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랙배저

[블랙배저] 어른아이

그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예현은 눈부시게 살아냈다.

파도타기 by 율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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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현은 아주 어렸을 적부터 소리 없이 우는 법을 배웠다. 어떻게든 살아남기 위한 처절한 몸부림이었다. 큰 소리를 내면 맞는다. 아니, 단지 훌쩍이는 소리여도 그들의 신경을 거슬러 맞기 일쑤였다.

왜? 왜 나를 때려요?

세상에는 이유 없는 폭력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너무 일찍 깨달았다.

이승현도 그 자들이 그럴 줄은 몰랐겠지. 알던 사람들이 그렇게까지 제 아들을 학대할 줄도 몰랐을 테다. 하지만 세상에는 고작 그딴 이유로 정당화할 수 없는 문제가 널렸다. 예현이 딱 그런 경우였다.

불행으로 점철된 과거였다. 사랑만 받고 자라야 할 나이에 생물학적 친부가 주는 건 없었고 돌아오는 건 무관심이다. 그 무관심이 예현의 어린 시절에 깊은 상처를 남겼다. 마음의 상처는 아무는 속도가 지독히도 느려서, 다 커서도 깊이 흉져 있는 경우가 다분하다.

하물며 예현에게는 그 상처가 아물 여유조차 없었다. 때리는 사람은 없어졌어도 계속 눈치를 보며 살았다. 그 위에 모래를 뿌리고 자라는 수밖에 없었고, 곪은 상처를 그대로 품고 컸다.

한데 예현을 사적으로 잘 아는 사람이든, 아니든 누구나 인정할 만한 객관적 사실이 있지.

그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예현은 눈부시게 살아냈다.

*

소리 없이 침실의 문을 열었다. 문틈 사이로 새어 나온 거실의 빛이 넓은 침대 위로 희미한 선을 긋는다.

힐데베르트는 살금살금 예현의 침실 안으로 들어섰다. 좋아, 이 정도만 완전범죄다. 예현은 뒤척이지도 않았고 문소리도 안 났고 발소리는 이보다 조용할 수 없지.

상사의 침실 안에 멋대로 들어가다니 하극상 아닌가? 윤이 있었다면 뚱한 표정으로 그리 말했을 것이다.

하지만 현재 넓은 집 안에는 힐데와 예현 뿐이었다. 윤은 밖에서 새로 얻어온 크리처 사체를 씹고 뜯고... 아무튼 여러 실험을 하며 과학동에 처박혀 있었고 아미는 출타 중이다.

윤을 과학동에 붙잡아 두려면 새로운 크리처 대가리 아니면 팔다리 하나. 힐데는 유용한 사실을 잘 기억해 두자고 다짐하며 예현의 침대 가까이 다가섰다. 지금 나는 블랙배저 본부 총사령관 침실에 들어온 게 아니라, 대자의 침실 안에 들어온 거라고 되뇌면서.

눈이 어느 정도 어둠에 익숙해지고 나서 몸을 웅크리고 자는 예현의 형체가 보였다. 뺨이 있을 만한 곳에 조심히 손등을 대자 이내 축축해진다.

울고 있었구나.

소리 없이 우는 건 아마 어렸을 때 생긴 습관일 것이다. 아무리 노력해도 훌쩍이는 소리 정도는 나기 마련인데.

미리 휴지를 뽑아오길 잘했다. 힐데는 반듯하게 접어 둔 휴지로 아이의 뺨을 조심히 눌렀다. 휴지는 멈추지 않고 젖어들었다. 아담이 울 때 돌봐줬던 게 이렇게 도움이 되네...

아이는 아프면 아프다고 말하는 법을 배우지 못했다. 어떤 상처는 사람의 가슴에 깊게 남아서, 몇십 년이 지나 어른이 된 후에도 사람을 과거에 가둔다.

예현이 과거에 갇혀 사는 사람이라는 뜻은 아니다. 아이는 정말, 정말 잘 컸다. 천성이 상냥하고 올곧은 아이였다. 지옥 같은 환경에서 엇나간다 해도 비난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을 텐데. 몇 번을 말해도 부족할 정도로 혼자서 잘 자랐다.

힐데는 그런 아이가 너무 기특하다가도 이내 한없이 안쓰러워지곤 했다. 이 두 가지 감정은 늘 쌍을 이루어 찾아왔다. 바르게 자란 훌륭한 어른이라고 해서 마음에 흉진 것까지 사라지는 게 아니라는 걸 그는 누구보다 잘 알았다. 본인은 인정하지 않겠지만, 그 자신이 그런 사람인지라.

마냥 무르지도 않고 끊어낼 건 제때 끊어낼 줄 알며, 공과 사를 칼같이 구분하는 사람. 하지만 정말, 정말 좋은 사람.

알게 된 지 1년이 겨우 지났지만 힐데베르트는 예현이라말로 지도자의 자리에 적합한 사람이라 생각한다. 예현이 듣는다면 무어라 할까? 힐데가 좋게 봐주셔서 감사하네요?

예현. 대자야. 너는 너 자신에게 좀 관대해질 필요가 있어. 이미 지고 있는 책임으로 충분한데 왜 쓸데없는 짐을 자처해서 지려고 해.

힐데는 그 이유를 어렴풋이 안다. 그건 예현이 타고나길 상냥한 사람이라서. 그래서다.

침대에 앉자 풀썩 소리가 난다. 깊게 잠든 예현은 그 정도 소리로는 쉬이 깨지 않았다. 힐데는 잠시 아이의 뺨에서 손을 거두어 복슬복슬한 머리 위로 옮겼다. 다정한 손길이 예현의 머리카락 위에 머물러 한동안 가만히 있었다.

현실에서 눈 돌리지 않는다. 그렇기에 수많은 문제를 직시할 수 있고 차마 지나치지 못한다. 하나둘씩 어깨에 올려놓기 시작한 책임은 이내 눈덩이처럼 불어나 거대한 의무가 된다.

힐데베르트 탈레브는 이예현과 닮았다. 그래서 서로에게 완전한 의지가 될 수는 없을 것이다. 왜, 가끔은 양심 없이 살라고 말해 주는 사람도 필요한데 차마 그러질 못하거든. 어떠한 사고를 거쳐서 행동하게 됐는지 너무 잘 알아서.

얘야, 윤이 챙기고 살 양심이 다 너한테 옮겨간 걸지도 모르겠다. 실없는 생각을 하면서도 힐데베르트는 예현의 머리카락을 쓰다듬는 걸 멈추지 않았다.

너 같은 사람이 가까이하는 자라면 아마 비슷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어. 근데 지금 생각해 보면 반대여서 차라리 다행이더라... 모르긴 몰라도 너 대신 윤이 화내준 적도 몇 번 있을 것 같다. 먼저 말해주기 전까지 물어볼 생각은 없지만 아무튼 그래.

예현이 잠에서 딱 깨지 않을 정도로만 조곤조곤 말했다.

예현. 너는 정말 잘 컸어... 훨씬 이전에 들었어야 할 칭찬인데 이제야 말해줘서 미안해. 누구도 너보다 잘 해내진 못했을 거야. 내 의지를 이은 것 하며 이후에 거대한 조직을 이끄는 일까지 전부.

지금도 너무 잘 하고 있는데 조금만 책임을 내려놓고 살아. 네 주변에는 책임을 나눠 질 수 있는 사람이 정말 많아.

기특한 아이야. 그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눈부시게 살아내서. 그리고 나랑 만나 줘서 고마워.

듣기 좋은 말만 듣고 컸어야 되는데. 이제 와서 자는 애한테 말해줘 봤자 늦은 거 아닌가 싶긴 했다. 그런데 얘나 나나 둘 다 깨어 있는 상태에서 얘기하면 중간에 도망갈 것 같단 말이지. 실없는 생각을 하며 힐데는 예현의 뺨에 다시 손등을 가져다 댔다. 눈물이 가신 뺨에는 옅은 온기가 돌고 있었다.

다행이다. 힐데베르트는 저도 모르게 작게 미소지었다.

다음 날 비척비척 일어난 예현이, '저 사실 그때 안 자고 있었어요'라고 이실직고하리라고는 꿈에도 예상하지 못한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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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 3000자~~~ 한 2500자쯤 나오지 않을까 싶었는디 약간 더 썼어용

걍... 예현이 쓰다듬어 주는 힐데가 보고 싶었습니다

예현은 정말 잘 컸고 훌륭한 어른이지만 그런 사람이라도 이따금 과거에 갇힐 때가 있지 않나... 쭉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어요. 하필이면 닮은 두 사람이 대부와 대자 관계라는 것도 읽으면서 신기했던 점이고요

평소에 했던 생각 이것저것 섞어서 썼습니당

비록 알게 된 지 얼마 되진 않았지만 두 사람은 정말......... 가족 같다는 생각을 자주 했어요

솔직히이예현아빠김힐데밖에없음...

캐해 실패한 부분이 있을 가능성 다분합니다... 후다닥 쓰느라 이상한 부분이 있을 수도 있고요

그래도 쓰면서 재밌었어요!!! 읽으신 분들도 즐감하셨으면 좋겠네요 히히

+2023/12/26 백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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