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R
레이 기일에 묘비에 간 예최능힐
*공백 포함 2469자의 짧은 NCP 글입니다
*레이 기일 겸 블배 런칭 1주년 기념글
묘비 앞에 하얀 국화 송이를 놓았다. 푸른 들판에 놓인 꽃잎이 계절감에 어울리지 않는 눈송이를 만들어 냈다. 힐데의 머릿속을 가득 채운 이와 닮았으며, 지구에 온 그가 처음으로 좋아하던 것. 따가운 햇빛 아래 하늘로 자유로이 날아가는 흰 점들, 힐데베르트는 여름의 눈을 보며 어김없이 가슴의 한 켠이 시려져 오는 것을 감내했다. 끊이지 않는 제 나약에 쓴웃음을 소리 없이 흘리다 잠시 눈을 감았다. 염치도 없이 그리운 이를 그렸다.
"힐데."
너무 오래 시간을 끈 모양이었다. 걱정이 선연히 느껴지는 낮은 목소리에 현실을 인식했다. 앉았던 몸을 천천히 일으키자 복잡한 감정을 담은 예현의 슬픈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옆으로는 날카롭게 눈을 굴리는 윤이 있었고, 늘어져 있는 제 오빠의 손을 꾹 쥔 채 소리 없이 글썽이는 아미가 보였다. 나는 숨을 내쉬다 들이쉬었다. 무더운 공기가 폐로 들어왔다. 살아있음을 알리는 감각. 이제는 홀로 느껴버리게 된 조금은 원망스러운 감각. 힐데는 흐려지지 않는 이의 잔상을 애써 눌러내며 작게 웃어 보였다.
"저 괜찮습니다. 같이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과호흡은."
"안 왔습니다. 숨 쉰 거에요."
"힐데..."
"아미, 울지 마세요."
눈을 가늘게 뜨고 상태 점검을 끝낸 윤이 고개를 작게 끄덕이자, 힐데는 물기 젖은 목소리로 눈을 돌렸다. 동그란 얼굴에서는 이제 눈물이 방울방울 흐르고 있었다. 검은 옷으로 툭툭 떨어지는 물방울이 주인의 선함을 여실히 드러냈다. 힐데는 작게 웃음을 흘렸다. 참지 못하고 나간 손으로 머리를 쓰다듬으며 선임과 눈을 맞췄다. 세상에 자신을 2년 동안 혼수상태에 빠지게 한 적군의 죽음에 울어주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 여러 감정이 뒤섞인 채 선임의 눈물이 멎을 때까지 조용히 달랬다. 예현은 조금 전 힐데가 서 있던 곳에서 다른 꽃송이를 꺼내 놓고 있었다. 잠깐 묵념을 하더니 묘비에 쌓인 먼지를 조심스레 털어냈다.
그 모습을 죄 눈에 담던 힐데는 잘 누르던 죄책감이 고개를 드는 것을 느꼈다. 여리고 무른 아이는 자신의 말에 따라 레이를 죽이기 위해 목숨을 걸었다. 자신이 아끼는 친구와 동생을 잃을 뻔했으며, 같이 지내던 배저들은 대다수가 죽었다. 내가 레이를 설득했다면.. 레이가 죽지 않고 협상을 했다면.. 우리가 지구에 오지 않았다면... 시간을 되돌려도 지구로 갈 선택을 했겠으나, 본래 결정과 감정이란 별개의 것이라. 힐데는 숨을 막아오는 공기를 피해 고개를 숙였다. 전쟁은 끝났고, 레이가 죽은 지도 한참이 지났다. 그러나, 몇세기가 흘러도 익숙해지지 않을 것 같았다. 혀에서 비릿한 피 맛이 났다. 자신도 모르게 입 안을 짓씹던 것을 멈췄다. 거친 굳은 살에 담긴 부드러운 온기가 힐데의 손에 닿았다. 힐데의 흔들리는 시선이 예현의 단단한 시선과 맞닿았다.
"힐데."
예현이 다시 힐데의 이름을 불렀다. 깜빡이는 검은 눈이 힐데를 보듬었다. 침묵 속에서 힐데베르트는 천천히 어질러진 감정을 정리했다. 윤이 무감한 얼굴로 꽃을 놓고, 아미가 훌쩍이며 이미 깨끗한 묘비를 몇번이나 쓸고 올 때쯤엔 가슴을 짓누르던 응어리들이 적당히 치워졌다. 아, 이제 미소 짓는 표정을 할 수 있겠다. 감각이 없는 입꼬리를 끌어올려 아이를 안심시키려는데 예현이 입을 열었다.
"안 웃어도 돼요. 오늘은 레이를 기려도 괜찮아요 힐데."
"응, 괜찮아 힐데."
예현의 것보다 조금 작은 팔이 등을 감싸는 것이 느껴지자마자 금안에 물기가 서렸다. 감당할 수 없는 고통에 정신없이 발작하던 눈물이 아니었다. 온전히 레이를 기리기 위한 울음. 어느새 다리가 풀린 자신을 달래는 손길을 느끼며 힐데베르트는 레이를 찾아 작게 흐느꼈다. 흐느낌이 묻은 침묵 속에는 돌이킬 수 없는, 오래된 추억에서 파생된 감정이 연신 떠돌고 있었다.
양심이 없게도, 나는 아직 너를 그린다.
내가 너를 위해 울 자격이 없는 것은 안다.
하늘에서 너는 마지막 순간에 내 칼을 보았으니,
지금 같잖은 눈물을 흘리는 나를 증오할테지.
그러나 역시, 감정은 그리 논리적인 것이 못 되어서.
네가 떠난 날을 핑계로 마음껏 너를 그리워한다.
레이, 내 소중한 친구.
못난 친구를 둔 죄로, 제 몫의 삶보다 훨씬 일찍 떠나버린 내 친구.
너에 비해 나는 좋은 사람이 아니라, 용서를 구하진 못한다.
그럴 수 없고, 그럴 수 없어야 한다.
그래도.. 나를 향한 분노 혹은 증오 속에 우리의 좋았던 시절이 생각난다면,
너도 나를 찰나의 순간이라도 좋으니 생각해주기를.
마지막까지 너무도 이기적인 욕심을 떠올렸다.
흐르던 눈물이 자연스레 멎자 시원한 바람이 힐데의 얼굴을 스쳐 지나갔다. 말없이 윤이 건네는 휴지를 받아들며, 여즉 이어지던 예현과 아미의 토닥임 속에 남은 여운을 마무리한다. 조금은 가벼워진 발을 내디뎠다. 전보다 버겁지 않은 미소를, 제가 새로이 사랑하게 된 이들에게 보였다. 아까 흩날리던 여름의 눈송이가 손 안에 들어왔다. 너와 닮은 하얀 꽃잎. 힐데베르트는 그것을 조심스럽게 꾹 쥐었다. 그리고 꽃잎 하나를 보낸 하늘을 올려다본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에 레이 르뉘르가 보이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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