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힐데] 사랑, 사람 2
언젠가 개복을 하긴 해야겠어.
윤은 연구실을 벗어나며 판단했다.
“출입을 금지하진 않으십니까?”
간을 배 밖에 두고 다니는 듯한 저 태도를 감안할 때 타이탄들은 간의 탈부착이 가능한 게 분명했으니까. 최윤은 현행범으로 발각된 것치곤 지나치게 당당한 질문에 힐데를 서늘히 응시했다. 부사수는 그제서야 고개를 살짝 숙였다.
허나 윤은 저 낮아진 어깨가 몇 분 되지 않아서 원래대로 돌아올 것임에 전재산을 걸 수도 있었다. 그간 너무 봐줬지. 최윤은 쯧 소리를 냈다.
“얼간이도 아닌데 일일이 명령해야 하나?”
“…얼간이까진 아니죠. 넵.”
“그리고 크리처 중에도 비슷하게 생긴 게 한둘이 아닌데 매번 솥뚜껑 보고 홀리는 것도 웃긴 일이지. 알아서 극복해.”
최윤은 힐데의 사정을 봐줄 생각이 전무했다. 1차로 다가가지 말라는 제 명령을 무시한 점이 괘씸했고, 2차로 군대라는 환경에선 개인의 사정을 배려하는 것이 불가능한 탓이다. 트라우마가 있든 없든 배저는 총을 쥐어야 한다. 크리처들을 사살해야만 하고.
윤은 힐데가 첫 대자나 다름 없던 아담의 죽음에 괴로워 하든 말든 그에게 화기를 쥐여 주었고, 스스로 쏴 죽인 이브로 인해 어떤 PTSD를 얻었든 부사수의 눈을 가려줄 생각도 없었다. 힐데가 직접 제거할 수 있도록 그에게 동족들을 대령해 주었듯이.
이곳을 택했다면 이곳에서 살아가야만 한다.
그렇지 않은가. 뻔뻔하게 먼저 계약을 요구해놓고 허락도 없이 뒈지려 들다니, 감히…. 최윤은 이미 끝난 건으로 치미는 짜증을 억눌렀다.
힐데베르트는 그 자신에게 다행히도 전형적인 군인이었다. 그가 장난기를 거두고 대답했다.
“예. 알고 있습니다.”
최윤은 제 노력이 무색하게 그 말을 듣고서야 기분이 가라앉는 것을 느꼈다. 삶이 두려워도 도망치지 않을 때의 힐데베르트는 타인의 시선을 찰나에 앗곤 한다.
최윤의 시선조차도.
“그런데 소뚜컹이 뭡니까?”
힐데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렇게 말했군. 공용어가 도입된 지도 오랜 시간이 지났으나 장수하는 배저들은 모국의 단어를 습관적으로 입에 올리곤 했다.
실수였지만, 인정하려니 짜증나 윤이 말했다.
“이쯤 됐으면 한국어를 알 때도 되지 않았냐?”
“세상 사람의 기준을 본인 삼지 마십쇼. 아니면 가르쳐주고 그런 얘길 하시든가요. 제가 영어는 동족중에서도 제일 먼저 배웠단 말입니다.”
“오. 그럴까.”
“…농담입니다. 배워도 예현이나 아미한테 배우고 싶다고요. 윤이 가르쳐주면 ‘참 쉽지 않냐?’ 라는 말만 쓰실 것 같은 불길하지만 가능성 높은 예감이―”
“학생주제에 스승을 가리십니까. 친구의 아버님?”
실없는 말을 테니스처럼 주고 받던 때 제 방이 눈에 들어왔다. 윤은 인사를 하고 떠나려는 힐데베르트를 붙잡았다.
“야밤에 실례했습니다. 푹 쉬십, 뭡니까?”
“들어와라.”
힐데는 고개를 기울면서도 순순히 객실에 들어왔다.
“여긴 훨씬 넓네요. 소파도 있고…. 뭐 보여줄 거라도 있으십니까?”
“어.”
“갑자기요?”
“개 거슬려서 아예 털고 가야겠다. 기다려.”
최윤은 힐데가 어깨를 움찔하는 것을 느꼈다. 본인이 잘못했다는 자각은 있나 보지? 윤은 심드렁히 그 모습을 무시하고 태블릿을 켰다.
그리고 사진 앱을 연 뒤 상대에게 탭을 건넸다.
“보라고. 좋아하잖아. 아미랑 예현.”
“최후의 만찬, 그런 겁니까?”
목울대로 마른침이 넘어가는 게 보였다. 하여간 웃긴 놈. 윤은 답하지 않았다. 오랜 눈치 싸움 끝에 힐데는 도망보다 최후의 만찬을 택했다.
그가 예전에도 보지 못했을 사진들이 하나둘 넘어갔다.
힐데의 입가엔 금세 호선이 걸렸다. 사진 속에 담긴 인간들을 퍽 아끼는 까닭이다. 흥미롭게도 그는 윤의 독사진을 보면서도 즐거워 했다. 사진이 최아미에게 얼굴의 여백을 빼앗겨서 낙서가 그려진 제 모습이란 점에서 의도는 불순해 보였지만.
윤은 떨떠름하게 힐데를 관찰했다.
그러나 나름 재미있는 모습이기도 했다.
지나갈 순간을 굳이 사진으로 남기는 이유를 이해하지 못하던 제게 언젠가 예현이 설명한 적 있었다. 좋아하는 사람들의 행복한 과거를 보는 것이 보통 사람들에겐 즐거움이 된다고. 그리고 자신은 아미와 너를 좋아하니 사진을 꼭 남기고 싶다고 말이다.
윤은 힐데베르트가 주변 사람들에게 정을 깊게 들이는 편이란 사실을 안다. 그것은 저 복잡한 뇌를 헤집어보지 않고도 확인되는 것이다. 상대를 대하는 미소에서, 불면을 앓는 고통에서. 동시에 윤은 그가 예현과 아미를 특히 아낀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따라서 힐데베르트 탈레브가 그 둘의 사진을 보며 즐거워 하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다….
아닐까?
기실 최윤은 친구의 설명을 이해하지 못했다.
사진에 담긴 순간은 이미 과거다. 웃긴 모습이 우스울 순 있겠지만, 행복한 모습이 제 행복으로 전이되는 것은 이상하다. 사진 속 어느 공간에도 힐데베르트라는 사람은 존재한 적 없었으니까. 어릴 적 최아미의 행복에는 힐데의 영향이 존재하지 않는다.
역도 마찬가지. 힐데는 예현의 슬픔에 눈 감지 못해서 그를 대자 삼았지만, 사실 예현이 고통을 겪어온 시간과 힐데가 고통을 겪어온 시간은 완벽하게 유리되어 있다. 헌데 어떻게 이미 지나간 서로의 기쁨과 아픔을 제것 삼을 수 있는지.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이 괴로웠던 적은 없다. 애초에 희로애락을 느끼는 정도가 남보다 낮게 태어난 까닭이다. 허나 학자의 탐구 본능에 의해 종종 생각을 깊게 해볼 때는 있었는데, 윤은 매번 답에 다다르지 못했다.
시각을 연구하는 시각장애인처럼.
“끝이네요.”
윤은 아쉬움이 섞인 음성에 상황을 확인했다.
종이 앨범과는 달리 디지털 앱은 시간의 역순으로 사진을 정렬한다. 힐데는 아기가 된 동생을 무표정하게 안고 있는 최윤의 사진에서 여정을 강제로 멈추었다.
부족한가.
저도 모르게 부풀린 듯한 볼이 우습다.
윤은 픽 웃었다. 행복은 알 수 없었지만, 적어도 부사수의 멍청한 낯짝을 관찰하는 것은 제법 유쾌한 취미다.
최윤은 태블릿을 돌려받은 뒤 말했다.
“이상하지 않냐? 나이 차이가 이렇게 나는데 같은 집에 입양된 게.”
힐데는 멈칫했지만 윤을 멈추진 않았다. 윤은 그를 답으로 받아들였다.
“보통 입양을 한 번에 둘이나 하지도 않지.”
“어떻게 된 겁니까?”
“내가 최아미까지 데려가 달라고 했어.”
“윤이요?”
힐데가 목소리를 높였다. 역을 상상했나. 보통은 어린 아이를 입양하길 선호하는 편이긴 했다. 최윤은 덤덤히 이야기를 덧붙였다.
“혼자 남으면 덜떨어져서 못 살 것 같더라고. 최가에서 일부러 나를 지명한 상황이라 강하게 나가도 될 것 같았고.”
“…윤을 말입니까?”
“까분다. 그 집 자식 농사를 보면 견적 나오지 않나. 가문의 명예를 드높일 놈이 필요하다면서 지능이 제일 높았던 날 골랐지.”
“그런데 윤은 달라던 명예가 아니라 부를 안겨준 거군요.”
제 성격이 공적으로 유명한 것은 윤도 잘 아는 사실이었다. 신경 쓰이진 않았지만. 윤은 선선히 긍정했다.
“그래.”
그리고 즉시 용건을 꺼냈다.
“이제 그 과학자 얘기를 해봐. 공평하게.”
“매번 방법이 치사하지 않습니까?”
힐데가 튀어나온 입으로 투덜거렸다. 일전에도 아미의 사진을 먼저 보여주고 본인 사정을 털어놓게 했던 것을 힐난하는 것이다. 일리는 있었다.
허나 중요한 차이도 있었다.
“하지만 이번엔 너도 짐작했지. 아니냐?”
힐데베르트는 쓰게 웃었다.
“사실 윤이 저한테 이용당한 셈이죠.”
처음이라는 이름은 항상 특별하다.
세상에 태어나 처음 접한 애정, 처음 만난 친구, 처음 먹어본 음식, 처음 본 바다….
힐데는 기억력이 좋은 편이었는데, 그가 접한 모든 처음은 각자가 고유의 아름다움을 갖고 있어서, 한 사람이 세상에 무사히 뿌리 내리게 하는 근간이 되어주었다.
아름다운 대지.
최초의 고향.
사무치게 그리운, 힐데베르트의 묘목들.
그 모든 것이 재가 되어 흩날리던 모습을 뒤로 한 채, 힐데는 부를 명칭조차 모르는 새로운 세계와 마주쳤다.
낯선 대지와 인간들, 다른 별자리.
세상에 태어나 자유롭게 할 수 있는 것은 호흡뿐인 탄생의 공포를 성인이 되어 겪으면서, 많은 동족이 의식하든 무의식으로든 두려움에 질렸다.
허나 힐데베르트는 기억력이 좋았기 때문에.
그의 최초는 경이롭고 감사한 것이 대부분이라 힐데는 다른 동족들보단 용기를 더 낼 수 있었다. 물론 세상이 호락호락하진 않음을 알린 몇 번의 경험을 통해 어릴 적 자신은 운이 좋았을 뿐임을 깨닫기도 했지만, 그래도 살아남은 쪽은 자신 아니던가.
걸음을 딛는 것을 아주 두려워 할 필요는 없지.
하여 힐데는 새로 도착한 세상에서 가장 먼저 무수한 최초와 부딪히는 동족이 되었으며, 선량하고 끔찍한 수많은 인간들을 마주했다.
이브는 그 무렵에 만난 최초의 과학자였다.
영어도 제대로 몰랐던 시기. 첫인상이 ‘이상한 머리색을 한 여자’였던 이브는 자신을 보자마자 멋대로 손을 가져가 악수를 했고, 말을 미친 사람처럼 쏟아내 알아들을 만한 이야기는 전무했던 수준이었다. 기실 그녀는 그 이후로도 배려라는 행위에 대해 잘 알지 못했다.
눈치가 둔한 그녀는 몰랐겠지만 그날 힐데는 옆에 있던 그레그―당시엔 그의 이름도 몰랐다―에게 이 여자가 제정신인지 확인하는 눈빛을 보내기도 했다.
말인즉 상상할 수도 없었단 이야기다.
이브가 자신의 첫 인간 친구가 될 거라고는.
다만 그날 헤어지기 직전에 그녀가 건넨 인사만은 짧고 간단한 단어로 되어 있어, 현재까지도 기억에 남아 있었다.
‘안녕, 세상아! Hello, World!'
그러니까 이브에게 힐데베르트 탈레브는 세상 그 자체였던 것이다.
힐데는 일 년 뒤 그녀에게 당시 왜 그런 인사를 건넸는지를 물었다. 소통이 어려운 상황이었긴 해도, 인간측에 이름은 제대로 전달했었기 때문이다.
‘그야 네가 정말로 내가 처음 만난 세계이기도 했고, 사실 그 말, 컴퓨터 프로그래밍을 배울 때 처음 쓰는 문장이거든.’
‘프로그래밍?’
‘컴퓨터한테 뭘 부탁할 때 쓰는 언어. 다양한 말이 있는데, 공통적으로 ‘안녕, 세상아!’ 라는 인사를 나한테도 해달라고 요청하는 게 제일 처음 프로그래밍을 배우는 과정이야.’
‘흥미로움.’
‘…그렇지? 힐데 너는 머리가 좋으니까 언젠가 프로그래밍을 배워 봐도 괜찮을 거야.’
이브는 멈칫하다 다시 수다를 이어갔다.
힐데는 그 잠깐의 멎음이 그녀 또한 그 말을 돌려받고 싶어서였음을 모르지 않았지만―이브는 그렇게 똑똑했는데 다른 이들이 본인보다 눈치가 빠르다는 사실만은 잘 인지하지 못했다―, 인간들과의 교섭에 지쳐 있었기에 그녀에게 인사를 돌려주진 않았다.
몇 년이 지난 뒤에야 인사를 돌려주고 싶었던 때가 여러 번 생겼지만, 이젠 알고 지내는 사이에 ‘안녕, 세상아!’ 란 얘길 건넬 타이밍이 생길 리도 없었고.
하지만, 그래, 돌이켜 보면 해야 했던 것이다.
그 어떤 때든.
넌 항상 내게 더 많은 인사를 건네주었으니까.
내가 오히려 너보다 눈치가 없어 무수한 말이 인사였음을 몰랐을 뿐.
어느 늦은 밤. 힐데는 그녀에게 왜 사회적 신분을 제거하면서까지 이 연구를 하기로 마음 먹었는지를 물어보기도 했다.
이브는, 그녀는 늘 제 연구 주제에만은 확신에 가득차 있었기에, 씩 웃으며 말을 꺼냈다. 당시의 그녀는 처음 만났을 때보다 늙은 채였지만 열정만은 달라진 곳이 없었다. 오히려, 이 땅에 오며 새긴 마음에 변화가 생긴 쪽은 자신이었을 터다.
‘힐데. 이런 생각 해본 적 있어? 인간이란 무엇인지.’
‘너희 말이야?’
‘아하하! 하지만 너도 네 세계에서는 그냥 인간이라고 불렸을 거 아냐.’
‘…맞아. 그랬지.’
‘어디까지가 인간이고 어디부터가 너희일까? 있지. 너희가 오기 전부터 인간은 다양한 가설을 세웠었어. 나 같은 생물학자들은 DNA, 문화인류학자들은 불을 쓸 수 있는지, 언어학자는 복잡한 언어를 사용하는지 등등. 아주 많지. 하지만 그러면 말야. 불을 쓰고 말을 할 줄 아는 다른 포유류가 지구에 나타난다면, 그건 인간일까? 심지어 DNA에도 차이가 거의 없어서 번식도 문제 없이 가능하잖아. 아멜리아한테 물어봤는데 기능이 똑같았대! 어떻게 똑같지?’
‘이브, 제발, 그런 얘기까진 하지 마.’
‘너도 참…. 아무튼 그래서 내 말은! 우린 서로간의 비교를 통해 우리를 처음으로 ‘인간’으로 정의해줄 수 있는 지적생명체와 조우했다는 거야. 이게 어떻게 축복이 아니겠어? 힐데. 나는 천문학자가 아니라 정확힌 모르지만, 우리가 사는 이 우주는 앞으로 우주가 나아갈 먼 시간선에서도 초기에 발생한 우주일 수도 있대. 그러니까 현인류가 가장 이르게 나타난 지적생명체중 하나여서, 긴 시간을 버텨도 다른 인류는 끝까지 만나지 못하고 멸망할 수도 있었다는 얘기지.’
힐데는 그 순간 깨달았다. 다른 이라면 몰라도 너는 우리와 만나지 않았으면 생이 퍽 외로웠으리란 것을. 적어도 너는, 이 접촉에 후회가 없겠다는 확신이 들어서. 힐데는 오랜만에 죽을 것 같은 안도감을 느꼈다.
‘그런데 기적처럼! 너희가 찾아온 거지. 신나지 않을 리가! 힐데. 너는 내가 너희들을 연구하고 있다고 생각하겠지만, 사실 모든 연구는 자신에 대한, 스스로를 위한 것이기도 해. 노화방지는 중요한 주제지만 난 그 이상으로 너를 알게 되는 게 우리를 아는 실마리가 되어줄 거라고 믿고 있어. 당연히 네가 우리를 아는 것도 너희를 아는 것의 실마리가 될 거고.’
힐데베르트는 홀린 듯이 두 눈을 깜빡였다.
삶에 대한 욕구가 있는 사람은 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마치 북극성처럼 세상을 비추는데….
그로부터 오랜 시간이 지나 지금에 이르러서, 힐데는 그녀가 건넨 말과 제가 건넨 말을 떠올려 보았다. 그리고 당시 오갔던 감정까지도.
그는 이브와의 대화를 통해 영어를 익혔다.
낯선 말을 배우는 것은, 하물며 완전히 새로운 환경에서는, 또 하나의 세계와 충돌하는 것과 다름 없었다. 그것은 자주 지겹고 못 견디게 지난한 과정이었지만.
‘힐데도 우리 좋아하지?’
이브. 그때 그 얘긴 거짓말이었어.
[네가 돌아왔을 때, 사실 나는 기쁘지 않았어.]
[네가 기어이 동족편에 섰다고 생각했으니까.]
그리고 너도 최후에는 깨달았었구나. 그 말이 거짓이었단 걸.
하지만 이브. 나는 너를 싫어하지도 못했어.
‘안녕, 세상아!’
널 싫어했다면 네게서 지구를 배우지도 못했을 거야.
당연하지만, 윤은 힐데베르트의 아픔에 전혀 공감하지 못했다.
허나 이 지나치게 오랜 세월을 살아남은 영물이 쏟아낸 후회가 단 하나의 영향을 끼치지 않은 것도, 의외로 아니었다.
고요한 호수에 던진 돌멩이가 띄운 파문처럼.
최윤은 이브에게 공감한다.
드문 일이다. 윤은 예현과 아미를 수십 년동안 알아왔어도 그들을 이해하지 못했다. 힐데베르트에 대해서도 마찬가지. 최윤은 자주 놈의 머리를 열어보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사고를 왜 저렇게 머저리같이 하는지 신기해서.
헌데 만나본 적도 없고 진명마저 제대로 알지 못하는 과학자를 끄트머리나마 이해한 것이다.
직업이 같아서일까. 멍청한 분석이군. 최윤은 자평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적확한 분석이 떠오르는 것도 아니다. 아닌가.
윤은 해저에서 케케묵은 과거를 떠올린다.
‘인간 같지도 않은 놈.’
그것은 근래에도 자주 듣는 이야기.
권력이랄 게 없었던 수십 년 전에는 더 했다. 최윤은 머리가 좋았고 타인에게 틈을 보여주지 않았다. 동시에 남들을 사귀려거나 잘 보이려는 행동도 없었다. 최아미는 그 말을 들으면 당사자 대신 날뛰며 상대를 괴롭히곤 했지만, 윤은 그런 꼴마저도 안 웃긴 희극처럼 느껴질 때가 있었다.
최윤은 비상한 기억력으로 부나방처럼 자신을 찾아와 사라지곤 했던 인간들의 얼굴과 이름, 목소리를 기억한다. 허나 인생의 거의 모든 부분을 기억하는 윤에게 그들의 의미는 어제 먹은 점심 메뉴를 회상하는 것쯤이다. 따지자면 트베인의 발광이 열 배는 인상적인 터.
다만 학자로서 하나의 의문엔 다다르게 되는 것이다.
한 생명이 인간으로 태어났는데도 인간일 순 없다면, 인간이란 무엇인가.
호기심은 탐색을 부르는 법.
비슷한 것은 알고 있기에 재미가 없고, 연구할 가치도 없다. 더욱이 윤에게는 아주 근처에 자신과 완전하게 다른 인간들이 존재했다. 자주 이게 혈육이 맞는지 의심스러운 최아미. 제가 본 인간중에서도 가장 정이 많은 이예현.
인간이란 저런 것인가?
최윤은 답을 구한다.
허나 도달하지 못한다.
그것은 첫째가 윤이 그들을 이해하는 데 깔끔하게 실패한 까닭이며….
둘째는 수 차례 전쟁 속에서 돌출된 여러 양상마저도 모든 학자들이 ‘인간다운’ 것이라 정의한 덕분이다. 최윤은 인간중에도 자신 같은 부류는 생각보다 많고, 그들 또한 그렇기에 인간이라고 불리기도 함을 알게 되었다.
‘보통의’ 인간과는 다르다는 수식이 붙긴 해도.
가망 없는 연구를 쭉 붙잡고 있는 것도 멍청한 짓이라 윤은 자연히 주제에 대한 흥미를 잃었다. 전쟁 이후론 훨씬 중요한 연구 주제가 물밀듯이 밀려왔기에 취미나 다름 없던 주제에는 집중할 시간도 부족했다. 윤은 숨을 개발했고 배저로서 움직였다.
그때 이놈이 날벼락처럼 나타난 것이다.
힐데베르트 탈레브는 오랜만에 만난 흥미로운 개체였다. 인간으로 태어나지도 않았는데 누가 봐도 인간과 다름 없는 생물이라는 점에서.
아마 행인 백 명에게 저와 힐데베르트를 두고 더 ‘인간 같은’ 쪽을 고르라 한다면, 백이 힐데를 택할 터다.
자연히 그를 면밀히 관찰하게 되었는데….
인간들과 웃고 떠들면서 깊은 관계를 맺지만 기실 힐데는 윤이 접한 수많은 크리처중에서도 가장 파괴적인 생명체다.
아미가 폐령이 지닌 힘을 과장 없이 진실되게 설명해도, 10단계의 행적에 저와 예현이 목숨을 잃을 뻔했음에도, 마지막 전투에서 적측 수장이 대지를 찢어버리는 힘을 선보였어도. 어느 순간부터 최윤의 판단은 교정된 적이 없었다.
인간이라기보단 괴물에 가까우며, 생명이라기보단 현상에 가까운 존재.
꼭 노화방지가 아니었어도 그를 연구하는 것은 즐거운 과정이었을 터다. 최윤은 힐데의 가공할 만한 파괴력이 저 몸에서 어떻게 나오는지 아직 파악하지 못했다. 힐데를 해부하는 것은 친분상 반은 농담이 되었지만, 최윤은 여전히 드문드문 그러한 충동을 느낀다.
헌데 저토록 위험하고 끔찍한 생명체가, 인체 실험에 뼛속까지 거부감을 느끼면서도, 제게는 순순히 몸을 맡겨온다면.
정말로 순진한 쪽이 누구인지.
무르고 약한 것은 또 누구인가.
최윤은 신을 믿지 않는다. 앞으로도 믿을 일은 없을 것이라고 단언할 수도 있다. 그러나 힐데의 세계에선 분명 신이 존재했으리라고, 윤은 확신했다.
괴물의 몸에 괴물의 정신을 넣는 것은 자연의 안배겠지만, 괴물의 몸에 인간의 정신을 가두는 것은 신의 안배일 수밖에 없을 테니.
윤은 힐데베르트의 입에 손끝을 쑤셔넣는다. 그 속살을 드러내는 것은 사실 그토록 쉬운 일이다. 윤은 괴물의 혀와, 가지런한 치아, 선홍색의 점막을 취향껏 압박하며 판단한다. 가장 단단한 생명체조차 속은 급소일 수밖에 없음을.
그토록 거대한 힘을 갖고도 무력함에 몸서리를 치는 것.
‘제가 마음 준 사람들에게 미움받는 건 무서우니까요.’
혼자였다면 그 어떤 고행을 하지 않아도 됐을 텐데 결국 사람을 놓지 못하는 것.
‘승진시험 전날에 납치당해서 인장 찍힌 고통은 잊히고?’
‘그 건으로도 화가 나셨습니까?’
막대한 두려움에 악몽 속을 헤매면서도 결코 현실에서 도망치지 않는다.
‘감사합니다. 끝을 제게 넘겨주셔서.’
인간성의 다른 이름은 미련함인가?
혹은 눈을 뗄 수 없는 의지인지.
어떻게 그것들이 한 생명체의 안에 공존할 수 있는지 의문스러워 하며, 최윤은 힐데베르트의 백발을 무신경하게 쓰다듬었다.
역시 뇌를 열어보고 싶은데….
“윤. 위로는 감사합니다만 이런 식이면 아미가 화내진 않습니까?”
최윤은 소파에 앉아 있는 힐데베르트의 머리를 조용히 내려보았다. 언제부터 흩뜨렸는지는 모르겠지만 까치집이나 다름 없는 모양새다.
“넌 전생에 개였나 보다.”
“하실 말씀이냐고요.”
“아미는 말릴 일은 많아도 위로할 일은 없어서. 영감님께서 70대 어린 애보다 앞가림을 못한단 뜻 아니겠습니까?”
사과할 의사가 없음을 깨달았는지 힐데는 숨을 푹 내쉬고 말했다.
“아미는 강하니까요.”
윤도 그엔 동의했다.
“아무튼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도움은 됐냐.”
“예. 상당히 괜찮아졌습니다.”
그럴 것 같긴 했다. 윤에겐 이미 사례가 있었기 때문이다. 최윤이 심드렁히 말했다.
“예현도 그러더라고. 신기한 일이지. 상황은 쥐똥만큼도 개선된 게 없는데 말 좀 털어놓았다고 기분이 나아진다니.”
“윤이 이야기를 잘 들어주시기 때문이겠죠.”
심지어 이런 얘기도 들어봤었다. 최윤은 대꾸하지 않았다. 어차피 무슨 소린지 이해 못할 테고 도움이 됐으면 된 것이기에.
다만 찰나, 이 녀석 같은 정상인이라면 하나는 이해할지도 모르겠다는 판단이 들었다.
“힐데베르트.”
“예.”
“예현이 내가 널 사랑한다는데 넌 어떻게 생각하냐.”
“…예?”
힐데는 고작 한 문장을 이해하지 못한 듯 굳었다가 되물었다.
“세뇌 아닙니까?”
최윤은 드물게 폭소했다.
“그럴지도.”
힐데베르트는 최윤에 대한 두려움과 해파리를 관찰하고 싶은 욕망 사이에서 통 크게 타협했다. 되도록 윤이 연구중일 때만 해파리를 보겠다고 의사를 밝혀온 것이다.
“되도록?”
“장담은 못하겠어서요….”
병신같이 솔직한 놈.
그러나 힐데는 거짓을 꾸며내기보다 진심을 숨기는 데 익숙한 자였다. 밝히긴 한 게 발전일지도 몰랐다. 다만 납득한 것과 짜증나는 것은 별개라, 윤은 그 뒤통수를 짧게 후려쳤다.
“알아서 해.”
그리고 윤은 제 몫의 연구시간을 늦은 밤으로 바꾸었다. 낮엔 다른 과학자들이 돌아다닐 테니 상대적으로 괜찮으리란 계산이었다.
하여 매일 밤 연구실엔 두 사람만이 남았다.
윤은 힐데와 친분이 있었고 나름대로 그를 아꼈지만 제가 알래스카까지 온 목적은 어디까지나 연구였다. 윤은 상대의 사정을 일체 봐주지 않고 연구를 이어갔다. 해파리에게 그린드림을 적정량 투여하고 경과를 지켜보거나, 형체 변동 무기로 샘플을 꿰어내거나.
잘라낸 촉수에 전기 충격을 가하고 신경계가 반응하는 속도를 살펴보자 힐데는 입을 가렸다. 토하고 싶은가.
그러진 않겠지만.
실험체가 제 동족이라면 모를까. 실제 이브도 아닌 해파리에게 지나치게 반응하는 것도 웃긴 일이었다. 윤은 심드렁히 실험을 계속했다.
9차 실험을 마친 날 힐데베르트는 퍽 해쓱해져 있었다.
이놈은 때론 도망치는 게 나을 텐데.
윤은 픽 웃고는 수고했단 뜻에서 말을 건넸다.
“노화정지 시술관 다르지만, 전부터 해파리는 이런 방면에서 주목받는 생물이긴 했지. 이론적으로 몇몇 해파리는 영원을 살 수 있거든.”
힐데베르트가 영원 같은 금안을 깜빡였다.
“그 여자도 네 안에서 영원히 살겠군.”
힐데는 침묵했다.
그러다 단호히 고개를 내저었다.
“격려는 감사하지만, 인간은 죽으면 끝입니다. 그러니 이브도 필사적으로 안식을 구한 거고요.”
윤은 어깨를 으쓱였다. 기실 그도 그렇게 판단했기 때문이다. 보통의 경우였다면 자신도 힐데베르트처럼 말했을 터다. 답지 않게 남을 위로해 보겠답시고 거짓을 읊었지만, 윤은 본디 위로에 재능이 없었고 힐데베르트는 지인중에서도 고집으로라면 1등을 다툴 이였다.
그 전제가 옳아야 이놈도 안식을 얻을 수 있을 테니 별 수 없겠지만.
윤은 놈의 가설을 전복하려던 시도를 깔끔하게 접었다. 힐데베르트의 집념을 뜯어고칠 마음까진 없었기 때문이다. 아집은 이성의 영역 너머에 있으며, 윤은 제가 그 영역엔 손을 뻗기 힘듦을 알았다. 예현이라면 모를까 저로선 불가능한 일이다.
대신 튀어나온 것은 수많은 인간을 관찰하며 얻은 경향이었다. 절대성이 아니기에 받아들이면 좋고 아니면 그만인.
“신전에서 자랐으면 신을 믿지 그러십니까.”
“윤은 안 믿으시잖아요.”
“어. 하지만 난 처음부터 무교였고 너는 아니니까.”
최윤은 연구복 주머니에 손을 찔러넣은 채로, 평소와 달리 자신에게서 눈을 피하는 상대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수조 속 해파리를 바라보며 말했다.
“힐데베르트. 어차피 이 세계엔 신이 실존해서 믿는 인간은 없어. 그를 증명하는 건 천둥과 바다, 하늘과 땅, 계절과 시간 정도지.”
후임의 머리는 그럭저럭 쓸 만하다.
“…저녁Eve이 영원하듯이 말입니까?”
“그리고 네 삶이 계속되듯이.”
인간의 삶은 죽음으로 끝난다. 하지만 생존자까지 그 죽음이 끝일 것이라고 믿을 필요는 없다. 사실과 믿음은 별개의 영역이기에.
그러므로 힐데베르트 탈레브의 생이 지속되는 한.
힐데는 느리게 입술을 떼어냈다.
“처음부터 저를 죽일 생각은 없으셨군요.”
목소리가 퍽 애처롭게 떨렸다.
“사라질 것에 이렇게 공을 들이진 않을 테니까요.”
“맞아.”
최윤은 마침내 인정했다.
이 끔찍하게 아픈 괴물이 최후의 안식을 구해 저를 찾은 것임을 알면서도.
“내가 너를 사랑하는진 모르겠다만….”
어쩌면 그것만이 최윤이 이 존재에게 의미를 남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임을 알면서도.
“내가 너를 늘 더 아끼는 건 사실이니.”
- ..+ 1
댓글 1
민첩한 새우
허나 윤은 저 낮아진 어깨가 (중략) 전재산을 걸 수도 있었다. - 이 부분 자주 쓰는 표현이긴 하지만 쓴 자가 최윤이라서 무게가 너무 남다르게 느껴져요 ㅋㅋㅋ 그의 전재산은 어마어마하겟지 이곳을 선택했다면 이곳에서 살아가야만 한다. - ㅎ ㅏ 벅차오르는 오타쿠 실없는 말을 테니스처럼 주고 받던 때 - 주로 티키타카라는 단어로 줄여 쓰이는 걸 자주 보다가 이렇게 풀어서 쓰니 먼가 좀 다른 느낌이에요(폄하x 긍정적인 의미) 오히려 그 상황이 거 잘 상상돼서 좋은 느낌 갠적으로 최윤이 '개'라는 비속어 쓰는 거 넘 좋느 다른 비속어는 잘 안 쓰면서 '개'만 쓰는 것이 먼가 좋은 느낌을 주는 듯 합니다 ㅋㅋ 사진에 담긴 순간은 이미 과거다. (중략) 어떻게 이미 지나간 서로의 기쁨과 아픔을 제것 삼을 수 있는지. - 아이러니하게도 이것이 사진이 좋은 이유, 찍는 의미라는 것이. 이미 과거이기에, 그리고 그 순간이 사진으로 남겨져있기에 공감하고 감정이 전이되는 것이란게🥲 "이제 그 과학자 얘기를 해봐. 공평하게." - 이 글의 주제와 장소도 그렇고 이 부분도 그렇고 원작에서 스쳐지나 가듯이 나온 장면으로 인용해서 상상하여 쓰시는 점이 정말 멋있어요. 심지어 별개의 사건을 이어 인용해서 글을 쓰시다니 상상력이 정말 좋으세요. 너무 좋아요😋👍 한 사람이 세상에 무사히 뿌리 내리게 하는 근간이 되어주었다. 힐데베르트의 묘목들. - 힐데가 '세계수'의 자식이라서 이런 표현들이 더더욱 좋은 느낌을 줌🥹 '안녕, 세상아!' - 왔다. 내 눈물 버튼😭 사랑사람 첨 읽었을 때 한동안 안녕..세상아!....안녕...세상아....안녕....어헝..세상아... 혼자 과몰입하고 살았었답니다🥲 힐데는 그 말을 돌려받고 싶어서였음을 모르지 않았지만 그녀에게 인사를 돌려주진 않았다. 하지만, 그래, 돌이켜 보면 해야 했던 것이다. 그 어느 때든. 넌 항상 내게 더 많은 인사를 건네주었으니까. 내가 오히려 너보다 눈치가 없어 무수한 말이 인사였음을 몰랐을 뿐. - 울어 걍.울어.냅다울어.😭😭😭 억장무너짐 걍....... '힐데도 우리 좋아하지?' 이브. 그때 그 얘긴 거짓말이었어. 그리고 너도 최후에는 깨달았었구나. 그 말이 거짓이었단 걸. - orz.................오열함 하지만 이브. 나는 너를 싫어하지도 못했어. 널 싫어했다면 네게서 지구를 배우지도 못했을 거야. - 하쥔심.......원작에서부터 힐데ㅡ이브 관계성에 미쳐있었는데 사랑사람 때매 더 미치게 되어버렷다니까요..........이 둘의 관계성을 너무 잘 표현하심......... 최윤은 이브에게 공감한다. - 이후의 최윤 독백 정말 좋아합니다. 정말 최윤같은 독백이라 몰입하게 돼요. 이론적으로 몇몉 해파리는 영원을 살 수 있거든. 힐데베르트가 영원 같은 금안을 깜빡였다. "그 여자도 네 안에서 영원히 살겠군." - 아악..악...아악....아아악.......악...........orz .......... 이 대목이 너무너무 좋아서 어떻게 표현하려 해도 모든 표현들이 납작하게 느껴집니다.........너무 좋아요......... 어차피 이 세계엔 (중략) "...저녁Eve이 영원하듯이 말입니까?" "그리고 네 삶이 계속되듯이." - 너무 벅차올라서 걍 하염없이 음미하며 폰 냅두고 하늘보고 있음........... "처음부터 저를 죽일 생각은 없으셨군요." (중략) "내가 너를 늘 더 아끼는 건 사실이니." - 🥹......................제 맘을 표현하는 걸 포기하고 그저 음미만.....과몰입...벅차오름........ 오...너무 긴걸.....글리프는 덧글도 사진 첨부 기능을 내놓아라ㅜ.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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