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유성

[열화요수] 나의 계절, 꽃을 물고 온 소년.

열화요수 엽서북 《선령세상유람기》 참여 원고│w. 유성



나의 계절,

꽃을 물고 온 소년.


W. 유성

생각을 나누고 마음의 목소리를 주고받는 관계란 얼마나 내밀한 감정을 공유할 수 있을까. 서로를 깊이 들여다보는 두 개의 영혼은 같은 경험과 같은 시간을 공유하니 정서발달의 성숙함도 동일하게 진행될까? 나와 같은 세상을 보고 같은 경험으로 살아간다면 나와 상대는 얼마나 다른 타인인가?

 

성령연의 검령은 타고나길 그의 생과 함께 부여된 것이다.

 

천마검을 손에 쥔 소년에게 그 사실은 어떤 의문도 의심도 필요 없는 정설이다. 이유를 헤아리거나 그에게 부여된 천명을 따져 물을 이유도 없었다. 다만 가끔, 아주 가끔 성령연은 생각했다.

 

세상의 창이 단 하나의 문이라면, 그조차 열리지도 않고 그저 바깥을 내다볼 뿐인 아주 작은 문이라면.

그 안에 갇힌 자는 살아있는 걸까?

 

한편 아직 어린 성령연이 그런 심오하고 때때로 제게 부여된 천명에 대해 심도 있는 고찰을 할 때 그 고민의 한 조각을 담당하는 검령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는가?

 

‘우리 배 말랭이 하나만 더 먹으면 안 돼?’

 

그래서 성령연은 배 말랭이를 먹으러 갔다. 그의 검령은 도무지 성령연이 홀로 심각하거나 철학적인 고민에 빠져 자아 사찰(성찰이라 할 수도 있겠지만, 결국 제 안의 또 다른 영혼의 심상을 들여다보려는 일이었으니 사찰이라 표현해도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에 시간을 낭비하게 두지 않았다. 그의 병아리는 어찌나 말이 많은지 성령연이 의문을 품기도 전에 제 의문을 한껏 쏟아내기 바빴다. 그러면 성령연은 또 호기심을 대신 풀어주고, 답을 내어주며 말동무가 되어주는 것이다.

 

성령연은 좁은 문이었지만, 어쨌든 제법 괜찮은 대답을 내놓는 문이었던 셈이다. 하지만 검령이 정말 그런 일상에 아무 불만이 없을까? 그런 생각을 하고 있으면.

 

‘령연, 나도 술래잡기하고 싶어. 내가 술래니까 령연이 해주면 안 돼?’

 

하고 도통 집중하지 못하게 방해한다. 오늘도 또 성령연은 제가 고작 몇 살 어린 동천의 아이들과 어울리기엔 제법 머리가 굵었다고 주장하고 싶어졌다. 다만 그것이 퍽 어린아이의 투정 같단 생각이 들어 입 밖으로 꺼내진 않았다. 통이 그의 공부를 방해할 때마다, 혹은 밖으로 놀러 나가자고 잔뜩 조르며 떼를 쓸 때마다 성령연은 오늘 해야 할 공부나 수련을 핑계로 달래곤 했다. 그러나 적지 않게 못 이긴 척 놀아주거나, 밖으로 나가 검령이 만족할 때까지 시간을 보내야 할 때도 있었다.

 

‘아니면 같이 산책이라도 가자. 가자~ 가자! 응? 저 언덕 너머까지 말이야. 그렇게 멀지도 않아. 잠깐 날아갔다 오면 금방인걸?’

“샤오통, 그렇게 놀기만 좋아해서 대체 어느 세월에 수행을 할 셈이야? 까먹기도 잘하면서 공부도 게을리해선 어떡해?”

 

오늘도 그런 모양인지. 성령연은 책을 내려놓고 밖으로 나섰다. 성령연에겐 해야 할 일이 많다. 더 배우고 더 많은 것을 알아야 하며, 그의 삶에 펼쳐질 세상은 이 동천의 언덕이 끝은 아닐 것이다. 소년은 본능적으로 그것을 알았다. 그런데 평생을 함께해야 할 그의 검령이 이리 철딱서니가 없어서야. 어느 세월에 수행을 쌓고 어느 세월에 진신을 얻어 그의 옆자리에 설지 걱정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령연, 수풀 사이로 숨어보고 싶지 않아? 저기 숲에서 가장 두꺼운 나무 위로 올라가 보고 싶지 않아? 너는 날개도 없잖아.’

“날개가 있어도 올라가 보고 싶진 않을 거야.”

 

성령연은 딱 잘라 거절했다. 하지만 샤오통은 오늘따라 끈질겼다. 들릴 리도 없는 날개가 팔락대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검령은 쉼 없이 떠들었고, 성령연은 재잘대는 소리가 그칠 때까지 공부보다 재미있는 일 108가지를 들어주어야만 했다. 말만 다르고 똑같은 행위가 3번쯤 중복되는 탓에, 성령연은 그의 검령에게 어휘력이 전보단 늘었구나 칭찬해 주어야 할지, 발전하지 못한 창의력을 지적해야 할지 고민했다.

 

‘다 왔어!’

 

솔직히 성령연이 한 것이라곤 그저 잔뜩 들뜬 검령의 기분을 망치지 않도록 걷기밖에 없었다. 오는 내내 떠들더니 그저 생각을 정리하는 셈 치고 산책을 나왔건만, 통은 기어코 언덕 너머의 잎새가 무성한 나무까지 그를 이끌었다. 바람을 쐬기에 나쁘지 않았지만, 특별한 것도 없는 풍경이다.

 

‘같이 나무에 올라갈래?’

“별로 올라가고 싶지 않다니까.”

 

거절하자 또 무엇이 마음에 안 들었는지 불퉁한 감정이 전해져온다. 검령은 또 무언가를 쫑알거리다, 그러면 자리에 앉아 나무를 올려다보라고 말했다. 이번엔 덜 번거로운 일이었기에, 성령연은 순순히 나무줄기에 기대어 앉았다. 거친 줄기의 껍질은 서늘했고, 올려다본 나무는 성령연의 키보다 까마득하게 높았다.

 

‘잘 봐. 보여주고 싶은 게 있단 말이야.’

 

평소엔 산새의 재잘거림처럼 울리던 목소리가, 그때는 마치 속삭임처럼 조용히 들려왔다. 때마침, 그 목소리가 불러온 바람이 불어와 나뭇가지와 잎새를 흔들고 지나갔다. 성령연은 그 흔들거림이 마치 통이 나뭇가지 사이를 흔들며 날아간 것처럼 느껴졌다. 아마 기분 탓일 것이다. 하지만. 거기 있어? 성령연은 꼭 그렇게 묻고 싶어졌다.

 

그가 마음을 흔드는 바람 소리를 입 밖으로 꺼내려던 때, 성령연의 눈에 무언가 하얀 것이 들어왔다. 아이의 손바닥처럼 납작한 잎새가 서로 부딪치며 흔들리고, 날개가 흔들고 지나간 가지 사이로. 햇살 한 줄기가 조용히 스며들어 높은 가지 하나를 새초롬히 비추고 있었다. 나무가 감춰둔 작은 꽃봉오리 하나. 바람이 불 때마다 살랑이며, 잎새 그림자 사이로 사라졌다 다시 나타나길 반복하는 작은 기쁨.

 

“거기 있구나.”

 

네가 있구나. 거기에. 닫혔다고 생각했던 작은 문 안쪽에서, 성령연은 그들의 봄을 발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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