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유성

[열화요수] 폐하, 저랑 백년해로할 거예요?

열화요수 엽서북 《선령세상유람기》 참여 원고│w. 유성

통비무제. 급진파 인황, 통비의 아방화 심각합니다. 적당히 느슨한 로맨틱코미디 유니버스.
진신을 얻은 천마검령이 공공연하게 무제의 반려 취급을 받지만 정작 당사자만 비밀연애라고 굳게 믿는 아기병아리 세계관.


어느 날, 제나라의 만인지상 인황 폐하께서 조회에 이르러 말씀하시길.

"궁 안의 만인이 마땅한 거처와 역할이 있건만, 제아무리 검령이라 하나 황제의 측근이 전장의 막사도 아니고 아무 지붕 아래에서 잠들게 할 수가 있겠느냐. 마침 빈 궁이 있으니 그에게 처소로 내어주고 적합한 지위를 주어 황실의 예와 질서를 바로잡고자 하노라."

라고 하시어. 이를 듣는 신하들은 모두 올 것이 왔구나. 싶었다. 그러나 이어서 무제가,

"태후께서 머물던 궁이 쓸모도 없이 비어 있다지, 이를 단장하여 내어주되. 본래 후비들의 거처로 지어진 궁이니 후대에 혼란이 없도록 사관은 금년 1명의 후(后)가 입궁하였노라 적어두거라."

라고 하시니. 이를 듣는 신하들은 모두 대경실색하고 말았다.

"정실부인조차 들이신 적 없사온데 없는 황후를 기록에 남기다니요. 이는 아니 될 말씀이옵니다."

얼핏 논리적인 말처럼 들렸으나, 인황이 인간도 공신들의 혈족도 아닌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검령을 황제의 정실 삼겠다는 소리가 아닌가? 후대가 착각하지 않게 기록만 올려놓겠다고? 이게 무슨 살 건 아니지만 포장만 뜯어볼게요 같은 소리인가? 이 개떡같은 소리에 속지 않은 신하들 중 인륜지대사 중 한창때의 젊은이들 혼사에 가장 관심이 많을 나이인 지천명의 학자가 반대를 하고 나섰고.

"그래? 허면 그보다 낮은 비(妃)로 삼고, 통비(彤妃)라 남겨두면 문제가 없겠군."

이 거침없는 추진력의 인황 폐하께선 없던 황후를 도로 없애 문제도 없애고 신하들의 반대도 없앴으며 다음날 조회에 노학자의 자리도 없애버리셨다.

그렇다면 조회의 이틀 치 논란이 된 이 '통비'마마께는 문제가 없었을까? 그렇지 않다. 인황의 뜬금없는 선발도 혼례식도 예법과 절차를 깡그리 무시한 이 후궁 책봉에는 통비의 발화가 약 50% 정도의 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아니, 어쩌면 99%쯤은 차지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남은 1%의 가능성은 나랏일에 바쁜 인황폐하 연애 좀 시켜보려는 안일한 땅 파서 먹고살자 세계관의 여지인 것이다.

하여튼 사건의 발단은 그리 오래되지 않은 이야기다.


폐하! 저랑

百年諧老

할 거예요?

W. 유성

황제 성소가 제멋대로 이름만 비로 올려 날치기로 책봉한 이 '통부인'께선 수행에 수행을 거듭하여 어찌어찌 진신을 얻은지 얼마 되지 않은 아직 미숙한 검령이다. 몸은 덜 자란 청년에 가까웠으나, 마음은 여전히 황제의 곁에서 재잘거리는 여느 애완조 못지않게 발랄한 소년이었다. 평생을 그와 함께한 성령연의 곁에서 하늘 아래 땅 위를 종횡무진하고 다녔으나, 육신을 얻은 뒤 제 발로 내딛는 대지의 감각이 이 어린 새를 감동시키지 않을 이유도 없었다. 이 미성숙한 검령이 제 발길 닫는 대로 온 황궁을 헤집고 다니는 무법자가 되는 데는 성소가 그를 천마검이라 소개한지 하루도 채 걸리지 않았다.

천하를 평정하고 이제 겨우 지엄한 법도 비스무리한 것을 세워보려 하는 황궁에 천마검령의 존재란 모든 예외사항이자 날아다니는 치외법권이었다. 특별한 지위도 신분도 없으나 천마검이 황제의 품에 있는 한 잠시 머물다 갈 객도 아닌이다. 하다못해 두발 딛고 달리기라도 하시면 어디 계시겠거니 하겠건만, 하늘과 땅과 지붕과 처마 밑을 아우르며 황실의 온갖 구역을 모두 휘젓고 다니며 제 호기심을 풀기 바빴다. 이를 기꺼이 여기는 황제가 친히 방임한 탓에 당최 그 행보에 제동을 걸지도 못하는 아랫사람들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모른체할 뿐이었다.

이를 알면서 모른체하는 인황폐하와 이를 모르지만 안다고 생각하는 검령은 돌보는 이들의 고초와 관계없이 평화로운 일상을 보내고 있었다. 예를 들어 검령이 또 어디서 포르르 날아와 제가 본 궁인들의 사사로운 일화를 풀어놓으면 자애로우신 황제 폐하께서 고개를 끄덕여주시는 식이다. 운이 좋으면 웃어주는 모습도 볼 수 있었다. 그런데 돌연 어디서 뭘 보고 온 것인지 황제 앞의 유일무이한 무법자가 물었다.

"그래서 말이야. 령연 너는 연애해 본 적 있어?"

이게 무슨 소리니 병아리야. 여태 우리가 한건 뭐라고 생각한 거니? 입을 다물었으면 다물었지 말문이 막혀본 적 없던 인황 폐하는 오랜만에 당황했다. 그는 세간에 그들이 나누는 친애와 정서를 무어라 지칭하는지 모르지 않았다. 물론 여기엔 소년 황제의 풋풋했던 첫사랑과 소박하지만 다사다난했던 둘만의 시간, 그리고 발갛게 익은 그의 소년을 품에 안고 어르고 달래며 다정한 말들을 나누었던 밤이 담은 사연이 길고 길게 있었으나……. 하여튼 그들 간의 관계가 우정이나 전장에서의 유대를 넘어섰다는 것은 진작에 자각하고 있던 황제 폐하는 어이가 털리는 소리가 아닐 수 없었다.

"네가 모르면 없지 않겠니."

여태 너랑 있었는데 네가 모르면 누가 알겠니. 성소는 그런 의도를 담아 불편을 살짝 드러냈으나, 눈치를 상실한 검령은 성소의 곁에 줄곧 곁을 지킨 유일무이한 존재가 자신임을 증명하는 말에 제법 우쭐해졌다. 

"황제는 아무나 만날 수 없다며? 그럼 있지, 나랑 연습해 보는 건 어때?"

하지만 이 당돌한 논리 파괴자는 다시 한번 황제 폐하의 어처구니가 가출하는 소리를 내뱉었다. 서로의 마음을 충분히 느낄 수 있는 관계에 교제 상대가 생긴다면 여태까지도 하나였고 앞으로도 하나인 것이 당연하거늘. 성소는 다소 기가 막혔지만 검령이 무슨 말을 하려고 이런 수작을 부리는지는 이해했다. 그의 병아리는 저들이 대체 무슨 사이인 줄도 생각해 보지 않은 채 그에게 고백하려 하고 있었다.

"그렇구나. 하지만 이 구중심처에서 헛된 말이 나돌도록 둘 수는 없는 법이지."

계략의 달인, 단리 선생에게 십몇 년쯤 수학한 수제자 무제 폐하는 '너만 알고 있어 비밀이야' 술법을 사용했다. 효과는 굉장했다. 덕분에 궁인들과 환관들이 시립 한 정전 안에서 황제와 천마검령이 교제를 하기로 했는데-아직 안 사귀었어? 그러시대.-그건 미래를 대비한 연습이고-대체 누굴 위한 연습이래? 나도 몰라-이 사실은 당사자 둘만 아는-우린 귀가 없대? 죽기 싫으면 없어야지...-비밀 연애인 것으로 결정되었다.

그리고 성소 황제는 다음 날 냅다 교지를 날렸다. 황제의 정인을 사사로이 둘 수 없으니 원래 다 그런 법이라며 궁의 법도에 무지한 검령에게 일러두었으니. 이것이 천마검령이 천마검이라는 무시무시하고 피가 뚝뚝 떨어질 것 같은 호칭을 놔두고 통부인이라 불리게 된 연원이었다.

자신의 궁과 작호를 받은 통부인은 과연 황실의 날아다니는 치외법권이 아니게 되었을까?

"짐의 궁에서 짐이 숨어야 할 까닭이 무엇이니?"

"그야 그렇지만 다들 이렇게 하던데."

그렇지 않다. 그저 귀찮은 일을 책임지기 싫어 흐린 눈으로 지붕을 넘어 도망친 검령을 모른척하던 궁인들이 이젠 목이 날아가기 싫어 필사적으로 황제와 그의 통비를 모른척해 주기 시작했다는 정도가 차이였다. 하기는 전에도 잘못 실수했다간 통비가 아니라 황제의 손에 목이 날아가는 건 똑같았으니, 차라리 대놓고 조심하라 일러둔 지금이 나은 것… 같기도? 궁인들은 잠시 소란이 있었으나 금방 적응했다.

"몰래 만나야 해. 몰래."

이 궁 안에 황제가 가지 못할 곳은 어디에도 없을뿐더러, 정말로 황제가 어디에 있는지 아무도 몰랐다간 당장 큰일이 난다는 사실은 제쳐두고. 후원 뒤 외진 전각에서 밀회를 갖자고 하는 통비는 제법 귀여웠다. 아니, 제법이 아니다. 제가 끌고 와놓고 막상 얼굴을 가까이하면 두 뺨이 붉어지는 것이 치명적으로 귀여웠다. 성소는 지금도 쌓여있는 문젯거리들을 한 아름 품에 안고 벽에서 전전긍긍하는 내관의 존재를 깡그리 무시하고 통비의 무릎에 머리를 베고 누웠다.

"졸려?"

"아니. 하지만 조금 머리가 아프구나."

엄살을 조금 부리니 금방 부끄러움도 잊고 그의 눈가를 덮어준다. 감긴 눈꺼풀 위로 걱정스러운 시선이 와닿는 것이 느껴졌다. 그는 오늘 남아있는 일정을 가늠해 보곤, 남아있는 여유시간을 정확히 계산해냈다. 5분 정도 더 어울려주다 돌아가면 될 법 싶었다.

"근데 령연, 연습이 끝나면 말이야. 궁에서 나가야 할까?"

정정, 10분은 더 어울려줘야겠다. 이 조그만 머리통에서 대체 무슨 생각을 했기에 황제의 인가를 받아 말뚝 박아둔 처소에서 나갈 생각을 하는지 알아야겠다.

"왜 그런 생각을 한 거니?"

"새 궁도 화려하고 좋지만 혼자 자려니까 좀 추운 것 같아. 네 곁에서 잘 때가 더 좋았단 말이야. 절대 무서워서 그런 건 아니야. 근데 시비들이 하는 이야기를 들어보니까, 총애를 받지 못하는 비는 궁 밖으로 쫓겨난다고 하더라고."

황제 성소의 총애가 통비에게서 사라질 날은 절대 오지 않겠으나, 어디서 또 통속소설 같은 이야길 주워듣고 온 모양이다. 하지만 간식배와 충신을 골라내고 혓바닥 긴 요족들과 심계가 날뛰는 전장에서 살아남은 황제는 금방 총비의 말에서 유의미한 정보 하나를 골라냈다. 작은 목소리로 빠르게 말하면 못 알아들을 줄 아는 모양인데, 성령연은 예민한데다 통비에 대해서라면 집중도 높았다.

황제 번역기에 통비의 말은 '폐하 혼자 자는 게 너무 무서워요 폐하 품에서 잠들고 싶어요.' 같은 말로 들렸다. 결국 황제와 동침하고 싶단 앙큼한 아양이 아닌가? 제 궁이 생겼다며 희희낙락 나가기에 아쉬움도 없는 줄 알았건만. 새 둥지를 보물창고 삼아 저가 주작인지 까마귀인지 모르게 보물을 모으고 있다는 말은 들었는데, 퍽 쓸쓸했던 모양이다. 하기는 그들은 낮이건 밤이건 그리 멀리 떨어져 지내지 않았으니 아직은 세상 모든 것에 적응하는 과정에 불과하다. 이 또한 결국은 통비가 그의 곁으로 돌아오는 법이라는 증명 같아 황제의 마음이 사뭇 너그러워졌다.

"그럴 일은 없을 거야. 누구도 너를 쫓아내지 못하게 해주마."

그리고 성소 황제는 다음 날 냅다 길일을 잡으라 명했다. 그게 무제 폐하께서 황실 기록만 날조한 게 아니라 혼례까지 날치기로 해먹게 된 사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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