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랙배저-예현힐데

[예현힐데] 사랑, 삶 下

‘사랑하니까.’

봄볕처럼 환한 미소.

‘사랑하는데 어떻게 팔이 안으로 굽지 않겠어요.’

가장 소중한 것을 마주하는 시선.

늘 묘한 슬픔이 어려 있어 거둬주고 싶었던….

힐데는 침대에 누워 수 시간을 뒤척이다 일어나서 의자에 앉았다. 수면으로 도피할까 싶었는데 오늘은 텄다.

그는 팔짱을 낀 채 숨을 길게 내쉬었다.

총사령관의 긴박한 일정과 예현이 상관으로 내린 명령을 고려하면, 힐데의 최우선 고민거리는 ‘이곳에 남을지, 코어로 돌아갈지’가 되어야 했다. 허나 정작 머리를 시끄럽게 울리는 것은 예현이 상대의 승낙을 포기하고 건넨 진심이었다.

힐데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그토록 오랜 시간 고민을 거듭했는데도 당장 나온 결론은 하나뿐이었다. 제가 대자의 마음을 연정이 아니라고 자의적으로 판단해 아이를 끊어내려 한 것. 그에 대한 사과는 해야 했다. 예현이 더이상 그를 신경 쓰지 않더라도.

하지만 다음엔 어쩔 셈이지? 

예현을 떠올릴 때마다 마음이 약해진다고 고백을 받아들일 건가? 그게 정말 대자가 원하는 일일까? 원한다 쳐도 아이에게 좋은 일이긴 한가.

예현과 제 사이로만 한정해 봐도 문제가 산적했다. 종족에 성별에, 백 년쯤은 우습게 뛰어넘는 연령차, 그 시간과 환경에서 비롯된 가치관 차이. 이런 것은 가족이라면 포용하면 그만인 문제이나 연인이라면 극복해야 할 장벽이 된다.

게다가 이런 조건적인 부분은 자신도 예현도 상대에게 관대한 편이니 어떻게 극복한다 쳐도. 지금껏 쌓아온 관계는 어쩔 건가. 

가족과 다름 없는 사이였다. 예현이 피보호자였고. 신관님들이 저승에서 저를 어떻게 볼지만 상상해도 등골이 오싹해졌다. 상상하지 않아도 양심이 죽도록 아팠다. 예현은 처음부터 이 관계를 형성했던 만큼 유연하게 변형할 수도 있겠다 판단한 모양이지만.

일대일로만 두고 고민해도 이 정돈데 주변까지 감안하면 최악의 선택이 따로 없겠지. 고려하지 않는 것은 불가능하다. 예현은 블랙배저의 핵심이니까. 그리고 양지에서 권력을 쥔 그에게 이종족인 자신은 지나치게 리스크가 큰 존재였다.

예현이 그저 그것이 옳다고 판단하여 벌인 일들이, 사랑에 미친 젊은이의 연인에 대한 특혜쯤으로 비춰지면….

힐데는 어깨를 떨다가 냉장고를 열어 물을 꺼내 마셨다. 죽을 맛이었다. 노신관이 ‘힐데베르트. 넌 파문이다!’ 라고 외치는 환청까지 들렸다.

힐데는 심장을 겨우 진정시키고 다시 의자에 앉았다.

기실 답이 정해져 있는 문제다.

무수한 조건을 떠나 힐데베르트란 인간 자체가 연인으로는 부적절했다. 제가 아는 게 없다시피 해도 한 가지는 확실하다. 연애가 의미 있으려면 상대를 채워줄 수 있어야지 않나? 그러기엔 지금 자신은 완전히 비어 있는 인간이었다.

현재도 예현의 시간을 갉아먹을 뿐이고.

그럼에도 고민을 거듭하는 게 되려 이상한 일이지. 힐데는 문득 그점을 깨닫고, 고민의 초점을 바꿔보다 깨달았다. 아마도.

사랑을 말하는 네가 행복해 보였어서.

기대를 버리는 네가 괴로워 보였어서.

너는 충분히 많은 것을 내려놓고 살아왔으니 난 네가 이젠 아무것도 포기하지 않고 살았으면 좋겠는데….

빛이 깜빡였다. 힐데는 탁자 위 전화로 눈을 옮겼다. 이 시간에 웬 연락이지. 확인하니 이고르의 문자였다.

[대장 잘 지내나?]

1이 사라진 걸 봤는지 용건이 즉시 이어졌다.

[있었군 유튜브를 봐]

                                                       [왜?]

[요우가 왜 올렸냐고 날뛰어서 언제 삭제될지 모르겠어]

[하여간 걱정하는 건 알겠는데 방식이 늘 재수 없단 말이야]

[델테이는 열받아서 자기 집으로 돌아갔고]

동문서답이었다. 이고르의 지능이 갑자기 떨어졌을 린 없으니 자신이 그 영상을 직접 확인하길 바라는 듯했다. 힐데는 유튜브를 열었다. 어차피 구독 채널은 델테이와 빙룡과 렉시크누들을 호평한 유튜버 둘뿐이었기에 영상은 쉽게 확인할 수 있었다.

곧 고혹적인 목소리가 방에 울려퍼졌다.

―거룩한 가지이시여.

―전능한 나무이시여. 찬미 받으소서. 찬미 받으소서.

―당신의 여린 가지를 굽어살펴 주소서.

델테이의 신성력이 유독 빼어난 것은 그 목소리와 가창력이 세계수의 성에 찼기 때문 아닐까. 노래를 못 부르던 신관도 존재했음을 알면서도 힐데는 그렇게 판단했다. 청아하게 뻗는 음성이 향수를 자극한다. 더없이 친숙하고 그리운….

하여 그는 영상이 끝난 뒤에야 판단력을 찾았다.

댓글을 왜 안 막은 거지.

설전이 넘쳐났다. 그 노래는 지구의 어떤 곡도 아니었고, 언어는 인류에게 존재한 적 없는 것이던 탓에. 얼굴을 공개하지 않은 계정이라 그나마 다행이었다. 일부 팬들이 일당백으로 델테이를 응원해주었지만 욕이 훨씬 많았다.

힐데는 전화를 걸었다.

“델! 괜찮아? 무슨 일이야?”

“그래. 이거지!”

“응?”

“요우 그 미친 T 자식. 사람이 욕을 먹고 있는데 일은 네가 쳤으면서 그게 중요하냐고 하잖아. 친구한테 할 말이야?”

델테이가 하소연을 와다다 쏟아냈다. 사회성 말아먹긴 했군. 힐데는 이마를 짚었다.

“이젠…. 반성하고 있겠지.”

“요우가? 택도 없어. 자긴 팩트를 말했을 뿐이라고 확신하니까!”

사실 나도 그렇게 생각하긴 해.

하여간 다들 오래 함께 지냈더니 서로에 대해 너무 잘 알아서 문제였다. 이쪽은 연애 문제는 안 생기겠어. 힐데는 진이 빠져 초점을 돌렸다.

“너무 신경 쓰진 마. 너만 손해잖아.”

“그렇긴 하지만. 짜증나아.”

“걱정했는데 의기소침하진 않아서 다행이다. 그보다 정말 무슨 일이야?”

“무슨 일이긴. 너한테 들려주려고지.”

힐데가 멈칫했다. 델테이가 차분히 말했다.

“카이로스도 자릴 비웠으니까…. 지금 혼자일 거 아냐. 외로울 것 같아서.”

“델.”

“그리고, 너무 열받아서. 네가 어떤 각오로 전장에 나갔는지 아무것도 모르는 인간들이 함부로 떠드는 게 진짜! 응원이라도 해주고 싶었어.”

힐데는 입술을 짓씹었다.

자신은 인복이 넘쳤다, 정말로.

“고맙다. 아름다운 노래였어. 자주 들을게.”

“후후. 당연한 말을. 힐데 너는 괜찮아?”

아. 힐데는 그 순간 생각했다. 이젠 정말로 타인의 도움을 받을 때가 아닌가 하고. 이런 문제는 자신이 고민을 거듭 해도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델테이는 동족중에서도 드물게 섬세한 친구이기도 했고. 그가 결정했다.

“나 고민이 있는데 들어줄 수 있을까.”

그 뒤론 일사천리였다. 힐데는 본부에서 마물 토벌 전략을 논의할 때보다 상세하게 고민을 털어놓았다. 말하면서도 제 안에 이 정도 이야기가 있었는지 놀랄 정도였다. 힐데는 심지어 예현의 고백을 수락하면 자신은 콜튼 이상의 쓰레기지 않겠냐는 심정도 고백했다.

델테이는 그 시간 동안 힐데를 멈추지 않았다. 그 감상을 긍정하거나 부정하지도 않았다. 대신 그녀가 마지막에 꺼낸 말은 고민과 전혀 상관이 없어 보이는 것이었다.

“힐데. 아주 예전에…. 내가 널 선택하면서 한 얘기 기억해?”

영문을 몰랐으나 힐데는 긍정했다.

“기억하지. 네 결단이었잖아. 감동적이기도 했고.”

“그거 거짓말이었어.”

“―이제 와서?”

델테이가 폭소했다.

“어떻게 말해! 네가 맘고생을 할 게 뻔한데.”

당시는 믿을 사람과 믿지 못할 사람이 수없이 갈라지던 나날이었다. 어떤 이는 배신자가 되었으며 어떤 이는 이중스파이가 되었다. 힐데도 카일도 사람을 쓰는 데 단호한 편이었기에 얼마 안 지나 전선을 갖췄지만, 아담의 사망 직후는 모두 혼란스럽던 시절이었다.

델테이는 그 즈음 힐데베르트를 찾아왔다.

이른 합류는 아니었다. 그녀가 카일을 연모해온 건 많은 이들이 아는 사실이어서 첩자 의혹을 제기하는 자들도 있었다. 힐데와 델테이는 오랜 친구였으나 친분이 사람의 신용을 담보하지도 못했다. 당장 힐데부터 오랜 인연들과 갈라선 상황이었기에.

허나 힐데는 델테이를 의심하지 않았고 다행히 그건 최측근들도 마찬가지였다. 이고르는 델의 처참한 운동능력을 믿었고, 요우는 신성력으로 사람을 해칠 방법은 없단 사실을 알았다. 하지만 힐데는 그런 말들 너머로 델테이에 대한 그들의 신뢰를 느꼈다.

성녀는 그런 사람이었다.

하여 힐데는 그녀와 재회했을 때 카일에 관한 이야기는 꺼내지도 않았다. 대신 그는 퍽 불안해 보이는 친구에게 염려를 담아 물었다.

‘델. 괜찮아?’

델테이는 친구를 끌어안고 오래도록 울었다.

이후 눈물을 그친 그녀는 힐데를 택한 이유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랬다. 그건 ‘선택한’ 이유였다. 카일을 떠나야만 했던 이유가 아니라.

이 다감한 여성에게도 신념은 있었기에.

‘힐데. 이젠 우리가 우리를 구원해야 하잖아. 우릴 보우해주던 신이…. 이젠 없으니까.’

신관이 되진 않았지만 신전에서 자라나 세계수의 자식이 된 힐데에게도 그 상실감과 외로움은 받아들이기 벅찬 것이었다. 고위 성직자로 백 년 넘는 세월을 살아온 델테이에게는 어떨지 상상할 수 없었다. 허나 그녀는 말했다.

‘그러니까 이젠 최소한의 판단도 스스로 하지 않으면 안 돼. 그리고 난 최대한 많은 동족을 구하려는 네가 옳다고, 생각했어.’

염려한 것보다 단단한 모습에 그는 안도했다. 다만. 힐데는 망설임 끝에 입을 열었다. 이유가 그것이라면 진실을 알려야 했기에.

델테이와의 의리조차 저버리고 싶진 않았다.

‘괜찮겠어? 델. 내가 할 수 있는 건 구명밖에 없어. 그것도 확언은 못하겠고.’

키시스가 제게 넘긴 뭔가를 지켜야 한단 생각에 노력은 하고 있었으나, 힐데는 신이 아니었다. 그는 오랜 친구들조차 설득할 수 없었다. 신관인 그녀가 구하려는 것이 구원이라면 더욱. 저조차 구해내지 못하는 이가 어떻게 타인을 구원한단 말인가?

그러나 델테이는 미소 지었다.

‘그러니까. 일단 살아남아야지 날 구할 기회도 생기지 않겠어. 힐데.’

‘응?’

‘이런 고민 해본 적 있어? 지구에는 세계수가 없는데 어떻게 신성력을 쓸 수 있는지.’

‘어…. 아니.’

‘후후. 넌 검사니까. 난 고민할 수밖에 없었거든.’

델테이가 창문 바깥의 별빛을 바라보았다. 그 미약한 것이 세계수와 닮은 몇 안 되는 흔적이라 동족은 다들 별을 사랑했다.

‘우리의 나무는 지복을 사람들에게 나눠주고 점점 쇠약해졌지. 그게 우리 세계와 나무도 무너뜨렸지만…. 다르게 보면 신을 우리 안에 깃들어 왔다고도 볼 수 있지 않을까? 어쩌면 아직도 신성력을 쓸 수 있는 건 사람들에게나마 신이 남아 있기 때문일지도 몰라.’

성녀는 별빛을 받고 반짝이는 눈으로 덧붙였다.

‘그러니까, 신관 된 입장에서 나는 가능한 많은 신을 살려야 한다고 결심한 거야.’

그날 성녀였으면서도 신의 상실을 딛고 일어서려던 친구가 얼마나 대단하게 느껴졌는데 거짓말이라니. 내 감동 돌려줘.

황당함에 말도 잇지 못하던 중 델테이가 고백했다.

“그때 어떻게 말할 수 있었겠어? 네가 내 구원이라고.”

힐데베르트는 그제야 거짓말이 정확히 무엇을 뜻하는지 알았다. 하지만.

“…나는 너한테 해준 게 없는데.”

되짚어도 전무했다. 힐데가 동족들을 살리려 애쓴 것은 사실이었지만 구원이라고 이를 만큼 델테이에게 해준 것은 없었다. 그녀가 막 찾아온 당시엔 더더욱. 또한 구명이 구원의 전제가 될 순 있겠으나 결과나 그 자체가 될 수 있다 보는 것도 과장이었다.

허나 델테이는 웃었다.

“왜? 너는 내 오랜 친구고, 고맙게도 살아 있고, 날 살려주었고, 네 덕에 많은 동족이 자신의 인생을 살 수 있게 됐는데. 그래서 지금은 옛일을 돌아보면서 시덥잖은 대화도 할 수 있는 거잖아. 이게 왜 구원이 아니지?”

“….”

“힐데. 너야말로 생각해봐. 이것보다 더 멋진 일이 어딨어. 설마 내가 이 나이를 먹고 생존한 게 불만인 건 아니지. 같이 늙어가는 처지에?”

“당연히 아니지.”

“그럼 됐네! 이제라도 말해서 시원하다. 줄곧 알려주고 싶었어! 부담될까봐 닫고 있었지만.”

“…델.”

“애초에 난 신관이라고. 의존할 뭔가가 있어야지 마음이 놓이는 사람이란 말야.”

우아한 목소리에 담긴 즐거움이 듣기 좋았다. 맑게 머리가 깨이는 느낌에 그는 그 말을 조용히 들었다. 곧 기품 어린 음성이 다정히 속삭였다.

“힐데. 그러니까 누군가가 너를 사랑해서 구명하고 싶어하는 것도 이상하지 않아. 구원하려는 것도.”

“….”

“그 아이한테도 네가 구원이었을지 모르잖아.”

얼마간 안부를 나누고 전화가 끊긴 뒤. 힐데는 친구의 노래를 다시 들었다. 서로 감정을 전이한 것도 아닌데 델테이의 마음이 몹시도 애틋하게 다가왔다.

예현의 마음을 생각할 때면 미안함 못지 않게 밀려오던 감정이 그러했듯이.

이 일상적이고 따뜻한 흔적도 구원인 걸까.

힐데는 다음날 대자를 찾아가 재연에게서 받은 녹음 파일을 돌려줄 수 있는지 물었다.

예현은 제 앞에선 늘 유순했던 눈을 크게 떴다.

“왜요?”

“음…. 직시해야 할 것 같아서.”

“무엇을?”

관찰하는 시선. 답은 대화라기보다는 죄 반문이었다. 힐데는 묘한 압박감을 느꼈으나 이번엔 떳떳했기에 솔직히 대답했다.

“그냥. 내 과거를.”

과오를, 이라고 얘기하면 안 주겠지? 실제로 과오를 직시할 계획도 아니었다. 아마도. 녹음한 내용을 대강 기억하는 만큼 결과는 그렇게 될지 몰랐지만.

예현은 이마를 찡그리더니 한참 뒤에 말했다.

“…본인이 전한 말을 돌려드리지 않는 것도 억지니 드리긴 하겠지만, 힐데, 이상한 생각은 하지 말아요.”

내가 자책할까봐 걱정하는구나.

마음을 알고 나니 속이 뻔히 보여 웃음이 나왔다.

“응. 안 할게.”

“안 좋은 생각이 들면 저한테 알려주시고요.”

“말해줬잖아. 목소리가 부드럽다 생각했다고.”

대자는 그제야 안심한 듯 미소 지었다.

“맞아요.”

힐데는 얼마 지나지 않아 제 방으로 돌아와, 예현에게서 받은 녹음기를 틀었다. 그리고 저조차 몰랐던 청년과의 첫 접촉을 조심스레 되짚었다.

[최악의 상황이 온다면, 공멸밖에 길이 보이지 않게 된다면. 핵폭탄 스위치를 누르기 전에 이걸 쥐고 뛰어 들어가 봐. 그리고 그에게 감정이 한 조각 남아있기를 기대해. 오랜 시간 함께한 전우의 무기를 알아보기를, 그래서 일순간이라도 망설이기를. 그 망설임의 순간 심장에 칼날을 찔러넣을 만큼 네가 냉철하고 유능하기를. 그리고, 감정 한 조각이 없을 시 그를 끌어안고 공멸할 각오를 지녔거나 삶에 애착이 없기를. …그러기를 기대해보자고. 희박한 확률이지만.]

밖에서 이어폰을 꽂고 들을 걸 그랬나. 힐데는 재생이 종료되자 약속한 것이 무색하게 미안함을 느꼈다. 흡연 욕구를 참기 힘들 정도였다.

자신도 고민 끝에 전한 말이었던 만큼 내용은 대강 기억하고 있었지만 쓰레기가 따로 없군….

허나 기묘하게도 아이가 제 부탁을 구원처럼 받아들인 이유는 알 것 같았다.

힐데베르트는 이제 그 부탁이 평범한 아이에겐 전해져선 안 될 말임을 안다. 이도 저도 안 되면 자살 테러를 감행하란 명령을 아담에게 하겠는가, 산에게 하겠는가. 허나 핏물이 대지를 적시던 시절 힐데는 얼굴도 모르는 인간 청년에게 검을 맡기고 요청했다.

가서 죽으라고.

제정신이 아니었다. 자신은 친구와의 동반 자살을 꿈꾸고, 남에게는 다른 친구를 죽여 달라고 사주하는 상황에서 사람이 제정신일 순 없었다. 가능한 냉정하게 전선을 꾸려야 한다고 수천 번 되뇌었지만 결론은 그것이다.

최대한 많은 동족의 구명을 목표로 나선 길에서도, 자신이 죽음만을 구원으로 삼을 만큼 몰려 있었다는 것.

그리고 당시의 너도 그랬던 거겠지.

넌 처음 들은 내 목소리가 상냥히 느껴졌다고 했었지만, 예현, 이따위 건 다정함이 될 수 없어. 이건 폭력이고 잔인함이지. 너의 영혼을 말살하는 짓이고. 그럼에도 네가 이걸 상냥함으로 인식했다면, 넌 그냥 공감했던 거야.

내 아픔에.

동시에 외로웠던 거지.

그래서 손을 내밀었을 뿐이야. 난 파일 너머에 있지 않았기에 녹음을 듣는 행위로는 접촉하지 못했을 뿐. 하여 수십 년이 지난 뒤에야 닿을 수 있었던 것까지.

눈물이 뚝뚝 흘렀다.

마음이 아팠다. 심장이 아팠고, 예현이 아프게 느껴졌다. 기묘한 감각이었다. 괴로움관 달랐다. 힐데는 괴롭진 않았지만 완연한 슬픔을 느꼈다. 세상 한 켠에 눈물로 지은 호수가 있어, 그 안에 가라앉은 너를 발견한 것 같았다.

힐데는 다시 재생 버튼을 눌렀다.

[그 망설임의 순간 심장에 칼날을 찔러 넣을 만큼 네가 냉철하고 유능하기를.]

아이가 눈을 깜빡인다.

[그리고, 감정 한 조각이 없을 시 그를 끌어안고 공멸할 각오를 지녔거나 삶에 애착이 없기를.]

마주한 순간 힐데베르트는 깨닫는다.

시선에는 항상 끝이 존재한다는 것을.

힐데는 그 사랑을 앞에 두고 고백한다.

있잖아, 예현. 전쟁이 터지지 않았으면 앞길이 창창했을 청년에게는 죄스러운 이야기지만, 그때 난 네가 나보다도 성숙한 나이길 바랐던 것 같아.

네가 삶에 애착을 잃어 누구도 원망하지 않길 바랐거든.

최후의 순간에 원망이라는 감정이 네 영혼을 좀먹지 않도록.

오랜 시간 내 인생을 지탱해주었던 친구들의 죽음을 각오했을 때, 나 또한 죽음을 예비했었는데도 나는 괴롭더라고. 세상이 증오스럽고 내가 혐오스러워서.

그런데 너는 정말로 나보다도 성숙한 나였기에 잔인한 명령에서도 다정을 구했구나. 그게 네가 가진 힘이고 천성이겠지.

어려운 일을 맡겨 미안해.

그리고 살아줘서 고맙다.

힐데는 그런 말을 수십 번 정리했다. 예현에게 제 감정을 실수 없이 전할 수 있도록. 그 아이에게 상처를 주지 않는 선에서 진심을 납득하게끔.

그렇게 긴 시간이 흘러 각오가 섰을 때.

힐데는 문득 이승현의 존재를 떠올렸다.

전쟁이 종료된 후. 대자의 불행의 근원이었던 그는 홀연히 자식 앞에 나타나 머리 숙여 과오를 사죄하곤 길을 떠났다. 다만 이것은 예현에게 소식을 전달받아 알게 된 경황이라, 그들이 정확히 무슨 얘길 나눴는지는 불분명했다.

그러나 확실한 부분도 한 가지 있긴 했는데, 이승현이 제 사죄엔 스승의 개입이 있었음을 대자에게 알렸단 것이었다. 덕분에 힐데는 금쪽같은 제자와 재회하면 놈을 반 죽여야겠다는 결심을 양심의 가책 없이 내린 차였다.

워낙 은신에 뛰어난 인간이라 추적하려면 시간과 정성을 따로 들여야 했고, 당장은 놈까지 신경 쓸 여유가 없었기에 찾진 않았지만.

예현은 그날 드물게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힐데가 자길 패준 덕에 정신이 들었다던데요.’

그 새낀 진짜 전설이다.

최초로 든 생각이었다.

나름대로 놈을 배려해서 강요한 상담이었는데 한 번 팬 게 더 효과가 있었다고 하면 어쩌란 거지? 더 패달란 뜻인가?

둘째로 든 의문이었고.

다행히 셋째를 떠올리기 전에 예현이 말했다.

‘뭐 이런 인간이 다 있지 싶더라고요.’

아이는 픽 웃었다.

‘그 지독한 세월이 내가 그 사람을 못 이겨서 얻은 죗값 같아졌잖아요? 아주 틀린 말도 아니라 짜증나.’

평소 성정이 또렷하기 때문일까. 이예현이 특유의 긁히는 목소리로 시니컬한 이야기를 하면, 누구도 그 판단엔 쉬이 이의를 제기하지 못했다.

게다가 이번엔 제자의 고발 탓에 저지른 죄도 드러난 상황이었다. 함부로 나서진 말았, 어야 했는데 항상 호기심이 문제다. 힐데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화 안 내?’

그랬다. 이예현은 의외로 헛소리에 분노한 기색은 아니었다. 약간의 불쾌감 정도. 그는 오히려 평소의 덤덤한 모습으로 돌아와 중얼거렸다.

‘그게 또 묘하지. 좋았어요. 당연히 아버지 얘기는 아니고요.’

그가 푸스스 웃었다.

‘힐데가 감정부터 앞세울 만큼 나를 좋아하는 게 느껴져서요. 그 부분만.’

그땐 네가 상처받지 않아 다행이라고 안심하고 만 일이었는데.

돌이켜보니 묘했다. 세상에 절대적인 내 편이 있단 사실이, 그 아이의 다정함도 눈 감도록 기쁠 일인가. 기실 그것은 누군가의 자식이라면 당연히 누려야 할 권리인데도. 힐데는 친부모가 아니었음에도 자신을 애정을 다해 양육했던 분들을 기억해냈다.

입안이 썼다.

만약 내 검과 녹음 파일을 너에게 전해주는 사람이 이승현이었다면. 그자가 너보다도 먼저 내 요구를 들었다면. 그리고 그 무례에 불같이 화를 낼 자였다면.

네가 이 메시지를 아껴 들을 일은 없었을 텐데.

그랬어야 했는데 말야….

힐데는 고민 끝에 예현이 전달해준, 이승현의 편지를 열어보기로 했다.

이제는 지구에서 보낸 세월도 상당한 기간이 되었지만, 훨씬 오랜 시간을 살아온 힐데는 사실 인생을 별 생각 없이 살아온 편이었다.

이전 세계에서 힐데는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성장했고, 그분들을 잃었을 때는 복수를 해야겠다 결심하고 그를 이뤘으며, 앞으로는 아끼는 것을 만들기 힘들지 않을까 싶었을 때 많은 이들이 다가와 제 벗이 되어주었다.

어느 순간부터 그는 실력과 인맥을 갖춰서, 남을 가해하지 않으면서도 자신이 피해받지 않는 적절한 지점에 운 좋게 서 있을 수 있었던 것이다.

흘러가는 파도에 몸을 맡긴 채 부유하던 삶.

그 과정에도 무수한 희로애락이 있긴 했으나 대부분 선악이 확실한 사건이어서, 그는 머리가 빠개지는 고민에 앓거나 후회로 밤을 지새우는 일은 잘 없었다.

그 모든 퀴퀴한 악취덩어리는 자신이 지구의 이방인이 되고 얻은 부산물이다.

어쩌면 그래서 더욱 옛 세계가 그리워지는지도 몰랐다.

‘잃을 것’을 쌓아가기만 하면 됐던 날들.

하여 힐데는 지구에 도착하고서도 상당한 시간이 지나서야 오판으로 인한 균열을 알아차렸다. 그 행복에 조금은 덜 심취했으면 좋았을 텐데.

힐데는 친구들의 상처에 진심으로 아파했지만, 그 상처가 그들의 관념에 어떤 식으로 뿌리 박아 사고방식을 바꿔 놓았는지까진 짐작하지 못했다.

그리고 결정적인 때 몰이해는 감당하기 어려운 상실이 되어 힐데베르트 탈레브라는 인간을 수몰시켰던 것이다.

키시스는 예언에도 재능이 있었는지 모르겠어.

어느 날은 자조적으로 그런 생각을 하기도 했다.

잃을 것을 만들라더니 정말 다 잃어버렸잖아.

인생이 감당하기 벅찰 때면 황자에게 들었던 말이 예언을 넘어선 주박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최대한 많은 이들을 살려낼 수 있는 결정’을 내리라고? 당신 날 뭘로 본 건가. 나는 황족을 수호해 온 기사고 마물을 제거하기 바빴던 살해자다. 그런 거시적인 결정은 내겐 황제나 당신 같은 귀족들이 쑥덕인 뒤 하달하면 수행한 명령에 불과했다고.

해낼 수 있을 리 없는데 왜 당신 자신이 아닌 나를 살렸지.

생명의 은인을 책망하기도 했던 순간.

결국 힐데가 발버둥 끝에 얻은 최선은 부표가 되는 것이었다. 그는 등대조차 되지 못했다. 적어도 자신이 판단하기엔.

힐데베르트 탈레브의 정신은 단단한 지반에 기반하지 않았고, 그럴 듯한 목표를 제시하기에는 정치와 먼 인생을 살아온 바였다.

그저 파도에 부딪히면서도 자리를 지키고자 버둥거리던 날들. 얼마나 볼품 없는 모습이었을지. 오랜 친구들이 어둠 속에서 자신을 지나친 것도 당연해.

그렇게 생각했는데.

힐데는 지금에 이르러 그 시절의 인연을 하나하나 되짚어 보았다.

신을 잃은 세계의 신관을.

사랑하는 이를 상실한 마법사를.

함께 부하들의 눈을 감겨주었던 검사를.

멸망할 세계에 친애하던 생명을 죄 두고 와야 했던 사역사를.

세계의 종말을 누구보다 일찍 짐작했음에도, 최후까지 분투했던 지도자를.

한 사람이 누군가의 등대가 될 수 있다는 믿음은 처음부터 환상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생명은 저마다 파도에 부딪히면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을. 그럼에도 서로의 손을 잡아, 자신과 상대가 침몰하지 않도록 지탱해주고 있을 뿐임을.

때로 그들이 제게, 제가 그들에게 상처를 주었지만 그럼에도 서로의 존재로 인하여 살아왔다는 사실을. 어쩌면….

앞으로도 살아갈 수 있으리라는 작은 가능성을.

그런 것들 또한 구원일지 모르겠다고 가늠하며, 힐데는 예현에게 고민 끝에 정리한 생각들을 솔직히 고백했다. 자신이 그에게 준 상처도 다시 사과했다.

그러나 이예현은 안도하지 않았다.

명석한 두뇌로 무언가를 짐작한 탓에.

청년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떠나겠군요.”

힐데베르트는 직속 상사가 최고 권력자인 상황에 익숙했기에 요점 정리에 능한 편이었다. 따라서 곁에 남을 생각이었다면 제 사정을 속속들이 털어놓으며 화제를 돌릴 일 없이, 대자에게 너를 따라가겠다는 결론부터 내놓았을 것이다.

힐데는 조심스럽게 긍정했다.

“응. 밖에서 정리해야 할 일이 좀 있어서.”

“…알겠습니다. 그래도 힐데가 안정된 모습이어서 다행이에요.”

힐데는 네 덕분이라는 말을 덧붙일 셈이었다. 그러나.

“아. 이건…. 이상하죠. 대부가 조금이라도 괜찮아졌으면 기쁘게, 받아들여야 할…. 일인데.”

투명한 액체가 소리 없이 흘러내렸다. 예현이 소매로 부리나케 눈가를 훔쳤지만 효과가 있진 않았다. 오히려.

힐데는 말을 잃었다.

당황해서는 아니었다. 그보다는, 그 모습을 마주한 찰나 자신도 모를 감정이 튀어 어떤 행동을 해야할지 몰랐다. 이런 동요는 처음이었다.

“죄송해요.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되니까….”

힐데는 문득 키시스가 남긴 말을 떠올렸다.

1차 전쟁 때는 정말 삶을 내던져버리고 싶던 순간이 많았다. 상상도 해본 적 없는 갈등, 배신, 그 배신자가 자신이라는 부분까지.

그럼에도 어떻게든 상황을 버텨낸 것은 그가 제게 가치를, 추구해야 할 목표를 넘긴 까닭이다.

‘힐데베르트. 앞으로 무슨 일이 닥치건 최대한 많은 이들을 살려낼 수 있는 결정을 내리도록 해.’

자기 생존 이상의 무언가.

한번 전해진 이상 이전으론 돌아갈 수 없는.

키시스는 힐데가 가장 되고 싶은 것이었고, 힐데는 머리가 둔한 편도 아니었으나, 유독 황자가 알려주는 것만은 빠르게 배울 수 없어 그도 최근에야 알았다.

사람은 등대가 될 수 없어도 사람에게서 전달된 가치는 어두운 밤을 헤쳐갈 불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다시 예현이 했던 말을 생각한다.

‘대자를 두고 속 편히 떠나진 못할 테니.’

‘저를 사랑하는 게 좋겠어요.’

힐데는 아이의 속을 이제야 이해했다.

너도 줄곧 내게 뭔가를 쥐어주고 싶었던 거구나.

그런데 총과 검이 쓸모를 잃은 평화의 시대에선, 나도 그를 모르고 세상에 혹사당한 너도 그게 무엇인지 몰라서….

너 자신을 던져버릴 수밖에 없었던 거야.

오랜 시간 애정이 결핍된 생을 살아왔음에도 사람을 사랑하여 그 마음을 전달하게 된 서투른 청년.

힐데는 눈을 닦는 예현의 손목을 조심스럽게 잡아 내렸다. 그리고 제 아이의 눈가에 달래듯이 짧게 입을 맞추었다.

이예현은 눈물로 일렁이는 눈을 깜빡였다.

힐데는 뒤늦게 열로 달아오른 얼굴을 숙였다.

“예현, 들어봐. 떠나긴 할 거야. 할 건데, 올해 안에는 돌아올 거라고. 약속…. 읍, 잠깐만, 잠, 시….”

세상이 빙글 기울었다.

힐데가 바깥에서 수색한 첫 사람은 놀랍게도 이승현이었다. 

잭과 연락해 비행형 크리처를 사방에 띄우고, 마물 사체의 흔적을 뒤쫓아서 누군가를 집요하게 찾는단 사실은 짐작했지만, 그 대상이 친부임을 깨달은 순간 이예현은 놀람과 초조함을 느꼈다. 대부가 그 사람을 왜?

마침내 그가 이승현을 찾아낸 날 힐데베르트는 친절히도 이유를 설명해주었다.

“왜 찾아오신 겁니까? 다신 못 볼 줄 알았는데요.”

답지 않게 뚱한 목소리가 이어폰 너머로 들려왔다. 이예현은 헛웃음을 터뜨릴 뻔했다. 진짜 뭐하는 인간이지.

허나 힐데는 위화감을 느끼지 못한 듯했다.

“편지 잘 받았다. 상담한 것도 효과는 있었다며? 그럼 처맞을 만한 상황인 것도 이해하겠지.”

“이러려고 상담을 강요하셨던 겁니까?”

“아니었는데 네가 쓴 문장마다 주먹을 부르잖아!”

극한의 분노가 터져나왔다. 사생활이라서 안 보고 넘겼는데 무슨 얘길 쓴 거야! 예현은 눈물을 삼키고 끼어들었다.

“힐데! 제가 할게요. 제가!”

“…예현?”

이어폰 너머에 아무도 없는 것처럼 음성이 비었다. 웬만한 일엔 꿈쩍하지 않는 이승현도 마찬가지였다. 끝났군. 언제 들켜도 이상하진 않았지만 이렇게 일찍.

스토킹범도 애인으로 쳐주려나.

가뜩이나 밤 늦게까지 재택 근무중이던 예현은 우울하게 서류를 넘기며 상황을 설명했다.

자신은 코어로 돌아가고 힐데는 일단 바깥에 남기로 했단 사실을 윤에게 알리자, 최윤은 소형 위치추적기를 보내왔다. 여기까진 힐데도 아는 사실이었고 힐데는 그것을 가볍게 받아들였다. 본래도 종족적으로 먼 거리의 개체 인식이 가능해서인지 거부감이 안 드는 모양이었다.

예현은 양심이 아팠으나 조금 안도했다.

헌데 힐데가 떠난 뒤 최윤이 알린 것이다. 그걸로 쌍방향 통신도 가능하다고. 예현은 오랜만에 윤에게 화를 냈지만 엎질러진 물이었다―기계에 기능을 추가해줬으면 고마워 해야 하는 거 아니냐? / 뭐가 문젠지 알면서 모르는 척하지 마! / 잘 풀리면 회나 쏴―.

그리고 호기심에 패한 이예현은 스토킹범으로 전락했단 이야기다. 예현은 머리를 쓸어넘기며 처분을 기다렸다.

힐데는 가볍게 말했다.

“그래? 잘 됐네. 걱정할 일이 줄어서.”

이예현은 마른 세수를 했다. 믿어서 다행이긴 한데.

“…힐데가 중세 시대에 태어나 운이 좋았다고 느낀 건 처음이에요.”

“정말 최윤에게 속았다고 확신하십니까? 이예현은 특수군 총사령관입니다.”

내 말이. 예현도 그 판단엔 동의했으나 힐데는 달랐다. 이어폰 너머로 수박 한 덩어리를 쪼개는 듯한 소리가 들려온 것이다.

뻑!

“그 전에 네 아들이겠지. 진짜 이게 내숭인 게 말이 되냐고. 아오….”

세상이 고요해졌다. 예현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힐데. 아버지를 죽인 건 아니죠?”

저도 이게 무슨 질문인지 몰랐다. 허나 대부의 음성은 늘 그랬듯 부드러웠다.

“응. 기절만. 네가 하겠다고 했으니까. 시간 날 때마다 일대일로 배우면 아마…. 될 것 같은데. 열심히 해보자.”

뭘요. 패륜을?

예현은 확인하고 싶었지만 눈치껏 침묵했다. 어쨌든 대부의 책망 없이, 사상자도 생기지 않아 다행이었다. 미래엔 생길지 몰라도.

다음으로 힐데가 찾은 장소는 오랜 친구의 곁이었다. 폭주를 시작한 세계수의 자식은 세상에 흔적 하나 남기지 않고 소멸하기 마련이어서, 힐데는 친구의 시체와도 재회할 순 없었다. 그저 다 녹아 소멸한 눈자국처럼 흔적이 사라진 발자취를 애써 더듬어볼 뿐.

힐데베르트는 그 자리를 찾아서, 서성이고, 떠나는 시간 동안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예현은 그가 찾던 위치를 사실 힐데보다 정확히 알았으므로 추적기의 좌표를 확인한 순간부터 그 목적을 짐작했더랬다.

예현은 힐데가 자리를 벗어나고도 몇 시간이 지난 뒤에야 입을 열었다.

“힐데. 그 건에 대해선 역시 저를 원망하는 게 낫다고 생각해요.”

“바보 같은 소리. 너한테 검을 준 건 나잖아.”

힐데베르트는 희미하게 웃었다.

“그냥, 세계수의 그늘에선 날 원망하길 바라야지. 레이가 그럴까 싶지만….”

허나 실제론 웃고 있을 것 같지 않았다. 예현은 자신이 곁에서 연인을 위로해줄 수 있으면 좋았겠다 싶었지만, 사실 그것도 현명한 선택일지는 불명확했다. 레이 르뉘르의 목숨을 앗아간 이는 다름 아닌 자신이었으니까.

힐데의 긴 생에 처음으로 사귄 친구.

유언으로 친구의 이름을 남긴 사람.

이예현은 침묵한다. 제가 죽을 때가 되어도 그 유언을 입에 올릴 일은 전무할 터다. 예현은 세계수의 그늘이라는 장소가 실제로 존재한다면, 친구를 기다리고 있을 이가 차라리 저를 원망하길 바랐다. 하여 힐데베르트만은 평범하게 웃으며 삶을 살아갔으면 하고….

산 사람의 최초와 죽은 이의 최후가 접한 곳에서. 예현은 제 연인의 행복만을 이기적으로 기도했다.

이쯤 되니 예현은 힐데가 다음으로 찾을 곳도 짐작했지만 아는 티를 내진 않았다.

대신 예현은 홀로 대륙을 떠도는 그가 외로울까봐 끝말잇기를 시도했다. 그 게임은 따지면 갓 사귄 연인의 사랑 싸움에 불과해서 승률은 서로 비슷했기에, 최종 승자는 심심풀이로 낀 최윤이 되었다. 학문 용어를 꿰고 있던 덕이다.

가끔은 책을 읽어주기도 했다.

<행복한 가정은 모두 비슷한 이유로 행복하지만 불행한 가정은 저마다의 이유로 불행하다> 고. 하긴 예현은 멀리 떨어져 있어도 연인이 있어서 행복했으나 윤은 재연의 유전자를 연구하지 못해 불행했다. 이예현은 마침내 납득했다.

힐데는 우연히 빙룡과 마주치고, 개간 업무를 진행중이던 슈와도 만나 세실의 안부를 나눈 뒤 그곳에 도착했다.

이어폰 너머로 회한에 젖은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예현의 불안을 염려했는지 힐데는 공용어로 상대에게 속삭였다.

“너는 내 창자가 끊어지길 바라겠지.”

예현은 침묵했다. 이예현에겐 카일의 죽음에 말을 얹을 권리가 없었으므로. 일전에야 힐데를 살리는 게 먼저니 빈말이라도 했다지만.

시가를 태우는 듯 깊은 숨소리가 이어졌다.

“그러면 다시 태어나서 그렇게 해. 나는, 그때까지 한 번 살아볼 작정이니까. 너는 날 죽이지 못해 내게 복수했으니 나는 어떻게든 생존해 너를 엿먹이기로 했거든.”

긴 시간 누군가의 호흡만 드문드문 들려왔다.

힐데베르트는 마침내 고백했다.

예현은 다음 날, 녹음한 메시지의 통역을 친구에게 부탁하고서야 그 뜻을 알았다.

“…사무치게 그리워. 그리워해서 미안하다.”

그는 직후에 자리를 떠났었다.

힐데는 진과 만났던 자리도 둘러본 뒤 마지막 사람을 만났다. 넉살 좋은 목소리와 함께 손뼉이 마주쳤다.

이후의 내용은 예현으로선 알 수 없었다.

다만 잭이 힐데의 추적에 협조한 공이 있었던 만큼 이승현이 언급된 것은 분명했는데, 예현은 그게 제 입장에선 앞담인지 뒷담인지 몰랐다.

어느 쪽이든 알 바는 아니었지만.

예현은 힐데의 웃음 소리를 듣다가 잠깐 통신기를 껐다. 안심이 될 땐 이야기를 엿들을 필요가 없었다. 약간 질투가 나기도 했고.

힐데베르트는 다음날 첫눈을 뽀득 밟는 소리를 내며 센터 코어로 귀환하는 여정에 올랐다.

예현은 그제야 완전히 안도하고 그를 놓아주길 잘했다는 결론을 내렸다. 최근 주요 언론과 협상을 마친 상황이기도 했다.

그러나 귀가는 예상만큼 쉽진 않았다.

이상 기후 때문이었다. 평소보다 늦게 내린다 싶던 눈은 금세 폭설로 변모해서 주변 지형을 흰 사막처럼 덮어버렸다. 칼바람이 몰아치는 소리가 들리기도 했다. 힐데가 타이탄이 아니라 평범한 인간이었다면 일이 났을 터다.

인지 능력상 사람은 주변을 구분할 수 있는 뭔가가 없으면, 똑바로 길을 나아가고 있다 판단해도 반드시 길을 잃게 된다. 예현은 통신으로라도 위치를 보조해주고 싶었으나 날이 흐려서 태양광 충전이 되질 않아 연결도 끊기길 반복했다.

힐데는 눈발이 진정되고 충전도 어느 정도 끝나면 다시 연락하겠다는 보고를 올리고는 통신을 끊었다. 최윤이 ‘걱정도 팔자’라는 평을 내린 뒤 퇴근했을 즈음이었다. 저것도 사수라고. 예현은 혼자만의 화병을 앓았다.

연락이 다시 됐을 때는 시차를 고려하면 힐데에겐 늦은 밤이었다. 예현은 미세하지만 천천히 움직이는 좌표에 의문을 느꼈다.

“힐데. 자리를 헤매는 것 같은데 괜찮나요. 차라리 낮에 눈이 녹으면 움직이는 게 낫지 않을까요.”

“괜찮아. 낮이 오히려 헷갈리더라고. 그냥 하얀 들판이 되어버려서. 지금은 별자리라도 보면서 방향을 잡고 있어. 헤매는 것처럼 보여도.”

“무리하지 마세요. 언제 오셔도 되니까.”

“난 하고 싶은데. 곧 생일이잖아.”

이 사람 예전부터 연애에 관심이 많았으면 주처럼 여럿 울려봤을 것 같은데. 이예현은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사실 그때 보고싶긴 해요.”

힐데는 가볍게 웃었다.

“주변에 조명이 없어서인가…. 밤하늘이 네가 띄운 나비처럼 반짝여. 너도 봤으면 좋았을 텐데.”

“언젠가 같이 봐요.”

“응. 별도 보고 바다도 보면 좋겠지.”

힐데는 드물게 감상에 취한 느낌이었다. 무얼 보고 있기에. 예현은 창가로 다가갔다. 아쉽게도 광공해 때문인지 여기선 별이 잘 보이지 않았다.

다음엔 함께 가야겠어.

결심한 순간 힐데베르트가 속삭였다.

“삶은 본디 순환이구나…. 이렇게 돌고 돌아서도 너를 만나러 갈 수 있다니.”

예현은 두 눈을 깜빡였다. 이 사람은 감성적인 말보단 행동으로 감정을 표현하는 편이었는데. 어색했으나 심장 한 켠이 간질간질했다.

문득 하고 싶은 이야기도 떠올랐다.

“힐데. 떠나기 전에 말했잖아요. 나는 등대가 될 수 없었다고.”

“응? 그랬지.”

예현은 부러 단정적인 어조로 말했다.

“하지만 나도 그렇게 느끼거든. 지금 당장 자리를 박차고 나가서 너를 만나고 싶다고.”

“….”

“내가 너의 별일 수 있는데 어떻게 네가 내 별이 안 돼.”

그토록 거대한 중력으로 사람을 끌어당기면서 자신이 광원인 줄 모르다니.

예현은 피식 웃었다.

“그렇죠?”

“…응.”

이예현은 진실과 거짓을 파악하는 데 능하다.

그는 만족했다.

전력이 바닥났는지 곧 통신이 끊겼으나 예현은 더이상 힐데를 걱정하지 않았다. 대신 이예현은 연인과 닿아 있을 하늘을 올려보며 힐데베르트 탈레브라는 개인의 고요한 평화를 기원했다.

여행을 떠나기 전 힐데가 심정을 밝힌 과정과 여행 자체는, 그 자신을 치유하는 것이기도 했지만 예현을 치유하는 것이기도 했다.

이예현은 그와 자신이 꽤 닮았다는 것을, 하여 자신을 애정하고 싶어지듯 힐데베르트 또한 사랑하게 됨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생각 못하게 발견한 나르시시스트적인 면에 당황하기도 했으나 그건 모든 평범한 사람의 욕구이기도 할 거라고, 드물게 자신을 비호하면서.

아름다운 밤이었다.

힐데는 성탄절에 센터 코어로 돌아왔다.

전날에 공식 송년회가 있었지만 힐데와 연이 있는 배저들은 끝도 없이 달렸다―아미는 정말로 달리기도 했다―. 예현은 힐데가 언제 돌아올지 알았고 따로 자리를 마련할 셈이었기에 적당히 마셨으나, 힐데는 술에 강하지 않았다면 최후엔 시체가 되었을 터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한 나절이 지나서 예현은 아미에게 윤을 맡기고―윤의 낯짝은 배신감으로 일그러졌다― 저는 생일 휴가를 핑계로 자리를 빠져나왔다.

물론 힐데베르트도 함께였다.

힐데는 오두막에서 전에 담가두었던 사과주를 한 병 꺼내왔다. 연락은 자주 했지만 얼굴을 보니 더 기쁘기도 하고, 둘뿐이라 주변 눈치를 볼 일도 없어서 이예현은 기분 좋게 술을 즐겼다. 이렇게 흥청망청한 생일은 처음이었다.

얕은 취기와 행복에 푸스스 웃자 힐데가 말했다.

“미안. 너무 늦었지.”

“괜찮아요. 무사히 돌아오셨으니까.”

그 말을 건넬 때만은 항상 진심이었다. 힐데는 눈을 깜빡이다 고개를 끄덕였다.

“응. 생일을 겨우 맞춰서 다행이야. 되는 대로 혼자 돌아다녔더니 날짜 감각이 둔해지더라고.”

“천사여서 이제 온 게 아니라요.”

“놀리지 마.”

성탄절에 착한 아이를 찾아온 미카엘이 붉은 귀를 숨기지 못하고 투덜거렸다. 퍽 사랑스러운 모습이라 예현은 가볍게 웃다가 검지로 탁자를 톡톡 두드렸다.

“힐데.”

“응?”

“이제 당신께 제 삶을 드려도 될까요?”

태양보다도 밝고 햇볕보다도 따스한 것을 마주친다.

아. 감히 내가 타인을.

누군가에게 생을 쥐어줄 줄 모르는, 겨우 내가 당신을.

이예현은 제 안에서 불어나는 욕심에 놀랐으나 이번엔 그 모습이 두렵다 하여 도망치진 않았다. 눈앞에서 피어난 미소에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가 자신을 누구보다 기꺼워 하리라는 것을.

“힐데. 아직 인간을 사랑하나요?”

“응. 그리고 너를.”

이예현은 힐데베르트 탈레브의 삶이 인간을 만난 뒤로 어떻게 부서졌는지 안다. 그럼에도 아직 인간을 사랑한다는 당신이 너무 당신다워서.

‘망각은 축복이었을 텐데.’

‘그럼 내가 네게 저지른 잘못도, 네가 내 제자라는 사실도 알지 못했겠지.’

망각이 축복이라면 기억은 도전이다. 자신과의 끝없는 분투이며, 사람은 그를 지고 살아가야만 한다. 그 결과가 승리가 될지 패배가 될지만이 각자에게 달려있을 뿐. 책의 마지막 장을 덮는 순간까지 지난한 세월을 버텨내야 할 터다.

그럼에도 이 사람과 함께라면….

연인이 서로에게 다가가 입을 맞추었다.

삶은 그토록 두려운 것이다.

허나 사랑은 이토록 찬란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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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4


  • 민첩한 새우

    종족에 성별에, 백 년쯤은 우습게 뛰어넘는 연령차, 그 시간과 환경에서 비롯된 가치관 차이. 연인이하면 극복해야할 장벽이 된다. < 극복해야할 장벽이긴 한데 오히려 종족차, 동성, 백 년쯤은 우습게 뛰어넘는 연령차, 가치관 차이 <<그렇기에 이것들이 진짜 맛있는 건데!!ㅋㅋ 그 게임은 따지면 갓 사귄 연인의 사랑 싸움에 불과해서 (중략) 최전 승자는 심심풀이로 낀 최윤이 되었다. 하긴 예현은 멀리 떨어져 있어도 연인이 있어서 행복했으나 윤은 재연의 유전자를 연구하지 못해 불행했다. <ㅋㅋㅋㅋㅋㅋ "내가 너의 별일 수 있는데 어떻게 네가 내 별이 안 돼." "이제 당신께 제 삶을 드려도 될까요?" < 🥹🥹🥹 사람은 등대가 될 수 없어도 사람에게서 전달된 가치는 어두운 밤을 헤쳐갈 불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망각이 축복이라면 기억은 도전이다. (중략) 책의 마지막 장을 덮는 순간까지 지난한 세월을 버텨내야할 터다. < 처음 읽었을 때도 이 두 문단이 정말 좋아서 한참 읽었는데 다시 읽어도 또 좋네요

  • 누워있는 개구리

    이제94번만더읽을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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