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유성

[열화요수] 학생회장님께 고백하고 싶어!

열화요수 엽서북 《선령세상유람기》 참여 원고│w. 유성

현대배경, 특능이 없는 학원물. 1학년 쉬엔지x학생회장 성령연. 그런 설정이구나? 생각하세요.
중국 학사일정을 몰라 구글의 협조로 대충 구성되었습니다. 틀렸다면 그런 설정인가? 생각하세요.
가벼움이 하늘을 찌르는 로코. 약 15000자... 분량이 좀 많이 깁니다.



청춘의 계절은 맑음 뒤 소나기. 아침 햇살에 뛰노는 까치 사이로 달려가다 저녁엔 비를 피해 골목을 뛰는 게 일상인 계절. 쉬엔지는 당당하게 고교생이 되었다. 남고생이란 무엇이냐? 팔딱이는 잉어킹이 갸라도스로 진화하듯 날뛰는 원숭이 같았던 중학생은 달리는 야생마가 되는 시절이다. 어째서 직립보행이 아닌 4족 보행으로 진화하는가? 이는 청소년이 복도를 달리는 이유와 깊은 인연이 있으나, 지금 중요한 사실은 망아지와 청소년의 상관관계 따위가 아니다. 사랑과 재채기는 감출 수 없다고 머리는 그대로인데 팔다리만 훌쩍 자란 고교생들은 청춘 커플의 꿈을 꾼다.

학생회장님께 고백하고 싶어!

W.유성

넌 이 학교에 왜 왔어? 나? 성적 때문에. 난 호적 소재지 때문에. 지역 할당제 보고 왔지. 이런 대답이 오가는 친구들 사이에서 당당하게 '첫사랑이 여기 다녀서.' 라고 선언한 학생이 있다. 한창 자랄 나이를 온몸으로 주장하며 또래 집단에서 머리 하나 껑충 오른 눈에 띄는 녀석. 1학년 8반 쉬엔지가 그 주인공이다. 청춘 고교생이란 보통 그렇다. 성적과 지망대학만큼이나 사랑의 대기에 관심이 많았다. 여름에 꽃가루 알레르기도 아니고 유행처럼 번지기 시작한 학생들 사이의 화제란 단연 연애, 연애. 연애!

"나도 연애하고 싶어!"

 정작 연애하러 순정에 진학을 제물로 바친 쉬엔지는 여전히 솔로인데도 말이다! 너 대학 안 갈 거야? 전국통일시험이 우스워? 그런 한심한 타박을 이어가던 친구들이 어느새 하나둘씩 손에 손잡고 여자친구 손도 잡고 남자친구 손도 잡기 시작했다. 도서관 옆자리에, 점심시간 맞은 편에, 하굣길에 뉴페이스를 추가하더니 누구보다 진심이었던 쉬엔지만 혼자 덜렁 남은 것이다.

"알겠는데 그걸 꼭 여기서 선언하는 이유는?"

샤오정이 골치가 아프다는 듯 중얼거렸다. 이 까칠한 동급생은 쉬엔지의 푸념을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어 제법 질린 차였다. 쉬엔지는 적어도 1학년들 사이에선 제법 유명한 첫인상을 가졌'었'다. '공부는 모르겠고요. 연애하러 왔습니다.'  새 학기 자기소개로 남긴 첫 소절은 일주일 만에 1학년 교실동 전체에 퍼졌다. 8반에 잘 생겼는데 띨빵한 애가 있다더라. 쉬엔지가 1학년의 유명인이 되기까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소문 탓에 인지도를 올렸는지 입학 일주일 만에 고백을 8번 받았을 때는 8반의 전설이 되었고, 전부 거절하며 마땅한 변명을 찾지 못해 '취향이 아니라서...' 라는 말로 교내의 마돈나를 차버렸을 때는 남자의 적에서 눈이 바닥에 떨어진 모지리로 평판이 뒤집혔다.

"어떻게 고백해야 할지 전혀 모르겠어."

"그러니까 그걸 왜 나한테 묻냐고."

물론 쉬엔지의 눈은 바닥에 떨어지지 않았다. 그는 상당히 정확한 심미안을 가지고 있었고, 아주 편협하리만치 취향이 단 한 사람에 고정되어있을 뿐이다. 소문을 떠들던 학생 대다수가 잊었으나, 쉬엔지는 첫사랑을 쫓아 고교진학부터 지망대학까지 고를 만큼 일편단심 낭만주의자였다. 그 아름다운 풋사랑의 이름 성령연. 적연고의 학생회장으로, 쉬엔지의 마음속 성내 최상위 청순고져스쿨뷰티럭셔리 미남 랭킹 1순위를 기록한 3학년의 선배였다.

"난 령연 형이랑 사귀고 싶은 거란 말이야."

"차라리 칭베이를 노려."

"칭베이가면 령연 형이 나랑 사귀어줄까?"

"네 새대가리로 퍽이나."

샤오정의 냉정한 말에도 쉬엔지의 머릿속에선 희망 회로가 불탔다. 그래, 올해는 령연 형이 수험 때문에 바쁠 테니까. 평판 우수, 성적 우수, 품행 단정, 3콤보의 학생회장이라면 칭화대학이건 베이징대학이건 골라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쉬엔지도 3년 빡세게 공부해서 성령연이 합격한 대학에 턱 하니 붙어 학생증을 머리에 꽂고 날아가는 것이다. 외롭고 적적한 대학 생활에 지친 성령연 앞에 잉크도 안 마른 대학교 학생증을 들고, 학교에서만 봐서 몰랐던 물오른 20살 미모의 청년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리고 행복한 CC라이프의 시작. 완벽하다.

"키 크고 잘생긴 연하남이 뇌섹남이기까지 하다니, 령연 형도 나랑 사귀면 개꿀이겠지?"

"너 그 지능으로 우리 학교엔 어떻게 온 거냐."

"입학시험에 모든 걸 바쳤어."

"알겠으니까 앞으로 남은 3년도 바쳐라."

정말로 성령연이 칭베이에 붙으면 걱정해야 할 건 연애 전선이 아니라 쉬엔지의 성적이다. 고교 입학시험이야 목숨 걸어 붙었더라도 대입 시험은 목숨을 거는 사람이 한두 명이 아닐 테니, 재수가 없으면 님도보고 학점도 따야 할 대학 생활이 님은 안 보이고 편도 3시간 거리의 롱디생활이 될 수 있다. 물론 그마저도 성령연이 받아준다는 전제의 이야기인데. 쉬엔지는 문득 휴대폰을 꺼내 칭화대학과 베이징대학까지의 거리를 계산해봤다.

생각해보니 성령연과의 물리적 거리가 멀어지는 것은 대입 이후의 일만은 아니다. 그는 3학년이다. 당장 1년이 지나면 비행기로 2시간, 차로 15시간의 먼 지역으로 떠나고 만다. 쉬엔지의 표정이 심각하게 굳었다. 비행기표 얼마지? 

"령연 형한테 유급하라고 하는 거 어떻게 생각해?"

"드디어 미쳤군."

"안 되겠어! 대학 못 보내. 내가 수험 공부하는 사이 누가 채가면 어떡해?"

"선배님도 너 주려고 수험공부 열심히 한 게 아닐 텐데."

"가지 말라고 졸업시험 방해하는 건 어떻게 생각해?"

"대학은 보내 줘라 진짜."

샤오정은 쉬엔지의 미친소리연속발화 무한제공사건에 10분은 더 시달리고 나서야 풀려날 수 있었다. 타이밍 좋게도 점심시간의 끝을 알리는 종이 울리며 그를 구했다. 그때만 해도 쉬엔지가 수업을 듣고 나면 제정신으로 돌아올 줄 알았다. 쉬엔지는 오후 내내 공책을 붙잡고 진지하게 필기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령연 형한테 고백해야겠어."

"너 공부 안 하냐."

돌아온 저녁 시간, 샤오정은 진지하게 이 자식을 버리고 혼자 저녁을 먹는 게 그의 소화기관에 도움이 될 거란 생각을 했다. 내가 어쩌다 쟤랑 친구지? 속으로 그렇게 생각해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항상 밥을 같이 먹던 친구들이 하나둘씩 자기 연인과 같이 앉겠다며 떠나가고 남은 게 쉬엔지와 샤오정 둘뿐이었으니까. 샤오정은 지금이라도 쉬엔지를 손절하는 방안을 고려했지만, 앞으로 남은 3년 같은 반인 녀석과 인연을 끊기란 어려울 것이다. 

"올해 안에 고백해서 나 신경 쓰여 못 가게 해야겠어."

"네가 졸업을 못 할 거란 생각은 안 드냐?"

3년만 참자. 혹은 1년만. 그땐 쉬엔지의 정신병인 성령연이 졸업해서 떠날 테니까. 친구의 성적과 자신의 성적 사이에서 짧은 고민을 하던 샤오정은 쉬엔지의 성적을 버리기로 했다. 친구가 미쳤어도 대학은 가야지. 샤오정은 기꺼이 입시에 우정을 팔았다.

"그래. 어디 하는 데까지 해봐라. 그래서 언제 고백할 건데?"

기왕이면 지금 당장하고 차여주면 좋겠다는 소소한 바람이 담긴 말이었다. 하지만 쉬엔지는 마지막 솔로 동지가 그의 편을 들어준단 사실만으로 만족해있었고, 아직 반도 먹지 않은 샤오정의 식판을 미루고 자신의 고백 작전이 빼곡히 쓴 공책을 코앞에 밀어 넣었다.

"이건 밥 먹다 토하라고 주는 건가?"

"아니! 당연히 내 고백 계획에 협조하라는 거지."

"밥은 평화롭게 먹고 싶다. 제발."

쉬엔지의 식판은 벌써 다 비어있었다. 자긴 다 먹었다 이거지. 샤오정은 욕설을 삼키며 제 식판을 끌어왔다. 쉬엔지의 고백 작전은 내용만 많았지 허술하기 그지없었다. 스마트폰 메신저 시대에 러브레터가 뭐야? 90년대 청춘영화냐? 낭독 시간엔 졸기만 하면서 감동적인 연서로 성령연을 감동시켜 사귄다는 작전은 대체 뭔데? 안경 벗으면 미남 작전은 또 뭐고? 너 안경 안 쓰잖아. 불꽃놀이를 함께 바라보며 고백은 언제 하는 건데? 춘절까지 기다릴 셈이냐? 샤오정은 하고 싶은 말이 많았으나, 거기까지 참견하자니 망하는 건 쉬엔지의 몫이지 자기 몫이 아니었기에 입을 다물었다. 대신 쉬엔지를 쫓아낼 마법의 주문을 입에 담았다.

"저기 학생회장 지나간다."

"뭐? 어디?"

쉬엔지는 공책으로 자기 머리를 덮어 자세를 낮추곤 경계하듯 주위를 살폈다. 과연 급식실 밖을 지나가는 성령연이 눈에 들어왔다. 제법 먼 거리였음에도 한눈에 그를 포착할 수 있었다. 학생회 일을 보고 왔는지 한 팔엔 프린트 뭉치를 들고 있었고, 나란히 걷던 교사와 대화를 나누는 것 같았다. 느린 걸음을 따라 교정의 건물 그늘에서 햇살 아래로 걸어 나오는 성령연이 유독 뚜렷하게 보였다. 그림자 사이로 비치는 노을이 성령연의 머리카락을 물들이기 시작했다. 쉬엔지의 모든 감각이 성령연을 향하고 있었다. 교사의 말을 경청하다 가만히 인사하는 그의 고갯짓이라던가, 돌아서는 발걸음이 금방이라도 사라질 것처럼 느껴졌다. 덜컹, 의자가 거칠게 끌리고 공책은 내던졌다. 쉬엔지가 정신을 차렸을 때는 벌써 성령연을 쫓아 급식실 밖으로 뛰쳐나간 뒤였다.

"령연 형."

고작 이 거리를 뛰었다고 거칠게 뛰는 심장이 발끝까지 뜨겁게 몸을 달궜으니, 화끈한 뺨이 얼마나 뜨거울지는 짐작할 필요도 없다. 혀 위로 솟구치는 그 이름이 너무 뜨거워 입 밖으로 내뱉고 나서야 제 목소리의 온도를 깨닫는다. 이윽고 달의 뒤편처럼 앞길만을 바라보던 무심한 얼굴이 고개를 기울이고, 쉬엔지를 발견한 검은 눈동자에 노을의 온기가 담기기 시작했을 때. 

"샤오지, 무슨 일이니."

성령연은 그 차가운 낯이 거짓이었던 것처럼 온화한 얼굴로 미소 지었다.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기는 희고 긴 손가락이 쉬엔지의 심장을 툭 간질이고 지나갔다. 다물린 입술이 그의 이름을 입에 담고, 손톱만 한 달처럼 웃음을 그려냈다. 쉬엔지의 머리에서 성령연에게 고백하는 36가지 방법이 모두 사라지고 108가지 번뇌만 자리 잡았다.

"나, 나, 나랑."

뭔가 말을 해야 해! 누구야, 고백 대사 준비한 샤오지? 몰라요! 저는 아니에요! 쉬엔지의 머릿속 뉴런들이 일제히 파업을 선언하며 어휘력을 하락시켰다. 쉬엔지는 병든 닭처럼 고개만 꾸벅거리며 성령연의 얼굴과 바닥을 번갈아보며 말을 찾기 바빴다. 랑 사귀어줘…. 하고 싶은 말은 분명한데. 더 예쁜 말로 포장할 방법을 모르겠다. 할 수 있다면 버드나무 가지라도 꺾어 왔을 텐데. 어느 드라마 속 주인공처럼 내 시간은 너를 위주로 돌아간다는 낭만적인 대사를 빌려올까. 그래야 성령연이 그가 얼마나 자신에게 중요한 존재인지 알아줄까. 쉬엔지는 조급해졌다. 이제 그 머릿속에 빼곡히 들어찬 것은 고백하지 않으면 성령연이 대학으로 날아간다는 절망적인 미래뿐이었다. 그와 함께 학교 다니고 싶다. 같이 등하교하고 교정을 손잡고 거닐고 싶다. 학교뿐만 아니라 평생을 령연과 함께 세트처럼 붙어 다니고 싶다. 사랑은 선명한데 고백의 말은 흐릿하기만 하고. 성령연은 아무것도 모르는 얼굴로 저리 어여쁘게 바라보고만 있으니, 쉬엔지의 마음은 풍선처럼 동그랗게 뒤엉키다 부풀어 올라 터지고 말았다.

"나랑 평생 학교 다녀줄 거지?!"

저 미친놈. 급식실을 나오던 샤오정이 중얼거리며 모르는 사이인 척 지나갔다. 다행히 전교권의 성적 우수자 문학 1등급의 성령연은 쉬엔지의 뜬금없는 대사에서 주어와 핵심 문장을 해석하는 데 성공한 것 같았다. 이를 같은 학교에 다니고 싶다, 정도의 발화로 이해한 것 같지만 말이다.

"그러려면 너도 공부를 열심히 해야겠구나."

좋아해! 너에 관해서라면 평생 공부해도 좋아! 쉬엔지는 욕망을 삼킨 채 고개만 끄덕였다. 성령연은 쉬엔지의 말을 어리광 정도로 생각한 게 틀림없다. 령연 형과 같은 학교에 다니고 싶다는 대사는 쉬엔지가 초등학생이던 시절, 옆집으로 이사를 온 중학생 령연 형을 만난 때부터 꾸준했던 말이니까. 

"곧 시험 기간이었지. 준비는 잘하고 있니?"

아니, 잤다. 필기 노트엔 수업내용 대신 어떻게 하면 성령연의 남자친구가 될 수 있는가에 대한 고찰만 잔뜩 적혀있다. 시험 범위도 기억나지 않는다. 하지만 성령연이 물어봤으니 샤오정에게 시험 범위를 묻는 노력이라도 해봐야겠다. 친구들한테 노트필기 좀 빌려봐야지. 시험 점수가 잘 나오면 전교 1등 짝남에게 어필되는 구석이 있지 않겠는가?

"어려운 게 있다면 같이 공부할까?"

"응, 나 공부 너무너무 어려워."

쉬엔지는 양심 없이 샤오정을 버렸다. 성령연이 그를 바보로 생각하면 어떡하냐는 걱정이 1초간 들었지만 그런 이미지 관리와 성령연과 단둘이 있을 시간을 비교하자면 압도적으로 후자의 우승이다. 원래 사랑은 사람을 바보로 만드는 것이라 그랬다. 쉬엔지는 성령연의 앞에서라면 얼마든지 바보천치가 될 자신이 있었다.

"주말에 우리 집에 올래?"

"그래, 그럼. 주말에 보자."

성령연은 쉬엔지의 가슴을 뒤흔든 희고 고운 손을 흔들며 멀어졌다. 이미 발끝까지 녹아버린 쉬엔지는 비실비실 올라가는 입꼬리를 감추지도 못하고 그를 따라 손을 흔들었다. 전교 1등 학생회장님의 특별 과외! 과외의 꽃말은 사랑의 요점정리가 아니겠는가. 님도 보고 점수도 따고. 수학 문제도 풀고 짝남 마음의 빗장도 푸는 것이다. 쉬엔지는 벌써 도서실에 나란히 앉아 손도 잡고 어깨를 기대는 두 사람을 상상하며 행복의 꿈을 펼쳤다. 너무 많은 상상을 하느라 수업에 도통 집중할 수 없을 정도였다. 사실 수업뿐 아니라 남은 요일 모두를 그렇게 망상 속에 보냈다. 덕분에 약속한 주말이 오기 전까지 쉬엔지의 필기 노트엔 데이트하기 좋은 카페, 도서관 데이트, 모범생과 썸타는 법, 따위의 글만 잔뜩 요약되었다.

고대하던 주말! 쉬엔지는 정말 많은 것을 준비했다. 공부하다 피곤하면 먹을 간식이라던가, 공부하다 분위기 잡을 때 쓸 로맨스 영화라던가, 공부하다 기분전환 삼아 할만한 2인용 보드게임이라던가, 공부하다가……. 아무튼 공부할 생각은 없고 딴짓할 마음만 절찬리에 창고 대방출 중! 쉬엔지에게 중요한 건 성령연의 남자친구가 되느냐 마느냐지 성적표에 낙제점이 찍히냐 마느냐가 아니었다.

"책 펴고, 틀린 문제는 다시 풀어보렴."

그리고, 이 낙제생의 철저한 예습과 복습은 감히 전교 1등의 상대가 되지 않았다. 성령연은 정말 공부만 하러 온 것처럼 쉬엔지의 집에 방문한 지 5분 만에 책을 펴고 쉬엔지의 현재 수준을 점검했다. 쉬엔지는 성령연의 테스트 시작 3분 만에 '가엽게도, 어리석구나.' 하는 짝남의 시선을 받아야 했다. 그 뒤로는 공부, 공부, 공부! 성령연과 함께하는 두근두근 과외 일기는 쉬엔지의 생각과 다르게 흘러갔다. 성령연은 전교 1등을 놓친 적 없는 모범생 학생회장의 명성이 아깝지 않은 엄한 스승이었다. 그는 철저하게 많이 풀고 많이 읽게 하며 쉬엔지를 공부시켰다. 굶주린 배에 간식을 채울 시간에 빈약한 뇌에 공식을 채우고, 개수작 대사를 입에 담을 시간에 영단어 하나라도 더 외게 만들었다. 그마저도 문제집에 붉은 비가 내리면 한숨을 내쉬는 싸늘한 낯과 마주해야 했다.

이러다간 진짜 시험공부만 하다 령연 형이 집에 가게 생겼다. 이대론 안 돼. 나 오늘 작정했단 말이야. 오늘이 끝나기 전에 령연 형을 너라고 부르고 싶단 말이야. 형은 내 남자니까. 쉬엔지는 예고장도 없이 도전장을 던졌다. 오늘을 위해 준비한 예비작전만 30개쯤 있었다.

"령연 형, 이 공식은 어떻게 풀어?"

공책에 간결하고 유명한 공식을 빠르게 휘갈겨 내밀었다. 128√e980. 반절을 지우면 I LOVE YOU가 되는 단순하고도 모범생 공부벌레 맞춤형 고백어택. 통했나? 눈치챘을까? 성령연은 말없이 빤히 공책을 바라만 보고 있었다. 쉼 없이 움직이던 샤프펜슬이 멈추고, 공책을 받아 든 성령연의 눈동자가 진지하게 쉬엔지의 고백 문장을 훑기 시작했다. 쉬엔지는 기대감과 긴장으로 심장이 떨려 저도 모르게 펜을 놓고 성령연만 빤히 쳐다보았다. 어쩜 고민하는 얼굴도 저렇게 미간부터 턱까지 전부 쉬엔지의 가슴을 설레게 할 수 있는지. 성령연은 쉬엔지의 심장을 쥐어짜기 위해 존재하는 게 틀림없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이윽고, 성령연의 입술이 열렸다.

"자연상수 e는 무리수이니 정확하진 않겠지만, 6606.48 정도가 나오겠구나."

그걸 풀었어?!

"시험 범위가 아닌 것 같은데, 중학교 과정은 제대로 졸업하고 온 거 맞니?"

"어어, 그게 아닌데. 응……."

쉬엔지는 그걸 틀리면 대학은커녕 졸업도 못 한다는 경고 섞인 부드러운 타박을 들으며 무리방정식과 고차방정식 예문을 풀어오란 숙제를 받았다. 왜 풀어야 할 문제가 줄어들지 않는지. 쉬엔지는 현대교육 과정의 폐단을 준엄하게 꾸짖고 싶었으나, 그럴 시간이 없어 펜을 쥔 주먹만 힘을 더했다. 

내가 바란 건 이게 아닌데. 이런 계획이 아니었는데. 속으로 통한의 눈물을 삼키면서도 펜을 놀려야 했다. 물론 쉬엔지라고 현실의 벽에 무너져 수작 부리기를 포기한 건 아니었다. 당이 떨어졌단 핑계로 카페에 가자고 조르거나, 슬쩍 가까이 있는 손을 덮어본다거나, 하지만…….

"영 집중을 못 하는 것 같구나."

전부 망했다. 온화하게 들리는 말과 달리 싸늘한 시선을 마주한다면 기가 죽을 수밖에 없다. 이러다간 기껏 공부를 가르쳐주겠단 성령연의 호의조차 잃을 처지라 쉬엔지는 더욱 악착같이 공부해야 했다.

성령연은 대체 어떻게 된 시야인지 자기 앞에 놓인 문제집을 막힘없이 풀어가면서도 쉬엔지가 조금만 오래 손이 멈춰있으면 지적을 해왔다. 딴짓하다 멈춘 건지 문제가 어려워서 막힌 건지 귀신같이 눈치챈 탓에 의도치 않은 잡생각도 차단당했다. 그래도 마냥 엄격하지만은 않은 것이, 문제를 물어보면 쉬엔지 본인보다 더 쉬엔지의 이해도를 잘 파악하고 설명을 덧붙여주었다. 이 공식을 못 푸는 건 앞에 여기서부터 진도를 못 따라간 거니 이 응용문제부터 풀어보자. 계속 같은 문법을 틀리는 걸 보니 독해가 모자라구나, 예문을 암기하는 게 빠르겠다. 성령연은 비교적 자상하게 문제를 해설해주었으나, 같은 문제를 두 번 틀렸을 때는 이걸 어떻게 할까 궁리하는 듯한 표정으로 쉬엔지를 바라보았다.

Q1. 3초 이상 눈을 마주하면 호감도가 오른다던데, 짝남이 저를 30초 동안 쳐다봐요. 이거 그린라이트일까요?

  A1. 빼박입니다. 이제 썸남되겠네요.

  └Q. 근데 제가 문학 3점 맞은 이후부터 계속 그렇게 보는데, 이것도 그린라이트 맞나요?

   └A. 국적을 의심했나보죠. 이참에 가르쳐달라고 하세요.

    └Q. ㅠ썸남이 가르쳐주고 있었는데 3점 받았어요ㅠ

     └A. 빡대가린가 쳐다본듯. 이제 남남되겠네요.

쉬엔지는 준비한 간식은 꺼내 보지도 못하고 밤까지 내리 문제집만 풀었다. 짝남을 남친 만들겠다는 작전은 1보 후퇴. 그럼 썸남이라도 만들어야 하지 않나? 이대로 령연 형이 졸업하면 롱디는커녕 어릴 때 옆집 살던 아는 동생, 결혼식에 신랑 측에 앉을 자격 있음. 정도로 끝나게 생겼다. 그 꼴은 절대 못 본다. 형한테 나는 뭐였어? 그런 질문을 하려면 정말 뭐라도 되어야 했다.

"오늘은 이만하고,"

"령연 형. 오늘 자고 가면 안 돼? 시간도 늦었는데……."

시간이 늦기는 핑계도 조악하다. 성령연의 방은 쉬엔지의 방에서 베란다를 통해 넘어갈 수 있을 만큼 가까운 옆집이었다. 그러니 성령연도 쉬엔지의 요청이 얼마나 쓸데없는 말인가를 잘 이해하고 있었으나. 오래 알던 옆집 동생 포지션은 원래 이럴 때 강해지는 법이다. 쉬엔지는 이미 성령연과 비슷한 눈높이를 한껏 낮추며 온몸을 구겨 아양을 떨었다. 쉬엔지가 어리광을 부리면 성령연은 대부분 들어주곤 했다. 그게 성령연의 일을 방해하지 않을 경우에, 였지만 말이다.

"형이 있으니까 공부가 더 잘 되는 것 같아. 응? 내일 나랑 같이 등교하면 되잖아."

성령연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하루 종일 몇 번이고 받아온 시선이 이상하게 유독 간지러웠다. 때때로, 쉬엔지는 그의 까만 눈동자가 먹물과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의 시선이 닿는 자리마다 먹물을 뿌린 듯 온통 성령연의 생각으로 물들어 다른 생각을 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문득 쉬엔지는 심장의 온도가 너무 뜨겁다고 느꼈다. 어쩌다 나는 태양을 삼킨 채 살고 있는지. 어쩌면 그래서 서늘한 밤 같은 당신을 사랑하는지. 그는 당장이라도 뱃속을 간질이는 새까맣게 탄 마음을 말로 내뱉고 싶어 견딜 수 없었다.

"그래. 그럼 짐을 가져올 테니 잠깐 기다리렴."

다행히 쉬엔지가 보잘것없는 고백을 자수하기 전에 성령연이 먼저 선수를 쳤다. 그는 아이를 달래듯 쉬엔지의 머리를 쓰다듬어주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쉬엔지는 그의 손에 제 머리를 헤집고 떠나고 나서야 제가 숨을 멈추고 있었단 사실을 깨달았다. 참았던 숨을 내쉬고, 붉어진 얼굴로 고작 옆집으로 돌아가는 성령연을 배웅했다.

그리곤 성령연이 자기 집으로 돌아간 사이 침대에서 몸부림쳤다. 비명도 지르고 싶은 것을 아파트의 얄팍한 방음 수준을 경계하느라 참았다. 10분쯤 몸부림치고 나선 옷을 갈아입고 오겠다는 성령연의 문자를 받았고, 쉬엔지는 30분간 공들여 샤워하고 방 청소까지 싹 끝내두었다. 가장 깨끗한 이불을 꺼내두는 것도 잊지 않았다. 선물 받고 포장도 뜯지 않아 벽장에 방치했던 디퓨저까지 뜯어왔다. 같이 저녁을 먹고 공부도 좀 하고, 밤에 영어 공부한다는 핑계로 영화를 같이 보면? 그리고 분위기 잡히면 고백해야지. 쉬엔지는 결코 성령연을 혼자 대학에 보낼 생각이 없었다.

……그러나, 성령연은 대학에 갈 생각이 아주 많았다. 쉬엔지의 얼렁뚱땅 로맨틱 분위기 잡기 작전은 시작도 해보기 전에 바로 차단되었다. 성령연이 영어 듣기용 CD와 그가 1학년 때 사용한 기출문제집을 한 아름 들고 왔기 때문이다.

쉬엔지는 눈물을 꾹 참고 영어 지문을 읽었다. 아무리 쳐다봐도 졸리기만 할 뿐 어디가 틀린 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호기롭게 밤까지 공부하자고 했지만 성령연을 붙잡아둘 핑계일 뿐, 따뜻한 물에 씻고 배까지 채운 쉬엔지의 집중력은 이미 바닥을 치고 꿈나라로 도피한 지 오래였다.

"네 뺨에 문제를 찍어낼 생각이라면 별로 좋은 계획은 아닌 것 같구나."

머리가 목과 90도를 이루며 고꾸라지는 것을, 서늘한 손이 받아아 주었다. 쉬엔지는 퍼뜩 잠에서 깨어 고개를 들었다. 성령연이 그의 이마를 받쳐주던 자세 그대로 쉬엔지를 바라보고 있었다. 쉬엔지는 그 짧은 사이 침이라도 흘렸을까 서둘러 입가를 훔쳤다. 다행히 그렇게까지 추하게 졸진 않은 모양이다.

"아, 아니야. 모르는 문장이 나와서. 가까이서 보면 더 잘 보일 것 같았지 뭐야?"

성령연은 그의 조급하고 말도 안 되는 변명에 속지 않았으나, 눈썹만 조금 까딱이곤 넘어가 주겠다는 듯 다시 문제를 풀기 시작했다. 그의 집중력은 무섭기까지 했다. 성령연이 답안을 지우고 넘겨준 문제집도 하나같이 동그라미 표시만 가득했다. 과연 전교 1등을 놓친 적 없는 수재. 이대로라면 꼼짝없이 칭베이에 성령연을 빼앗기고 말 것이다. 쉬엔지의 마음에 삐죽하니 솟구친 질투의 화마는 그의 문제집에 내린 비로 인해 진화되었다. 기우제라도 지낼까? 성령연이 전국통일시험을 거하게 말아먹고 2년 재수하게 해달라고 지금부터 빌까? 그럼 같은 해에 대학에 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

"령연 형, 실수로 시험 망쳐본 적 있어?"

"아니, 실수로 흐트러질 정도의 성적은 아니니까."

"전교 2등은 억울하겠다. 령연 형이 있으니까 평생 1등은 못 할 거 아니야."

"노력과 운이 모든 걸 결정하진 않지만, 그걸 내가 책임질 필요는 없지 않겠니."

냉정한 말이었으나 맞는 말이었다. 쉬엔지는 숙연해져 문제집을 바라보았다. 성령연은 그러거나 말거나 펜을 딸깍였다. 문득, 쉬엔지는 쓸데없는 말을 하나 더하던 둘을 더하던 상관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은근슬쩍 이참에 제 호기심을 채우자는 욕심이 들었다.

"그럼 혹시 시험 기간에 고백받은 적 없어? 그런 말도 있잖아. 고백해서 시험 망치게 해야지."

제발, 제발 없다고 해라. 쉬엔지는 금방 눈이 똘망해져서 성령연을 바라보았다. 성령연은 더는 공부하기 글렀다고 생각했는지 한숨을 내쉬고 펜을 놓았다. 그는 쉬엔지가 어지간히 공부할 마음이 없다는 사실을 눈치챈 것 같았다. 시계는 벌써 밤 10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시험 기간에 그런 요행을 바라는 사람이라면 상대할 필요도 없을 것 같은데."

쿠궁. 쉬엔지의 머리 위로 돌이 떨어지는 것 같은 충격이 왔다. 쉬엔지는 허겁지겁 책을 그러안았으나, 성령연은 이미 문제집을 덮고 필기구를 정리하고 있었다.

"그럼, 그러면. 시험 기간 아니고 엄청 한가하고 날씨 좋고 분위기 좋은 곳에서 고백하는 사람은?"

쉬엔지는 다급하게 물었다. 시험 기간에 고백하기 작전은 전부 폐기되었다. 오답 노트를 받아놓고 같은 답을 찍는 바보는 없다. 성령연은 그러거나 말거나 쉬엔지의 책까지 빼앗아 한쪽에 가지런히 쌓았다.

"글쎄, 그래도 거절하겠지. 선약이 있다고 해둘까."

그렇게 말하는 성령연은 의문스러운 낯으로 쉬엔지를 보고 있었다. 성령연은 드물게 장난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으나, 쉬엔지는 갑작스러운 말에 정신이 나가 이를 알아채지 못했다. 선약이라니? 선약이라니?! 쉬엔지의 정신이 혼미해지다 못해 상상에 상상을 더하다 성령연의 결혼식 피로연까지 도달하고 나서야 다시 현재로 돌아올 수 있었다.

"에이~ 고백에 선약이 어디 있어?"

그렇지? 그렇다고 말해. 애써 농담으로 들은 양 웃었지만, 그의 마음에 치솟는 질투의 불길은 밟아도 밟아도 꺼지지 않았다. 성령연은 그런 쉬엔지의 속도 모르고 책상을 치우고 이불을 펴고 있었다.

"어른이 되면 결혼해달라고 울며 떼를 쓰던 아이가 있어서 말이야. 네가 어른이 되면 다시 생각해보자고 달래두었는데, 어린애라지만 약속은 약속이니 기회는 줘야 하지 않겠니?"

성령연은 아이를 달래듯이 그리 말하곤 쉬엔지를 눕혔다. 그때쯤 쉬엔지의 머릿속에선 폭발이 서른 번쯤 일어나고 천지가 개벽하고 있었다. 결혼해달라고 울며 떼를 쓰던 어린애? 령연 형이 중학생일 때부터 그의 곁에 어린애라곤 나뿐이었는데 대체 어떤 머리에 피도 안 마른 꼬맹이가 선수를 친 거지? 쉬엔지는 기가 막히고 코가 막혀 말문을 잃고 말았다. 그의 머릿속에 제 초등학교 동창들부터 성령연의 등굣길 어린이집 아이들, 빙탕후루를 사달라고 조르던 하굣길 골목에서 마주친 10살짜리들까지 쭉 훑었다. 어쩌면 그가 쉬엔지의 옆집으로 이사 오기 전의 인물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성령연이 어디 매달리는 걸 다 받아주는 사람이던가? 그에게 떼를 쓰고 어리광을 부려도 되는 어린애란 예나 지금이나 오직 쉬엔지뿐으로……. 문득 쉬엔지의 생각이 멈췄다.

'네가 어른이 되어서도 생각이 바뀌지 않으면, 그땐 들어줄게.'

벼락처럼 앳된 성령연의 목소리가 회상 속에서 속삭였다. 이제 집에 가야 한다는 성령연을 붙잡고 집에 가지 말라고, 같이 살자고 울던 어린애. 령연 형이랑 결혼할 거라고 결혼해달라고 머리에 열이 오르도록 빽빽 울어대던 어린애. 그건 쉬엔지였다! 저도 까먹고 있던 것을 성령연이 아직도 기억하고 있던 것이다. 과연 예습과 복습에 지난 연도 출제 유형까지 빼곡히 외우는 모범생다운 태도가 아닐 수 없었다.

"……령연!"

"이제 잘 시간이야 병아리."

"…네."

호기롭게 벌떡 몸을 일으킨 쉬엔지는 3초 만에 다시 누웠다. 성령연은 이미 잘 생각인지 불도 끄고 돌아 누워있었다. 이 모범적인 학생회장은 사생활마저 깔끔하고 타의 모범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당장 그를 깨워 대체 무슨 의미냐고 묻고 싶은 마음이 화산처럼 폭발하고 있었으나, 평화롭게 자는 얼굴을 보니 방해하고 싶은 마음보단 얌전한 아기 양처럼 굴고 싶은 마음이 커졌다.

쉬엔지는 결국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대체 무슨 뜻이지? 무슨 의미야? 성령연이 중간에 깨기라도 했다면 잠결인 척 물어나 보았을 것을. 령연 형, 내가 좋아하는 거 알고 있어? 그는 쉬엔지의 마음에 폭탄을 던져놓은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한 번도 깨지 않고 잘 잤다. 성령연! 혼자만 평화롭지 말고 대답을 해달란 말이야. 반면 쉬엔지는 혹여 뒤척임에 성령연의 잠이 방해받을까 봐 꼼짝도 못 하고 애꿎은 허벅지만 쥐어뜯었다. 그냥 농담이겠지. 날 아직도 어린애라고 생각하는 거야. 결국 쉬엔지가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수마에 몸을 맡기려던 때엔 이미 아침 해가 뜨고 있었다.

아무것도 해소되지 못한 복잡한 마음만 남긴 채, 등교 시간이 다가왔다. 쉬엔지는 등교를 준비하는 내내 조는 바람에 성령연에게 타박을 들어야 했다. 그에게 돌봄을 받는 것은 제법 좋았지만, 여전히 그가 자신을 챙겨야 할 어린 동생으로만 보는 것 같아 마음이 편치 않았다.

교복에 대충 팔을 끼우고, 가방은 어깨에 둘러메고, 아예 버스에서 모자란 잠을 보충할 작정으로 목베개도 챙겼다. 성령연은 자투리 시간에도 허투루 쓸 생각이 없는지 한 손엔 필기 노트를 들고 있었다. 그를 보니 혼자 잠들기 머쓱하여 주머니에서 영어 단어장을 꺼냈다. 당장이라도 어젯밤에 그건 무슨 의미였냐고 묻고 싶었지만, 이어폰을 끼고 집중한 성령연에게 어제의 사건은 이미 안중에도 없어 보였다.

"뭐 듣고 있어?"

"인터넷 강의."

쉬엔지는 바란 적도 없는데, 성령연은 이어폰 한쪽을 내밀었다. 귀에 대충 꽂으니 역사를 강의하는 강사의 느릿느릿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런 사람의 수업은 졸고 말 거야. 쉬엔지는 그렇게 생각했으나, 성령연은 졸음기 없는 눈으로 필기 노트를 훑으며 귀로는 강의를 듣고 있었다.

쉬엔지는 필기 노트를 보는 척 집중한 성령연의 옆얼굴을 구경했다. 긴 머리칼은 가지런히 올려묶어 우아한 목선이 훤히 드러났고, 이어지는 턱선과 반듯한 콧대는 창밖에서 들어온 햇살이 미끄러져 대리석처럼 희게 빛났다. 도통 그의 마음에 못나 보이는 구석이 없었다. 하긴 성령연은 쉬엔지의 인생에 나타난 이래 단 한 번도 쉬엔지의 마음에 들지 않은 적이 없었다. 령연, 너 정말 어쩌려고 그래. 내가 어른이 되어서도 결혼해달라고 떼쓰면 들어줄 거야? 정말 나한테 기회를 주는 거야? 아니면 너도 나한테 조금이라도 마음이…….



쉬엔지는 알 수 없는 말을 웅얼거리다가 그대로 잠들고 말았다. 그때까지도 공책에서 시선을 떼지 않던 성령연은 쉬엔지의 고개가 기울어지자 팔을 뻗어 제 쪽으로 기대게 해주었다. 쉬엔지는 모르겠으나, 성령연은 쉬엔지가 곁에 있을 때면 항시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어 그의 일에 기민하게 반응할 수 있었다. 쉬엔지의 집요한 시선 역시 모르지 않았다. 성령연은 쉬엔지가 기대기 편하게 자세를 고쳐 앉곤, 그의 머리를 가볍게 토닥여주었다. 잠을 설친 것 같았으니, 학교에 도착할 때까진 자게 두어도 될 것이다. 지금 몇 분 더 재운다고 수업 시간에 졸지 않게 되진 않겠지만.

버스는 정거장마다 멈췄다 가느라 느리게 학교를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느긋하게 쉬엔지의 잠든 얼굴을 구경할 여유가 넘치는 것이다. 성령연은 꿈이라도 꾸는지 찡그려졌다 펴지길 반복하는 쉬엔지의 얼굴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악몽이라도 꾸는 걸까? 앓는 것 같으면 깨우려 하였으나, 살살 토닥이면 또 헤실헤실 웃는 것을 보니 그리 심각한 꿈은 아닌 모양이다.

"령연…. 결혼은 나랑 해야 해……."

그의 입에서 잔뜩 발음이 새는 잠꼬대가 새어 나오자, 성령연은 옅은 웃음을 흘렸다. 

"그래서, 반지는 언제 끼워줄 예정이니?"

성령연은 잠든 쉬엔지의 귓가에 작게 속삭였다. 그가 깨어나서 기억할지 기억하지 못할지 알 수 없었으나, 그건 성령연에게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결말을 알고 있는 기다림이란 그런 것이다. 출제자의 의도를 알고 있다면 더더욱 그렇다. 성령연은 단 한 번도 듣기평가에서 잘못된 답안을 고른 적이 없었다.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