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랙배저 2차

[예현힐데] 산군 - 2

퇴고 천천히 합니다

두시전에자자 by 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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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뒤 힐데는 때때로 찾아와 예현을 끌고 고을 여기 저기를 헤집고 다녔다.

고을로 통하는 산길을 짚어준 날 예현은 호환이 정말 없었는지 거듭 묻고는 인부를 모아다가 갈림길에 표식을 만들고 길가에 끈을 묶어 산에서 길을 헤메는 사람이 없도록 했다. 며칠이 걸리는 일에 참은 물론이고 없는 곳간을 털어 보수까지 제대로 지불하니 불만을 갖는 이가 없었다. 일이 진행되는 것을 지켜보던 힐데의 눈이 기특하다는 듯 반짝인 것은 덤이다. 

길이 넓어지니 행상이 편해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안 그래도 사람이 많던 장에 행상까지 불어나자 엄청난 인파 속으로 온갖 물건이 드나들었다. 주막에는 발 디딜 틈이 없다시피 했다. 예현은 질서를 확립할 겸 종종 시전에 직접 시찰을 나가곤 했다. 말간 얼굴의 젊은 원님을 알아본 이들이 허리를 굽힐 때마다 예현은 사람 좋게 웃었다. 이를 들은 힐데는 담뱃대를 물고 있던 입을 떡 벌렸다.

“그, 사농공상이라 하였는데….“

언짢게 중얼거리는 힐데의 말에 예현은 어깨를 으쓱였다.

“열심히 사는 사람들입니다. 낮추어 차별할 이유가 없지요.”

“그래도, 장사치 중에서는 꼭 질 나쁜 놈들이 있단 말이지. 그리고 사또는 너무… 안 되겠다, 다음에는 나랑도 가세.”

“그럴까요? 저야 좋지요.”

그리하여 원님이 구릿빛 피부와 금빛 눈동자를 뽐내는 서역인을 끼고 시전에 나선 날, 힐데는 예현의 생각과는 다른 방향으로 폭발적인 반응을 얻었다.

그릇 가게에서는,

“아니, 이게 몇 년 만이야! 어쩜 이리 하나도 안 늙었담?”

“내 서역인이라 그래 보이는 게지. 우전댁도 20년 전 얼굴 그대로인데 뭐 나한테 그럽니까?”

“듣기 좋은 말 하는 버릇도 어디 안 갔네!”

또 곡식 상인이 그를 보더니,

“아니, 힐데? 자네 안 죽었구만?”

“아주 멀었지. 황씨는 잘 있었나? 애들은?”

“어느 애들? 자식놈들, 손주놈들?”

“뭐? 손주가 생겼다고? 이런, 내 뭐라도 좀 사와야지, 기다리게.”

“됐어! 살아있다고 얼굴 내민 걸로 족하지. 한 잔 하러 갈까?”

“오늘은 안 될 것 같은데?”

“아니 왜… 아뿔싸! 나으리! 이거 정신이 팔려서, 아이고…”

이런 식이었다. 정말로, 그를 아는 사람이 두루 넘치는 나머지 힐데는 세 발짝마다 인사를 하고 다녔다. 예현은 벙 쪄서 젖은 낙엽마냥 힐데를 좇을 뿐이었다.

“정말… 마당발이시군요.”

“…그, 여기서 오래 살다 보니… 흠, 길을 다듬은지 얼마나 됐지?”

“다듬는데 한 달이 걸렸고, 일꾼들을 해산시킨 뒤 석 달이 조금 넘었지요.”

“석 달이라… 감탄스러워. 그게 이런 식으로 인간들에게 보탬이 될 줄은 몰랐는데. 상품 질이 전반적으로… 오.”

걸음을 멈춘 힐데가 한 좌판을 기웃거렸다. 가까이 가서 보니 색색의 갓끈이 휘황하게 늘어져 있었다. 힐데는 그 중 하나를 집어 햇빛에 비추어가며 빛을 살폈다. 상인이 옆에서 추임새를 올렸다.

“이야, 보는 눈이 있으십니다.”

“이거… 이것, 어울리겠는데.”

예현은 잠깐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예? 누구… 저 말입니까?”

“그럼 누구를 이를까. 여기, 옆에 좀 서 보게. 대어 보자.”

힐데가 당장이라도 예현의 갓 아래에 갓끝을 재어 볼듯 나섰다. 예현은 힐데에게서 얼른 물러났다. 

“아니… 아니 됩니다. 관직에 앉은 사람이 사치를 할 수는…“

“어허, 잘 어울릴 거래도. 사또, 품위유지비란 것도 있지 않아.”

“저는 괜찮습니다. 아직 그런… 여유가 있지도 않고… 그, 힐데 공이 쓰실 것을 산다면 말리지 않겠습니다.”

예현은 간신히 힐데를 달랬다. 힐데는 투덜거리며 좌판에 좀 더 집적거리더니 기어코 갓끈 하나를 골랐다. 호박과 마노가 어우러져 호사스러우면서도 기품이 있는 물건이었다. 그 모양이 힐데를 닮았다고, 예현은 속으로 생각했다.

그 날 나들이의 마지막은 예현이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시전 구석의 주막이었는데, 특이하게도 국수 요리를 내어 주었다. 힐데는 그 국수를 먹고 나서야 토라진 것을 풀었다. 한 젓가락 얻어 먹었으나, 도통 어디서 왔는지 모를 맛이었다.

둘은 예현의 거처로 돌아와 시전 좌판의 질서 문제와 조세 방안에 대해 한참을 논했다. 이런 저런 의견을 제시하던 힐데는 슬금슬금 품에서 갓끈 꾸러미를 꺼내 들었다. 예현은 살짝 눈을 굴렸다.

“돌아가실 때 장식하셔도 좋겠군요.”

“사또야.”

이럴 것만 같았다. 과연 연륜에 비례하는 것인지, 힐데는 묘하게 고집이 센 편이었다. 그리고 때로 그렇게 고집을 부릴 때는 저런 호칭으로 예현을 부르곤 했다.

“…안 받습니다.”

“준다곤 안 했잖아.”

“…….”

“그냥… 한 번만 대어 보면 안 될까? 정말 어울릴 듯 하여 그러는 것인데….”

예현은 한숨을 푹 쉬었다.

“진짜 대어 보기만 하는 겁니다. 여기서만요.”

힐데가 활짝 웃으며 갓끈의 양 끝을 길게 잡고 서안 옆을 굼실굼실 돌아 예현의 곁에 앉았다. 예현의 하얀 볼 옆으로 노란 호박이며 마노가 어룽졌다. 힐데가 만족스러이 웃었다.

“예쁘구나.”

예현은 순간 제 속에 불이 붙는 줄 알았다.

귓바퀴가 몹시 더웠다. 뭐라 대꾸하지 못하고 입만 뻐끔이는데 힐데가 손에서 힘을 풀어 갓끈을 툭 떨어뜨리며 일어섰다.

“흠, 시간이 이렇게 늦은 줄도 모르고 앉아있었구나. 자네도 오늘 한참을 돌아다녔으니 푹 쉬는 게 좋겠어. 늦은 시간까지 눈치 없이 앉아있던 것 같아서 미안한걸.”

“어, 아니… 아닙니다. ”

“그럼 가보겠네. 어어, 안 나와도 돼.”

“저기, 이거, 이것 들고 가셔야….”

“잠깐만 맡아 주게. 밤길에 강도라도 당할까 그래. 내가 다음에 찾아 갈 테니까, 응?”

“…예.”

문이 바삐 닫히고 한참이 지난후에도 예현은 고개를 들지 못했다. 그저 눈길을 두고 있던 갓끈에 장식된 호박이 문득 그 눈동자같아 예현은 눈을 질끈 감았다.

밤새 온 얼굴이 홧홧하여 잠을 이루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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