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랙배저-예현힐데

[예현힐데] 사랑, 삶 上

블랙배저 40x화 기준

* 2월에 쓰기 시작했던 글이라 설정 오류가 심각합니다. 양해 부탁드립니다.

카일의 검은 날카롭게 목표를 찢어발긴다.

짐승이 뾰족히 튀어나온 발톱을 휘두를 때면 뼈와 근육을 넝마로 만들 듯이, 그 검은 갈퀴처럼 상대를 베었다. 그물같이 펼쳐진 그의 영역에서 살아남기란 드넓은 사막에서 호수를 찾는 것만큼 행운을 요하는 일이다.

그 점에서 힐데베르트는 운이 좋았다.

“왜….”

아니, 운이 좋았나?

칼날이 늑골을 거침 없이 빠개고 들어온 통각에도 힐데는 다소 멍하게 눈을 깜빡였다. 수천 번의 전투 경험으로 고통을 인내하는 데도 익숙해진 그였지만, 이번 반응은 그런 참을성이 개입된 것은 아니었다. 그저.

“카, 일.”

시야가 혼탁해졌다. 목이 메여서 숨을 쉬기도 어려웠다. 힐데는 자신이 울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 모습이 상대에게 얼마나 추해 보일지도, 어렴풋이 짐작했다.

그래도 상관 없었다.

“가지 마….”

힐데가 손을 뻗었다.

카일은 잡지 않았다.

대신 그는 신경질적으로 피를 토해내고는, 입가를 사납게 끌어당기더니 말했다.

“복수다. 힐데베르트.”

너의 유언은 어찌 그리도 명료한가.

닿으려 할 때마다 외면당할 것을 알면서도 힐데는 멍청하게 카일을 붙잡고자 했다. 제 몸에 칼날을 꽂은 오랜 친구가 최후의 생명줄이라도 되는 양 절박하게 다가, 가서….

손이 허공을 가로지른다.

서로를 우리로 인식케 했던 금색이 소멸한다.

아.

부디 마지막만은.

인연이 재가 되어 바람에 흩날렸다.

차마 제정신으로 마주할 수 없었다. 힐데는 당장 숨이 넘어갈 사람처럼 호흡했다. 감정에 따른 반응이 수습되지 않아 피아를 식별하지도 못했다.

그저 드는 생각이란.

개자식. 나도 지옥으로 보내주지.

“힐데, 힐데!”

누군가 제게 다가와, 저를 붙잡고, 저승에서 이승으로 죽은 자를 불러오듯 저를 거듭 호명하고 있음을 알면서도.

너와 함께라면 지옥도 천국 같았을 텐데.

막대한 정신적 충격과 강제적인 이전의 고통에 기절하기 직전까지 힐데베르트는 생각했다.

어떻게 나만 버리고….

조용한 오후.

전쟁이 끝나고 다시 독서를 취미로 붙인 이예현은 드물게 책의 다음 페이지를 넘기지 못하고 한 문장에 매여 있었다.

<행복한 가정은 모두 비슷한 이유로 행복하지만 불행한 가정은 저마다의 이유로 불행하다.>

기묘하게도 그가 멈춘 이유는 그 유명한 첫머리가 유독 인상적이어서는 아니었다. 되려, 굳이 따지면 그는 그 문장을 이해하기 어려워 독서를 잇지 못하고 있었다.

그럴 수도 있는 건가?

이예현은 손끝을 맞대고 오랜 과거를 돌이켜 보다 현실이 그럴 수도 있음을 받아들였다. 그랬기도 했지. 전쟁이 터지기 전에는.

근 60년의 표면적인 현실은 거장의 묘사와는 달랐다.

불행이 몰개성적이고 행복이 개인적이었던 암흑의 시대.

인류는 식량 증식으로 급격히 팽창했던 인구의 상당수를 잃는 총력전을 벌였고, 그 흐름에 따라 전쟁 고아가 대거 양성되었다. 이예현이 몸 담은 조직에선 가족을 잃은 적 없는 이들이 드물 정도였으며 일반인도 사정이 크게 다르진 않았다.

코어가 자리잡자 한숨 돌리긴 했으나 크리처는 드물지 않게 코어를 습격해 왔다. 대부호조차도 생존을 장담할 수가 없는 삶. 죽음을 눈 앞에 둔 공포에 익숙해진 세계는 동일한 일상을 영위할 때도 이전과는 질적 차이가 극심했다.

하지만 이젠 좋았던 시절로 돌아갈 수 있을지도 모르겠어.

졸업식에 나타난, 친구들의 부모님이 자식을 축하해 주던 모습을 부러워 했던 그때로.

좋은 일이지. 예현은 담담히 생각했다. 제 과거가 불행했다고 남들도 불행하길 바라는 질 나쁜 취미는 그에겐 없었다. 재연이라면 모를까.

조짐도 괜찮았다. 지구에 출몰한 크리처들은 인류를 배신한 과학자들이 만든 포탈을 통해 이세계에서 전송됐었기에, 그들의 수장이 제거된 순간부터 출현율이 급감했던 것이다. 인류는 3차 전쟁의 승리를 평화의 시대가 도래했다며 자축했다.

언젠가는 다시 하늘을 열 수도 있을 터.

기뻐할 일이야. 예현은 판단했다. 그러나 결론과는 별개로, 만족감이 들진 않았다. 사실 예현은 슬슬 많은 이가 비슷한 행복을 찾으려 나선 때에도 지겨운 불행을 빠져나오지 못하는 중이었다. 오랜 경험으로 그런 쪽에 역치가 높아 버티고는 있었으나.

예현은 결국 블랙배저의 사령관 직을 반납하고 도서관장으로 취임했다. 새 시대에는 새 얼굴이 필요하다는 민중의 요구도 있었고….

아무래도 평화의 시대에 정신병자가 지도자인 건 양심상 불편하니까.

다행히 도서관장이라는 직책은 예현의 성향과 잘 맞았다. 그는 독서를 즐겼고 책으로 둘러싸인 공간에 로망이 있었기 때문이다.

비록 그 도서관이 센터 코어 바깥의 대표적인 군용 건물인 ‘시작의 도서관’이며, 최근 팽창의 전초기지로 탈바꿈한 덕에 서재 대부분이 제가 꿈꿨던 모습과는 차이가 크단 점이 아쉽긴 했지만―일부 언론은 그가 실권을 전혀 놓지 않았다고 성토했다―.

그래도 사령관이던 때보단 책임이 적었고, 집무실 서재나마 꾸미는 재미가 있었다. 무엇보다 이곳에 있어야….

똑똑.

상념에 젖어 있던 예현은 고개를 번쩍 들었다. 문을 노크하는 소리만 들어도 방문자가 짐작된 덕이었다.

“관장님. 들어가겠습니다.”

과연 부드러운 음성이 말했다.

이예현은 그 사람의 목소리만은 결코 헷갈리지 않는다.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 상대를 맞았다.

“힐데.”

“독서중이었구나. 방해해서 미안하네.”

힐데베르트가 뒷목을 긁적였다. 마물의 피가 곳곳에 묻은 상태였지만 본인은 괜찮아 보였다. 예현은 그를 상처 입힐 수 있는 존재가 전무함을 알면서도 안도했다.

“읽으려던 참이었어요. 앉으세요.”

이예현은 집무 데스크 앞쪽에 마주 본 채 놓여 있는 소파들을 가리켰다. 그리고 그가 혹여나 제안을 거절하기 전에 캡슐커피 머신으로 다가가 디카페인 캡슐을 내렸다. 힐데는 다행히도 명령하기 전에 소파에 앉았다.

예현은 따뜻한 커피 두 잔을 탁자에 내려놓은 뒤, 맞은편에 앉으려 했다.

“예현.”

허나 힐데가 손을 잡았다. 살갗에 닿는 온기에 멈칫하자 걱정 섞인 시선이 다가왔다.

“사령관을 그만뒀는데도 피곤해 보여. 책보다 잠이 우선이어야 하는 거 아니야?”

그리고 떨어지는 손. 누가 할 말인데. 예현은 떠난 체온을 무심코 흘끗하고는 부러 어깨를 으쓱였다.

“과도기니까요. 일이 극적으로 줄 순 없죠.”

“그래도.”

“본부에 있는 것보단 나으니 제 걱정은 마세요. 스카는 죽어나는 모양이더라고요.”

“아.”

“대부님께 감사할 일이죠.”

장난스럽게 말하자 힐데가 픽 웃었다. 예현은 안심하고 소파에 앉았다.

기실 힐데베르트 탈레브는 이예현이 배저 본부를 떠난 이유의 과반이었는데, 그 사실을 고백한 적은 없었으나 상대는 자신이 원인임을 파악하고 미안해 하던 차였다. 예현이 자신도 이 참에 쉬고싶었다고 구구절절 고백하자 납득해 주었지만.

그렇게 지쳐 보였나.

내가 피곤해 보였어서 다행이다, 라고 생각하는 것도 색다른 경험이었다. 예현은 웃음을 겨우 삼켰던 찰나를 기억해냈다.

“그보다 잠은 힐데가 자야할 것 같은데.”

예현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힐데는 마물을 대체 몇 마리 베었는지 꼴이 엉망이었다. 체력으로 둘째라면 서러울 사람이 눈을 맹하게 깜빡이기도 했다.

스스로를 착취하는 화풀이.

화풀이라도 되면 다행인데 말이야.

이예현은 쓴웃음을 삼켰다.

힐데베르트 탈레브가 센터코어 밖을 나돈 지도 두 개월째. 그를 코어로 불러들이지 못한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하나는 힐데 자신의 문제로, 절친했던 친구를 죽인 충격에 업무를 정상적으로 하기 어려워진 상황이라는 점. 그는 자주 시체처럼 누워 있거나 악몽을 꾸곤 했기에 시민의 감시가 붙기 마련인 순찰 업무는 맡길 수가 없었다.

반면 개간 업무는 일반인의 따라붙는 시선도 없고, 베어낸 크리처 숫자를 업무 증빙으로 삼을 수 있어 성실성을 남에게 증명받지 않아도 됐다.

두 번째 이유는 전쟁 종료로 정세가 요동치면서 타이탄인 힐데를 토사구팽하길 원하는 이들이 늘어나고 있단 점이었다. 콜튼을 제거하는 과정에서 많은 원로들이 쇠락했으나, 이 문제에 관한 기득권자들의 의견은 거의 동일했다.

이예현의 검이 지나치게 날카롭다는 것.

동시에 그 검이 언제든 자신들을 벨 수 있다는 것.

합리적인 판단이었고 힐데의 상태가 정상이었으면 실제로도 그리 했을 터였다. 그들은 언론을 부추겨 여론을 더욱 부풀렸다. 블랙배저는 콜튼을 제거하며 완전히 독립적인 기관이 되었으나, 모든 황색 언론을 통제하는 것은 신이라도 불가한 일이었다.

그러기엔 블랙배저는 태생부터 양지에 자리하고 있었다.

또한 타이탄이라는 종족 자체에 원한을 가진 이들도 즐비했기에, 예현은 위급시 힐데를 바로 빼돌리려면 그와 자신이 바깥에 있는 게 낫겠단 판단을 내렸다.

물론 친구에게서도 죽지 못한 힐데가 그들따위에게 죽어주려 들진 않겠지만.

예현은 겨우 상념에서 빠져나왔다. 자신까지 침식될 순 없었다. 적어도 힐데가 멀쩡하지 못한 지금은. 

“담요도 있으니 한숨 자도록 해요.”

이예현이 타이르듯 말했다. 힐데는 그제야 제 꼴을 살펴보더니 고개를 내저었다.

“아…. 씻고 올 걸. 됐어.”

“빨면 그만인데요.”

핏자국이 신경쓰이는 듯했지만 담요쯤은 세탁하면 그만이었다. 소파야, 이 사람을 한숨이라도 재울 수 있다면 그게 중요한가 싶고. 예현은 그리 판단했으나 힐데가 염려한 부분은 그완 달랐다.

“그냥, 그 전에. 대자한테 보여줄 모습이 아닌 것 같아. 미처 신경을 못 썼네.”

“…그 대자가 여든을 넘긴 직업군인이어도요.”

“응. 그래도. 험한 꼴은 안 볼 수 있으면 안 보는 게 낫잖아.”

지나치게 제 주변에 상냥한 사람.

예현은 울컥 일어난 감정을 애써 추슬렀다.

“힐데. 그러면.”

“어?”

예현은 힐데에게 다가가 멋대로 담요를 펼쳐 그를 덮어주었다. 아직도 약간 맹해 보이는 이를 번데기처럼 감싸니 만족감이 들었다.

이예현은 상사가 준 선물을 차마 버리지 못한 채 어색하게 붙들고 있는 부하의 맞은편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자신도 보란 듯이 담요를 덮은 뒤 속삭였다.

“이렇게 같이 잠들면, 그건 평범한 꼴이겠죠.”

“예현.”

“몇 시간만 써주세요. 제가 아직도 힐데에게는 아이처럼 보인다면.”

떠들고 보니 민망해져서 이예현은 자려는 척 눈을 감았다. 이 나이를 먹고 익숙지도 않은 어리광이라니. 제가 봐도 어이가 없었다. 동시에 두렵기도 했다.

거절할까 봐….

“응.”

예현은 눈을 떴다.

“미안. 너무 늦었지.”

햇살처럼 따스한 눈길이 진심을 털어놓았다. 이예현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네.”

힐데베르트는 잠깐 괜찮아 보이다가도 지독한 우울에 빠지길 반복했다. 기약 없이 이곳을 떠나서는 화를 쏟아내듯 마물을 토벌하고 돌아왔다.

그렇게 썰어낸 크리처에 남은 불 같은 검격은 종종 본인이 아닌 카일의 것을 닮을 때가 있어서, 예현은 그가 힐데의 삶에 어떤 흔적이 되었단 데에 아픔과 분노를 느꼈다. 자신에게 그자를 직접 제거할 실력이 있었다면 좋았을 것을.

이 사람은 제가 그 기회를 빼앗았다면 대자를 증오하게 되었겠으나.

“…미안하다.”

“사과하진 마세요.”

당신 잘못이 아니니.

“그래도 무사히 돌아오셨으니까요.”

예현이 중얼거렸다. 그건 절절한 진심이었기에 말하기 어렵지 않았다.

힐데는 무슨 대답을 해야 좋을지 모르겠는지 조용히 입을 끔뻑이더니, 곧 시체처럼 깊은 잠에 빠졌다. 본인이 의식했던 것 이상으로 피로했던 게 분명했다.

어쩌면 이렇게라도 해야 악몽을 피할 수 있어서 자신을 몰아붙이는지도 모르겠어.

예현은 소중한 가족이 깨어날세라 아주 천천히 힐데에게 다가가 상대의 하얀 머릿결을 귀 뒤로 넘겨주었다.

이예현의 불행은 진부하다.

심지어 자신의 대부가 전쟁 PTSD에 시달리고 있다는 점까지.

힐데베르트 탈레브는 의외로 일상을 그럭저럭 버텨내고 있었다.

물론 자신이 영혼을 잃은 사람처럼 보일 수도 있음을 모르진 않았다. 기실 세실과 재회해서 그 기억을 엿보지 않았다면 그점을 파악하기도 어려웠겠지만, 힐데는 포탈 너머에서 겪었던 50년과 그녀와의 우애 덕분에 제 상태는 감별할 줄 알게 되었다.

저렇게 며칠을 식사나 생에 대한 어떠한 욕구 없이 보내는 것은 ‘이상하다’.

카일을 죽였다고 해서 삶을 아예 놓아버리는 것은 세실의 배려와 요우의 눈물을 ‘외면하는’ 것이다.

그리고 기억을 함께 본 이들의 ‘경악’, ‘걱정’.

힐데는 이미 본인이 주변에 너무 큰 상처를 주었다 여겼기에 그들을 더 상처 입히고 싶진 않았다. 확신은 없었지만 마음은 그랬다. 하여 카일을 죽이고 난 뒤의 자신이 어떻게 될지, 나름 각오도 하고 출정한 차였는데….

각오와 실제는 다르군.

정신이 들 때면 현실을 인정해야 했다.

탈력감에 최소한의 호흡을 하는 것도 버겁게 느껴지는 순간이 있었다.

그래도 힐데는 나름대로 노력했다. 식사를 했고, 애꿎은 마물들을 상대로 미친듯이 화풀이를 하기도 했다. 지인에게서 오는 연락은 너무 늦지 않게 답장하려 했고, 자신을 유독 걱정해서 곁을 지키려는 대자와 드물게 산책을 할 때도 있었다.

어느 날은 솔직한 심정을 털어놓았었지.

‘이럴 수도 있겠다고 생각은 했어.’

맞잡은 손에서 느껴지던 온기가 너무 따뜻해서 미쳤던 게 분명하다.

‘내가 너무 증오스러워서, 마지막에 어떤 결과를 받아들여야 하게 되면. 내게만은 절대 안식을 허락하지 않을 거라고…. 그런 가능성을 상상해보지 않은 건 아니야. 멍청하게 그렇게까지 굴진 않길 바랐지만 말이지. 하하, 하….’

‘힐데.’

그때 네가 얼마나 처참한 낯이었던가.

세 배는 되는 세월을 살아온 주제에 보호해야 할 아이를 보듬기는커녕.

벼락 같은 깨달음에 어찌 할 바를 모르고 멈춰있던 내게 네가 속삭였다.

‘저는 그가 그냥, 당신이 살아가길 바란 거라고 생각해요.’

염치없게도 그 거짓말이 위로가 됐나. 그랬을 가능성이 높진 않음을 알면서도 힐데는 무심코 고개를 끄덕였더랬다.

그 뒤로 힐데는 예현의 조언을 정말 그랬으면 좋겠다는 얄팍함으로 되짚기도 했고, 오랜 친구가 실제로 그런 의도였을 린 없으니 카일이 저승에서 보기 좆같도록 생존하고 만다고 다짐하기도 했다.

그게 어느 쪽이든 지난 50년보단 제가 느끼기에도 ‘살아 있는’ 꼴이 되었기에.

힐데는 죄책감에 묻어버렸던 질문을 환상 속 시체에게나마 건넬 수 있게 되었다.

가장 거대한 궤적에서부터 최소한의 균열까지 모든 부분을 반추하며….

카일. 지구에 마물은 대체 왜 푼 거야? 레이가 그런 결정을 내렸을 린 없지. 네 짓이야. 근데 난 그게 이해가 안 돼. 우린 살 터전을 찾으려고 그 고생을 해서 도망쳐온 거잖아. 앞으로 살아가야 할 보금자리를 우리 손으로 해치는 건 대체 무슨 의미냐고.

아니, 사실 내가 묻고 싶은 건 그런 게 아니야. 사실 나는, 너도 그렇게 했잖아. 빌어먹을, 너조차 네가 살 곳을 박살낼 수 있는데 왜 인간은 그러지 못할 거라고 확신했냐고. 네가 저지른 짓이 핵을 터뜨리는 것과 뭐가 다르냔 말이야.

그런 질문이 수백 개 이어졌다.

불 같은 분노.

본인이 들으면 질색할 이야기였지만 카일이 제 안에 살아 있는 듯했다.

그 분노가 종래엔 늘 길을 잃고 재가 되어 사라지는 부분까지도….

아. 내 손으로 다시 너를 죽이고 울면서 깨어난 밤. 비를 피하려 본능적으로 찾은 지하에서 정신을 차린 힐데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놀랍게도 시야엔 큰 차이가 없었다.

지옥과 현세에 차이가 없는 것처럼.

그는 별수없이 승복했다.

수단과 내 미숙함에 대해선 후회해도 목적만은 후회하지 않지만. 과거로 돌아간대도 나는 그리 하겠지만. 너희가 없는, 내 손으로 너희를 죽이고 살아 있는 이 순간만은 지옥불에 타오르듯 고통스러워.

네 복수는 훌륭히도 성공했음을.

며칠 후. 윤과 아미가 도서관을 찾아왔다.

명목은 임무였다. 실질은 예현의 초대겠지만. 대자에게 언질을 받은 것도 아님에도 힐데는 확신했다. 남매는 배저중에도 손꼽히는 실력자이자 통솔자로, 특수 임무가 아니면 같은 팀을 구성할 일이 효율상 사라진 지 오래였기 때문이다.

예현은 힐데가 도서관에 귀환하면 부러 지인을 초대하곤 했다. 아마 자신이 정신 놓고 누군가를, 특히 대자를 해치기라도 할까봐 도망친 사이에 지인들이 도착한 적도 몇 번 있었을 터다. 예현의 성격상 그 사실을 일러주진 않았지만.

다만 초대는 했으되 정작 초대자는 이곳에 없었다. 예현이 총사령관 직을 놓은 지도 수 개월이 지났으나 그 자리에 앉고싶어 하는 사람은 없어, 그는 눈물을 머금고 센터 코어로 돌아가야 할 때가 있었다. 비극적인 삶이었다….

어쨌든 방에 틀어박히기엔 소중한 지인들이라 힐데는 예현 대신 손님 대접을 했다. 정신 수련차 담근 술을 내어주면, 릭이 썩은 표정으로 만들었다는 렉시크누들을 전해 받는 식으로. 윤의 특정 음식 혐오 발언만 제외하면 즐거운 시간이었다.

그러던 중 주먹을 불끈 쥔 아미가 단언했다.

“힐데는 화병에 걸린 거야.”

조심스럽게 상태를 묻기에 걱정할까봐 덤덤히 답한 뒤였다. 힐데는 제 말의 어디에 그녀가 화낼 구석이 있었는지 의아했다.

그러나 배저중에서도 성격이 가장 좋되, 한번 열이 오르면 최윤을 넘어서는 박력을 보여주는 아미는 펄펄 뛰며 카일을 까내렸다.

“인성이 너무 못됐어! 오빠도 그러진 않을 거라구.”

욕이라기엔 얌전한 게 그녀답다 해야 할지, 기준이 윤인 것은 카일에게 너무하다고 해야할지. 미묘함에 반응할 수가 없었지만 정작 당사자는 태연했다.

“곧 죽는데 아는 놈 저주나 하고 있진 않겠지.”

시간 낭비니까. 힐데는 오랜 관찰로 윤의 사고 회로를 대강 짐작했으나 그를 말하진 않았다.

대신 궁금했던 부분을 물었다.

“그런데 화병이 뭡니까?”

몇 분 뒤 아미가 폰으로 검색해준 위키 내용을 정독한 힐데는 확신했다.

“전 전생에 한국인이었나 봅니다!”

인간들에겐 귓바퀴 뒤쪽에 유양돌기가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됐던 때만큼 충격적인 진실이었다. 힐데는 반 농담 반 진담으로 경악했다.

“그럴 수도.”

의외로 윤이 선선히 긍정했다.

“오빠도 전생을 믿엉?”

“윤도 전생을 믿습니까?”

제 출생의 비밀보다도 흥미로운 이야기였다. 동시에 터진 반응에 윤은 픽 웃었다.

“정확히는 전생이라기보단…. 유전자풀에?”

그렇게 꺼낸 추측은 드물게 일반인 청자에게도 흥미로운 것이었다.

동물중에는 서로 다른 종이어도 유연 관계가 가까워 번식에 성공하는 경우가 있다. 라이거나 노새처럼. 허나 유전적인 결함이 동반돼 안정적으로 세대를 이어가기는 어렵다. 반면 타이탄과 인간은 3세대에도 문제 없이 피를 섞었으며 이후로도 그럴 듯 보인다.

이는 타이탄의 체력 혹은 유양돌기처럼 인간과는 구분되는 특수능력의 존재에도 불구하고 두 종이 사실상 동일종임을 알려주는 사실이다.

하지만 서로 다른 행성에서 각자 환경에 맞게 진화한 두 종이 어떻게 동일종일 수 있는지는, 그 기원이 같은 경우가 아니고선 상정하기 어렵다.

본격적으로 연구를 한 것은 아니어서 당장은 흥미상의 가정이지만, 내 가설은 너희가 지구로 넘어왔듯 인간도 그 세계로 넘어갔을 가능성이 있단 것이다.

힐데는 이쯤에서 입을 크게 벌렸다.

“그게 어떻게 가능한데요?”

“왜 불가능하다고 판단하지? 단서는 의외로 많아. 첫째로 크리처들이 이 세계로 오게 포탈을 연 놈들만 해도 인간 과학자들이었지. 마나 되먹임에 빠져 있던 너희측 대마법사들이 아니라.”

“으음.”

“압수한 자료를 뮐른에게 넘겨둔 상태니 곧 뭔가 나오긴 할 거야. 그리고 과학으로 해낼 수 있는 일은, 자원이란 문제만 해결되면 언제든 반복할 수 있지.”

“하지만 그 세계는 확실히 멸망했는데요. 마물이야 지구에 풀기 위해 데려왔다 쳐도 인간들이 갈 만한 곳은 못 됩니다.”

“그러니 여기서 둘째. 너는 포탈에서 50년을 뛰어넘었지. 하지만 거기서 지낸 시간이 정확히 50년이었을까?”

“그 얘기를 왜 하는진 모르겠지만…. 체감이었을 뿐이라 확신은 못하겠네요.”

“그래. 50년은 네가 납득한 기간일 뿐이야. 게다가 그 안의 공간은 네 기억을 봤을 때 또 다른 세계와도 연결되어 있는 것 같았고, 공간 자체도 불안정했어. 알고 있나? 시간과 공간은 사실상 동일한 개념이야. 공간이 그토록 불안정한 곳에서 시간만 안정적으로 일정하게 나아가기를 기대하는 것도 우습단 뜻이지.”

“운이 좋았군요. 제가.”

세실을 만나 생존했다고밖에 볼 수 없었다. 그게 정말 운 좋은 일이었는지는 아직 의문이지만, 힐데는 귀를 쫑긋 세운 채 SF소설 같은 이야기에 집중한 아미가 있는 곳에서 진심을 털어놓지는 않았다.

속내를 읽었나. 아니면 제 양심이 찔렸을 뿐인지. 최윤은 힐데를 특유의 날카로운 눈으로 관찰하더니 차분히 말했다.

“그 외에 슈 다이아몬드처럼 포탈을 열기 쉬운 체질이 있단 사실이 밝혀지기도 했고…. 갖고만 있을 뿐이지만 다른 유전자도 있으니까. 그건 더 자유롭게 포탈을 오간 것 같던데 상황에 따라서 연구해볼 수도 있겠지.”

“안 해보신 겁니까? 의왼데요.”

“좀비 사태가 해결된 뒤론? 만지기도 좆같더라고.”

“오빠! 힐데한테 나쁜 말 쓰지 마!”

아미가 윤의 배에 퍽 잽을 꽂았다. 일반인이었으면 내장이 파열됐을 힘이었으나 윤은 꿈쩍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동생을 무시하고 투덜거렸다.

“농담이고 재가가 필요해.”

농담 치고는 하나도 재미 없는데요.

“왜 망설이는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아마 그 지독한 악연에도 불구하고 생명으로서 연민은 느낀 거겠지.

힐데는 그 추측이 비교적 가능성이 높다 여겼으나 굳이 언급하진 않았다. 아미가 재연에 대해 어디까지 아는지 몰랐기에. 윤은 어차피 처리한 놈, 이젠 진실이 밝혀져도 별 상관 없겠다 판단한 듯 조심성이 결여된 모습이었지만.

힐데는 부러 빠르게 결론내렸다.

“요약하자면 윤은 미래 인류가 기술 발전에 힘입어 다른 세계로 떠나려다 포탈 사고를 겪었고, 그 탓에 제가 자란 세계의 과거로 가서 동족으로 진화했단 거군요?”

“맞아. 당장은 환단고기 수준의 끼워 맞추기지만 기술 발전과 바퀴벌레 같은 인간의 생존력을 고려할 때 가능성이 제로는 아니라 본다.”

“환단고기는 또 뭔데요.”

“힐데한테 이상한 거 알려주지 말라고!”

이번엔 퍽이 아니라 퍽퍽퍽퍽이었다. 그래도 그걸 맞아주면 끝날 텐데 윤은 얄밉게도 주먹을 다 막아냈다.

난장판이군.

힐데는 무심코 웃다가 툭 물었다.

“그런데…. 왜 떠나려 했을까요? 지구 정도면 살기 좋은 세계인데.”

“거기까진 모르겠는데. 공룡처럼 운석을 맞았을 수도 있겠군. 웃긴 가정이지만 불행이 소리 내며 찾아오진 않으니까. 또 모르지.”

“그래도 멸망 직전의 도피인 건 확신하고요.”

최윤이 단언하는 일엔 늘 어느 정도 신빙성이 있다.

찰나. 힐데는 묘한 감정에 사로잡혔다. 무엇이든 태어난 것은 소멸하기 마련임을 알면서도. 이 행성의 미래가 제가 알던 어떤 모습이 될 수 있다 상상하니….

“그야 당연하지 않겠냐? 쌓은 기술을 다 잃었으면 계획적인 이주는 아니었겠지.”

최윤은 타인의 감상을 깔끔하게 전기톱으로 동강 내고 휘 떠나는 재주가 있다. 힐데는 눈꼬리를 접어 웃었다.

“제 고민을 항상 쓸모 없게 만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윤.”

“오냐.”

“힐데. 다음엔 나만 올겡!”

아미가 애처롭게 팔을 흔들었다. 역시 어둠만 남은 곳에도 빛은 존재하기 마련이구나. 힐데는 그 손을 절박히 맞잡았다.

“예. 아미.”

최윤은 부사수와 동생의 쿵짝을 심드렁히 외면했다.

그때였다. 다소 뜬금 없는, 하지만 무엇보다도 중요한 의문이 떠오른 것은. 어쩌면 자신보다는 인류 전체에, 아니, 제 동족에게까지 위험한….

“윤. 가정이 맞다면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의 문제 같은데요. 그러면 최윤이 제, 조상일 수도 있단 얘깁니까?”

아미가 동그란 눈을 깜빡였다. 크게 벌린 입술까지 동그래졌다. 힐데는 다행히 그녀가 완전한 원이 되기 전에 결론을 얻었다.

안도의 숨이 터져나왔다.

“아무리 생각해도 아닌 것 같습니다. 다행이죠.”

주변 동족에게선 윤의 인성이 보이지 않았다.

“까분다.”

최윤은 예의 차분한 모습으로 코웃음을 쳤다.

그날 저녁 남매는 센터 코어로 돌아갔다.

힐데는 이틀 뒤 귀환한 예현에게 그간 있었던 일을 상세히 털어놓았다. 대부가 아직 남아 있단 사실만을 기뻐하던 예현은 푸스스 웃었다.

“재밌네요. 윤의 가정이면 한 번 걸어볼 만도 하겠고요.”

“그치? 내가 더 생각해봤는데.”

힐데는 오랜만에 진지해졌다.

“만약 윤의 유전자가 생존한 게 사실이면 예현 네 유전자도 어떻게든 살아남은 걸 거야. 그래서 겨우, 중화된 거지.”

주어를 말할 필요는 없었다. 예현은 부정하는 대신 입을 가리고 소리를 삼켰다. 힐데는 간만에 대자에게 쓸모가 있었다는 사실에 즐거워졌다.

그때 예현이 부드러운 미소를 짓더니 말했다.

“자주 오라고 해야겠네요. 드물게 좋아보여요.”

아.

“미안해 하진 말고요. 저도 좋아서 하는 일이니까.”

멈칫하던 힐데는 곧 턱을 끄덕였다.

하긴 남매는 자신보다도 예현에게 더 소중할 이들이었다. 그리고 힐데는 예현이, 제가 반복해서 미안해 하는 것을 더 염려한단 사실은 알았다.

감정이란 게 마음대로 통제되진 않아서 그렇지….

그가 깔끔하게 긍정하자 예현이 느리게 손을 뻗었다. 힐데는 뺨에 닿는 따스함에 무심코 고개를 기댔다가, 예현이 두 눈을 깜빡이는 모습을 마주하고서야 그게 흔한 행동은 아님을 인식했다. 그는 반사적으로 대자에게서 떨어졌다.

“그게, 그냥 버릇이야. 미―”

“열도 이마를 대어 잰다고 듣긴 했어요. 저도 대부 곁에서 고생해볼 걸 그랬죠.”

예현은 쿡쿡 소리 내고는 다정히 속삭였다.

“애정이 당신을 살리는군요.”

파도처럼 성실하게 감정을 두드리는 목소리였다. 힐데는 어쩐지 말을 할 수 없어졌는데, 다행히 그럴 듯한 얘기를 해야 할 일도 생기진 않았다.

“힐데. 그러면.”

예현이 돌연 무언가를 깨달은 사람처럼 손뼉을 마주치곤 황당한 이야기를 시작한 까닭에.

“저를 사랑하는 게 좋겠어요.”

“…뭐?”

“맞아. 왜 그 생각을 못했지. 묘안인데.”

예현이 티 없이 환희했다. 힐데로선 처음 만난 모습이기도 했다. 그 완벽한 기쁨은 사샤의 사진을 대자에게 돌려주었을 때도 접한 적 없었던 것이었다.

“힐데. 나를 사랑하는 게 좋겠어.”

“어, 너무 갑작스럽지 않, 습니까?”

“그런가? 하긴 나도 이런 경우는 처음이긴 해. 음. 어떻게 하면 좋을지 생각해 볼게.”

이예현은 생각에 잠긴 듯 머리를 주억이다가, 힐데와 두 눈이 마주치자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말려야지 않나?

하지만 저 행복을 당장 깰 수가 없었다.

힐데는 마른침을 삼켰다.

믿는 신이 없어도 사람에겐 고해소가 필요하다.

인간은 모두 어떤 비밀을 지녔기 때문이다. 심지어 짧지 않은 생에서 가장 소중한 사람에게도 털어놓지 못할. 그 사람을 불신해서가 아니라 상대의 애정을 신뢰하기에 더욱 감출 수밖에 없는, 이기적이거나 멍청한 순간이 하나쯤은.

하여 진실을 짚자면. 최초에 자신이 힐데와의 관계를, 유년기의 한 순간도 그와 공유한 적 없음에도 대부와 대자로 명명한 데는 다소 계산적인 판단이 있었다.

물론 자신이 그와 오랜 시간을 공유하게 되기 전에, 그저 상사와 저를 안쓰럽게 여기던 부하에 불과했던 적에도 예현은 상대에게 깊은 호감을 느꼈긴 했다. 아니, 그걸 그냥 호감이라고 정의해도 될까?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어렵던 애틋함이 존재했다. 그때는, 지금도.

따라서 그에 대한 자신의 계산은 호감이 앞섰기에 드물게 사람을 상대로도 계산기를 두드리는 속도가 빨라졌던 특수 건이었다고 변명할 수도 있었다. 부모 대부분이 아마도 애정으로 자식의 이름을 지어 주먹 만한 핏덩어리를 제 것 삼듯이.

‘대자를 두고 속 편히 떠나진 못할 테니.’

그럼에도 그것은 어쨌든 계산이었다.

이예현은 생존보다 나은 죽음을 안다. 힐데를 원망하는 데 늘 실패하는 것은 그 이유에서다. 퍽 오래된 앎이었다. 어쩌면 죽음을 삶보다도 먼저 배웠을 터다. 십대의 끝무렵, 소중한 인연을 처음 얻었던 그때까지 예현의 생존은 관성 혹은 헛된 기대감에 빚을 졌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었다.

어쩌면 내일은 다를지도 몰라.

다르긴 무엇이? 돌이켜 보면 황당할 노릇이었다. 이예현은 지인을 드물게 하나둘씩 얻고 군인으로도 오랜 시간을 소모한 뒤에야 깨달았다.

사람은 남을 원하는 대로 통제할 수 없다. 그를 가능케 하는 것은 권력 혹은 호의 정도인데, 부자 사이에서 권력은 늘 이승현이 쥐고 있었고, 그는 아내를 잡아먹은 아들에게 순수한 호감을 느낄 수가 없는 입장이었기 때문이다.

어리석음으로 점철되었던 날들.

그 나날에서 완전히 빠져 나왔다고는 현재도 단언하기 힘들었지만, 예현은 이제 세상엔 어떻게 해도 안 되는 일이 존재한다는 것은 인지하고 있었다.

허나 사람은 결국 헛된 기대로 살아가는 존재인지.

그래도 힐데는 ‘다를 수’ 있어.

최초에 떠올린 상념.

그렇지 않을까? 이유는 모르겠지만 나한테 척 봐도 마음을 쓰고 있잖아. 물론 그는 주변에 본디 친절한 사람이지만 내게 조금 더….

나를 조금 더.

내가 애정을 구하는 사람이 나를 편애한다는 것. 그게 얼마나 가슴을 뛰게 하는 일인지 예현은 처음 알았다.

하여 미숙히 판단했던 것이다.

권력보단 호의가 낫겠지, 하고.

‘지금이라도 부모 역할 해주세요. 그럼.’

그 말은 퍽 덤덤히 흘러나왔다.

심지어 놀란 모습을 관찰하는 게 즐겁기도 했던 것 같은데.

그러나 차분했던 태도와는 달리, 사실 자신이 있던 상황은 아니었다. 적어도 이예현이라는 인간에 한해서는.

예현은 오십 년이 넘는 세월을 군인으로 살아왔다. 당연히 그는 생명을 살리기보단 살해하는 데 익숙했다.

모두가 이예현 최대의 구명이라 단언하는 10단계 크리처의 사살조차도, ‘누군가’를 살린 것이라기보다는 ‘인류’에 대한 위협을 핵보단 온건한 수단으로 제거해준 것에 불과했으니까.

그조차도 한 사람에게는 죽음에 갈음하는 고통이었던 모양이니….

이예현은 대부의 지기를 직접 살해했고, 소피아의 연인을 외면했으며, 재연이 보란 듯 넘겨준 사진 속 부하들을 사선으로 내몰았다.

자신이 있었을 리 없었다.

다만 그럼에도, 당시엔 어떤 확신은 있었다.

수십 년 전엔 이름은커녕 존재도 몰랐을 아이에게 관심을 들이지 못했다는 이유로 미안함을 쏟아내던 그의 다정함에.

가능할 것 같았다.

힐데는 약자에게 다감했고, 이예현은 사랑에 굶주려 있었으며, 그로 인한 기민함을 갖추었던 까닭에.

원인은 불명이었으나 전부터 제게 애정을 쏟고 싶어함은 알았다. 천치가 아니고서야 알면서도 기회를 놓칠 리가.

불행인지 다행인지 그 의문도 머지않은 미래에 풀렸다.

아담.

힐데베르트가 온 마음을 써서 키워내려 했던, 허나 총탄에 생이 으스러지고 만 그 아이.

예현과 동시대에 자라난,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았을 첫 대자.

자주 자신은 인복이 좋은 편이라 여기고 그를 떠드는 모습을 보면 본인은 모르는 듯하지만, 힐데의 인복은 그가 정을 주었던 사람들을 무의식 수준에서 그리워 하며 세상을 대하는 덕에 도출된 결과에 가까웠다.

이를 테면 아무리 기억력이 좋다 해도, 더 오랜 세월을 블랙배저라는 조직에 몸 담아온 예현보다 상세히 본부 과학자들을 꿰고 있는 것은, 힐데가 처음 정을 내주었던 인간이 이브라는 과학자였단 사실에 기반한다.

그가 아담을 완전히 잊어버렸을 때도 총기는 쓰지 못했던 것 또한.

물론 그렇다고 해서 힐데가 누군가를 타인의 대용으로 쓰는 사람이란 뜻은 아니었다. 차라리 그랬으면 그를 ‘살 만했던’ 시절에 편안하게 묶어두었겠으나….

다만 아담의 존재를 알게 되었을 때, 그가 과거의 반복을 필사적으로 피하려 들겠다는 판단에는 즉시 다다를 수 있었다. 힐데가 그 아이를 유치원 어느 반에 보낼지 고민하던 때, 폭력에 시달리던 다른 아이가 지척에 있었단 사실을 성격상 쉬이 넘기진 못하겠단 것도.

그리고 예현은 불운하게도 그의 제자를 친부로 얻어 힐데의 존재조차 모른 채 이승현의 냉대를 긴 시간 버텨내야 했지만, 다행히도 아담과 같은 시대를 헤쳐와 힐데베르트의 검술을 익히고 뜻을 이어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전쟁 고아가 넘쳐나는 배저들 가운데서도 예현만을 아픈 손가락으로 삼은 까닭.

다 자란 성인이 건넨, 대부가 되어달란 부탁을 받아들이고, 어색한 어리광도 기쁘게 감싸주었던 이유.

이예현은 납득했고, 이해는 두려움을 수면 아래로 끌어내렸다.

안도는 방심을 불러내기 마련이어서 김칫국을 마실 때도 있었다.

당신 곁에는 그토록 당신을 아끼는 사람들과 대자로 삼은 내가 있으니, 모든 일이 끝나더라도 어떻게든 전처럼 살아주지 않겠나 하는 마음.

전전긍긍하며 설렜던 소망.

허나 그가 기억을 완전히 상실했을 때조차도 생에 미련이 커 보이는 사람은 아니었다는 점에서 짐작해야 했나. 옛 친구들에게서 얻은 상처가 영혼에 치유될 수 없는 흉으로 맺혔음을.

‘대자를 두고 속 편히 떠나진 못할 테니.’

돌이켜 보면 그건 적절한 판단이 아니었다.

멋모르고 쏟아낸 바람의 투영이었을 뿐….

그 소원에 이토록 절박해질 줄 알았다면 그리 덤덤하게 말하진 못했을 텐데.

실에는 양단이 있다.

타인을 삶에 묶으려 든 순간 저도 그 삶에 묶일 수밖에 없음을 처음부터 알아야 했던 것이다.

카테고리
#2차창작
커플링
#예힐

댓글 2


  • 민첩한 새우

    “몇 시간만 써주세요. 제가 아직도 힐데에게는 아이처럼 보인다면.” < 어리광부리는 예현이 너무 좋느😋 그는 눈물을 머금고 센터 코어로 돌아가야 할 때가 있었다. 비극적인 삶이었다... "전 전생에 한국인이었나 봅니다!" "그러면 최윤이, 제 조상일 수도 있단 얘깁니까?" < 진좌 작가님 개그 제가 너무 좋아함 예현은 부정하는 대신 입을 가리고 소리를 삼켰다. 힐데는 간만에 대자에게 쓸모가 있었다는 사실에 즐거워졌다. < 이 부분 둘이 너무 예쁘고 귀여워서 한참 읽엇어요ㅠㅠ "힐데. 그러면." "저를 사랑하는 게 좋겠어요." < 🥹🥹🥹👍👍👍 "힐데. 나를 사랑하는 게 좋겠어." (중략)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둘이 존대/반말 번갈아 말하는 게 진자 너무 죠음 말잇못 코로나로 미각은 잃었지만 예힐의 맛은 잃지 않았기에 재독갑니다 마히따

  • 누워있는 개구리

    왔다.. 내 보양식..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