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화요수] 25시의 크리스마스 이브.

열화요수 엽서북 《선령세상유람기》 참여 원고│w. 유성

엔딩후, 쉬엔지가 이상 에너지 사고에 휘말려 기억이 1권 시점으로 날아간 이야기.

개연성은 이공국 외근팀 직원이 책임져줄것입니다 아마도. 크리스마스 로맨스는 어떻게쓰나요? 그냥잘...

원래 모티브는 찰스 디킨스의 소설 크리스마스 캐럴, 을 의도했으나. 쉬엔지 버전123을 모두 불러오자니 피곤해서 이렇게 되었습니다.


로망이라는게 그렇다. 첫키스를 할 때는 종소리가 울리고, 운명적인 사랑을 만나면 스파크가 튀며, 긴생머리 그이의 머리카락에선 하루 24시간 내내 청순한 꽃향기가 난다는 정석의 환상. 봄이 흩날리는 계절엔 떨어지는 꽃잎을 잡으면 소원이 이루어진다고 믿고, 더위와 습기는 망각한 채 새파랗고 맑은 바다를 거니는 새하얀 셔츠깃을 흔드는 청량한 여름을 상상한다. 가본 적 없는 밀밭을 추억하며 물결치는 황금속 가을을 회고하고, 찬 공기가 코끝을 메우면 서늘한 여백의 냄새에서 지나간 겨울에 따뜻했던 인연을 찾는다. 현실은 그렇지 않다는 걸 모두가 알면서도, 그저 믿어보려는 것처럼 선망하고 마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이 픽션과 문화가 만들어낸 환상에 불과하다해도 사람들은 낭만의 흔적을 쫓는다.

제나라 역사보다 짧은 크리스마스라는 양놈 문화가 대뜸 버르장머리 없이 대륙을 한바퀴 돌아 중국에서 유행하는 것도 다 이유가 있다는 말이다.

전력으로 크리스마스에 미친 아메리카 대륙을 생각하면 중국의 크리스마스야 빨간옷이 조금 더 유행하는 시즌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모름지기 크리스마스란 동서양을 막론하고 연인의 날이다. 겨우살이 나무 밑에서 입맞춤을 나누고, 서로의 산타가 되어 선물을 주고받으며, 선물 포장을 벗길 때 산타 옷도 벗겨보는 세계 인구수 증가 캠페인의 날이나 마찬가지인 것이다.

그렇다면 이쯤에서 당연히 끝내주는 연인의 날에 옆구리 따숩게 데워줄 불꽃남자가 있는 대마두 폐하는 어떠하실까?


25시의 이브


W.유성

이 커플을 위한 빅 이벤트에 누구보다 큰 기대를 품은 사내가 있었으니. 크리스마스에 휴가를 내는데 성공한 눈치싸움의 승자, 크리스마스에 연인이 입어줬으면 하는 옷 랭킹 1위 산타복을 놔두고 굳이 빨갛고 까만 현의를 주문제작까지 하는 성의를 보여 애인에게 갖다바친 남자. 선후과의 쉬엔지가 바로 그 주인공이었다. 그에게는 집에서 기다리는 섹시하고 고귀하신 폐하와 함께하는 끝내주는 크리스마스에 대한 로망이 있었다. 아주 파렴치하고 깜찍하지만 그의 폐하께서 관대히 들어주실만한 소원을 잔뜩 (애인의 귓가에)빌었단 말이다. 성령연은 부산을 떠는 쉬엔지를 보며 약간 한심하게 여겼으나, 가끔은 그의 병아리가 속세에서 배운 저속한 취향에 어울려주기로 마음을 먹었다. 별탈이 없었다면 그는 분명 철딱서니를 일부러 두고 온 연인을 위해 기꺼이 흑적색 옷을 다시 입어주었을 것이다.

하지만 크리스마스 이브의 맞이한 아침, 성령연은 쉬엔지가 주문제작해온 적색 옷을 꺼낼 필요가 없어졌다. 그는 대신해 평범한 현대를 살아가는 대마두를 위한 남성복(buy 쉬엔지)을 입고 이공국으로 가야했다. 그의 남자친구를 대신해 남의 친구가 황급히 성령연을 부른 까닭이다.

"그러니까, 제가 당신이랑 사귀는 사이라고요?"

쉬엔 주임이 멍청한 표정으로 대마두에게 물었다.

"와, 혹시 제가 이미 말했나요? 당신이 내 이상형이라고."

대마두는 오랜만에 두통을 느꼈다. 그의 연인, 크리스마스 낭만이 어쩌고 저쩌고 깃털이 빠지게 부산을 떨던 주작은 이곳에 없다. 얼뜨기같이 기억이 날아가 이공국 입사 첫날로 돌아간 멍청한 쉬엔 주임이 남았을 뿐이다. 이 희귀 조류를 본국까지 무사히 조달하는데 모든 기운을 다 쓴 외근팀 직원은 며칠이면 기억도 차차 돌아올지도 모른다는 무책임한 말만 남기곤 꽁지빠지게 도망쳐버렸다.

그리하여, 현재에 이른다. 성령연은 졸지에 기억상실 남친을 획득했다. 기억이슈는 장장 10권에 걸친 대서사시로 끝이 났건만 뒷북도 이만한 뒷북이 따로 없을 이야기가 시작된 것이다.

미인 대마두가 남자친구의 기억이슈로 두통을 느낄 무렵, 당사자는 사라진 기억은 뒷전이고 눈앞의 '이상형'을 빤히 보느라 바빴다. 쉬엔지는 ~두근두근 사랑의 메모리! 내가 잊은 남자친구가 최애캐랑 너무 닮아서 곤란!~ 상태가 되었다. 그는 정말이지, 쉬엔지의 집에 가지런히 진열되어있을 피규어들과 닮아도 너무 닮았다. 그와 연인이란 말에 의심 한점 없이 그렇군요! 님이 완전 맞습니다! 하고 대답할 만큼 확고하게 쉬엔지의 취향이었던 것이다. 쉬엔지가 떠오르는 건 함께 지원한 면접자 5명중 1등으로(어쩌면 아닐 수도 있지만) 합격하여 공무원 아닌 공무원에 합격했단 사실뿐인데. 눈 감았다 뜨니 직급 번듯하고 직장 번듯하고 얼굴까지 번듯한 애인이 생겼다. 같은 직장 사람인가? 동료들이 기억을 잃은 그를 뻔히 성령연 앞에 대령한걸 보면 공공연한 사이였던 모양인데. 대놓고 사내연애라니 새 직장에 잘 적응했던 모양이다.

다행히 쉬엔지는 기억이 모조리 날아간 것은 아닌 모양이다. 선후과(무려 직통 상사를 후처리 하게 된 일에 적잖은 소란이 있었으나, 어쨌거나 이런게 선후과의 일이다)의 여러가지 조치와 심문에 따르면, 쉬엔지는 자신의 과거나 이공국에 대한 것, 학교에서 가르칠 만한 기초상식과 같은 부분은 제대로 기억하고 있었다. 외근팀 직원의 말대로 하루나 이틀이면 차차 기억도 돌아올거라나.

"그때까지 내가 책임지라고?"

"저희 서로를 책임지는 관계였어요?"

"그냥 집으로 가는게 낫겠다."

"저희 동거도 해요?! 사귄지 하루 이틀된게 아니구나……."

길다면 길고 교제 시간이 짧다면 짧은데 허 참나 이걸 설명하려면 10권은 필요한데 3천자 안에 설명할 방법이 없어 넘어간다. 성령연은 어미새를 처음본 병아리마냥 조잘대는 쉬엔지도 제법 신선하, 신선한가? 쟤는 매일 저러지 않았나? 머리가 아파서 이성적인 판단을 하려니 자신까지 어지러워지는 기분이다. 성령연은 크리스마스고 나발이고 빨리 남자친구를 집에 넣고 재우기로 했다. 원래 애들이 사고치고 골치아프게 할 때는 재우고 싶은 법이다.

"제가 당신을 뭐라고 불렀나요? 자기야? 여보? 귀염둥이?"

"……성령연이라고 불러. 령연 형이라고 부를 때도 있고."

"형이구나. 알겠어 자기야!"

아, 이거 감당 안되네. 성령연은 벌써 몇 번째인지 모를 이마짚는 대마두 포즈를 취했다. 다행히 쉬엔지는 얌전히 그의 집으로 따라왔다. 그 과정에서 또 한번 여기가 내 집이라고? 사태가 있었지만 성령연은 익숙하게 무시했다.

성령연이 소파에 앉아 쉬는 동안 쉬엔지는 자신의 집을 여기저기 살피며 옷장을 뒤집기도하고, 둘의 커플아이템 따위를 찾아내며 탐방하는데 여력이 없었다. 그는 수줍은 소년처럼 신이 나 하다가도 어떤 것들에선 미묘한 기시감을 느꼈다. 선후과 모 직원은 기억이 사라진게 아니라 이중보안 폴더에 들어가 접근 권한을 상실한 것과 비슷하다고 했는데, 그래서인지 정확히 기억은 나지 않아도 가끔 흐릿하게 익숙함을 느끼거나 막연히 어떤 것이구나 정도의 희미한 감각이 들었다.

"근데 형, 내가 사실 신경쓰이는게 있는데."

쉬엔지는 집안 탐방을 충분히 마쳤는지 방에서 나와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이건 뭐야?"

쉬엔지의 손에는 아직 포장도 뜯지 않은 택배박스가 있었다.

"나 혹시 쇼핑중독이었어?"

무려 다섯개나.

성령연은 쉽게 저 상자의 정체를 깨달았다. 그래, 쉬엔지가 입어달라고 하던 옷이겠지. 근데 왜 다섯개지? 침대에서 패션쇼라도 시킬 셈인가? 이 발칙한 병아리가. 성령연은 저 미지의 랜덤박스를 까봐도 되는지 괜히 긁어부스럼을 만드는게 아닌지 답할 수 없었다. 하지만 침묵을 긍정으로 느낀 쉬엔지는 어차피 수신인도 자신이겠다 거침없이 상자를 까보기 시작했다.

"……자기야, 우리 이런 사이야?"

그리고 기억상실 쉬엔 주임은 쉬엔지의 50가지 그림자 중 1개를 마주하고 조용히 상자를 덮었다. 그는 조금 부끄러워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내심 숨기지 못한 기대감과 약간의 흥분이 그의 눈에 도사리는 것을 성령연은 모르지 않았다. 이런 사이가 뭔데? 대체 뭘 생각하는 거니. 성령연은 부정하기도 긍정하기도 껄끄러워 치우라고 손을 내저었다. 쉬엔지는 쑥쓰러워하면서도 상자를 버리지 않고, 고스란히 옷장 밑 서랍장에 넣어두었다.

다행히 쉬엔지는 더 이상 상자를 까보려고 하진 않았다. 대신 배가 고프진 않냐며, 성령연에게 식사를 어떻게 할지 물었다. 냉장고엔 쉬엔지가 오늘을 기대하며 사온 크리스마스 케이크가 고스란히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형, 배 안고파?"

본래 예정대로라면 두 사람은 쉬엔지가 보고 싶다고 난리를 치던 광장의 거대한 크리스마스 트리 점등식을 보러갔을 것이다. 야경은 아름답고, 행복한 분위기가 넘치는 커플들 사이를 손잡고 거닐다 들어왔을 것이다. 쉬엔지가 한달 전부터 예약한 크리스마스 케이크를 나눠 먹고. 그리고는 뭐, 쉬엔지의 50가지 그림자가 화끈한 밤을 만들어 주었을지도 모르지만.

"형."

지금 성령연의 옆에 있는건 골 때리는 기억이슈 남자친구다. 그들이 무엇을 감수하고 어떤 시간을 거쳐 사귀게 되었는지, 우리의 사랑을 증명하기 위해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 알지 못하는. 확 기절시켜서 재울까? 그게 내 편두통에 이로울까?

"자기야?"

"샤오지, 나 생각중이잖아."

목소리는 조금 차갑게 나왔다. 고개를 드니 조금 냉해진 온도차에 금새 쭈그러든 쉬엔지가 우물쭈물 휴대폰을 내밀고 있었다.

"그게 아니라, 내가 식당을 예약했다는 알람 메세지가 와서 말이야. 잘 기억은 안 나지만 오늘 데이트를 하려고 했던 것 같아서……. 물론 형이 그럴 기분이 아니면 그냥, 취소한다고 연락할까? 내가 맛있는거 차려줄게."

식당을 예약했다고? 성령연은 들떠서 이런저런 크리스마스 계획을 말하던 쉬엔지를 떠올렸다. '분위기 좋은 곳에서 식사라도 하면 어때? 집에서 홈파티를 하는 것도 좋겠다.' 지나가듯 그런 말을 하기에 마음대로 하라고 대답했던 것 같다. 별다른 말이 없어 신경쓰지 않았는데, 서프라이즈 데이트라도 계획했던 걸까.

성령연은 탐탁치 않았으나, 상황이 어찌되었건 그의 병아리가 애써 준비했을 일정을 망치고 싶진 않았다. 케이크만 해도 무슨 예약을 한달씩이나 기다려야하나 불평하면서도, 여기 케이크를 꼭 먹어보고 싶었다고 투덜거린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쉬엔지는 외근을 갔다가도 무언가 제가 좋았거나 맛있는 것을 발견하면 성령연에게도 먹여보고 싶어했다. 같이 나누고 싶었다거나, 분위기가 좋아 꼭 같이 와보고 싶었다며 데이트 약속을 잡았다. 이번에도 말은 없었지만 성령연을 데려가고 싶은 장소였음은 분명하리라. 성령연은 오늘만 몇 번째인지 모를 한숨을 내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렇게 된 거, 데이트나 할까."

"정말? 머리가 아픈 거 아니었어? 형이 피곤하면 난 안 나가도 돼."

하지만 쉬엔지의 몸은 벌써 반쯤 옷장으로 향하고 있었다. 성령연이 한번 더 긍정하자, 쉬엔지는 우당탕 옷장으로 뛰어들어 갔다가 굴러나오며 욕실로 들어갔다. 때빼고 광내겠단 의지가 확고한 동선이었다.

정확히 1시간 뒤, 평소와 무슨 차이인지 모르겠지만 약간은 반질반질해진 공작새 한 마리가 성령연의 손을 잡고 출발했다. 치장하길 좋아하는 것은 날개달린 것들의 종특이니, 기억이 없어도 제 옷장 뒤지는 실력 만큼은 사라지지 않는 모양이었다. 쉬엔지는 갑작스러운 데이트에 제법 들뜬 것 같았다. 성령연 역시, 굳이 불평할 필요가 없었기에 아까보단 평온해졌다. 그는 항상 자신을 다스리는데 능했으니 그렇게 보이게 하는 것도 어렵지 않았다.

쉬엔지가 예약한 식당은 무려 호텔 스카이라운지에 있는 레스토랑이었다. 오늘을 위한 크리스마스 특선 메뉴까지 선정되어 있었고, 과거의 쉬엔지는 기특하게도 제법 괜찮은 와인을 골라 주문해두었다. 쉬엔지(ver.01)는 만약 꽃다발이라도 나왔다면 자신이 프러포즈를 준비하고 있던 건 아닌지 의심스러웠다. 금방이라도 레스토랑의 불이 꺼지고 어디선가 러브송이 들려오며 반지케이스를 은쟁반 위에 얹은 웨이터가 나타날 것 같았다. 다행히 과거의 쉬엔지는 아직 크리스마스 서프라이즈에 프러포즈 대작전이 없었는지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레스토랑의 조명은 식사에 방해되지 않을 만큼만 은은하게 조도를 낮춰 대화하기 부드러운 무드를 만들어주었고, 웨이터는 적당한 때에 다음 코스의 메뉴와 와인을 따라주었을 뿐이다. 이 모든 것을 성령연은 마치 대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처럼 능숙하게 시중을 받고 요리를 맛보았다. 샹들리에의 불빛이 검은 머리카락 위로 별빛처럼 내려앉고, 등 뒤로 펼쳐진 유리창 너머의 도시풍경은 아득하리만치 아름다웠다. 마주보고 앉아 그를 바라보는 쉬엔지는 문득, 이 모든 것을 그에게 해주고 싶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음식이 입에 안 맞아? 계속 보기만 하고 먹질 않네."

"어? 응? 먹어, 먹어야지. 와, 나는 대체 어떻게 여길 예약한거래? 이런 곳은 돈만 있다고 들어올 수 없다는 건 나도 안단 말이야."

성령연은 그건 네가 돈도 있고 나라의 비호를 받는 멸종위기종 조류여서 그렇단 말을 생각하다 오리 콩피와 함께 입 안으로 삼켰다. 부드러운 오리 다리가 입안에서 녹아가는 동안 쉬엔지는 한입에 말 한마디씩 내뱉느라 바빴다. 그래도 즐거워하는 기색이 역력하여, 성령연은 쉬엔지가 기억이 없더라도 나오길 잘 했다고 생각했다.

둘은 식사를 하며, 간간히 쉬엔지의 휴대폰을 살폈다. 스마트폰 중독까진 아니어도 제법 전자기기에 뇌를 외주맡기며 살아오는 현대인 답게, 쉬엔지는 중요한 예약이나 스케줄 따위를 휴대폰 캘린더에 저장해두었다. 쉬엔지는 슬그머니 혹시 호텔을 예약해두진 않았나 찾아보았으나,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런 일정은 적혀있지 않았다. 대신 메모장의 체크리스트에 크리스마스 케이크 먹기, 광장의 제일 큰 트리 점등식 구경가기, 백화점 랜덤 럭키박스 사보기, 밤 10시에 하는 TV영화 같이보기 따위가 적혀 있었다. 몇 개는 아예 스크랩을 해두었는지 쿠폰이나 시간 따위가 적혀있기도 했다.

생각보다 많이 기대하고 있었구나. 성령연은 쉬엔지가 잡다하게 적어둔 문장들에서 기대감과 사랑을 느꼈다. 쉬엔지가 기억하지 못하더라도, 그 애가 하고 싶은 일은 모두 해주고 싶었다. 결국 두 사람은 코스는 엉망이지만 쉬엔지가 적어둔 메모의 일들을 하나씩 해보기로 했다. 케이크는 집에 있으니 귀가 후로 미루고, 광장의 거대한 트리도 점등식이 해질무렵에 있기 때문에 이미 저녁을 먹고 있는 지금은 늦은 시간이었다. 아쉬운대로 백화점이 문을 닫기 전에 럭키박스를 사러 갔다가, 돌아가는 길에 이미 불을 켜놓은 트리를 보러 가기로 했다. 다행히 트리가 설치된 광장과 백화점은 그리 멀지 않았다.

백화점은 가족단위의 손님들로 번잡했다. 선물을 끌어안은 아이들과, 선물을 포장하는 어른들의 얼굴에 웃음이 가득했다. 성령연은 그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고개를 돌렸다. 남의 집 아이들 틈바구니에서 열심히 상자를 흔들어보는 우리 집 아이가 보였다. 덩치는 남들보다 우뚝 솟은 것이, 아이들 사이에서 신중하게 상자를 흔들어 귀에 대보고 있었다. 저렇게 까지 사야할 일인가? 조금 귀여워보이니 이것도 중증이다. 성령연은 쉬엔지의 등살에 아무 상자나 골라 집어들었다. 무게는 조금 가벼운 것 같았다. 럭키박스는 잡화나 간식류 따위의 큰 분류를 제외하면 내용물이 모두 비밀이었다. 이벤트에 참여한 브랜드의 상품이 들어있다는데, 아이들 용으로 구비된 매대에 있는 것은 대부분 간식이나 트리장식용 오너먼트인 모양이었다. 쉬엔지는 괜히 안쓰는 물건이 나오면 꽝이나 다름 없다며 아이들 사이에서 긴 팔다리를 무기삼아 휙휙 상자를 고르고 있었다.

"우리 집에 트리는 없어? 오너먼트 하나쯤 사서 달아도 좋을텐데."

"네가 사겠다는 말은 했던 것 같은데, 아직 보지는 못해서 모르겠네."

"아까 그 상자들 중 하나에 있을지도 모르겠네."

쉬엔지는 집에도 자신의 럭키박스가 남아있음을 떠올렸다. 말을 하면서도 귓가가 조금 뜨끈해지는 것이, 부끄러워도 마저 다 까보고 올 걸 그랬다고 약간의 후회가 들었다.

"아! 난 초콜릿이야. 이거 그거지? 어린이용 장난감이 들어있는 초콜릿 말이야."

쉬엔지는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들려 여러개가 들어있는 줄 알았다며, 가벼운 푸념과 함께 초콜릿을 까 입에 넣었다. 장난감은 근처에 있는 다른 아이에게 주었다. 그래도 재미가 있었는지, 럭키 박스를 코너마다 하나씩 몇개를 더 골랐는데 안타깝게도 오늘의 쉬엔지는 럭키가 아니었는지 영 쓰기 애매한 것들이 나왔다. 여성용 스킨케어 브랜드의 할인쿠폰이나, 곱게 포장된 스카프, 작은 병에 담긴 50ml 향수 따위를 줄줄이 얻고는 결국 더 사는 것을 포기하고 나왔다. 가격에 비하면 나쁘지 않은 물건들이었지만, 나중에 직장에 선물로 나눠주는게 낫겠다 싶었다.

"형은 뭐 나왔어?"

"네가 바라던, 트리 장식이야."

성령연의 상자에는 작은 새 모양 조각품이 들어있었다. 천연비누 브랜드에서 크리스마스를 겨냥해 만든 상품으로, 포장비닐에 작은 리본이 달려 있어 트리 오너먼트로 사용한 후엔 포장을 까 비누로 쓸 수 있는 제품이었다. 한 손에 올릴 만큼 작았지만 성령연은 제법 그 작은 새가 마음에 들었다. 은은한 시트러스 향이 나는 비누는 주황색이기까지 해서, 누군가를 많이 생각나게 했다.

백화점을 나와, 광장의 트리 앞에 도착했을 때는 거의 한밤 중이었다. 바람이 제법 싸늘했는데 트리 주변에 모인 인파의 열기 탓에 그리 춥게만 느껴지진 않았다. 낮은 빌딩 높이만큼 높게 쌓은 트리는 많은 장식들과 색색의 전구들이 빼곡하게 깔려 멀리서도 눈에 띄게 화려했다. 반짝이는 조명은 주기적으로 여러 패턴으로 반짝이며 야경의 볼거리를 제공해주고 있었다. 사진을 찍는 사람들 사이를 걷다보니 사진을 찍어달란 요청도 많이 받았다. 얼결에 다섯 커플을 연속으로 찍어주고 나니 진이 빠졌다. 성령연은 팔짱을 끼고 바라만 보고 있었다. 우리는 사진 안 찍나, 흘끔흘끔 눈치를 살피니 방금 사진을 찍어준 커플이 다가와 사진을 찍어주겠다고 제안했다.

"우리 커플처럼 보이나봐."

"네가 커플링을 낀 손을 계속 흔들고 있으니까."

어쨌거나, 두 사람은 트리 앞에서 사진을 찍었다. 쉬엔지는 이 사진이 조만간 자신의 배경화면이 될 거라고 예상했다. 기억이 돌아온 자신도 틀림없이 좋아할 테니까.

히죽거리며 사진을 내려다보고 있으니, 차가운 무언가가 코에 떨어졌다. 쉬엔지는 무심코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하늘은 흐렸고, 하얀 가루가 느릿느릿 내려오고 있었다. 화이트 크리스마스다. 쉬엔지의 시야가 자연스럽게 옆에 있을 성령연을 향했다. 추위에 발갛게 달아오른 뺨, 항상 창백해보이는 손을 잡아 깍지를 끼고 제 주머니에 넣었다. 심야 방송으로 틀어주는 명작 특선이 시작하기 전에 들어가려면 이만 귀가하는 게 낫겠다. 결코 성령연을 추운 곳에 내버려두고 싶어서는 아니다. 쉬엔지는 자꾸만 더워지는 손을 꼭 붙잡고 속으로 몇 번이나 중얼거렸다. 우리 사귀는 사이잖아? 이정도는 해도 되는 거지? 그렇지?

성령연은 집에 도착할 때까지 평범한 사람보다 조금 따뜻한 손의 온도를 느끼며 조용히 있었다. 두 사람의 손이 같은 온도가 되고 나서도, 손을 놓는 일은 없었다.

그들은 거실의 TV로 영화를 틀어놓고, 소파에 나란히 앉아 영화를 보았다. 영화를 보며 사온 크리스마스 케이크를 먹기로 했던게 신경 쓰였지만, 쉬엔지는 내심 손을 놓고 싶지 않아 케이크가 생각나지 않은 척 했다. 성령연 역시 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집 안은 조용했고, 거실등을 끄고 아늑한 무드등을 대신 켜두자 창 밖에서 들려오는 도시의 소란이 다른 세상처럼 느껴졌다. 집 안은 고요하고, 간간히 쉬엔지의 웃음소리와 영화음악이 들려왔다. 경쾌한 분위기의 재즈와 함께 사랑하는 연인이 춤을 춘다. 영화는 과거에 한번, 쉬엔지와 성령연이 처음 데이트를 했을 때 함께 봤던 로맨틱 코미디였다. 쉬엔지는 처음 보는 영화였기에 제법 즐겁게 웃으며 영화에 몰입했다. 그런 그를 성령연은 가만히 지켜보았다. 기억이 없어도 쉬엔지는 같은 장면에서 웃었고, 같은 갈등에 몰입했다. 성령연은 그에게 굳이 우리가 보았던 영화란 말은 해주지 않았다. 단지 같은 경험을 함께한다는 사실이, 쉬엔지가 기억하지 못해도 쉬엔지가 준비한 것들이 꾸준히 성령연의 일상을 이루고 있다는 사실이 어쩐지 간지러운 감상을 남겼다.

영화가 클라이막스에 다가오고,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장면을 배경으로 잔잔한 클래식이 깔린다. 성령연은 조금씩 꾸벅거리던 쉬엔지의 고개가 툭 쓰러지는 것을 받아 제 어깨에 기대게 해주었다. 크리스마스 휴가를 얻기 위해 며칠 야근을 반복했으니, 기억엔 없어도 지칠만 할 것이다. 어쩌면 기억이 날아간 피로감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성령연은 영화의 크레딧이 올라갈 때까지 쉬엔지의 잠든 얼굴만 바라보고 있었다. 잔잔한 영화의 OST가 흘러나오고, 쉬엔지는 깨어날 기색이 없었다. 맞잡고 있던 손에도 힘이 빠져, 성령연은 쉬엔지를 쿠션에 기대게 하여 눕혀주곤 담요를 가져와 덮어주었다.

예정대로 이루어진 거라곤 예약한 레스토랑을 노쇼하지 않았다 뿐이다. 그런데도 엉망의 하루란 생각은 들지 않았다. 쉬엔지가 난데없이 기억을 날려먹고 왔을 때는 조금 짜증도 났지만, 그들의 추억을 기억하건 기억하지 않건 쉬엔지의 사랑은 변하지 않았다. 도리어 그가 내뱉지 않은 말들 사이에서, 조금은 수줍어하며 하지 않던 몸짓들 사이로, 말도 없이 홀로 골몰하며 그를 채워주려던 고민으로부터, 기억하지 못해도 똑같은 얼굴과 웃음으로, 언제 어디에서건 가장 먼저 자신을 찾는 시선에서. 쉬엔지의 사랑이 끊임없이 새어나온다.

성령연은 눈을 감아도 사랑이 선명한 연인의 얼굴을 내려다보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방 안은 온기로 따뜻했으나, 어쩐지 차가운 바람이 필요할 것 같았다. 그는 쉬엔지에게 찬바람이 들까 담요를 하나 더 끌어와 덮어주곤 베란다 창을 열고 나갔다.

베란다 난간에 기대어 불이 꺼지지 않은 도시를 내려다본다. 거리에는 활기가 넘치고, 자정을 넘긴 시간에도 도로에는 빽빽하게 자동차 라이트가 은하수처럼 흐르고 있다. 그 모든 중생들이 사람을 찾아 사랑하는 이의 곁에서 살아가고 있다. 성령연도 그렇다. 이 시대에 발을 붙이고 그가 살아가는 까닭은 온통 사랑 때문이었기에. 그에게 향하는 사랑은 선명한데, 어째서인지. 이해할 수 없게도. 조금은, 외로워져서.

"샤오지, 보고 싶어. 형 그만 애태우고 돌아와."

그 순간 마법처럼, 성령연의 등 뒤에서 두 팔이 뻗어져나오며 성령연을 끌어안았다. 익숙한 온기에 고개를 드니, 사랑을 가득 담은 두 눈이 그를 바라보다 어깨에 코를 묻고 매달렸다.

"나 보고 싶었어?"

시계는 어느새 자정을 넘겨 25시 0분. 25일의 선물이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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