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랙배저-윤힐데

[윤힐데] 시절인연 하편

아주 깊은 잠에서 깨어난 기분이었다.

라고 생각했는데 여전히 꿈일지도 모르겠다. 힐데베르트는 주변을 둘러보다 의문에 빠졌다. 순백색의 공간. 작은 침상이 두 개 놓여 있는 이 방은 병원처럼 느껴졌으나, 의아하게도 자신은 다친 기억이 없었다. 당연히 이곳이 어딘지도 전혀 짚이지 않았다.

아니지. 장소도 장소인데….

드르륵.

힐데는 문 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흰색 가운을 차려 입고서 노란색 꽃다발을 든 검은 머리 남자가 견적 내리듯 저를 관찰했다.

뭐지. 힐데베르트는 이루 표현할 수 없는 기묘함을 느꼈다. 새하얀 옷차림을 보면 의사인데 감각적으로 느껴지는 분위기는 사람 몇 명 담가본 살인자였다. 체격을 보면 운동이 취미인 듯했는데, 외모는 웬만한 궁정 광대보다도 잘생긴 편이었다.

옥에 티로 인상이 무생물처럼 차갑긴 했지만.

“$#^!^”

아닌가. 혀를 차자 인상도 꽤 달라졌다. 냉랭한 분위기가 소멸되진 못했으나 장난기는 있어 보이기도 했다. 남자가 다시 말했다.

<깼냐?>

이 새끼 왜 반말이지.

<뉘신데 반말입니까?>

<누굴까?>

이 남자, 가게에서 알바생이 메뉴를 물어보면 내가 단골인데 그것도 기억 못하냐고 고함부터 치는 타입 같았다. 내가 어딜 다쳤었는지는 기억이 안 나지만 기절해 있던 동안 괴팍한 의사가 배정된 모양인데. 권위 의식이 있어서 반말부터 하고 본다든가?

아니다. 상황이 혼란스럽다고 상상의 나래를 펼치기만 해 좋을 것도 없었다. 분명한 것은 자신은 그를 처음 본다는 사실이었으므로, 힐데는 말했다.

<제가 사람은 잘 기억하는 편인데 전혀 모르겠습니다만.>

그러자 남자는 코웃음을 치더니―첫인상과 달리 표정이 풍부한 타입일지도 모르겠다― 제게 노란색 튤립 다발을 건네주며 말했다.

<받기나 해라.>

반사적으로 받은 꽃은 상태가 싱싱했고, 힐데는 두 눈을 깜빡였다. 의아하게도 이 장소나 자신이 여기 앉아 있는 상황은 짐작도 안 되는데 선물의 꽃말은 선명하게 기억이 났다. 이런 선물을 들이밀던 사람이 종종 있었기 때문일 터다. 분명히….

<아.>

‘짝사랑’이었지.

<아. 그리고?>

남자가 반응을 따라했다. 표정은 차분한데 어투는 거의 똑같아 소름이 끼쳤다. 허나, 짝사랑할 외모는 역시 아니지 않나? 기묘한 분위기 탓에 연애를 못한 건지. 힐데는 의아함에 상대를 흘끔거리다 솔직하게 고백했다.

<죄송합니다. 저는 아내가 있어서.>

숨겨서 좋을 게 없는 진실이었다. 이런 사실이라도 기억하고 있어 다행이었다. 반지를 나눈 상대가 분명 존재했는데, 그러고 보면 반지는 또 어디 갔을까.

자신의 무지에 슬슬 불쾌감이 들 즈음이었다.

남자가 큭큭 웃었다.

<알고 줬던 거냐? 하여간 웃기는 놈.>

<그건 무슨 얘기―>

<아내는 기억 나나?>

<…저 인간쓰레기였나 봅니다. 정말 전혀 생각이 안 나는데, 뭐지?>

힐데는 이마를 찡그렸다. 아내가 있었다는 상황은 떠올려놓곤 상대가 누구였는지는 어렴풋하기만 한 게 답답해 미칠 노릇이었다. 아니, 사람으로서 이러면 안 되는 것 아닌가? 제가 선택했을 가족이 기억이 안 난다니―.

툭. 이마에 손끝이 닿았다.

<그러다 깨진다.>

남자가 답지 않게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대충 생각해. 네 아내보단 네가 더 선하게 살았을 테니 그 정돈 봐줄 걸.>

아내와 아는 사인가. 힐데가 눈을 깜빡였지만 그는 의문을 무시하고 침상 옆 간이의자에 앉았다. 침상 주인―아마도 자신―의 허락따위 알 바냔 듯이.

진짜 뭐냐고. 이름이라도 물어볼까.

<혹시 아내의 친척입니까? 성함이라도 알려주실 수 있는지…. 죄송합니다. 지금 기억이 잘 안 나는데, 그래도 제가 이런 상태인 건 아시는 것 같아서요.>

남자가 적어도 제 혈연은 아닌 건 분명했다. 일단 피부색부터 달랐고 자신은 고아였기 때문이다. 대신 나를 키워주신 분들이 있었는데, 그분들은 또….

<최윤. 성이 최고 이름은 윤이다. 촌수는 없고.>

<최윤.>

힐데는 입안에서 사탕 굴리듯 그 이름을 두 번 더 굴려보았다. 최윤이라. 생전 처음 듣는 난해한 발음인데도 입엔 붙는 게 신기했다.

정말 아는 사이였을지도 모르겠어.

그러나 친척 같진 않았다. 호명 체계부터 달랐고 촌수도 없다니까. 하지만 이런 친구를 사귄 기억도 없는데. “지구”에서 알게 된 상댄가, “지구”는….

그 순간 윤이 오른손을 뻗어서 힐데가 쥔 튤립을 툭툭 두드리더니 말했다.

<힐데베르트. 아내가 기억도 안 난다면 그냥 나랑 연애하지. 잘 보이려고 꽃도 들고 왔는데.>

힐데는 낯선 남자에게 느끼던 묘한 호감이 찰나에 휘발되는 것을 느꼈다. 유부남인 걸 알면서 작업을 걸다니! 이런 상대와 괜찮은 인연이었을 것 같지도 않았다. 사실 악연이었는데 남이 기억을 잃은 틈을 타서 수작을 부리는 게 아닐까.

결론 내린 힐데가 팔짝 뛰었다.

<잘생기신 건 알겠는데 전 임자가 있다니까요?>

<외모가 취향이면 된 것 아닌가? 어쩌다 누구와 결혼했는지도 기억 못할 텐데.>

비꼰다기에는 지독히 덤덤한 목소리였다.

힐데는 움찔했다. 윤의 말이 전부 사실이라 비수로 심장을 찌른 듯했기 때문이다. 허나 힐데는 자신이, 이 정도 인간쓰레기는 또 아니었을 것 같았다.

힐데베르트가 애써 꿍얼거렸다.

<그, 래도 이유 정도는 뻔하죠!>

<오. 뭔데.>

<당연히, 사랑했으니까요.>

힐데는 상대가 낀 반지를 신경질적으로 가리켰다.

<당신처럼요.>

<그렇군.>

만족스러운 음성.

어쩐지 낯이 익은 반지를 관찰하던 힐데는 고개를 들었다. 남자는 입가를 끌어당겨 웃고 있었는데, 그 탓인지 의미 모를 말만 반복하던 최윤이 청량하게도 보였다. 본인 비꼬는 말을 왜 좋아하지, 정신병잔가? 근데 얼굴은 왜 잘생겼냔 말이다.

더 엮여 좋을 게 없어 보였다.

<예. 그러니 나가주십쇼. 아내에게 충실하시고요. 전 염치도 모르는 사람은 질색이란 말입니다.>

<다 맞는 말이군. 좋아.>

<근데 왜 안 나가, 우웁, 웁….>

이 새끼가 미쳤나?

팔과 벽 사이에 갇힌 채 숨이 틀어막히는 와중에도 힐데베르트는 생각했다. 키스는 사랑하는 사람과만 하고 싶었는데!

최윤은 누군가가 그를 조심스럽게 흔드는 감각에 잠에서 깨어났다.

옆 침상에서 먼저 잠들었던 힐데가 곁까지 다가와 윤을 소중한 이 대하듯이 내려보고 있었다. 그 눈이 자신을 낯선 상대 보듯 의아하게 흘끗하지 않은 것은 오랜만이라, 최윤은 조용히 상체를 일으켰다. 술렁임마저 이 기적 같은 찰나를 깨뜨릴까봐.

힐데베르트는 쓰게 웃었다.

“푹 자고 있었는데 깨워서 미안합니다. 윤.”

“오늘따라 멀쩡해 보인다?”

아내의 이름도 공용어도 분명히 기억하고 있었다. 제가 잠든 몇 시간 동안 치매 치료제가 개발된 것도 아닐 텐데. 윤의 예리한 감각은 이 상황을 기쁘게만 받아들이지는 못하고 경종을 울렸다. 아니나다를까 힐데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예. 웬일로 이것저것 생각도 나고 윤에게 저지른 실례도 떠오르길래 깨웠습니다. 제가 감은 좋잖아요. 뭐더라, 마지막 잎새? 그런 것 같아서요.”

최윤은 코웃음을 쳤다.

“마지막 불꽃이겠지.”

기분이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윤은 힐데베르트의 감을 본인 이상으로 신뢰하는 편이었다. 적어도 불운에 관한 한 감이 틀리는 일은 거의 없었다. 그러므로.

끝이라.

그것이 필멸자의 운명이라고들 하나, 최윤은 살아 있는 힐데베르트 탈레브가 만들어내는 무수한 가능성의 종말을 도저히 유쾌하게 받아들일 수 없었다. 놈이 기억을 잃었을 때만 해도 하루가 다르게 멍청한 꼴을 구경하는 재미는 있었는데.

윤은 드물게 고요한 분노에서 헤엄치다가 힐데를 살펴봤다. 방심한 상황에 뒤통수를 치면 기절할지도 모른다. 이 기적이 힐데베르트의 마지막 불꽃이든 제 신앙이라던 세계수의 마지막 잎새든, 이별 인사를 할 시간 정도는 확보하려 한 것 아니겠는가.

기절시키면 미룰 수 있을지도.

“윤. 이상한 생각 하지 마십쇼.”

어떻게 알았지.

“사귄 게 몇 년인데 다 보입니다. 저 아직은 윤을 제압할 수 있으니까요. 댁을 묶어둔 채로 헤어지고 싶진 않으니까 협조 좀 해주시죠.”

“그런 취향이었냐? 진작 말하지.”

“인간아.”

힐데가 주먹을 빠득 쥐었다. 윤은 무시했다. 어차피 개소리임을 서로가 알았다. 허나. 윤은 헛웃음을 터뜨린 뒤 중얼거렸다.

“인류가 치매 극복을 위해 수백 년을 갈았는데도 뇌를 정복하지 못해서 죽기 직전에야 만나다니.”

“…성공했다 쳐도 효과가 없었을 수도 있잖습니까. 전 인류가 아니니까요.”

“힐데베르트. 초 치지 마.”

“게다가 전 이 상황이 그럭저럭 마음에 들어서요. 더러운 꼴 볼 만큼 지능이 망가지진 않았었고, 영생이란 게 늘 까마득하기도 했고요. 죽기 전에 운 좋게 아내 이름도 떠올렸고…. 입술을 맞댄 상대도 다행히 좋아하는 사람이었으니까, 당시엔 불쾌했었지만요.”

윤은 어이가 없었으나 힐데베르트를 그냥 두었다. 그가 제 가라앉은 기분을 끌어올리기 위해 헛소리를 남발중임을 알았으므로. 힐데는 말을 하다 보니 이 상황이 즐거워진 듯, 연인에 대한 앞담을 재잘재잘 이어갔다.

“미치광이 과학자가 뇌는 복제하지 못해서 저만이 윤의 유일로 남았는데. 이 정도면 진짜 운이 괜찮은 것 아닙니까? 사실 치매가 아니었으면 어딘가에서 뇌로만 남았을 것 같아서 무섭단 말입니다…. 제발 좀 부정해주십쇼.”

최윤은 의미심장하게 미소 지었다.

앞담에 대한 복수였다.

그는 제 기분이 놀라울 만큼 호전된 것을 느꼈다. 하긴 상대가 시한부 애인인지를 떠나, 바로 옆에서 사람이 북 치고 장구 치고 꽹가리를 치는데 시선이 가지 않으면 그도 이상한 일일 것이다. 마지막까지 웃기는 놈.

최윤은 패배를 인정하고 덤덤히 제안했다.

“그래서 말인데 지금이라도 백 년간 냉동되는 건 어떻게 생각하냐. 뇌보단 몸이 되는 게 낫지 않나?”

“백 년은 모르겠고 백 번은 들었습니다.”

힐데베르트는 넌더리를 내더니 픽 웃었다.

“그리고 그러기엔 저를 아끼시잖아요.”

최윤은 이게 또 본인 눈에 무슨 콩깍지를 셀프로 꼈는지 의심스러워졌지만, 그 말을 부정하진 않았다. 제가 그를 아낀다는 전제만은 완전한 진실이었기에.

힐데는 돌연 지친 듯 숨을 길게 내쉬더니 말했다.

“다른 사람들도 좀 봐야겠습니다.”

윤은 그를 침상에 눕히고 연락을 취해주었다.

자신이 아니었으면 직접 나서서 했을 일이었기에 돕긴 했으되, 그것은 윤에게 반가운 짓은 아니었다. 힐데베르트는 윤과 다르게 좆같이 마당발이어서 도착한 이들과 이별 인사를 짧게만 나누어도 반나절이 훌쩍 지나갔던 것이다.

윤은 만약 힐데가 오늘 죽는다면 저 인사 강행군이 사인일 거란 추측을 아미에게 강력히 토로했고, 불행히 바로 죽지 않는다면 본인의 수치심 해소를 위해서라도 자신이 그를 빼돌리고 죽음을 위장해줘야 하지 않을지 떠들어대다 예현에게 뒤통수를 맞았다.

그렇게 늦은 밤이 되어 인내심도 한계에 달했을 때, 힐데는 부른 지인들을 전부 집으로 돌려보냈다. 오래 알아왔던 동족들과 대자인 예현까지도.

순순히 물러갈 이들이 아니었는데 설득을 어떻게 했는지 몰랐지만, 어쨌든 남은 인간은 자신이었기에 최윤은 적대감에 가까운 질투도 신경 쓰진 않았다. 여기서 몸 섞어본 상대가 나밖에 없는데 당연히 내가 남아야지, 정도의 감상이었다.

괜찮은 척을 하고 있었는지, 그것이 운명인지.

홀로 남은 힐데베르트는 안색이 순식간에 초췌해졌고, 평소와 달리 고통을 연신 호소했다. 윤, 아파요, 너무 아파, 손 좀 잡아줘. 눈이 짓무르도록 울면서….

이 병원에서 함께 지내던 내내 본 적 없었던 꼴이 낯설었지만 윤의 기억력은 언젠가 연인이 했던 말을 떠올려냈다. 어렸을 땐 자신을 아껴주던 신관분들께 둘러싸여 컸다고. 그렇다면 힐데는 그때도 고통을 잘 견뎌내는 인간은 아니었을 것이다.

이것은 사람에게 제 손을 뻗어야지만 살 수 있는 존재니까.

납득한 최윤은 다 큰 아기를 도닥이듯 힐데베르트 탈레브를 돌봤다. 동생의 양육을 오래 전담했던 적도 있었기에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녀석이 정신이 들면 민망해 할 것 같긴 했는데, 제 기분은 아닌지라 윤은 그에 대한 신경도 껐다.

무통 주사를 추가로 찔러넣은 뒤에야 힐데베르트는 헉헉대던 숨을 삼켜가며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윤이 송골송골 맺힌 땀을 닦자 다짜고짜 말했다.

“윤. 이 능력, 윤도 다른 사람에겐 넘기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최윤은 코웃음을 쳤다. 예상대로 그게 남들을 무리해서라도 다 돌려보낸 이유였던 것이다. 제 부사수는 기실 다정이 불치병이라서.

퍽 불쾌했지만, 그 덕에 일대일로 이별할 시간은 벌 수 있었고, 무엇보다도 최윤은 이곳에 모든 이가 남았어도 상황은 변치 않았으리란 것을 확신했기에 개의치는 않았다. 힐데의 마음은 본인보다 남에게 더 선명히 보이는 것이었다. 그가 애정하는 달빛처럼.

윤은 팔짱을 꼈다.

“건방지게 다 죽어가면서 사수한테 명령이냐?”

“하지만 들어주시겠죠. 지금이 그 결과니까.”

힐데베르트는 키득거렸다.

“게다가 당신 여우과잖아.”

윤은 언젠가 저의 연인이 한국어를 공부한답시고 낭독하던 책의 글귀를 떠올렸다.

[너는 나에게 이 세상에 단 하나뿐인 존재가 되는 거고, 나도 너에게 세상에서 하나뿐인 존재가 되는 거야.]

기실 제 행성을 떠나, 인간의 생애주기에 가까운 백 년을 지구에서 살아왔음에도, 여전히 자신을 종종 이방인처럼 여기는 힐데가 그 책에 심취한 것은 뻔히 보이는 바였다. 하여 힐데베르트가 사랑하는 여우는 그의 하나뿐인 벗일 수밖에 없음도.

다른 때는 읊조리지 않고 조용히 책을 보던 연인이 굳이 그 문장을 읽었던 것도, 그게 힐데가 제 마음을 두드리는 방식이기도 했음을 윤은 모르지 않았다.

따라서 마지막에 이르러 최윤은 인정했다.

“이리 오세요. 윤.”

힐데베르트 탈레브도 최윤도 언젠가 필멸한다면, 운이 좋은 쪽은 자신이었단 사실을. 이토록 멀쩡히 상대와 인사할 수 있고, 그의 마음에 귀를 기울일 수 있으며, 두 이마를 맞댔을 때 아직 살아 있는 상대의 체온을 제 혼에 새길 수 있단 것이.

힐데베르트가 입술 사이에서 사랑을 속삭였다.

[미래에서 만나요.]

그리고 우리가 다시 만날 수 있다는 것이.

하얀 머리 왕자는 자정쯤 먼 여행을 떠났다.

감긴 눈 위로 유리구두처럼 투명한 액체가 번졌다.

이십 년이 지나 최윤은 치매 치료제를 완성했다.

연인의 생전부터 현재까지, 최윤이 꾸준히 시간을 들여 온 연구가 노력이 아깝지 않게 괜찮은 결말로 끝난 것이다. 윤의 통장엔 거듭 돈이 갈퀴로 쌓였다.

다만 그것은 이미 손 꼽히는 자산가였던 최윤에겐 의미 없는 일이었고, 그를 그나마 흥미롭게 한 것은 주변의 반응이었다. 언론은 물론이고 윤을 가장 오래 알아온 인연인 최아미까지도 눈물을 흘리면서 같은 반응을 보였던 것이다.

“오빠. 힐데 때문이었징? 고생 많았어….”

“내 부사수 죽은 게 언젠데 걔 때문이겠냐?”

“이익. 오빠가 그딴 식으로 말해도 난 알아!”

알긴 뭘 안다는 건지.

치매 연구의 동인이 힐데였다면 연인이 사망한 날 연구도 막을 내렸을 터였다. 주제를 붙잡아둘 이유가 소멸했는데 시간을 더 써 무엇 한단 말인가? 인류를 치매에서 건져낸다고 해서 죽은 힐데베르트가 살아 돌아오진 못할 것을.

허나 윤은 장례식을 마치는 대로 업무에 복귀했다.

스카가 휴가를 쓰는 게 어떻겠냐는 제안도 했지만 무시했다. 그는 대신 한동안 연인을 돌보느라 멈췄던 신체 훈련을 재개했고, 뇌 연구에 집중하느라 미뤘던 본부의 연구 주제도 다시 잡았다. 그리고 남는 시간 대부분을 치매 연구에 쏟았다.

이유는 더 이상 힐데베르트 탈레브일 순 없었기에, 그것은 철저히 최윤 자신만을 위한 행적이었다. 제겐 연인과 달리 저를 구원할 신앙이 존재하지 않았으니 자신을 건져내려면 스스로 나서야만 했다. 성미에도 그쪽이 더 맞았고.

힐데야 세계수의 가호란 게 실재했는지 마지막을 멀쩡한 정신으로 끝낼 수 있었다지만…. 최윤이 치매에 걸린다면 제 죽음은 좋은 꼴일 순 없지 않겠는가. 제 행동을 멀쩡한 지능으로 통제하지 못한다는 것은 통제광인 그에겐 상상만으로도 불쾌한 일이었다.

다행히 샘플로 쓸 만한 뇌는 꽤 많았고―보관해둔 것이 있었다―, 윤은 목표에 있어선 인내심이 확실한 편이었기에 수십 년이 지나자 결과가 도출되었다.

최윤은 오랜만에 휴가를 썼다.

그리고 사람을 주기적으로 불러 관리한 덕에 세월이 무색할 만큼 전과 같은 모습인 오두막을 찾았다. 종종 배터리를 갈아주는 것으로 수명을 이어 온 로봇청소기 티그가 소리 없이 다가오더니 홀로그램으로 인사를 띄웠다.

[어서오세요, 윤.]

힐데가 입력해둔 한국어 문장이었다.

윤은 기억 속 목소리를 곱씹고는 안으로 들어갔다.

인테리어엔 유행이 있기 마련이고, 힐데베르트는 그럴 듯한 미적 감각을 지니진 못한 존재였던 만큼 집안은 요즘 기준엔 우스꽝스러운 꼴이었다. 통일감 모자란 빈티지 물품으로 점령된 별장. 예현과 아미가 주인을 추억하는 용도로만 기능하는 십년 여의 액자.

윤은 오랜만에 저 또한 과거에서 일주일을 지내볼 요량이었다. 차분하게 고민하고 결정해야 할 문제가 생긴 탓에.

최윤은 덩치 있는 남자 둘이서 나란히 앉아 있으면 좁게 느껴지기도 했던 가죽소파에 홀로 앉아, 피로로 인한 숨을 길게 내쉬었다.

최윤은 죽어가고 있었다.

치매 치료제는 치료제일 뿐, 백신이 아니었다. 즉 그것엔 예방 효과가 없었다. 다만 이 단점은 일반인에겐 문제가 되지 않았다. 어쨌든 경증일 때 증상을 발견해 치료한다면 발병 전과 별 차이 없는 삶을 살 수 있었으니까.

문제는 강화신체 소유자 혹은 지복을 받은 타이탄들로, 그들의 몸은 뇌의 노화를 인식하면 급속도로 노화하게 되어 있었다. 신체의 노화는 이후에 치매 치료제를 써서 뇌를 보전해도 멈출 수 없었고. 그 매커니즘이 어떻게 된 것인지 몰라 흥미는 일었으나….

그것을 연구할 시간이 제게 주어지진 않을 터다.

최윤은 해결할 방도가 없는 호기심은 덮어두었다. 어찌 보면 문제라 하기도 어려웠고. 생각 없이 영생을 받았다가 후회한 배저들은 이 상황에 기뻐하기도 했다. 배저들도 결국 노화한단 사실에 반 배저단체의 기승도 꺾였으니.

따라서 윤의 고민거리는 인간의 죽음 같은, 이미 그 이전에 수십 억명은 고민해 보았을 보편적인 주제가 아니라.

최윤은 빼돌린 약제 한 병을 협탁에 올려두었다.

이 약을 과거의 힐데에게 전달할지의 여부였다.

윤은 유리병에 든 투명한 액체를 넌지시 바라보다 눈을 감았다. 최윤은 고민에 본디 오랜 시간을 쓰진 않는 편이어서 일주일이면 어떤 방침을 결정할 시간으론 넘치는 편이었다. 그는 그대로 소파에서 잠에 빠졌다.

이곳에서 웃고 떠들던 부드러운 목소리와 함께.

다음날 윤은 어제 냉장고에 넣어둔 식재료를 꺼내 쇠고기무국과 쌀밥을 해먹었다. 힐데베르트가 식탁 맞은 편에서 촐싹대며 말했다.

‘이거 진짜 맛있는데요. 렉시크누들 가까이 되는 것 같습니다!’

윤은 시큰둥하게 무시했다.

그날 오후 최윤은 두 개 있는 게임 컨트롤 패드 중 하나를 꺼내 이전엔 힐데와 함께 플레이했던 콘솔 게임을 간단히 해보았고, 자신이 구매해 넣은 옷이 대부분인 힐데베르트의 옷장을 차분히 바라보기도 했다. 서랍엔 제가 처음 사줬던 시계가 들어있었다.

<힐데베르트. 우리 결혼하지.>

이러다 틀림 없이 잃어버릴 것 같다고 울면서 빼둔 반지도. 반지야 다시 사면 그만이라던 자신에게 이건 다시 살 수 없는 물건이라고 화를 내던 목소리까지.

‘그걸 내가 모를까?’

‘…미안합니다. 윤.’

잠은 연인을 도닥이며 잠들었던 침대에서 청했다.

하여 사흘째 아침에 최윤은 약을 개수대에 부었다.

자신이 얻은 비상식적인 능력에 대해 최윤은 많은 것을 알아내진 못했다. 애초에 겪어본 이동 횟수가 너무 적었다. 윤은 백이십 년을 살아오며 네 번 겪은 것이 다였고, 힐데는 쓸 때마다 티가 나던 타입이니 거의 제가 아는 두 번이 전부일 터다.

그러므로 알아낸 바는 한쪽이 죽을 때 능력도 이동된다는 것. 그 순간 둘 사이에 인과가 생겨, 상대가 살아온 시간을 종종 여행하게 된단 것. 소요 시간은 하루 정도라는 것. 아마도 자신 혹은 상대의 감정적인 동요가 서로를 끌어당기는 자석이 된다는 것 정도.

어쩌면 마지막 부분을 이용할 수 있으리란 것까지.

허나 선천적으로 뇌에 문제가 있는 자신이 감정의 수준을 끌어올리긴 쉽지 않은 일이었다. 고려한 바가 몇 가지 있긴 했으나, 인위적인 시간 이동이 가능해도 도착할 시간대를 정할 순 없는 상황에서 내성이 생길지 모를 짓을 거듭 시도하기도 그랬고.

격렬한 감정일수록 쉽게 사그라드는 법이니.

그나마 힐데베르트가 비밀을 몇 알아차리지 못한 게 다행이었다. 그는 자신보다 감정을 불러일으키긴 쉽겠지만, 수많은 경험으로 후회를 끔찍히도 두려워 하게 된 만큼 진실을 알았다면 최윤의 시간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지 몰랐다.

개입이 본인에게 좋은 일이 되었을지도….

그럼에도 약을 전해주려 한다면 한 번은 시도해볼 만하겠으나. 윤은 언젠가 힐데가 슬픔 어린 목소리로 제게 건넨 말을 떠올렸다.

‘같은 마틴이죠?’

‘그래. 오늘 일어난 일은 기억하지 못하겠지만.’

서로 다른 시간을 점유한 물체에 제가 ‘같다’라는 결론을 내린 덴 전제가 필요했다. 마틴은 생명체인 힐데와 달리 기계라는 것. 그러므로 백업한 데이터를 적절한 사양의 컴퓨터에 옮긴다면 무엇이든 마틴이 될 수 있었다는 것.

그럼에도 사실 새로운 마틴은 그날 일어난 폭발을 기억하지 못했단 점에서, 둘은 실제론 같은 개체라고 할 순 없었다. 그 부분까진 부러 언급하지 않았지만.

하물며 사람이라면.

윤은 힐데베르트에게 치료제를 전달할 수도 있다. 그러면 힐데는 기억 누수 없이 여생을 보냈을 테고, 윤은 다음 연구로 넘어가서 신체 노화의 비밀을 풀어냈을지도 모른다. 이 집 책장에 꽂혀 있는 동화처럼 ‘영원히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라는 결말이다.

허나 그 책 속 윤은 자신은 아닐 것이다. 힐데 또한 최윤의 힐데베르트 탈레브일지언정, 자신의 힐데는 되지 못할 터다.

연인의 눈 위로 번졌던 액체도 물거품이 될 따름.

그러나 최윤은 그것을 갈급하게 알고 싶었다. 치매 치료의 실마리를 찾아 헤매던 때보다 강한 지적 욕구였다. 어느 날 자신을 마주하자마자 눈물만 뚝뚝 흘리던 연인도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최윤은 그것 또한 갖고 싶었고, 가져야만 했다!

자신 외의 누구도 그를 쥐게 둘 순 없었다.

평생을 학자로 살아온 인간으로서 최윤은 지독한 호기심을 느꼈다. 뇌에 선천적인 장애를 갖고 살아온 이로서 누군가에 대한 비틀린 소유욕에 사로잡혔다. 동시에 그는 새로운 감정을 깨닫는다. 어쩌면, 이런 마음을 뭇 사람들은 두려움이라 일컫는다는 것을.

겨우 눈물 몇 방울을 받아내지 못할까봐.

윤은 헛웃음을 터뜨리면서도 결론 내렸다.

좋다. 최윤은 힐데베르트 탈레브에게서 두려움과 신비와 눈물을 얻었다. 그러므로 오직 그만이 제게 완성해줄 수 있을 것이다.

최윤이라는 이름의 사람을.

힐데베르트 탈레브라는 이름의 사랑을.

이 세상에 단 하나뿐인 존재로서.

결론을 내린 최윤은 남은 나흘간 신변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 과정은 예상한 대로 슬프진 않았는데, 의외로 재밌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었다. 이야기 속 여우가 네 시에 너를 만난다면 세 시부터 행복해질 거라고 확언했듯이.

윤은 세 명뿐인 단톡방에도 간단히 흔적을 남겼다.

[여행 좀 다녀올 예정인데 돈 쓸 일 있으면 미리 말해라]

그러자 저녁쯤 인내심이 바닥난 이가 오두막 문을 열어젖히곤 외쳤다.

“최윤! 너 이상한 생각 하는 거 아니지?”

이예현이었다. 힐데베르트의 죽음을 저만이 얻어냈을 때 유일하게 신경 쓰였던 존재. 윤은 나름대로 이상하진 않은 계획이 있었기에 심드렁히 말했다.

“내가?”

“그럼 대체 왜 이러는데, 곧 죽을 사람처럼. 아미가 불안해 해!”

“너 이번주는 야근한다지 않았냐?”

“이걸 보고 하고 싶겠어?”

싫겠지. 근데 그건 평소에도 그랬지 않나?

최윤은 그리 생각했지만, 그 말을 꺼내는 순간 제 등바닥이 남아나지 못할 것임을 확신했기에 주먹 쥔 친구를 그냥 두었다.

그리고 동생의 불안에 대해서는, 솔직히 큰 걱정이 되진 않았다. 일부 인간은 불안할 때면 주어를 바꿔 언급하는 버릇을 지닌 까닭에.

윤은 덤덤하게 대답했다.

“곧 죽을 사람인 건 맞고, 인간이 이만큼 살았으면 호상인데 불안할 것까지야. 최아미는 금방 적응할 걸. 네가 문제지.”

“….”

“그냥 여행 갔다고 생각해. 틀린 사실도 아니니까.”

예현은 움찔하다 조심스럽게 말했다.

“혹시 예전에 한 얘기 때문이야? 그거 백 년은 된 일이잖아.”

맞았다. 그래서 윤은 어차피 확정적인 제 죽음을 예현에게만은 상황이 정리될 때까지 비확정된 상태로 두는 게 나을 수도 있겠단 결론을 내렸더랬다. 이 상태로 본가에 머물러봤자 친구는 부정적인 감정만 소모할 따름이니까.

물론 제 죽음은 노화에 따른 자연사이고, 친구는 지난 백 년간 관록을 갖추었으며, 힐데와의 만남을 통해 정신병도 다소 호전된 만큼 전과 다른 결론을 내릴 수도 있겠지만…. 어떤 판단은 미세한 오차만 발생해도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하는 법이었다.

허나 그 생각을 예현에게 있는 그대로 노출할 순 없었으므로, 윤은 부러 과장된 어투로 여행 목적을 부풀렸다.

“아니. 따지자면 천사를 만나러 가는 거야. 체력이 완전히 소진되기 전에…. 성지 순례처럼?”

“―최윤 네가 신을 믿었다고? 미쳤어?”

자신조차도 황당해서 윤은 헛웃음을 터뜨렸다.

하지만 생각할수록 제 말에 아주 틀린 구석은 없어 보이기도 했다. 인격이 괜찮은 사자는 신적 존재로 승격된다는 설화도 있지 않던가? 처음 만난 날에도 그리 보였고. 힐데베르트 탈레브가 지옥에 갔을 것 같지도 않았다. 죽은 이가 자신이었다면 몰라도.

“말이야 맞는 말인데.”

“아. 진짜…. 도와줄 만한 건?”

이예현이 뒷목을 긁더니―누군가의 영향이었다― 말했다.

최윤은 드물게 고개를 기울였다.

“갑자기?”

“짜증나는데 즐거워 보여. 최근 들어 제일!”

이예현이 성큼성큼 다가와 친구가 싸고 있던 짐을 확인했다. 사실 굳이 챙길 필요는 없었고, 부족하면 물품을 구매하면 그만이었으나 윤은 그가 오지랖을 부리게 두었다. 자신 또한 상대에게 해선 안 될 짓을 했다는 자각은 있었으므로.

최윤은 대신 팔짱을 끼고 말했다.

“도움은 됐고 최아미나 잘 부탁한다.”

“꼭 그런 말까지 해야 해?”

예현이 언성을 높였다. 윤은 어깨를 으쓱였다.

힐데는 임무를 마친 뒤 포털을 나왔다.

특정 보급소가 야간마다 밤눈이 밝은 크리처에게 공격받는다길래 다녀오는 길이었다. 그래서 포털을 통해 본부 옥상에 귀환했을 땐 이른 아침이었는데.

남자는 검은색 셔츠를 입고 서 있었다.

이 근처에서 배저 본부만큼 높은 건물은 없었고, 하여 옥상은 광활하게 트여 있었다. 날도 청명해서 온 구름이 잿빛 없이 목화처럼 하얬고. 그 가운데서 제 취향으로 옷을 입은 채 자신을 기다리는 잘생긴 연인은, 존재감이 과할 정도였다.

힐데는 무심코 손등으로 눈가를 비볐다.

꿈은 아닌 것 같은데 웬 사람이 저렇게 탄산음료 광고영상 같냐. 주변의 다른 이들이 들었으면 펄쩍 뛰었을 생각도 들었다.

힐데는 한달음에 윤에게로 다가갔다.

“왜 여기서 기다리….”

그러다 멈칫했다. 애인 인상이 고작 사흘만에 제법 달라져 있어서. 이 인간 좀, 마르지 않았나? 평소보다 낯빛도 피곤해 보였다.

“무슨 일 있었습니까?”

“그냥 보고 싶던데.”

최윤은 픽 웃었다.

제 뒤로 다가온 팀 동료들이 수군거렸다. 소문이 사실이니 어쩌니 하는 이야기들. 힐데는 순간적으로 쏘아붙일 뻔했다. 다들 시력을 잃었나? 피로와 마른 몸은 보이지도 않느냔 말이다. 멀리서 볼 때는 옷이 까매서 생긴 착시인가 했는데 그는 확연히 수척했다.

눈빛도 다른 이들을 볼 때나, 심지어 평소 자신을 마주할 때와도 달랐다. 누구도 현재의 윤을 무기질적이라고 판단하진 못할 터다. 헤아릴 수 없이 깊은….

힐데는 그에게로 다가가 속삭였다.

“윤. 설마 검사에서―”

“집부터 가지.”

아니면 아니라고 단언했을 인간이다. 힐데는 마른침을 삼켰다. 순식간에 끔찍한 가능성이 떠올랐다. 이 사람을 잃으면 나는.

커다란 손이 정수리를 짓눌렀다.

“힐데베르트. 망상하지 마. 네 생각관 다르니까.”

힐데는 눈을 깜빡이다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최대한 빨리 옷 갈아입고 오겠습니다.”

“그래. 주차장으로 와라.”

윤이 먼저 옥상을 빠져나갔다. 힐데베르트는 급히 탈의실로 가서, 입고 왔던 평상복으로 갈아입은 뒤 지하주차장을 찾았다.

윤이 자주 주차하는 자리―아무도 막진 않았지만 후배들이 꺼리는 곳이 몇 개 있었다. 예현이 대는 곳 근처라든가―로 향하자 연인은 안면 인식으로 차의 문을 열었다. 그 즈음엔 기분도 꽤 진정되어 힐데는 습관적으로 운전석에 다가가는 윤에게 말했다.

“제가 할까요. 어디 아프신 것 같은데.”

최근 전수 검사가 있었어서 사고가 극단까지 치달았지만 최윤은 청색병이나, 그건 백신을 맞았댔지, 아무튼 다른 병을 앓는 중일지도 몰랐다. 그가 경증 치매가 시작된 상태였으면 평소의 명징한 기억력과 비교했을 때 티가 안 났으려고.

아마 야근 탓에 정신적인 피로가 몸살로 이어졌다든지. 정확히는 그랬으면 했다. 그건 가만 두면 나을 증상이니까. 체온을 한번 재보고 싶은데….

최윤은 착석부터 했다.

“아니. 난 여기가 좋으니까 넌 보조석에 앉아.”

애도 아니고 아픈 인간이 뭘 여기가 좋대!

허나 덩치도 산 만한 배저를 강제로 끌어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힐데베르트는 입을 댓발로 내민 채 보조석에 앉았다.

그래도 힐데는 큰 걱정은 하지 않았다. 센터코어의 모든 차량에는 자율주행 시스템이 탑재되어 있었다. 운전자는 시스템이 고장났을 때 보조하는 정도로도 충분했다. 윤에겐 당연히 면허가 있고, 스포츠카를 구입하는 게 취미인 만큼 솜씨도 상당했지만, 그는 아픈 컨디션에 수동 운전을 고집할 인간은 아니었다.

비합리적이니까.

윤이 차의 시동을 켰다. 그리고 목적지를 지정하는 일 없이, 람보르기니가 출발했다. 이 인간이 미쳤나? 힐데는 눈을 크게 떴다.

“자율주행 안 켜십니까?”

최윤이 맑게 웃었다. 평소보다 표정도 풍부하고. 진짜 뭘, 잘못 먹은 것 같은데. 식중독일지도. 힐데는 의심스럽게 윤을 흘끗했다.

“의심하냐?”

귀신 같은 인간.

차량은 부드럽게 지하주차장을 빠져나왔다.

“아파 보인다고요. 켜고 그냥 쉬시죠.”

“못하겠다 싶으면. 오랜만이라 꽤 재밌네.”

그러면 할 말이 없었다. 윤의 운전 솜씨는 그대로였으니까. 그는 고집을 부릴지언정 한 입으로 두 말 하는 인간은 아니니, 정말 피곤해지면 제가 참견하기 전에 알아서 자율 주행을 켤 것이다. 힐데는 편안히 보조석에 등을 기댔다.

창문을 열자 시원한 바람이 불어왔다.

이 시간에 퇴근한 덕분인지, 좋은 날씨 때문인지, 연인과 둘이서만 차에 앉은 까닭인지. 예정에 없던 드라이브를 하는 느낌이라 힐데베르트는 기분이 퍽 좋아졌다. 그는 창가를 통해 들어오는 햇살에 미소 짓다가 윤을 관찰했다.

이런 말 하긴 그렇지만 수척한 것도 나름.

“얼굴 닳겠다.”

본다고 닳을 거였으면 진작 달걀이 됐을 걸. 힐데베르트는 그리 판단했으나 낯간지러운 말을 꺼내진 못하고 투덜거렸다.

“댁도 자주 보잖아요.”

잠자리에선 꽤 집요하게….

“그렇지. 나도 미감이라는 게 있으니까.”

안 민망한가? 저한텐 단순한 사실이어서? 귓가에 열이 달아올랐다. 하필 홀로 이상한 생각이 떠올라서 더. 힐데가 멈칫할 때였다.

휭―. 바람이 세게 일었다.

“우왁.”

다시 자른 뒤로도 몇 년이 지나서 제법 긴 머리가 흩날렸다. 시야를 가리는 것이 거슬리기에 힐데는 한 손으로 머리채를 모아 쥐었다.

그러자 윤이 차분히 충고했다.

“수납칸에 머리끈 넣어뒀었잖아. 꺼내서 묶어.”

완전히 잊고 있었는데.

힐데는 그제야 넣어둔 머리끈이 떠올라 수납칸을 열고 머리를 묶었다. 나 자신보다 내 행적을 잘 아는 상대의 존재란 꽤 소름 돋는다고 생각하며. 

귀엽게….

진짜 미친 건 자신인가? 어느 누구의 협박도 없이 떠올린 생각이 황당했다. 언급하지 않은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어차피 묻어버릴 비밀이니 괜찮, 겠지?

“뭐 하냐?”

몸을 부르르 떤 게 보인 모양이었다.

“아, 아무것도 아닌데요.”

“딱 봐도 아무건데 운전중이니 봐준다.”

힐데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 와중에도 차는 매끄럽게 거리를 나아갔다.

기억력도 자신보다 좋고.

힐데베르트는 완전히 안심해서 물었다.

“윤. 이상한 결과를 받진 않은 거죠? 저도 통지가 오진 않았는데요.”

“대답하기 애매해서 바로 얘길 못했었다. 이 시간 기준으론 아니지만 내 몸은 노화한 상태긴 해. 아마 오늘 죽을 걸.”

힐데는 뜻을 이해하지 못해 침묵하다 되물었다.

“예?”

“오늘 뒈진다고. 생명체의 최후란 뻔한 것 아니냐.”

“…이렇게 뜬금없이 무슨 개소리십니까? 이 시간 기준으로 아니란 건 뭐고요.”

최윤이 소리내어 웃었다.

“힐데베르트. 교통 사고로 함께 죽어줄 생각이 아니라면 나머지는 집에서 얘기하지. 네가 쓸 데 없이 임무를 뛴 덕에 시간이 얼마 안 남았어.”

그렇게 중얼거리는 윤은 힐데가 본 모습중에서도 손에 꼽게 유쾌해 보였다. 그러자 늘 제 명줄을 지탱해온 불길한 감각이 경종을 울렸다.

저 태도가 거짓일 순 없다고. 

힐데베르트는 더 이상 어떤 말도 하지 못했다.

오두막은 본부와 멀지 않은 거리에 있어서 힐데는 금세 집에 도착했다. 그는 차에서 나오자마자 자신을 시한부라 주장하는 윤을 부축하러 갔는데, 당사자는 뭐 하냔 듯 멀뚱멀뚱한 눈으로 힐데를 보더니 알아서 오두막에 들어가 버렸다.

그래서 시한부야, 아니야?

힐데는 인내심이 한계에 달한 것을 느끼며 안으로 들어갔다. 윤이 계속 의아하게 군다면 잿빛 망토를 한 마리 잡아와야겠단 생각이 들 정도였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최윤은 지독히 효율적인 인간이었다. 그는 소파 팔걸이에 외투를 올려두곤 자리에 앉더니, 힐데가 항의하기도 전에 입을 열었다.

“너 오늘 이상한 능력 생길 거다.”

“…이건 또 뭔 소린데요?”

영 생뚱맞은 소식이었다.

허나 의외로 들을수록 맥락은 있었다. 우선 최윤은 노화가 시작된 본인의 건강 상태를 간략하게 설명한 뒤, 자신이 미래에서 왔음을 주장했다. 힐데는 그가 탈출한 재연이 아닌지부터 본인의 협조를 얻어 확인했다.

“의심해서 죄송합니다만, 콜튼 개새끼 해봐.”

“그 정도론 안 되지. 다음엔 ‘콜튼은 힐데베르트에게 더 집착한다’ 라고 외치게 해. 꼴이 볼 만할 텐데 못 봐서 아쉽군.”

순수하고 진득한 악의와 즐거움. 그는 황당하게도 최윤이 맞았다. 윤은 바지 주머니에서 담배를 한 개피 꺼내 물었다. 불은 힐데가 붙여주었다.

맞담배를 할 때면 종종 맡았던 향이 퍼져나갔다.

윤은 그 능력을 어릴 적 자신을 돌봐주던 사람이 사망했을 때 얻었다고 했다. 당시에는 기이한 힘이 생겼는지도 몰랐지만, 이후 두 차례 시간을 이동하는 경험이 생겼고, 유품으로 고인의 일기를 얻으며 이게 어떤 능력인지도 파악하게 되었다고.

당사자도 비상식적인 힘을 파악하고 싶긴 했는지 일기엔 다음 같은 추측이 쓰여 있었다고 한다. 힘은 보유자가 죽을 때 곁에 있는 사랑하는 이에게 넘어간다는 것. 그 순간 둘 사이에 인과가 생겨, 상대가 살아온 때를 드물게 여행하게 된단 것. 소요 시간은 하루 정도.

그렇게 정리를 한 뒤에야 윤은 제 추측을 말했다.

“그런데 내 시간대에 넌 이미 죽은 상황이라. 아마 능력을 넘길 ‘사랑하는 사람’이 필요해서 죽기 전에 네가 살아 있는 시간에 도착한 게 아닌가 싶은데.”

사랑이라.

그 단어는 지나치게 감정적이어서 최윤이 꺼낸 것 같지 않았다. 담담히 언급하는 목소리를 들으면 학회에서 학문 용어를 쓰는 듯 느껴질 정도였다. 하지만 현실성이 떨어져서 오히려. 힐데는 떨리는 손끝으로 관자놀이를 짚었다.

윤은 담배를 재떨이에 눌러 끄더니 통보했다.

“믿든 말든 오늘 너한테 넘어가긴 할 거다. 난 너를 예전에 한 번 보긴 했었으니까.”

힐데는 울컥했다.

“의심할 리 없잖습니까. 댁이 이렇게까지 헛소리를 하는데! 하지만 그러면 곧 죽을 상황에 대체 운전은 어떻게 한 건데요?”

“그 정도야. 마약성 진통제를 때려넣었지. 지금도 정신이 살짝 몽롱해.”

“…사실 같이 죽으려고 온 거 아닙니까?”

“그럴 걸 그랬나?”

윤이 입가를 끌어당겼다.

힐데는 뒷목을 잡았다.

힐데베르트는 한숨처럼 웃음을 내쉬다가, 의욕을 긁어모아 일단 앉아 있던 최윤부터 소파에 눕혔다. 이후 팔짱을 낀 채로 좁은 거실을 빙빙 돌면서 일을 어떻게 해결하면 좋을지 고민하다가, 괜찮은 방법은 하나도 떠오르지 않는다는 결말에 다다랐다.

결국 뇌가 터진 힐데는 윤에게로 다가가 외쳤다.

“죽지 마세요!”

“머리 울린다.”

“날 갈구려고 태어난 귀신 아니었냐고. 제멋대로 두고 가는 게 어딨습니까?”

최윤은 세상 한심하단 눈으로 연인을 흘겨보았다.

“네가 먼저 죽었다니까. 그리고 사람이 사망해야 귀신이 되지, 어떻게 귀신으로 태어나?”

힐데베르트는 확신했다. 제가 죽기 직전에도 팩트 체크가 중요한 애인이라니 진작 헤어졌어야 했는데. 그래도 짜증이 나 정신은 들었다.

윤은 귀찮은 듯 손을 내젓고는 말했다.

“수칙이나 읊어봐.”

“이동한 시간대에서 남한테 함부로 접근하지 말 것. 역사가 꼬이니까…. 본인부터 접근해놓고서!”

힐데가 발을 굴리며 항의했다.

허나 이번에도 윤에겐 명분이 있었다.

“아무래도 군인이라 명령엔 복종하는 편이지.”

덤덤한 목소리.

힐데베르트는 단번에 그 말의 뜻을 이해했다.

그러자 더 이상 화를 낼 수 없었다. 현실을 부정할 수도, 무죄인 연인을 다그칠 수도. 대신 찾아온 것은 감당하지 못할 슬픔이었다.

아끼는 이의 죽음을 마주할 때면 항상 느꼈던.

무수히 받아들여야 했음에도 익숙해지지 못한.

힐데는 입술을 짓씹었다.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아 소파에 붙자 최윤이 무표정하게 팔을 뻗었다. 그는 연인의 입술 사이를 손끝으로 꾹꾹 눌렀다. 힐데는 그 모습에 언제나처럼 기묘한 다정을 느꼈다. 이토록 고요하고 차분한 위로라니.

겨우 정신을 차린 힐데가 속삭였다.

“윤. 혹시 소원은 없습니까? 아미나 예현에게라도 전화할까요? 죽는다는 얘기까진 안 하더라도 인사는 나눌 수 있잖아요.”

윤은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연락은 당연히 안 되고, 내 시간대에서 정리할 건 해뒀어서. 섹스?”

씨발, 제발 잘못 들은 거였으면.

불행히도 아니었다. 짜증스럽게 시선을 헤아리니 지독한 장난기가 엿보였다. 아무리 애인 슬픔을 거둬주고 싶었다지만, 아니, 그건 과자의 질소 포장이나 다름 없는 부풀리기고 이 새끼는 진짜로 성욕에 돌아버린 게 분명했다.

힐데베르트는 누군가의 바지 앞섬이 부풀어 오른 모양새를 겨우 외면했다. 그 존재감이 어떤지 알기에 쉽진 않았지만, 내 아픔을 이따위로….

“곧 죽는다면서. 할 체력은 되냐고.”

“이십 년을 못했는데 어떻게든 되지 않겠냐?”

이를 갈던 힐데는 멈칫했다. 잘못 들은 거 아닌가? 지금 몇 년을 수도승처럼 살았다고? 최윤이? 말은 되나?

그러나 최윤이 곧 죽는다는 말도, 제게 시간 이동 능력이 생길 거란 예언도, 사랑을 언급하던 목소리도 전부 잡아낸 귀가 이 얘기만 잘못 들었을 린 없었다.

힐데베르트는 심각해졌다.

그 즈음에 반은 진 게임이긴 했다.

“사인이 복상사면 나까지 쪽팔린다고…. 한발 빼주기만 할 테니까 가만히 있으십쇼.”

힐데베르트는 열이 달아오른 얼굴을 손으로 겨우 가리며 중얼거렸다. 얄밉게도 최윤은 그 반응에 전혀 놀라지 않았다.

삼십 분 뒤 힐데는 입안을 물로 헹구고 돌아왔다.

강제로 자극당한 목구멍이 과히 쓰라렸다. 구강을 채우다 못해 코를 메우던 비릿한 내음은 또 어떻고. 그나마 부탁대로 가만히 있었으면 버틸 만했겠으나 윤은 잠자리에선 질이 좋지 않은 애인이었다. 평소의 매너는 나름의 반성문이 아닐까 의심될 만큼.

하여간 손버릇이 나쁜 인간이야.

힐데는 다시 거실 소파로 다가와 풀어둔 머리끈을 잡았다. 그리고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손끝으로 빗어 정리한 뒤 가볍게 묶었다. 분명 화장실에서 얼굴을 깨끗이 씻고 왔는데 속눈썹이 영 찝찝하게 느껴졌다. 기분 탓이겠지만.

“매번 느끼지만 진짜 비리고 맛없습니다.”

결국 힐데가 투덜거렸다. 윤은 의아한 듯 말했다.

“그 맛없는 면보단 낫지 않나?”

힐데는 참지 못하고 그 입을 검지로 두드렸다.

“주둥아리. 렉시크누들을 욕하지 말라니까요.”

“사실 적시겠지.”

“…괜히 빨아줬습니다. 렉시크면 맛있기나 하지.”

“그러냐? 많이 봐줬다고 생각했다만.”

윤이 쿠션을 목에 대고 누운 채로 말했다. 힐데는 움찔했다. 그가 평소보다 자신을 제법 봐준 건 사실이었던 까닭이다. 나이를 먹고 철이 들었는지, 본인 컨디션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성격상 후자이긴 할 텐데.

사실 힐데는 연인과 반 동거를 하고 있었으므로, 끝까지 갔으면 어떤 곤란한 오해나 일이 벌어졌을지 몰랐다. 당장 입술이 찢어진 것도 예리한 관찰력에 안 보일 리 없고,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머리가 핑핑 돈 까닭이다. 솔직히 윤이 아파서 다행이다 싶었다.

다만 그래서 미안하기도 했다. 이십 년만이라니까. 이 정도로 만족할 인간이 절대 아닌데 대체 상태가 얼마나 안 좋으면.

“아쉽냐?”

“아니거든.”

최윤은 가볍게 웃었다.

힐데는 그 모습을 바라보다 상대에게로 다가갔다.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가 몹시 궁금했다. 자신은 어떻게 죽었는지, 그때 당신은 어떤 기분이었는지. 지금 내가 느끼는, 표현하기 힘든 슬픔과 아쉬움을 당신 또한 느꼈을지.

그것은 상실감이었나, 배신감이었을까, 혹은 그저 통각이었는지. 분노와 짜증 혹은 이질감. 죄 아니면 타인으로서는 아예 헤아리지 못할 기분이었는가.

어쩌면 그랬을지도 모른다.

힐데베르트 탈레브는 죽을 때까지도 그의 감정에 닿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최윤이라는 이름의 무한히 뻗어 있는 우주를 유한히 헤매다 끝났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힐데는 이 불가해한 생물과 마주치고 웃고 울며 살던 과정에서 불안을 느낀 때가 거의 없었듯, 이번에도 제 무지를 두려워하진 못했다.

상대가 다른 이였다면 몰라도.

“윤. 사실 저를 꼭 기다리지 않을 수도 있었잖아요. 제가 최윤에게 목숨을 주었습니까?”

“그렇다면?”

“…당신 참 단순한 인간이야. 그래서 사랑할 수밖에 없었어요.”

그는 받은 만큼 주었고, 쏟은 만큼 건네었으므로.

내가 준 것이 무엇이고 당신이 건넨 것이 무엇이든.

그렇지 않은가? 내가 나의 죽음을 당신에게 양도했으니, 네게도 내 목숨의 소유권을 넘겨 주겠다니. 가장 복잡한 아픔까지도 이토록 명쾌하게.

더는 참을 수가 없었다.

“왕자님. 대체 나이는 어디로 먹으신 겁니까?”

눈물이 뚝뚝 흘렀다. 허나 그것이 민망하진 않았다. 힐데베르트 탈레브는 최윤의 감정에 대해 많은 부분을 알지 못했으나, 이전부터 하나는 확신한 까닭이다.

“우는 거 좋아하는 거 다 알거든….”

지금도 연인은 남의 눈가를 핥고 뺨 위로 입술을 맞추기 바빴다. 무슨 뱀도 아니고. 힐데는 그의 팔을 붙들고 칭얼거렸다.

“저 키스 이상의 스킨십은 마음이 있는 사람과만 할 거라고 생각했었다고요!”

윤은 어이가 없다는 듯 뚱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니 나와 해야지. 너도 날 사랑한다 했고 나도 너를 사랑하니까. 아니냐?”

헌데 설마 그 사람이 최윤이 될 줄은.

이 소름 끼치게 사랑스러운 인간 같으니!

마지막 입맞춤에선 짠맛이 났다.

최윤은 그답게도 죽었다.

원래도 불필요한 움직임이 드문 인간이었다. 종종 새벽에 깨서 옆자리에 잠든 이를 발견하면 시체처럼 느껴질 때가 있었다. 규칙적인 호흡과 체온만이 그가 살아있음을 유이하게 증명했다. 그 꼴이 퍽 신기해서 힐데는 그를 몰래 구경하곤 했다.

최윤이 완전히 호흡을 잃은 지금, 힐데는 그것이 전혀 신기하지 않았다. 죽은 자가 움직이지 않음은 당연한 전제니까. 그는 결국 모든 가능성을 상실한 것이다.

그럼에도 힐데는 윤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오히려 좁은 소파에서 그를 내내 끌어안고 있었다. 그러면 최윤 본인의 온기가 식어가는 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힐데는 깊은 슬픔에 그 어깨에 고개를 묻고 흐느끼다가, 멍한 기분으로 시간의 흐름도 인지하지 못했다가, 드물게 이상한 생각을 떠올리길 반복했다.

이 인간 틀림없이 내 시체 챙겼을 텐데.

나도 눈 하나 정도만 가져가 버릴까….

다행히 그런 생각은 눈 위에 손을 올린 순간에는 멈출 수 있었다. 이렇게도 수려한 작품에서 핵심을 떼어내 하자를 만들기가 양심상 그러했던 것이다.

심연을 들여다 보면 심연이 된다더니 윤과 사귀다 소시오패스가 되어버렸나. 어이가 없었지만 마지막 양심은 놓지 않은 힐데는 어떻게든 정신을 차렸다.

허나 여전히 최윤에게서 떨어지진 못했다.

시체 애호가가 된 기분.

조금만 더 미치면 성관계도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러면 죽은 윤도 약이 올라서 살아돌아올지 모른다. 내가 죽기 직전엔 안 해주더니 무슨, 짓, 이냐면서….

깨어났을 땐 완전히 낯선 장소였다.

힐데베르트는 비몽사몽한 상태로 침대에서 빠져 나오려다가―베개가 왜 이리 무거워. 갖다 버릴까― 바닥에 등부터 떨어졌다. 반사적으로 정신이 든 그는 주변을 둘러보다가, 이 공간에서 익숙한 것은 방금 자신을 떨군 소파뿐임을 깨달았다가, 기억해냈다.

윤이 죽었으며 자신은 그를 안고 있다 잠들었음을.

힐데가 벌떡 일어났다.

최윤!

다행히 시체는 무사했다. 시체에게도 ‘무사하다’란 표현을 붙일 수 있다면 말이지만. 어쨌든 흠결 없이 어제와 같은 모습이었다. 힐데는 숨을 푹 내쉬었다.

이제 문제는 낯선 공간이 되었다.

실마리가 전무했다면 반 배저단체에 납치됐는지부터 의심했겠으나 힐데베르트는 어제 윤이 한 말을 기억하고 있었다.

분명 하루를 버티면 원래 시간으로 돌아갈 수 있다 했으니까, 아마 윤의 시체는 힐데가 있던 시간대에서 하루를 소모해 여기 귀환한 듯싶었다. 그리고 자신과 제 소파는 그동안 시체와 찰싹 붙어 있었어서 이동에 엮인 게 아닐까 싶은데.

나도 하루가 지나면 돌아갈 수 있나?

이 낯선 곳에 애인 시체랑 소파와만 묶인다면.

불길한 상상을 하자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물론 윤의 추측이 틀릴 일은 거의 없었다. 하지만 얘길 듣기론 이동할 때만 전제로 삼은 것 같았는데, 이동 당했을 때도 같은 결과가 나올지.

힐데베르트는 뒷목을 문질렀다.

문지르며 고민하다가 결국 어떻게든 되겠지, 라는 결론을 내렸다. 사실 자신이 정말로 시간을 이동해온 상태라면 해결할 방법을 아는 것도 아니었다. 학자는 결국 연인일 뿐, 그렇게 파고드는 기질은 뼛속부터 무인인 저와는 근본적으로 맞지 않았다.

하루가 지나도 해결되지 않으면 그때 고민하자.

결론 내린 힐데는 주변부터 둘러보기 시작했다.

넓은 공간이었다. 어림 잡아 삼십 평 정도. 방문이 여럿 있었으니 실제 공간은 훨씬 넓을 터다. 그러나 면적에 비해 가구나 짐은 거의 없었다. 컬러감 또한. 윤의 안가중 하나지 싶은데, 본가와 달리 인테리어에 간섭할 이가 없으니 본인 취향으로 뭉개버린 듯했다.

힐데는 인간미라곤 없는 풍경에 혀를 내둘렀지만, 그럼에도 동생과 친구의 의견에 귀찮도록 휘둘리며 맞춰줬을 연인을 떠올리면 그가 귀엽게도 느껴졌다. 이 집을 돌아다녔을 윤을 상상하면 그림이 당사자완 어울리기도 했고.

더군다나 내부를 둘러본 지 얼마 되지 않아 힐데는 집안에 안 어울리게 티그를 쏙 빼닮은 로봇청소기를 발견하였으므로, 이곳이 성에 찼다.

모두 최윤이 살아온 흔적이었다.

힐데는 곧 보물선을 발견한 해적처럼 집안을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어차피 주인은 죽어서 제게 간섭할 수도 없었다. 혹 되살아나면 몸으로 무마해보지, 뭐.

무엇보다 그는 기계를 하나 확보하고 싶었다.

시간만 확인하면 거의 전부가 명쾌해질 터다.

얼마 지나지 않아 침실에서 휴대폰이 나왔다.

인류가 아직 이것을 사용하고 있어서 다행이었다. 액정을 두드리자 시간이 떴다. 이십이 년 후. 힐데는 그 숫자를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정신을 차렸을 땐 밤이 되어 있었다.

힐데베르트는 시체가 된 윤을 등에 업은 뒤 침실 침대로 옮겨주었다. 당사자는 고마워 하진 않을 것 같긴 했다. 애초에 시체니까.

그러나 이유는 불명이었으되 침실 천장은 유리로 되어 있었고, 힐데는 그 풍경을 죽은 연인과도 함께 즐기면 좋을 것 같았기에 본인의 동의는 무시했다.

이 인간한테 이런 낭만이 있었나.

달과 별이 금방이라도 쏟아져내릴 것 같았다.

손을 뻗으면 닿을 듯이….

두 눈을 깜빡이며 고요히 흘러가는 은하수를 보자 힐데베르트는 문득 묘한 생각이 들었다. 연인이 가장 사적인 공간에 펼쳐둔 풍경이 본인 취향은 아니었을 것 같다는. 이토록 시시각각 바뀌는 밤하늘과 희미한 빛무리가 수면에 긍정적으로 기능할 리 없었다.

하지만 내가 이곳에서 잠들 단 하룻밤을 위해서 이 짓을 해뒀다는 건 자의식 과잉이지. 힐데는 떠올린 생각이 민망해서 킥킥 웃었다.

아무리 최윤이 최윤이라지만 본인이 죽은 뒤마저 예상할 수 있었을까 싶었다. 그럼에도 최윤이라면, 하게 되는 건 제가 그를 과히 의지하는 까닭일지도.

어쨌든 이젠 알지 못할 이유야 아무래도 좋았다.

잠깐의 우스꽝스런 생각덕에 힐데베르트는 연인의 시체와 함께 잠드는 이 순간이 외롭거나 괴롭지 않아졌으므로. 의도의 유무쯤 알 반가. 이렇게 늘 그랬듯 필요할 때 제게 다가와주는데. 하여간 대단한 인간이야.

달이 영원한 잠에 빠진 연인을 창백하게 비추고….

힐데는 찰나, 달빛이 웃는 소리를 엿들은 듯했다.

다음날 아침.

힐데베르트는 비밀번호 입력으로 윤의 휴대폰의 잠금을 풀어서 예현에게 연락했다. 물론 죽은 자신의 계정이 남아 있을 린 없었으므로―남아 있는 걸 봐도 무서울 것 같길래 확인하진 않았다―, 최윤의 계정을 빌렸다. 연락 내용은 별것 없었다.

이곳 주소.

최윤인 척을 잘할 수 있을 것 같지도 않고, 그러는 게 예의도 아니다 싶어 일부러 말을 줄였다. 힐데는 초조하게 대자를 기다렸다.

사실 예현과 접촉하는 건 역사를 바꿔선 안 된다는 윤의 충고를 무시하는 짓이었지만, 이 부분은 별 수 없었다. 시체를 부패하기 전엔 넘겨야 할 것 아닌가. 어차피 윤도 자신도 사망한 상황인데 역사쯤 바뀌어봤자 무슨 상관인가 싶고.

정오쯤 마당에서 차 대는 소리가 났다.

힐데는 문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문을 열, 어주려 했으나 이예현의 손속이 빨랐다. 문고리가 한 순간의 망설임도 없이 나가 떨어진 것이다. 어….

당황스러웠지만 그래도 반가움이 앞섰다.

“예현!”

“최윤!”

신경질적으로 친구를 호명한 이예현은 평소에도 크던 눈을 휘둥그레 뜨더니, 이내 얼빠진 표정으로 말했다.

“…천사?”

엥.

오해는 함께 소파에 앉아서 한 시간 정도 대화를 나눈 뒤에야 풀렸다. 예현은 좋은 청자라 말의 진위를 의심하진 않았지만, 그럼에도 제가 겪은 사건이 워낙 특이했던 탓이다. 사실 이제 하루가 지났을 뿐이라 힐데도 제 이야기가 낯설게 느껴지기도 했다.

허나 다행히 예현은 연신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그래서 그날 병실에서 미안하지만 돌아가 달라 하셨던 거군요.”

“응?”

“사정은 나중에 꼭 설명하겠다고도 하셨습니다. 사실 그래서 녹음을 또 남겨두신 건가 했는데요…. 설마 이런 얘기일 줄은.”

“어, 미, 미안!”

전후 상황을 눈치로 이해한 힐데베르트가 황급히 사과했다. 당연히 녹음이 있을 줄 알고 죽기 직전에 물러난 건데 뒤통수를 거하게 맞았다는 뜻 아닌가.

그러자 예현은 가볍게 웃었다.

“푸핫. 농담입니다. 그래도 저와의 약속은 지켜주셨으니까요. 이런 사정을 어떻게 녹음으로 남기겠어요? 충고는 생각할수록 윤이 옳게 한 것 같지만요.”

힐데는 민망함에 턱을 긁었다.

예현은 곧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어쨌든 윤도 당신도 죽을 때 외롭진 않았단 거죠.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힐데.”

힐데는 그제야 이 모든 상황이 연인의 안배였음을 알았다.

하여간 수단 좋은 인간이라니까.

힐데베르트는 조심스럽게 아이와 대화하고, 이젠 백 세를 넘어가는 청년의 머리를 천천히 쓰다듬어준 뒤, 아주 화창한 날에 소중한 대자와 이별했다.

텄다.

피 묻은 팔을 끌어당기던 최윤은 판단했다.

이건 글렀다. 출혈이 너무 많다. 지금 살아 있는 게 기적이지만, 몇 분 안 가 죽을 것이다. 자신이 어떻게 할 수 없는 운명이다. 이미 시체나 다름 없다.

그렇다면 돌아서는 게 나을 것이다.

최아미는 자신이 순간적으로 끌어안은 덕에 멀쩡하지만, 도로에 놓아두었으니 그것은 현명한 선택이 아니다. 최윤은 돌아가야 한다. 적어도 그 먹고 싸고 우는 것밖에 할 줄 모르는 갓난쟁이를 갓길로 옮겨야 한다. 이후 구조를 기다리는 것이 최선이다.

허나 왜일까.

발이 움직이지 않았다.

“윤. 괜, 찮니?”

거듭 거친 숨만을 몰아쉬던 여자가 말했다. 기력이 없을 텐데. 유언을 남길 셈이군. 최윤은 눈을 가늘게 뜨곤 억양 없이 말했다.

“데려올게요.”

여자는 힘겹게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 이리 오렴.”

무슨 뜻인지를 인식한 최윤은 되물었다.

“저 아이를 사랑하셨잖아요?”

그러나 여자의 눈은 제게 고정되어 있었다. 윤은 그 사실을, 뭐라 받아들여야할지 몰라서, 납득할 수 없고 이해하지 못해서, 영원히 그곳에 머물러 있을 것처럼 매여있다가, 겨우 그녀에게 다가갔다. 여자의 시간이 순간으로 쪼개지고 있음만은 인지했기에.

자신과 달리.

여자가 겨우 입꼬리를 끌어당겼다.

“그래…. 하지, 만 너도 아꼈단다.”

최윤은 그저 침묵했다.

제 안에서 무언가가 끓어오른 탓이다. 허나 그것을 분별할 수 없는 까닭이다. 알지 못하니 판단할 수가 없으며, 판단하지 못하니 움직일 수도 없었다.

최윤은 차선책으로, 제 심장이 뛰는 속도와 뇌가 작용을 멈춘 상황에 미루어 이것을 짐작해 보았다. 이것은 분노인가? 아니. 최윤은 그녀를 해치고 싶지 않다. 공포인가? 아니. 그녀도 자신을 해칠 수 없으며 여자의 죽음은 기정 사실임을 최윤은 확신했다.

그렇다면 이것은 대체.

그 순간 여자가 기침하며 말했다.

“다행이지. 너도 이 마음, 을 알게 되, 어서.”

“….”

“얼마나, 사랑스러웠, 는지….”

여자가 손을 뻗었다. 최윤은 반사적으로 그 손길을 붙잡았다. 그러자 여자가 애써 미소 지었다. 피칠갑을 한 채로, 뻔히 보이는 고통을 아득바득 숨기면서.

마침내 움직임이 멎은 찰나.

최윤은 이것을 사랑이라 부름을 학습했다.

허나 사랑이 무엇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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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5


  • 민첩한 새우

    죄송합니다. 저는 아내가 있어서. < 정말 좋은 울림 하여 힐데베르트가 사랑하는 여우는 그의 하나뿐인 벗일 수밖에 없음도. 다른 때는 읊조리지 않고 (중략) 그게 힐데가 제 마음을 두드리는 방식이기도 했음을 윤은 모르지 않았다. < 몇 번을 읽어도 좋아하는 부분 ㅜ.ㅜ 힐데베르트가 입술 사이에서 사랑을 속삭였다. [미래에서 만나요.] 🥲 치매 연구의 동인이 힐데였다면 연인이 사망한 날 연구도 막을 내렸을 터였다. 시간을 더 써 무엇 한단 말인가? 죽은 힐데베르트가 살아 돌아오진 못할 것을. < 그니까.....그 최윤이.........😢 하여 사흘째 아침에 최윤은 약을 개수대에 부었다. 최윤은 그것 또한 갖고 싶었고, 가져야만 했다! 자신 외의 누구도 그를 쥐게 둘 순 없었다. < 자신의 힐데가 아니기에 약을 버린 최윤부터 여기까지 최윤의 소유욕이 너무나 잘 보여서 좋아해요 아니. 따지자면 천사를 만나러 가는 거야. < 악마는 못 만났지만🥲 천사는 만낫네요.... 윤달의 옥상과 재회의 옥상........... 함께 차를 타는 것이 오랜만인데 수납칸에 넣어둔 머리끈은 잊지 못한 최윤.......... 제가 최윤에게 목숨을 주었습니까? 그렇다면? 내가 나의 죽음을 당신에게 양도했으니, 네게도 내 목숨의 소유권을 넘겨 주겠다니. < 달달하다는 말로는 부족함....이 지독한 사랑아 힐데는 곧 보물선을 발견한 해적처럼 집안을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 이 부분 읽을 때마다 '최윤이란 이름의 우주를 헤매다 끝났을지도 모른다' 랑 맞물려서? 우주처럼 생긴 집 안을 다니는 힐데로 상상이 돼요 달이 영원한 잠에 빠진 연인을 창백하게 비추고 힐데는 찰나, 달빛이 웃는 소리를 엿들은 듯 했다. 가볍게 발췌하려고 재독하기 시작했는데 밥 먹는 것도 잊고 재독했네요^.ㅜ 처음이랑 두번째 읽을 때는 거의 제정신이 아니었어서(ㅋㅋ큐ㅠ) 천천히 음미하면서 읽으려고 주말만 기다렸는데 이제는 결말을 아니까 제정신으로 읽을 수가 없더군요(..) 좋아했던 부분이 또 좋아서 했던 말 또하긴 뭣해서 최대한 안 겹치는 부분만 감상으로 써야지~ 했는데도 좋아했던 부분들은 또 좋아서 ㅋㅋ 결국 했던 말 또 하고 또 하고..그치만 했던 말 또 하는 게 오타쿠 아니겠습니까?(?)

  • 전설의 족제비

    눈물이 너무 나요...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으아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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