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화요수] 담배

단편

완결 이후의 스포일러가 담겨 있습니다.


탁, 탁, 탁.

쉬엔지가 쓰레기통 위에서 손가락으로 담배를 털었다. 이윽고 그는 한숨을 내쉬는 듯 하얀 연기를 방 안 가득 내뿜었다. 순식간에 더더욱 매캐해진 공기 속에서 그는 텅 빈 허공을 응시했다.

“뭐야, 켁. 켁켁.“

갑자기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하얀 연기가 한바탕 파도치는 듯이 무언가에 휩쓸리더니, 곧이어 닥쳐오는 담배 연기를 손으로 내저으며 다가오는 대학 동기가 어렴풋이나마 보이기 시작했다.

“어우, 담배 냄새. 또 여기서 담배 피우냐?”

“황웨이? 여긴 어쩐 일이야?”

“일단 환기부터 하시지? 내가 동아리실에서 피지 말라고 몇 번이나 말했던 것 같은데, 우리 쉬엔 동지께서는 동아리장 말씀을 하나도 들어먹지 못하시는군요.”

쉬엔지를 지나쳐 창가 앞까지 걸어간 그녀가 곧 창문을 확 열었고, 방 안에 짙게 깔린 하얀 연기는 그에 넘실대며 점점 옅어져 갔다.

“아니, 이 신성한 대학교에서 담배나 뻑뻑 피고 말야. 쉬엔지, 또 사고 쳤냐? 이제 4학년인데 제발 취업 준비도 좀 하시죠?”

쉬엔지가 장난스럽게 한숨을 쉬었다. 이번엔 하얀 연기가 내뿜어지지 않은 채였다. 그는 곧 쓰레기통으로 걸어가 담뱃불을 끄면서 입을 열었다.

“우리 위대하신 동아리장님께서는 워낙에 학업에 출중하신 천재이신지라, 취업 길이 훤하시니 이 미천하고도 가련한 중생의 고민 따위는 이해하지 못하시겠지요.“

“어허, 그래도 내 친히 그대의 이야기를 들어보겠느니라.”

창가 앞에 기대어 쉬엔지를 무심히 바라보던 황웨이는 쉬엔지가 담배꽁초를 버린 쓰레기통을 보더니 곧 기겁했다.

“어쩐지 동아리실에 웬 운무가 흐르나 했더니, 담배 한 갑을 전부 다 핀 거야? 너 사람 맞아?“

“내가 좀 우리 학교에서 제일가는 애연가이긴 하잖아.”

어께를 으쓱한 쉬엔지가 그녀를 보고는 벽에 몸을 기댔다.

“그래서 무슨 사고를 쳤는데?”

“사고가 아니라 고민. 고민이라니?”

잠시 멈칫한 쉬엔지가 말을 이었다.

“어제 한 구절을 봤어.”

“무슨 구절? 너라면 또 음모론 비슷한 거겠지. 뭔가 했더니 그런 거 보고 또 상상의 나래로 빠지셨구먼!”

“아니, 아니! 그런 거 아냐! 무제랑 관련된 거였다고.”

“무제?”

황웨이가 고개를 까딱 기울이자, 눈썹을 찌푸린 쉬엔지가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제무제 성소 말이야.”

“아하.“

음모론 맞는데 뭘.

황웨이가 낸 목소리에 숨겨진 뜻을 눈치챈 쉬엔지가 그녀를 흘겨보다가 입을 열었다.

“어제 길을 걷다가 한 서점에 들렀는데, 어떤 책에 쓰여 있는 구절을 봤어.“

쉬엔지는 그 책의 구절을 황웨이에게 읊어주었다.

일생에서 빠져나오기 힘든 겹겹의 포위망에 갇혔을 때, 당신의 등 뒤를 맡길 사람이 있나요?

여정의 끝에 이르렀을 때, 아내와 자식을 부탁할 수 있는 사람이 있나요?

모든 희망이 잿더미가 되어버렸을 때, 당신에게 난롯불을 지펴줄 사람이 있나요?

설이나 명절, 연회가 끝나고 모두가 흩어졌을 때….

벽에 가득 걸린 풍등과 갈까마귀 외에, 당신과 함께 남은 술을 나눌 사람이 있나요?*

*열화요수 68화 | Priest, 유서우 저

“인생을 관통하는 구절이네.“

”그렇지?“

”근데 그게 무제랑 무슨 연관이 있는 건데?“

“왜냐하면 그 책이 무제의 야사와 관련된…….”

그러면 그렇지.

황웨이의 눈빛에 조금 뜨끔한 쉬엔지가 얼른 화제를 다른 곳으로 돌렸다.

“…… 아무튼 내 고민의 요지는 그게 아니야. 그 구절을 보니까 조금 기분이 울적해지기도 하고 그래서.”

구절을 곰곰이 되짚던 황웨이가 이상하다는 듯이 쉬엔지에게 말했다.

“근데 너, 동기들과 사이좋지 않아?“

어를 으쓱한 쉬엔지가 순간 적연의 기령들을 떠올리고는 말을 이었다.

“물론 좋은 동기들은 많아, 사이도 좋고. 근데 가끔은 다른 사람들은 모두 소중한 사람들이 하나쯤은 있는데 나만 혼자 동떨어져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그렇긴 하지.”

머무르는 곳 없이 계속 움직이는 하늘가의 구름을 바라보던 황웨이는 몸을 일으켜 책장 쪽으로 걸어가면서 입을 열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거 아닐까, 인간은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가야만 뒤처지지 않을 수 있어. 움직이지 않으면 현실이 바뀌지 않잖아. 그렇기 때문에 끊임없이 발 디딜 곳 하나 없이 느껴지는 걸 수도.”

“하늘에서 내려온 천재님은 그런 말도 하실 줄 아시는구나.”

“인문학부라면 응당 이런 얘기도 할 줄 알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황웨이는 곧 책장에서 책 한 권을 뽑아 들고는 쉬엔지에게 보여주면서 이어 말했다.

”너 아까 내가 여기에 왜 왔냐고 물었지? 이거 때문이야. 참, 너 계속 여기 있을 거야?“

”응.“

”그럼 환기 좀 시킨 다음에 창문 닫고 나와. 너 또 담배 피우지 말고.“

이윽고 황웨이가 문을 닫는 소리가 들려왔다.

탁.

탁.

탁.

담뱃재를 털던 쉬엔지의 손이 성령연의 손과 맞닿았다. 몽롱함에서 화들짝 깨어난 쉬엔지는 고개를 들어 어느새 자신의 옆에 앉은 성령연을 보았다. 성령연은 미간을 조금 찌푸린 채였다.

“어, 어어. 왜?”

“이제부터는 피우지 말거라, 듣자 하니 연기가 폐를 태운다고 하더군.“

조금 멍하니 폐하를 바라본 쉬엔지가 푸스스 웃으며 말했다.

“뭐야, 그런 건 또 언제 들었어?“

쉬엔지의 말에도 표정 하나 바뀌지 않은 성령연이 그의 손에서 담배를 꺼내 쥐었다. 그러자 쉬엔지의 손이 곧 떠나려는 성령연의 손을 옭아매었다. 담배와 쉬엔지의 손이 겹쳐 조금은 뜨거운 온기에 신경이 쓰이는 것을 애써 무시하면서 성령연이 입을 열었다.

"무슨 생각을 그리 해? 병아리."

쉬엔지가 담배를 든 성령연의 손을 물러미 보다가 입을 떼었다.

"아니, 뭐…… 그냥 그런 게 있어. 근데 나는 뜨거운 걸 좋아하는데도 피면 안 되는 거야? 전에는 그냥 넘어가더니 누구한테 무슨 이야기를 들었길래 이런 바람이 든 거야? 령연, 가끔 넌 나를 그냥 범인으로 보는 건 아닌지 의심이 가."

"범인이라,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나 보지?"

성령연은 담배를 다른 손으로 옮겨 쥐고선 쉬엔지를 잠자코 바라보았고, 얽혀진 손을 바라보고 있던 쉬엔지의 얼굴은 점점 붉어져 갔다. 잠시 목청을 가다듬은 쉬엔지가 대답했다.

"말 돌리지 마……."

성령연이 희미한 웃음을 지으면서 말했다.

"그저 궁금해서 물어본 것뿐인데."

마는 육욕에 통달하였다고 하던가, 정말 이 마두는 사람 마음을 들었다 놓는 데에 일가견이 있다.

쉬엔지가 얼핏 보이는 성령연의 눈물 모양 흉터를 외면하면서 딴생각에 빠져 있을 때, 그의 귀로 한 마디가 들려왔다.

"넌 범인도 아닌데, 가끔 사람보다도 사람 같을 때가 있어."

그 말에 조금 찔려서 발끈한 쉬엔지가 몸을 옆으로 살짝 돌리며 맞받아치려고 입을 열었다.

"그러는 너는 가끔……. 가끔, 음."

그러나 내뱉은 말은 끝을 맺지 못했다. 사람 아닌 것보다도 사람이 아닌 거 같다, 라는 말은 떠올리기만 해도 마음이 후벼파지는 것 같았다. 잠시 끙끙거리던 쉬엔지가 에라 모르겠다 싶어 얼버무리려던 순간, 고개가 확 돌려졌다. 강제로 시야에 성령연을 품은 그가 조금 멍해졌다. 성령연이 손에 들고 있었던 담배를 입가로 가볍게 물고는 빈손으로 쉬엔지의 고개를 돌린 것이다. 이따금 피어오르는 담배 연기가 쉬엔지의 코를 스쳤다. 아까 회상했던 기억 탓일까, 순간 쉬엔지는 머릿속에 이 문구가 떠올랐다.

모든 희망이 잿더미가 되어버렸을 때, 당신에게 난롯불을 지펴줄 사람이 있나요?

쉬엔지는 자신의 체온보다는 살짝 서늘하게 느껴지기에, 맞잡은 성령연의 손을 살짝 만지작거렸다. 그러자 성령연이 얽혀들어 간 손을 흘끗 내려다보고는 다시 쉬엔지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이 새 녀석은 정말 그 어떤 것보다도 뜨겁다. 너무 뜨거워서 자신까지 녹아버릴 것만 같다.

쉬엔지가 무의식적으로 성령연이 물고 있는 담뱃불을 바라보면서 몸을 조금씩 반대쪽으로 기울이자, 그를 느낀 듯 성령연이 점점 몸을 쉬엔지 쪽으로 돌리면서 앞으로 다가왔다. 비단 같은 기나긴 머리칼이 어를 따라 스르륵 흘러내렸다. 이윽고 성령연이 물었다.

"가끔 뭐?"

쉬엔지는 방금 회상했던 기억 속에서 황웨이가 자신에게 보여주었던 책 표지에 '무제'가 적혀있던 것이 떠올랐다. 그때 사학과였던 황웨이는 무제를 주제로 포트를 쓸 거라고 했었다. 쉬엔지는 무제에 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던 사학과 학생들을 떠올리며 입을 열었다.

"가끔…… 이 아니라 언제나 범인들에게 삶을 이어 나갈 수 있는 신앙이 되어 주지. 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우러러보는 인황 폐하이시니까."

그 말에 웃음을 흘린 성령연이 또다시 물었다.

"질투해?"

쉬엔지가 눈길을 피할 뿐만 아니라 말길까지 돌리려 했다.

"폐하, 그거 알아? 사실 담배는 직접 흡연보다 간접흡연이 더 해로…… 으앗."

결국 쉬엔지는 자기 상체 무게를 버티지 못한 채로 소파 옆자리에 넘어졌다. 그러나 뒤로 넘어질 때도 계속 성령연과 손을 잡고 있었기에, 성령연도 몸이 쉬엔지 쪽으로 기울여졌다. 성령연이 비어있는 손으로 여유 있게 소파를 짚은 위치가 쉬엔지의 다리 너머라, 쉬엔지는 졸지에 폐하의 긴 머리카락 사이에 갇히고 말았다. 그는 이마에 종족 문양을 빛내며 입을 열었다.

"뭐, 뭐, 뭐야."

"네가 내 손을 잡은 채로 넘어졌어."

자신을 잡은 쉬엔지의 손을 보여준 성령연이 이어 말했다.

"그리고 내가 말했잖아, 너는 사람보다 사람 같아도 범인이 아니라고."

그는 빙긋이 웃으며 한 마디를 더했다.

"쉬엔지璇玑."

쉬엔지는 입을 열긴 열었지만, 아무것도 내뱉지 못한 채로 가만히 있는 상태였다. 비록 말로는 표현되지 못했으나 이마의 종족 문양으로 그의 심정을 어렴풋이 짐작해 낼 수 있었다. 성령연이 마지막 한 마디를 말할 무렵에 그의 입에서 거의 다 타가는 담배꽁초가 떨어졌는데, 이에 쉬엔지가 저도 모르게 한 손으로 떨어지는 담배꽁초를 받아쥐는 순간 성령연이 이마의 문양이 그려진 부분에 입을 맞췄다. 담배꽁초가 떨어지는 옆을 바라보던 쉬엔지의 눈이 앞을 바라보자, 시야가 온통 검은 머리카락에 뒤덮였다. 성령연이 담배를 핀 것은 아니었지만, 담배를 물고 숨을 들이쉬며 말을 내뱉었기 때문에 숨결은 한층 더 따뜻해진 참이었다.

내가 이 사람의 난롯불이 되어 준 걸까?

갑자기 떠오른 생각에 쉬엔지가 말문이 막힌 사이, 이마에서 입을 뗀 성령연이 입을 열었다.

"그러니 일부러라도 범인이 되려고 애쓸 필요 없어."

멍해진 쉬엔지가 입에서 나오는 대로 아무렇게나 말했다.

"너도 혼자서만 앞으로 나아갈 필요 없어, 발 디딜 곳이 없어도…… 내가 같이 걸어줄 테니까."

그 말에 성령연이 몸을 지지하던 팔에 힘을 뺐고, 이에 놀란 쉬엔지가 담배꽁초를 불사르고는 몸 위에 엎어진 그를 한 손으로 안았다. 얽혀진 손은 여전히 그대로 얽혀있는 채였다. 몸에 울려 퍼져오던 서로의 심장 박동은 처음에는 박자가 어긋났지만, 점점 어긋난 정도가 줄어들더니 마침내 하나가 되어 울려 퍼졌다. 그들은 눈을 감은 채로 그 고동을 온전히 느꼈고, 그렇게 오랜 시간 동안 서로를 껴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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