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현힐데][유료발행] 파도의 행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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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년 9월 디페스타에서 판매되었습니다.
- 글리프 선발행
- 실물 회지는 4000원에 판매되었으며, 유료발행은 가격을 약간 낮추어 판매합니다.
- 샘플 연재분에 덧대고 수정된 부분이 꽤 있으니 시간이 괜찮으시면 처음부터 읽어주세요.
[읽기 전에]
이 2차창작은 <블랙 배저> 연재분 490화 근처에서 구상, 창작되었으며 최근 연재분의 전개와 많은 부분이 충돌합니다. ‘다른 방식으로 종전이 되었다면 어떨까’와 같은 가상 설정으로 생각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힐데, 좋아해요.’
예현의 녹음은 그렇게 시작했다.
‘나도 너를 좋아해, 라고 대답하실 것 같아서 덧붙이자면, 이 좋아함은 당신의 좋아함과 다를 것이라 생각해요. 저의 좋아함은 당신에게 입 맞추고, 같은 침실을 쓰고… 어쩌면 오래도록 함께하고 싶은 좋아함이에요. …대답은 제가 돌아오고 해 주세요.’
그리고 예현은 잠시 침묵한 뒤, 퍽 쾌활한 투로 이야기한다.
‘저는 당신을 50년 넘게 기다렸는데, 힐데도 좀 기다려 봐야 공평하지 않겠어요?’
작은 목울림이 이어진다.
‘다녀올게요. 끝나고 봐요.’
녹음된 목소리가 끝났다.
힐데는 잠든 예현의 옆에 앉아 녹음을 다시 재생한다.
전쟁이 끝난 지, 그리고 전 블랙배저 총사령관 이예현이 모든 기억을 잃은 지 사흘이 지났다.
사태는 복잡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코어 내부적으로는 핵 스위치를 쥔 원로들이, 외부적으로는 카일을 위시한 타이탄들이 그들의 적이었다. 언제까지고 힐데베르트가 홀로 양 쪽에 관여할 수는 없었다. 그는 결국 동족을 우선적으로 상대해야 했다.
그때 나선 것이 예현이었다.
“타이탄은 타이탄이, 인간은 인간이. 이 편이 효율적일테니까. 인과도 맞고. 너는 이기고 돌아오면 돼. 나를 믿어.”
그리고 작게 덧붙였다.
“믿어주세요.”
힐데베르트는 반대하고 싶었다. 이미 죽음을 청했던 과거가 있던 터다. 또 제 손으로 저 아이를 죽음으로 몰아가는 것은 너무 잔인했다. 대부라는 위치를 이용해서라도, 항명이라는 말을 듣더라도 예현을 말리고 싶었다. 그러나 대자는 녹음된 음성만을 남기고 홀연히 인간의 전장으로 떠났다. 힐데베르트는 힘겹게 현실을 받아들이고 제 감정을 잠시 잘라냈다. 적어도 그 아이가 청한 것은 해내야 하지 않겠는가.
그렇기에 완수했다.
타이탄의 전쟁을 끝내고 코어로 실려 돌아온 힐데베르트가 깨어난 뒤 그의 사수에게 가장 먼저 물은 것은 인간의 전쟁에 대해서였다.
“글쎄. 어떨까.”
그 애매모호한 답변에 이어지는 설명은 담백하면서도 어지러운 이야기였다. 힐데베르트에게 필요한 내용은 두 줄로 요약할 수 있었다.
이예현은 승리했다.
그러나 격전 끝에 무너지던 건물에서 빠져나오지는 못했다.
수색팀은 건물을 거의 다 치워내고서야 예현을 찾아낼 수 있었다. 그나마 마지막 순간에 몸을 웅크리고 형체변동무기로 성기게나마 자신을 감싸 피해를 완화한 것 같다고 했다. 그러나 형체변동무기의 특성상 사용자가 주의를 기울일 수 없는 상황에서는 그 강도는 극히 약해진다. 발견되었을 당시 예현은 두부 출혈이 심각한 상태였다. 아마도 그가 정신을 잃은 후 형체변동무기가 그를 보호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건물의 잔해가 그를 덮쳤으리라.
그래도, 살아있었다.
힐데베르트는 여기저기 붕대를 감은 채 예현의 머리맡을 지켰다. 예현은 힐데베르트와 대조적으로 외상이며 골절이 멀끔하게 나아 흡사 낮잠을 자는 것도 같았다. 가늘게 이어지는 숨소리만 흰 병실을 채우고 있었다. 그 곁에서 예현의 녹음된 목소리를 들으며 힐데베르트는 기쁨, 슬픔, 낙심, 절망, 후회, 또 그 모든 것이 섞인 눈물을 흘렸다.
기다림이 정말 공평해질까 두려웠다.
네가 깨어나지 않으면 어쩌지.
손에 쥔 것을 얼마나 더 많이 잃어야……
힐데베르트는 틈이 날 때마다 예현의 병실을 찾았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붙들고 있던 예현의 손이 미미하게 움직이는 것을 느꼈다.
깜짝 놀라 눈물을 박박 훔치고 고개를 들자, 막 잠에서 깬 듯 몽롱한 표정의 예현이 조금씩 고개를 가누고 있었다.
“예, 예현? 정신이 들어?”
예현은 눈을 느리게 꿈뻑이더니 누운 채 주위를 둘러보았다. 힐데베르트는 저도 모르게 예현의 손을 꼭 쥐며 더듬더듬 말했다.
“예현. 예현… 다 끝났어. 너도, 나도 잘 해냈어. 네가 깨어나길 기다리고 있었어… 좀 어때? 아픈 데는? 의사를 부를까….”
힐데베르트는 말끝을 흐렸다.
예현이 주저하며 힐데의 손에서 제 손을 빼고 있었다.
“…예현?”
힐데의 부름에도 예현은 이불을 슬금슬금 끌어당기며 벽 쪽으로 도망치듯 붙었다. 꼭 겁먹은 동물처럼…. 힐데는 비어버린 손을 제 무릎으로 당겨 두고 애써 부드럽게 말했다.
“괜찮은 거야…?”
아이의 눈이 공포로 축축해졌다. 겁에 질려 바르르 떠는 목소리가 나왔다.
“누구…예요?”
힐데베르트는 너스콜 버튼을 눌렀다.
아이는 그 후 한참을 겁먹은 채 울다가 잠들었다. 의료진이 그를 달래고 재우는 동안 힐데베르트는 복도에 나와 기계적으로 수뇌부와 윤, 아미에게 상황을 통보했다. 다들 바쁜지 메시지에 읽음 표시가 쉽게 떠오르지 않았다. 병실을 빠져나온 새뮤얼은 난처한 표정으로 예현이 전반적 기억상실을 보인다고 말했다. 힐데는 생각에 잠겼다.
승전으로 모든 것이 끝났다면 좋았겠지만, 어떤 전쟁이든 그 끝에는 뒤치다꺼리가 잔뜩 쌓이는 법이었다. 수뇌부는 최우선 목표가 완수된 조직을 건사하느라 바빴다. 윤은 숨의 해체 전 제반 사항 확인을 위해 코어 여기저기를 돌아다니고 있었고, 아미 또한 카이와 함께 수십년간 버려져 있던 땅의 수복 및 크리처 토벌을 위해 오래 자리를 비울 예정이었다. 그리고 힐데베르트 또한 항복하거나 코어로 합류한 타이탄들에 대한 책임이 있었다. 입원한 자신을 대신하여 전권을 위임받은 요우가 린과 이고르를 말도 못하게 굴리고 있는 모양이었다. 자신도 이제 움직일만하니 슬슬 그의 무게를 덜어 주어야 한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이예현의 대부이기도 했다.
부은 눈을 하고 잠든 아이를 잠시 바라본 힐데베르트는 다시 휴대전화를 들어 짤막한 메시지를 덧붙였다.
‘당분간 제가 예현을 돌보겠습니다.’
잠에서 깬 예현은 자기 전 만큼이나 날이 서 있지는 않았다. 힐데는 예현에게 조심스럽게 자기소개를 했다.
‘네 이름은 이예현. 성이 이, 이름은 예현이고. 그리고 나는… 너의 대부야. 당분간 너의 보호자고… 너를 보호할 거야. 그러니 겁먹지 않아도 괜찮아.’
‘예현… 이요.’
‘맞아.’
제 이름까지도 잊어버린 대자는 힐데베르트가 알려준 그의 이름을 암기하려는 듯 한참 입 안에서 굴렸다.
‘대부님은….’
‘힐데베르트 탈레브. 힐데라고 불러.’
‘……힐데.’
힐데베르트는 예현의 곁에서 대화를 나누고, 식사와 진료를 도왔다. 그의 말투는 꽤 느릿느릿했는데, 언어적 문제가 있다기 보다는 단어를 연상해 내는 데 조금씩 시간이 걸리는 것처럼 보였다. 과거에 대한 기억은 아예 없다고 봐도 좋았다. 생활에 필요한, 예컨대 수저를 쥐거나 물을 마시거나 하는 기본적인 기억은 그나마 유지하고 있는 것 같았지만 이조차도 완벽하진 않아서, 힐데베르트는 생각지도 못한 교육—냉장고 문을 연 뒤엔 다시 닫아야 한다거나, 때에 맞는 인사 같은 것들—을 몇 가지 해야 했다. 전후의 감상에 빠질 시간 같은 것은 없었다. 아니, 실은…
예현이 잠들고 병실이 조용해지면 힐데베르트를 괴롭게 하는 기억들이 그를 감쌌다. 예전에 그를 힘들게 했던 기억들이 대개 먼 오래 전의 추억들이었다면, 지금 그를 괴롭히는 것은 바로 몇주 전의 일들이다. 쓰러지는 동족들, 피격당하는 소중한 인간들, 그 모든 일이 일어나게 된 원흉과… 그러다 끝에 다다르면 늘 그를 맞이하는 것은 자기혐오 뿐이다.
그렇게 며칠째 잠들지 못한 어느 날 밤, 문득 예현이 자신을 빤히 보고 있었다.
“…아… 깼어? 다시 자.”
“대부님은… 왜 안 자요?”
“힐데라고 불러도 된다니까. 음, 생각을 좀 하느라….”
“무슨 생각이에요?”
답할 말이 없었다.
그래서 힐데는 억지로라도 잠들기로 했다. 그저 예현에게 난처한 대답을 하고 싶지 않아 그런 거였지만, 실행하고 보니 꿈에서 그들을 마주하는 편이 생각보다는 괜찮았다. 자고 일어나면 꽤 많은 부분을 잊어버렸기 때문에.
일주일이 지났다. 힐데의 외상도 이제는 다 나았다. 예현의 외상은 이미 전무했고, 활력징후도 정상이었다. 새뮤얼은 두 사람의 퇴원 날짜를 잡았다. 기억 상실증의 경우 시간이 지나며 기억이 돌아오는 경우가 많고, 입원하여 케어한다고 나아지는 문제도 아니라는 말에 힐데베르트는 달리 반박할 수 없었다. 마지막 진료를 마치며 힐데베르트는 새뮤얼에게 제 생각(‘가뜩이나 혼란스러울 상태이니, 과거나 전쟁에 대해서는 예현이 원할 때만 알려주려고 하는데요.’)을 이야기했는데, 그도 힐데의 의견에 어느 정도 동의하는 입장이었다.
“그래도, 언젠가는 모든 것을 차근히 설명해줘야 해. 필요하다면 말야.”
아이의 고백도?
글쎄.
“알겠습니다.”
“그리고 너도 챙기고. 육아 하려면 일단 보호자가 건강해야 해. 네 팔자에 육아가 추가될 줄은 너도 몰랐지?”
“육아요?”
“거의 그런 수준 아니냐. 얼마 전에 요거트 뚜껑 따는 법 알려주는 거 내가 다 봤다.”
“아, 요거트 뚜껑 핥는 건 안 알려줬는데 하더라고요. 연쇄적으로 기억이 떠오른 걸까요. 귀여웠는데.”
“…그래… 그럴지도 모르지. 아무튼 중요하니까 다시 말하는데, 너 스스로도 잘 챙겨.”
굳이 꼭… 이라는 말이 얼굴에 둥둥 떠 있는 힐데에게 새뮤얼이 못 박았다.
“예현을 잘 돌보려면.”
그 말에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힐데베르트는 퇴원 준비를 하며 잠시 집에 들러 예현의 옷가지와 신발 따위를 챙겨 왔다. 벌써 날씨가 추워진 터라 겉옷도 잊지 않고 챙겼다. 예현은 제가 즐겨 입던 옷들을 갸웃거리며 들여다보았다. 병원복을 몇 번 갈아입어 본 터라 바지를 입을 때는 문제가 없었으나 티셔츠를 입을 때는 조금 버벅거리기에 힐데가 요령을 알려주었다.
사람이 뜸한 새벽시간에 병동을 나섰다. 예현은 병실을 나오고, 차에 타며 쉴 새 없이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안전벨트를 매어주고 사용법을 알려주자 달칵거리며 클립을 몇 번 빼내었다 끼우곤 고개를 끄덕였다. 예현은 비록 많은 것을 잊어버리긴 했어도 한 번 가르쳐준 것은 절대 잊지 않았다.
아이는 이제 조수석에 앉아 얌전히 창밖을 구경하고 있었다. 이제는 모르는 것이 공포가 아닌 호기심으로 다가오는 모양이었다. 좋은 징조라고 생각했다. 그래도 익숙한 환경에서 생활하다 보면 점점 기억이 돌아올지도… 그러나 문득 힐데베르트의 머리를 스쳐 지나가는 기억이 있었다. 어느 날 총사령관과 나누었던 이야기다.
‘망각은 축복일 수도 있으니까.’
아이의 말이 맞았다. 꼭 모든 걸 기억해내야 할까?
어쩌면 이건 삶에 너무나도 슬픔이 많았던 예현을 위한 작은 축복이 아닐까?
“힐데.”
옆자리에서 예현이 힐데를 불렀다. 이런, 너무 생각에 빠져 있었던 모양이다.
“어, 응. 예현. 다 왔어. 이제 내리자. 안전벨트 풀고.”
“응… 풀었어요. 어디로 내려요?”
“아, 거기 옆에… 홈 보여? 여기, 이쪽이랑 같이 생겼지. 이게 손잡이인데.”
“아.”
예현이 자신 있게 손잡이를 잡곤, 병동에서 하던 대로 손잡이를 시계 반대 방향으로 돌렸다. 콰득! 움직이면 안 되는 방향으로 힘을 받은 손잡이가 지점토처럼 부서져 나갔다.
“…엇…….”
“아니, 여기서는 당겨야 하는 거라… 다음에 다시 연습하자. 괜찮아. 내가 밖에서 열어줄게.”
힐데는 후다닥 제 벨트를 풀고 내린 뒤 반대쪽으로 돌아 조수석 문을 열었다. 힐데가 나간 운전석 쪽으로 몸울 기울이고 있던 예현이 소리를 듣고 뒤를 돌아보았다. 예현은 꾸물꾸물 내리며 중얼거렸다.
“당기는 문이었군요…”
“음, 당기면서 미는 거긴 한데.”
예현이 따뜻한 아이스 아메리카노 같은 말을 들은 듯한 표정으로 힐데를 쳐다보았다. 아니, 진짠데….
오래 비어 있었던 집은 서늘했다. 힐데베르트는 현관에서 예현이 신발을 벗도록 하고 거실의 불을 켰다. 따라 들어온 예현은 힐데가 조작한 스위치를 유심히 보다가, 겉옷을 벗어 현관 옷걸이에 걸어두는 힐데를 보곤 그를 따라 했다.
책은 남겨뒀지만, 신문과 같이 최근 정세를 알 수 있을 법한 것들은 치워둔 상태였다. 예현은 언어적인 부분에는 전혀 문제가 없었다. 그는 영어, 공용어, 한국어 모두 수월히 읽어냈다. 음료수나 과자에 적힌 성분표를 읽고 있기에 책을 가져다주었더니 밤새워 읽으려 들어서 조금 곤란했던 일이 있다. 아무튼 그나마 다행이었다. 힐데는 검은 가르쳐도 언어를 가르칠 자신은 전혀 없었다.
검이라… 기억하고 있을까?
예현은 이제 방마다 돌아다니며 안을 살피고 있었다. 꼭 새로운 공간을 탐색하는 고양이 같았다.
“구경하고 있어. 다 구경하면 밥 먹자.”
“네.”
“뭐 먹고 싶은 거 있어?”
최윤의 방—침대 말곤 없다—을 들여다보던 예현이 순한 눈으로 힐데를 돌아보았다.
“…저는 뭘 좋아했어요?”
아.
“글쎄, 뭐든 가리진 않았던 것 같은데… 그럼 햄버거 먹을까.”
“네.”
어쩐지 첫날은 햄버거가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언제나처럼, 맛있었다.
예현이 혼자 잠들지 못하는 탓에 힐데는 예현의 방에 임시로 매트리스 하나를 옮겨 두었다.
집에 돌아온 첫날, 오두막으로 돌아가려던 힐데베르트는 맨 발로 그를 쫓아 나온 예현을 보고 기함했다. 어르고 달래 침실에 아이를 넣어둔 힐데베르트는 오두막에 돌아와 밀린 연락을 처리한 뒤 기절하듯 잠들었다. 생각보다 퇴원 절차가 피곤했던 건지 꿈 한조각도 없었다. 짧지만 깊은 잠을 자고 일어나 예현의 집에 돌아온 힐데는 한숨도 자지 못한 듯 수척한 얼굴로 소파에 옹송그리고 있는 예현을 보고 이마를 짚었다.
“혼자 있기… 너무 넓어요.”
허스키한 목소리가 더 잠겨 있었다.
오두막에 아이를 데려오는 것보단 이 곳에 있는 게 기억이 돌아오는 데에 더 도움이 되지 싶었다. 며칠 같은 방을 써 보니, 예현은 금세 잠들지만 잠귀가 예민했다. 힐데베르트가 핸드폰을 만지거나 잠깐 물이라도 마시려고 일어날라 치면 눈을 반짝 뜨기 일쑤였다. 게다가 아이는 깨면 아침까지 다시 잠들지 못했다. 힐데베르트는 엉겁결에 통잠을 자게 되었다. 하소연을 들은 카이로스는 ‘효자 아닌가!’ 같은 반응이나 해댔다.
그 밖에도 힐데베르트가 예상하지 못한 육아적 난관은 순차적으로 찾아왔다. 예를 들면 섭식 문제 같은 것이었는데, 한번 맛을 보더니 자꾸 초콜릿만 먹으려 들어서 설득에 애를 먹었다. 간식으로만 먹어야 하고, 양치질을 꼭 챙겨야 한다고 신신당부했다.
또 난처했던 것은 개인 위생 문제였다. 예현이 남겼던 녹음을 듣고 났더니 직접 씻겨준다는 건 상상을 할 수가 없어서 대충 비누칠과 헹궈내는 방법을 알려주고 욕실에 밀어 넣었는데, 물소리만 들리고 한참을 나오지 않기에 문을 두드려보니 등을 못 닦아서 몇분째 버둥거리고 있었다. 비누칠을 하는 동안은 수돗물을 꺼두라고 가르치며 하얀 등을 살살 문질러 주었다. 근육이 조금 빠진 살갗이 말랑하게 눌렸다…. 정말 잘못을 하는 기분이 들어 아이의 몸을 제대로 보지 못했다. 예현이 말은 안 했지만, 얼굴이 시뻘게졌을 것이다.
정말 새뮤얼의 말이 맞았다. 살면서 겪으리라고 생각하지 못한 종류의 일들 투성이었다.
그래도… 힐데베르트는 이 상황을 미워할 수 없었다.
그런 하나하나를 배워가면서, 예현이 정말 본 적 없을 만치 맑게 웃었기 때문이다. 짜장면을 먹다 입가에 묻힌 것에 웃고, 초승달 모양 단무지가 여러 개 쌓이는 것에 웃고, 오래된 영화를 보다가도 웃었다. 망해버린 힐데의 요리에도, 언젠가 아미가 장난으로 사두었을 것이 분명한 우스꽝스러운 스웨터에도….
한 번도 보지 못한 이십 대 언저리의 미소가 아름다웠다.
미래의 자신이 지금을 생각하며 웃으리라고 확신할 만큼….
부끄럽게도, 대자의 망각은 자신에게까지도 축복일지 모른다고, 힐데베르트는 생각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하루 종일 집에서 예현을 돌보고만 있을 순 없었다.
요우가 모든 일을 계속 떠맡을 순 없기 때문이었다. 물론 무엇보다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는 것이 바로 힐데베르트였다. 예현은… 대외적으로는 아직 혼수상태로 되어 있었다. 힐데는 예현에게 상황을 간략히 설명하며, 자신이 집을 비우는 동안에는 답답하더라도 집에서만 머물어 달라고 부탁했다. 예현은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침에 일어나 예현이 간단히 데워 먹을만한 음식을 해 두고, 아이의 배웅을 받으며 배저 본부에 마련된 임시 타이탄 사무실로 출근해 최대한 일 처리를 끝낸다. 요우는 그답게 짜증을 내면서도 나름 그를 배려하여 힐데가 결정해야 할 일들을 최소한도로 남겨두는 식으로 일을 처리했다. 덕분에 힐데베르트가 직접 일을 처리해야 할 시간은 확연히 줄었지만, 물량을 무시할 수 없어 매사가 치열했다. 절대적인 업무 시간이 짧다 보니 모든 일은 압축적으로 진행되었고, 몰두하다 보면 점심은 건너뛰기 일쑤였다. 감상에 잠길 시간 따위는 없었다.
그래도 동료들의 배려 덕에 힐데베르트는 늦어도 서너시쯤 집에 돌아올 수 있었다. 복도에서 마주친 새뮤얼은 ‘육아 단축 근무’ 같은 얘길 하며 웃었다. 그렇게 귀가해서 문을 열면 소파에서 뒹굴뒹굴하며 책을 읽거나 게임을 하던 예현이 벌떡 일어나 그를 반겼다.
퇴근 후에는 같이 가사를 하고 잡담을 하며 시간을 보냈다. 예현은 조금씩 제 과거나 시대에 대한 질문을 하기 시작했다. 힐데는 그때마다 예현이 납득할 수 있을 수준의 대답을 해 주었다.
강화신체(제 나이를 듣고 지은 표정을 찍어놨어야 했다), 인맥(“친구가… 저는 대체 어떤 인간이었던 거예요?” “그게 네 잘못은 아닐거야….”), 세 번의 전쟁(“맙소사…”), 그리고… 가족관계.
“아버지는 이승현, 어머니는 사샤.”
“이승현, 사샤… 어떤 일을 하셨어요?”
“이승현은… 그러고 보니 걔 요즘 뭐 하지? 신경을 못 썼네. 사샤는…”
그래도 사실만을 말해야지.
“생전에 어떤 일을 했는지는 잘 모르겠다. 오래 전에 세상을 떠났거든.”
아이가 커다란 눈을 깜빡였다.
“아버지는 그럼 살아 계신 거예요?”
아… 이런 부분이 있군.
아마도 제 나이 덕에 이미 부모는 죽어 없을거라 생각했을 것이다. 평범한 사람들이라면 그게 맞겠지.
“음, 맞아. 녀석도 강화신체를 받았으니까.”
“전쟁 때문에요?”
“그렇지.”
예현은 소매를 조금 만지작거리다 물었다.
“아버지를… 만나 뵈면 안 될까요?”
싫었다.
그리고 그 생각을 하고 힐데베르트는 스스로에게 조금 놀랐다. 자신이 싫고 말고가 여기서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음, 기억이 돌아온 뒤가 좋겠어.”
그래도… 그 놈은 갱생이 덜 됐다. 감히 예현을 보일 순 없다! 설령 애비라 해도!
“…네… 아무래도 걱정하시겠죠. 알겠어요.”
‘글쎄다…’ 그러나 별로 더 이야기 하고 싶은 주제가 아닌지라 힐데는 예현의 머리만 복복 쓰다듬었다.
“힐데는요?”
“나? 내 가족? 음… 난 신전에서 자랐어. 그러니까… 종교시설. 부모님이 일찍 돌아가셨거든.”
“그럼 가족이 엄청 많았겠네요.”
그런가?
“너무 오래되어서 기억이 잘 안 나.”
“음? 그럼…… 아니, 아니에요.”
“왜? 궁금하면 뭐든 물어도 돼.”
“아뇨… 이건 좀 여쭤보기 무서워서….”
“뭔데 그래?”
예현은 잠깐 눈을 굴렸다.
“…힐데는… 그럼 몇 살이에요?”
“어, 나?”
어쩐지 예현은 긴장한 듯 침을 삼키고 있었다.
“나는……”
“…….”
“…그, 미안. 진짜 기억이 안 나거든. 근데 200살은 넘었을걸….”
“…….”
“…….”
“…와.”
그 한 마디를 하곤, 예현은 얼떨떨한 표정을 하고 한참을 조용히 앉아있었다. 힐데베르트는 괜히 머쓱해져서 예현의 주변을 서성거렸다.
특이한 점이 하나 있었는데, 예현이 곧잘 게임을 즐긴다는 것이었다. 지난 3년간 본 적 없었던 모습이라 힐데베르트로서는 퍽 새로웠다. 예현은 주로 캐주얼한 퍼즐게임이나 복잡하지 않은 어드벤처 게임을 좋아했는데, 실력은 딱 꼬집어 말하기 애매했다. 머리를 써서 해결하는 거라면 손쉽게 해냈지만, 타이밍을 맞춰 누르는 것은 쥐약이었다. 그렇게 스테이지가 막혔을 때마다 예현은 게임기를 들고 힐데에게 달려왔다. 대부가 가뿐히 클리어해내는 것을 보며 예현은 연신 탄성을 내뱉었다.
“어떻게 이렇게 잘 해요?”
“버튼을 빨리 누르면 돼.”
“안 되던데….”
눈썹이 축 처지는 예현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웃었다.
“컨트롤러에 익숙하지 않아서 그래. 넌 운동신경이 좋으니까 익숙해지면 쉬울걸.”
“운동신경이… 좋았어요?”
힐데베르트는 어떤 영상을 떠올리곤 머릿속에서 흩어버린다.
“응. 너는 검도 잘 다뤘어. 총이나 체술도 뛰어났지만.”
“검… 이요? 전쟁에서 검을 썼어요?”
의문을 갖는 것이 당연하다. 열병기의 시대에 냉병기를 들고 설치는 사람? 힐데베르트는 과거에 제가 포탈에 떨어진 직후 검을 뽑을 때마다 들었던 이야기들을 기억했다.
“쓰긴 썼는데, 항상은 아니었을 걸. 확실치 않네. 1차, 2차 전쟁 땐 나는 너를 몰랐거든.”
“그러면… 힐데와 제가 만난 뒤에, 제가 검을 쓴 적이 있나요?”
아이의 질문은 또 다른 기억을 불러낸다. 음. 희미하지만 짜릿한 기억이군.
“직접 봤지. 한 번이나마 나를 이긴 적도 있어.”
예현이 말도 안 된다는 표정으로 힐데를 바라보았다.
“힐데가 해주는 이야기가 거짓말 같을 땐… 어떻게 해야 할지 정말 모르겠어요.”
“정말인데. 검을 쥐면 기억이 날지도 모르겠다.”
“진심이세요…?”
“물론이지. 나는…”
힐데베르트는 말을 고른다. 그러고 보면, 그때…
‘그럼 저 은퇴한 다음 알려주십시오. 꼭.’
그 부탁에 제대로 된 대답을 했던가?
“확신하거든.”
너도 검격을 피워낼 수 있을 거라고.
그 모든 것을 잊었을 아이는 그저 순하게 대부를 바라볼 뿐이다.
“어떤…?”
힐데베르트는 그냥 웃어보였다.
“이렇게 하자. 바쁜 게 마무리 되면… 검을 가르쳐줄게.”
그 말을 들은 예현의 얼굴에 보드랍게 미소가 물들었다.
“…힐데가 가르쳐주는 거면, 좋아요.”
그날 저녁은 렉시크 누들 기본맛 밀키트였다. 분명 레시피를 잘 따라 만든 괜찮은 한 그릇이었는데, 예현의 표정은 전자렌지에서 타버린 냉동 피자를 보았을 때보다 좋지 않았다. 이상하다, 예전에 같이 갔을 땐 잘만 먹었는데…. 기억을 잃으면서 입맛이 좀 바뀐 걸까?
새뮤얼은 순하게 앉아있는 예현과 그 옆에 얼빵하게 앉아있는 힐데베르트를 한 번씩 바라보곤 한숨을 쉬려다… 꿀꺽 삼켰다.
“검사 결과는 완전 멀쩡해. 스트레스는… 눈에 띄게 낮고. 기억은 차도가 없다고?”
“예…. 이대로 괜찮은 겁니까?”
“어쩔 수 없어. 이런 류는 회복에 몇 년씩 걸리기도 하니까. 별달리 약이 있는 것도 아니고.”
힐데베르트가 뚱한 얼굴로 새뮤얼을 쳐다보았다.
“그렇게 노려봐도 어쩔 수 없어, 녀석아.”
새뮤얼은 팔짱을 끼고 힐데베르트를 마주 노려보다가, 예현에게 고개를 돌렸다.
“예현, 잠깐 나가서 진료실 밖에 앉아있어. 힐데랑 둘이서 얘기할 게 좀 있다.”
“네? 네…”
예현은 눈을 굴리며 눈치를 보다 진료실을 나갔다. 예현의 뒷모습을 눈으로 좇던 힐데베르트는 문이 닫히자마자 의사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무슨 얘깁니까?”
“대충 마무리 되고 있지?”
무슨 이야기인지는 알아들었다.
“뭐, 그렇죠. 요샌 점심도 예현이랑 먹습니다.”
“그래. 네 스트레스 수치도 역대급으로 낮은걸 보니 그런 것 같긴 했어.”
“그거 원리가 뭡니까…?”
“너희 사수한테 물어봐라. 아무튼, 이제 슬슬 예현한테 과거 이야기를 해 주는 게 좋겠어. 예현도 안정됐고, 너도 좀 한가하고.”
“그래도 꽤 가르쳐 줬는데요.”
“지구의 과거 말고, 예현의 과거 말야. 녀석이 주인공인 이야기를 해 주란 말이다.”
새뮤얼이 팔짱을 꼈다. 예현의 과거라고… 힐데는 조금 주저했다.
“…제가 아는 만큼으로 충분합니까?”
“그래. 필터 넣지 말고. 너 예현이 끙끙 앓을만한 내용은 쏙 빼놓고 설명했지? 안 봐도 뻔해.”
반박할 수가 없었다….
“핸드폰도 돌려주고, 지인들이랑 연락도 주고받게 하고, 밖도 좀 돌아다니게 해. 그 집에서만 평생 가둬둘 게 아니면 말야. 살아가야 할 거 아니냐, 예현도.”
새뮤얼은 그렇게 말하고 손을 휘휘 저었다.
“잘 해봐라.”
축객령이었다.
진료실을 나오니 예현이 얌전히 앉아 힐데를 기다리고 있었다.
“조제과 들러야 해요?”
“아니, 오늘은 없어. 바로 돌아갈까.”
“네.”
“차로 가자. …우리 몇 층에 댔지?”
“지하 2층이에요.”
지나가는 사람들이 예현을 볼 때마다 놀란 얼굴로 인사를 했다. 예현은 힐데가 미리 일러둔 대로 그저 미소 지으며 손을 흔들었다. 힐데는 계속 곁눈질하며 그가 하는 양을 보았다. 미소가 좀 과하게 밝은 거 같은데… 아니, 저 직원 얼굴이 빨개졌잖아. 그런 생각을 하는 와중 예현이 힐데의 손을 덥썩 잡고 걸음에 맞춰 흔들기 시작했다. 경박했다….
“예현… 그, 흔들진 말고.”
“네.”
흔드는 것은 멈췄는데 잡은 손은 그대로였다. 어쩔까 하다가 손을 떼어내는 것도 좀 그래서 그냥 두었다. 그러면서 자연히 힐데베르트는 그 녹음을 떠올렸다.
기억을 잃은 너도 나를 좋아하고 있다. 그러나 그때 녹음했던 좋아함과는 또 다르겠지… 새뮤얼의 말은 틀린 것이 없었다. 예현도 살아나가야 하므로…….
내가 너의 모든 과거를 알려주면.
그땐 너는 나를 어떻게 좋아하려나.
예현에게 휴대폰을 돌려주었다.
사적 번호가 등록된 것과 공적 번호로 되어있는 것 중 어느 쪽이 나은가 잠시 고민하다가 그냥 둘 다 돌려주었다. 예현의 생체정보로 잠금을 해제하자 온갖 알림이 쏟아졌다. 알림을 확인하기에 앞서, 힐데베르트는 우선 주소록을 하나씩 짚으며 인물마다 간략한 설명을 해 주었다. 사적 번호 쪽은 등록된 번호가 몇 없어서 쉬웠는데, 공적 번호 쪽은 많아도 너무 많아서 그냥 메시지나 부재중 연락이 와 있는 사람 위주로 설명했다.
그러던 중 윤에게 전화가 왔다. 예현이 동그래진 눈으로 힐데를 쳐다보았다. 힐데는 받아보라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통화 버튼을 누르자마자 낮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야.]
“…네, 어, 응.”
[뭐야, 아직도 안 돌아왔어? 힐데. 너 거기 있냐.]
힐데의 제스처에 예현이 얼른 통화를 스피커폰으로 바꿨다.
“예에.”
[여태 뭐했냐? 똑바로 안 하지.]
힐데베르트는 억울했다….
“아니, 새뮤얼도 시간이 약이라고 했단 말입니다.”
[한 대 더 패 봤어? 보통 그걸로 고쳐지는 거 같던데.]
“윤. 사람은 그렇게 쓰면 망가집니다.”
[맞아! 오빠는 예현 오빠가 로봇인 줄 알아?]
“아미!”
반가운 목소리가 들렸다.
“아니, 어떻게 둘이 같이 있습니까?”
[힐데 안녕! 보급 때문에 잠깐 코어 안쪽으로 들렀는데, 마침 오빠가 여기로 출장 온거 있지! 예현오빠도 안녕! 잘 지냈엉?]
“어, 잘 지냈습… 지냈어.”
[뭐야? 아직 회복 중인거야? 나 자기소개 할까? 나는 최아미구, 최윤 오빠 동생이구, 오빠가 제일 예뻐한 사람인데–]
“예현은 저를 제일 예뻐했죠.”
힐데베르트가 무심코 끼어들었다.
[허어.]
[와….]
전화 너머의 반응이 심상치 않았다. 아니, 그래도 정정할 건 정정해야 하지 않겠는가? 곁에서 눈치를 살살 보던 예현이 얼른 입을 열었다.
“그, 몸 조심하고. 언제 센터코어에 한번 들러줘.”
[아미, 잭이 부른다. 가봐.]
[앗! 갈게! 예현오빠, 또 연락해!]
[이예현. 넌 끊지 말아봐.]
“응…?”
그러더니 갑자기 사수는 한국어로 뭐라 말하기 시작했다.
눈을 몇 번 깜빡인 예현은 윤의 말에 짤막짤막하게 대답했다. 대화는 제법 길게 이어졌지만, 예현의 대답은 늘 단답이었다. 그 표정이 그리 좋진 않아 보여서 힐데는 슬며시 예현의 어깨를 짚었다. 아이는 그를 올려보았다. 어쩐지… 눈빛이 조금 슬픈 것 같았다.
윤이 뭐라고 더 말하던 중, 예현이 갑자기 공용어로 말했다.
“알겠어. 이제 끊을게.”
[그래. 연락해라.]
윤도 공용어로 대답했다. 예현이 통화 종료를 터치하는 것을 보며 힐데는 눈을 굴렸다.
“뭐… 윤이 괴롭힌 거 아니지?”
“그런 건 아니고….”
예현은 잠시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가 길게 내쉬곤 힐데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힐데. 괜찮으시면… 제 과거 이야기 해주실래요?”
예현의 단단한 마음이 투명한 눈동자 안에 비쳐 보였다. 아마도 사수의 말에 아이가 어떤 결심을 한 것이리라. 그래, 윤은 예현을 가장 잘 아는 사람 중 하나니까….
“…그래.”
하지만 힐데베르트도 나름 대자를 잘 안다. 그 애에 대한 것이라면 절대 잊지 않으니.
궁금한게 있으면 바로 물어봐야 한다고 당부를 먼저 한 뒤, 알고 있는 만큼 가감 없이 이야기를 시작했다. 예현의 시점에서 시간순으로 이야기하려다 보니 가장 처음은 부모에 대한 이야기가 되었다. 승현에 대한 이야기가 길어질 수밖에 없었다. 아아, 나의 친애하는 후레제자. 고작 스물 다섯에 아비라는 놈에게 끌려온 뒤 온갖 고초를 거치고 결국 적진의 선봉을 베어넘겨 첫 전쟁을 끝낸 것이 너라는 이야기를 했다. 아이는 잠자코 앉아 긴 이야기를 꼭꼭 씹어 삼켰다.
“내 검을 넘기고, 그걸 네가 들고… 끔찍한 부탁이었다고 생각해. 그것도 알지도 못하는, 앞날이 밝을 청년에게 말야. 아마 전쟁 때문에 머리가 어떻게 됐던 것 같기도… 아무튼, 그걸로 네가 레이를 꺾었고… 너는 전쟁영웅이 되었지.”
“힐데.”
처음으로 예현이 입을 열었다. 힐데는 얼른 하던 말을 멈췄다. 사과하려나? 과거의 네가 항상 그랬던 것처럼? 너의 잘못은 절대 없다고 대답할 생각이었다. 그것은 내가 사주한 일이었다고.
“괜찮아요?”
그러나 예현은 전혀 다른 것을 물었다.
“…음, 뭐가?”
“힐데의… 친구가 죽었던 이야기잖아요. 힐데가 너무 힘들면 다음에 계속 이야기해 주셔도 괜찮아요.”
눈을 깜빡였다. 슬픈가? 힐데는 제 마음을 들여다보았다. 예전에는 제 검에 멈칫한 레이를 생각할 때마다 가슴이 미어지는 것만 같았다. 걷잡을 수 없이 울거나 잠을 이루지 못한 날도 많았다. 그런데 지금은… 글쎄. 그 일이 슬프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꽤 덤덤하게 말할 수 있게 되었다. 시간이 지나 감정이 흐려진 걸까? 아무튼 생각을 마친 힐데베르트는 대답했다.
“힘들지 않아.”
“정말요?”
“응. 나도 좀 신기하네. 예전엔 많이 괴로웠었는데.”
“…다행이에요. 계속 이야기 해 주세요.”
이야기는 흘러갔다. 자신은 지나가듯 들어 잘 알지는 못하는 두 번째 전쟁 이야기, 총사령관 취임, 그리고 시간이 흘러… 자신을 거둔 것.
“윤이 개족보라고 했어.”
“푸흡.”
“그땐 네 존댓말이 정말이지, 너무 당황스러웠는데….”
“그래요?”
예현이 키득키득 웃었다.
“그럼 지금의 내가 반말을 하면 어때?”
“어.”
힐데는 잠시 말이 없다가, 팔을 슥슥 문질렀다.
“지금 좀 소름이…”
“아하하하.”
“아니, 지금 그러면 내, 제가 힘없는 전 총사령관님을 돌보고 먹이고…”
“괜찮아요. 그냥 하던 대로 하세요.”
“식은땀 났어….”
이런저런 이야기가 이어졌다. 송년회에서 보드카를 먹였다던가. TF를 만들었던 이야기, 재연, 희토류 전쟁, 전염병, 퇴임… 그리고 3차 전쟁.
너의 마지막 전쟁에 대해 이야기했다.
가슴이 저려왔다. 먼 과거의 좋았던 기억들이 아닌 바로 몇 주 전의 슬픈 기억이 그를 힘들게 했다. 힐데베르트는 겨우 자신을 다독이며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발발의 전조, 자신의 잠적, 핵 버튼, 책임소재와 인과. 다만…
그 녹음에 대해서는 말할 수가 없었다.
힐데베르트는 제 비겁함을 인정했다. 자신은 당장 예현에게 대답을 할 수 없다. 변명하자면 슬퍼할 새도 없이 너를 돌보느라 바빴다. 어찌나 바빴는지 네가 남긴 녹음을 들은 것 조차도 예현의 병실에서가 마지막이었다. 그 녹음은 네가 아무도 모르게 나에게 전해준 것이었다. 정말이지 너와 나밖에 모르는 일이다. 그 존재를 아는 사람이 하나 쯤 줄어든대도, 너는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힐데베르트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리고 너는 결국 승리해서, 살아 돌아왔지.”
예현은 제 볼을 문지르며 가만히 있었다. 생각에 잠긴 듯했다.
“혹시… 제가 다른 말을 남기진 않았나요?”
심장이 덜컥거리는 기분이 들었다.
“다른 말이라면, 어떤?”
“그냥, 그러니까… 힐데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제가 당신을 줄곧… 꽤 걱정했던 것 같아서요.”
예현은 제 손끝을 바라보며 느릿느릿 말했다.
“저라면… 당신을 안심시키고 싶었을 것 같아서.”
“글쎄….”
힐데베르트는 고개를 한번 까딱 기울였다.
“없었던 것 같은데.”
그리고 무난하게 덧붙인다.
“당시에 너와 함께 있었던 사람들에게 한 번 물어볼게.”
“…네. 고맙습니다.”
예현은 가볍게 고개를 꾸벅 숙였다. 힐데베르트는 무심코 그 정수리를 슥슥 쓰다듬었다. 힐데의 손을 피하지 않고 얌전히 앉아있던 아이가 어, 하는 소리를 냈다.
“힐데. 눈 내려요.”
“어, 정말이네.”
통창 밖, 긴 이야기 끝에 어느 새 해가 진 하늘에 눈발이 흩날리고 있었다.
어둑해진 바깥이 온통 희었다. 빙룡을 보러 갔을 때에 평생치 눈을 보았다고 생각했건만 예현과 단 둘이 보는 눈은 또 새로웠다. 그러고 보면 예현은 겨울에 태어났었지….
예현이 슬쩍 창밖을 보는 힐데의 손을 잡아 왔다. 하얀 손이 차서, 힐데베르트는 그 손을 꼭 쥐어 주었다. 둘은 그렇게 창 밖에 나리는 눈을 보며 오래 앉아 있었다.
“힐데. 저… 오늘은 혼자 잘게요. 해주신 이야기에 대해 생각을 좀 하고 싶어요. 정리도 하고.”
한참이 지나 입을 연 예현의 목소리가 조금 잠겨있었다.
“그래… 이야기 듣느라 고생했어. 즐거운 이야기도 아니었는데.”
“힐데야말로 고생하셨어요. 음, 저녁 챙겨 드시고요.”
“너는?”
“저는… 지금은 생각이 없어서.”
“그래.”
자리에서 일어나 천천히 제 방으로 들어가는 예현을 보며 힐데베르트는 어쩐지 아이가 안쓰러워 닫힌 문을 한참 바라보았다. 언젠가의 밤처럼 아이가 소리 없이 울까 귀 기울였지만 그런 기색은 없었다.
그저 눈 내리는 소리만 겨울밤을 채웠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아무리 문을 두드려도 예현은 대답하지 않았다.
한참 고민 끝에 문을 열었을 땐 안은 이미 비어있었다. 믿기질 않아서 이불 속이며 제가 쓰던 매트리스까지 뒤집어 보았지만 예현은 없었다. 대체 어떻게 된 거지? 거실에는 제가 밤새도록 있었는데… 당황하여 두리번거리던 힐데베르트의 눈에 책상 위의 작은 종이 하나가 눈에 띄었다. 힐데베르트는 반듯하게 접혀있는 그것을 집어 들어 펼쳤다. 곧 힐데의 눈이 크게 뜨였다.
짧은 내용이……
…….
힐데베르트는 그것을 구겨 버릴 뻔한 것을 간신히 참았다.
그는 눈을 질끈 감고 눈가를 문질렀다가 떴다. 금빛 눈동자는 처음 방에 들어올 때와 달리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는 서랍 안을 확인하고, 방 한 켠의 옷장을 들쑤셨다. 제가 예현의 방에 돌려 두었던 물건 몇 가지가 없어진 것을 확인한 힐데베르트는 마지막으로 예현의 방에 단 하나 나 있는 창문을 열어 바깥을 둘러보았다. 밤새 내린 눈이 소복이 쌓여있었으나 발자국은 없었다.
차가운 겨울바람에 흰 머리카락이 한참 흩날렸다. 힐데베르트는 창문을 다시 닫고… 그대로 그 앞에 주저앉았다.
습관에 대해 생각한다.
이것은 자신의 나쁜 습관이다. 꼭 잃어야만 얼마나 사랑했는지 알게 되는, 곁에 있을 때엔 깨닫지를 못하는 멍청한 습관.
얼마간 이마를 짚고 있던 힐데베르트는 벽을 짚고 일어났다. 그리고 망설임 없는 걸음으로 필요한 것을 챙겨 집을 나섰다.
현관에 걸려있던 예현의 외투가 바람에 조금 흔들리다 멈췄다.
댓글 3
몰입하는 족제비 구매자
아ㅜㅜㅠ 예현이 첨부터 기억 잃은 적 없다는 걸 알고 나서 읽으니까 예현이 애잔하고,,ㅋㅋ 연기력 좋네,,싶고 ㅋㅋ큐ㅠㅠㅠㅠ '요거트 뚜껑 핥는 건 안 알려줬는데 하더라고요' <습관적으로 핥은 걸지 핥고 나서 속으로 흠칫하지 않았을지? 싶은 생각도 들고요ㅠㅠㅠㅠㅋㅋㅋㅋㅋ 애썼다 예현아.. 새뮤얼도 예현이 연기하고 있단 걸 눈치 못 챘을까요? 왠지 눈치챘을 것 같기도 하고요🤔 안 혼났으려나..ㅋ큐ㅠㅠ ㅠㅠ둘은 진지할텐데 자꾸 기억 잃은 적 없고 첨부터 연기였다...는 게 신경쓰여서 자꾸 웃김.. 차 문 손잡이 부수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한번 맛을 보더니 자꾸 초콜릿만 먹으려 들어서' '대충 알려주고 욕실에 밀어 넣었는데, 물소리만 들려' '등을 못 닦아서 몇분째 버둥' 아ㅜㅠㅠㅠ예현아....... '예현이 말은 안 했지만, 얼굴이 시뻘개졌을 것이다.' < 예현이 얼굴이 더 시뻘겋지 않았을까.....ㅠㅠ... "친구가... 저는 대체 어떤 인간이었던 거예요?" < 흐엉어ㅋ큐큐ㅠㅠㅠㅠ 예현이 힐데의 손을 덥썩 잡고 걸음에 맞춰 흔들기 시작했다. < ㅠㅠㅠㅠㅠㅠ예현아.............. "혹시... 제가 다른 말을 남기진 않았나요?" < 예현아............🥲 이게 마지막 기회였을텐데 힐데야.. "너의 노력으로 내가 여기 있어." < 😭😭😭 또 여기서 울어버리다... ㅠㅠ 초~중반까지는 예현의 기억상실 연기를 보며 애잔함과..ㅋㅋ 웃음을 참을 수 없었는데 후반은 다시 읽어도 왕창 몰입해서 읽게 돼요 🥲🥲 짱..최고..!!
귀여운 도마뱀 구매자
하 식님 올려주신 후기?스포? 보고 다시 보니까 정말........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와 이러고도 기억을 잃은 적이 없는 거라고??? 정말 믿기지 않고 역시 총사령관은 아무나 하는 게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되네요......ㅋㅋㅋㅋㅋㅋ 분명 처음 읽을 땐 🥺🥺 이런 느낌으로 앞부분을 읽었는데 두번째엔 자꾸 아냐 힐데야 지금 그럴 때가 아니야 하고 머리 부여잡고 있어요...
몰입하는 족제비 구매자
ㅠ ㅠ 통판 놓쳐서 꺼이꺼이 울고 있으면 작가님께서 선발행을 해주신다...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큰절 😢 원작에선 힐데가 녹음을 남기고 떠난 후 기억을 읽은 채로 돌아왔는데 이제 반대의 차례군요 1, 2편 보고 너무 기대돼서 3편은 부러 묵혀두고 있었는데 드디어🥹🥹 요거트 뚜껑 핥는 건 안 알려줬는데 하더라고요. < 아무래도 국룰이라 몸에 배지 않았을지 ㅋㅋ 그나저나 나이 80먹고도 요거트 뚜껑 핥는 아기미소년총사령관 실존..너무 귀엽다 예현은 비록 많은 것을 잊어버리긴 했어도 한 번 가르쳐준 것은 절대 잊지 않았다. < 우리(?) 아기 천잰가봐.. 아이의 말이 맞았다. 꼭 모든 걸 기억해내야 할까? 어쩌면 이건 삶에 너무나도 슬픔이 많았던 예현을 위한 작은 축복이 아닐까? 😢😢😭😭😭 "음, 당기면서 미는 거긴 한데." 예현이 따뜻한 아이스 아메리카노 같은 말을 들은 듯한 표정으로 < 아 한 번도 생각 안 해봤었는데 그르네 따.아.아. 같은 느낌이네요 ㅋㅋㅋㅋ 겉옷을 벗어 현관 옷걸이에 걸어두는 힐데를 보곤 그를 따라 했다. < 아...너무 귀엽다 대부 행동 고대로 따라하는 대자 너무 귀여워용 어쩐지 첫알은 햄버거가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 첫날은 햄버거... 친구가...저는 대체 어떤 인간이었던 거예요? "그게 네 잘못은 아닐거야...." < 아ㅠㅠㅠㅠㅠㅋㅋㅋㅋ 이건 최윤이 잘못했다(??? "아버지를... 만나 뵈면 안 될까요?" < 오우...큰일난다 예현아 아들이 혼수상태에서 기억상실인 채로 깨어났는데 한 번도 안 찾아왔단 건............. "...와." 그 한마디를 하곤, 예현은 얼떨떨한 표정을 하고 한참을 조용히 있었다. < ㅋㅋㅋㅋㅋㅋㅋㅋ 아무래도...본인 나이도 듣고 엄청 놀랐을텐데 대부 나이가 자기보다 2배가 머야 그 이상 차이난다면....놀랄 수밖에 ㅠㅠㅠㅋㅋㅋ 스테이지가 막혔을 때마다 예현은 게임기를 들고 힐데에게 달려왔다. < ㅠㅠㅠㅠ 너무 귀여워ㅠㅠㅠ "버튼을 빨리 누르면 돼." < 그게 먼데...그거 어떻게 하는 건데...... "...힐데가 가르쳐주는 거면, 좋아요." < 힐데바라기..순둥이🥺 너무 귀여워요 렉누 기본맛 밀키트 이거 힐데말고 수요가 있을까요? 예현의 표정은 전자렌지에서 타버린 냉동 피자를 보았을 때보다 좋지 않았다. < 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그와중에 냉동 피자 태운 적도 있냐고 ㅠㅠㅠㅠ 이상하다, 예전에 같이 갔을 땐 잘만 먹었는데 < 대자가 대부를 정말 많이 사랑하는구나 미소가 좀 과하게 밝은 것 같은데... 아니, 저 직원 얼굴이 빨개졌잖아. < 힐데야 맘의 소리에 좀더 집중해봐 사심이 아예 없을가? 질투하니? 예현이 힐데의 손을 덥썩 잡고 걸음에 맞춰 흔들기 시작했다. < 아 너무 귀여워 소리지름 ㅠㅠㅠㅠ 대부랑 함께 있어서 행복한가바 [한 대 더 패 봤어? 보통 그걸로 고쳐지는 거 같던데.] < 이것이 소패식 치료법 ? 오빠가 제일 예뻐한 사람인데 < 아미 본인이 사랑받는 거 잘 알고 있고 그걸 말할 수도 있다는 게 너무 좋어요 "예현은 저를 제일 예뻐했죠." < 와......... 아아, 나의 친애하는 후레제자. < 아ㅠㅜㅜ 커피 딱 마시는 순간이었는데 바로 뿜을 뻔했어욬ㅋㅋㅋㅋ "힐데." "괜찮아요?" "힐데의... 친구가 죽었던 이야기잖아요." < 기억을 잃어도 너무 다정한 아이야....🥺 "글쎄...." "없었던 것 같은데." < 아이고 이 영감아........... 힐데 무슨 예현이 숨만 쉬어도 예뻐하면서 정수리 복복 쓰다듬는 것 같은데욬ㅋㅋㅋㅋㅋ 복복복 그가 가장 자주 본 바다는 종이와 나무 냄새 속에 있었다. 어느 날 대부를 붙잡으려 했던 그 서재에. 바다란 그런 것이다. 있는 힘껏 파도를 뻗어 닿으려 하지만 그 뿐이다. 당신이 날아간 곳까지는 닿을 수 없다. 물자국만 남기고 도리어 멀어질 뿐... < 이 부분에서 예전에 올리셨던 파도 단문이 떠올라서 다시 읽고 왔는데 역쉬🥺 작가님이 표현하는 예현의 파도가 너무 좋아요 "힐데." "저 여기 있어요." < ㅠㅠㅠㅠㅠㅠㅠㅠㅠ 계속 숨 못 쉬고 읽고 있어요 ....... 착실히 복수를 하러 온 걸까? 내가 당신 대자를 죽였잖아. < 하................. "그건 내 노력이 아니었어. 예현." "너의 노력으로 내가 여기 있어." < 눈에 힘주고 참고 있다가 여기서 울고 있어요 ㅠㅠㅠㅠ "...같이 돌아가요, 힐데." 🥺🥺🥺🥺 너무 좋아요.......정말 제목같은 글이었어요 파도의 행로.... 아 너무 좋다 정말 예힐의 정수 예힐의 바이블 너무 벅차오름...가섬이 찌르르해요 과몰입이 되 겨울바다 가고 싶어지는 글이에요 잘 읽었습니다 두고두고 떠오를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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