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랙배저 2차

[예현힐데] 파도의 행로 - 1

9디페 목표

두시전에자자 by 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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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데, 좋아해요.’

예현의 녹음은 그렇게 시작했다.

‘나도 너를 좋아해, 라고 대답하실 것 같아서 덧붙이자면, 이 좋아함은 당신의 좋아함과 다를 것이라 생각해요. 저의 좋아함은 당신에게 입 맞추고, 같은 침실을 쓰고… 어쩌면 오래도록 함께하고 싶은 좋아함이에요. …대답은 제가 돌아오고 해 주세요.’

그리고 예현은 잠시 침묵한 뒤, 퍽 쾌활한 투로 이야기한다.

‘저는 당신을 50년 넘게 기다렸는데, 힐데도 좀 기다려 봐야 공평하지 않겠어요?’

작은 목울림이 이어진다.

‘다녀올게요. 끝나고 봐요.’

녹음된 목소리가 끝났다. 

힐데는 잠든 예현의 옆에 앉아 녹음을 다시 재생한다. 

전쟁이 끝난 지, 그리고 전 블랙배저 총사령관 이예현이 모든 기억을 잃은 지 사흘이 지났다.

사태는 복잡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코어 내부적으로는 핵 스위치를 쥔 원로들이, 외부적으로는 카일을 위시한 타이탄들이 그들의 적이었다. 언제까지고 힐데베르트가 양 쪽에 관여할 수는 없었다. 그는 결국 동족을 상대해야 했다. 그때 나선 것이 예현이었다.

“타이탄은 타이탄이, 인간은 인간이. 이 편이 효율적일테니까. 인과도 맞고. 나를 믿어.”

그리고 작게 덧붙였다.

“믿어주세요.”

힐데베르트는 반대하고 싶었다. 이미 죽음을 청했던 과거가 있던 터다. 또 제 손으로 저 아이를 죽음으로 몰아가는 것은 너무 잔인했다. 대부라는 위치를 이용해서라도, 항명이라는 말을 듣더라도 예현을 말리고 싶었다. 그러나 대자는 녹음된 음성만을 남기고 홀연히 인간의 전장으로 떠났다. 힐데베르트는 힘겹게 현실을 받아들이고 제 감정을 잠시 잘라냈다. 적어도 그 아이가 청한 것은 해내야 하지 않겠는가.

그렇기에 완수했다.

타이탄의 전쟁을 끝내고 코어로 실려 돌아온 힐데베르트가 깨어난 뒤 그의 사수에게 가장 먼저 물은 것은 인간의 전쟁에 대해서였다.

“글쎄. 어떨까.”

그 애매모호한 답변에 이어지는 설명은 담백하면서도 어지러운 이야기였다. 힐데베르트에게 필요한 내용은 두 줄로 요약할 수 있었다.

이예현은 승리했다.

그러나 격전 끝에 무너지던 건물에서 빠져나오지는 못했다.

수색팀은 건물을 거의 다 치워내고서야 예현을 찾아낼 수 있었다. 그나마 마지막 순간에 몸을 웅크리고 형체변동무기로 성기게나마 자신을 감싸 피해를 완화한 것 같다고 했다. 그러나 형체변동무기의 특성상 사용자가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 경우 그 강도는 극히 약해진다. 발견되었을 당시 예현은 두부 출혈이 심각한 상태였다고 했다. 아마도 그가 정신을 잃은 후 형체변동무기가 그를 보호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잔해 같은 것에 맞은 듯 했다.

그래도, 살아있었다.

힐데베르트는 여기저기 붕대를 감은 채 예현의 손을 잡고 그 머리맡을 지켰다. 예현은 힐데베르트와 대조적으로 외상이며 골절이 멀끔하게 나아 흡사 낮잠을 자는 것도 같았다. 가늘게 이어지는 숨소리만 흰 병실을 채우고 있었다. 그 곁에서 예현의 녹음된 목소리를 들으며 힐데베르트는 기쁨, 슬픔, 낙심, 절망, 후회, 또 그 모든 것이 섞인 눈물을 흘렸다.

기다림이 정말 공평해질까 두려웠다.

네가 깨어나지 않으면 어쩌지.

손에 쥔 것을 얼마나 더 많이 잃어야……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힐데베르트는 붙들고 있던 예현의 손이 미미하게 움직이는 것을 느꼈다. 깜짝 놀라 눈물을 박박 훔치고 고개를 들자, 막 잠에서 깬 듯 몽롱한 표정의 예현이 조금씩 고개를 가누고 있었다.

“예, 예현? 정신이 들어?”

예현은 눈을 느리게 꿈뻑이더니 누운 채 주위를 둘러보았다. 힐데베르트는 저도 모르게 예현의 손을 꼭 쥐며 더듬더듬 말했다.

“예현. 예현… 다 끝났어. 너도, 나도 잘 해냈어. 네가 깨어나길 기다리고 있었어… 좀 어때? 아픈 데는? 의사를 부를까….”

힐데베르트는 말끝을 흐렸다.

예현이 주저하며 힐데의 손에서 제 손을 빼고 있었다. 

“…예현?”

힐데의 부름에도 예현은 이불을 슬금슬금 끌어당기며 벽 쪽으로 도망치듯 붙었다. 꼭 겁먹은 동물처럼…. 힐데는 비어버린 손을 제 무릎으로 당겨 두고 애써 부드럽게 말했다.

“괜찮은 거야…?”

아이의 눈이 공포로 축축해졌다. 겁에 질려 바르르 떠는 목소리가 나왔다.

“누구…예요?”

힐데베르트는 너스콜 버튼을 눌렀다.

아이는 그 후 한참을 겁먹은 채 울다가 잠들었다. 의료진이 그를 달래고 재우는 동안 힐데베르트는 복도에 나와 기계적으로 수뇌부와 윤, 아미에게 상황을 통보했다. 다들 바쁜지 메시지에 읽음 표시가 쉽게 떠오르지 않았다. 병실을 빠져나온 새뮤얼은 난처한 표정으로 예현이 전반적 기억상실을 보인다고 말했다. 힐데는 생각에 잠겼다.

승전으로 모든 것이 끝났다면 좋았겠지만 어떤 전쟁이든 뒤치다꺼리가 잔뜩 쌓이는 법이었다. 수뇌부는 최우선 목표가 사라진 조직을 수습하느라 바빴다. 윤은 숨의 해체 전 제반 사항 확인을 위해 코어 여기저기를 돌아다니고 있었고, 아미 또한 잭과 함께 수십년간 버려져 있던 땅의 수복 및 크리처 토벌로 오래 자리를 비울 예정이었다. 힐데베르트 또한 항복하거나 코어로 합류한 타이탄들에 대한 책임이 있었다. 입원한 자신을 대신하여 전권을 위임받은 요우가 린과 이고르를 말도 못하게 굴리고 있는 모양이었다. 자신도 이제 움직일만하니 슬슬 그의 무게를 덜어 주어야 한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이예현의 대부이기도 했다.

부은 눈을 하고 잠든 아이를 잠시 바라본 힐데베르트는 다시 휴대전화를 들어 짤막한 메시지를 덧붙였다.

‘당분간 제가 예현을 돌보겠습니다.’

잠에서 깬 예현은 자기 전 만큼이나 날이 서 있지는 않았다. 힐데베르트는 예현과 어느 정도의 대화를 주고받고, 식사와 진료를 도왔다. 제 이름까지도 잊어버린 대자는 힐데베르트가 알려준 그의 이름을 암기하려는 듯 한참 입 안에서 굴렸다. 그의 말투는 꽤 느릿느릿했는데, 언어적 문제가 있다기 보다는 단어를 연상해 내는 데 조금씩 시간이 걸리는 것처럼 보였다. 과거에 대한 기억은 아예 없다고 봐도 좋았다. 생활에 필요한, 예컨대 수저를 쥐거나 물을 마시거나 하는 기본적인 기억은 그나마 유지하고 있는 것 같았지만 이조차도 완벽하진 않아서, 힐데베르트는 생각지도 못한 교육—냉장고 문을 연 뒤엔 다시 닫아야 한다거나, 때에 맞는 인사 같은 것들—을 몇 가지 해야 했다. 전후의 감상에 빠질 시간 같은 것은 없었다. 아니, 실은…

예현이 잠들고 병실이 조용해지면 힐데베르트를 괴롭게 하는 기억들이 그를 감쌌다. 예전에 그를 힘들게 했던 기억들이 대개 먼 오래 전의 추억들이었다면, 지금 그를 괴롭히는 것은 바로 몇주 전의 일들이다. 쓰러지는 동족들, 피격당하는 소중한 인간들, 그 모든 일이 일어나게 된 원흉과… 그러다 끝에 다다르면 늘 그를 맞이하는 것은 자기혐오 뿐이다. 그렇게 며칠째 잠들지 못한 어느 날 밤, 문득 예현이 자신을 빤히 보고 있었다.

“…아… 깼어? 다시 자.”

“힐데는… 왜 안 자요?”

“음, 생각을 좀 하느라….”

“무슨 생각이에요?”

답할 말이 없었다.

그래서 힐데는 억지로라도 잠들기로 했다. 꿈에서 그들을 마주하는 것은 조금 더 나았다. 자고 일어나면 꽤 많은 부분을 잊어버렸기 때문에.

일주일이 지났다. 예현의 외상은 전무했고, 활력징후도 정상이었다. 새뮤얼은 이예현의 퇴원 날짜를 잡았다. 기억 상실 문제는 시간이 지나며 기억이 돌아오는 경우도 있고, 입원하여 케어한다고 나아지는 문제도 아니라는 말에 힐데베르트는 달리 반박할 수 없었다. 마지막 진료를 마치며 힐데베르트는 새뮤얼에게 제 생각(‘가뜩이나 혼란스러울 상태이니, 과거나 전쟁에 대해서는 예현이 원할 때만 알려주려고 하는데요.’)을 이야기했는데, 그도 힐데의 의견에 어느 정도 동의하는 입장이었다.

“그래도, 언젠가는 모든 것을 차근히 설명해줘야 해. 필요하다면 말야.”

아이의 고백도? 글쎄.

“알겠습니다.”

“그리고 너도 챙기고. 육아 하려면 일단 보호자가 건강해야 해. 네 팔자에 육아가 추가될 줄은 너도 몰랐지?”

“육아요?”

“거의 그런 수준 아니냐. 얼마 전에 요거트 뚜껑 따는 법 알려주는 거 내가 다 봤다.”

“아, 요거트 뚜껑 핥는 건 안 알려줬는데 하더라고요. 연쇄적으로 기억이 떠오른 걸까요. 귀여웠는데.”

“…그래… 그럴지도 모르지. 아무튼 중요하니까 다시 말하는데, 너 스스로도 잘 챙겨.”

굳이 꼭… 이라는 말이 얼굴에 둥둥 떠 있는 힐데에게 새뮤얼이 못 박았다.

“예현을 잘 돌보려면.”

그 말에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힐데베르트는 퇴원 준비를 하며 잠시 집에 들러 예현의 옷가지와 신발 따위를 챙겨 왔다. 벌써 날씨가 추워진 터라 겉옷도 잊지 않고 챙겼다. 예현은 제가 즐겨 입던 옷들을 갸웃거리며 들여다보았다. 병원복을 몇 번 갈아입어 본 터라 바지를 입을 때는 문제가 없었으나 티셔츠를 입을 때는 힐데가 요령을 알려주었다. 

예현은 병실을 나오고, 차에 타며 쉴 새 없이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안전벨트를 매어주고 사용법을 알려주자 달칵거리며 클립을 몇 번 빼내었다 끼우곤 고개를 끄덕였다. 예현은 비록 많은 것을 잊어버리긴 했어도 한 번 가르쳐준 것은 절대 잊지 않았다. 아이는 이제 조수석에 앉아 얌전히 창밖을 구경하고 있었다. 이제는 모르는 것이 공포가 아닌 호기심으로 다가오는 모양이었다. 좋은 징조라고 생각했다. 그래도 익숙한 환경에서 생활하다 보면 점점 기억이 돌아올지도… 그러나 문득 힐데베르트의 머리를 스쳐 지나가는 기억이 있었다. 어느 날 총사령관과 나누었던 이야기다. 

‘망각은 축복일 수도 있으니까.’

아이의 말이 맞았다. 꼭 모든 걸 기억해내야 할까? 어쩌면 이건 삶에 너무나도 슬픔이 많았던 예현을 위한 작은 축복이 아닐까?

“힐데.”

옆자리에서 예현이 힐데를 불렀다. 이런, 너무 생각에 빠져 있었던 모양이다.

“어, 응. 예현. 다 왔어. 이제 내리자. 안전벨트 풀고.”

“응… 풀었어요. 어디로 내려요?”

“아, 거기 옆에… 홈 보여? 여기, 이쪽이랑 같이 생겼지. 이게 손잡이인데.”

“아.”

예현이 자신 있게 손잡이를 잡곤, 병원에서 하던 대로 손잡이를 돌렸다. 콰득! 움직이면 안 되는 방향으로 움직여진 손잡이가 지점토처럼 부서져 나갔다.

“엇…….”

“아니, 여기서는 당겨야 하는 거라… 다음에 다시 연습하자. 괜찮아. 내가 밖에서 열어줄게.”

힐데는 후다닥 제 벨트를 풀고 내린 뒤 반대쪽으로 돌아 조수석 문을 열었다. 힐데가 나간 운전석 쪽으로 몸울 기울이고 있던 예현이 소리를 듣고 뒤를 돌아보았다. 예현은 꾸물꾸물 내리며 중얼거렸다.  

“당기는 문이었군요…”

“음, 당기면서 미는 거긴 한데.”

예현이 따뜻한 아이스 아메리카노 같은 말을 들은 듯한 표정으로 힐데를 쳐다보았다. 아니, 진짠데….

오래 비어 있었던 집은 서늘했다. 힐데베르트는 현관에서 예현이 신발을 벗도록 하고 거실의 불을 켰다. 따라 들어온 예현은 힐데가 조작한 스위치를 유심히 보다가, 겉옷을 벗어 현관 옷걸이에 걸어두는 힐데를 보곤 그를 따라 했다.

책은 남겨뒀지만, 신문과 같이 최근 정세를 알 수 있을 법한 것들은 치워둔 상태였다. 예현은 언어적인 부분에는 전혀 문제가 없었다. 그는 영어, 공용어, 한국어 모두 수월히 읽어냈다. 음료수나 과자에 적힌 성분표를 읽고 있기에 책을 가져다주었더니 밤새워 읽으려 들어서 조금 곤란했던 일이 있다. 아무튼 그나마 다행이었다. 힐데는 검은 가르쳐도 언어를 가르칠 자신은 전혀 없었다.

검이라… 기억하고 있을까?

예현은 이제 방마다 돌아다니며 안을 살피고 있었다. 꼭 새로운 공간을 탐색하는 고양이 같았다.

“구경하고 있어. 다 구경하면 밥 먹자.”

“네.”

“뭐 먹고 싶은 거 있어?”

최윤의 방—침대 말곤 없다—을 들여다보던 예현이 순한 눈으로 힐데를 돌아보았다.

“…저는 뭘 좋아했어요?”

아.

“글쎄, 뭐든 가리진 않았던 것 같은데… 그럼 햄버거 먹을까.”

“네.”

어쩐지 첫날은 햄버거가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언제나처럼, 맛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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