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힐데] 사랑, 사람 1
* 힐데이브 요소 다수(성애는 아닙니다).
블랙배저 특정직의 업무는 자주 갑작스럽다.
“알래스카에 다녀와.”
하여 힐데는 일주일간 야간 순찰 업무가 배정되어 있던 상황에 하달된 외근 업무에도 놀라진 않았다. 그러나 총사령관으로 복귀한 이예현은 상황을 설명할 필요성을 느꼈는지 책상을 툭툭 두드리곤 이야기를 이어갔다.
“몇 시간 전쯤 그쪽 석유 채굴량에 이상이 생겼어. 원인은 충격에 따른 설비 파손으로 인한 누수. 윤이 먼저 가 있던 게 운이 좋았지. 기술자들과 생긴 틈을 틀어막긴 했는데, 아직 원인을 찾아내진 못했다더군. 재발할 수도 있다 판단한 모양이야.”
“원인을 크리처의 공격이라고 추정하나 봅니다.”
“그래. 아니었으면 좋겠지만 맞다면 부서진 형태상 상당히 거대하고 힘이 센 크리처의 공격으로 보인다던데. 그 원인을 파악해서 해결하는 게 네 임무야.”
인류의 태양광 에너지 발전은 어마어마한 진보를 이뤘지만 석유는 여전한 핵심 자원이었다. 플라스틱부터 아스팔트까지 물질 문명이 석유에 근간을 두고 있었으니까. 힐데는 사령관이 불쾌해 보이는 이유를 납득했다.
알래스카는 석유 채굴량이 압도적인 지역은 아니었으나 대륙 끄트머리에 위치한 덕에, 포털에서 튀어 나온 크리처에게 공격당하는 일은 거의 없이 생산량을 뽑아주고 있었다. 크리처라는 돌발 변수가 상수가 된 세계에선 ‘안정적인’ 이라는 조건이 몹시 중요했다.
서둘러야겠군.
하지만 무엇인지도 모를 마물이 원인이라. 마물에 박식한 카이로스가 가서 살펴보는 게 더 도움이 되었을 텐데 그는 하필 포탈과 먼 거리에서 외근중이었다. 뭐, 윤이 판단하기에도 강력할 것 같은 마물이면 그냥 죽이는 게 나을 수도 있겠지.
“알겠습니다. 그런데….”
의아한 부분이 남아 있었다. 힐데가 물었다.
“윤은 왜 거기 있는 겁니까? 요즘 데스크가 비어 있길래 이상하다 싶긴 했는데 알래스카까진 상상 못했습니다.”
윤이 과학동에서 모습을 감춘 지도 2주째였다.
힐데는 배저들 못지 않게 과학자들과 친밀한 편이어서, 의뢰를 수행하려 자주 과학동에 드나들곤 했다. 그런데 2주 전 그와 둘이서 술자리를 가진 날 이후로 최윤이 증발해버린 것이다. 제가 실수를 했으면 즉시 갈구거나 알려줬을 테니까 일이 생겼겠다 싶긴 했는데.
알래스카라니.
섭섭하진 않았다. 그의 성격상 일일이 거취를 제게 알려왔으면 그게 더 기묘한 일이다. 더군다나 최윤은 배저중에서도 유독 신분이 다양했다. 유능한 과학자, 기술자, 사령관의 측근, 에이택의 특허 보유자. 자신은 모를 일을 지금도 수십 가지 감당하고 있을 터.
하지만 기왕 같은 곳에서 근무하게 됐고 친분도 있는 사이면 이 정도는 물어봐도 괜찮지 않을까. 판단하는데 예현이 동공을 크게 떴다.
“말 안 했어? 해파리 연구중이잖아.”
“예?”
“그쪽 심해에서 아주 거대한 해파리가 발견됐는데 강화신체 소유자의 노화정지 시술이 적용된 결과와 그 해파리의 구조가 흡사해 보인다 했나? 제대로 알아듣진 못했고 그걸 옮겨오긴 힘드니까 한동안은 거기서 연구하고 싶다 했었어.”
강화신체, 노화정지, 해파리.
작은 수조에서 둥둥 떠다니던….
“힐데? 왜 그래요?”
아. 힐데는 다가온 대자가 팔을 붙들고서 조심스럽게 흔드는 감각에 겨우 정신을 차렸다. 그는 아무렇지 않게 웃었다.
“잠깐 다른 생각을 하느라. 별것 아니야.”
“정말로요.”
“응. 괜찮아. 다녀올게.”
예현은 날카로운 시선으로 힐데베르트를 살핀 뒤 말했다.
“보급팀에서 보수용으로 지원할 물품을 준비중이라 시간이 꽤 걸릴 겁니다. 대기하다 가세요. 그동안 눈 좀 붙이시고요.”
괜찮다고 했는데. 신뢰가 없군. 업보라 어쩔 수도 없었다. 힐데는 겸연쩍게 뒷목을 긁었다.
그날은 드물게 한가한 하루였다.
전날 보급 업무를 끝낸 힐데는 오랜만에 게임을 푹 즐길 생각으로 들떠 있었다. 지인을 만나도 좋겠지만 우연인지 거의 업무가 있었고, 게임을 못 만진 지는 한 세월이 되어서 조금은 잘 됐다는 생각도 든 차였다. 그는 즐겁게 게임 팩들을 꺼내 거실에 늘어놓았다.
아니, 놓았었다.
돌연 손님이 찾아오기 전까지.
1층 출입문을 열자 평소처럼 차분한 낯이 보였다.
“뭐냐. 그 실망한 낯짝은.”
“보이십니까?”
“어. 개 잘 보인다. 술이나 마시지.”
윤이 술병 사진이 인쇄된 박스들을 살짝 들어올리며 말했다. 보드카와 매실주. 웬 작정한 조합이지. 의아했으나 그는 물어보기도 전에 집안에 발을 디뎠다.
이제 전쟁도 끝났으니 가택 침입죄로 신고해도 되지 않을까?
실없는 생각을 하며 힐데는 문을 닫았다.
최윤에 대해 말하자면 그는 다양한 수식어를 갖고 있었다. 공인 소시오패스, 총사령관의 친구, 아미의 친오빠, 숨의 개발자, 유능한 과학자, 손에 꼽히는 실력의 배저―종종 ‘어, 실수’로 아군(?)을 제거함―. 그중에서도 힐데에게 익숙한 것은 제 사수라는 사실과.
극한의 효율 추구인이라는 점.
말인즉 이 남자는 그에게 의미가 있는 일에만 나서는 부류였다. 힐데는 남자의 부사수였고, 최윤의 메신저 프로필사진은 힐데로 되어 있으며, 힐데는 사수에게 헛소리도 편하게 할 만큼 친밀감을 느꼈지만, 용건 없이 일대일로 만나는 일은 사실상 전무했단 뜻이다.
그런데 대낮에 저런 술까지 가져오다니.
뭔가 있어.
힐데는 명탐정 X난에 빙의한 채 윤이 가져온 각종 해산물을 세팅하곤 상대를 살폈다. 고맙게도 최윤은 보드카를 주고받은지 얼마 되지 않아 용건을 밝혔다.
“힐데베르트. 죽고싶냐?”
대낮에 남의 집까지 찾아와 술을 먹이며 죽고 싶은지 물어보는 소시오패스 실존.
힐데는 어이가 없었으나 윤의 날카로운 안광을 마주하자 정신이 들었다. 그가 생각보다 진지한 기색이었던 까닭에.
하긴 윤은 돌려 말하는 것을 선호하지 않았고 남의 시선엔 더욱 관심이 없었다. 그러니 대낮이든 밤이든, 술자리든 시끄러운 카페든 최윤에겐 큰 차이가 있진 않을 터다. 힐데베르트 탈레브가 죽고 싶어 하는지가 보안상 중요한 건도 아니고.
즉 남들이 없는 날에 술이라도 챙겨서 찾아온 건 부사수에 대한 배려란 셈인데.
“안 들리냐?”
힐데는 지나치게 좋은 두뇌와 맞바꾼 최윤의 인내심이 곧 바닥남을 인지하고 손을 내저었다. 그리고 자리에 없는 누군가를 떠올리며 답했다.
“아. 새삼 친구라는 생각이 들어서요.”
예현도 물어봤었다. 심지어 3차 전쟁이 발발하기도 전에. 당연히 표현 방식은 친구와 달리 정중했고 마주한 제가 괴로울 만큼 절박했지만. 그래도 남이 대놓고 물어본 적은 거의 없었단 점이나 비슷한 경우에서, 종종 두 사람이 친구란 사실이 느껴지곤 했다.
주변의 동족과 인간들이 저에게 미래를 굳이 확인하지 않는 까닭은, 사실 그 답이 정해져 있는 탓이다. 그리고 미안하게도 다들 제 답을 두려워하는 거겠지.
그러나 최윤은 망상은 망상이라는 이유에서, 사실은 사실이라는 이유로 두려워하지 못했다. 힐데는 그게 장점인지 단점인지는 몰랐다.
다만 대하기는 항상 편했다.
힐데는 부러 매실주를 한 잔 삼킨 뒤 말했다.
“딱히 당장 죽고싶진 않습니다.”
“살고 싶은 것도 아니란 뜻이군.”
예리한 지적에 멈칫하자 윤이 덧붙였다.
“넌 누가 죽으면 죽을 셈이지?”
아.
“아이가 그렇게 말했습니까?”
심장이 철렁했다.
“어. 하지만 예현은 요즘 꽤 괜찮아졌고, 지금은 너한테 묻고 있지.”
“다행이네요. 윤의 판단이면 맞겠죠.”
힐데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지만 최윤은 눈을 더욱 가늘게 떴다. 하긴, 친구를 위해 그 대부가 살아갈 수 있는 조건을 확인하러 온 듯한데 답이 즉시 나오질 않으니 짜증나겠지. 힐데는 이제야 사수가 이해되어 가볍게 웃었다.
“예현이 그리 걱정되십니까? 죽더라도 갑자기 죽을 생각은 없으니 안심하시죠.”
어항 속 해수염의 농도를 어느 정도로 맞춰야 이 물고기가 살아남을지 확인하는 절차 같은 것. 그렇게 납득하자 기분이 편해졌다.
“어쨌든 살아남은 처지고…. 제가 죽으면 슬퍼할 사람들도 많은데 그러겠습니까.”
“알긴 아냐.”
최윤은 코웃음을 치곤 평소의 모습으로 돌아와서 보드카를 마셨다. 그는 힐데를 오래 관찰하긴 했지만 나름대로 답을 받아들인 듯했다.
갑자기 사수가 집에 처들어와선 너 죽을 건지 말 건지 털어본 상황치곤 좋은 마무리군. 대자의 상태도 괜찮다고 하고….
힐데베르트도 만족했다.
허나 매실주가 살짝 들어간 상황이어서였을까. 만족감이 지나치게 부풀어 올랐던 듯했다. 사실 언급하지 않았어도 윤은 그렇게 해줬을 텐데.
왜 이 분위기에 확언을 받아내야겠다 싶었는지.
“하지만…. 윤. 일전에 제가 인간을 배신하면 죽여주겠다고 하셨죠.”
“언젯적 얘기냐?”
헛웃음 섞인 목소리. 힐데는 무시했다.
“제가 어떤 꼴이 되든 살려둘 거라고도 하셨고요.”
“그래서.”
“제 생사가 최윤의 손에 달려 있다면, 하나만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힐데는 윤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상황이 돌이킬 수 없이 심각해져 수급을 베어내야 할 날이 온다면 제 목은 윤이 거둬주십시오.”
감정의 수준이 거의 늘 가라앉아 있는 최윤의 눈이 드물게 분노로 번들거렸다. 오래 전 자신이 헤카테를 놓아준 것을 확신했을 때처럼.
그러나 사실 힐데베르트는 그때도 지금도, 이 소시오패스가 무서웠던 적이 거의 없었다. 물론 양심적으로 윤에게 죄책감은 느꼈지만.
동족들과 예현, 릭과 아미였다면 두려웠겠으나.
“다른 사람들은 결단을 내리지 못할 것 같아서요.”
최윤의 소유욕엔 어차피 한계가 있지 않겠는가.
“되도록 살아 보겠지만 처지가 처지인지라.”
힐데는 제 입장이 다른 동족들에 비해서 특이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폭주와 흡입을 할 수 있는 크리처의 존재. 그를 인간들은 사람이 아니라 동물, 나아가서는 개념으로 불렀기 때문에. ‘10단계’라는 명칭으로.
다른 동족들은 사회에 이미 잘 섞여들어갔으니 괜찮을 터다. 카이로스는 과하게 유명해졌지만, 제 목숨은 어떤 상황에도 담보할 수 있는 실력자인데다 흡입을 할 순 없으니 괜찮다. 세실은 제가 처리했다고 알려졌으니 마법으로 변장해서 살면 그만이고.
문제는 생존한 세계수의 자식인 자신이었다.
예현은 진실을 숨기려고 갖은 애를 썼지만, 힐데는 제 뒤로 오가는 여러 말들을 잘 알고 있었다. 눈 앞의 측근이 그를 모를 리 없다는 것도.
불처럼 타오르던 분노가 가라앉는다. 힐데는 윤도 어떤 상황엔 저를 제거해야 한단 사실을 인지했음을 깨닫고 안도했다. 열감이 사라진 위치에는 시리도록 차가운 이지가 자리한다. 힐데는 그 기묘한 수준의 반전에 놀랐으나 물러서지는 않았다.
다른 이들에게 그러하듯이, 힐데베르트 탈레브가 ‘최윤’에게도 어떤 의미가 되었음을 모르지는 않는다. 하지만 제가 그에게 소중하다 해도 예현이나 아미만큼은 아닐 테지. 그리고 최윤이라면, 아니, 윤만이 일의 우선순위를 맞게 판단해 주리라고 힐데는 확신했다.
마침내 최윤이 말했다.
“네 동료들은 어쩔 셈이지.”
“저 하나로 그들을 전부 살릴 수 있으면 남는 장사 아닙니까?”
“그래?”
감흥 없는 음성.
그 탓에 표정을 제대로 확인하지 못했다. 찰나에 목이 졸려서. 힐데는 기도가 틀어막히는 감각에 몸을 떨었지만, 윤의 팔을 떼어내지도 않았다.
아….
툭 몸이 놓였다.
“커헉. 아, 학….”
힐데는 미친 듯이 숨을 들이켰다. 정신을 차린 뒤 생리적으로 고인 눈물을 옷소매로 닦아내자, 사람의 목을 조르고도 차분한 흑안이 보였다.
“힐데베르트. 하나를 요구했으니 하나는 약속해라.”
놀라지는 않았고 되려 손속이 가볍다고 느꼈다. 정말로 윤이 제 목숨을 앗을 일이 벌어진다면 동족들의 분노는 죄 그가 감당해야 할 테니까.
오히려.
“이중계약을 시도하면 죽는다.”
왜 이렇게 선선하지.
의아했지만 달리 요청할 이가 없었다.
힐데베르트는 잔기침이 섞인 호흡을 진정시킨 뒤 고개를 끄덕였다.
“더 부탁할 상대도 없습니다.”
“술이나 처마셔.”
“옙.”
힐데는 목이 바늘로 긁히는 듯한 감각을 겨우 참고 보드카를 마셨다.
윤은 탐사용 잠수정에서 쏘아보내는 레이더를 면밀히 확인하고 있었다.
알래스카 해양 기지의 가장 깊은 곳에 자리한 시추 설비는 현재 시추를 중단한 채였다. 문제가 해결되기 전에 시추를 재개했다가 크리처가 출현하면 환경 오염을 돌이킬 수 없었다. 이미 플랜트 주변의 어류가 다수 폐사했다. 윤은 조심스럽게 움직이기로 했다.
그나마 이곳 기지의 석유 채굴량이 코어들을 유지하는 데 필수적인 수준은 아니어서 다행이었다. 전력 소모량이 피크에 달해 화력 발전도 보태야 하는 여름이었다면 위험했겠지만, 2-3개월은 버틸 만할 터다. 그러니 계절이 바뀌기 전엔 해결해야 할 텐데.
놀랍도록 잡히는 흔적이 없었다.
이럴 수 있나. 고장난 시추 설비는 이미 확인했다. 레이저 같은 원거리 공격이 아니라 직접적인 충돌에 의해 뭉그러진 게 분명한데 사진 한 장을 남기지 않고 사라지다니. 그토록 거대한 몸집에 속도까지 빠르단 게 말이 되는지.
배저로 치면 윌리엄 워커의 신체와 최아미의 속도를 동시에 지닌 개체가 존재한다는 뜻이다. 그런 게 실재했다면 진작 힐데베르트와 싸움을 붙여봤겠지.
재미있을 테니….
위잉―. 위잉―.
윤은 눈을 돌렸다. 거치대로 세워둔 휴대폰이 울렸다. 친구에게서 온 영상 통화다. 지원 요청에 대해 할 말이 있는 모양이군. 최윤은 통화 버튼을 눌렀다.
이예현은 거두절미하고 말했다.
“힐데를 보내기로 했어.”
“잭 블랙이 아니라?”
처음 스카와 통화했을 땐 블랙이 되지 않겠냐 했었는데. 반문하자 예현의 시선이 드물게 서늘해졌다.
“배은망덕한 자들이 너무 많아. 정리를 좀 하려고.”
제 대부를 잠깐 파견하는 게 아니라 그가 자리를 비운 동안 큰 그림을 그려보겠다는 뜻이었다. 과보호 하고는. 윤이 평했다.
“독재자 다 됐군.”
“그러게 말이야.”
예현은 선선히 긍정했다.
“겸사겸사 힐데가 널 편히 대하니 이번 기회에 푹 쉴 수 있으면 좋을 것 같아서.”
“네 대부가 오면 미친 듯이 굴릴 생각밖에 없다만.”
이예현은 가볍게 웃었다.
“그점에서.”
“시간은 어떻게 벌 생각이냐? 토벌이 끝나면 잡아둘 핑계도 없어.”
아니, 사실 핑계는 만들면 그만이었고 방법도 넘쳤다. 윤은 이예현의 대부를 이곳에 고립시킬 방법을 열 가지는 떠올릴 수 있었다. 그걸 다 쓸 일은 없겠지만.
권한을 달란 뜻에 사령관은 관자놀이를 누르며 망설였지만, 오래지 않아 결정을 내렸다.
“포털 고장. 그로도 안 되겠으면 발전기를 셧다운하든가, 알아서 해. 비상용 발전기와 배터리도 있으니 한동안 버티겠지.”
“사령관님. 마틴이 전기를 지나치게 먹는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아. 궁금한 게 있는데.”
정말 의아했는지 예현이 돌연 음성을 높였다.
“힐데한테 알래스카에 간 걸 숨긴 이유가 있어? 어플엔 연구중이라고만 적혀 있던데. 해파리 연구가 보안이 필요한 일은 아니잖아.”
“상세히 떠들 이유도 없으니까.”
“왜 없지? 네가 센터코어에 있다고 추정되는 것과 알래스카에 있다고 확인된 것 사이에 연락 빈도 차이가 없을 리 없는데. 너 정도 과학동 핵심 인력이면.”
최윤은 침묵했다.
“물어보니 아미는 알았더라고. 그런데 힐데를 보면 둘이 싸운 것 같진 않고. 무슨 일이야?”
어떻게 말하겠는가?
네 근무일에 둘이서 술자리를 잡았는데, 타이탄이 매실주에만 꼬라박는단 사실이 흥미로워서 매실주를 먹였더니, 놈이 갑자기 해파리냉채를 붙잡고 울길래 왜 미쳤냐 물어봤었다고. 그러자 녀석은 해파리만 보면 죽은 과학자가 떠오른다고 고백해왔단 사실을.
처음부터 끝까지 어떤 부분에서도 좋은 말이 돌아올 것 같지 않았다. 최윤은 마틴을 처음 개발했을 때처럼 친구의 눈을 피했다.
“별 일 없었어.”
예현은 침묵하다가 픽 웃었다.
“비밀이 생겼네.”
윤은 예현이, 정확히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거대한 오해를 하게 되었음을 깨달았다. 그러나 고칠 엄두는 나지 않았다….
망설일 무렵 상대가 중얼거렸다.
“큰 문제 아니면 됐어. 한동안 대부를 잘 부탁해.”
곧 전화를 끊을 기색이라 윤은 즉시 물었다.
“왜 나냐?”
썩 이해되지 않는 인선이었다. 예현의 판단은 다른 듯했지만, 윤은 제가 객관적으로 위로라는 행위에 재능이 전무함을 알았다. 그런 제게 가장 망가지지 않았으면 하는 사람을 맡기다니.
아미가 낫지 않나?
친구를 연달아 죽인 뒤로 자주 제정신이 아닌 것을 알면서.
예현은 한숨을 길게 내쉬고는 말했다.
“그야 너 힐데를 사랑하잖아.”
무슨 헛소리지.
“비극은 힐데가 너를 사랑하지 않는단 거지만. 이참에 잘 좀 해보든지.”
“세뇌하냐?”
이예현은 코웃음을 치곤 연결을 끊었다.
해양 플랜트는 거대했다.
수면 위에 자리한 최상층만 판단해도 축구장 수십 배 면적은 되어 보였다. 힐데는 포털을 나오자마자 드넓게 펼쳐진 수평선에 감탄했다.
힐데베르트는 바다에 늘 묘한 로망을 느꼈다.
허나 그 장관의 아름다움은 앞서 도착한 이에겐 알 바 아닌 이야기였던 듯했다. 최윤은 특유의 하얀 연구복을 입고 주머니에 양손을 꽂은 채로 말했다.
“왔냐.”
“옙.”
날이 좀 추웠으면 좋았을 텐데.
그래서 저 인간이 패딩을 입고 펭귄처럼 뒤뚱뒤뚱 걷는 꼴을 봤으면 재밌었을 텐데.
힐데는 그저 추운 곳으로 인식했던 알래스카의 9월 날씨가 센터 코어의 초겨울과 비슷한 상황에 아쉬움을 느꼈다. 물론 정말로 기온이 전에 겪은 남극 같았다면 크리처 토벌도 고행이 됐을 테니 다행이었지만.
“따라와라.”
힐데베르트는 윤슬이 반짝이는 수면을 뒤로 한 채 사수를 쫓아 움직였다.
최상층에서 계단을 타고 몇 층 높이를 내려 가고, 엘리베이터로 갈아타자 바깥에서만 보이던 단순 철골 구조만이 아니라 제대로 된 벽 구조가 나왔다.
건물엔 생활감이 있었고, 실제로 다양한 사람들이 있었으며―여성 과학자가 ‘팬이에요. 힐데베르트씨!’ 라고 인사하기도 했다―, 공용어로 된 팻말이 방마다 붙어 있었다. 최윤은 그중에서도 객실3을 당분간 네가 머물 곳이라며 넘겨주었다.
“윤은 어디서 머무는데요?”
“객실1.”
지나오며 보기로 그 방은 십여 미터 거리에 있었다. 어떻게든 이웃으로 만날 운명이라는 건지. 다른 배저였으면 불편했을지도 모르겠다. 자신은 상관 없었지만.
최윤은 힐데가 가방을 침실 의자에 풀자마자 폰을 보여주었다.
“짐작되는 부분이 있나?”
용건부터 간단히군.
“인수인계가 너무 빠르지 않습니까?”
“불만이면 네가 1기 하든가.”
물론 힐데베르트는 62기 쪼렙에 불과했다.
“감사히 받겠습니다. 하늘같은 선배님.”
“오냐.”
어쩐지 상황이 재밌어서 힐데는 황제가 하사한 보물처럼 휴대폰을 받든 뒤 화면을 들여보았다. 사실 자신도 정체 모를 크리처가 궁금하긴 했다.
힐데는 수중카메라로 찍은 듯 흐리고 어두운 사진들을 면밀하게 살펴보았다. 무언가 거대한 덩어리에 짓눌려 으깨진 흔적, 바닥에 드문드문 보이는 빗살무늬 발자국, 파괴적인 의도는 없이 직선으로 길을 오갔을 뿐인 듯한 궤적들을.
가설을 세운 그는 한숨을 내쉬었다.
예상보다 더 쉽지 않은 임무가 되었다.
“아니길 바라지만 [무아]일 확률이 높아 보입니다. 카이로스가 와도 소용은 없었겠네요. 사역되는 마물이 아니라. 정확히는 육감에 잡히지도 않는단 점에서 마물이라고 하기도 어렵지만요.”
[무아?]
이젠 발음도 하잖아. 힐데는 잠깐 말을 잃었다.
“자아가 없다고 그렇게 불렀습니다. 다른 마물들에 비하면 지능이랄 게 없는 놈이어서요. 모습은 아래의 빗살무늬로 된 발을 제외하면 거대한 바위덩어리고, 덩치에 비해 빠르게 움직입니다. 수영을 할 수 있어서 땅이든 바다든 발 닿는 데로 옮겨가며 살고요. 와중에 발생하는 피해는 녀석에게 공격성이 있어서라기보다는 질량과 크기가 압도적이기에 동반되는 천재지변에 가깝습니다.”
“감시망에 안 잡힌 이유를 알겠군. 바위와 구별하기 힘들겠어. 제압할 방법은.”
“몸이 웬만한 강철보다 단단해 소드마스터의 검격도 잘 통하지 않습니다.”
“좆됐네. 오러는 먹히겠냐?”
“모르겠네요. 토벌시 써보죠.”
“너희 세상은 대체 어떻게 되어먹은 거냐.”
힐데는 웃음을 터뜨렸다.
“말씀드렸지만 상위 마물들처럼 공격성이 있거나 똑똑한 녀석은 아닙니다. 그래서 제국에선 실력 있는 기사를 쉰 명 이상 동원해 밧줄로 감은 뒤 말뚝을 땅에 박아 해결했죠. 보수용으로 가져온 물건 중에 신소재 와이어가 있으니 끌어쓰면 될 것 같습니다.”
“육감에 잡히지 않으면 먼저 치기도 어렵겠고. 그럼 직원들이 3교대로 레이더와 카메라를 확인하고 있으니 그게 나타날 때까지 대기해.”
“옙.”
힐데는 순응했다. 무아가 나타나면 바빠지겠지만 당장은 저도 할 일이 없었다. 놈이 발견된 게 지상이었다면 주변이라도 직접 수색해 봤겠으나.
윤은 업무에 관한 질의응답이 끝난 뒤 동생과 친구의 안부를 확인했다.
힐데는 방 탈출이 무서워진 예현이 아미에겐 야근하는 척 둘러대고 오두막에서 자고 돌아간 이야기를 전해주었다. 낌새를 눈치 챈 최아미가 찾아와서 ‘예현 오빠, 이번만 봐주는 거양!’ 이란 말을 전하고 떠났단 소식도.
최윤은 이예현의 고난을 퍽 고소하게 여겼다.
잘못 사귄 우정의 최후였다….
사건 속 한 명만 불행한 안타까운 시간이 지난 뒤. 힐데는 본부와 알래스카에 관한 소식을 주고받다가 문득 그것을 떠올렸다.
“그런데 윤. 해파리를 연구하신다고 들었는데 저도 볼 수 있습니까?”
“보고는 싶냐?”
윤이 혀를 찼다. 힐데베르트는 혹시나 싶었던 가설이 진실이 된 상황에 내심 앓았다. 그때 하필 해파리 냉채가 있었지. 대체 무슨 헛소릴 했을까.
다행인지 최윤은 진실을 숨겨준 인간치고 선선했다.
“평생 피할 순 없겠지.”
“윤. 혹시 제가 전에―”
“중요한가? 따라오기나 해.”
하긴 뱉은 말이다. 힐데는 하릴없이 납득했다.
연구실은 객실보다도 수십 층 아래에 있었고 무척 거대했다. 그리고 출입 절차가 까다로웠는데, 수조가 지진 등 비상 사태로 깨졌을 때 물이 연구실 밖까지 터져 나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차폐 설비가 되어 있어서라는 설명이 돌아왔다.
당연히 이제껏 본 적 없이 거대한 수조 안에….
해파리가 작은 세상을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힐데는 연한 회색이 섞인 베이지 빛의 해파리에게 온 신경을 빼앗겼다. 아마 첫만남에 타인과 사랑에 빠져도 이런 감각일 순 없을 터다.
기묘한 광경이었다.
저렇게 넓은 수조가 저토록 좁아보이다니.
“심해 생물치곤 예쁘게 생기긴 했다만.”
힐데는 손목이 으스러지게 잡히고서야 제 발이 수조를 향하고 있었음을 알았다. ‘꿈의 목소리’에 사로잡힌 것도 아닌데.
“다가가진 마라. 실험에 변수가 생기면 안 되니까.”
윤의 무감정한 눈을 마주하자 정신이 들었다.
힐데는 애써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으로 식당을 소개받고 오랜만에 사수와 밥을 먹은 뒤, 힐데는 객실로 돌아가서 잠을 청했다. 별달리 일도 없었는데 심신이 지쳤었는지 금세 졸렸다.
그리고 그날 오전에 윤이 비보를 전해왔다.
힐데는 입을 크게 벌렸다.
“발전기가 터졌다고요?”
“5호기만. 전력 사용에 문제는 없는데, 포탈은 당장 쓰기 어렵게 됐다.”
“뭘 그렇게 됐다, 하고 계십니까. 지원이 절실한데.”
무아는 배저 둘로는 해결할 수 없는 개체였다. 게다가 알래스카는 지금껏 마물의 습격에서 안전하긴 했지만, 경향성이 절대성까지 보장해주진 못했다.
허나 최윤은 웬만한 일엔 당황하지 않는 인간이었다.
“일 터지면 일상 전력과 비상용 배터리를 몰아 활성화하면 되니까 크리처가 나타나도 헛짓하지 마. 추적기를 줄 테니 그것만 붙이고 발을 빼라고. 네 말대로 지능이 모자라다면 추적기를 떨궈낼 일은 없겠지.”
“좋은 생각입니다만 그러면 건물 전체가 정전되지 않겠습니까?”
굳이 언급하진 않았으나 힐데는 연구실에서 본 해파리를 떠올렸다. 정전이 발생해 수조의 여과 장치가 멈추면 안에 든 생명은 멀쩡할 수 있을까.
“내가 모르겠냐. 방법이 있으니 신경 꺼.”
그래도 윤이 괜찮다 하니 조금은 안심이 됐다. 최윤은 타인의 안위에는 관심이 없고, 해파리엔 더욱 그렇겠지만, 제 실험이 타의로 끝나는 것을 좌시할 린 없는 인간이었다. 납득한 힐데는 윤과 식사하고 카메라를 관찰하는 나날을 조용히 살아갔다.
일주일 가까이 평화로운 시간이 이어졌다.
힐데는 깊은 밤에 남 몰래 연구실을 찾았다.
해파리를 어떻게 할 생각은 없었다. 최윤에게 처맞는 취미가 있는 것도 아니니까. 그저 관찰하고 싶었다. 그것이 둥둥 수조를 부유하는 꼴을.
네가 유유히 세상을 유영하는 모습을.
그리고 내게, 네가 죽은 것이 거짓말이었다는 듯이, 새까만 화면에 ‘안녕, 세상아!’ 라는 인사를 띄워줬으면 좋겠다고 소원하며….
힐데는 접근을 가로 막는 유리창 위로 한 손을 붙였다. 전처럼 가까이 다가오지 않아 답답했다. 친구가 오랜만에 찾아 왔는데 반갑지도 않은가. 그럴 수도 있겠다. 마지막이 그 모양이었으니까. 힐데베르트는 주변을 둘러보다가 수조 위쪽으로 향하는 계단을 발견했다.
그는 계단을 하나 둘 올라갔다.
정상에는 여과 장치가 있었고, 작은 물고기를 급여하는 데 쓰는 듯한 큰 대야가 있었다. 그리고, 힐데는 손을 뻗었다, 네가 이렇게 가까이….
“윽―.”
무지막지한 힘과 함께 시야가 뒤집혔다.
힐데베르트는 저를 죽일 듯이 내려보는 검은 동공과 눈이 마주치자 경황을 파악했다. 은닉에 재주가 있는 최윤이 소리 없이 다가와 머리채를 잡아당긴 것이다.
“힐데베르트. 죽고 싶냐?”
아.
힐데는 멍청하게 눈을 끔뻑였다.
기억이 났다. 확인하지 못했다고 판단했었던 표정이. 언젠가 본부 옥상을 찾았을 때 보여주던 태도가. 카일측에 납치당한 순간 발견한 낯빛이. 그래. 이런 모습이었다. 늘 감정 수준이 가라앉아 있는, 최윤답지 않은 극한의 분노….
‘설마 걱정하셨습니까?’
힐데는 언젠가 그 마음을 악의 없이 순수하게 의심했던 것을 기억해냈다. 그리고 이젠, 애정의 여부에 대해서는 의심하지 않았으나 의문은 한 가지 남아 있었다.
왜일까?
헤아리기 전에 최윤이 말했다.
“이중계약을 시도하면 죽인다고 했는데.”
“예. 기억 납니다. 죽으려던 건 아니었습니다.”
힐데는 머리채를 쥔 최윤의 커다란 손을 조심스럽게 떼어내곤 말했다.
“감사합니다. 잊지 않아주셔서.”
윤은 답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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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1
민첩한 새우
사랑 사람은 참 좋아하는 글 중 하나인데요 이 글은 특히나 다른 데 방해받지 않고 온전히 집중해서 읽고 싶은 글이에요 다른 데에 정신팔리지 않고 읽을 각 잡고 읽고 싶은 글이고 2차 연성으로 읽었던 글 중에 가장 여운이 남는 글 중 하나입니다. 윤힐이라서 좋은 글이지만 꼭 커플링이지 않아도 될 것 같은..(커플링이나 무언가를 폄하하는 의도가 아닙니다..)성애적 사랑을 넘은 그런..몬 말인지 표현을 할 수가x 텔레파시하는 법 급구합니다ㅜ 어항 속 해수염의 농도를 어느 정도로 맞춰야 이 물고기가 살아남을지 확인하는 절차같은 것 - 무척 와닿는 비유. 윤힐의 이 바이브 딱 이 표현으로 정리됨(?) "제 생사가 최윤의 손에 달려 있다면, 하나만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 이 부분부터의 사건을 너무 좋아해요. 상대가 최윤이기에 할 수 있는 잔인한 부탁. 다른 사람들은 안 되고 최윤이라서 신뢰할 수 있으니까🥲 이후에 조용히 분노하는 최윤. 이유는 알겠지만 그게 이해나 납득은 아닐거고 그걸 힐데도 알고 있을테고. 바로 최윤이 목 조르는데 경계하긴커녕 오히려 그 행위로 더 신뢰하게 됐을듯.. (아이고 이 빠그라진 영감아ㅜ) 다른 사람들이었으면 미친 행위들인데 윤힐이라서 사건도 아닌 별거 아닌(?) 일로 지나가게 된다는 점이 돌아버리게 좋은 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쓰면서 갑자기 혼자 벅차오르는 오타쿠🥹 놈이 갑자기 해파리냉채를 붙잡고 울길래 왜 미쳤냐 물어봤었다고. 그러자 녀석은 해파리만 보면 죽은 과학자가 떠오른다고 고백해왔단 사실을. - 첨 읽었을 때 저도 이 부분 보고 울었던 기억이 나요. 이브 에피를 굉장히 (여러모로)충격적이게 읽었었고 또 좋아하는 에피라 재독도 여러번 했었거든요. 그래서 한동안 해파리 단어만 봐도 아련해졌었는데 딱 그 시기에 글 읽었어서 더욱 여운이 남은 기억이 나네요. 겨우 괜찮아졌는데(?) 또 한동안 해파리 보면 우는 녀석 되게 생김 🥲 그저 관찰하고 싶었다. 그것이 둥둥 수조를 부유하는 꼴을. 전처럼 가까이 다가오지 않아 답답했다. 친구가 오랜만에 찾아 왔는데 반갑지도 않은가. - 또 울어 걍 쓰러져 억장무너짐 그냥 오열할라고 😭 제 소소한 특기이자 취미가 읽고 감상 남기기인데요. 항상 선을 넘지 않을까 조마조마한 마음입니다.. 어휘력이 안 좋아서 냅다 걍 흥분해서 주접떠는데 자제하는 중인데 만약 제 글 중 선넘는 발언이 있다면 꼭 애호박 흔들어 주세요🥲 항상 잘 읽고 있습니다. 코로나 다 나은 기념으로 윤힐 달려🏃♀️🏃♀️➡️🏃♀️🏃♀️➡️🔥 헐..구독조차 잊고 있었음 어쩐지 홈에 안 뜨더라..대충격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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