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야 나갈 수 있는 방

윤힐데+예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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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뜨니 낯선 천장이 보였다.

예현은 몸을 벌떡 일으키고 주위를 살폈다.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는데……?

정사각 형태의 새하얀 방은, 그가 누워있는 침대와 정면에 붙은 패널을 제외하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예현이 눈을 가늘게 떴다. 패널에 무언가 쓰여있었다.

‘최 윤과 힐데베르트 탈레브가 …해야 나갈 수 있는 방’

“…어……?”

뭘 해……?


눈을 뜨니 낯선 천장이 보였다……. 힐데베르트 탈레브는 생각했다. 이 망할 사수가 기어이 일을 쳤군.

“뭐야, 여긴.”

“헉, 씨! 깜짝이야!”

아니잖아!

“씨?”

“죄송합니다.”

힐데베르트는 재빨리 사과했다. 윤이 드디어 인내심에 한계를 느껴 나를 납치한 줄 알았는데……. 그럼 여긴 어디지? 반사적으로 옆을 돌아보자 최윤이 짧게 말했다. “몰라.”

그는 이 상황에 다소 심기가 뒤틀린듯 보였다. 힐데베르트는 더이상 최윤에게 말을 붙이지 않기로 결정하고 주변을 살폈다.

방은…… 텅 비어있었다. 윤과 나란히 누워있던 침대 하나와(힐데베르트는 슬쩍 일어나 벽끝으로 물러났다.) 눈 앞의 패널을 제외하면.

‘최 윤과 힐데베르트 탈레브가 윗몸 일으키기 100회, 플랭크 1분씩 3회 10세트, 오리걸음으로 방 20바퀴, 앞구르기 30회, 풍차돌리기 20회, 앉았다 일어서기 70회, 좌로굴러 우로굴러 50회를 해야 나갈 수 있는 방’

길어…….

이게 무슨 똥개훈련이지?

힐데베르트가 아연해져서 윤을 돌아보았다. 윤은 소리없이 일어나 패널 쪽으로 저벅저벅 걸어갔다.

“엇, 윤!”

그리고 힐데베르트가 미처 말리기도 전에 주먹에 힘을 실어 패널을 내려쳤다.

쾅!

굉음이 방을 울렸다.

그러나 패널에는 흠집조차 나지 않았다. 윤은 방을 한바퀴 빙 돌며 화풀이라도 하듯 벽을 쾅쾅 쳐대다가, 어느 곳도 부서지지 않는 것을 확인하곤 깔끔한 목소리로 말했다.

“하는 수밖에 없겠네.”

“으악.”

힐데베르트가 질색했다.

방에는 검도, 검 대용으로 쓸만한 무엇도 없었기 때문에 힐데베르트는 손 한 번 써보지 못하고 한 순간에 최윤의 아바타로 전락해야했다.

한 명만 수행해도 정상적으로 카운트가 되는 모양이니 전부 네가 맡아 하라, 는 사수의 지시 탓이었다.

인정머리 없는 인간.

힐데베르트는 찔끔 나오려는 눈물을 꾹 눌러참으며 오리걸음으로 방을 돌았다. 15바퀴째였다. 정상적인 형태의 훈련이 아닌, 사람 죽어보라는 식의 굴림에는 그 역시 지칠 수밖에 없었다.

제국에서 막 기사직위 달았을 때도 해본 적 없는 짓인데……. 사실 시킨 사람은 더러 있었으나 힐데베르트는 안 했다. 그냥. 그런 신입도 있는 법이다.

앞구르기 30회, 풍차돌리기 20회…….

앉았다 일어서기 50회를 넘길 즈음엔 힐데베르트의 몸은 이미 땀범벅이 되어있었다. 다리도 좀 후들거리는 것 같았다. 편안하기 그지없는 자세로 침대에 누워 발끝을 까딱거리는 최윤을 원망스럽게 쏘아보았으나 본디 이 소시오패스는 직접 자신을 쥐어패러 오지 않는 이상 누가 저를 죽어라 원망하든 말든 신경도 안 쓰는 위인이었다.

급기야 힐데베르트는 세상을 원망하기 시작했다.

애초에 저 인간말종과 가엾고 힘없는 부사수인 나를 한 방에 가둘 생각을 한 자식이 누구냔말이다.

나가기만 하면 반드시 찾아내 족칠 것이다.

나가기만 하면…….

“…헉! 허억……!”

힐데베르트가 마지막 ‘우로굴러'를 끝냄과 동시에 바닥에 대자로 뻗었다.

마지막으로 이렇게 땀을 흘려본 게 언제였지? 사실 이제와서는 땀보다는 피를 쏟는 일이 더 익숙한 것 같기도 했다. 차라리 칼을 주고 배를 찔러 할복하라고 했으면 한층 일이 쉬웠을 텐데…….

힐데베르트는 미쳐가고 있었다.

그에겐 다행스럽게도 모든 수행과제가 완료됨과 동시에, 작은 틈 하나 없던 새하얀 방의 벽에 스르륵 문이 생겼다.

“윤…….”

“어. 봤다.”

다 죽어가는 목소리에 윤이 답했다.

됐다! 됐어!

힐데베르트는 기쁨의 내적 비명을 지르며 텁 손을 뻗어 바닥을 짚었다. 일어나 걸을 기운은 없었으나 기어서라도 나갈 생각이었다. 단 1초라도 이 방에 더 있고 싶지 않았다. 정말로.

힐데베르트가 꿈틀꿈틀 바닥을 기었다.

그러나 제 몸은 앞으로 나아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뭐지. 힐데베르트가 다시 꿈틀거렸다. 여전히 제자리였다. 힐데베르트는 둔한 머리를 굴려 생각했다. 그러고보니 발목이 좀 무겁지 않나……?

뒤를 돌아보자 물귀신처럼 제 발목을 붙들고 웃는 최윤이 있었다. 차라리 귀신인 편이 나았을 것이다.

“운동 부족하지 않냐?”

윤이 어째서인지 음산한 목소리로 물었다. 힐데베르트는 덜덜 떨며 고개를 저었다.

“아뇨……. 아, 아니…….”

공포에 말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힐데베르트가 다시 앞으로 기었다. 필사적인 몸짓이었다.

“벌레 같네.”

윤은 그 모습을 신랄하게 평하며 힐데베르트를 침대로 질질 끌고 갔다. 살려주세요, 한번만봐주세요, 이러다저죽어요, 당신은살인마야……. 힐데베르트가 뭐라 지껄였으나 무시했다.

풀썩. 침대 위에 힐데베르트를 내려놓은 윤이 제 옷을 툭툭 벗어던졌다.

“바빠서 얼굴 볼 틈도 없던 와중에 잘 됐네. 여기서 뽕 뽑고 가자.”

무슨 뽕을 뽑아! 이게 파격 세일 행사인 줄 알아!

힐데베르트의 비명은 윤의 입 안으로 삼켜졌다.


예현은 초조하게 다리를 떨고 있었다. 패널에서 말하는 것이 정확히 무엇인지는 알 도리가 없으나, 센터코어에는 이와 관련된 과거의 자료들이 많이 남아있었다. 아마 정황상…….

아, 정말 생각하기 싫다. 그는 반쯤 머리를 쥐어뜯었다. 그래도 다행인 점은 아직까지 탈출 가능한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니. 이걸 다행이라고 해야할지…….

예현이 약 40번째로 마른세수를 하려던 찰나, 기묘한 소음과 함께 벽 위로 문이 생겨났다.

달칵. 나가라는 듯 친절히 문을 열어주기까지 했다.

예현은 벌떡 일어났다가 그만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았다.


한참 후에야 겨우 정신을 추스르고 방을 나왔다.

방 밖은…… 그냥 센터코어의 어느 골목이었다. 뒤를 돌아보니 그가 나온 문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있었다. 이런 마법 같은 일이 가능할리가……. 타이탄 측의 수작인가. 예현은 그런 의문을 뒤로 미뤄두고 우선은 윤과 힐데측에 연락을 취해보기로 했다. 마음이 술렁거려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다.

그러나 둘 중 누구에게도 연락이 닿지 않았다. 이쯤 해서 예현의 불안은 가속화 되기 시작했다. 말도 안되는 비극적인 가정들이 머리를 가득 메웠다. 예현은 본디 이성적이고 사리판단에 밝은 인물이었으나 방금 그 자신이 겪은 비이성적인 일이 평소와 같은 사고를 불가능하게 했다.

급기야 예현이 자신이 아는 힐데의 모든 지인에게 연락을 돌려보기로 결심했을 즈음, 눈 앞에 문이 짠 하고 나타났다.

그냥 허공에 갑자기.

그리고 그 안에서 반쯤 기절한 힐데베르트를 들쳐업은 윤이 묘하게 상쾌한 표정으로 걸어나왔다.

예현이 반색하며 다가갔다.

“윤!”

그러다 멈칫했다. 그러고보니…… 이들이 나온 방이…….

머릿 속에 자신이 보았던 패널 문구가 둥둥 떠다녔다. 다시 생각해보니 윤이 힐데를 들쳐업고 나온 것도 뭔가 수상하게 느껴졌다…….

짧은 사이 예현의 머릿속에 108가지의 번뇌가 스쳐지나갔다. 그는 자신이 부디 판도라의 상자를 여는 것이 아니길 빌며 윤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윤…… 혹시, 그 방의 탈출 조건이……?”

윤은 속을 알 수 없는 눈으로 예현을 바라보다가 이내 ‘윗몸 일으키기 100회……’로 시작하는 긴 문장을 한치의 오차 없이 줄줄 읊었다.

그리고 예현은 크게 안심했다.

아! 다행이야! 내가 걱정하는 그런 일은 없었구나!

그는 순식간에 기분이 좋아져 윤의 어깨를 툭툭 치며 말했다. 힘들었을테니 오늘은 더 근무하지 말고 곧장 퇴근하도록 하라고.

“그리고 힐데도 오두막에 데려다줘.”

어째서인지 윤에 비해 유독 초췌한 꼴의 힐데가 조금 신경쓰이긴 했으나, 예현은 너무 바빴고 또 너무 들떠있었기에 거기까지는 깊게 생각할 여력이 없었다.

“그래.”

윤은 간단히 답했다. 너도 비슷한 일을 겪은 듯하니 내일 이야기하자 덧붙이며. 하하……. 예현이 머쓱하게 웃었다. 자신이 했던 기우가 떠오른 탓이었다.

말도 안 되는 일이지. 윤에게 힐데베르트는 까마득한 후임이고, 부사수고, 또 친구의 대부일텐데.

별 일 없어서 정말 다행이야. 예현은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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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4


  • 예의바른 불사조

    그 말도 안 되는 일이 실제로 일어났단다...

  • 멋부리는 바닷가재

    무슨 뽕을 뽑아! 이게 파격 세일 행사인 줄 알아! ㅋㅋㅋㅋㅋㅋ 윤이 거짓말한 건 아닌데...ㅋㅋㅋㅋㅋ 한건맞는듯....ㅋㅋㅋ큐ㅠㅠ 예현은 속아버렸습니다..

  • 생각하는 까마귀

    아니야 예현아 넌 속고있어! 윤은 진짜 했어!!!!

  • 운동하는 산양

    진짜 최고애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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