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현힐데] 파도의 행로 - 3
새뮤얼은 순하게 앉아있는 예현과 그 옆에 얼빵하게 앉아있는 힐데베르트를 한 번씩 바라보곤 한숨을 쉬려다 꿀꺽 삼켰다.
“검사 결과는 완전 멀쩡해. 스트레스는… 눈에 띄게 낮고. 기억은 차도가 없다고?”
“예. 이거 괜찮은 겁니까?”
“어쩔 수 없어. 이런 류는 회복에 몇 년씩 걸리기도 하니까. 별달리 약이 있는 것도 아니고.”
힐데베르트가 뚱한 얼굴로 새뮤얼을 쳐다보았다.
“그렇게 노려봐도 어쩔 수 없어, 녀석아.”
새뮤얼은 팔짱을 끼고 힐데베르트를 마주 노려보다가, 예현에게 고개를 돌렸다.
“예현, 잠깐 나가서 진료실 밖에 앉아있어. 힐데랑 둘이서 얘기할 게 좀 있다.”
“네? 네…”
예현은 눈을 굴리며 눈치를 보다 진료실을 나갔다. 예현의 뒷모습을 눈으로 좇던 힐데베르트는 문이 닫히자마자 의사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무슨 얘깁니까?”
“대충 마무리 되고 있지?”
무슨 이야기인지는 알아들었다.
“뭐, 그렇죠. 요샌 점심도 예현이랑 먹습니다.”
“그래. 네 스트레스 수치도 역대급으로 낮은걸 보니 그런 것 같긴 했어.”
“그거 원리가 뭡니까…?”
“너희 사수한테 물어봐라. 아무튼, 이제 슬슬 예현한테 과거 이야기를 해 주는 게 좋겠다. 예현도 안정됐고, 너도 좀 한가하고.”
“그래도 꽤 가르쳐 줬는데요.”
“지구의 과거 말고, 예현의 과거 말야. 녀석이 주인공인 이야기를 해 주란 말이다.”
“…제가 아는 만큼이면 충분합니까?”
“그래. 그리고, 필터 넣지 말고. 너 예현이 끙끙 앓을만한 내용은 쏙 빼놓고 설명했지? 안 봐도 뻔해.”
반박할 수가 없었다….
“핸드폰도 돌려주고. 지인들이랑 연락도 주고받게 하고, 밖도 좀 돌아다니게 해. 그 집에서만 평생 가둬둘 게 아니면. 살아가야 할 거 아니냐, 예현도.”
진료실을 나오니 예현이 얌전히 앉아 힐데를 기다리고 있었다.
“조제과 들러야 해요?”
“아니, 오늘은 없어. 바로 돌아갈까.”
“네.”
“차로 가자. …우리 몇 층에 댔지?”
“지하 2층이에요.”
지나가는 사람들이 예현을 볼 때마다 놀란 얼굴로 인사를 했다. 예현은 힐데가 일러둔 대로 그저 미소 지으며 손을 흔들었다. 힐데는 계속 곁눈질하며 그가 하는 양을 보았다. 미소가 좀 과하게 밝은 거 같은데… 아니, 저 직원 얼굴이 빨개졌잖아. 그런 생각을 하는데 예현이 힐데의 손을 덥썩 잡고 걸음에 맞춰 흔들기 시작했다.
“예현… 그, 흔들진 말고.”
“네.”
흔드는 것은 멈췄는데 잡은 손은 그대로였다. 힐데베르트는 그 녹음을 떠올렸다.
기억을 잃은 너도 나를 좋아하고 있다. 그러나 그때 녹음했던 좋아함과는 또 다르겠지… 새뮤얼의 말은 틀린 것이 없었다. 예현도 살아나가야 하므로…….
내가 너의 모든 과거를 알려주면.
그땐 너는 나를 어떻게 좋아하려나.
예현에게 휴대폰을 돌려주었다.
사적 번호가 등록된 것과 공적 번호로 되어있는 것 중 어느 쪽이 나은가 잠시 고민하다가 그냥 둘 다 돌려주었다. 예현의 생체정보로 잠금을 해제하자 온갖 알림이 쏟아졌다. 그 알림을 확인하기 전에, 힐데베르트는 우선 주소록을 하나씩 짚으며 인물마다 간략한 설명을 해 주었다. 사적 번호 쪽은 등록된 번호가 몇 없어서 쉬웠는데, 공적 번호 쪽은 많아도 너무 많아서 그냥 메시지나 부재중 연락이 와 있는 사람 위주로 설명했다. 그러던 중 윤에게 전화가 왔다. 예현은 눈이 동그래져서 힐데를 쳐다보았다. 힐데는 받아보라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통화 버튼을 누르자마자 허스키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야.]
“…네, 어, 응.”
[뭐야, 아직도 안 돌아왔어? 힐데. 거기 있냐.]
힐데의 제스처에 예현이 얼른 통화를 스피커폰으로 바꿨다.
“예에.”
[여태 뭐했냐? 똑바로 안 하지.]
“아니, 새뮤얼도 시간이 약이라고 했단 말입니다.”
[한 대 더 패 봤어? 보통 그걸로 고쳐지는 거 같던데.]
“윤. 사람은 그렇게 쓰면 망가집니다.”
[맞아! 오빠는 예현 오빠가 로봇인 줄 알아?]
“아미!”
반가운 목소리가 들렸다.
“아니, 어떻게 둘이 같이 있습니까?”
[보급 때문에 잠깐 코어 안으로 왔는데 마침 오빠가 여기로 출장 온거 있지! 예현오빠! 잘 지냈엉?]
“어, 잘 지냈습… 지냈어.”
[뭐야? 아직 회복 중인거야? 나 자기소개 할까? 나는 최아미구, 최윤 오빠 동생이구, 오빠가 제일 예뻐한 사람인데–]
“예현은 저를 제일 예뻐했죠.”
힐데베르트가 무심코 끼어들었다.
[허어.]
[와….]
전화 너머의 반응이 심상치 않았다. 힐데는 머리를 짚었다. 눈치를 살살 보던 예현이 얼른 입을 열었다.
“그, 몸 조심하고. 언제 센터코어에 한번 들러줘.”
[그래. …아, 아미, 잭이 부른다. 가봐.]
[앗! 갈게! 예현오빠 또 연락할게!]
[이예현. 넌 끊지 말아봐.]
“응…?”
그러더니 갑자기 사수는 한국어로 뭐라 말하기 시작했다. 눈을 몇 번 깜빡인 예현은 윤의 말에 짤막짤막하게 대답했다. 표정이 그리 좋진 않아 보여서 힐데는 슬며시 예현의 어깨를 짚었다. 아이는 그를 올려보았다. 어쩐지… 눈빛이 조금 슬픈 것 같았다. 윤이 뭐라고 더 말했는데, 예현이 갑자기 공용어로 말했다.
“알겠어. 이제 끊을게.”
[그래. 연락해라.]
윤도 공용어로 대답했다. 예현이 통화 종료를 터치하는 것을 보며 힐데는 눈을 굴렸다.
“윤이 괴롭힌 거 아니지?”
“그런 건 아니고….”
예현은 잠시 숨을 깊이 들이마시고 내쉬곤 힐데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힐데. 제 과거 이야기… 해주실래요?”
아마도 사수의 어떤 말에 아이가 어떤 결심을 한 거겠지. 예현의 단단한 마음이 투명한 눈동자 안에 비쳐 보였다.
“…그래.”
힐데베르트도 마침 마음을 먹고 있던 터였다.
궁금한게 있으면 바로 물어봐야 한다고 당부를 먼저 한 뒤, 알고 있는 만큼 가감 없이 이야기를 시작했다. 예현의 시점에서 시간순으로 이야기하려다 보니 가장 처음은 부모에 대한 이야기였다. 아이는 잠자코 앉아 긴 이야기를 꼭꼭 씹어 삼켰다.
승현에 대한 이야기도 더했다. 아아, 나의 친애하는 후레제자. 그에게 끌려온 뒤 온갖 고초를 거쳐 결국 첫 전쟁을 끝낸 것이 너라는 이야기를 했다.
“그 검은 내 것이었지. 끔찍한 부탁이었다고 생각해. 아마 전쟁 때문에 머리가 어떻게 됐던 것 같기도… 변명하자면 그때 나는 그 검이 너에게 전달되었다는 건 몰랐어. 아무튼… 그걸로 네가 레이를 꺾었고, 너는 전쟁영웅이 되었지.”
“힐데.”
처음으로 예현이 입을 열었다. 힐데는 얼른 하던 말을 멈췄다. 사과하려나? 너의 잘못은 절대 없다고 대답할 생각이었다.
“괜찮아요?”
“…응? 뭐가?”
“힐데의… 친구가 죽었던 이야기잖아요. 힐데가 너무 힘들면 다음에 계속 이야기해 주셔도 괜찮아요.”
눈을 깜빡였다. 슬픈가? 힐데는 제 마음을 들여다보았다. 예전에는 제 검에 멈칫한 레이를 생각할 때마다 가슴이 미어지는 것만 같았다. 걷잡을 수 없이 울거나 잠을 이루지 못한 날도 많았다. 그런데 지금은… 글쎄. 그 일이 슬프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꽤 덤덤하게 말할 수 있게 되었다. 시간이 지나 흐려진 걸까? 아무튼 생각을 마친 힐데베르트는 대답했다.
“힘들지 않아.”
“정말요?”
“응. 나도 좀 신기하네. 예전엔 많이 괴로웠었는데.”
“…다행이에요. 계속 이야기 해 주세요.”
이야기는 흘러갔다. 자신은 지나가듯 들어 잘 알지는 못하는 두 번째 전쟁 이야기, 총사령관이 된 것, 그리고 자신을 거둔 것.
“윤이 개족보라고 했어.”
“푸흡.”
“그땐 네 존댓말이 정말이지, 너무 당황스러웠는데….”
“그래요?”
예현이 키득키득 웃었다.
“그럼 지금의 내가 반말을 하면 어때?”
“어.”
힐데는 잠시 말이 없다가, 팔을 슥슥 문질렀다.
“지금 좀 소름이…”
“아하하하.”
“아니, 지금 그러면 내, 제가 힘없는 전 총사령관님을 돌보고 먹이고…”
“괜찮아요. 그냥 하던 대로 하세요.”
“식은땀 났어….”
이런저런 이야기가 이어졌다. 송년회에서 보드카를 먹였다던가. TF를 만들었던 이야기, 재연, 희토류 전쟁, 전염병, 퇴임… 그리고 3차 전쟁.
너의 마지막 전쟁에 대해 이야기했다.
가슴이 저려왔다. 예전엔 먼 과거의 좋았던 기억들이 힐데베르트를 힘들게 했다면, 지금은 바로 몇 주 전의 슬픈 기억이 그를 힘들게 했다. 힐데베르트는 겨우 자신을 다독이며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발발의 전조, 자신의 잠적, 핵 버튼, 책임소재와 인과. 다만…
그 녹음에 대해서는 말할 수가 없었다.
힐데베르트는 제 비겁함을 인정했다. 자신은 당장 예현에게 대답을 할 수 없다. 변명하자면 슬퍼할 새도 없이 너를 돌보느라 바빴다. 그 녹음을 들은 것 조차 예현의 병실에서가 마지막이었다. 그 녹음은 네가 아무도 모르게 나에게 전해준 것이었다. 정말이지 너와 나밖에 모르는 일이다. 그 존재를 아는 사람이 하나 쯤 줄어든대도, 너는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힐데베르트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리고 너는 결국 승리해서, 살아 돌아왔지.”
예현은 제 볼을 문지르며 가만히 있었다. 생각에 잠긴 듯했다.
“혹시… 제가 다른 말을 남기진 않았나요?”
심장이 덜컥 하는 기분이 들었다.
“다른 말이라면, 어떤?”
“그냥, 그러니까… 힐데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제가 당신을 계속… 꽤 걱정했던 것 같아서요.”
예현은 제 손끝을 바라보며 느릿느릿 말했다.
“저라면… 당신을 안심시키고 싶었을 것 같아서.”
“글쎄….”
힐데베르트는 고개를 한번 까딱 기울였다.
“없었던 것 같은데.”
그리고 무난하게 덧붙인다.
“당시에 너와 함께 있었던 사람들에게 한 번 물어볼게.”
“…네. 고맙습니다.”
예현은 가볍게 고개를 꾸벅 숙였다. 힐데베르트는 무심코 그 정수리를 슥슥 쓰다듬었다. 힐데의 손을 피하지 않고 얌전히 앉아있던 아이가 어, 하는 소리를 냈다.
“힐데. 눈 내려요.”
“어, 정말이네.”
어느 새 해가 진 하늘에 눈발이 흩날리고 있었다. 빙룡을 보러 갔을 때에 평생치 눈을 보았다고 생각했는데, 예현과 단 둘이 보는 눈은 또 새로웠다. 어둑해진 바깥이 온통 희었다. 예현이 슬쩍 창밖을 보는 힐데의 손을 잡았다. 그러고 보면 예현은 겨울에 태어났었지. 하얀 손이 차서, 힐데베르트는 그 손을 꼭 쥐어 주었다. 둘은 그렇게 한참 동안 눈을 보며 앉아 있었다.
“힐데. 저… 오늘은 혼자 잘게요. 해주신 이야기에 대해 생각을 좀 하고 싶어요. 정리도 하고.”
한참이 지나 입을 연 예현의 목소리가 조금 잠겨있었다.
“그래… 이야기 듣느라 고생했어. 즐거운 이야기도 아니었는데.”
“힐데야말로 고생하셨어요. 음, 식사 챙겨 드시고요.”
“너는?”
“저는… 지금은 생각이 없어서.”
“그래.”
자리에서 일어나 천천히 제 방으로 들어가는 예현을 보며 힐데베르트는 어쩐지 아이가 안쓰러워 닫힌 문을 한참 바라보았다. 언젠가의 밤처럼 아이가 소리 없이 울까 귀 기울였지만 그런 기색은 없었다.
그저 눈 내리는 소리만 겨울밤을 채웠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아무리 문을 두드려도 예현은 대답하지 않았다.
한참 고민 끝에 문을 열었을 땐 안은 이미 비어있었다. 믿기질 않아서 이불 속이며 제가 쓰던 매트리스까지 뒤져 보았지만 예현은 없었다. 대체 어떻게 된 거지? 거실에는 제가 밤새도록 있었는데… 당황하여 두리번거리던 힐데베르트의 눈에 책상 위의 작은 종이 하나가 눈에 띄었다. 힐데베르트는 반듯하게 접혀있는 그것을 집어 들어 펼쳤다. 곧 힐데의 눈이 크게 뜨였다.
짧은 내용은……
구겨 버릴 뻔한 것을 간신히 참았다.
힐데베르트는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그 눈동자는 처음 방에 들어올 때와 달리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는 서랍 안을 확인하고, 방에 이어진 드레스룸을 들쑤셨다. 마지막으로 힐데베르트는 예현의 방으로 돌아와 하나 나 있는 창문을 살폈다. 창밖으로는 밤새 내린 눈이 소복이 쌓여있었으나 발자국은 없었다. 차가운 겨울바람에 흰 머리카락이 흩날렸다. 힐데베르트는 창문을 다시 닫고… 그대로 그 앞에 주저앉았다.
습관에 대해 생각한다.
이것은 자신의 나쁜 습관이다. 꼭 잃어야만 얼마나 사랑했는지 알게 되는, 곁에 있을 때엔 깨닫지를 못하는 멍청한 습관.
얼마간 이마를 짚고 있던 힐데베르트는 벽을 짚고 일어났다. 그리고 망설임 없는 걸음으로 필요한 것을 챙겨 집을 나섰다.
현관에 걸려있던 예현의 외투가 바람에 조금 흔들리다 멈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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