― 망상에 시달리던 힐데는 겉치레일지 모를 자유도 일단 감사히 받아들였다.

거의 열흘 동안 기상하자마자 휴대폰으로 날짜를 확인하고, 대문이 잘 열리는지를 체크한 뒤, 옆집을 찾아가거나 예현에게 전화해서 수명이 다 해 사망한 대자는 AI예현으로 교체되었으며 이 순간은 트루먼쇼와 비슷한 힐데베르트쇼가 아닌지를 점검해 얻은 결론이었다.

그러다 시작된 통화가 삼십 분 넘게 이어진다거나 아미, 윤과 더불어 아침 식사를 하는 것은 꽤 즐거운 감각이기도 했다.

힐데베르트 탈레브는 22세기를 살아가고 있었다.

아직은 무사히….

아닌가. 너무 미화했나? 휴대폰을 자주 보지 않고 살아온 자신이 기상한 뒤 폰을 열자마자 받는 문자가 ‘깼냐’고, 예현이나 아미가 업무상 전화를 받지 못할 때면 연결음이 나기도 전에 ‘코어 나갔다’는 알림이 뜨는 상황을 ‘무사히’라 하기엔 어폐가 있어 보였다.

힐데베르트 탈레브는 22세기를 살아가고 있었다, 아직은.

다행이었으나, 어느 날 힐데는 섭섭함을 못 이기고 따져묻기도 했다. 해킹 앱에 위치 추적기에 도청기도 덕지덕지 달아놓고는!

“왜 제가 윤과 렉시크 누들 가게에서 데이트하고 싶다고 중얼거리는 말만 무시하는 겁니까?”

“처음 듣는데. 치매 때문에 헷갈린 거 아니냐?”

최윤은 덤덤한 낯짝으로 개 구라를 쳤다.

“와…. 그 얘기만 데시벨이 낮아졌을 린 없잖아요. 시한부 환자의 버킷리스트가 그것뿐인데 그것도 못 들어줍니까? 렉시크 쌀국수가 나왔댔다고요!”

“누가 들으면 한 번도 간 적 없는 줄 알겠다.”

윤은 한심하단 눈으로 힐데베르트를 흘겨보면서도 람보르기니를 끌고 연인과 데이트에 나섰다. 최윤은 렉시크 기본맛은 절대 먹지 않는다는 점만 빼면 괜찮은 애인이었다. 힐데베르트 탈레브를 감시하고 도청하고 추적하고 종종 냉동하고 싶어 하는 충동을 보인단 점만 제외하면, 어, 아마도.

최윤이 긴급 상황에도 방목적인 결론을 내린 데는 당연히도 과학적인 이유가 있었다. 경증 치매 환자는 가능한한 난제와 부딪히게 해서 두뇌를 최대한 쓰게 하는 게 증상을 지연시키는 데 낫단 것이다. 덕분에 힐데는 아직까진 그럴 듯한 일상을 영위중이었다.

하지만 가끔은, 본성에 맞지 않게 결정을 떠밀려 내려야만 했던 누군가가 너무나…. 안쓰럽게 느껴질 때가 있어서.

힐데는 언젠가 동침 후에 물었다.

“윤. 냉동은요?”

“너 죽고 나 죽겠다며.”

신경질적인 말투. 아이가 아끼던 장난감을 빼앗긴 듯한 꼴에 힐데는 킥킥 웃었다. 그리고 쉰 목소리로 연인의 귓가에 속삭였다.

“사실 당신도 죽일 수 있을진 모르겠는데. 솔직히 못할 것 같습니다.”

“그러면 그러거나 지금이나 다를 게 없지.”

고려한 부분인 듯 최윤은 차분했다.

힐데베르트 탈레브는 쓰게 웃었다.

동족이 사망했던 날부터 어떤 소원이 생긴 게 문제였다. 자신도 이 나이면 살 만큼 살지 않았나. 요우가 언젠가 언급했던 호상이란 단어처럼, 이 기회에 평화롭게 생을 마무리짓고 싶다는 이기적인 욕망. 다사다난한 상황 탓에 그동안 꿈도 꾸지 못했던 가능성이 너무, 눈 돌아갈 만큼 매력적으로 느껴졌던 것이다.

최윤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사랑>함에도.

그가 긴 시간 저 없이 남겨질 것을 알면서도.

“죄송합니다. 윤.”

처음부터 확신했지만 이 관계에서 최윤은 일방적으로 손해를 보고 있었다. 그가 저에게 흉이 진 손을 굳이 내밀었던 게 의아했을 만큼, 이번에도.

윤은 덤덤히 말했다.

“너 실성한 뒤에도 안 한단 얘긴 안 했다만.”

“하하!”

힐데는 맑게 웃었다.

그 웃음이 어떤 뜻인지는 자신도 이해하지 못했다. 그냥, 그냥 좋았다. 귀엽고 사랑스러웠다. 하나뿐인 제 연인이….

힐데는 윤의 목 언저리에 치아로 상흔을 남겼다.

그 흔적이 신기루처럼 사라질 것임을 알면서도.

어쨌든 합리적인 이유를 들은 뒤로, 힐데베르트는 일부러라도 몸을 움직이고 머리를 쓰려 애썼다. 운전만은 반드시 자율 주행을 택했지만.

근처 대형 마트에서 장을 보는 것에 대한 의견도 묻자, 윤은 드물게 기특하단―약간 놀라움도 담아― 시선으로 힐데를 보곤 카드를 건넸다.

“좋은 생각인데. 결제는 이걸로 해라.”

“빈정 상해서 못 쓰겠는데요. 제 카드도 있고요.”

“내 걸 써야 내 폰에 바로 알람이 꽂혀서 편해.”

“진짜요?”

그 이유라면 제 명의의 카드를 써도 결과는 똑같을 것 같은데. 힐데가 흘겨보자 윤은 청량하게 웃더니 말했다.

“알려줘?”

세상엔 열지 않는 게 나은 상자도 있는 법이다.

“아뇨. 덮어두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그럼 한도라도 정해주시죠. 백 만원이면 되지 않을까요?”

“굳이? 네가 완전히 미쳐버려서 10억을 일시불로 긁어도 상관 없어.”

재수없는 부르주아 같으니.

“무슨 생각 하는지 보인다. 자랑하던 팔콘 재산은 어디로 가고.”

“요우한테 동족들 돕는데 쓰라고 줬단 말입니다.”

“돈은 평생 못 모을 [팔자]군.”

“안 모으는 거라고요! 아무튼 한도나―”

“10억을 써도 상관 없다니까. 그 정도 쓰면 정신이 번쩍 들지도 모르고.”

최윤은 같은 말을 두 번 했다. 말인즉 세 번째까지 윤이 그 얘길 할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힐데는 한도 없는 블랙카드를 황송하게 받아들여야 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그 거대한 애정에 대고, 대자를 위해 시험지를 바꿔칠 생각이나 했다고 천벌을 받은 건지.

장바구니를 쥐고 귀가하던 어느 날. 힐데는 흑색 컬러 렌즈 너머로 치솟아오른 불길에 말을 잃었다. 치안이 보장된 집 근처완 완전히 다른 고속도로였다. 이런 일을 겪어본 적이 없었다면 제가 ‘꿈의 목소리’에 홀린 건 아닌지도 의심했겠지만….

힐데베르트는 침착하게 상황을 파악했다. 차량 세 대가 하늘을 위협하듯 불타올랐다. 무지막지한 열에 현장과 떨어져 있는 제 살가죽도 녹아내릴 듯싶었다. 앞선 두 대는 깔끔하게 전소. 마지막 한 대는, 힐데는 멈칫했다.

응애―.

사고 현장과 약간 거리를 두고, 우는 아기를 섬뜩할 만큼 무표정한 낯으로 끌어안은 아이가 있었다. 작은 몸집을 이용해 차창으로 차를 빠져나온 듯했다.

기묘한 풍경이었다.

아이는 미친 듯 우는 제 동생을 안았을 뿐, 달래진 않았다. 평소였다면 시끄럽고 귀찮아서라도 아기를 도닥였을 터다. 그 전에 불이 더 치솟을 가능성이나 매연을 들이마실 상황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자리를 벗어났을 테고. 따라서 고요한 시선의 끝에….

한 여성이 엎드려 누워 있었다.

하반신이 완전히 차체에 깔린 채.

핏물이 바닥에 웅덩이를 이뤘다.

심각한 부상, 아니, 사망이었으나 기름과 차체가 타오르는 냄새가 훨씬 더 자극적이어서 혈향은 눈치 채지도 못했다.

게다가. 힐데베르트는 입술을 짓씹었다. 긴 머리에 얼굴이 가려져 상대를 제대로 인식할 수 없음에도 여성은 체구부터 제법 익숙했다. 힐데는 그녀에게로, 혹은 제 아이에게로 무작정 달려갈 뻔하다가 정신을 차렸다.

당사자가 말했다.

역사는 바뀌어선 안 된다고.

힐데는 머리를 식히기 위해 갖은 애를 썼다. 그녀는 죽었다. 만에 하나의 확률로 살아 있대도 얼마 뒤 사망할 터다. 손 쓸 수 없는, 써선 안 될 운명이다.

이 찰나가 제 연인이 고아가 된 이유일 테니.

하지만….

참을 만한 기분이 아니었다. 그녀는, 새뮤얼의 할아버지가 온다 해도 구하지 못하겠지. 힐데의 현실 감각은 그녀를 즉시 포기했다. 허나 가라앉은 눈으로 제 친모의 시체만 관찰하는 아이는. 상황을 모른 채 목이 쉬도록 우는 아기는.

젠장. 못 참겠다.

힐데는 장바구니를 팽개치고 아이에게로 달려갔다. 이 순간 역사가 틀어지면 자신이 그를 다신 보지 못할 수 있음을 알면서도. 그저 감정에 저를 던졌다.

후회하고 싶지 않았다.

그런 아픔은 이미 과하게 앓아보았다.

아이는 메마른 눈으로 인기척을 마주했다.

힐데베르트는 그런, 감정이라곤 없이 버석버석한, 마치 개구리 시체를 관찰하는 듯한 시선을 잘 알고 있었지만, 그게 오랜만에 낯설게 느껴지기도 했다.

윤은 이제 힐데를 그리 보지 않기에.

힐데베르트는 목소리를 다듬었다. 한국어를 배워 둬 다행이었다. 아직은 꽤 기억하고 있었다. 귀찮던 렌즈도 끼고 나오길 잘했다. 시선을 회피하는 용도로 윤이 제작해준 그것은 특이한 눈 색을 깔끔하게 덮어주면서도 이물감 없이 본기능을 유지하게 해주었다.

마침내 힐데가 말했다.

 [아가야. 괜찮니?]

윤은 눈을 한 번 깜빡였다. 그리고, 끝이었다. 수상해서 재고 있군. 어른이라도 도움이 절실할 상황에. 하여간 어려져도 범상치 않았다.

힐데베르트는 웃음을 삼키고 손을 내밀었다.

[여긴 위험하니까 도망가자.]

[저승사자? 악마?]

아. 인간도 아닌가.

윤답지 않게 현실과 동떨어진 단어가 의아했지만 상황을 돌아보니 납득은 됐다. 차를 나오려다 실패한 친모 외에도 많은 사람들이 사망했을 터였고, 돌연 나타난 제 외양은 지나치게 이국적이었다. 외국인에 익숙지 않은 시기라면 상상의 나래를 펼칠 법했다.

그래도 최윤이 악마를 상상하다니. 귀엽네.

매연이 세상을 삼킬 듯 치솟아 오르며, 살이 열에 녹으려는 상황에, 연인의 어머니의 시체를 바로 옆에 두고도 할 생각은 아니었지만 본심은 그러했다.

당황하기엔 너무 많은 시체를 봐온 것이다.

답을 얻어내지 못한 아이가 결국 먼저 말했다.

[저 여자를 살려.]

[예?]

[대신 나를 죽이고.]

윤이 검지를 뻗었다. 힐데베르트는 조용히 그 길을 따라갔다. 손가락 끝에는 당연히 이미 죽은, 연인의 어머니밖에 없었다.

잠깐 숨이 막혔다.

힐데베르트는 이 이치를 지극히 예전부터 알았다. 차라리 저를 죽이고 그들이 살아남길 염원하게 되는 과정을. 비록 윤의 사고방식과 도출 결과는 제것관 다르다 해도. 최윤에게서 얻을 것으론 예상도 못한 반응에, 힐데는 심장이 송곳으로 푹 찔리는 듯했다.

상당한 시간이 지나서야 힐데는 고개를 내저었다.

윤의 눈은 뱀의 그것처럼 수축했다.

[불가능한가? 어린 애가 사력을 다해 부탁해도?]

형형한 눈과 쉭쉭거리는 목소리로 하는 말이 부탁이라기보단 협박 같아 정신은 들었다. 또한 이 요청은 어차피 자신은 이뤄주지 못하는 것이었다. 그게 가능했다면….

힐데는 무릎을 꿇고 앉아 정면에서 단언했다.

[예. 안 됩니다, 윤.]

최윤이 눈썹을 꿈틀거렸다. 생전 처음 보는 상대가 제 이름을 아니 수상하겠지. 수상할수록 좋다. 그가 자신에게만 집중할수록.

힐데는 말을 끊어가며 강조했다.

[생존자는 윤이고, 사망자는 저분이니까. 그리고 죽은 사람은 살릴 수 없어요. 무슨 짓을 해도.]

살리는 것 이전에 힐데베르트는 그녀를 차체에서 꺼내지도 못했다. 수사가 어그러지면 역사가 바뀔 수 있으니까.

사실 지금 자신이 최윤에게 다가온 것도 잘한 짓 같진 않았다. 연인 본인이라면 이렇게 얘기할 터다. ‘최윤’은 차량에서 벗어났으니 생존이 확정된 반면, 상황을 바꿀 수 없는 자기 위안적 위로를 건네려고 역사의 변경 가능성을 안음은 치명적인 실책이라고.

허나 별 수 없었다. 윤도 제 입장이 되어봐야 한다. 이 남자는 늘 블랙홀처럼 강제적인 인력으로 자신을 끌어당기곤 했으니.

힐데베르트는 떨리는 손을 내밀었다.

[자. 일단 안전한 곳으로 가죠.]

[어째서지?]

그러나 최윤은 쉽지 않았다. 이 금쪽 같은 소년은 상황을 연구하는 과학자처럼 말을 다발로 쏟아내기 시작했다. 특유의 삼백안을 더욱 치켜 뜬 채로.

[어차피 영혼을 하나 취해야만 한다면 어떤 영혼이어도 상관 없는 것 아닌가? 인간의 영혼마다 값에 차이가 있어서? 그런 교리는 거의 본 적 없는데. 있는 경우에도 아이의 영혼은 성인의 것보다 훨씬 무결해. 죄는 인간이 자라나며 쌓는 것이니까. 그렇다면 저것보단 내 것을 가져가는 쪽이 더 이득이지 않나?]

[윤.]

[아니면 전두엽의 문제가 영혼의 가치에도 영향을 주게 되어 있―]

힐데베르트는 양팔로 아이의 어깨를 끌어 안았다.

전두엽의 문제라느니 뭐니, 본인은 전혀 신경 쓰지 않겠지만 이 어린 나이에 그 얘길 재잘재잘 떠들게 두고 싶지도 않았다. 아이의 말수가 기묘하게 많아진 것도 걱정이 되었다. 최윤은 기본적으로 말수가 적은 인간이었기에.

소년은 지금 답답해 하고 있는 것이다.

으앵―.

품 안에서 아기 울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갑자기 주변이 어두워지니 놀란 듯했다. 힐데는 황급히 팔을 풀었다. 아미는 고맙게도 금세 울음을 그쳐주었다.

그 와중에도 윤은 동상처럼 동생을 안은 채였다.

무거울 텐데. 허나 최윤이 낯설고 수상한 상대에게 동생을 떠넘길 일은 생기지 않을 터다. 그것이 그의 애정이니까.

어쩐지 안심이 되었다.

힐데는 픽 웃고는 말했다.

[윤. 일단 전 저승사자가 아닙니다. 당연히 악마도 아니고요.]

[확신하는데 이곳엔 아무도 없었어. 그리 갑자기 나타나 놓고? 알려준 적 없는 이름도 알면서?]

[방법은 비밀입니다만…. 아무튼 전 윤이 영혼의 교환을 원한다 해도 그럴 능력이 없습니다.]

[생각해보지그래. 최아미에게도 어미가 남는 쪽이 이득일 걸. 인간은 다른 포유류에 비해서 생후 성장 기간이 과하게 길어. 그리고 내겐 이걸 키워내는데 필요한 정서적 교류나 물질적인 소득이 준비돼 있지 않아. 내가 먼저 한 제안이니 너를 원망할 일은 없을 거라고 장담하지.]

[최윤.]

힐데는 탄식했다. 이 새끼가 답지 않게 끝난 일에 연연한다 싶더니 이런 좆같은 판단이나 하고 있었던 것이다. 머리에 피도 안 마른 게, 씨발.

목소리에 짜증이 담겼다.

[네가 내 말을 믿든 말든, 아무래도 좋아. 우겨봤자 난 못 해줄 일이니까. 하지만 네 동생이 알면 울 소린 하지 마.]

윤이 미간을 찡그렸다.

힐데는 숨을 푹 내쉬었다.

[윤. 아미가 윤을 얼마나 사랑하고 의지하는데요. 클수록 아미도 윤을 지켜줄 거고요. 힘들 때마다…. 댁이 힘들어 하는 모습은 상상이 안 되긴 합니다만, 음, 그래도 보통의 남매 사이는 그렇다 들었으니까 아마―]

[되게 자신 없어 보인다?]

힐데는 무시했다.

[지금도 옷을 꽉 쥐고 있잖아요. 귀여워.]

[이 나이엔 원래 뭐든 잡아대.]

[짜증 난단 말 자주 듣지 않습니까?]

[소름 끼친단 얘긴 자주 들어봤는데.]

[…그건 윤이 사랑스럽단 뜻입니다.]

[소름 끼친댄다. 최아미.]

[아. 진짜!]

꼬르륵.

벌떡 일어나 언성을 높이던 힐데는 멈칫했다. 이 금쪽이 더는 못 참아주겠다, 윤의 어머님은 얼마나 힘드셨을까 하는 공감성 의문이 들던 차였다.

배고픈 소리를 낸 최윤은 동요하지 않았다.

소년에겐 부끄러워 할 일이 아닌 것이다. 생리적 현상일 뿐이었으니. 힐데베르트도 평소라면 그렇게 생각했을 터였다. 허나 왜일까.

좀 귀여웠다.

물론 그렇다고 소리 내 웃고 싶진 않아서, 힐데는 아미를 안은 윤을 번쩍 끌어올린 뒤―버둥거렸지만 무시했다― 고속도로 바깥으로 옮겼다.

그리고 화제를 돌렸다.

[일단 뭐라도 먹죠. 배를 채우면 기분이 나아질지 모르니까.]

어쩐지 렉시크 누들이 그리웠다. 마트에서 렉시크 밀키트도 팔면 좋을 텐데. 오가자키한테 협업을 제의해 봐야겠다. 분명 불티 나게 팔릴 거니까.

힐데는 확신하며 자신이 내팽개쳤던 장바구니를 들고 돌아왔다. 다행히 물건들이 망가지지는 않았고 점심을 떼우려는 용도로 산 초밥도 멀쩡했다.

힐데베르트는 그것을 윤과 나눠먹었다.

[네가 저승사자도 악마도 아닌 건 알겠다.]

최윤의 감상은 간단했다.

[신이라기엔 입맛이 쓰레기 같아.]

입맛은 어려서부터 까다로웠나 보다. 힐데는 피식 웃었다. 어차피 그가 군대를 2번 가며, 평생 짬밥을 먹을 운명임을 힐데는 당사자보다 잘 알고 있었다.

초밥을 대충 처리하고 시시콜콜한 대화를 나누며 삼십 분 정도가 지났을 무렵이었다. 힐데의 예민한 귀에 사이렌 소리가 잡혔다. 예상대로 사고 현장의 연기를 발견하고 소방차가 오는 중인 듯했다. 힐데는 장바구니를 정리한 뒤 잡아들었다.

[그럼 전 가보겠습니다.]

사이렌 소리가 이젠 평범한 인간인 윤에게도 들릴 만큼 가까워지고 있었다. 윤은 눈알을 도르륵 굴려 힐데를 살펴본 뒤 말했다.

[사람을 만나면 안 되는 상황인가봐?]

[예. 사정상.]

[그래. 잘 가라.]

하여간 깔끔한 인간이야.

힐데는 키득거리며 손을 흔들었다.

[네. 윤.]

힐데베르트는 윤도, 구조대도 저를 발견하지 못할 수풀로 깊이 들어갔다. 소방차가 아이들을 태워 떠날 때까지 멀리서 그 모습을 구경하긴 했는데 윤은 알아차리진 못했을 터다. 그는 아직 제 연인도, 강화신체 소유자도 아닌 평범한 아이에 불과했으니까.

최윤과 평범이라.

개 안 어울리는데.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힐데는 두 단어의 조합이 썩 마음에 들어서, 하루가 지날 때까지 나무에 기대어 반찬 투정을 늘어놓던 아이를 생각했다.

달이 여느 때처럼 따스하게 반짝였다.

최윤은 바쁜 와중에도 일찍 퇴근했다.

급하게 끝내야 할 업무는 부지런히 마치고, 차일로 미룰 수 있는 일은 미루자 정시 퇴근을 할 수 있었다. 집에 도착했을 땐 일곱 시가 안 된 때였다.

이른 저녁이었지만 초겨울이라 날은 어두웠다.

최아미는 코어 밖에 나가 있는 상태였고 이예현은 야근 확정이었다. 십 년 전이었다면 온 집이 어두웠겠으나. 윤은 전등이 켜진 계단을 성큼성큼 올랐다.

다섯 시쯤 개인 번호로 걸려온 전화가 떠올랐다. 실 없이 웃던 목소리. 과거를 돌아보지 않는 최윤이 종종 녹음된 통화를 재생하게 하는 것.

‘보고 싶습니다. 오늘따라 너무….’

언제는 못 봤다는 양. 아침까지 뒹군 것도 잊었나. 윤은 어이가 없어졌다. 일이 제대로 안 풀려서 슬슬 불쾌해지던 차였는데 고작 그 말에 기분이 반전되어. 보고 싶다면서 장소도 알리지 않고 통화를 끊은 상대에게 짜증이 날 법한데도.

최윤은 옥상 문을 열었다.

그가 힐데베르트의 위치를 찾아내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이었지만, 이번엔 노력할 필요도 없었다. 전화 너머로 들려온 바람 소리를 감안하면 야외였고, 허나 배저들에게 공적 장소에서의 음주는 허용되지 않았다. 그렇다면 이 집 옥상에서 들이켠 것이겠지.

오차는 없었다.

힐데베르트가 찬란한 금안을 반짝였다.

“윤!”

연인이 활짝 웃으며 팔을 흔들었다. 옥상 난간까지 다가가 등을 기대고 휘청이는 모양새였다. 평소보다 거센 바람에 비닐돔은 연신 푸득거리는 소리를 냈다.

저 새끼가?

윤은 힐데에게로 다가가서 그 팔을 잡아당겼다. 그리고 엉거주춤 끌어당겨져 눈만 깜빡이는 연인에게 말했다.

“힐데베르트. 떨어져 죽고싶냐?”

힐데는 멈칫하더니 푸스스 웃었다. 윤은 그 이유를 알았다. 무심코 언젠가 건넨 말과 완전히 같은 얘길 해버린 것이다.

같은 대답을 하겠군.

남의 기분은 박살내놓고 본인만 들떠서.

“아뇨. 살고 싶습니다.”

이렇게.

“가능하면 윤과….”

최윤은 침묵했다.

힐데베르트 탈레브는 뻔뻔히도 제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얌전히 냉동돼라는 제안은 들을 때마다 거절중이면서 이런 소리라니.

그게 어떻게 가능하단 말인가?

고요를 이해했는지, 그저 눈치를 살피려는지. 힐데베르트는 쓰게 웃더니 구부정해진 어깨를 펴고 기어들어왔다.

“죄송합니다. 그냥 달을 보고 있었어요. 이쪽에서만 보이길래. 또…. 윤이라면 잡아줄 것 같았습니다. 늘 그래주셨으니까.”

최윤은 오랜만에 이것의 뇌를 열어보고픈 충동을 느꼈다.

어차피 죽음을 향해 스스로 나아가는 상황에도 제 연인을 흔들림 없이 바라보는 눈과 그 너머의 믿음이 신기해서. 이것이 뇌로만 남는대도 최윤을 신뢰할지. 병명이 치매만 아니었다면, 그 인격을 온전히 보전할 수 있었다면 윤은 필히 시도해 봤을 터다.

그러나 최윤은 수단을 쓸 모든 손발이 잘려나갔고, 그럼에도 지금 자신만을 의지해 오는 이 금색이 탐탁하여서.

도저히 이 별의 중력에서 벗어날 수 없어서.

침묵 끝에 윤은 바람에 헝클어진 힐데의 머리를 귀 뒤로 쓸어넘겨주며 속삭였다.

“알콜이 치매에 얼마나 안 좋은지 뇌에 박히도록 말했다고 생각했는데 벌써 잊었냐.”

“전 매실에 취한 거니까 괜찮지 않을까요? 그리고 한잔밖에 안 마셨습니다. 말투도 멀쩡하잖아요.”

실실 처웃고 있는 주제에.

지적할 의욕도 나지 않았다. 윤은 찬 바람에 평소보다 냉랭해진 연인의 손을 붙들었다. 따뜻한 방에서 어떻게든 재워야 할 것 같았다.

그 순간 힐데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윤. 아미를 많이 의지해주십쇼.”

아. 그거였군. 아침만 해도 멀쩡해 보이던 게 돌연 매실주를 처마시고 지랄을 떤 이유가. 모든 순간이 납득되었다. 무지에 대한 찝찝함이 해소되자 기분도 꽤 나아졌다. 제게도 의미는 있는 시간이었으니 이 정 많은 놈에겐 어떠했겠나.

이 아픔이라도 제것이 분명하다면.

최윤은 선선히 대답했다.

“반대겠지.”

“그게 의지한다는 뜻이라고요.”

“그럴지도.”

힐데가 멈춰서서는 작게 입술을 벌렸다.

윤은 고민하지 않고 입에 입을 맞물렸다.

상당한 시간이 지나, 타액이 번들거리는 입을 윤이 항상 들고 다니는 손수건으로 꼼꼼히 닦아준 뒤에야, 힐데베르트는 정신을 차렸다.

“뭡니까? 술 냄새 났을 텐데.”

“고민할 시간에 키스나 하자고. 그게 훨씬 생산적이니까.”

힐데는 헛웃음을 터뜨리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긴 하네요. 술에 취하고, 달에 취하고, 윤에 취하고요…. 음음. 꽤 이득 봤습니다.”

그러다 문득 손뼉을 마주치곤 덧붙였다.

“아. 한국어에 [윤달]이라는 말도 있던데요.”

“한자가 달라.”

“[윤달]이라는 말도 있더라고요. 어감 예쁘죠.”

알 바냔 거군. 고집 하고는. 윤은 코웃음을 쳤다.

“그래. 한자는 다르지만.”

힐데는 미간을 찡그린 채 정색하다가, 곧 배를 잡고 폭소했다. 윤은 그 영문을 모르진 않았으나, 웃는 연인은 근래 드물게 즐거워 보였기에 그냥 두었다.

얼마 뒤 곧 죽을 사람 특유의 감정 기복이 진정된 힐데는 윤의 어깨에 옆머리를 기대곤 밤하늘을 올려보더니, 비밀을 공유하듯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날 이후로….”

최윤은 굳이 대꾸하지 않았다. 그래도 문제는 없었다. 그날이라고 지칭할 만한 시간이 연인 사이에는 과히 넘쳤음을 서로가 알고 있었기에. 동시에 윤은 그 모든 시간을 항상 연인보다 정확히 기억하였으며 앞으로도 그럴 터였으므로. 

힐데베르트가 속삭였다.

“달을 보면 종종 생각나더라고요. 내 심장에 귀를 기울이던 당신이.”

“그러면 달을 봐도 되겠군. 언제든 저기에 있을 테니.”

윤은 덤덤하게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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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1


  • 민첩한 새우

    그러나 힐데베르트가 진실에 고통스러워 하였으므로, 그 상처는 최윤의 삶에도 어떤 흔적이 되었다. < 몇 번을 봐도 이 문장에서 한참을 다시 읽다가 넘어가요 연인을 익사시키려 드는 해수를 강제로 몇 바가지 퍼마셔도 짜증만 날 뿐, 타격받진 않았다. < 윤힐이 개 쩌는 이유 중 하나 이 감각을 저 또한 전해주고 싶었다 < 다정아......... 마트에서 렉시크 밀키트도 팔면 좋을 텐데. < 진자 렉누 밀키트가 안 나와서 다행이지 그거 있어서 렉누 만들어줬으면 꼬마 최윤한테 경멸이란 경멸은 다 받았을 듯 옥상 달 부분은 언제봐도 너무...너무 좋아요 달달하고 예쁘고...이게 청혼이 아니면 뭐란 것임? "그러면 달을 봐도 되겠군. 언제든 저기에 있을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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