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현힐데] 산군 - 5
한의학지식전혀없습니다 저는공대나왔습니다
그 뒤 고뿔은 씻은듯이 나았다.
다음날 다시 예현의 집을 찾은 최윤은 그의 맥을 짚곤 “울체가 조금 준 것 같긴 한데… 어떻게 한 거지.” 같은 이야기를 하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힐데는 대문을 나서는 최윤을 붙잡아 받은 약에 무슨 약재가 쓰였는지 물었는데, 다 알아듣기는 어려웠으나 대충 종합하면 열을 내리는 약재가 이래저래 들어간다고 했다.
“병이 없는 자가 먹으면 몸의 열이 떨어져 픽픽 쓰러져 버릴 겝니다. 특히 시호의 비율이 높은 편이고.”
“시호?”
“간담의 화를 누르는 약재요. 뭐, 캐다 먹이시게?”
“어, 그래도 됩니까?”
“당연히 안 되지. 용도에 따라 정제 하는 방법이 다르니 말이오. 뭐, 의원이 될 생각이 있다면야 내 밑에서 5년만 수학하면—”
“예현이먹을약은제가잘챙기겠습니다오늘고생하셨고산길조심하시고다음에뵙지요.”
문이 톡 닫혔다. 제법 무례한 축객령–심지어 객이 객을 내쫓았다–인데도 무감한 얼굴에는 변화가 없었다. 다만,
‘이름을 막 부르네. 언제부터?’
의원은 그런 의문을 가질 뿐이다.
힐데는 이젠 매일같이 찾아와선 예현이 밥 먹는 양을 지켜보다가 상을 물릴 때면 최윤이 지어준 약을 들이밀었다. 윤이 맡겨두었던 약은 둥근 환약이었는데, 예현의 말에 따르면 ‘약이 입가에 가까이 오기만 해도 쓴 맛이 느껴진다’고 할 정도로 맛이 없는 듯 했다. 예현의 얼굴이 몇 번 일그러지는 것을 본 힐데는 손을 잡거나 어깨를 도닥이며 그를 달래다가, 어느날인가부터는 주전부리를 챙겨 와선 약을 삼킨 예현의 입에 쑥 넣어주곤 했다.
힐데가 예현을 달래거나 단 것을 주는 것은 꼭 아이를 대하는 것과 같았다. 그런 취급을 받을 나이는 한참을 지났음에도 어쩐지 예현은 기꺼웠다. 아비 생각이 나서 그런 것도… 없지는 않았다. 그의 아비는 서책 따위에서 묘사되는 어진 부모와는 거리가 멀었고… 아니, 아니다. 예현은 불이 붙으려 하는 제 불효막심한 생각을 저 멀리 밀어버렸다. 윤이 항상 열을 내리는 약재를 처방하는 이유가 다 여기에 있을 것이다.
어린 시절을 휩쓸고 간 가뭄같은 기억은 그의 마음을 버석하게 마른 풀밭과 같이 만들었다. 마른 풀에는 작은 마찰에도 금새 불이 붙기 마련이었고, 그 불길은 이내 몸 여기 저기로 번지기 일쑤였다. 윤의 설명으로는, 그 불이 가슴에 또아리치면 명치가 답답해지고 소화를 방해하며, 팔다리로 가면 관절에 염증이 생기고, 머리로 가면… 그의 말을 조금 순화해서 옮기자면, ‘감정도 이지도 모두 태우고 재만 들어차서는 사람이고자 하는 마음을 잃게 만든다’고 했다. 처음 진단을 내린 날이자 두 번째로 목숨을 빚진 어느 날에 윤이 했던 말이다.
‘구해준 건 고맙지만… 이건 너무 쓰지 않나.’
“오늘은 팥떡을 좀 가져왔는데….”
약을 꿀꺽 삼킨 예현은 힐데가 내미는 꾸러미를 받으려다 잠시 힐데를 빤히 보았다.
피부가 진하니 입술이 팥빛이네.
‘그래서 단 맛이 나나?’
“예현?”
힐데의 부름에 예현의 눈이 살살 휘었다.
“힐데. 이거, 얼마나 쓴지 궁금하지 않으세요?”
“…그 수는 지난번에도 부리지 않았어?”
예현은 되려 당당했다. 앉은걸음으로 슬금슬금 힐데의 곁에 가면 그는 언제나 푸스스 웃으며 그에게 몸을 기울여 주었다.
이제는 예현도 곧잘 먼저 힐데에게 입을 맞추곤 했다. 옷깃을 잡는 데도 손을 벌벌 떨었던 몇 달 전을 생각하면 장족의 발전이었다. 아니, 사실 정인이 생겼다는 자체가 더 놀라웠다. 젊은 현감은 여전히 이것이 서로간의 호의는 아닐지 의심했다. 이를 들은 윤은 벌써부터 의처를 한다는 둥 (그는 기민하게 예현과 힐데의 사이를 눈치챘다) 병증이 오만데로 튀었다는 둥 하며 이죽거렸다.
“으. 써….”
“힐데. 떡 드세요.”
“너 먹이려고 가져온 것인데….”
“윤은 반대할 걸요. 팥은 기운이 따뜻해서.”
“그래도 말야…” 힐데는 예현의 손을 잡고 주물거렸다. 윤이 내어준 약을 먹는 동안은 불편한 정도까지는 아니나 늘상 손이 찼다. “그 약이 너무 찬 기운만 있는 건 아닌가 싶어. 너무 한 쪽으로만 치우쳐도 안 좋은 게 아닐까 해서.”
“그 녀석이 더 잘 알겠지요. 나름 한양에서는 알아주는 의원 가문 출신입니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알아주는 의원 양반이 이런 데까지 내려와 있다고?”
“별난 녀석이라서요.”
“너 좋아하는 거 아니고?”
예현이 고개를 갸웃 하곤 속삭이듯 말했다.
“힐데. 질투하시는 거예요?”
“…그냥 해본 소리인데.”
“저 화내는 거 아니에요. 오히려 좀… 기쁜데요.”
“……그래?”
어째서 그런지는 잘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예현은 미소지으며 힐데가 가져온 팥떡을 그의 입에 쏙 넣어주었다. 고민에 정신이 팔려 떡을 주는대로 받아먹곤 그대로 우물거리는 정인을 보며 예현은 마음에 수목이 번무하는 것을 느꼈다. 황야에 도달하고 만 여름과 같았다.
그러나 고을의 사정은 예현의 속과는 딴판이었다. 힐데의 말대로 구름 하나 없는 날이 길어질 징조가 보였다. 예현은 미리 힐데가 알려주었던 계곡에서 물줄기를 조금 끌어오기로 했다. 며칠을 고생한 끝에 마르기 직전이었던 논밭에 다시 물기가 차기 시작했다. 예현은 힐데에게 거듭 감사를 표했다.
새로 끌어온 물길은 과연 가뭄에도 마르지 않는 듯 했는데, 다소 이상한 점은 있었다. 날씨에는 변함이 없는데 때로 물살이 끊겼다가도 어느새 다시 수위를 회복하곤 했다. 마치 누가 저 위의 계곡에서 물을 막았다 텄다 하면서 장난을 치는 것 같았다. 농사를 못 할 정도는 아니었으나 영향이 있는 건 사실이었고, 어찌 된 일인지 궁금하기도 하여 예현은 직접 수로를 점검해 보기로 마음 먹었다.
늦여름의 더위는 예현을 땀으로 흠뻑 젖게 만들었다. 그래도 최근에는 스스로 체력이 붙었다고 생각했는데 순 착각이었던 모양이다. 물길을 따라 걸으며 산을 오르던 예현은 잠시 발길을 멈추고 숨을 골랐다.
그래도 저기 보이는 바위 곁을 돌아 오르면 곧 계곡이 나올 것이다. 예현은 처음 힐데와 이곳에 오르던 기억을 떠올리며 웃었다. 따로 청하여 같이 오자고 할 것을. 그도 즐거워했을 터인데…. 그렇게 생각하며 바위 언저리에 다다라 잠시 손을 짚은 순간,
예현은 온 산을 내달리는 포효를 들었다.
어느새 그는 주저앉아 있었다. 주체할수 없는 공포에 몸이 덜덜 떨렸다. 예현은 이 소리가 무엇인지 알았다. 누구보다도 잘 알 수밖에 없었다.
어디선가 피 냄새가 나는 듯한 착각이 일었다.
‘호랑이도 있고.’
처음 만난 날 힐데가 분명 그렇게 말했었다. 왜 잊고 있었을까.
바위 위에서 대호大虎가 그를 노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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