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랙배저-예현힐데

[예현힐데] 사랑, 삶 中

힐데는 대자의 방책이 꽤 효과적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였다.

수 개월간 자신을 짓눌러온 우울이 소멸한 덕이었다. 대신 그는 바람 빠진 풍선처럼 멍한 기분으로 하루를 보냈다. 드문드문 현실을 부정하며.

‘선배한테 계속 고백하는 거? 그냥 고백 공격이라 괜찮아.’

언젠가 바비가 한 말이 떠오르기도 했다.

‘고백 공격이요?’

‘모르는구나? 로맨스 장르 클리셰인데. 서로 경쟁하는 사이에 2인자가 1인자를 방해하려고 거짓말을 치는 거지. 고민이나 실컷 해보라고.’

‘하지만 두 분은 경쟁하는 사이도 아니고, 릭도 별 신경 쓰지 않는 것 같던데요.’

‘힐데~…. 많이 컸어~?’

‘죄송합니다. 세상에 리카르도가 둘이나 되는 건 무섭단 말입니다. 거둬주십쇼!’

힐데베르트는 머리를 박았다.

당시엔 지구의 새로운 문화를 알게 돼서 ‘아직도 배울 게 많구나’ 생각하며 넘긴 이야기였는데. 망할, 제대로 들어둘 걸. 아무래도 그거 같잖아.

힐데는 언제 밖으로 나돌기 바빴냐는 듯 극도의 히키코모리가 되어 방에 틀어박혔다. 실수로 나갔을 때 대자와 마주치면 어떻게 대해야 할지 깜깜하다는 이유만으로. 정말이지 결과만 보면 고백공격이 따로 없었다.

그는 결국 오래 전, 렉시크누들의 평가를 온종일 검색했던 때처럼 절실하게 휴대폰을 잡았다. 그리고 누들 기본맛 챌린지 영상을 10개쯤 보는 도피 끝에 감정이 진정되어―인간은 다 좋은데 미각엔 하자가 심각했다― 결론내렸다.

날 사랑하는 게 좋겠다는 말이 그냥 이전처럼 잘 지내보잔 뜻은 아니겠지. 그랬다면 굳이 그렇게 말하지는 않았을 테니까. 그리고 예현은 거짓말을 그리 환한 얼굴로 할 아이도 아니야. 어쩌면 진심일 수도 있단 뜻인데….

하지만 어째서?

어떤 전조도 없었다. 힐데는 확신했다. 그리고 넘어가, 지 못했다. 평소였다면 휙 넘겼겠으나 비상 사태인 만큼 밀도가 있는 고민을 해보기로 한 것이다.

단, 문제가 있었다.

좋아하는 사람이 생기면 어떻게 행동하냐.

힐데는 침대에 누운 채 마른 세수를 했다. 제가 그 방면으로 아는 게 거의 없었다! 백 년이 넘게 바쁘기만 했어서 연애는 고려할 일도 없었더니 그 부분은 가물가물한 전생처럼 느껴지기도 했다―사실 백 년이면 일반인에겐 이미 전생과 다름 없는 시간이었다―.

그는 끙끙거리며 뭔가를 하나둘씩 떠올렸다.

보통 늘 같이 있고 싶어하고, 돌봐주고 싶어하고. 예현이 그래서 여기에 남아 있는 거긴 하지. 그렇게 신경 쓰는데 그 마음을 모르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건 자신도 마찬가지였기에 연애 감정의 증거라고 하긴 애매했다.

성애적 감정이 있는 상대라면, 역시 스킨십을 하고 싶어하려나. 그러나 예현이 허락 없이 좋아하는 사람에게 접촉을 시도할 인간은 아니었다. 이런 부분은 물어보기도 그랬고.

심장이 두근거린다거나. 내가 지금 혼란스러워 빠르게 뛰긴 하는군. 그냥 눈 딱 감고 열을 재는 척 가슴에 귀라도 대볼까. 아냐, 그건 한 번 얘기가 오간 상황엔 성추행이나 다름없어.

그럼 뭘 어떡하냐고.

힐데베르트는 대자의 성관념을 헤아릴 필요성과 제 보수성 사이에서 갈피를 못 잡고 헤매다가 다시 휴대폰을 잡았다.

문득 묘한 호기심이 들었다.

애초에 대부와 대자 관계였는데. 인간들한텐 이런, 일이 흔한가? 어쩌면 그래서….

힐데는 고민 해결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까 싶어 포털 검색창에 [대자가 대부에게 고백]이란 문구를 쳤다. 결과는 예상밖이었다.

[시리해리] 안 돼

[해리시리] 왜 안 돼

― 해리 포터는 결국 자신의 감정을 인정한다

해리 포터? 판타지 소설 주인공 아닌가?

힐데는 큰 생각 없이 글 하나를 눌렀다가 몇 분 되지 않아 뒤로 버튼을 연타했다. 알 필요가 없는 지식을 알아버린 듯했다. 인간들은 예상보다 더 파렴치한 종족이었고. 이런데 동족의 조상일 리 없어….

망각은 축복이지.

콜튼이 죽어 다행이었다. 그가 통신망을 해킹중이었다면 미카엘과 프로메테우스에 이어 판도라라는 별명을 눈 한 번 꿈쩍 않고 지어줬을 테니까.

힐데가 부르르 어깨를 떨 때였다.

지잉―. 지잉―.

전화였다. 발신자는 카이로스.

자신처럼 장기 임무를 핑계로 코어 바깥을 떠도는 친구에게 힐데는 한동안 미안함을 느꼈으나 오늘은 달랐다. 그는 반사적으로 전화를 받았다.

“카이! 잠깐 시간 돼?”

“무슨 일 있었나? 일찍 받았다 싶긴 했는데.”

“그게, 예현이….”

힐데는 입을 다물었다. 이걸 뭐라고 설명하지. 내가 너무 우울해 보였는지 대자가 나랑 사귀자 했다고? 말은 되나?

“효자 상사가 왜.”

아. 둘이 은근 친하지. 힐데는 그게 오이디푸스와 브루투스에 이어 최윤이 오랜 친구에게 붙인 별명임을 기억해냈다. 최윤이 지은 별명치고는 간만에 뜻이 좋다 생각했었는데. 그러나 힐데는 처음으로 윤에게 절실하게 물어보고 싶었다.

지구에선 효자가 고백도 하냐고.

물론 평생 못 꺼낼 질문이지만. 힐데는 뒷목을 긁다 멈칫했다. 그러고 보니 이거 카이에게도 막 털어놓을 일은 아니지? 팬이 많아서 되려 연애는 경계하며 살았던 것 같던데. 아직 대자의 사생활을 확정짓기도 그랬다.

“음. 아무것도 아니야.”

“불효자가 됐나 보군?”

“어떻게 알았어?”

헙. 힐데는 입을 가렸다. 뒤늦은 조치였다.

“푸흡. 눈치 빠른 사람이면? 사령관은 자네 일에만 표정 관리를 못하잖나.”

“그게 왜 그런 뜻이 돼? 예현 일이면 나도 수습은 잘 안 되던데.”

전화 너머로 밭은 웃음이 들렸다. 곧 이어 하는 말이란. 힐데베르트는 뚱하게 폰을 내려보았다. 예현 일은 남의 문제란 거야, 뭐야.

“심각한 고민인가 걱정했는데 아니라 다행이군.”

“난 요즘 오늘처럼 심각했던 적이 없거든?”

“그래그래. 대장은 그럴 수도 있지.”

“좀 진지하게 들어주면 안 돼?”

카이로스는 힐데 곁에서도 가장 감정에 솔직한 인간상에 속했다. 힐데는 목소리만으로도 친구가 제 고민에 흥미를 잃었음을 알았다.

그래도 잔소리에 우정이 살아났는지.

카이가 가볍게 웃다 충고했다.

“정확히 무슨 말이 오갔는진 모르겠지만, 그리 고민되면 앓지만 말고 솔직히 얘기를 나눠보지 그래.”

“솔직히?”

“인간들은 감정전이를 할 수 없으니까…. 그럴수록 대화를 제대로 해봐야지 않겠나.”

힐데는 그 조언만은 의외로 옳다는 것을 인정해야 했다.

예현은 힐데가 방 안에 틀어박혔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몸을 쓰고 단련하는 게 취미인 대부답지 않은 일이었으나 예현은 걱정하진 않았다. 어딘지도 모를 장소로 훌훌 떠나서 신변 파악이 불가능한 것보다는 나았고, 근처에 있다면 그를 불러내는 건 쉬운 일이었다. 예현은 그의 상사였고 힐데가 아끼는 대자였다.

권력으로도 호의로도 모자람이 없었다.

이예현은 이틀만에 힐데의 방 문을 두드렸다.

“들어와.”

의외로 차분하고 따뜻한 목소리였다. 예현은 눈을 깜빡였다. 따뜻한 것은, 그의 목소리는 원래 그랬다. 이예현은 한동안 그 목소리를 듣는 것이 취미였던만큼 대부가 지닌 음성의 성질엔 예민한 편이었다. 청년은 그 부드러움을 사랑했다.

하지만 차분한 것은.

문이 열렸다. 예현은 힐데가 어떤 결정을 내렸음을 파악했다. 소중한 사람을 대하는 미소였다. 평소처럼. 이예현은 묘하게 불안해졌다.

“힐데. 퀘스트를 받았는데 혼자 해결할 시간이 없네요. 도와주실 수 있나요?”

그래도 감정을 숨기는 덴 익숙해서 예현은 용건을 빈틈없이 말했다. 과학자들에게 유독 약한 그가 부탁을 거절할 린 없음을 확신하며.

힐데는 대자를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손을 뻗어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렇게 묻지 마.”

이예현은 동요하지 않았다. 대신 이런 말에도 심장이 철렁하지 않는 자신을 생소하게 느꼈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지, 이토록 손길이….

“과학동 분들에게 도움이 된다면 나야 좋지.”

지나치게 삶의 궤적에 진솔한 사람이다. 하나쯤은 외면할 법한데도.

“더군다나 네 일이잖아. 그냥 도와달라고 해. 혹시 도움이 못 돼도 노력은 해볼 테니까.”

너의, 이예현의 일이라서.

언젠가 이승현에게 숙제를 도와줄 수 있냐고 물어봤다가 무시당한 기억이 났다. 예현은 열로 달아오른 낯을 숨기려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힐데를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힐데베르트는 홍차와 과자를 몇 개 꺼내 탁자 위에 놓았다. 예현은 대부가 저를 위해 과자들을 구비해 두었음을 알았다.

너무 달아.

좋아하던 비스켓이 유독 그렇게 느껴지던 때였다.

“그보다 네 말이랑 행동을 생각해봤는데.”

이예현은 찻잔을 내려놓았다.

“예현. 넌 나를 그런 의미로 여기진 않잖아.”

힐데는 용케 그 말을 웃으며 했다.

이 사람이 먼저 그 이야기를 꺼낼 거라곤 예상 못했다. 예현은 이마를 찌푸린 채 침묵했다. 힐데베르트는 조곤조곤 대자를 설득했다.

“무슨 생각인진 알겠어. 서로 사랑하지 않는 사이에도 필요로 결합하는 이들은 내 주변에도 꽤 있었거든. 사실 귀족은 대부분 그랬고.”

“….”

“그래도 여긴 그러지 않아도 되는 세계니까 너는 마음에 둔 사람을 만났으면 해. 난, 느리지만 괜찮아지고 있고. 네 덕에.”

“…힐데는요. 기사면 지구에선 준귀족이었는데. 남에게 묶일 생각은 없었나요?”

“아. 일이 너무 많아서 시간을 못 내겠더라고. 막 기사단장이 됐을 땐 로망이 있었던 것 같은데.”

“로망이요.”

“반려가 생기고 가정을 이루고? 뻔한 이야기지.”

힐데가 민망한 듯 뒷목을 긁었다.

이예현은, 찰나에 제 안에서 일어나는 감정에 경직했다.

기실 예현이 그 얘기에 동요할 까닭은 없었다. 낫고 있다면 좋은 일이지. 자신은 그 속도가 전혀 만족스럽지 않지만 어쨌든 사실이라면.

반려에 대한 이상형이 존재했다면, 그도 좋은 일이었다. 예현이 제가 봐도 비상식적인 제안을 한 데는 어떤 계산이 있었기 때문이다. 힐데에게 저 같은 인위적인 관계가 아닌 진짜 가족이 생긴다면, 그는 결코 외면하지 못할 거라는.

그렇지 않겠나. 반려가 있었다면 이 사람의 모습은 요즘보단 괜찮았겠지. 설령 그의 말마따나 연모해서 만난 상대가 아니었어도 책임은 다했겠고, 그 성격상 마음을 쏟으려 애썼을 테니 상대가 그를 사랑하게 되지 않기도 힘들었을 것이다.

미친.

이예현은 입을 가리고 머리를 숙였다. 속이 역했다. 그는 구역질을 겨우 참아냈다.

당연하지만 그 메스꺼움은 대부의 존재한 적 없는 반려에 대한 질투에서 비롯된 건 아니었다. 그저 알아차린 탓이다.

내가 이 사람을 그냥, 살리고 싶어서 발버둥을 쳤던 게 아니라….

힐데베르트란 개인을 열애해서 그가 살아남길 바랐단 사실을.

“예현? 갑자기 왜 그래?”

안 돼. 진창이다.

감정을 깨닫자마자 떠오른 판단이었다. 동시에 수십 년간 살아오면서 쌓아왔던 무수한 근거가 고름처럼 악취와 함께 터져나왔다.

이예현의 사랑은 남을 살리는 데 도움된 적이 없었다.

증오를 끌어오는 일이라면 모를까.

빌어먹게 자신과 닮은 낯짝. 예현은 그를 기억한다. 수백 년이 지나도 잊지 못할 것이다. 그 흔적이 다른 누구도 아닌 자신에게 존재한 까닭에. 친구에겐 못한 말이지만 종종 진심으로 남자가 죽길 바라기도 했다. 그리고 보다 자주 소원한다.

나를 봐주세요.

돌아오는 것은 무관심. 혹은 폭력이다.

“예현!”

끼익. 의자가 바닥을 긁는 소리가 뇌를 울렸다.

어깨가 흔들린다. 이예현은 정신을 차렸지만, 자신을 수렁에서 꺼낸 이의 태양 같은 눈동자를 제대로 마주할 순 없었다.

한 사람을 승화시키는 것은 그와 입을 맞추고 몸을 섞는 것보다 훨씬 어려운 일이겠지. 하물며 힐데베르트를 지옥에서 현세로 끌어오는 것은.

내가 이 사람을?

나따위가?

어떻게 그런 생각을 했지.

“…힐데.”

“너 안색이, 물이라도 가져다줄까.”

예현은 머리를 굴려본다. 잘 되진 않지만 어떻게든 해야 한다. 첫수부터 잘못 두었으니 판을 뒤집을 묘수가 필요하다. 다행히 그는 기억해냈다.

이 사람과 사랑에 빠져도 될 법한 이들은 사실 제가 넘치도록 쥐고 있단 사실을. 차라리 그중 한 명을 설득해서.

씨발. 죽어도 못하겠어.

“아무, 것도 아니에요. 힐데. 아무것도. 그냥, 옆에 있어주세요.”

예현이 입을 가리고 밭게 호흡했다.

힐데는 흔들리는 눈으로 대자를 내려보더니 한 손을 잡고는 말했다.

“그래. 일단 침대에 눕기라도 해. 손이 차….”

힐데베르트 탈레브만 제 손이 과하게 따뜻하단 사실을 몰랐다.

며칠 뒤. 예현은 초대한 적 없는 친구의 방문 소식을 듣고 놀라서 그를 맞이했다. 반란자들의 자료를 압수하고 연구중인 과학자들은 여유를 부리기가 불가능한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예현은 윤이 가져온 디저트를 빼곡히 냉동고에 수납한 뒤 말했다.

“한동안 부족할 일은 없겠네…. 그런데 연락도 없이 무슨 일이야?”

“너야말로 무슨 일이냐.”

윤은 소리 없이 탁자에 폰을 올렸다. 그냥 얘기하지. 보여주는 게 효율적이란 건가. 예현은 의아해 하며 화면을 읽었다.

[윤. 예현이 요새 절 피하는데요ㅜㅜㅜㅜ]

[왜 그러는지 상담 좀 해주시면 안 됩니까?]

[어디 아픈가 싶기도 하단 말입니다ㅠㅠ]

[필요하시면 제 유전자라도 떼어드릴게요]

[(양털이 깎이는 양 이모티콘)]

렉시크누들 기본맛 프로필사진. 힐데의 문자였다.

이예현은 진지하게 중얼거렸다.

“한글은 아미한테 배웠나? 왜 이렇게 귀엽지.”

“드디어 미쳤군.”

“너는 양 이모티콘이 귀엽지 않아?”

“최아미는 좋아하긴 하더라만. 이런 이모티콘보단 마틴이 30배쯤 귀엽지 않나?”

“마틴은 전력을 너무 많이 먹어.”

예현은 단호히 대답하며 다시 폰으로 시선을 옮겼다. 설마 윤에게까지 SOS를 칠 줄이야. 미안하기도 하고 고맙기도 했다. 사랑스럽기도―

“사령관 명령으로 사진 좀 바꾸라고 해. 볼 때마다 밥맛 떨어진다.”

“네가 어플을 삭제하면 될 문젠데 왜 힐데한테 그래? 당연한 얘기지만 유전자는 안 돼.”

“재연 건 되겠군.”

“그것도 안 돼.”

윤이 투덜거렸다. 얼렁뚱땅 넘어갈 줄 알았나.

“그래서 무슨 일이냐. 회피하는 걸 보니 뭐가 있긴 했나본데.”

“그냥. 이래저래.”

감정 없이 직시하는 새까만 눈. 이예현은 항복했다.

“너무 티나는 거짓말이었지. 미안하다.”

예현은 간략히 사정을 설명했다.

방문까진 예상하지 못했으나 고민 상담을 할 상대가 생기니 기분도 다소 나아지는 듯했다. 최윤은 의외로 상담자로 적절한 상대였다. 감정이 거의 늘 가라앉아 있었기에 대화를 나누다 보면 남의 감정도 가라앉히는 힘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건 예현이 얼마 전 힐데의 손님으로 윤을 초대한 이유이기도 했고, 자신도 감정 기복이 심한 부친에게 고통받던 때 도움 받은 점이기도 했다.

다만 안 좋은 부분도 있긴 했는데.

이야기가 끝나자 윤은 양복주머니에 손을 넣고는 덤덤하게 말했다. 거의 별 걸 다 고민한다는 어조로, 그는 인성에 하자가 있었다.

“잘됐군. 사이 좋게 돌아오면 되겠어.”

“응?”

“설마 겨우 문자 때문에 여기까지 왔겠냐.”

최윤이 혀를 찼다.

“스카가 널 설득해달라고 보통 사정하는 게 아니야. 너 언제까지 여기서 썩고 있을 거냐?”

“….”

“힐데베르트를 좋아하는 게 진심이면 오히려 이럴 때가 아니지 않나?”

예현은 침묵했다. 말에 일리가 있음을 자신도 알긴 했기 때문이다. 윤은 연초를 한 개피 꺼내서 피우고는 팩트 폭격을 이어갔다.

“어차피 블랙배저는 네가 장악한 조직이지. 힐데베르트를 바깥에 둬야겠다 싶으면 관장 직에 녀석의 사정을 배려할 배저를 앉히면 그만이야. 리카르도나 칼이나. 누구든 잘할 걸.”

“….”

“하지만 그 녀석을 코어 안으로 끌어들이는 게 최종 목표라면, 답은 네가 더 잘 알 거다.”

“….”

“힐데베르트가 네가 영입한 네 사람이란 사실을 너무 많은 인간들이 알고 있어.”

“예현 키즈니 뭐니 하면서 말이지. 쪽팔려….”

이예현은 마른 세수를 했다.

언젠가부터 힐데베르트가 보여준 탈인간적인 실력으로 인해, 사람들은 이예현이 되려 힐데의 제자란 것은 짐작한 상태였다. 그럼에도 그가 ‘예현 키즈’로 불린 시간이 재밌게 느껴졌는지 밈적 사고방식에 젖은 네티즌들은 그 별명을 포기하지 못했다.

그래서 스승보다 실력도 떨어지고 어린 자신이 과분한 제자를 얻고 만 것인데. 정작 힐데는 그 별명을 꽤 좋아해서 뭐라 하기도 힘든 상황이 되어버렸다.

통탄할 노릇이었다.

허나 공감능력에 문제가 있는 과학자는 친구의 좌절을 무참히 무시했다.

“잘 된 것 아닌가? 10단계를 제거한 영상 덕에 당시 너와 힐데의 관계가 부풀려졌으니까. 1차 전쟁 때부터 커넥션이 있던 우리 편이란 증거로.”

“그건 그렇지.”

“단, 그만큼 네가 직접 정리하지 않으면 놈을 위한 자리를 만들긴 불가능할 거야.”

이곳에 오기로 결정했을 때부터 알던 사실이었다. 급한 불부터 꺼야 한다는 핑계로 외면했으나, 그래, 더는 어렵긴 하겠지. 하지만.

예현은 결국 깊은 곳에 묻어두었던 두려움을 꺼냈다.

“힐데가 다시 코어로 돌아오려 할까?”

그것이 사실 유일한 이유였다.

이대로 완전히 헤어지게 될까봐.

겨우, 내가 카일을 제거하기 위해 당신을 이용하고, 당신은 살든 죽든 목적을 이뤘으니 내 곁을 떠나는 것으로 내겐 너무 소중했던 만남이 끝을 고할까봐.

예현은 손으로 낯을 가렸다. 조금 버티기 힘들었다.

뻔뻔한 것은 늘 최윤이다. 과학자는 이해가 안 된다는 듯 물었다.

“왜 아니라고 생각하지? 물어는 봤냐?”

예현은 애써 고개를 내저었다.

“아직. 강요하고 싶진 않아서.”

“두 세기 넘게 군인으로 살아온 놈한테? 적절히 강요하는 게 본인한텐 더 편할 수도 있을 걸.”

“그래서 더.”

예현은 얼굴에서 손을 떼고 단호히 덧붙였다.

“자유를 택할지 충성을 택할지는 둘 다를 알고난 뒤 고를 수 있어야 해.”

“흠.”

“지금까진 그럴 기회도 없었지만, 상황이 달라졌으니까.”

“그래서 녀석이 언제 내릴지도 모를 결정을 할 때까지 존버중이었다….”

윤이 픽 웃었다.

“이승현이 너한테 잘해줄 때도 있었다는 얘기만큼 웃긴 핑곈데.”

핑계라. 예현은 미간을 찡그렸으나 그를 부정하진 않았다. 왜냐하면, 그 말이 옳은 조언일 수도 있었던 탓이다. 최윤은 소시오패스였지만 그 덕에 누군가에 대해선 본인보다 잘 알 때가 있었다. 당사자가 감정에 매몰돼 판단을 그르치는 경우에 특히.

그리고 이예현은 자신이 이 문제에 지나치게 몰입중이라는 것은 아는 상태였다. 불쾌할수록 조심스럽게 돌이켜볼 필요는 있었다.

곧 윤이 담배를 휴대용 재떨이에 비벼 끄고는 입을 열었다. 언제나처럼 차분한 목소리였다.

“그렇게 무서우면 물어봐줄까.”

“뭐?”

“원하는 결과가 안 나와도 남한테 전해 들으면 덜 무섭지 않겠냐?”

“아, 그러지 마. 좀!”

예현은 질겁했다.

고민이 날아가다 못해 정신이 확 드는 제안이었다.

허나 윤은 이해가 안 된다는 듯 턱을 까닥였다.

“그렇게 시간 낭비도 안 하고 상처도 덜 입을 묘안인데 이해가 안 된다는 시선으로도 보지 마.”

그래. 최윤이 긴 인생에서 가장 친한 친구라니 인생을 헛 산 게 분명하다. 하지만 헛 사는 것이 인생이라고 덕분에 머리를 식힐 순 있었다.

“내가 말할게.”

예현은 숨을 크게 내쉬었다.

그날 저녁 예현은 힐데를 집무실로 불렀다.

저녁이었지만 볼 서류가 남아 있었고, 상대와 나눌 이야기도 반은 공적인 내용이 될 터라 집무실이 적당했다. 여기서 상사로 있는 게 감정을 잡기도 수월할 듯싶었고. 예현은 능숙하게 서류를 처리하며 대부를 기다렸다.

힐데는 늦은 밤 집무실을 찾아왔다.

집무실로 호출한 탓인지 그는 늦어서 죄송하다는 인사부터 건넸지만 예현은 개의치 않았다. 반 나절도 안 되어 연락이 닿은 게 운이 좋았다.

할 말을 정해둔 덕일까. 죽을 맛까진 아니었다. 예현은 평소처럼 윤이 사온 디저트를 탁자 위에 올리고 디카페인 커피를 한 잔씩 뽑아 왔다.

힐데는 그 자취에서 뭔가를 짐작한 듯 말했다.

“윤이 왔었어? 아미가 좋아하는 과자잖아.”

대부는 기억력이 좋다. 곁을 퍽 아끼는 까닭에.

“네. 바쁘다곤 했는데 힐데도 안 보고 갈 줄은 몰랐네요.”

윤은 반나절의 여유도 얻지 못했다. 슬픈 삶이었다. 그곳으로 곧 돌아가야 하는 저 또한. 친구가 아니라 물귀신이었나. 검고 하얗고 음산한 게 꽤 닮았다.

이예현은 내심 투덜거리다 눈을 깜빡였다.

“그런데 왜 아미가 아니라 윤이죠?”

“좀, 물어본 게 있었거든. 하루만 기다려주지.”

힐데가 곤란한 듯 시선을 피하며 중얼거렸다. 넘겨주겠다던 양털은 역시 머리카락인가. 예현은 푸스스 웃었다.

“힐데는 윤을 정말 좋아하는군요.”

처음 주가 둘을 붙였을 때만 해도 모든 이들이 힐데를 걱정했지만, 염려와는 다르게 윤과 그는 서로 적당한 공간을 내어준 채 잘 지내고 있었다.

힐데베르트는 오랜 기사단장 경력으로 웬만한 상대에겐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깡이 있었고―윤은 웬만한 상대가 아니었기에 벅찰 때도 잦았겠으나―, 최윤은 이러니저러니 해도 성실하고 연구 충동을 일으키는 후배를 아끼는 편이었다.

그리고 사실 윤 자체가 몇몇 사람에겐 드물게 대하기 쉬운 인간상이기도 했다. 예현은 힐데가 그를 편히 여기는 이유를 짐작한다.

힐데베르트 탈레브는 배신과 그로 인해 빚어진 반발감을 끔찍히 두려워했다.

하지만 윤이라면 자신에게 분노할 일이 생겨도 배신감 같은 복잡한 감정으로 치를 떨진 않으리라고 믿는 거겠지.

예현은 그 가정엔 다소 착오가 있다고 봤으나 굳이 사실을 짚어주진 않았다. 그렇게 생각해서 기댈 구석을 하나라도 잡아둔다면야.

그 순간 힐데가 의아하다는 듯 말했다.

“난 너를 더 좋아하는데.”

예현은 근래 피하기 바빴던, 보석 같은 금안을 파고들 듯 관찰했다. 평소보다 떨리거나 자신을 외면하는 부분이 있는지. 어쩌면 그가….

이예현은 안심했다.

대부가 당연한 사실을 말한다는 양 단단해서.

안도란 늘 유쾌한 감정일 순 없는 법이다.

예현은 부러 기분을 진정시키곤 두 손가락을 부딪혀 딱 소리를 낸 뒤 명령했다.

“고마운 걸. 그럼 힐데. 사수보다 소중한 상사한테 잠깐 시간 좀 내줄래.”

“아. 넵.”

힐데가 허리를 곧게 세워 앉았다. 예현은 제 양 손끝을 마주대곤 예사롭게 말했다.

“갑작스럽지만 내 복귀가 정해졌어.”

금안 중심의 동공이 팽창했다.

“수뇌부 사정이 급한 모양이라. 정확한 시기는 미정이지만 가능한 일찍 센터 코어로 돌아가게 되지 싶어.”

“복귀는 사령관으로서입니까?”

“남들은 그렇게 여기는 것 같아. 그러니까 스카가 사령관으로 취임했어야 했는데. 이렇게까지 악으로 깡으로 버틸 줄 누가 알았겠어?”

“아마 사령관님만 빼고 다…. 대리로 겪어봤으니 더 무서웠겠죠.”

예현은 침묵했다. 힐데가 한 템포 늦게 눈치를 살피고는 덧붙였다.

“죄송합니다. 결국 그 지옥에 제 발로 돌아가시는군요.”

“하…. 그러게.”

예현은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쓸어넘겼다. 벌써부터 의욕이고 뭐고 바닥난 지 오래였다. 아마 힐데에게 할 말이 있지 않았다면 침실에서 슬프게 최후의 숙면을 시도중이었을 것이다. 독사과를 먹는 게 차라리 낫겠다 되뇌면서.

하지만 그런 개인적인 사정보다는 이 사람이 훨씬 중요하니까. 업무야 사실 과중한 데 익숙해 엄살에 가깝기도 했다.

이예현은 차분히 말했다.

“아무튼 그래서 돌아가기 전에 네 의사를 확인하려고 불렀는데. 특별히 생각이 있어?”

“네?”

“나와 함께 센터 코어로 갈지, 이곳에 남을지.”

그토록 피한 찰나였으나 때가 오자 이예현은 망설이지 않았다. 사령관으로 지내온 수십 년은 감정을 감추는 법을 체화하기에 적당한 시간이던 탓이다. 사람은 스스로를 위장할수록 그와 같은 존재가 되기 마련이니까. 재연만큼은 아니어도.

오히려 힐데의 동요가 명백했다. 목소리가 평소와 달리 흔들려 예현은 내심 놀랐다. 의아함과 미약한 두려움이, 어째서? 확인해야 하나?

“그건…. 책임자가 귀환하는데 당연히 따라가야 하는 것 아닙니까?”

허나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어떤 때에도 분명한 것이었다.

“당연히 당연하지 않아.”

예현은 누구보다 제게 그 사실을 주지시키기 위해 음성을 꾹꾹 눌러가며 덧붙였다.

“당연해선 안 돼. 힐데.”

힐데는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진짜 뭐가 문제지. 생각하다 예현은 낯에 열이 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게 불필요한 오해를 샀을 수도 있겠다.

예현은 잘 나가다 결국 표정 수습에 실패했다.

“그, 첨언하자면 내 복귀는 너에 대한 고백관 관련이 없어. 일을 쳐놓고 한심한 변명이지만…. 그 부분은 고민하면서 배제해도 돼.”

“네? 아…. 그런 오해는 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항상 사령관님이 지나치게 골치 아픈 문제에서 도망치지 않는다고 생각했는데요. 그럴 리 없잖습니까.”

자식 편애가 지나친데. 예현은 푸스스 웃었다.

“지금 본인 말 해?”

힐데베르트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저는 나름대로 열심히 도망치고 있습니다만. 여기 남은 것만 해도 그렇고요.”

대꾸할 가치가 없는 얘기라 예현은 무시했다. 대신 그는 다리를 꼰 채로 화제를 돌려놓았다.

“어쨌든 오해하진 않았다니 원하는 대로 결론 내리면 되겠군.”

“…너무 갑작스러워서. 그냥 전처럼 사령관님께서 귀환하시니 함께 간다고 판단하면 안 되는 겁니까?”

“응. 그러기엔 너도 짐작하겠지만 센터 코어의 정세가 순탄하질 않아.”

“….”

“솔직히 지금의 넌 전혀 괜찮아 보이지 않아서, 나도 곁에 두고 지켜보고픈 마음은 굴뚝 같지만….”

이예현은 쓰게 웃었다.

좋아하는 상대에게 내 곁에 없는 게 나은 이유를 설명해야 하는 상황이 얄궂었다. 동시에 그럼에도 힐데가 저를 택했으면 하는 바람까지 어리석어서.

적막이 사이를 스쳐지나간다.

그것이 때로 춥고 매섭게 느껴질지라도 평화일 순 있는 법이다.

“적어도 이곳은 조용하지. 하지만 돌아간다면, 내가 상황을 안정시킨답시고 수를 써도 안정이 언제 찾아올지는 장담 못하겠어. 어쩌면 수십 년이 걸릴 수도 있고.”

사실 평생이 우스울지도 모른다.

예현은 손톱이 살을 파고들도록 주먹을 쥐었다.

“어떤 길이든 후회는 남을 거야. 그러니까―”

“선택이라도 스스로 하란 말씀이시군요. 그런 덴 익숙합니다.”

익숙할 필요가 없었다면 좋았을 텐데.

이예현은 안타까움을 삼켰다. 힐데가 이제 상황을 이해하긴 한 듯했기에. 그리고 자신도, 어떻게든.

“아무튼 갑작스러운 질문이긴 했으니 결론이 나면 알려줘. 그동안 일정을 미뤄보긴 할게.”

“감사합니다. 하지만 저는.”

“단, 조건이 있어.”

예현은 제 고생이 무색하게 뼛속까지 군인인 힐데가 어떤 고민도 하지 않았음을 눈치채고는 그를 멈췄다.

“반드시 네 선택권과 존엄성만을 기준 삼아야 해. 이번 일만이 아니라 앞으로도.”

“예?”

“힐데. 이제 아무도 널 강제할 수 없고 강제해서도 안 돼. 내가 인류의 대표라 할 순 없겠지만…. 어쨌든 우린 너한테 너무 큰 빚을 졌지. 헌데 인간이 너를 제한한다는 게 말이 되나?”

“….”

“네 의사는 그 정도 권리는 갖고 있어. 잊지 마.”

예현은 전에 없이 상대에게 강하게 말했다. 힐데는 군인으로선 명령에 복종하는 과였고, 가족으로선 대자를 아끼는 대부였기에 이렇게 대할 일이 잘 없었다. 허나 이번만은 이 정도로도 그가 승복할 보장이 없었기에 이예현은 최대한 단호히 나왔다.

과연 힐데베르트는 뒷목을 긁었다.

“하지만 존엄성이란 개념은 제겐 너무 어렵고….”

“이참에 고찰하는 것도 괜찮겠지. 어차피 지구에서 여생을 살아가야 하니까. 존엄성은 식견을 갖춘 인간이라면 다들 인지는 하는 개념이야. 몰라선 안 돼.”

이예현은 제 대부가 무슨 핑계를 대든 다 밀어버릴 자신이 있었고, 그럴 셈이었다. 허나 힐데가 목울대로 마른침을 넘기고 꺼낸 말은 미처 예상 못한 것이라.

“그리고, 저를 누구도 강제해선 안 된다는 말은 사령관님답지 않은 이야기처럼 느껴집니다.”

예현은 눈꺼풀을 빠르게 깜빡였다.

“독재자 마인드다 이건가?”

곧이어 픽 웃었다. 그러게.

“맞아.”

“예?”

“사랑하니까.”

힐데베르트 탈레브는 숨조차 쉬지 못했다.

그럼에도, 왜일까, 평소라면 분명 멈췄을 텐데. 이 사람을 배려하고, 헛 나온 말이니 잊어도 된다 속삭이고. 헌데 이 순간은 물러서고 싶지 않았다. 왜냐하면….

이예현은 고백했다.

“사랑하는데 어떻게 팔이 안으로 굽지 않겠어요.”

속이 시원했다!

동시에 이예현은 직감했다. 지금 이 순간이 제 삶에서 가장 이기적이고 제멋대로 굴던 찰나가 되리란 점을. 그리고 그건 생각지 못하게 즐거운 경험이었다.

힐데의 뒤통수를 맞은 듯 멍한 낯마저 좋았다.

예현은 잠깐의 행복에 눈꼬리를 접어 웃다가, 곧 자신으로 돌아왔다. 이예현은 행복이 늘 순간임을 알았다. 그래도 잠깐이나마 누렸으니 원은 없었고.

“염치 없죠. 그렇게 사선으로 밀어넣고선.”

이예현이 덤덤히 중얼거렸다.

힐데는 급히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 난 네가 총사령관이 아니어도 가야 했고, 그렇게 했을 거야. 오히려 네 덕에 제대로 된 도움을 받은 셈이지. 맞아. 콜튼이 사령관이었어봐.”

“하하하!”

필사적인 비유였다. 예현은 눈가를 훔쳤다.

힐데는 안도한 듯 짧은 숨을 내쉬곤 덧붙였다.

“아무튼 난 네가 내 편이 아니라는 전제는 상상 해본 적 없으니까…. 사실 내가 미안하지. 전후에 처리해야 할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닐 텐데 여기서 썩게 만들었으니.”

속을 제대로 털어놓은 적은 없었으나 힐데는 대자가 이곳에 있는 게 본인 때문임을 처음부터 알았다. 예현도 그가 그러하리란 것을 짐작했고. 모르기에는 똑똑한 사람이지. 그럼에도 아닌 척 눌러앉은 쪽은 자신이었다.

“하지만 전 나쁘지 않았는데요. 예전부터 책을 좋아했거든요.”

“여긴 도서관이라기에는 너무…. 차라리 무기박물관 같아.”

“푸흡. 그래도 이름은 다른 곳보다 멋지잖아요? 전부터 이곳 서재를 꾸며보고 싶다는 로망은 정말 있었습니다. 이번 기회에 제 방이라도 괜찮게 꾸며서 만족했고요. 당장은 무리여도 미래엔 여기서 한가롭게 책을 읽을 수도 있을 테니까, 그때를 위한 포석이려니 여겼는데요. 힐데?”

“…책을 좋아하던 아이가 있었어.”

예현은 본능적으로 이해했다. 그가 누구인지. 어쩌면, 살아남았다면 자신 대신 이 사람 앞에서 울고 웃었을 소년을.

이예현은 가깝고도 먼 보석안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개인적인 습성을 말한 적은 없었는데. 감정이 묘히 섞였다. 책을 사랑했던 소년의 인생이 서글프기도 하고 그 사실을 저에게 털어놓는 대부가 안타깝기도 했다. 동시에 추하게도, 그가 어차피 돌이킬 수 없는 과거를 털어놓을 만치 마음을 열었단 사실이….

다행인지 감상에 취할 상황은 아니었다.

“연습해보자고 무기를 쥐어주면 웃으며 도망가려 들었지.”

“힐데.”

“너도, 검 같은 걸 좋아하진 않았을 텐데.”

저 햇볕처럼 다정한 눈이 안쓰러움을 한가득 안은 게 애틋하고 사랑스러워서. 타이탄의 이주가 어쩔 수 없던 것임을 확신하면서도 힐데는 이주가 서로에게 남긴 피해에 늘 책임감을 느꼈다. 아담과 다른 이들이 그렇게 된 까닭에 더욱.

예현은 짧은 고민 끝에 결정했다.

물론 자신도 총과 핏물이 끔찍할 때가 많았고 자주 도망치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허나. 예현은 힐데 곁에 다가가 당황한 그의 손목을 부드럽게 감싸쥐었다. 힐데베르트의 자아가 종종 죄책감에 쓰러지는 듯해도 근본은 단단함을 알면서 그렇게 했다. 그리고 이예현은….

좋아하는 이의 손끝을 제 심장 위에 올렸다.

“하지만 그 덕에 생존했고, 힐데를 만났죠.”

이것이 삶의 증거다.

만남의 증거이고, 떳떳하게도 사랑의 증거였다.

“적어도 당신의 검을 이어받았던 것은 한 번도 후회한 적 없습니다. 힐데도 제자인 저는 좋아하잖아요?”

이예현은 아담이 아닌 생존자였고 제 업무에 누구보다 적성이 있었다. 그리고 그 사실을 힐데베르트 또한 안다.

예현은 단단한 손을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이 온기를 잠깐이라도 더 붙잡고 싶다고 생각하며.

침묵하던 힐데가 고개를 끄덕였다.

“응. 염치 없지만 싫어할 순 없더라. 네 성실함이 느껴져서.”

그가 발견했을 무언가에도 변치 않은 애정이 어린 미소였다. 마치 보고만 있으면, 그것이 그에게도 일상이어서 이상을 인식하지 못한 것처럼, 그랬다.

착각하지 말아야지.

예현은 내심 되뇌며 제 짝사랑을 받아들였다.

“힐데. 내가 당신을 그런 의미로 여기지는 않는다고 했을 때…. 사실은 힐데가 저를 그런 의미로 여길 수 없었던 거죠?”

어떤 말은 바람이다. 판단이 아니라.

이 사람이 저를 두고 편히 떠나진 못할 거라고, 무수한 밤 기도했던 어리석은 이의 소원처럼.

“그럼에도 다시 고백한 건 제 이기심이지만, 한 번만 이해해주세요.”

이게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니까.

이예현은 소리를 겨우 삼켰다.

그런 말마저도 내뱉으면 누군가의 바람이 되어버릴까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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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2


  • 민첩한 새우

    지구에선 효자가 고백도 하냐고. < 할 수도 있지(?) 200살 드셨으면 세상을 넓게 보실 때도 되셨어요 영감님(??) 네가 어플을 삭제하면 될 문젠데 왜 힐데한테 그래? < 예힐 둘다 팔안굽 ㄹㅈㄷ 너무좋아욬ㅋㅋㅋㅋ 좋아하는 이의 손끝을 데 심장 위에 올렸다. "하지만 그 덕에 생존했고, 힐데를 만났죠." 이것이 삶의 증거다. 만남의 증거이고, 떳떳하게도 사랑의 증거였다. < ㅎ ㅏ.......너무 좋아서 잠깐 화면 덮고 천장보다 옴............가섬이 찌르르르 해요.......

  • 민첩한 새우

    ㅎㄹ ㅍㅌ를 안 읽어서 첨 읽을 땐 이해 못했다가😅 오늘 다시 읽으면서 검색해보고 짱 터졋네요 저 장르도 대부대자가 그런...(? 인간들은 예상보다 더 파렴치한 종족이었고. (중략) 판도라라는 별명을 눈 한 번 꿈쩍 않고 지어줬을 테니까. << ㅋㅋㅋㅋㅋ 그저 알아차린 탓이다. (중략) 자신을 수렁에서 꺼낸 이의 태양 같은 눈동자를 제대로 마주할 순 없었다. < 이 부분 몰입감 장난아니에 (양털이 깎이는 양 이모티콘) < 살신성인 장난아냐(?) "사랑하니까." "사랑하는데 어떻게 팔이 안으로 굽지 않겠어요." 속이 시원했다! < 나도!!! 이것이 삶의 증거다. 만남의 증거이고, 떳떳하게도 사랑의 증거였다. < 정말 큰 울림을 줌...🥺 도서관장 예현 너무 좋은데 안 돌아가면 안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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