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랙배저 2차
유료

[예현힐데][유료발행] 산군

두시전에자자 by 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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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AU

- 2024년 7월 디페스타에서 판매되었습니다.

- 약 3만자

- 글리프 선발행

- 실물 회지는 5,000원에 판매되었으며, 유료발행은 가격을 약간 낮추어 판매합니다.

開花

    개화

신임 현감 이예현이 그를 처음 만난 것은 현환(玄貆)에 부임을 하고 열흘이 채 되지 않은 어느 날의 저녁이었다.

저녁상을 물린 뒤 곡식 비축량과 세액을 정리한 서책을 뒤적이던 때였다. 아까부터 바깥에서 재차 인기척이 들렸다. 행랑어멈이 또… 이전 현감이 술을 좋아한 모양인지 행랑어멈은 습관적으로 술상을 내오곤 했다. 몇 번이나 거절했기에 그 정도면 된 줄 알았건만. 예현은 서책에서 눈을 떼지 않고 문밖에서도 들릴 수 있도록 적당히 소리를 내어 답했다.

“술상은 되었다 하지 않았어.”

“술상이 아닙니다, 나으리.”

대답한 이는 아는 목소리가 아니었다. 사내의 목소리인데 퍽 간드러지고 듣기가 좋았다. 누구지? 아무튼 이대로 방 안에서 객을 맞는 것은 예의가 아닌 듯하여, 예현은 옷매무새를 가볍게 다듬고 창호문을 열었다.

툇마루 너머에 흑청색 도포를 깔끔하게 차려입은 사내가 반듯하게 서 있었는데 그 생김새가 특이했다. 색목인… 아니, 회회인¹인가? 피부가 거뭇하고 코가 우뚝한 사내의 눈이 금빛으로 형형하게 빛나고 있었다. 

정체 모를 사내는 예현에게 가볍게 목례했다. 갓 아래로 얼핏 보인 머리는 또 노인처럼 희었다. 예현은 엉겁결에 마주 인사했다. 얼빠진 목소리가 나왔다.

“저… 누구십니까?”

“힐데베르트 탈레브라고 합니다… 이름이 어렵지요. 힐데라고 불러주시면 됩니다. 대단한 사람은 아니고, 서역에서 건너와 공부나 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회회인이 맞았구나. 우리말이 유창하여 큰 걱정을 덜었다. 예현은 허리를 펴며 답했다.

“아, 예… 이예현이라고 합니다. 이 시간에 어인 일로… 급한 볼일이 있으신지요?”

“그런 건 아니고, 새 원님께서 부임하셨다기에 늦게나마 와 보았습니다. 혹시… 전임 현감께 말씀 들으신 것이 없으신지요? 제가 오래전부터 종종 관에서 자잘한 업무를 돕고는 했는데….”

없었다. 전임 현감은 조세를 뒤로 빼돌리다가 삭탈관직을 당했기 때문이었다. 휘말린 이방이며 호방까지 싹 다 끌려갔기에 당장에도 말 전해줄 이 하나 없어 서책이나 뒤적이는 판이었다. 예현이 멍하니 대답이 없자 상대가 뒷목을 긁적였다.

“하긴, 제가 일을 도우러 온 지 조금 되긴 했습니다마는…”

“아이고, 어르신!”

뒤에서 행랑어멈이 헐레벌떡 달려왔다. 이예현이 아니라, 힐데베르트 탈레브를 향해서였다. 남자 또한 반가워하는 눈치였다.

“내주댁. 오래간만입니다.”

“어르신, 이게 얼마 만이어요! 서역으로 돌아가신 줄만 알았습니다!”

“아닙니다. 그간 고향의 친우들과 볼일이 좀 있어 방문이 뜸했어요. 잘 지냈지요?”

“아유, 난리도 아니었습니다. 그 전에 계시던 곽 사또께서… 어마나, 나으리가 먼저 나와 계셨어요.”

뒤늦게 예현을 발견한 행랑어멈이 포드득 놀라 어쩔 줄을 몰랐다. 여기서 스무 해 넘게 일곱이 넘는 현감을 모셨다는 내주댁이 이렇게 반기는 사람이면 나쁜 사람은 아닐 터였다. 예현은 웃으며 두 사람에게 말했다.

“아직 밤바람이 찬데, 잠시 들어와서 이야기하시지요. 어멈, 상을 내올 수 있겠는가.”

“여부가 있겠습니까! 금세 내오겠습니다.”

행랑어멈이 분주하게 부엌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예현은 문에서 한 발짝 물러나 손을 방에 들였다.

“이거, 정말 잠깐 인사만 드리려고 했는데요… 실례합니다.”

손님은 정말 길게 이야기를 나눌 생각은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그러나 이야기를 하다 보니 그는 지금의 예현에게 꼭 필요한 사람이었던지라, 자연히 질문도 꼬리에 꼬리를 물게 되었다. 

“이 고을에서만 그리 오래 도움을 주셨다니… 선배님 아니십니까. 말씀 편히 하시지요.”

많이 보아도 저와 동년배로 보였는데, 그는 벌써 서른 해 넘게 이곳에서 지냈다고 했다.

‘색목인은 나이를 가늠하는 것이 어렵구나.’

예현은 막연하게 그리 생각했다. 

한참 문답을 하다 보니 자연히 힐데 공公의 스스로에 대한 소개를 들을 수 있었는데, 고향에서부터 학자였던 그는 조선이 궁금해 상인들과 함께 서역에서 먼 길을 건너왔다고 했다. 고향에서 가져온 금붙이가 떨어진 뒤 공부를 하는 틈틈이 셈이나 지혜를 빌려주는 방식으로 먹고살다가, 기회가 되어 당시 호방의 일을 도와준 것을 계기로 이따금 관의 일을 돕게 되었다는 이야기였다.

“아니, 그렇게 대단하지 않습니다. 그냥 제가 계산이 빠르고 잡다히 아는 것이 많다 보니 그리되었을 뿐인데…”

“그러지 마시고 말씀 낮춰주십시오. 그 편이 오히려 제 맘이 더 편할 것 같습니다.”

“그리 청하시니… 그… 노력은 하겠습니다.”

“…….”

“알겠으니 그렇게 보지 말고….”

그제야 예현이 방긋 웃었다. 고을 사정에 훤한 사람이 먼저 저를 도와주러 오다니, 천군만마가 이보다 좋으랴. 하늘에서 내린 동아줄을 잡은 듯하여 기분이 몹시 좋았다.

힐데베르트는 그전 현감에 대한 이야기를 듣곤 눈을 둥그렇게 뜨더니 이내 제가 아는 만큼의 고을 사정을 읊어 주었다. 서책으로 남길만한 정도는 아니지만 알아두면 도움이 될 내용이 대부분이었다. 드물게 가뭄이 올 때가 있다거나, 다른 고을보다 가을이 이르게 오는 편이라 수확이 일주일쯤 이르니 세금을 걷을 때 미리 준비를 해야 한다거나…

“또 어디 보자… 산세가 험한 편이긴 한데, 행상이나 마을 사람들은 안전한 길을 다 알아서 크게 문제가 없어. 다만 외부인은 길을 잃기 쉬우니… 언제 시간을 비울 수 있으면 같이 한번 돌아보는 게 어떤가.”

“저야 감사하지요. 산에 혹 짐승도 많습니까?”

“많지. 토끼, 산양도 많고… 범도 있고.”

“범이요?”

예현이 깜짝 놀라 소리를 높였다. 비스듬하게 앉아 턱을 괴고 있던 힐데베르트가 소리 내 웃었다. 

“하하, 겁먹었나?”

“그런 건… 저, 그럼 호환도 있었습니까?”

“아니, 호환은 한 번도 없었어.”

힐데베르트가 눈을 길게 휘며 웃었다.

“내가 이 고을에 머무는 동안에는 단 한번도 없었지.”

그 뒤 힐데베르트는 때때로 찾아와 예현을 끌고 고을 여기저기를 헤집고 다녔다.

고을로 통하는 산길을 짚어준 날 예현은 호환이 정말 없었는지 거듭 묻고는 인부를 모아다가 갈림길에 표식을 만들고 길가에 끈을 묶어 산에서 길을 헤매는 사람이 없도록 했다. 며칠이 걸리는 일에 참은 물론이고 없는 곳간을 털어 보수까지 제대로 지불하니 불만을 갖는 이가 없었다. 일이 진행되는 것을 지켜보던 힐데베르트의 눈이 기특하다는 듯 반짝인 것은 덤이다. 

길이 넓어지니 행상이 편해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안 그래도 사람이 많던 장에 행상까지 불어나자 엄청난 인파 속으로 온갖 물건이 드나들었다. 주막에는 발 디딜 틈이 없다시피 했다. 예현은 질서를 확립할 겸 종종 시전에 직접 시찰을 나가곤 했다. 말간 얼굴의 젊은 원님을 알아본 이들이 허리를 굽힐 때마다 예현은 사람 좋게 웃었다.

그러나 이를 전해 들은 힐데베르트는 담뱃대를 물고 있던 입을 떡 벌렸다.

“그, 사농공상이라 하였는데….“

언짢게 중얼거리는 힐데베르트의 말에 예현은 어깨를 으쓱였다.

“열심히 사는 사람들입니다. 낮추어 차별할 이유가 없지요.”

“그래도, 장사치 중에서는 꼭 질 나쁜 놈들이 있단 말이지. 그리고 사또는 너무… 안 되겠다, 다음에는 나랑도 가세.”

“그럴까요? 저야 좋지요.”

그리하여 원님이 구릿빛 피부와 금빛 눈동자를 뽐내는 서역인을 끼고 시전에 나선 날, 힐데베르트는 예현의 생각과는 다른 방향으로 폭발적인 반응을 얻었다.

그릇 가게에서는,

“아니, 이게 몇 년 만이야! 어쩜 이리 하나도 안 늙었담?”

“내 서역인이라 그래 보이는 게지. 우전댁도 20년 전 얼굴 그대로인데 뭐 나한테 그럽니까?”

“듣기 좋은 말 하는 버릇도 어디 안 갔네!”

또 곡식 상인이 그를 보더니,

“아니, 힐데? 자네 안 죽었구먼?”

“아주 멀었지. 황씨는 잘 있었나? 애들은?”

“어느 애들? 자식놈들, 손주 놈들?”

“뭐? 손주가 생겼다고? 이런, 내 뭐라도 좀 사 와야지, 기다리게.”

“됐어! 살아있다고 얼굴 내민 걸로 족하지. 한잔하러 갈까?”

“오늘은 안 될 것 같은데?”

“아니 왜… 아뿔싸! 나으리! 이거 정신이 팔려서, 아이고…”

이런 식이었다. 정말로, 그를 아는 사람이 두루 넘치는 나머지 힐데베르트는 세 발짝마다 인사를 하고 다녔다. 예현은 벙쪄서 젖은 낙엽마냥 힐데베르트를 좇을 뿐이었다.

“정말… 마당발이시군요.”

“…그, 여기서 오래 살다 보니… 흠, 길을 다듬은 지 얼마나 됐지?”

“다듬는 데 한 달이 걸렸고, 일꾼들을 해산시킨 뒤 석 달이 조금 넘었지요.”

“석 달이라… 감탄스러워. 그게 이런 식으로 인간들에게 보탬이 될 줄은 몰랐는데. 상품 질이 전반적으로… 오.”

걸음을 멈춘 힐데베르트가 한 좌판을 기웃거렸다. 가까이 가서 보니 색색의 갓끈이 휘황하게 늘어져 있었다. 힐데베르트는 그중 하나를 집어 들곤 햇빛에 비추어가며 빛을 살폈다. 상인이 옆에서 추임새를 올렸다.

“이야, 보는 눈이 있으십니다.”

“이거… 이것, 어울리겠는데.”

예현은 잠깐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예? 누구… 저 말입니까?”

“그럼 누구를 이를까. 여기, 옆에 좀 서 보게. 대어 보자.”

힐데베르트가 당장이라도 예현의 갓 아래에 갓끝을 재어 볼 듯 나섰다. 예현은 힐데베르트에게서 얼른 물러났다. 

“아니… 아니 됩니다. 관직에 앉은 사람이 사치를 할 수는…“

“어허, 잘 어울릴 거래도. 사또, 공직자로서 품위유지란 것도 있지 않아.”

“저는 괜찮습니다. 아직 그런… 여유가 있지도 않고… 그, 힐데 공이 쓰실 것을 산다면 말리지 않겠습니다.”

예현은 간신히 힐데베르트를 달랬다. 힐데베르트는 투덜거리며 좌판에 좀 더 집적거리더니 기어코 갓끈 하나를 골랐다. 호박과 마노가 어우러져 호사스러우면서도 기품이 있는 물건이었다. 그 빛깔이 힐데를 닮았다고, 예현은 속으로 생각했다.

그 날 나들이의 마지막은 예현이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시전 구석의 주막이었는데, 특이하게도 국수 요리를 내어 주었다. 힐데베르트는 그 국수를 먹고 나서야 토라진 것을 풀었다. 한 젓가락 얻어먹었으나, 도통 어디서 왔는지 모를 맛이었다.

둘은 예현의 거처로 돌아와 시전 좌판의 질서 문제와 조세 방안에 대해 한참을 논했다. 이런저런 견해를 풀어내던 힐데베르트는 슬금슬금 품에서 갓끈 꾸러미를 꺼내 들었다. 예현은 살짝 눈을 굴렸다.

“돌아가실 때 장식하셔도 좋겠군요.”

“음, 사또야.”

이럴 것만 같았다. 과연 연륜에 비례하는 것인지, 힐데베르트는 묘하게 고집이 센 편이었다. 그리고 때로 그렇게 고집을 부릴 때는 저런 호칭으로 예현을 부르곤 했다.

“…안 받습니다.”

“준다곤 안 했잖아.”

“…….”

“그냥… 한 번만 대어 보면 안 될까? 정말 어울릴 듯하여 그러는 것인데….”

예현은 한숨을 푹 쉬었다.

“진짜 대어 보기만 하는 겁니다. 여기서만요.”

힐데베르트가 활짝 웃으며 갓끈의 양 끝을 길게 잡고 서안² 옆을 굼실굼실 돌아 예현의 곁에 앉았다. 그가 커다란 손을 예현의 귓가에 올리자, 하얀 볼 옆으로 노란 호박이며 마노가 어룽졌다. 힐데베르트가 만족스러이 웃었다.

“예쁘구나.”

예현은 순간 제 속에 더운 바람이 훅 부는 듯했다.

귓바퀴가 몹시 뜨거웠다. 저 스스로에게 당황하여 뭐라 대꾸하지 못하고 입만 뻐끔이는데, 힐데베르트가 손에서 힘을 풀어 갓끈을 툭 떨어뜨리며 일어섰다.

“흠, 시간이 이렇게 늦은 줄도 모르고 앉아 있었구나. 자네도 오늘 한참을 돌아다녔으니 푹 쉬는 게 좋겠어. 늦은 시간까지 눈치 없이 앉아 있던 것 같아서 미안한걸.”

“어, 아니… 아닙니다. ”

“그럼 가보겠네. 어어, 안 나와도 돼.”

“저기, 이거, 이것 들고 가셔야….”

“잠깐만 맡아 주게.”

힐데베르트는 기어이 갓끈을 예현의 손아귀에 올리고 그것을 쥐게끔 손가락을 꾹꾹 말아 주었다.

“밤길에 강도라도 당할까 그래. 내가 다음에 찾아 갈 테니까, 응?”

“…예.”

문이 바삐 닫히고 한참이 지난 후에도 예현은 고개를 들지 못했다. 그저 눈길을 두고 있던 갓끈에 장식된 호박이 문득 그 눈동자같아 예현은 눈을 질끈 감았다.

밤새 온 얼굴이 홧홧하여 잠을 이루지 못했다. 

病症

    병증

예현은 혼자 있을 때마다 곧잘 그 갓끈을 들여다보았다. 가져가라고 사정하던 것이 무색할 정도였다. 특히 그 호박의 빛깔이 꼭 어떤 이의 눈빛을 닮았기에 한 번 들여다보기 시작하면 어찌하여도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물론 힐데 앞에서는 절대 그런 티를 내지 않았다. 그런 체를 곧잘 해내어 부지해 온 삶인 터다.

들키진 않았으리라… 아마도.

그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힐데베르트는 자꾸만 갓끈을 챙기는 것을 미뤘다. 그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자신을 깨달은 예현은 약간 아연해졌다.

그러나 예현이 어찌 흔들리든 계절은 달려가고 있었다. 매미가 하나 둘 울기 시작한 어느 계절에 힐데베르트는 ‘올해는 가뭄이 들 지도 모르겠다’고 중얼거리더니 예현에게 하루를 통으로 비워달라는 청을 했다.

“귀한 옷은 입지 말고.”

“어디로 가기에 그럽니까?”

“산을 좀 올라야 해.”

“산이요?”

그렇게 아침 일찍 힐데를 따라갔는데, 이건… ‘좀’이 아니었다. 이젠 익숙해진 산길에서 조금 벗어나는가 싶더니 곧장 우거진 나무와 풀 사이를 헤치며 걸어야 했다. 와중에 힐데베르트의 걸음걸이엔 거침이 없었다.

잠깐 쉬었다 가면 안 되냐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올 쯔음 힐데베르트의 걸음이 느려졌다. 우뚝 서 있는 커다란 바위 하나를 돌자 끝없이 시야를 가리던 수풀도 어느새 뜸해져 있었다. 그들이 당도한 곳에는 깊지도 너르지도 않은 작은 계곡이 흐르고 있었다.

“와….”

“고생했어.”

목을 축이던 산짐승 몇몇이 도망가는 소리가 들렸다.

멀지 않은 곳에 맑은 물이 청량하게 흐르고 있었다. 예현은 조심스럽게 물가로 발걸음을 옮겼다. 산 중턱 너머에서 끝없이 쏟아지는 물은 멀리서 볼 때보다 훨씬 그 양이 많았다.

“꽤 오래 지켜봤는데 여긴 줄곧 가물지 않았거든. 7년쯤 전에도 한번 가뭄이 돌았는데 멀쩡했으니까 쓸 만할 게야.”

“감사합니다. 과연… 물을 전답까지 어찌 끌어오느냐가 관건이겠군요.”

“그건 나도 좀 걱정하긴 했는데… 사또가 똑똑하니까 어떻게든 해내지 않을까 하고?”

목소리에 다소 짓궂음이 묻어있었다. 예현은 무어라 항의하려 고개를 들며 몸을 돌렸다.

그 순간, 막 디딘 발이 훅 미끄러졌다.

엇, 하는 한마디조차 할 새 없이 순식간에 균형을 잃었다. 예현은 요란하게 물속으로 나자빠졌다. 풍덩! 한 여름인데도 물이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예현은 허우적거리며 몸을 일으키려 노력했다. 갑자기 몸이 젖어 그런지, 무릎 정도 되는 깊이일 뿐인데도 이상하리만치 몸을 바로 세우기가 버거웠다. 다행히 확 뻗어진 손이 그를 일으켰다.

‘아니, 무슨 힘이 이렇게…’

일으켰다기보다는 흡사 어린아이를 들어 올리듯 한 모양새였다. 예현은 힐데베르트의 손에 겨드랑이가 걸린 채 얼굴에 맺힌 물을 쓸어내리고서야 겨우 눈을 뜰 수 있었다. 

걱정스러운 힐데의 얼굴이 별안간 시야에 가득했다…

얼굴에 화악 피가 몰렸다.

“괜찮아, 사또야?!”

“그… 괜찮습니다. 놔 주셔도 됩니다…. 안 다쳤어요.”

“잠깐만, 뭍에 올려주어야… 어, 어어!”

순식간에 두 인영이 다시 사방에 물방울을 흩뿌리며 주저앉았다. 퍼드득거리며 겨우 중심을 잡고 앉은 예현은 제가 힐데베르트를 깔고 앉아 있는 것을 깨닫고 또 대경하여 허우적거렸다. 멀리서 보는 이가 있었다면 다 큰 어른 둘이 물장난을 치고 있다 생각했을지도 몰랐다.

겨우 소강상태에 접어들었을 땐 둘 다 흠뻑 젖은 채였다. 

힐데베르트의 도포는 물에 젖어 이젠 검은 색처럼 보였다. 그는 쓰고 있던 갓이 거추장스러웠는지 매듭을 훌훌 풀어 던져버리곤 얼굴을 한 번 쓸어올렸다. 갓 아래에 곱게 묶인 상투가 과연 온통 희었다. 드물게 얼빠진 표정을 한 힐데베르트가 물이 뚝뚝 떨어지는 제 옷자락을 한 번, 예현을 한 번 보곤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더니, 이내 고개를 꺾으며 박장대소를 했다.

“아니, 무어가 그리 재미있으십니까…”

“재미있고말고! 하하하!”

그 웃음은 묘하게 전염성이 있어, 결국 예현도 그를 따라 웃고 말았다. 그렇게 한참을 마주 보고 웃었다. 나무 그늘 사이로 빛이 새고 있었다. 웃음소리가 윤슬처럼 반짝였다.

그렇게 한 여름에 예현은 앓아눕고 말았다. 

쫄딱 젖은 예현을 바래다주고 이틀 만에 다시 찾아온 날, 행랑어멈만 울상으로 힐데베르트를 맞았다. 힐데베르트가 마당에 서서 자초지종을 듣고 있던 차에 예현의 침소가 벌컥 열리더니 처음 보는 남자가 튀어나왔다. 의원인 듯했다.

눈이 마주친 남자가 힐데베르트를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입을 열었다.

“그쪽이 힐데베르트요?”

“맞습니다만… 누구신지?”

“최윤. 잠깐 나 좀 봅시다.”

그러곤 건넌방으로 쑥 들어가 버리는 것이다. 당황해서 멀거니 서 있던 힐데베르트는 내주댁이 채근하여(저 의원님이 아주 성질이 무섭습니다! 빨리 따라가시어요!) 겨우 그 뒤를 따랐다. 

최윤은 제 집인 양 방 안에 앉아 있었다.

최윤의 앉으라는 손짓에 마주 앉긴 했는데, 그러곤 한참을 말이 없었다. 극도로 어색한 적막함이 방 안을 메웠다. 그 동안 최윤은 시꺼먼 눈동자로 빤히 힐데베르트를 쳐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힐데베르트는 이게 노려보는 것인지 잠시 고민했다. 그러던 최윤이 처음 꺼낸 말은 제법 엉뚱한 축에 속했다.

“사냥꾼이요?”

“예?”

“사냥 다니시냐고.”

“아니… 전혀요. 탁상 물림입니다.”

“그런 거 치곤 풀 냄새며 짐승 냄새가 진동을 하는데.”

노려보는 것이 맞았던 모양이다.

“아, 오기 전에 시전엘 좀 들렀습니다. 약재상과 피혁상에 들러서 그런가 봅니다. 냄새가 그렇게 짙습니까?”

“진하다마다. 품에 가축이라도 품고 온 줄 알았네.”

어느새 상대가 말을 놓았다. 이런 치인가 하여 힐데베르트는 별 내색하지 않기로 했다.

“…그, 의원께서는 이 동네 분은 아닌 듯한데요. 어디 멀리서 오셨습니까?”

“한양.”

말이 짧아도 이렇게 짧을 수가 없다. 그러고는 또 제가 하고 싶은 대로 말을 한다. 

“뭐 하나 물읍시다.”

이번엔 또 존댓말이다.

“아, 아는 거라면야….”

“예현이 저놈이 약 먹는 꼴을 혹시 보았소?”

“예? 어디가 아픕니까?”

“봤냐고.”

음. 재깍재깍 답이 없으면 곧장 말이 짧아지는군.

“전혀… 못 봤습니다. 지병이 있는 겝니까?”

“약재상에 가거나 따로 의원을 본 적도 없단 말이지.”

“예. 적어도 제가 볼 적에는 한 번도….”

그 말을 들은 최윤의 표정은… 힐데베르트는 맹세코 그리 섬뜩하고 사나운 얼굴은 평생에 처음 보았다. 절로 어깨가 좁혀졌다. 의원의 탈을 쓴 야차가 끓는 용암처럼 씹어 말했다.

“약을.”

“예… 예.”

“약을 두고 갈 터이니… 저놈이 하루 한 번 어김 없이 먹도록 감시 좀 하십시오. 저 새끼가 뒤지고 싶어서 아주 용을….“

“윤. 힐데 공을 괴롭히지 마.”

두 남자는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어느새 소창의 차림의 예현이 문간에 기대어 서 있었다. 창백한 낯에 식은땀이 맺힌 모양이 누가 봐도 병자의 상이었다. 

“지금 네놈이 나를 괴롭히고 있는데.”

“예현…! 이리 돌아다니면 어찌해. 어서 들어가 쉬어.”

“이제 좀 살만한 차인데요.”

“그게 살만한 거면 저어기 건넛집 제사는 잔치냐? 까불어, 이게.”

“아냐, 정말로…”

그러나 거기까지 말한 예현은 금세 비틀거렸다. 힐데베르트가 벌떡 일어났으나 의원의 몸놀림이 훨씬 빨랐다. 그는 인상을 잔뜩 쓰고 혀를 차더니 마른 몸을 번쩍 들어 올렸다. 그리곤 고개만 살짝 돌려 힐데에게 말했다.

“좌우지간 이놈 먹일 약은 행랑어멈에게 맡겨 둘 테니 부탁 좀 하겠습니다.”

“그, 그… 무슨 약입니까? 무슨 병이기에…”

“죽음에 이르는 병이지.”

힐데베르트는 아연하여 입을 쩍 벌렸다. 최윤은 그 얼굴이 재밌다는 듯 피식 웃고 덧붙였다.

“홧병이오.”

최윤은 예현을 이부자리에 던져두곤 고을 약재상 구경이나 가야겠다며 훌쩍 나가버렸다. 혼자 남은 예현은 누운 채 눈을 꿈뻑였다. 하도 많이 자서 그런지 더는 잠이 오지 않았다. 멍하니 천장의 나무 무늬를 세다가 문밖의 기척을 눈치챈 예현은 조금 고민한 뒤 목소리를 내었다. 

“힐데 공. 들어오셔도 괜찮아요.”

오락가락하던 인영이 뚝 움직임을 멈췄다. 예현은 샐샐 새는 웃음을 이불 속으로 숨겼다. 힐데는 참 알기 어려운 사람이지만, 이따금 정말 알기 쉬운 사람이 된다. 곧 문이 달각 열리고 힐데베르트가 머리를 들이밀었다.

“으음, 쉬는 데 내가 방해 하는 게 아닌가 하고….”

“이틀 넘게 누워만 있었는데요. 잠도 안 옵니다. 차라리 말벗이 있으면 좋겠는데요….”

예현은 일부러 앓는 소리를 내 봤다. 어떨까. 속으로는 조금 조마조마했다. 이내 힐데베르트가 발소리 없이 문지방을 넘어와선 예현의 옆에 앉았다. 

“누워 있어.”

힐데베르트가 만류했으나 예현은 굳이 일어나 앉았다. 아까 최윤이 괜한 말을 한 터라 눈치는 보였지만 그렇다고 힐데 앞에서 세상 편하게 누워있을 수는 없었다….

미묘한 정적을 깨고 힐데베르트가 예현에게 물었다.

“올해 사또가 몇 살이지?”

“저,,, 스물넷입니다.”

“허어… 약관을 겨우 넘었는데 어찌….”

왜 물어보나 했더니….

아무래도 힐데베르트는 그 ‘홧병’에 관해 물어보고 싶어 근질근질해 보였다. 이대로라면 모든 것을 물어보겠지. 그러면 자신은 모든 것을 다 대답할 수밖에 없다. 예현은 그냥 제가 먼저 선수를 치기로 했다.

“힐데. 저 약 먹었었습니다. 힐데가 안 볼 때요.”

“정말이냐? 이런, 의원에게 다시 이야기를 해 둬야…”

“여기 오고서 일주일 정도지만요.”

힐데베르트의 눈이 홱 가늘어졌다. 그렇지만 힐데에게 거짓말은 하고 싶지 않으니까….

“믿어주세요. 괜찮아서 안 먹은 겁니다.”

“괜찮은 걸 네가 판단하면 어찌해? 그건 의원이 판단해야지.”

“진짜예요. 여기 오고 나서 바쁘게 일하다 보니 화든 무어든 다 잊히던걸요. 공기도 좋고, 힐데 공도, 음, 많이 도와주시고. 힘든 것이 없습니다.”

“…….”

힐데의 눈에 여전히 불신이 가득했다. 농이라도 해야 할 성싶었다.

“굳이 따지자면 지금이 여기 와서 가장 힘든 순간인 것 같긴 한데요… 막 열도 나고. 기운도 없고.”

…나름 웃자고 던진 말인데 어째 힐데베르트는 더 시무룩해졌다. 예현은 필사적으로 덧붙였다.

“그, 정말입니다. 열도 이제 다 떨어졌어요.”

“…정말이야?”

“네, 재어 보세요.”

예현은 능청스레 몸을 기울여 이마를 내밀었다. 이것은 어느 정도… 사리사욕이었다. 조금 닿아 보고 싶었다. 종종 잠이 오지 않을 때 곧잘 상상하던 터다.

그런데,

예상치 못하게 금빛 눈동자가 훅 다가왔다.

“그래도 미열은 있는 듯한데.”

이마가 툭, 닿았다. 

“……!!”

온몸이 굳는 느낌이었다.

얼굴이 붉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저항은커녕 말 한마디 꺼낼 겨를이 없었다. 손으로 이마 언저리나 짚어볼 줄 알았지, 이렇게, 이렇게….

“얼굴은 아직 붉은데… 사또야?”

고장 난 듯 삐걱대던 예현이 겨우 대꾸했다.

“누…가 열을 잴 때 이렇게 재요?”

뱉어놓고도 아차 했다. 역증을 내려던 게 아닌데…! 와중에 힐데베르트는 또 엉뚱한 반응이다.

“원… 원래 이렇게 하는 거 아니었어?!”

먼저 놀란 건 예현인데 힐데베르트가 더 당황한 것 같았다. 예현은 상대의 당황에 숨어 얼른 말했다.

“보통은 손, 손으로 하지요…!”

“손으로? 이, 이렇게?”

힐데가 예현의 얼굴 가까이 두툼한 손을 들더니… 볼을 감쌌다. 이건 더… 아니… 그…!

“이것도 아니야?”

“아까는 이마를 재어 주셨지 않습니까. 이마를 짚으셔야죠….”

목소리가 졸아들었다. 힐데베르트가 쩔쩔매며 사과했다.

“미안해… 그, 몰랐어. 내 열을 재 줬던 사람은 그렇게 했었거든. 이마를 맞대어서….”

누가?

당신을? 당신과?

신경질처럼 물음이 차올랐다. 맙소사, 이예현. 당신에게 ‘예전’이 있으리란 생각을 왜 못했지? 누구와? 언제? 스스로조차도 영문 모를 질투가 파도처럼 널을 뛰는 통에 예현은 마른 입술을 핥았다. 그러나… 바로 코앞의 하얀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는 것을 보자 그 무엇도 따질 틈이 없었다. 홀린다는 게 이런 것일까. 

힐데베르트의… 모든 것은.

아름다웠다.

너무도…

“예현.”

눈이 다시 마주쳤다. 예현은 제 자신을 미루고 다시 그를 읽으려 노력했다. 여전히 그의 눈빛엔 당황이 있었다.

그러나 확신도 있었다.

“미안.”

왜 자꾸 사과하는 걸까? 당신이 미안할 것은 하나도 없는데… 그러나 그 사과의 뜻을 알게 되는 것은 금방이었다.

버석한 입술에 여린 살이 맞닿았다.

크게 뜨여진 검은 눈동자에 비친 금빛 눈동자가 스르륵 눈을 감았다. 몇 번 가볍게 부딪친 입술은 착각이 아니라는 듯 예현의 입술을 눌렀다. 맞닿은 입술이 따뜻하고 달았다. 양 볼을 감싼 그의 손이 예현을 끌어당기며 그를 탐했다. 힐데베르트가… 자신을.

그러나, 그러나 언젠가 상상했던 상황에 다다른 예현이 가장 먼저 마음에 담은 것은 벅참도 기쁨도 아닌 불신이었다.

그는 의심하고 재차 의심했다. 그 스스로도, 그리고 당신도… 이게, 꿈이 아닌 거야? 열이 너무 올라 환각을 보는 게 아닌가? 

서로 같은 마음일 리 없는데.

정말 힐데베르트, 당신이 내게?

당신은 이것도 실수라고, 잘 몰랐다고 할 거야? 

생각은 길었는데도 접문은 짧았다. 힐데베르트는 천천히 물러났다가, 예현의 어깨에 이마를 묻었다.

“미안해. 이제 안 할게… 그런데 나는…”

힐데베르트가 머뭇거리며 속살이듯 말했다.

“네가 어여쁘고 너무 좋은데… 이런 것도 처음이라,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어…….”

아.

그런 거였나.

“힐데 공.”

저를 드러낸 힐데베르트의 말에 깨달은 것이 있었다.

“미워하지 마….”

예현은 그래서 저 또한 자신을 조금 드러내기로 결심했다.

“힐데. 저도… 당신이 좋습니다.”

힐데베르트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냥 친애가 아니에요. 저는…”

예현의 말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 눈을 크게 떴다가 점점 환희가 온 얼굴을 채운다. 달처럼 밝아진 표정을 보며, 예현은 힐데의 다른 손을 끌어당겼다. 달리기라도 한 듯 빠르게 뛰는 제 심장으로 증명하고 싶었다.

“어느샌가 저 또한 당신을 연모하고 있어요.”

그러니까 우리는, 서로를 의심하는 마음이 같았다.

그런 줄도 모르고…….

 

戀愁

    연수

그 뒤 고뿔은 씻은 듯이 나았다.

다음날 다시 예현의 집을 찾은 최윤은 그의 맥을 짚곤 “울체가 조금 준 것 같긴 한데… 어떻게 한 거지.” 같은 이야기를 하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힐데베르트는 대문을 나서는 최윤을 붙잡아 받은 약에 무슨 약재가 쓰였는지 물었는데, 다 알아듣기는 어려웠으나 대충 종합하면 열을 내리는 약재가 이래저래 들어간다고 했다.

“병이 없는 자가 먹으면 몸의 열이 떨어져 픽픽 쓰러져 버릴 겝니다. 특히 시호의 비율이 높은 편이고.”

“시호?”

“간담의 화를 누르는 약재요. 뭐, 캐다 먹이시게?”

“어, 그래도 됩니까?”

“당연히 안 되지. 용도에 따라 정제하는 방법이 다르니 말이오. 뭐, 의원이 될 생각이 있다면야 내 밑에서 5년만 수학하면—”

“예현이먹을약은제가잘챙기겠습니다오늘고생하셨고산길조심하시고다음에뵙지요.”

문이 톡 닫혔다. 제법 무례한 축객령–심지어 객이 객을 내쫓았다–인데도 무감한 얼굴에는 변화가 없었다. 다만,

‘이름을 막 부르네. 언제부터?’

의원은 그런 의문을 가질 뿐이다.

힐데베르트는 의원의 말을 들은 뒤 몇 달을 매일같이 찾아와선 예현이 밥 먹는 양을 지켜보다가, 상을 물릴 때면 최윤이 지어준 약을 들이밀었다. 윤이 맡겨두었던 약은 둥근 환약이었는데, 예현의 말에 따르면 ‘약이 입가에 가까이 오기만 해도 쓴맛이 느껴진다’고 할 정도로 맛이 없는 듯했다. 예현의 얼굴이 몇 번 일그러지는 것을 본 힐데베르트는 손을 잡거나 어깨를 도닥이며 그를 달래다가, 어느 날인가부터는 주전부리를 챙겨 와선 약을 삼킨 예현의 입에 쑥 넣어주곤 했다.

힐데베르트가 예현을 달래거나 단 것을 주는 것은 꼭 아이를 대하는 것과 같았다. 그런 취급을 받을 나이는 한참을 지났음에도 어쩐지 예현은 기꺼웠다. 아비 생각이 나서 그런 것도… 없지는 않았다. 그의 아비는 서책 따위에서 묘사되는 어진 부모와는 거리가 멀었고… 아니, 아니다. 예현은 불이 붙으려 하는 제 불효막심한 생각을 저 멀리 밀어버렸다. 윤이 항상 열을 내리는 약재를 처방하는 이유가 다 여기에 있을 것이다.

어린 시절을 휩쓸고 간 가뭄 같은 기억은 그의 마음을 버석하게 마른 풀밭과 같이 만들었다. 마른풀에는 작은 마찰에도 금세 불이 붙기 마련이었고, 그 불길은 이내 몸 여기저기로 번지기 일쑤였다. 윤의 설명으로는, 그 불이 가슴에 또아리치면 명치가 답답해지고 소화를 방해하며, 팔다리로 가면 관절에 염증이 생기고, 머리로 가면… 그의 말을 조금 순화해서 옮기자면, ‘감정도 이지도 모두 태우고 재만 들어차서는 사람이고자 하는 마음을 잃게 만든다’고 했다. 처음 진단을 내린 날이자 두 번째로 목숨을 빚진 어느 날에 윤이 했던 말이다.

‘구해준 건 고맙지만… 이건 너무 쓰지 않나.’

상념을 걷어낸 것은 힐데베르트의 목소리였다.

“오늘은 팥떡을 좀 가져왔는데….”

약을 꿀꺽 삼킨 예현은 힐데베르트가 내미는 꾸러미를 받으려다 잠시 힐데를 빤히 보았다.

피부가 진하니 입술이 팥 빛이네.

‘그래서 단 맛이 나나?’

“예현?”

힐데의 부름에 예현의 눈이 살살 휘었다. 

“힐데. 이거, 얼마나 쓴지 궁금하지 않으세요?”

“…그 수는 지난번에도 부리지 않았어?”

예현은 도리어 당당했다. 앉은걸음으로 슬금슬금 힐데의 곁에 가면 그는 언제나 푸스스 웃으며 그에게 몸을 기울여 주었다.

이제는 예현도 곧잘 먼저 힐데에게 입을 맞추곤 했다. 옷깃을 잡는 데도 손을 벌벌 떨었던 몇 달 전을 생각하면 장족의 발전이었다. 아니, 사실 정인이 생겼다는 자체가 더 놀라웠다. 젊은 현감은 여전히 이것이 서로간의 호의는 아닐지 의심했다. 이를 들은 윤은 벌써부터 의처를 한다는 둥 (그는 기민하게 예현과 힐데의 사이를 눈치챘다) 병증이 오만데로 튀었다는 둥 하며 이죽거렸다. 

“으. 써….”

“힐데. 떡 드세요.”

“너 먹이려고 가져온 것인데….”

“윤은 반대할걸요. 팥은 기운이 따뜻해서.”

“그래도 말야…” 힐데베르트는 예현의 손을 잡고 주물거렸다. 윤이 내어준 약을 먹는 동안은 불편한 정도까지는 아니나 늘상 손이 찼다. “그 약이 너무 찬 기운만 있는 건 아닌가 싶어. 너무 한 쪽으로만 치우쳐도 안 좋은 게 아닐까 해서.”

“그 녀석이 더 잘 알겠지요. 나름 한양에서는 알아주는 의원 가문 출신입니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알아주는 의원 양반이 이런 데까지 내려와 있다고?”

“별난 녀석이라서요.”

“너 좋아하는 거 아니고?”

예현이 고개를 갸웃하곤 속삭이듯 말했다.

“힐데. 질투하시는 거예요?”

“…그냥 해본 소리인데.”

“저 화내는 거 아니에요. 오히려 좀… 기쁜데요.”

“……그래?”

어째서 그런지는 잘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힐데베르트는 가끔 자연 속에 홀로 지내다 온 사람과 같이 구는 면이 있었다. 아니면… 말도 안 되는 생각이겠지만, 연인을 두는 것이 처음일지도. 예현은 미소 지으며 힐데베르트가 가져온 팥떡을 그의 입에 쏙 넣어주었다. 고민에 정신이 팔려 떡을 주는 대로 받아먹곤 그대로 우물거리는 정인을 보며 예현은 마음에 수목이 번무하는 것을 느꼈다. 황야에 도달하고 만 여름과도 같았다.

그러나 고을의 사정은 예현의 속과는 딴판이었다. 힐데의 말대로 구름 하나 없는 날이 길어질 징조가 보였다. 예현은 미리 힐데베르트가 알려주었던 계곡에서 물줄기를 조금 끌어오기로 했다. 며칠을 고생한 끝에 마르기 직전이었던 논밭에 다시 물기가 차기 시작했다. 예현은 힐데에게 거듭 감사를 표했다.

새로 끌어온 물길은 과연 가뭄에도 마르지 않는 듯했는데, 다소 이상한 점은 있었다. 날씨에는 변함이 없는데 때로 물살이 끊겼다가도 어느새 다시 수위를 회복하곤 했다. 마치 누가 저 위의 계곡에서 물을 막았다 텄다 하면서 장난을 치는 것 같았다. 농사를 못 할 정도는 아니었으나 영향이 있는 건 사실이었고, 어찌 된 일인지 궁금하기도 하여 예현은 직접 수로를 점검해 보기로 마음먹었다.

늦여름의 더위는 예현을 땀으로 흠뻑 젖게 만들었다. 그래도 최근에는 스스로 체력이 붙었다고 생각했는데 순 착각이었던 모양이다. 물길을 따라 걸으며 산을 오르던 예현은 잠시 발길을 멈추고 숨을 골랐다.

그래도 저기 보이는 바위 곁을 돌아 오르면 곧 계곡이 나올 것이다. 예현은 처음 힐데와 이곳에 오르던 기억을 떠올리며 웃었다. 따로 청하여 같이 오자고 할 것을. 그도 즐거워했을 터인데…. 그렇게 생각하며 바위 언저리에 다다라 잠시 손을 짚은 순간,

예현은 온 산을 내달리는 포효를 들었다.

어느새 그는 주저앉아 있었다. 주체할 수 없는 공포에 몸이 덜덜 떨렸다. 예현은 이 소리가 무엇인지 알았다. 잘 알 수밖에 없었다.

어디선가 피 냄새가 나는 듯한 착각이 일었다.

‘범도 있고.’

처음 만난 날 힐데가 분명 그렇게 말했었다. 왜 잊고 있었을까.

바위 위에서 대호(大虎)가 그를 노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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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창작
페어
#BL

댓글 2


  • 몰입하는 족제비 구매자

    아니, 호환은 없었어 힐데베르트가 눈을 길게 휘며 웃었다. 내가 이 고을에 머무는 동안에는 단 한번도 없었지. <영감님 이렇게 섹시해도 되는 일인가요 여기서 못 빠져나가겟어요 당신에게 '예전'이 있으리라 생각을 왜 못했지? 누구와? 언제? 스스로조차도 영문 모를 질투가 파도처럼 < 이거지예 연하의 맛tv 미슐랭 어린 시절을 휩쓸고 간 가뭄같은 (중략) '감정도 이지도 모두 태우고 재만 들어차서는 사람이고자 하는 마음을 읽게 만든다'고 했다. < 이 부분 눈에 그리는 듯이 상상이 되어요 묘사가 참 좋네요 "힐데. 이거, 얼마나 쓴지 궁금하지 않으세요?" < 아기여우의유혹에쓰러지다 "...그 수는 지난번에도 부리지 않았어?" < 심지어 이미 쓴 적 있음 기절할 것 같음 맛있다 그 모습을 마지막으로 힐데베르트는 자취를 감췄다. < 히죽히죽 웃다가 여기서 멈춤 영감님아🤦‍♀️ 우와 창귀 설정 너무 좋아요 수호이에게 당해 창귀가 된 이승현 원작의 원로와 수족 관계를 범과 창귀 관계로 녹여내다니 작품이랑 잘 어울리네요! 정말정말 즐겁게 잘 읽었습니다! 동양풍을 좋아해서 유료발행을 오매불망 기다리고 있었어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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