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랙배저

[블랙배저] 크리스마스의 가족

최윤은 최초의 애정을 제 동생을 통해서 배웠다.

파도타기 by 율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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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미는 좋아하는 것이 많다. 쉬는 날에 영화 보기, 새우완자치즈떡볶이 먹기, 그냥 침대에서 뒹굴거리기...

그중 하나가 뜨개질이다.

아미가 처음으로 뜨개질을 접한 건 초등학교에서였다. 어쩌다 초등학교 1학년이 뜨개질을 배우게 되었는지 정확한 경위는 생각나지 않는다. 아무튼 선생님은 첫날에 털실과 뜨개질바늘을 사 오라고 하시며, 몇 달 동안 뭘 만들지 결정해 오라셨다. 아미는 고민 없이 목도리를 뜨기로 했다. 일자로 쭉 뜨기만 하면 되니까 제일 쉽잖앙!

하지만 초보자가 으레 그렇듯 아미는 실수를 꽤 자주 저질렀다. 아직 손끝이 여물지 못해 더 그랬다. 분명 이 자리에 코가 있어야 하는데 없던 적이 빈번하다. 바늘로 실과 실을 엮으려던 아미는 그럴 때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왜징? 왜 이 자리에 코가 없는 거징? 설마 처음부터 다시 떠야 하나??

코를 빠뜨릴 때마다 목도리를 다시 뜨기 시작하면 영영 목도리 하나도 제대로 완성하지 못하리라는 걸 아미는 오래지 않아 깨달았다. 좋아, 그냥 무시해야겠당!

목도리를 10cm 정도 뜨고 나서야 아미는 그것의 주인을 고민하기 시작했다. 뜨개질로 처음 만든 물건이니 본인이 가질까 꽤 오래 망설였던 것 같다.

아이는 오래지 않아 제가 가장 좋아하는 사람의 얼굴을 떠올렸다. 1년 뒤면 고등학생이 되는 중학교 3학년의 윤.

그래도 의미 있는 거니까 그냥 내가 가지기보다는 오빠한테 줘야징!

동기부여가 확실히 되니 목도리를 뜨는 속도가 제법 빨라진다. 갓 초등학생이 된 아이는 한참 남은 노란색 털실 뭉치를 바라보며 배시시 웃었다.

크리스마스에 선물로 줘야지. 오빠가 좋아했으면 좋겠다.

*

에이택 오너 일가는 썩 다정한 가족은 못 된다. 이 집안 사람들 대부분이 본인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최윤은 아주 어릴 때부터 잘 알았다. 그런 집구석에서 윤에게 유일하게 대가 없는 애정을 아낌없이 퍼붓는 존재.

윤은 아미를 사랑했다.

입양되어 성이 바뀌기도 전, 아미를 처음 본 감상은 이러하다. 작다. 너무 작았다. 아기는 원래 다 저렇게 작은가? 툭 건드리면 부서질 것 같이 연약한 그 존재가 제 동생이란다. 입안에서 몇 번이고 굴려봐도 영 익숙해지지 않는 단어였다.

윤이 처음부터 아미를 끔찍이 아꼈느냐 하면, 딱히 그렇지는 않다. 제 동생이라 해도 별 감흥이 없었다.

윤은 제가 여타 사람들과 다르다는 점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다. 평균을 훌쩍 웃도는 지능뿐만이 아니다. 남들은 커가며 당연히 깨닫는 감정이 윤에게는 결여되어 있었으므로.

한데 어린 시절의 아미는 미친 듯이 사랑스러운 아기였다. 아미를 처음 마주했던 9살의 윤이 미처 예상하지 못했던 점이다.

동그란 눈을 뜨고 방긋방긋 자주 웃는데 그게 그렇게 귀여울 수가 없다. 남이 함부로 제 머리를 쓰다듬는 걸 싫어하는 아기는 윤에게만은 제 복슬복슬한 정수리를 내주었다. 내가 뭐라고. 나는 쟤한테 딱히 잘해준 것도 없는데 왜 나한테만.

아기가 주는 애정에 천천히 스며들었다. 가랑비에 옷 젖듯이 윤은 아미를 사랑하게 되었다. 언제부터인지는 모르겠지만 바람이 불면 날아갈 듯한 아이를 윤은 지키겠다고 마음먹었던 것 같다. 고작 9살에 그리 결심했다.

최윤은 최초의 애정을 제 동생을 통해서 배웠다.

그랬던 동생은 어느새 훌쩍 컸다. 옹알이를 하고, 저를 오빠라고 처음 부른 아이의 모습이 아직도 선연한데. 이젠 발음도 또박또박하고 발에 날개라도 달린 듯 잘 뛰어다닌다.

- 오빠, 나도 이제 다 컸엉!

아미는 저도 이제 초등학생이니 다 컸다고 으스댔다. 그때마다 윤은 입가에 희미한 웃음을 띄운다.

- 밥 더 먹고 나만큼 커. 그러면 다 큰 거야.

-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아미가 어른이 되어도 윤은 언제까지고 그 위에 사랑스러운 아기의 모습을 겹쳐 볼 터다. 분명 그럴 터인데.

"마음에 들어?"

꼬맹이가 다 컸다. 목도리를 나한테 다 주네.

에이택 회장가에 입양되고 나서 처음 맞이하는 크리스마스였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아미는 윤에게 선물을 내민다. 포장지에는 테이프가 잔뜩 묶여 있고 겉면에는 리본이 엉성하게 묶인 꾸러미를 열어 보니 목도리가 나왔다.

빈말로라도 잘 만들었다기엔 무리가 있었지만 보는 사람이 기분 좋아지는 물건이다. 중간중간 털실이 삐져나오고 코가 빠졌어도 만든 이의 정성과 노력이 느껴지는 것.

윤은 엄지손가락과 검지손가락 사이로 털실을 문질렀다. 노랗고 따뜻하고 보송보송하다. 병아리를 연상시키는 목도리였다. 아미가 작은 목소리로 덧붙였다. 그거 내가 만든 거야.

누구 동생이길래 이렇게 기특하냐. 어째 선물도 꼭 저 같은 걸 만들어 와선.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저를 쳐다보는 아미에게 윤은 담백히 진실을 고한다.

"마음에 들어."

물음표가 온점으로 바뀐다. 아미는 윤의 답변을 의심하지 않는다. 아미가 아는 윤은 다른 이의 기분을 좋게 하기 위해 거짓말을 할 사람이 아니었다.

아미는 온 세상을 얻은 듯 환히 웃었다.

말없이, 한참 동안 저보다 머리 몇 개는 작은 아미의 정수리를 쓰다듬는 손길이 다정하다.

*

고등학교에 올라가고 아직 꽃샘추위가 지독한 한 달. 그동안 윤은 아미가 선물한 목도리를 매일 하고 학교에 나갔다. 날씨가 제법 풀려서 목도리를 하고 있으면 더울 시기까지도, 하루도 빠짐없이.

검은 무기질을 연상시키는 소년. 무표정한 낯의 전교 1등이 허구한 날 올이 다 풀린 노란색 목도리를 하고 다니는 모습은 정말 인상 깊었다. 공부를 열심히 하기 시작한 뒤로 단 한 번도 1등 자리를 빼앗겨 본 적이 없는 예현이 윤을 보고 처음 한 생각이다.

솔직히 열받았다. 시험공부를 왜 하냐는 재수없는 소리를 하는 놈이 1등을 한다니 머리가 억수로 좋은가. 머리만 좋으면 다야? 재수없어. 재수없다 진짜. 게다가 주변 사람들을 대하는 표정은 시종일관 똑같아서 무서울 정도다. 그런데 노란색 목도리가 취향인 이상한 애...

교문 앞에서 손을 붕붕 흔들고 있는 아미를 보고 미묘한 웃음을 짓는 윤을 본 건 정말 우연이었다. 예현은 윤에게 목도리를 준 사람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동생이 준 거였구나. 그래서 올이 다 풀렸고 무슨 병아리 같은 목도리여도 맨날 하고 다녔구나.

재수없고 소시오패스 같고 재수없고 재수없고 재수없어도 나쁜 애는 아닐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앞으로 쟤 때문에 고등학교 내내 1등 못 하게 생겼는데.

차마 남을 미워하진 못한다. 한없이 착한 아이는 그런 생각을 한 제 자신이 미워졌다.

*

예현이 윤과 친해진 계기는 아미였다.

유순한 눈매의 예쁘게 생긴 오빠 친구. 딱 봐도 착해 보이고 실제로도 대화 몇 번만 해보면 얼마나 선한지 알 수 있는 오빠 친구를 아미는 금세 좋아하게 되었던 것이다.

아니, 근데 이걸 친해졌다고 할 수 있나? 저 재수없는 고기능 소시오패스는 제 동생이 저를 좋아하니 적당히 친해 보이려는 것 아닌가?

윤이 굳이 친해질 가치를 못 느끼는 인간에게는 애초에 말도 걸지 않는다는 사실을 몰랐기에 할 수 있는 생각이었다. 정신을 차려 보니 에이택 회장가에 놀러 온 뒤였다. 무려 크리스마스에, 윤의 초대를 받아서. 이거 그냥 친해진 거 맞는 것 같다.

윤은 자신의 방으로 세 명 몫의 음식을 올려 달라고 저택 안의 사람에게 자연스럽게 말했다. 그걸 본 예현이 허탈하게 웃으며 중얼거렸다.

"너희 집 진짜 부자다."

"정확히는 에이택 회장이 부자인 거지."

"그게 그거 아니야?"

"내가 돈 많은 건 아니잖아."

성인 되면 무슨 일 있어도 독립한다 내가. 일순 윤의 얼굴에 혐오 혹은 경멸 비슷한 것이 스쳐 갔다. 짓씹듯 중얼거린 윤은 곧 무표정으로 돌아왔다. 올라가자. 아미 기다리고 있어.

별 쓸데없는 짓으로 시간을 보냈다. 보드게임을 실컷 하고, 이불을 뒤집어쓰고 <나 홀로 집에>를 보고,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한다. 보드게임 말을 옮기다 질 위기에 처하자 허둥대는 아미 앞에서는 윤이 킬킬 웃는다.

따뜻했다. 저에겐 과분하게 따뜻했다. 선물 같은 온기가, 이유 없는 애정이 훌쩍 떠나버릴까 봐 문득 두려워 예현은 울고 싶어졌다.

쥐도새도 모르게 까무룩 잠든 것 같다. 새벽에 눈을 떴을 때 익숙한 천장이 아니어서 덜컥 겁이 났다. 그러다 어차피 제 아버지란 사람은 한 번도 크리스마스에 집에 들어온 적 없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예현은 제 옆에서 꾸물꾸물 움직이는 온기에 몸을 맡기고 다시 잠들었다.

다음 날 아침, 아미는 작년에 그랬듯 어김없이 윤에게 꾸러미를 내밀었다. 엉성한 건 마찬가지였으나 그래도 한 번 해 봤다고 제법 태가 잡혀 있었다.

다만 이번에 아미가 뜬 목도리는 윤의 것만이 아니었다. 저에게로 내밀어진 선물 두 개를 본 예현이 눈을 크게 떴다. 하나는 아미, 하나는 윤이 내민 것이었다. 이거 나 주는 거야? 정말? 정말로?

예현은 리본을 풀 생각도 못 하고 한참이나 포장지를 매만졌다. 제 손안의 꾸러미와 상자가 세상에서 가장 귀한 보물이라도 된다는 듯. 무표정한 낯으로 예현을 가만 쳐다보던 윤이 말한다. 준비 되면 그때 열어.

긴 손가락이 얽힌 리본을 풀고 테이프를 떼어냈다.

중간중간 코가 빠져 있는 남색 목도리. 예현은 목도리를 만든 사람이 누군지 대번에 알아챘다. 뜨개질에 제법 능숙해진 초보자가 만든 것이다. 학기 초 윤이 하고 다니던 노란색 목도리와 꼭 닮아 있었다. 받을 사람을 생각하면서 열심히 만든 것. 윤이 손에 들고 있는 것과 똑같았다.

다음으로는 윤이 건넨 길쭉한 상자 포장지를 뜯었다. 테이프를 떼는 데 시간이 하도 오래 걸리자 윤이 짜증을 냈다. 포장지가 무슨 금박도 아니고 빨리 좀 뜯어. 금박이어도 빨리 뜯어도 상관 없는데 뭘...

알았어. 애써 눈물을 참으며 말하자 윤의 표정이 풀렸다. 상자 뚜껑을 열자 깔끔한 검은색 바탕에 이음새 부분이 금으로 된 만년필이 나왔다. 윗부분에는 고급스러운 필체로 예현의 이름이 로마자로 새겨져 있다. 순간 예현의 표정이 멍청하게 변했다.

예현 오빠 얼굴 지금 완전 웃긴 거 알아? 예쁜 건 똑같은데 웃겨! 최아미, 조용히 해. 뭐! 오빠도 웃고 있으면서!

"내 이름 철자는 어떻게 알았어?"

"너 쓰는 거 보고."

웃음을 갈무리하고 대수롭지 않게 대꾸한 윤이 예현에게 물었다.

"마음에 들어?"

"너무. 너무 마음에 들어..."

나 이런 거 처음 받아봐.

그 말을 끝으로 예현은 울기 시작했다.

예현의 아버지가 일방적으로 잘해주려 한 적은 있다. 갑자기 예현을 끌고 가 백화점에서 비싼 패딩이나 장갑 따위를 사 주는 일. 당황스럽기만 하고 전혀 기쁘지 않았다. 받는 사람을 생각하지 않는 일방적인 호의-사실 그렇게 부르기도 아까운 짓거리-는 호의가 아니다. 그건 폭력이었다.

어떻게 보면 오늘 예현이 받은 건 그가 인생에서 처음 받는 진정한 선물이다. 받는 사람을 생각하고 그를 향한 애정이 가득 담긴.

울지 마... 예현 오빠 울면 나도 슬퍼... 크리스마스처럼 좋은 날에 울 시간이 어딨어!! 아미가 훌쩍거리며 예현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그리곤 윤을 향해 눈을 부라렸다.

오빠, 이럴 때는 안아주는 거야! 꼭 안아주고 쓰다듬어 주고 위로해 줘야 하는 거라구! 그렇게 말한 아미는 냅다 윤도 끌어안았다. 키가 작아 사실상 저보다 한참 큰 두 사람의 허리를 겨우 잡고 있는 수준이었지만. 예현도 울고 아미도 울었다.

몇 번을 맞닥뜨려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는 상황이 있다. 지금까지는 아미가 이유 없이 우는 상황이 유일했다. 왜냐면 그 이유를 아무도 모르게 쓱싹하거나 치워버릴 수 없으니까.

오늘 두 번째 사례가 생겼다. 왜 우는지 정확한 이유도 모르겠는데 예현이 먼저 울고 아미가 우는 일이다...

보통 사람들이 어떻게 하지. 위로의 말을 건네거나 등을 두드려 주던가. 최대한 학습한 바로는 그랬다. 윤은 예현과 아미의 등을 어색하게 두드렸다.

언제까지고 잊지 못할 새하얀 겨울날의 아침이다.

*

아미는 좋아하는 것이 많다.

당연히도 그중 가장 사랑하는 이들은 윤과 예현이었다.

-

약 5600자!!! 아래 썰 기반으로... 원래는 배저 본부에서 좋아하는 사람들한테 목도리 떠 주는 아미 얘기를 쓰려고 했는데 쓰다 보니까 윤하고 예현이 멋대로 튀더라고요. 그래서 걍 손 가는 대로 썼습니다. 이런 류의 글은 오랜만에 써 보는 것 같은데 쓰면서도 기분이 좋았어용... 열심히 글재활 중

제목에 들어가는 가족은 비단 윤과 아미만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예현까지 포함한 거에요. 당연한 말이지만 피로 이어지지 않았어도 혈연보다 끔찍이 서로를 아끼는 사람들이 있으니까요... 저는 세 사람을 보면서 늘 그 생각을 했어요 어떤 의미에선 얘네가 진정한 가족이라고요

그런데 소제목이 왜 저렇느냐

걍 최윤이 깨달은 최초의 사랑이 동글동글아기뱁새이리라는 생각이 드니까 너무 좋앗음...

최남매 이렇게까지 사랑할 생각이 없엇는데

그리고이예현어떻게안사랑합니까... 그래서 어린 시절이라도 행복한 거 써 주고 싶엇음요

쓰면서도 아이거최윤캐붕아님?하면서 머리 싸맸는데요... 윤의 몇 안 되는 예외가 예현이랑 아미라고 생각하는 편이라서요. 괜찮?지?않을까?하고 받아들여주십쇼

과거날조가많습니다... 전부 그뭔씹 날조임

새벽에 후다닥 휘갈긴 거라 많이 오글거리고 이상할 수 있습니다...

끝까지 읽어주신 분들 감사합니다!

+2023/12/26 백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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