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랙배저-윤힐데

[윤힐데] 장송 상편

* 플랫폼 이슈로 원작 재독을 못하고 있어 캐해석 / 설정 오류가 심한 부분 양해 부탁드립니다

태풍에 헛간 지붕 한 켠이 폭삭 가라앉았다.

건물이란 게 자연 재해로 무너지기도 하는군. 십칠 년 인생에서 처음으로 이런 사태를 겪은 힐데는 말을 잃었다. 작년에 지을 때 마을 분들도 도와주셨는데. 튼튼하게 쌓아 올리려고 스승님과도 갖은 애를 쓰지 않았던가? 헌데 이토록 허무하게….

힐데는 위가 쓰려오는 감각에 명치를 살살 눌렀다.

그러나 이미 가라앉은 건물이다. 어쩔 텐가. 그는 짧은 고민 끝에 상황을 되도록 받아들이기로 했다. 어찌 보면 그 난리에도 망가진 게 지붕뿐이어서 다행인지도 모른다. 헛간을 기초부터 다시 올리는 것보단 낫겠지.

낫지 않았다.

마음을 크게 먹고 안쪽으로 들어가자 둥글게 모여 체온을 보존중인 양들이 보였다. 메에. 내는 소리는 공포에 질린 울음처럼 들리기도 했다. 무리에서 몇 마리가 떨어져 나오더니 곁을 둘러 쌌다. 힐데는 그 아이들을 도닥이며 상황을 살폈다.

물을 먹다 못해 발목까지 잠기는 진흙이 된 바닥을 보아 하니 헛간은 완전히 다시 지어야 할 판이었다. 습기에 절었을 다른 목재도 언제 쓰러질지 몰랐다. 이미 무너지고 빠개진 내부 자재가 여기저기에 널려 있었다.

지붕 잔해를 조금 치우자 양 시체도 둘 나왔다. 

하….

힐데는 울적해졌다.

신관님들이 말릴 때 뿌리치고 달려와서 지켜줄 걸 그랬다. 물론 힐데도 인명이 더 소중하다는 그분들의 주장은 이해했다. 하지만 그들보다 직접 양을 키워온 입장에서 상실감도 자연히 들었다. 적어도 더 안전한 모서리로 인솔할 수 있었다면.

[으르르―.]

힐데베르트는 검 손잡이를 쥐었다.

최근 검술 연습에 심취해 있어 검을 패용하고 다녀 다행이었다. 힐데는 감각을 예리하게 돋우고 짐승의 울음 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조용히 다가갔다. 헛간 특유의 악취와 물비린내 사이로 철내음의 존재감도 뚜렷해졌다. 대체 몇 마리를 해쳤는지.

기분이 가라앉자 잡념도 사라졌다.

힐데는 벽처럼 길을 막은 판자중에서도 특히 얇아 보이는 것을 걷어차자마자 발검했다. 그리고―

스륵!

시야가 전환되는 것보다 빠르게 베었으나.

검신에 묵직함이 전혀 실리지 않았다. 체중이 있는 생명은커녕 바람만 가른 것이다. 기습을 예상했는데. 힐데는 주변을 둘러보다 깨달았다.

피비린내는 거의가 늑대들의 것이었다.

먹이를 사냥하러 왔는지, 태풍을 피할 셈이었는지. 어쨌든 여기 도착한 늑대들은 불행히도 헛간 구석이 무너지면서 명을 달리 한 모양이었다. 성인 남성만큼 거대한 짐승 시체가 넷. 겨우 생존한 하나만 다리를 절뚝이며 자신을 노려보고 있었다.

죽여야지.

힐데베르트는 판단했다.

늑대는 양의 포식자다. 바보도 부정 못할 진실이다. 야생 짐승을 사정이 안타깝게 됐다는 이유만으로 돌려 보냈다간 후회할 일이 생길 터다.

확신하면서, 힐데는 외곽쪽 벽을 검으로 베어냈다.

서걱!

퉁, 투둥.

주먹 만한 두께의 목재들이 단면이 깔끔하게 절단되어 무너졌다. 갑작스럽게 생긴 활로에선 태양빛이 무감히도 쏟아져내렸다.

늑대는 빛무리가 자극적이었는지 즉시 탈출하진 못하고 눈을 깜빡였다. 신체 반응으로 눈물만 줄줄 흘리면서.

힐데는 오랜 고민 끝에 말했다.

“…어제는 서로 힘든 밤이었지.”

튼튼한 신전으로 도망 온 마을 사람들을 돌보느라 자신도 정신 없는 하루를 보냈다. 이튿날 새벽에야 짬이 나 양들 상태도 확인하러 온 터였다. 허나 제 고생이 하루아침에 온가족을 상실한 저놈 것만 했으랴. 늑대들이 가족으로 무리를 이룸은 상식이었다.

벨 의욕이 들지 않았다. 도저히.

“이번만 봐줄 테니 다신 찾아오지 마라.”

힐데는 쓰게 웃으며 출구에서 몇 걸음 물러났다. 그리고 꾸준히 관리해 날이 시퍼런 검을 흔들며 보여주고는 외쳤다.

“또 내 양들을 노리면 그땐 진짜 죽은 목숨이다!”

충고를 이해하진 못했겠지만, 늑대는 그래도 힐데베르트의 말을 하나는 이행했다. 눈이 빛에 적응하자마자 헛간을 벗어난 것이다.

왼발을 절뚝거리며.

나름대로 선행을 베풀었는데 뒷맛이 찝찝하기도 처음이었다. 저놈 다리가 나아서 다시 양을 사냥하러 와도 곤란했고, 낫지 못한다면 그것대로 안타까웠다. 뜀박질이 성치 않은 늑대를 어느 무리가 받아들이며 무리 없는 늑대가 홀로 생존할 순 있으련지.

생존이라.

평소 느긋한 성미로, 인생에 대한 고민이라곤 좀체 하질 않아 양육자들을 답답하게 했던 그가 처음으로 삶에 대해 생각해볼 때였다.

[메에에―.]

양 한 마리가 지척까지 다가왔다. 진흙이 된 땅을 푹푹 밟으며, 빗물로 젖은 털에서는 쿰쿰한 냄새를 풍기면서.

힐데는 아이를 힘껏 끌어안았다.

헛간에 들어왔을 때 얼핏 체크하긴 했지만, 살아 있어서 정말 다행이었다! 힐데는 이오의 뺨에 짧게 입술을 맞추었다. 이오는 힐데가 맡아본 양중에서도 유독 아끼는 아이였다. 물론 편애를 들키면 안 되겠지만 양들은 멍청해서 그것까진 모를 테니 괜찮다.

아마도….

어쨌든 이오는 힐데가 난생 처음으로 탄생을 지켜본 양이었다. 그 이름도 자신이 지어주었고, 최초로 털을 깎아준 사람도 힐데였다. 다만 그것은 아름답기만한 기억은 아니었는데, 이오가 뒷발로 저를 걷어찬 기억이 선명한 까닭이다. 아무리 서툴렀다지만!

그래도 힐데는 이오를 애정했다.

짝사랑도 사랑이라고들 하니까.

힐데는 이오의 눈을 비롯해서 건강 상태를 가볍게 확인했다. 힐데베르트 탈레브도 이제 열일곱 생일을 넘긴 만큼, 이오는 양중에서도 늙은 축에 속했으나 다행히 아직은 건강했다. 태풍 때문에 무슨 일이라도 생겼을까봐 걱정했는데.

비록 입은 여전히 친구의 이름도 부르지 못할 만큼 멍청했지만 눈은 다른 양들과 비교하면 총기가 있어 보였다. 울음 소리도 평소 그대로고. 피부병이 생길 수 있으니 빗물에 흠뻑 젖은 겉 털만 살짝 깎아주면 될 성싶었다.

만족한 힐데는 양 머리를 쓰다듬으며 추억 풀이를 했다. 아끼던 친구가 노년에 접어들면 좋았던 날만을 돌이키게 된다는 것도 힐데는 이오를 통해 배웠다.

“그땐 네가 멍청하다고만 생각했는데.”

[메에―.]

“지금 보면 양이랑 인간은 목 구조부터 다를 테니 말을 못하는 게 당연한 것 같아. 그래도 너 내 이름은 알지?”

[메에에―.]

“…힐데베르트.”

[메―.]

“힐, 데.”

이오는 답이 귀찮아졌는지 반응조차 하지 않았다. 이거 모르는 것 같은데. 불길함을 느낀 힐데는 양의 얼굴을 두 손바닥으로 붙잡고 말했다.

“이오.”

[메―.]

“오이.”

[메에―.]

‘메’와 ‘메에’의 차이점은 무엇일까. 아무리 그래도 제 이름은 알겠지? 허나 되짚을수록 ‘메’나 ‘메에’나 거기서 거기인 것 같았다.

“…똑똑한 게 뭐가 중요하겠어. 건강이 제일이지.”

힐데베르트 탈레브는 열일곱에 이르러 제가 기른 양이 천재는 아니었음을 다시 인정했다. 어떤 인정엔 사실이라도 각오가 필요함을 또 한 번 이해하면서.

그는 다른 양의 상태도 확인한 뒤 헛간을 나왔다.

날씨는 어제의 난리가 거짓이었다는 양 청명했다. 습기가 거둬진 바람이 힐데베르트의 두 뺨을 사뿐히 어루만지고 지나갔다. 힐데는 그 숨결을 좇아 언덕을 올라갔다. 부드러운 것이 더 강하다던가. 양들 먹이로 쓰여온 넓은 목초지는 형태만은 비교적 멀쩡했다.

꺾인 것은 신목이었다.

본 기둥은 평소처럼 우뚝 서 있었으되 잔 가지가 몇 대 부러져 있었다. 힐데는 잠깐 놀랐지만 곧 나무 주변을 돌면서 파손된 가지들을 주웠다. 신목을 해한 자는 저주받는다고들 하나, 이번에 그를 위협한 이는 사람이 아닌 자연이니 이 정도 접근은 괜찮을 듯했다.

힐데는 가장 두껍고 긴 나뭇가지를 쥐고 흔들면서 이것을 지팡이로 만들 수 있을지 재보았다. 단단한 게 시도는 해볼 만할 것 같은데.

‘힐데. 그건 기적이었다.’

문득 지팡이를 선물하고픈 노인이 수십 번은 언급했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보통 사람은 절대 그렇게 할 수 없어. 네 어머님의 은혜를 잊지 말고, 하루하루 성실히 살아가야 한다!’

아무렴요.

그가 키득거렸다.

힐데는 본인도 제 성격이 안온함을 더 선호한다는 것은 알았으나, 꼬장꼬장한 원리원칙주의자인 그녀 곁에서 잔소리를 다발로 듣고 자라난 덕에 최소한의 책임감은 갖추지 않았나 스스로를 평하는 편이었다. 실제로 양도 신목도 제일 먼저 수습하려고 찾아오지 않았는가.

게다가 그는 인생의 재미를 돋워줄 취미 또한 이른 나이에 발견한 편이었다. 신목을 경외하는, 동시에 그 저주를 피하고 싶어 하는 분위기 덕에 사람들이 찾지 않는 언덕에서 검술 연습을 하노라면 반나절이 훌쩍 지나가곤 했던 것이다.

더욱이 주기적으로 성가도 배우거나 불러야 했고, 날마다 양을 몰고 돌보다 보면 하루가 짧게 느껴질 때가 많았다.

힐데는 누구보다 성실하게 살아왔으며.

이런 생활에 더 없이 만족하고 있었다.

‘아이가 그리 뛰어난가?’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제 검술은 쓸모를 다 했을 정도입니다. 마을에서 내보내 더 많은 경험을 쌓으면 힐데는 불세출의 검사가 될 겁니다.’

‘그래…. 아이를 보내줘야 할 날이 오겠구나.’

우연히 엿들은 어떤 쓸쓸한 예상과는 달리.

언덕에서도 가장 높은 곳, 신목이 고독히 서 있는 장소에서 힐데는 숨을 길게 내쉬었다. 뭇 사람들이 두려움으로 존경하는 이 나무가 그는 전부터 무서운 적이 없었다. 아무렴 이게 세계수의 베풂이고 마을의 수호목이라면 저를 해하겠는가.

힐데베르트는 감히 신목을 우애했다.

또한 고향과 사람과 양들을 사랑했다.

언덕 너머 저 멀리서, 하늘로 뻗은 위용을 자랑하는 세계수를 바로 이 자리에서 신앙했다.

힐데는 절벽 아래 펼쳐진 드넓은 세상을 오래도록 바라보다 그 광경에서 돌아섰다. 품엔 지팡이로 만들 나뭇가지를 단단히 안은 채로.

하지만 이곳에서도 제 신은 존재하고, 당신과 사랑하는 사람들이 곁에 있으며, 어느 장소에서나 대지와 하늘은 경이로울만치 아름다운데도요.

느낌이 영 꿉꿉했다.

물론 힐데는 그게 단순한 기분탓임을 잘 알았다. 강화신체 소유자만큼은 아니어도 힐데의 회복력은 인간들을 쉬이 뛰어넘었다. 헌데 뭐, 인간들이 대개 자신의 어제만큼 그짓을 하진 않겠지만, 예외 없이 일상 생활을 하긴 하던데 제가 낫지 못할 리가.

최윤이 인간을 초월한 게 아니고서야. 물론 그는 문자 그대로의 의미론 제 종족을 넘어서긴 했는데. 아니, 그게 아니라….

힐데는 손끝으로 제 복부의 특정 지점을 눌렀다.

진짜로 진화, 신인류, 그런 것 아닐까? 강화 신체 시술을 안 받아봐서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고자가 된 대가로 거기도 강화해준다든지. 꼭 개살구가 되어야 한다면 빛이라도 반질반질 나게 해주어야 배저들도 면이 설 것 아닌가.

한가로운 아침. 식탁 의자에 앉아 음식을 기다리며 의식의 흐름으로 사고를 뻗어나가던 힐데는 뒤늦게 헛웃음을 뱉었다. 살다살다 인간 거시기 때문에 미쳐버릴 줄이야. 이백 년을 넘어가는 생을 살아왔음에도 상상해본 적 없는 난감하게 평화로운 미래였다.

이걸 최윤에게 고마워 해야 하는지. 절대 그러고 싶진 않지만. 힐데는 애인에 대한 감정을 힘껏 부정하다가 그래도 확실한 결론 하나엔 도달했다.

개살구도 그쯤 되면 살구보다 가치 있긴 하겠지.

“악!”

“뭐야?”

애인이 가장 좋아하는 음식을 만들다 짜증이 극에 달한 윤이 뒤돌아 보지도 않고 말했다. 힐데는 무시했다. 지금 내가 피해잔데 최윤 반응따위 알 바냐.

그보다 신경 쓰이는 것은 날이 다르게 관념이 변화해가는 자신이었다. 힐데는 최근 노인이 된 부하들이 파렴치한 소리를 아무렇지 않게 하던 모습을 두려워하며 이해해 가던 중이었다. 이래서야 저승에 가면 신관님들은 어떻게 뵐지….

불행중 다행히도 그 즈음에 윤이 음식을 내왔다.

“먹어라.”

“윤도 드시죠.”

윤은 답하지 않고 제 몫의 식사를 본인 앞에 내려 놓았다. 힐데는 관심을 껐다. 어차피 예의상 한 소리였다. 맛있는 음식 함께 나눠 먹으면 좋겠지만 나만 먹어도 좋지 뭐. 힐데베르트는 콧노래를 부르며 면을 한 입 삼켰다.

최윤이 만든 렉시크누들은 늘 일정한 맛을 냈다.

항상 기가 막히게 훌륭했다는 뜻이다.

요리사가 된 학자는 요리도 과학적으로 했다. 윤은 그 과정을 ‘물과 재료의 분량을 mL 수준에서 맞추고 타이머로 조리 시간을 계량하면 된다’고 설명했다.

허나 요리에 크게 재능이 없는 힐데에게 그 얘긴 TV 채널을 돌리다 보면 나오는, 머리가 굽슬굽슬한 남성이 직접 그린 그림을 보여준 뒤 ‘참 쉽죠?’ 라는 헛소리를 하던 장면처럼 느껴질 뿐이었다. 힐데는 그 그림중 어느 것도 그럴싸 하게 따라하지 못했다.

어느 날 퇴근한 윤은 폐지 더미에서 우연히 애인이 버린 그림을 발견하고 이게 뭔지 물어보기도 했는데, 비꼬는 기색이 전무했다는 점에서 힐데의 자존심에 작은 상처를 냈다. 윤은 현재도 자신이 그날 집에서 그를 쫓아냈던 이유를 모를 터다.

어쨌든 최윤이 본인 말마따나 ‘이 기막힌 음식을 한 입도 간 보기 싫다’는 이유로 완성한 계량 레시피 덕에 힐데는 종종 즐거운 식사를 할 수 있었다.

비록 그게 사람을 밤새 괴롭히고 약을 주는 꼴이긴 해도. 사실 섹스는 애인이 있는 성인이면 다들 하는 일이잖은가? 그 덕에 렉시크 누들을 만드는 기계가 전용으로 생겼으니 손해 본 장사는 아니었다. 힐데는 이 상황에 나름대로 만족했다. 기계쪽은 모르겠으나.

힐데베르트가 면을 부지런히 삼키곤 감동했다.

“진짜 맛있다…. 대체 왜 이렇게 맛있는 걸까요?”

“그건 내가 묻고 싶은데.”

윤은 심드렁했지만, 그는 원래 그랬다.

“저도 알려주신 레시피대로 하긴 했는데 이 맛은 안 나오던데요.”

“그러면 레시피대로 안 한 거겠지. 너는 검이 아닌 일엔 대충이잖아.”

“으음. 부정은 못하겠네요. 그래도 언제 한 번 봐주시죠. 제가 할 줄 알면 윤이 싫어하는 음식 만드느라 고생할 일도 없을 것 아닙니까.”

힐데는 그 직후 마지막 면발을 입에 넣었다. 역시 한 번에 십 인분은 먹고 싶을 만치 훌륭한 맛이었다! 제 위장이 그만큼은 아닌 게 통탄스러울 정도로.

그런데 이 인간은 왜 대답이….

힐데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심장이 쿵쾅거렸다. 다리가 무너지는 느낌이었다. 아니, 실제로도 하반신은 타의로 흔들리고 있었다! 정확히는 발 밑이, 바닥이―.

“힐데!”

힐데베르트가 창문으로 달려갔다.

쿠구궁.

세상이 갈라지는 소리가 났다. 평소 분노하는 법을 보여주는 일이 없던 대지의 신이 입을 쩌억 벌렸다. 스산한 바람이 거듭 파멸을 속삭이며 뺨을 할퀴었다.

동시에 기울어지는 시야에 맺힌, 막대한 금빛이….

“저게 어떻게?”

그것이 끝이었다.

무언가가 무턱대고 쏘아보낸 감정이 있었다. 과히 강압적이고 갑작스러워 비명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날이 선 비수 같은 폭력이 의식을 무참히 썰어냈다. 그것이 저를 들쑤실 때마다 사고가 점멸한다. 마치 신호등처럼 깜빡, 깜, 빡하고―.

최후.

힐데는 제 발이 붕 뜨는 것을 느끼며 기절했다.

툭. 투둑.

이마 위로 무언가가 떨어진다. 힐데는 반사적으로 눈썹을 찡그렸다. 그러자 누군가가 그것을 쓸어냈다. 부드럽지는 않지만, 확실한 미온이 느껴지는 손길. 자신이 오랜 시간 의지해 온. 힐데는 그 감각을 쫓아 눈꺼풀을 들어올렸다.

“깼냐.”

잘생긴 낯짝이 유독 어두웠다.

늘 비슷한 표정이 아니라 문자 그대로의 의미에서. 온세상이 암흑이었고 천장에서는 아주 희미한 빛만 균열을 뚫고 들어왔다.

두통을 앓다, 기절하기 직전 겪은 일이 떠올랐다.

어떻게 된 일인지 그게 지구에 돌연 뿌리 내렸고, 그 여파로 어마어마한 규모의 지진이 발생해 오두막까지 무너진 것 같은데. 그게 쏟아부었던 감정은―.

정수리에 연인의 일정한 숨이 내려앉았다.

지나치게 비좁은 공간에서 맞닿아 붙은 까닭이다. 아무래도 그는 저를 감싸다가 무너진 건물에 휘말린 듯싶었다. 덜컥 겁이 났다.

“윤. 괜찮습니까?”

최윤은 비죽 웃었다.

“야광등으론 쓸 만하네.”

제 눈을 말하는 것이다. 힐데는 생긋 웃다가, 윤의 옆구리를 엄지와 검지 끝을 모아서 힘껏 비틀었다. 강화신체 소유자는 아쉽게도 태연하기만 했다.

그래도 숨결은 일정하고, 어투는 평범하고, 농담도 하는 걸 보면 상태가 최악은 아닌 모양이었다. 물론 워낙 연기를 잘하는 인간이니 이곳을 벗어나 제대로 살펴보긴 해야겠지만. 힐데는 제 안광에 비친 연인의 모습을 조심스럽게 확인하곤 물었다.

“죄송합니다. 얼마나 됐습니까?”

“십 분. 그 정도야. 이제는 여진도 멎은 것 같으니 움직이지.”

힐데는 윤의 품 안에서 고개를 끄덕였다.

회복이 느린 자신을 배려한 것인지, 윤이 대부분의 하중을 받아주어 힐데는 비교적 운신이 자유로웠다. 비좁은 데서 떠드는 와중에도 질식할 것 같은 기분이 들진 않는 걸 보면 산소 공급도 되고 있고. 빛이 들어오는 쪽으로 힘을 가하면 탈출할 수 있지 않을까.

급히 견적을 내리던 중이었다.

“넌 집이 무너질 운명을 타고난 모양이다.”

최윤은 바다에서 죽으면 입부터 둥둥 뜰 것이다. 마침 예전 경험도 떠올라, 힐데베르트는 천장의 특정 위치를 애인인 양 신경질적으로 후려치곤 답했다.

“그런 운명이 어딨는데요.”

다행히 주먹질은 효과가 있었다.

빛이 내려오는 넓이가 주먹만 해진 것이다.

기분이 나아진 힐데는 부지런히 여백을 확보해 갔다. 윤의 부담을 가능한 빨리 해소하기 위함이었다. 허나 이 상황에도 호기심이 우선인지 최윤은 물었다.

“뭔가 아는 것 같은데. 무슨 일이냐?”

힐데베르트는 멈칫했다. 그래도 즉시 작업을 이어갔지만, 속까지 찰나에 멀쩡해진 건 아니었다. 지금 일어난 사건과 예상되는 상황을 감안하면 인간들이 입은 피해가 어느 정도일지. 힐데는 차마 제 연인의 얼굴을 보진 못하고 중얼거렸다.

“아마 방금 저를, 부른 것 같습니다. 세계수가….”

그러자 덤덤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래? 팔은 쉬지 마. 탈출부터 해야지.”

하. 세상이 오늘 멸망한대도 최윤이란 인간은 저런 식일 터다. 어이가 없었으나, 덕분에 들끓던 고뇌도 진정되었다.

힐데는 땅 위로 탈출하자마자 윤을 끌어올렸다.

그리고 즉시 할 말을 잃었다.

“총사령관한테 두 명 생존 보고하고. 집에서 혈액 주사부터 찾아와라.”

“윤!”

최윤이 휘청거렸다. 뒤통수부터 등 뒤로 피칠갑을 한 채였다. 제 후각이 마비되어 냄새도 맡지 못했던 것이다! 힐데가 경악하자 윤은 손을 내저었다.

“애인 죽는 꼴 두고 볼 셈이냐? 서둘러.”

힐데베르트는 울고 싶기도 하고, 그를 몇 대 치고 싶기도 했다. 물론 그 모든 것보다 최윤의 본가에서 혈액 주사를 찾아 오는 게 우선이었지만.

배저들은 대부분 살아 남았다.

강화신체 덕은 아니었다. 그보다는 그들이 고소득자이며, 내진 설계가 잘 된 숙소에 거주한단 사실이 유효했다. 윤의 본가는 거대한 규모에도 큰 피해를 보지 않은 것과 달리, 힐데베르트의 작은 오두막은 폭삭 무너진 것 또한 같은 맥락이었다.

수많은 빈자들이 사상을 입었다.

‘안타깝게 됐다’ 고 예현은 탄식했다. 동생은 오전부터 내내 답지 않게 말을 아꼈다. 최윤은, 그에게도 이 상황을 분별할 판단력은 있었다. 그 또한 죄 없는 이들의 죽음이 안타까운 것이라는 명제엔 동의했다. 비록 그 의미가 친구의 것과 동일하진 못하다 해도.

허나 어쨌든 생자에겐 생자가 가야 할 길이 있는 법이었다. 그는 누구보다 빨리 상황을 파악했고 생존자들에게 남겨진 숙제도 간단하진 않음을 확인했다.

스카는 현명한 사령관이었다.

불행한 사령관이기도 했다. 일을 넘겨받은 지 얼마 되지도 않았건만, 지나치게 책임이 막중한 일이 거듭 쏟아졌다. 스카의 안색은 하루가 다르게 어두워져서 배저도 사실 노화하는 생물이 아닌지를 의심케 했다. 이예현에겐 천운이 따른 셈이었다.

명석하고 불운한 총사령관은 결국 위염을 앓으며 센터 코어에 머무는 부하들을 집합시켰다. 현장에서 방어선을 쌓고 버티는 배저들을 제외한 전부였다.

배저 본부는 크리처의 습격을 전제로 건축됐기에 수십 층 높이에도 불구하고 멀쩡한 편이었다. 스카는 회의실에 모인 수백 명에게 급히 상황을 설명했다. 

“오면서 들었겠지만, 저 미친 나무가 크리처들을 센터 코어로 집결시키고 있어. 이미 저게 나타나면서 생긴 틈을 비집고 들어온 크리처들만 수십 마리다. 과학동에선 메인 코어가 버텨줄 수 있는 시간이 24시간 정도라더군. 이대로 뒀다간 센터 코어가 크리처 테라리움이 될 판이야!”

사령관이 탁상을 가볍게 내리치곤 덧붙였다.

“당연히 이 코어의 수천만 시민을 수용할 수 있는 코어는 어디에도 없지. 이곳은 무조건 사수해야 돼.”

“나무면 불로 태우면 되는 것 아닙니까?”

누군가가 손을 들고 물었다. 사공이 넘치는 상황에 토의로 시간을 버릴 수도 없어 이번엔 윤이 나섰다. 최윤은 사령관의 암묵적 재가를 확인한 뒤 말했다.

“현장에 있는 배저들이 샘플로 보낸 가지를 태워봤다만 기름에 절여도 큰 소용은 없었다. 예상 질답. 핵을 쓰는 게 가장 편하겠지만, 방사능이 누출되면 인류 역사상 최대 규모의 메트로폴리스를 분할해야 하겠지. 이미 수뇌부에선 어떻게 할지를 결정한 상태인데, 사령관님, 제가 언급해도 되겠습니까?”

“그래.”

“여기 있는 배저들은 방어선을 뚫고 들어가 나무 주위로 폭탄을 설치한다. 저 나무의 높이와 면적을 감안할 때 전체를 소멸시키긴 어렵겠지만, 폭발물의 양을 구역별로 조정해서 특정 방향으로 쓰러지게 할 순 있을 거라는 게 과학동 계산이다. 당연히 그 방향 시민들은 대피시킬 거고, 완충재도 설치해야겠지.”

케이트가 자료 화면을 띄웠다. 그러자 누군가가 헉 숨을 들이켰다. 윤은 놀라지 않았다.

“저어. 그쪽엔 제 집이 있는데, 보상안은….”

“너를 가장 위험한 곳에 배치하면 보상할 필요도 없어지지 않을까?”

“네엡….”

아미가 입을 가려 웃음을 삼켰다. 진이 빠진 윤은 케이트에게 과학동의 발언권을 완전히 넘겨버렸다. 이내 사령관의 세부적인 작전 지시가 이어졌다.

곧 정비 시간이 되었다.

회의장을 나온 윤을 제일 먼저 붙잡은 상대는 힐데였다. 어쩐지 내내 뭐 마려운 표정만 짓고 있더라니. 예현이 이 표현을 들었다면 ‘가장 우울한’이란 그럴 듯한 말로 정정해 주었겠지만, 친구는 지금 힐데의 대자이기 전에 고문으로서 바쁜 상황이었다.

힐데베르트가 겨우 입을 열었다.

“윤.”

“따라와.”

어차피 이미 일어났는데 어떻게 할 수도 없는 상황 때문에 머리가 터지기 직전이겠지. 예상했던 일이라, 윤은 그대로 놈을 방음이 되는 회의실에 던져넣었다.

힐데는 오랜만에 두려움이 깃든 눈으로 물었다.

“윤. 혹시 몇 명이―.”

최윤은 양팔을 가볍게 낀 채로 답했다.

“추산중이지만 수만 명은 되겠지.”

“그 정도 민간인 피해는 1차 전쟁 이후로는 처음 아닙니까?”

“잘 아네.”

“…죄송합니다.”

힐데가 고개를 숙였다. 윤은 그 모습을 지켜보다 조용히 숨을 내쉬었다. 하여간 사서 고생이었다, 이 멍청이는. 조금이라도 저에게 유리하게 상황을 해석하려 애쓰기만 해도 이런 태도는 보일 수 없을 텐데 말이다.

애인 삽질을 두고 볼 수만도 없는 노릇이라, 윤은 결국 수고를 들여 말했다. 힐데의 복슬복슬한 머리를 손끝으로 헤집으며.

“이게 네가 사과해야 할 일이냐? 넌 지금 아무것도 모르잖아.”

“하지만 절 부르는데도요. 저게 혹시 저를 쫓아온 거라면 적어도 얘긴 해야지 않을까요?”

“오. 네가 없던 시기에 좀비가 생겨도 네 잘못이고, 너도 모르던 사이에 스토커가 생겨도 네 잘못이다?”

최윤은 코웃음을 치며 손을 내렸다.

“자기애가 과한데.”

“윽.”

힐데는 억울한 듯 미간을 찡그렸지만, 부정하려니 나르시시스트 취급을 받을 게 민망해졌는지 얼굴을 붉혔다. 신기할 만큼 부끄러움 많은 놈이었다. 윤은 이 이백 년은 가뿐히 살았을 노인네를 더 골려주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당장은 그럴 시간이 없었으나.

공사는 구분해야지. 최윤이 차분히 정리했다.

“이 상황에 불확실한 추측으로 고개 숙이고 다니지 마라. 넌 남들 시선을 끄는 편이니까.”

“…일단 알겠습니다.”

“그래. 그보다 저게 세계수가 아닌 건 확실하냐?”

이미 힐데베르트의 동료에게 확인한 정보였지만 윤은 부러 그를 언급했다. 힐데는 그제야 평소처럼 답했다.

“아, 예. 델테이 덕분에 다시 확인해봤는데 확실히 존재감이 다릅니다. 크기도 제가 아는 위용의 이분의 일 정도고요. 분명 비슷하지만 같지도 않습니다. 동일종 내부의 다른 생명체란 느낌입니다. 형제나 자매처럼요.”

“이분의 일? 저게 미성숙체면 완전히 성장했다간 하늘에도 닿을 것처럼 보이겠군.”

지금도 배저 본부만 한 고층 빌딩을 수십 개 나열해둔 정도의 넓이였다. 윤이 내심 혀를 내두르는데 힐데가 눈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제 세계에선 세계수는 어디서든 볼 수 있다고도 했으니까요.”

향수인지.

“그건 불가능해. 행성은 둥그니까.”

“말이 그렇단 겁니다.”

심술에 짜증이 이어졌다.

힐데베르트는 허리 아래로 본인 주먹을 쥐었다가―안 보일 거라고 생각하나― 윤에게 아량을 베풀어 제 손을 풀어주었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만큼 나무의 영향력이 절대적인 세계였습니다. 모두의 신앙이었으니까요. 지구에선 왕명이나 천명으로 번역될 말도 저희는 종종 [세계수의 명]이라고 불렀죠. 언어와 사회 곳곳에 흔적이 있었습니다.”

최윤은 이 툭 튀어나온 정보가 꽤 중요한 것임을 파악했다. 경우에 따라선 타이탄들을 임무에서 배제해야 할 만큼. 힐데나 잭은 문제 되지 않겠으나 용병격으로 부른 이들도 꽤 있었던 탓이다. 윤은 힐데를 날카롭게 살펴보았다.

“그러면 너와 네 동족들은 저걸 방해하는 상황이 역천하는 것처럼 느껴지나?”

“아. 알겠습니다. 그건 걱정하실 필요 없을 겁니다. 저게 세계수가 아니라는 연락은 진작 공유했고, 다들 육감으로 차이를 받아들였으니까요.”

“그래…. 뭐. 좋아.”

최윤은 발을 툭 내리눌렀다.

무언가를 가볍게 짓밟듯이.

“힐데베르트. 네 세계에선 어땠는지 모르겠지만, 지구의 인류는 신을 경배하면서도 그 권능과 힘을 빼앗으려 안간힘을 써왔다. 이번에도 예외는 없어.”

“….”

“센터코어가 그 잿빛 도시처럼 되게 둘 순 없으니.”

세계수의 시련. 그에 대해서 처음 들었을 때부터 윤에겐 의문스럽던 부분이 있었다. 어째서 그 세계 인간들은 눈에 보이며 손에 잡힐 나무를 신앙하였음에도 그 곁에 머무르기를 택하진 않았나. 왜 저주를 풀러 가는 여정이 마물들이 들끓는 시련인가?

틀림 없이 인적이 있었을 나무 주변의 마을은 왜 유령 도시로 남았나. 출입을 제한하는 이유는 뭐지? 마치 삿된 것에 다가가지 않도록 금줄을 걸어두듯이.

힐데에겐 그 상황이 자연스럽고 본인도 그렇게 된 이유는 모르는 듯해 캐묻진 않았으나. 윤의 시선에 그것은 괴이에 가까운 이상 현상으로 보였다.

왜냐하면 지구에서는,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유적에서부터, 괴베클리 테페로 이름 지어진 그 건물들의 수만 년 전에서부터 신전을 도시에 품어온 까닭이다. 인류 문명엔 늘 신과 신전이 존재해 왔다. 전에 없이 무신론자 비율이 높아진 현재조차도.

이제 최윤은 답을 추론한다.

어쩌면 힐데베르트의 세계에서도 저 재앙은 돌연 나타났을지도 모른다. 크리처를 끌어모으는 그것을 고대의 기술을 지닌 인류는 감당하지 못했을 터다. 종래에 결과를 얻은 그들은 공포로 재앙신을 섬기게 된 것이다.

이 간단한 추측을 제 연인이 못할 리가.

힐데베르트 탈레브는 재앙의 자식 된 눈을 감았다.

하얀 속눈썹이 나비 날개처럼 떨렸다.

윤은 사고한다. 갑작스런 재난이 힐데베르트에겐 세계수의 형제처럼 느껴진다면, 세계수의 자식임을 자랑스러워 하던 신도에게 저 재앙은 어떤 의미인가. 어둠이 내려앉은 무렵이면 종종 도시의 야경을, 별을 쫓아 끝없이 달리던 청년에게 그것은.

그럼에도 윤은 힐데가 걸을 길을 염려하진 않았다.

그가 눈을 뜬다.

힐데베르트 탈레브는 최윤이 아는 생명중에서도 가장 강인한 존재였다. 육체적으로도, 심리적으로도. 특유의 본질적인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마침내 그것이 단단한 목소리로 선언했다.

“예. 저도 제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살아가는 땅이 망가지는 건 피하고 싶습니다.”

최윤은 픽 웃었다.

“그래.”

의외로 이 상황을 해결하려는 이유는 최윤에게도 비슷했다. 그가 신경 쓰는 사람들은 극히 한정되어 있었지만.

윤은 그것과 함께 방을 나섰다.

가까이서 본 나무는 크기가 어마어마했다.

지구에서도 몇몇 나무는 천 년이 넘는 세월을 버텨왔고, 일부는 시야로 판단하기 어려울 정도의 높이를 자랑했다. 허나 이것은 상식을 아득히 뛰어넘는 규모였다. 생명체가 이 정도 면적을 지닐 수 있음을 윤은 처음 알았다.

헌데 이게 이분의 일이라고.

그쯤 되면 이것을 나무라고 불러도 될지도 애매해진다. 평범한 나무의 뿌리와 기둥, 가지와 이파리를 완벽히 모사하고 있음에도. 

따지자면 나무 형태의 크리처에 가까울 터.

최윤은 사실 과학자들이 실험에 돌입하기 전부터 이것을 불로 태우진 못할 것임을 짐작했다. 세계수가 이보다 큰 나무라면 낙뢰를 수천 번은 맞았을 텐데, 그것은 되려 힐데베르트의 행성에서 수천 년이 넘게 유일신으로 군림해 왔다잖은가.

애초에 고작 나무가 불사의 단서를 제공할 수 있을 리도 없고, 지성체를 끌어들일 힘도 갖췄을 리 만무했다. 적어도 윤의 과학적 상식으론 그러했으므로….

최윤은 오랜만에 뭔가에 대한 해부 충동을 느꼈다.

힐데베르트에게서 종종 느껴본 것과 비슷한 감각이었다. 사람 형태의 크리처는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뜯어서 알아보고 싶은 기분. 심지어 저걸 파헤치는 덴 윤리적으로 어떤 문제도 없었다. 이예현의 비호를 적극적으로 받던 놈과 달리.

22시간이란 시간 제한만 아니었다면 지금쯤.

“할 말 있으십니까?”

폭탄을 설치하고 온 힐데가 눈이 마주치자 물었다. 하여간 생존 감각은 끔찍하도록 예리한 놈이다. 윤은 의미심장하게 입가만 쭉 끌어당겼다.

“뭐, 뭔데요?”

그리고 무시했다.

“윤!”

가지를 얻어뒀으니 부분적으론 연구할 수 있겠지. 저걸 쓰러뜨리고 나면 더 많은 샘플이 확보될 테고. 그는 즐겁게 실험 계획을 세워보았다.

윤은 일단 이것이 어떻게 이 세계에 출현했는지가 궁금했다. 또한 매립된 상하수도관과 전선을 죄 박살내고 이 근처에 뿌리를 내린 방법이 흥미로웠으며, 나무가 지닌 지성의 수준도 알고 싶었다. 힐데에게 원격으로 접촉한 걸 보면 지성이 있긴 하단 뜻인데.

폐령보다 뛰어난 파괴력과 지능을 갖춘 크리처.

제가 만든 코어의 틈으로 부지런히 마물들을 끌어들이는 나무를 윤은 다시 가늠해 보았다. 빙룡조차도 저것을 쉽게 제압하진 못할 듯했다.

그렇다면 저것은 신인가?

힐데베르트의 세계에서 인류가 믿어왔던 것처럼?

집채 만한 크리처 몇 마리가 쇄도하듯 날아왔다.

탕! 타다당―! 탕!

윤은 그들의 눈만을 깔끔하게 쏘아 맞혀 떨어뜨린 뒤 총구를 내렸다. 그리고 열이 오른 총신에 탄환을 보충하면서 웃었다.

그럴 리는 없었다.

신이 신이고자 한다면 전지전능해야 한다. 저것은 전능한가? 전능하다면 굳이 점령군처럼 수고를 들일 필요가 없었다. 저것이 보여주는 이능력은 분명 단일 개체치고는 어마어마하지만, 그 종류는 아직 인간이 상상 가능한 범위 내에 있었다.

애초에 신이란 대개 실체가 없는데, 그건 인류에게 실물을 해체하고 분석하려는 충동이 존재하는 까닭이다. 이를 테면 저 나무는 마물을 끌어들이고 불사할지언정 인간의 언어를 인간답게 구사하지는 못할 것이다. 단순히 인간들의 성대를 갖추진 않은 탓에.

그렇다면 전지한가? 힐데의 정신에 간섭하려 든 상황을 감안하면 그를 막으려는 뜻은 알지도 몰랐다. 허나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그렇다고 이 공세에 저항하진 못할 텐데. 나무란 움직일 수 없는 과녁이었고, 코어를 형성한 숨도 하루는 쓸 만했다.

애초에 이게 정말 전지전능한 생명체였다면 힐데베르트의 세계에서 소멸할 일도 없었겠지. 그 얘길 본인에게 하진 않겠다만.

어쨌든 신이라기보다는 대부분의 개체보다 먹이 사슬상 높이 위치한 생명체 정도로 느껴졌다. 최윤은 결론 내리다 눈을 깜빡였다.

조용했다.

그 말 많은 놈이.

힐데베르트가 비틀비틀 나무로 다가갔다.

“저건 또 시작이군.”

윤은 헛웃음을 흘렸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놀랍지는 않았다. 저런 반응도 예상하고 있었으므로. 스카에게 따로 요청해 힐데의 곁에 자신만 남아 있는 이유도 그런 까닭이었다.

힐데베르트는 제 두통을 나무가 감정을 전이하다 종이 달라서 실패한 결과쯤으로 여겼다. 허나 윤은 웬만한 일은 대수롭게 넘기는 그의 성격을 알았기도 했고, 힐데가 전이를 자주 해봤을 놈도 아니었기에 따로 의견을 구했다.

잭 블랙은 그게 사역에 실패한 결과일 수도 있다는 의견을 내놓았다.

사역이란 것이 정확히 어떤 매커니즘으로 가능한 일인지 윤은 현재도 이해할 수 없었지만, 이 상황에 한 가지는 확실했다. 그게 일면식도 없던 상대에게 무턱대고 감정을 쏟아붓는 일보다는 그럴 듯한 추측이란 것.

자신의 가장 강한 무기가 될 수도 있으면서, 제게 가장 위협적인 패가 될 수도 있는 존재를 저 나무는 본능적으로 간파한 것이다.

나였어도 할 수 있었으면 사역을 시도는 해봤겠지.

재밌을 테니….

짜릿하지 않겠는가. 힐데베르트 탈레브 정도의 격 높은 생명체를 손 안에 휘어잡을 수 있다면. 놈을 그 상태로 계속 둘지는 생각해 봐야겠다만.

어쨌든 타이탄만 마물을 사역할 수 있는 게 아니라 역도 어쩌면 가능하다는 점에서 윤은 자연의 공평한 뜻이 마음에 들었다. 그게 마물들이 몰려온 이유로도 합리적이고, 사실 우주에서 티끌 만한 존재인 인간이 다른 생명보다 꼭 우월해야 할 까닭도 없었으므로.

윤은 어기적어기적 힐데를 뒤따라갔다.

이런 사태를 예상했음에도 힐데를 작전에서 배제하진 않은 까닭은, 녀석이 사역 당해 배저들이 없는 민간인 밀집지에서 폭주할 경우 재앙만 두 배로 늘어나는 탓이다. 힐데베르트처럼 우수한 군인을 중요한 작전에 써먹지 않는 건 인력 낭비기도 하고.

다만 사역에 성공했으면 주변부터 공격했겠고, 그때는 연인에겐 반응할 가능성에 기대거나, 현장에서 도망칠 수 있는 배저가 필요할 듯해 저만 붙은 건데.

점점 나무 뿌리 틈으로 진입하는 힐데는 완벽하게 사역당한 것 같진 않았다. 그보다는 눈이 흐리멍텅한 꼴이 잿빛 망토에게 홀린 모양과 비슷했다.

최윤은 손끝으로 제 허벅지를 툭툭 두드렸다.

“흠.”

어쩌면.

“흡수할 셈인가?”

뿌리란 그러라고 있는 기관이니.

저 정도 인간 병기를.

멍청하고 비효율적이기 짝이 없는 선택이라 미처 생각지 못했지만, 이 나무는 저와 달리 힐데베르트를 모르니 그쪽도 자연스럽긴 했다. 전능하지 않은 것도 모자라 전지하지도 않군. 설마 지성이 부족해서 더 골치 아파질 줄은.

윤은 플랜 B로 챙긴 개량한 흡수 촉진제를 꺼냈다.

그리고 아직 아무것도 모르던 예현에게 무전으로 상황을 짧게 보고한 뒤, 제대로 된 답변이 돌아오기 전에 자신도 뿌리를 드러낸 크리처의 밑동으로 진입했다. 사건이 종료되면 대부를 싸고 도는 친구에게 일을 어떻게 변명할지를 걱정하면서.

힐데베르트가 사역 가능한 생명인지 궁금했다는 진실은 당연히 안 먹힐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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