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유성

[열화요수] 알페스와 나페스 사이의 우리 사이.

열화요수 엽서북 《선령세상유람기》 참여 원고│w. 유성

현대배경, 열화요수가 동명의 드라마인 세계관. 아이돌 출신 쉬엔지x아역출신 탑배우 성령연

돌판, 업계에 대한 고증 낮음. 난데없이 퀴어물을 찍어주는 더 큰 중국드라. 검열 어디갔는지 모름.

그 외 원작 등장인물 언급 있으나 등장은 약함. 모브 다수. 제목이 이런데 알페스얘기가 적은듯합니다...

인터넷 말투 사용 있음. 쉬엔지가 인터넷밈에 익숙함. 작중 등장하는 드라마, 영화는 그냥 중국식으로 대충 한자끼워맞춘 제목들입니다.

분량조절 대차게실패... 약 25000자. 겸허히 운명을 받아들이고 씁니다.


S#1. 만남의 장소. (낮/사무실)


"드라마? 누가? 제가요?"

"그럼 기사에 적힌 이름이 너지 누구겠냐."

"와, 형 성공했네요. 첫 주연이 무려 성령연이랑 같은 작품이라니."

멤버들의 말에도 쉬엔지는 쉽사리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그는 손에 쥔 대본과, 안일한 매니저보다도 발 빠르게 소식을 전한 인터넷 기사 페이지를 띄운 휴대폰을 번갈아보느라 바빴다.


'월급쟁이 초능력자X봉인된 마두' 환상의 만남?...영화배우 성령연, 멜로 드라마 도전

적연미디어 20XX. 01. 21.


(성령연의 시대극 촬영장 사진)

△성령연. 사진|소속사 제공

종합 엔터테인먼트 기업 U넷이 야심하게 출범한 드라마, '열화요수'(극본 Priest, 연출 BL)의 캐스팅이 발표되었다. 일찍이 프리스트 작가의 신작으로 알려져 화제를 모았던 열화요수는 이번에 스크린의 황제 성령연의 드라마 복귀작으로 화려하게 신호탄을 쏘아올렸다. '열화요수'는 온갖 초자연 현상과 '특능인'들을 관리하는 '이공국'을 무대로 한 서스펜스 장르의 로맨스 판타지이다. 믿고 보는 연기력의 성령연, 케미 제조기 쉬엔지의 캐스팅이 확정되며 이들의 연기 앙상블에 이목이 쏠리고 있다.

[적연미디어 유행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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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진짜 나라고?!"

쉬엔지는 휴대폰을 내던지며 벌떡 일어났다. 물론 그러자마자 제가 벌인 짓에 제가 화들짝 놀라 휴대폰을 공중에서 잡아채는 기예를 선보였다. 쿵쾅거리며 뛰는 가슴이 액정이 설탕유리보다 못한 휴대폰을 떨어트릴뻔 한 것에 대한 충격인지, 자신의 첫 주연 캐스팅을 회사가 아니라 기사를 통해 먼저 알게된 탓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아이돌 경력 10년, 개인 활동으로 연기를 시작한지는 이제 겨우 3년차. OTT나 저예산 웹드라마로 알음알음 이름은 알렸으나 여전히 아이돌 출신이란 딱지가 붙어있는 어중간한 중견 아이돌 쉬엔지에게 첫 주연작은 제법 의미가 깊다. 매일 엉망진창 돌아가지만 높으신 분들과 연줄은 좋은 소속사에서도 슬슬 쉬엔지를 주연으로 꽂기 위해 괜찮은 작품을 물색중이란 이야기도 들었다. 하지만 작품을 찾아보겠다고 하곤 피처링이나 화보 촬영 일정만 물어오지, 서브커플로 참여했던 작품이 뒤늦게 해외에서 유행이 돌아 예능이며 인터뷰며 불려다니지, 솔직히 다음 앨범 컴백 준비나 하고 싶었던 쉬엔지로서는 까맣게 잊고 있던 차기작 소식이다.

"그걸 왜 나한테 물어보지도 않고 계약해?!"

그러니 쉬엔지에겐 아닌 밤중에 홍두깨 같은 소리일 수 밖에. 심지어 계약서는 본 적도 없는데 이미 캐스팅 기사가 났다고? 당사자에게 후통보를 해도 정도가 있지, 기사로 접하게 하는건 대체 무슨 경우냔 말이다.

"예? 제, 제가 말 안했던가요? 하지만 형 하실거잖아요. 그 '성령연'인데."

쉬엔지의 매니저, 양차오가 어리숙한 얼굴로 주절주절 변명을 했다. 거절하기엔 너무 좋은 스케줄이라느니, 이걸 걷어차면 굴러온 복이 아니라 1등 당첨된 복권을 찢는 격이라느니. 맞는 말이다. 계약서를 보기도 전에 도장부터 찍었을 것이다. 스타 작가에 탑배우가 참여하는 시즌제 드라마의 주연이라니. 제가 소속사 직원이었어도 제안을 듣자마자 찔러보기로 끝나기 전에 냅다 계약서부터 들이밀었을 큰 건이었다. 하지만, 하지만 말이다.

"잘 되었네. 가서 팬이라고 고백해."

"장난해? 본체를 어떻게 비즈니스 모드로 영접하란 말이야? 게다가, 거기다!"

쉬엔지가 비명을 지르며 소파에 엎어졌다. 그 와중에도 휴대폰은 혹여 기스라도 날 까봐 두 손으로 고이 쥐고 머리 위로 치켜든 채였다. 그 불편한 자세를 보다못한 샤오정이 쉬엔지의 휴대폰을 빼앗아들었다. 쉬엔지의 휴대폰이 깜빡, 반짝이며 잠금 대기화면이 켜졌다. 화면에는 성령연이 작년에 찍은 역사극 영화, 무씨제국천하패왕전武氏帝国天下覇王传의 포스터가 띄워져 있었다.

"내가 성령연 좋아하는 거 세상 사람들 다 아는데 어떻게 로맨스를 찍어……!"


알페스와 나페스 사이의 우리사이

2024. 1. 21. 아이소발간. W. 유성


익명의열화러 : 제목 이렇게 넣어도 됨?

└익명의열화러 : 어쩔수 없음 위치찾기 실패...


10년차 아이돌 쉬엔지. 그는 돌판에서도 방송가에서도 유우우명한 성령연 팬보이, 성령연 오타쿠였다. 쉬엔지의 개인팬들은 물론이고 그들의 소속사인 영안엔터의 인턴마저 쉬엔지가 얼마나 뼛속깊이 성령연 오타쿠인지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물론 쉬엔지는 이렇게까지 오타쿠 이미지를 오래 가지고 갈 생각이 없었으나……. 본래 아이돌의 이미지 사업이란게 뜻대로 되진 않는 법이다. 쉬엔지의 성배우빠돌이 이미지는 5년 전 아이돌 예능에서 역사 퀴즈를 하라고 보냈더니 성령연 출연작만 줄줄줄 맞췄을 때부터 망해있었다. 물론 이 변명을 꺼낼 때마다 같은 그룹 멤버인 샤오정은 네 휴대폰과 성령연 진열장이 있는 방 꼬라지를 보고 말하라고 부정했지만, 아무튼 쉬엔지는 오타쿠 이미지를 굳힐 생각이 전혀 없었다.

"좋게 생각하세요. 형 그래도 연기 시작하고 한번쯤 같은 작품 찍어보고 싶다고 하셨잖아요."

양차오 매니저는 스케줄 통보라는 만행을 저질러놓고 '아차, 깜빡했다.' 정도로 넘긴 주제에 태평하게 말했다. 배우들 중에 성령연과 같은 작품 안 해보고싶은 배우가 어디있겠는가? 그는 걸어다니는 100억 돌파 보증수표, 그가 출연한 영화가 떳다 하면 스크린 점유율 1위를 놓치지 않는 명실상부 스크린의 황제다. 같은 앵글에 잡혀주는 것만으로도 천세만세 황송하옵니다 머리를 조아려야할 격차였다. 거기다 쉬엔지처럼 연기경력은 고작 3년에, 출연작이라곤 팬들의 애정과 OTT시대의 덕으로 그럭저럭 제작비만 회수한 서브커플 전문, 만년 서브남 역할의 배우에겐 성령연 출연작에 '제재!' 한 마디 듣고 목이 잘리는 환관으로 캐스팅되어도 감지덕지할 수준이. 그런 성령연과 함께 더블주연? 심지어 그의 상대역으로 나온다고? 덕계도 정도가 있지 어떻게 그의 앞에서 연기를 하란 말인가! 연기를 맞춰보다 대사를 절지만 않아도 잘 했다고 칭찬받아야 마땅하다.

"그래서 안 하실거에요?"

"아니? 미쳤어? 절대로 해야지. 오늘부터 로맨스의 제왕, 아니 제왕은 성령연이지. 내 배역이 뭐라고? 신입사원? 그래 고백을 부르는 신입사원. 직진 밖에 모르는 쉬엔 주임이라고 불러."

"드디어 미쳤군."

"그래, 미쳤지. 성령연에게."

샤오정은 혀를 끌끌 차고는 컴백 일정이나 물어봐야겠다고 회사로 떠났다. 쉬엔지는 뒤늦게 부랴부랴 그를 쫓아가 함께 그룹의 향후 스케줄을 재확인하였고, 제대로 된 드라마 출연 계약서도 받아볼 수 있었다. 거짓이 아니었다. 그는 확실하게 주연이었고, 무려 시즌제 드라마였다. 15년 전 멸망한 나라의 어린 황제역을 마지막으로 영화판만 전전하며 드라마로 돌아오지 않던 성령연이 어째서 방송가로 돌아왔는진 모르겠지만, 정말로 쉬엔지가 그와 함께 드라마를 찍는 것이다. 심지어 장르는 로맨스 판타지!

"어떻게 생각해 라오샤오, 우리 폐하께서 연기 스펙트럼을 넓히려는 걸까? 하지만 무씨제국천하패왕전이랑 위심계후연의도 충분히 이미지 변신이 되었을텐데 말이야. 황제 역할에 질리신 걸까?"

"대본 다시 읽어라. 너네 폐하 여전히 황제니까."

"너네 폐하라니! 아니, 하지만 말이야. 그게 중요한게 아니라고. 난, 나는 물론 몸쓰는 일은 다 잘한다고 자부하지만. 멜로 드라마라는 건, 그거잖아? 그러니까. 내가 폐하를…… 좋아한다니까?"

"어, 그건 니가 숙소에 온갖 사극 블루레이 쌓아둘 때부터 알았으니까 닥쳐봐."

"망했어. 완전 망했다고. 난 아직도 내 출연작 모니터링 할 때 손가락 사이로 본단 말이야. 그런데 폐하가 나오면 다 봐야하잖아!"

"지금 너 때문에 우리 다음 컴백 앨범도 망할 것 같으니까 제발 꺼져."

한참을 샤오정을 붙잡고 토로하던 쉬엔지는 결국 1시간 만에 샤오정의 작업실에서 쫓겨났다. 다음 정규 앨범에는 꼭 자작곡을 넣고 싶다고 했던 샤오정인 만큼 그의 예민함을 이해 못하는 건 아니었지만, 도통 흥분을 가라앉히기 어려웠다. 기쁨과 심란함이 마음속에서 휘몰아쳤다. 결국 쉬엔지는 매니지먼트 팀으로 달려가 연기 수업을 늘려 달라고 매달렸다.

없는 시간도 쪼개 연기 연습을 하고, 대본이 너덜너덜해지도록 읽었다고 긴장이 사라지진 않았다. 적어도 성령연을 앞에 두고 대사를 잊어 NG를 내지 않을 만큼은 달달 외웠다. 손꼽아 기다리던 대본 리딩날, 쉬엔지는 마음 같아선 1시간쯤 일찍 가고 싶었으나.

……그는 무려 5분 지각하고 말았다. 야외 촬영에 기상 이변으로 촬영 스케줄이 꼬였다. 그가 아무리 노력한다고 해도 하늘을 조종할 순 없었으니 전체 일정이 늦춰질 수 밖에 없었고. 그마저도 매니저가 사정사정해서 다음 스케줄을 위해 부랴부랴 비행기를 타야했다. 최대한 빠르게 도착했을 땐 이미 리딩 현장에 대부분의 주역 배우들이 모여있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쉬엔지는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참고 황급히 허리를 숙이며 인사를 건넸다. 쉬엔지를 제외하곤 조연조차 이름이 가볍지 않은 배우들이었다. 명품 조연으로 꾸준히 등장하는 비춘셩, 액션계의 대부 왕저, 연극판에서 넘어와 한창 주가를 높이는 라이징스타 핑첸루까지. 데뷔 경력만 따지면 쉬엔지도 그리 짧게 방송물 먹은 것도 아니건만, 배우로서 만난다고 생각하니 긴장되는 면면들이었다. 하물며 이 자리엔 그가 있었다. 쉬엔지의 영원한 별, 시대를 막론하고 영원한 황제로 군림하시며 남우주연상을 시상식마다 쓸어모으는 성령연.

"자, 이제 우리 주연들이 모두 모였으니. 시작할까요?"

그의 폐하는 쉬엔지를 위아래로 한번 훑더니, 그대로 고개를 돌려버렸다. 쉬엔지는 거기서 이미 1차 충격을 받았다. 감독이 쉬엔지를 다독여 자리에 앉히고, 다른 배우들이 저마다 가벼운 인사말이나 눈인사를 건네는 동안 성령연은 그저 대본만 보고 있었다. 쉬엔지를 의식조차 하지 않는 태도에 쉬엔지는 속이 울렁거렸다. 이게 아닌데. 프로패셔널하게 인사하고, 성 배우님 작품 잘 보고 있었습니다, 하는 아이스브레이킹을 마친 뒤 대본 분석을 착실히 해온 자신의 노력을 보여주며 긍정적인 동료 배우 이미지를 만들려던 내 계획이!

망했다. 그는 최애에게 첫인상부터 비호감 도장을 찍은게 분명했다.


라오샤오일반인여친🔒@ERT_1711
얘들아 ㅅㅂ 샤오지 얼굴봤냐 안에서 새는 바가지 면전에서도 ㄹㅈㄷ로 새고있음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저게 대본 리딩이야 단독 팬미팅이야 대사한번칠때마다 흘긋대네 아 이제 병아리 덕계못이라고도 못 놀리는 거 아님??
(https://youtu.be/열화요수_대본리딩현장)

통쪽하세요?🔒@TuTqkqhdi
아 혼곤하다 스캔들 뜰 바엔 영원히 섭남만 하라고 빌었는데 근데 이걸? 축하? 한다고? 해야해? 뮤비보다 연기 못하잖아 어쩔거야ㅅㅂ 와중에 아방한 표정 미쳤음
(성령연 쳐다보는 바보같은 표정 캡처)(긴장해서 쭈그러든 쉬엔지 얼굴 캡쳐)

숨참고컴백다이브🔒@cbackdive
@TuTqkqhdi님에게 보내는 답글
그래서애들컴백언제?

통쪽하세요?🔒@TuTqkqhdi
@cbackdive님에게 보내는 답글
시즌제 드라마란다 나그냥 죽었다 컴백때깨려고

숨참고컴백다이브🔒@cbackdive
@TuTqkqhdi님에게 보내는 답글
ㅇㅋ영안엔터 불지르고옴


S#2. 나페스과 오타쿠(저녁, 숙소)


열화요수는 무난하게 촬영에 들어갔다. 작가의 실력과 주연(주로 성령연의) 이름값을 믿고 이미 다음 시즌까지 편성계획이 짜여있다던데, 그래서인지 촬영일정은 타이트한것에 비해 곤란한 이변이나 사고가 일어나진 않았다. 단지 어려움이 있다면, 주연 배우들 사이의 묘한 긴장감이었는데. 마치 쉬엔지와 성령연 사이에 차단벽이라도 세운 듯 묘한 거리감과 어색함이 있었다. 이는 스태프들 사이에서 제법 의외라는 말이 오갔다. 성령연이야 본래 과묵한 성정이지만 현장 분위기를 고려해 능숙한 사교성을 발휘하는 편이었고, 쉬엔지는 그 성령연의 팬이니 같이 맞붙는 신이 많은 만큼 두 사람이 금방 친해질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현실은 이렇다. 성령연은 자기 촬영이 끝나면 벤으로 돌아가 쉬었고, 다른 배우의 촬영을 참관할 때도 조용히 자리에 앉아 현장 모니터링만 할뿐 주변과 어울리지 않았다. 거기에 항시 캐릭터에 몰입한 상태를 유지하려는지 대본을 쥐고 있는 그에게선 조금 서늘한, 주변을 거절하는 분위기가 느껴지곤 했다.

그런 성령연이 연기에 진심이라고 생각한 쉬엔지는, 1달전 출시한 자신의 솔로앨범과 1년전이 마지막인 그룹앨범 사인CD를 예의상 건넨게 끝이었다. 그는 종종 팬들이 보내준 커피차가 오면 성령연에게 먼저 갖다 바치는 성의를 보일망정 먼저 다가가 친해지려는 태도를 보이지 않았다. 이를 본 감독은 굉장히 의외라는 발언을 했는데, 이에 그의 아이돌 쉬엔지는 어색하게 웃으며 다음과 같이 답했다.

쉬엔지, 28세. 2군 남자아이돌 오방소년의 메인댄서.

▶아, 그게. 제가 성령연 배우님 팬인건 다들 아시잖아요? 물론 이번 기회에 가까워지면 좋겠죠. 하지만 첫 주연이고, 아직 현장에 다른 선배님들도 많이 계신데 연기에 집중해서 좋은 모습 보여드려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스탭분들도 열심히 하시는데 저도 주연으로서 책임감을 가져야겠다 싶었죠.

이를 속마음변환기를 돌려보면 이렇다.

성령연오타쿠, 15년차. 성령연클립모아보는 비계있음.

▶ㅁㅊ지금도 떨려서 미치겠는데 어떻게 가서 치대???? 공사구분못한단 소리나 듣겠지;;; 근데 폐하 초근접샷 미쳤다 이런얼굴이어야 클로즈업카메라 들이대도 살아남는구나 방금 카감님 감탄사 들었어?? 나도보고싶다 왜 나랑 같은 앵글안에 들어가서 캡쳐를 못따지?? 감독님저진짜못하겠어요제가어떻게폐하랑멜로를해요 이거신고감이야 혼인신고

그렇다면 성령연은 어떠한가?

성령연, 30세. 영화배우.

▶1부의 초반엔 대립하는 장면이 많으니, 배우들 간에도 적당한 거리를 두고 사적인 모습을 감추는게 극중 긴장감에 몰입하는데 더 좋다고 판단했습니다. 서로를 의식하지만 경계하는 두 인물은 심리가 굉장히 복잡하게 연출되니까요. 감독님께 의논드렸더니 좋은 생각이라고 하셔서, 쉬엔지 배우분께는 죄송하지만(웃음) 지금 저는 신비주의 컨셉입니다.

이를 속마음변환기를 돌려보면 이렇다.

성령연, 30세. 영화배우.

▶뭘 해 그냥 하는거지.

하여튼 이런 이유로 두 사람은 영 친하지 않았다. 다행히 프로패셔널한 두 사람의 노력덕에 촬영엔 아무 지장이 없었지만, 쉬엔지는 가끔 소망을 품었다. 이번 촬영 끝나면 선배님한테 인사드려야지. 이번 시즌끝나면 선배님께 번호 여쭤봐야지. 이번 작품끝나면 선배님 혹시 시간 나면 콘서트 와주시면 감사하겠다고 티켓드려야지. 하여튼 이런 식으로 뭐만 끝나면, 의 생각은 계속 했는데.

매일 컷 사인이 떨어져도 성령연에게 접근하긴 커녕 망상에 망상만 더해지고 그의 가슴속 키티일기장에 적기만 했다. SNS계정에 적진 못했다. 아이돌이란 언제 어떻게 비계가 털릴지 알 수 없는 존재였으니까. 그는 그저 욕망을 꾹 누르고 성령연 보정짤, 성령연 스틸컷, 성령연 열화요수 메이킹필름 캡쳐 따위를 알티하며 조용히 성령연 덕질을 계속했다. 실물이 같은 장소에 있는데도 오타쿠가 아닌 접근법을 모르겠다. 사진 찍고싶지만 차마 같이 셀카찍잔 말 한마디를 못해서 휴대폰을 아예 양차오에게 맡기고 다녔다.

쉬엔지의 오타쿠철학은 간단하다. 팬과 최애는 거리를 지켜야한다. 엔터업계에는 최애 하나만 보고 업계에 투신한 인물이 적지않게 있었고. 그보다 많은 수의 팬들이 업계와 최애의 인간적 면모 과다공개, 갑질이슈, 온라인 여론과 맞짱뜨기, 예민한 언론과의 눈치싸움, 워라벨 없는 노동강도 등등에 밀려 최애도 잃고 직장도 잃는 결말을 맞이했다. 쉬엔지는 제 팬이라며 영안엔터로 이직한 기획팀 모 양이 직장생활 3년차만에 쉬엔지가 지나가도 눈치채지 못하고 죽은 좀비꼴로 대표욕을 제문마냥 읊으며 출근하는 것을 보고 많은 교훈을 얻었다. 팬심은 멀리 있어야 아름답다. 화면 너머로 보아야 오래간다. 성령연도 그렇다. 물론우리폐하는코앞에카메라를들이밀어도굴욕샷없는삼천년에한번나올천재배우지만.

"야, 너 첫방일 언제냐. 회사에서-"

휴대폰을 보며 쉬엔지의 방으로 들어오던 샤오정이 문 앞에서 우뚝 멈춰섰다. 그는 휴대폰을 끌어안고 바닥에 누워 눈물로 음침제문을 그리고 있는 쉬엔지를 보고 경멸하는 표정을 참지 않았다.

"난 진짜 니가 이럴 때마다 숙소 나가 살고싶어."

"나가... 멤버라곤 둘만 남았는데 불화설 뜨고 싶으면..."

"미친 새끼... 니가 관찰 리얼리티 같은 거 찍었다가 이미지 폭망할까 봐 안 나가주는 거다."

샤오정은 절대 쉬엔지가 왜 찌질하게 번데기가 되었는지 이유를 묻지 않았다. 쉬엔지가 두 손으로 떠받들고 있는 휴대폰엔 성령연의 SNS 공식계정이 떠 있었으니까. 원인 파악은 쉬웠다. 물론 그걸 몰랐어도 절대 알고싶지 않았겠지만.

"폐하가 네가 보내준 커피차 인증샷에 내 이름 태그 달아주셨어... 귀여워서 미치겠네... 그냥 미쳐야겠다..."

"거기서 더 미칠 구석이 남아있었다고?"

"나 지금 폐하보고 이마치느라 거북목 완치됨."

"너 제발 인터넷 좀 그만해."

샤오정은 질색하며 쉬엔지를 걷어찼다. 이럴 줄 알았으면 커피차따윈 보내지 않았을거라고 중얼거렸지만 정말 보내지 않았다간 다른 의미로 불화설이 돌았을테니 결국 보냈을 것이다. 누워있는 쉬엔지가 정신 못차리고 헛소리를 하는 동안 샤오정은 제 휴대폰에 남은 메신저 채팅창을 쉬엔지의 눈 앞에 들이밀었다.

"아무튼, 너 첫방 언제냐. 회사에서 너랑 나랑 첫방보는거 라이브 찍자던데. SNS에도 사진 좀 올리고. 스케줄 안 맞으면 너네 촬영장에 한번 들러서 사진찍고 오게."

"우리 연말 콘서트 말고 일정 없지않아? 스케줄 안맞을게 어디있어."

"너 말고 나. 나. 내 솔로활동 이 새끼야."

"악! 자꾸 차지마! 리더가 멤버 패네!"

스케줄을 확인해본 결과, 다행히 첫방송 날짜와 다른 스케줄이 겹치지 않았다. 하지만 쉬엔지는 아직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은 것 같았다. 그는 여전히 성령연과 쉬엔지가 같은 화면에 나오는 영상을 두눈 똑바로 뜨고 시청할 자신이 없었다. 촬영장 모니터링도 둘이 나오는 컷에선 온 힘을 다해 성령연만 집중해서 보는데. 방송 보다가 비명이라도 안 지르면 다행이다.

"나 눈 감고 방송보다가 태도 논란나면 네가 책임질거야? 라오자오, 가뜩이나 폐하 때문에 비 엄청 내린단 말이야. 심장마비."

"나도 진짜 너를 책임지고 싶지 않은데 하필 재계약이 4년 남아서 미치겠다 정말. 팬들이랑 소통한다고 이상한거 배워오지좀 마."

샤오정은 쉬엔지가 자꾸 인터넷 밈을 배워오는게 팬들의 주접덧글 탓인 줄 알았다. 쉬엔지 본인이 그 팬들 속에 뒤섞여 누군가에 대한 주접을 달고 있으리란 건 짐작도 못한 채로. 쉬엔지는 대답 없이 시선을 슬슬 돌리곤 스케줄러에 첫방날짜를 추가했다. 겸사겸사 첫방일에 그들이 브랜드 모델로 있는 불닭치킨벼락맞아둘이먹다둘이죽을콤보도 시키기로 했다. 어느새 프로아이돌의 뇌를 장착한 쉬엔지가 착실히 SNS에 보낼 내용까지 먼저 컨펌받았다.

"그렇게 걱정되면 그냥 연기라고 생각하면 되지 않냐? 너 맨날 하는 헛소리 있잖아. 뭐였더라, 엘리베이터에서 만났는데 성령연이 이웃집인 컨셉? 그 웃기지도 않은 짓 숙소 이사얘기 나올 때마다 하더니. 눈감지 말고 촬영 모니터링하는 역할로 연기해. 사진 찍는 동안."

"엘리베이터에서 만난 폐하와 부담스럽지 않게 눈인사만 하고 헤어졌는데 아래층 택배가 잘못 배달된 나머지 가져다주러 갔더니 우연히도 아랫집에 사는게 폐하였다는 시츄에이션 예행연습이야. 연예계란 언제 어디서 엮일지 모르는 좁은 판이니까."

샤오정은 그게뭔데 미친놈아.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쉬엔지는 휴대폰을 가슴에 부여잡고 눈물을 삼켰다. 나왔다, 오타쿠를 향한 일반인의 잔혹한 경멸. 쉬엔지는 그런 망상들이 팬덤에선 속칭 나페스라고 불린다는 또 다른 어두운 진실을 숨겼다. 그렇다. 쉬엔지는 성령연이 공급도 안해준 성령연유사에 미치는 성령연나페서였다. 어쩔 수 없다. 그 역시 과거에 연예계의 고된 현실을 모르는 연습생 시절엔 성령연과 아는형동생 정돈 하고 싶어서 연예인의 꿈을 키웠으니까. 원래 일정없고 꿈만 있는 연습생 시절엔 롤모델 하나쯤 두고 콘서트에 서는 꿈, 음악방송 무대에서 인사하고 사인받는 꿈, 선배님 행사에 게스트로 섭외되는 꿈 같은걸 꾸기 마련이다. 쉬엔지의 경우엔 그게 성령연이었을 뿐이고…….

"너 맨날 뭐만 하면 긴장될 때 성령연이 팬싸에 잠입한 컨셉 같은거 연기했잖냐."

"아니야. 폐하 팬미팅에 깜짝 게스트로 섭외되어 팬인 척 들어가있는 컨셉이었어."

롤모델을 통한 동기부여란 생각보다 효과가 좋다. 쉬엔지는 아이돌로 데뷔한 이후로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성령연을 생각하며 견뎌왔다. 오방소년은 제대로 뜨기까지 암흑기가 길었고, 그럭저럭 성공한 지금도 그룹활동은 줄줄이 역경을 맞고 둘만 남아 각자 솔로 활동으로 인지도를 이어오고 있었다. 개인 활동을 시작하게 되었을 때 연기로 진로를 정한 것도, 따지고보면 성령연 탓이었으나. 쉬엔지는 정말 아이돌 활동이건 배우 활동이건 단 한번도 성령연과 우연하게라도 마주친 적이 없었다. 그러다보니 한이 깊어져 쉬엔지의 덕질이 슬슬 상황설정 컨셉유사 빙의글 수준이 되긴 했지만.

"그거나 그거나 미친놈 같은 건 똑같으니까 밖에서 말하지 마라."

"미쳤어? 나도 사회적 체면이란게 있어."

"너랑 나도 비즈니스 관계인거 제발 잊지 말고."

"우린 이 험한 아이돌판을 헤쳐나가는 전우인거지. 안 그래요? 리더형님."

어쩔 수 없다. 긴장되어 토할것 같은 무대 뒤에서나 별 이상한 이슈로 활동기를 말아먹었을 때, 쉬엔지의 스트레스 리프레쉬 방식은 항상 성령연이었다. 성령연 클립을 보고 성령연 솜인형을 스트레스 볼마냥 주무르며 비록 상황이 그룹해체 직전이지만 싸가지 없게 굴어 인성논란 일으킨 기사가 연예란을 도배해 폐하가 보기라도 하면 부끄러우니까 어른스럽게굴자. 그렇게 스스로에게 세뇌하다보면 침착함을 유지할 수 있었다.

"첫방송 모니터링을 어떻게 연기로 해? 라이브 내내? 연기하는 나를 보면서 연기를 또 하라고? 결국 내 연기를 봐야하잖아. 폐하와 같은 화면에서, 폐하를 보면서!"

"너 지금 촬영은 잘 하고 있다며."

"그야 폐하가 별로 나한테 관심이 없으시니까……. 최대한 공사구분하는 모습을 보여야지 무작정 치대면 싫어할 걸."

"로멘스의 제왕, 고백을 부르는 신입사원은 어디로 갔냐. 어차피 우린 해야 해. 우리 팬들만 보는 라이브니까 네가 평소의 90%만 입 다물면 이미지 문제는 없을거고."

"닥치란 소리를 참신하게 하네."

성령연은 거의 마법의 주문이었다. 소속사가 이상한 컨셉 가져와서 쪽팔리게 할 때마다 아이돌은 자존심없어 폐하가 보시는 건 나의 프로다운 모습이야, 같은 말을 중얼거리고. 편도만 6시간 걸리는 거리의 지방 행사가 같은 날 잡혔을 때도 어쩌다 지방 로케촬영을 온 성령연이 열심히 무대하는 쉬엔지를 발견하는 망상 같은 것을 하며 몸이 부서져라 춤을 췄다. 멤버 하나가 사고를 쳐 정규앨범 컴백 일주일만에 자숙기에 들었을 때는 아이돌 망해서 엔터사로 들어가 성령연 매니저가 되는 상상 같은걸 하다가 현타가 와서 그만두었다. 그날 성령연이 출연한 라디오에 '직동이 사고쳐서 이직하고 싶어요. 그치만 일을 그만두긴 싫어요 이런 제 마음은 뭘까요.' 같은 고민사연을 올려 성령연의 목소리로 새벽 1시에 '일을 무척 사랑하시나봅니다. 제 생각에는 사연자님이 직장을 그만두셔도 결국 같은 일로 돌아오게 될 것 같네요' 라는 격려의 말을 듣고 울며 샤오정에게 뛰어가 내가 더 열심히 할테니 리더도 탈퇴하지 말라고 매달렸다.

"하지만, 촬영은 별개잖아. 팬들에게 보여줘야할 내 이미지도 있고."

이제 슬슬 성령연으로 안해본 망상이 없는 수준이다. 마지막 수치심을 지키기 위해 샤오정에게 제가 해온 망상의 10%도 말하지 않았지만, 항상 힘들 때마다 'ㅁㅁ하는 나를 보는 성령연.'이란 마법의 주문을 중얼거리는 걸 샤오정도 알고 있었다.

"네 이미지 오타쿠된지 오래다."

"촬영하는 동안 점잖고 싹싹한 후배로 보이려고 얼마나 열심히 이미지 관, 리를……."

어라? 생각해보니 지금도 별로 다르지 않은데?

쉬엔지는 문득 깨달았다. 지금까지 촬영장에서 그가 해오던 혼신의 흐린눈으로 최애와 거리감 지키며 프로의 모습 보여주기 캐릭터가 그동안 쉬엔지의 나페스 망상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오히려 지금이 현실판 아닌가? 망상만 해오던 '성령연과 같은 촬영장에서 함께 배역 캐릭터연구하고 대본 맞춰보는 동료 배우썰'의 실사화 아닌가? 비록 성령연과 꼭 필요한 말 말고는 나누지 않아서 대본 맞춰보기도 캐릭터 연구도 나눈 적 없지만.

"라오자오 넌 천재야! 역시 우리의 리더! 고마워! 나 연습 좀 하고 잘게!"

쉬엔지는 벌떡 일어나 샤오정을 내쫓고 성령연 필모 캐릭터 피규어를 들고 드레스룸으로 향했다. 그는 거울 앞에 성령연 피규어를 세워두고 촬영장에 성령연에게 자연스럽게 비오타쿠인척 말을 거는 시뮬레이션 연기를 했다. 샤오정이 '쓸데없는 일까지 노력파'라고 칭하는 그의 연습벌레 속성이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그는 새벽까지 드레스룸에서 온갖 상황극 연기에 매진하다 안 그래도 다음 컴백 때문에 빡치는데 숙소에서까지 스트레스 받아야겠냐고 갈구는 샤오정의 짜증을 받고 잠자리에 들었다.


너네 성령연 멜로 어떨거같음? 난 좀 별루

잡담│익명의열화러


내 마음의 별루

(열화요수 스틸컷1)


ㅇㅇ : 언제적 드립이냐

ㅇㅇ : 다음 시즌 드라마 말하는 거임? 연출 잡은 사람 보니까 로맨스는 약할 것 같긴 하던데

└ㅇㅇ : 드라마는 작가를 봐야지 영화야 메가폰 누가 잡았냐지만 ㅍ작가 멜로 잘 말아주심

ㅇㅇ : 대놓고 정통멜로는 찍은적없긴 한데 연기되잖아 저번에 ㅁㅇㅎㅅ에서 로맨스 약하단 말은 좀 있었긴 한데ㅎ 그 얼굴이면 3초만 눈 마주쳐도 애는 몇이나 낳을까 자기야됨

└ㅇㅇ : 이게맞다ㅋㅋㅋ작가가 로맨스 개연성을 전부 성령연 열굴로 밀더만 저래도됨? 싶으면 폐하얼굴꽉차게찍음

ㅇㅇ : 폐하는 근데 혼자 신선같지 않음? 뭔가......

ㅇㅇ : 좀 의외긴 함 무협도 아니고 평소 하던거나 하지.

ㅇㅇ : 상대역 아이돌아님? 잘함?

└ㅇㅇ : 평타는 치던데 굳이 캐스팅한 이유는 모르겟슴

└ㅇㅇ : 얼굴합이됨 얼굴합이된다고 둘이그림체가맞다고 스틸컷만봐도벌써결혼식장가서손바닥에불나게박수치고뷔페에서갈비탕한사발거하게말아먹고고왔구만

└ㅇㅇ : 알겠어진정해;;


S#3. 주차장 길목(아침, 차량내부)


영화배우 성령연. 쉬엔지의 영원한 스타이자 모두가 스크린의 황제로 손꼽는 이 탑배우는 자신의 팬보이를 알고 있을까? 물론 그는 알고 있었다. 그가 아이돌이나 쉬엔지에게 특별히 관심이 있어서는 아니었다. 캐스팅 된 상대 배우에 대해 간략한 조사를 매니티먼트 팀에게 맡겼고, 인터넷을 훑던 와중에 한 영상 클립을 보았다.

"사진 속 인물을 역사 순서대로 맞추시면 됩니다."

"아니, 이걸 어떻게 맞춰요? 다 똑같이 성령연 씨잖아!"

"어차피 황제는 성령연(웃음)"

"저 이 영화는 본 것 같은데, 이거 누구더라. 그 초한지 아냐 초한지?"

(시끌벅적한 토크 중 진지한 얼굴로 사진을 들여다보는 쉬엔지를 클로즈업하는 카메라.)

(혼자 척척 사진의 순서를 바꾸는 쉬엔지. 감탄하는 자막.)

"와! 정답이에요. 뭐야, 형님 역사공부 좀 하셨나봐요?"

"그냥... 폐하 출연작이라 쉬웠어요. 여긴 등전만리심, 이건 상엽홍애풍사, 난아심자, 이 둘은 둘다 강희제 시절이긴 한데 작일지불가류가 장진주보다 과거에요. 여기 장신구 색이 다르잖아요."

영상은 1분 30초 남짓한 길이였는데, 쉬엔지는 그중 50초 동안 성령연 출연작 이야기로 프리스타일 랩을 했다.

아역 데뷔로 시대극의 전설을 찍고 11살에 칸 영화제에 초청받은 중국이 낳은 천재 배우. 선진시대부터 당송요원명나라를 거치며 역사극에선 안 거쳐본 시대가 없는 살아있는 시대극의 주인공. 그 때문에 '어차피 황제는 성령연' 이란 유행어를 만든 명실상부 시대극 감독들의 워너비 톱배우. 솔직히 황제로 너무 많이 나왔다. 성령연의 필모를 줄줄 꿰다못해 명대사까지 외워버려 중국사를 성령연으로 배운 쉬엔지는 이제 성령연의 착장 화보만 보고도 강희제와 영락제, 당 태종과 광무제를 구분할 수준이었다. 그러니 예능에서 조금 틀려보라고 만든 퀴즈에 줄줄이 성령연 필모를 대며 중국사 퀴즈를 다 풀어버린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물론 PD도 쉬엔지가 그 자리에서 퀴즈를 다 맞추다 못해 시대극 필리버스터를 할 줄은 몰랐겠지만. 당사자인 성령연조차 미디어가 팬덤의 기초상식에 미치는 영향을 염려해 픽션사극에는 출연을 재고해봐야하나 라는 허튼 생각을 3초쯤 할 정도였다.

영상을 본 성령연의 감상은 단순했다. PD가 일부러 이걸 갖다 붙인 건가?

아이돌 쉬엔지를 모르냐고? 망돌시기를 견디고 역주행 신화를 쓰며 팬사인회 남편짤로 망한 그룹에 소생술을 쓴 유사남친 쉬엔지를 모른다? 물론 성령연은 모른다. 그게 누군데. 성령연에게 중요한 건 소속사랑 굳이 불편한 기류를 형성하며 차기작을 영화가 아닌 드라마로 골랐다는 거고, 해외진출의 가능성을 열어둘 겸 슬슬 시대극 말고 현대극을 해보자는 단리의 조언을 받아들였다는 사실이다. 이 드라마가 무조건 잘 되어야할 이유가 두개나 있었다. 물론 감독도 작가도 믿을만한 네임드라 작품성도 흥행도 의심할 바 없었지만. 평소와 같았다면 성령연은 쉬엔지가 이상한 컨셉의 초능력 아이돌이건 자기 팬이건 카메라 앞에서 목각인형만 되지 않는다면 신경쓰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성령연은 아주 약간의, 어떤 가능성에 대해 생각했다.

아이돌 쉬엔지에게 붙은 꼬리표는 영 이상한 것들 뿐이었지만, 배우 쉬엔지에게 붙은 타이틀은 '케미 제조기'였다. 멜로가 아니어도 다양한 매체에서 활약하며 어떤 조합에서도 잘 어울린다는 평을 받아왔다. 연기 경력으로는 대체로 젊은 층을 타깃으로 한 청춘 멜로 드라마에서 주구장창 서브남 역할만 맡아와 짝사랑 역할에 도가 튼 배우였다.

그렇다면 성령연은? 그에 대한 찬사야 많았지만 드배팬들 사이에 가끔 나오는 부정적인 타이틀은 하나, '쇼윈도 남편'이다. 부인 역할의 배우와 투샷을 찍어도 정치적 파트너로 보이지 연인 같은 느낌이 없다는 평가. 소속사에서 스캔들을 철저하게 막아왔을 뿐더러, 워낙 어릴 때 데뷔한 영향도 적지 않았다. 하지만 젊은 남자배우가 멜로 시장에서 배제되는 것도(물론 그 누가 감히 성령연을 캐스팅 목록에서 제외할까만은) 상품가치에 문제가 있다. 사랑이 중심이 아닌 배역만 주로 맡아왔으니 그럴 수도 있겠지만, 멜로 드라마에 캐스팅되고도 케미가 안 산다는 말을 듣는 건 좀 그렇지 않나? 성령연의 성실하고 완벽주의 뇌세포가 크런치 모드에 들어갔다.

열화요수에서 성령연이 맡은 인물은 그의 영혼의 반쪽, 주작공자를 마음 깊이 사랑하여 그를 위해 그를 포기할 수 있는 인물이다. 짊어진 것이 많아 숙명에 짓눌리면서도 마음의 가장 깊고 부드러운 자리에 작은 둥지를 남겨두고 꽁꽁 숨겨두는 철혈의 황제. 둘의 애정전선이 대놓고 티나진 않더라도, 지켜보는 시청자들로 하여금 두 사람의 사랑이 이루어지길 응원하게 만들어야 했다. 하지만 단지 한 앵글 안에 들어온다고 모든 커플이 소위 말하는 '케미'라는 것이 느껴지는 건 아니다. 성령연은 배역 이상의 연기를 보여줘야했다. 쉬엔지가 도움이 되지 않을까? 케미 제조기와 쇼윈도 남편 사이에서 누가 승리할까?

성령연은 쉬는 시간 짬짬이 캐릭터 분석을 시작했다. 쉬엔지에게 대중이 기대하는 이미지는 젊고 싹싹하고 가끔은 거칠게 밀어붙이는 건강미 있는 남자후배였다. 대체로 붙어있는 키워드도 어느정도 비슷비슷하다. 젊은 피, 신입, 연하의, 친근한데 사연있는 옆집 오빠, 듬직해서 의지하고 싶은 남친감이지만 내 앞에선 여우짓을 하며 질투도 좀 해주고 결정적일 때 벽쿵도 해주고, 이게 다 무슨 소리야. 성령연은 인터넷의 바다에 손가락만 담갔다가 도로 나왔다. 아무튼, 그래. 대충 알겠다. 쉬엔지가 제멋대로 굴면 오냐오냐 해주고 리드에 따라주는데 가끔 고민상담도 해주고 비맞으며 처량해진 쉬엔지에게 우산 씌워주고. 뭐 이렇게 바라는게 많아? 성령연은 인터넷 서치를 그만뒀다. 대신 매니지먼트 팀에게 쉬엔지에 대해 조사할 때 쉬엔지의 팬들 니즈도 파악해보라는 요구를 추가했다. 아이돌 팬 누구도 오빠의 멜로눈깔을 바라지 않을 거라는 음습한 욕망을 모르는 일반인의 질문이었다.

성령연은 일단 쉬엔지와 조금 더 친해져보기로 했다. (그 무렵 쉬엔지가 성령연의 믿음직한 후배이자 붙임성 좋은 배우 설정을 밀고 있는 컨셉질 시동중이었단 걸 알았다면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성령연의 배역과 쉬엔지의 배역은 서로 갈등과 대립을 반복하다 공생하게 되는 복잡한 서사가 있었다. 서로간의 사연이 깊은 관계엔 때로 대사 이상으로 드러나야할 호흡과 분위기가 있다. 쉬엔지의 연기력은 예상보다 나쁘지 않았으나, 은연중에 그의 눈에 담기는 성령연에 대한 숨기지 못할 호기심의 빛이 선명했다. 초반이야 괜찮지만, 나중에 모니터링 해보면 저 애송이도 눈치채겠지. 저걸 어떻게 동경의 시선에서 사랑에 빠진 얼굴로 바꿔야할지 성령연은 제 일도 아닌 걱정이 조금 들기 시작했다.

"선배님. 저희 다음 로케부터 맞붙는 장면이 많던데. 같이 대본 맞춰보는건 어떠세요? 서로 캐릭터 해석도 나눠보고, 그래도 파트너인데 배우들끼리도 좀 호흡이 맞으면 좋지 않겠어요?"

걱정이 무색하게, 기회는 빠르게 찾아왔다. 제법 수줍게 낯을 가리며 거리를 두던 쉬엔지는 첫방이 시작하고 제법 풀어진 분위기로 그에게 다가왔다. (성령연의 동료배우인 나, 라는 설정의 상황극 연습이 그때 끝났기 때문이라는 사실은 오직 오방소년만 알았다.)

쉬엔지는 말이 많았다. 어쩌면 오지랖도 많았는지도 모른다. 손에 든 커피캐리어엔 성령연의 커피는 물론이고 함께 따라다니는 매니저팀의 음료까지 바리바리 사들고 왔다. 직장에 어색한 사이가 있는 걸 안 좋아하는 타입인가. 제법 분위기메이커 기질이 있는 쉬엔지가 기어코 제게 접근한 것을 보며 성령연은 가벼운 평가를 내렸다. 단지 성령연에게 어떻게든 싹싹하고 좋은 사람으로 보이고 싶어 노력한 쉬엔지의 발품팔이가 만든 눈물겨운 사교성임을 성령연은 모를 것이다. 성령연은 예의상의 미소를 지으며 그를 자신의 벤으로 초대했다.

"캐릭터 분석은 충분히 된 것 같던데, 따로 맞춰보고 싶은 장면이라도 있습니까?"

"아, 여기 도릉궁 회상 장면이요. 저는 이때부터 둘 사이의 묵은 감정을 조명한다고 생각하는데, 천마검이 무제의 애정을 알고 있었을지 잘 이해가 안 가서요. 참, 말씀 편하게 하세요. 연기는 제가 한참 후배인데."

연기뿐아니라 그냥 모든 경력을 통틀어 성령연이 선배였다. 그는 어지간한 원로배우에 준하는 경력을 가졌으니. 성령연은 그걸 지적하는 대신 그럴까? 잘 부탁해요. 정도로 말을 맺었다. 쉬엔지는 묻지도 않은 말을 줄줄 내뱉으며 자신의 캐릭터 분석을 설명했다. 굳이 그러지 않아도 대본에 꼼꼼히 메모된 것을 보면 퍽 진지하다는 건 알 수 있었다. 단지 쉬엔지의 태도가 동료 배우로서보단, 선생님에게 숙제의 검사를 받는 것처럼 보이는게 거슬렸다. 카메라 앞에서도 그러했는데, 카메라 앵글에 담기지 않는 쉬엔지는 지나치게 솔직했다.

"멜로 드라마에 출연한 경험은 쉬엔지 씨가 더 많던데, 조언을 구하는 부분이 의외네."

"헉, 제 출연작 보셨어요? 아! 별로 없어서 부끄러운데. 저는 성령연 선배님 출연작 전부 다 봤어요. 개인 활동으로 연기를 하려고 했던 것도 선배님 연기 보면서 너무 좋아서, 아. 물론 공부도 많이 되었습니다! 저 정말로 선배님 팬이거든요."

쉬엔지는 정말 말이 많았다. 굳이 모른체 해주려해도 이렇게 자기 입으로 주절주절 뱉어낼 만큼. 같이 촬영해야할 상대역이 내 팬이라고 밝혔을때 비슷한 경험이 세자리수로 있는 톱배우가 해야할 반응으로 적절한 것을 고르시오. 1, 아 네. 2, 예 감사합니다. 3, 아진짜요? 4, 저도 팬이에요. 5, 촬영이나 제대로 하죠? 성령연은 침묵의 미학을 알아 그저 그가 자주 쓰는 반듯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의 팬들이 자비로운 폐하얼굴 이라고 부르는 미소였다.

"그래도 좋아하는 사람에게, 사랑받는 역할은 처음이라서요. 잘 하고 싶잖아요."

그렇게 말하는 쉬엔지는 '좋아하는 사람'을 발음하며 또렷하게 성령연을 보고 있었다. 아직 분장을 지우지 않은 쉬엔지는 색이 밝은 서클렌즈를 끼고 있었는데, 그 안에 반사되는 성령연의 상이 조명 하나 없는 벤 안에서도 잘 비춰보였다. 문득 성령연은 드라마 팬들이 자주 말하던 속칭 '멜로눈깔'이 뭔지 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금방이라도 열정에 녹을 것 같은, 이런 색의 눈이 아닐까.

아, 이걸 써야겠다. 성령연의 뛰어난 두뇌는 금방 해답을 찾아냈다.


라오샤오일반인와이프🔒@ERT_1711
스케줄끝나고 바로 집들어가는 남자 어떤데? 결혼해도 외박 안하고 꼬박꼬박 들어와서 기다리던 나 보고 여태 안자고 뭐했냐고 핀잔주고 재워줄거같은 남자 어때??
(샤오정 공방 직찍 캡쳐)(무대의상 입고 땀닦는 손 캡쳐)
(라방하느라 편안한 실내복 입은 샤오정 드라마 실시간 채팅에 덧글가는 쉬엔지 몰래 찍은 사진 캡쳐)

숨참고컴백다이브🔒@cbackdive
얘들아 내가만약 성...떤남자가 끌려... 우리애가 좋아하는데 크오패스 함 잡아볼가...

라오샤오일반인와이프🔒@ERT_1711
@cbackdive님에게 보내는 답글
안돼너 도망수만 좋아해서 니오빠들 다 도망갔잖아

숨참고컴백다이브🔒@cbackdive
@ERT_1711님에게 보내는 답글
ㅅㅂ............그래서컴백언젠데?? 나도먹고는살아야ㅠ할거아냐ㅁㅊ

통쪽하세요?🔒@TuTqkqhdi
@cbackdive님에게 보내는 답글
이걸블락안하네


S#4. 연심과 팬심의 간격(밤, 세트장)


드라마 열화요수는 성령연의 존재만으로 거대한 홍보의 신호탄을 쏘아올렸고, 그 관심이 꺼지기 전에 빠르게 진행된 촬영일정을 통해 방송이 시작되었다. 촬영 일정을 조율하느라 바쁘게 흘러가는 와중에, 의외로 가장 바쁜건 쉬엔지였다.

드라마 촬영하랴 화보 촬영하랴, 가끔 짬대로 MC도 뛰러가고 챌린지도 찍어야하고, 같은 그룹 멤버인 샤오정의 솔로 컴백으로 홍보일정도 간간히 도와야했다. 정신없이 지내다보니 시즌1 촬영은 정말 순식간에 끝났고, 벌써 시즌2의 촬영도 전체의 3분의 1을 지났다. 유독 전통복을 입을 일이 많아 아예 도릉궁 세트장을 따로 빌려 궁 안 장면을 몰아 찍는다던데, 아직 전통복이 익숙치 않은 쉬엔지는 혹여나 의상이 상할까봐 쉬는 시간에도 어정쩡한 자세로 기대지 못하고 자리에 앉아야 했다. 반면 성령연은 아주 능숙하게 옷을 정돈하고 옥좌에 앉아있었다.

"폐하, 마실 것을 대령할까요?"

쉬엔지가 장난스레 옥좌 앞에 허리를 숙이고 묻자, 대본을 읽던 성령연이 옅게 웃고는 대본으로 쉬엔지의 이마를 톡 쳤다.

"어느 불손한 신하가 감히 짐을 내려다보는 거지?"

"아이고, 존경하는 황제폐하. 계단이 높아 그만 잘못 오르고 말았사옵니다. 금방 내려가 커피 가져올게요? 카페라떼?"

"그래, 시럽은 넣지 말고. 네 것도 가져오렴. 의상 밑단 밟지 않게 조심하고."

이 와중에 성령연과의 관계도 제법 평화롭게 '일방적 아는 사이'에서 '동료 배우'라고 할만한 수준으로 진전이 있었다. 이 한 걸음은 쉬엔지 가슴 속에 거인의 한 걸음이나 마찬가지였으나. 어쨌든 '팬이에요.' 하며 쿨하고 싹싹한 후배 이미지를 밀기를 잘 했다고 생각했다. 비록 내일모레 서른이지만 원래 아이돌이란 30대 중반에도 애교를 부릴 줄 알아야하는 법이다. 그리고 쉬엔지는 팬싸마다 레전드를 찍는 유사킹 유사의제왕 연하남의 정석이란 소리를 10년쯤 들어왔다.

쉬엔지가 커피를 가져오자, 성령연은 당연하다는 듯 넓은 옥좌의 옆 자리를 비워주었다. 두 사람은 나란히 앉아 휴식을 취하며 대본을 분석했다. 쉬엔지의 대본은 곳곳에 메모로 빽빽했는데, 성령연은 구김 하나 없이 깨끗했다. 여러번 넘기고 조금 휜 흔적만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어디든 짚으면 보지도 않고 척척 대답해 그가 대본을 모두 외우고 있단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성령연은 팬으로서도 그렇지만 같은 업계 배우로서도, 사람대 사람으로서도 배울 것이 많은 사람이었다. 쉬엔지는 자신이 그의 팬이란 사실이 자랑스러웠다.

하지만 팬과 배우란 위치는 가끔 위기를 느낄 때가 있었다. 성령연은 커피를 한모금 쪼롭 빨며 물었다.

"쉬엔지 씨는 내가 왜 좋아?"

왜냐니요 폐하만 보면 죽었던 심장도 깨어나 뛰는데 불로장생의 영약이 따로있나 이게 걸어다니는 심폐소생기지 폐하를 보면 진시황도 억울해서 벌떡일어날거에요 평생찾던 영약이 21세기에 돌아다닌다고

……따위의 말을 할 수 있을리가. 쉬엔지는 마시던 버블티가 목에 걸릴 것 같은 기분이 들었으나, 아이돌 자아를 최대치로 끌어올려 필사적으로 삼켰다. 아이돌은 먹다 토하는거 아냐. 아이돌은 맛없게 먹으면 안 돼. 쉬엔지는 매년 선출되는 복스럽게 잘 먹는 남돌 랭킹 탑순위권의 자존심을 지켜냈다.

"보통 동년배 배우를 팬이라고 하진 않으니까, 조금 궁금해져서 말이야. 거기다 아이돌들은 그쪽 업계 선배를 롤모델로 꼽지 않던가?"

백번 옳은 말씀이죠 암요. 하지만 쉬엔지에게 성령연은 단순히 롤모델이 아니다. 최애라는건 원래 그렇다. 그냥 가슴이 시키는 거지. 어느 날 갑자기 심장에 무단침입해서 분명 내거였던 심장을 불법리모델링 하더니 살림차려 버리는게 최애란 존재다. 하지만 그걸 고스란히 입 밖으로 꺼내 가뜩이나 방송계에 대놓고 뿌려진 성령연 오타쿠 캐릭터를 당사자에게까지 각인할 생각은 없었다. 쉬엔지는 심호흡을 하고, 최대한 멀쩡하고 멋쩍어하는 수줍은 후배의 표정을 지었다. 레디, 액션.

"또래라서 더 존경스러웠던 점이 분명 있는 것 같아요. 어릴 때부터 뭘 하고싶단 꿈이 없었는데, 성령연 선배님이 나오는 방송을 아버지가 즐겨 보셨거든요. 나랑 비슷한 나이라는데, 벌써 저렇게 자기 길을 찾아가는게 대단하기도 하고 부럽기도 하고. 자연스러웠죠."

머릿속 시뮬레이션 3014편이 돌아간다. 씬넘버 써리원. 엄격한 가정에서 자라 티비는 못보던 어린시절 유일하게 대하사극에서 볼 수 있던 화면 속 사람들을 동경하다 방송계에 진출한 어쩌구 컨셉으로. 진심을 섞어서 너무 겸손하게 굴지는 말고. 쉬엔지는 과연 웹드라마 선정 짝사랑 티내지 않고 티내는 연기로 만인의 서브남 타이틀을 딴 배우답게 애정을 부담없이 표현하는 연기에 능했다. 물론 다른 장면을 연기할 때보다 더 피나는 노력으로 이를 악 물고 성령연에 대한 팬심을 참아야 했다. 사실 지금도 조금만 눈에 힘을 풀면 성령연을 마주보고 있는 부담을 이기지 못하고 도망쳐 손수건을 물어뜯을 것 같았다.

그러한 노력이 성령연에게 어떻게 어필되었느냐, 하면.

'이 건방진 녀석이 내 앞에서 연기를 하네?'

당연히 들켰다. 다른 사람들이야 모르겠지만 성령연은 평생 타인이 자신을 보는 시선과 자신의 연기가 모든 각도로 어떻게 보여질지 철저히 계산하고 연구하며 살아왔다. 그가 연기경력이 제 반도 못 미치는 후배의 생활연기를 눈치채지 못할리가 없었다. 제법 가소롭게 느껴졌지만 흥미롭기도 했다. 처음엔 쉬엔지가 자신에게 반응하는 구간을 캐치해 연기 중 적절히 활용하려 했는데, 예상보다 쉬엔지는 거리를 잘 지켰다.

"그래서, 어때? 존경하는 선배와 같은 작품을 하는 건?"

"저야 항상 배우고 있죠. 가끔은 꿈인가 싶기도 한데. 그래서 꼬박꼬박 증거사진도 남기잖아요. 자, 셀카 찍을래요? 요즘 성령연 선배님 팬들이 저희 공식계정 찾아와서 선배님 얼굴 찾는다니까요."

쉬엔지는 성령연에게도 가끔은 SNS에 사진 올려달란 말을 애교처럼 하며 휴대폰을 꺼냈다. 혼신의 말돌리기였다. 다행히 성령연은 그 이상 묻는 일 없이 수긍하곤 자신의 휴대폰도 꺼내들었다. 그의 말대로 이번엔 자신의 계정에 올리겠다는 말을 덧붙이며. 둘은 성령연의 휴대폰으로 커피를 마시는 자연스러운 컷, 대본으로 의상을 살짝 가리고 포즈를 취한 컷 따위를 찍었다. 진정한 미남은 셀카에 간절하지 않다던데. 쉬엔지는 그런 생각을 하며 성령연의 휴대폰에서 폐하가 괜찮게 나온 사진을 고르기 시작했다.

"지금 의상 나와도 되나? 괜찮죠?"

"시즌2 예고컷에 쓰인 장면에 비슷한 의상이 있었으니 괜찮겠지. 그래도 혹시 모르니 한번 물어는 봐야겠다."

때마침, 성령연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촬영 순서가 조금 바뀌었으니 분장을 고치자는 메이크업 담당자의 말이 들렸다. 쉬엔지가 엉거주춤 따라 일어나자 성령연은 그냥 쉬고 있으라는 듯 손을 흔들고 내려가버렸다.

"아니, 휴, 휴대폰… 가져가셔야죠……."

제가 이상한거 유출하면 어쩌시려고요 폐하……. 개인적인 물건을 남에게 맡기고도 거리낄 것 하나 없다는 저 쿨한 태도가 멋있지만 걱정스럽다. 한편으론 쉬엔지를 전혀 의심하지 않는 것 같아 그의 신뢰를 샀다는 기분도 들었다. 실상은 성령연이 항상 휴대폰을 업무용으로만 쓰며 아무데나 던져놓고 매니저나 스태프에게 맡기는 일이 흔해 신경도 쓰지 않은 일이었으나. 아무튼 쉬엔지의 기분만은 무척이나 좋아졌다. 그는 어떻게든 제가 조금 못생기게 나왔더라도 폐하의 용안이 가장 아름다운 사진을 골라내겠다고 다짐했다.

그렇게 다시 휴대폰 갤러리를 넘기기 위해 화면을 터치한 쉬엔지는, 하필 운 나쁘게도 잘못 누른 손가락이 탭 하나를 잘못 넘겨버렸다. 소속사 매니지먼트 팀과의 단체 채팅방인지, 이런저런 자료통계나 여론 반응을 정리한 캡쳐가 올라오고 있었다. 알람을 끄지 않아 실수로 알람창을 눌러버린 모양이다. 쉬엔지는 허둥지둥 채팅창을 나가려 했는데, 조막만한 휴대폰에 비해 두꺼운 손가락이 그만 맨 밑의 홈버튼과 막 올라오던 채팅의 링크를 같이 눌러 새 창이 열리고 말았다.

  • ■기획팀 황모브 사원 : 말씀하신 조사 자료 링크 첨부합니다.

그리고 쉬엔지의 눈 앞에 펼쳐진, 어떤. 상상도 못한 글자로 인해 쉬엔지는 그만 휴대폰을 든 채 굳고 말았다.

  • ■기획팀 황모브 사원 : 잠깐

  • ■기획팀 황모브 사원 : 자

  • ■기획팀 황모브 사원 : 잘못ㄱㄹ

  • ■기획팀 황모브 사원 : 링크잘못올렸습니다

  • ■기획팀 황모브 사원 : 죄송합니다;;;

채팅이 워낙 우다다다 올라오고 있었으나 위에 계속 뜨는 알람창의 글자를 제대로 읽지 못했다. 그는 단지 새 창에 띄워진 너무 충격적인, 감히 상상도 못한 현실에 숨쉬는 것조차 잊을 지경이었다.


[선기령연] 숨온기 - 11편

을 줬으면 네 온기도 줬어야지

W. 유해한쌀푸딩

마음의 굴레가 무섭게 무게를 더하며 구르고 또 구른다. 가자, 바다로 가자. 그렇게 속삭이던 애처로운 바람은 누구의 숨결이었나. 우리는 땅에서 나 땅으로 돌아간다. 결코 저 하늘의 푸르름을 품을 수 없다. 그래서 나는 바다가 좋았나봐. 네가 헤엄치는 저 하늘로 나는 갈 수 없잖아. 그래서 나는 너와 닮고 싶었나봐. 통비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붉은 비단을 찢고 또 찢어…….

(중략)


[성인][열페스][크오]


무심코 초반의 문단을 쭉 읽어버린 쉬엔지는 스크롤을 더 내리지 못하고 잠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는 이것을 모르지 않았다. 가끔 비게퍼 하던 시절엔 구독하던 금손들도 있었다. 알페스라는건 원래 아이돌과 떼려해도 뗄 수 없으나 적당히 아이돌은 모른척 눈감고 귀막고 뻔뻔하게 웅 비게퍼 그게뭔데여 쉔지는 팬들만 알아용 하는거다. 단지 쉬엔지가 온갖 인터넷 짬빠에 절여져 성령연 유사를 먹는 중증 나페서에 배우판과 돌판을 넘나들며 구독하는 비계까지 있는 진성 오타쿠라도 말이다.

쉬엔지가 처음부터 성령연 유사를 먹었던 것은 아니다. 그는 단지 연예인이란 꿈을 꾸게 해준 아역배우를 너무 좋아했을 뿐이고, 연습실과 지방 행사 말고는 갈 데도 없던 망돌시절엔 성령연의 필모를 낡은 노트북 화면에 잔상이 남도록 돌려봤다. 시간은 남아돌았고, 알아보는 사람이 없다해도 바깥을 쏘다니긴 아이돌로서의 자아가 신경 쓰였으니 숙소에 박혀 성령연 팬질, 성령연 커뮤니티 활동, 성령연 숏츠 탐방에 매진했다. 그는 자연스레 오타쿠의 생태계에 익숙해졌고, 팬덤의 주접문화에도 익숙해졌다. 성령연은 신이자 종교이고 최애는 남편이자 남친이 되었다. 넘치는 애정을 주워 삼키지 못해 데뷔하고 나서도 ‘성령연 찐팬으로 유명한 남돌’로 알려질 정도인데 익명으로 140자를 쏟아낼 수 있는 공간에선 얼마나 필터가 없었겠는가? 그의 비계 프사는 성령연 남친짤이었다.

근데, 내가 나페스를 먹는 거랑 최애가 나와 알페스를 미는 건 좀 다르지 않나? 쉬엔지는 심각한 얼굴로 성령연의 휴대폰에 띄워진 화면을 응시했다. 아무리 봐도 이것은… 두 사람이 주연인 드라마 ‘열화요수’의 팬픽션이었다. 그것도 선기령연 19금 버전. 무심코 북마크를 눌렀다가 제 휴대폰이 아니란걸 떠올리고 서둘러 취소했다.

정말로 오방소년 그룹활동을 걸고 말하건데 쉬엔지는 성령연과 뭐 어떻게 엮여보겠다거나 그와의 연애를 꿈꾸거나, 하아……. 아니, 그래. 했다 했어. 망상으론 이미 결혼식 삼천번가고 신혼여행으로 세계일주도 했다. 그게 죄야? 유죄는 성령연이다. 하지만 그는 정말 팬과 최애는 거리가 있어야 한다는 믿음이 확고한 배우팬이었다. 상상도 뭐 머리에 빈 자리가 있어야 하는거지. 실제로 성령연과 같은 작품을 하고 멜로를 찍는 것만으로 심장이 터져 죽을 것 같은데 그 이상이 생각날리가 없었다.

하지만 성령연은? 대체 성령연은 무슨 생각이란 말인가? 부탁한 자료라니? 대체 뭘 부탁한 건데? 응? 성령연! 대답을 하란 말이야! 물론진짜로대답하진말고요. 쉬엔지는 심란해졌다. 그는 차마 성령연 앞에서 평정을 유지할 자신이 없어 휴대폰을 성령연의 매니저에게 돌려주곤 피곤하니 촬영이 재개되면 깨워달란 말과 함께 자신의 벤으로 기어들어갔다. 제대로 잠들 수 있을리 없었으나, 다행히 촬영이 재개되고 나서도 성령연의 단독컷이 먼저인지 쉬엔지가 불려가는 일은 꽤 한참 뒤였다. 쉬엔지는 정말 간신히, 겨우 NG를 3번 내는 것으로 아슬아슬하게 오늘의 스케줄을 마치고 숙소로 귀가할 수 있었다.

따뜻한 물에 씻고, 푹신한 침대에 누우니 몸은 피곤한데 정신은 점점 말똥말똥해져갔다. 성령연은 대체 무슨 생각일까? 왜 그런걸 보는 걸까? 성령연도 혹시, 나를 조금은 좋게 봐주는 건가? 그냥 레퍼런스 조사? 대중반응 서치? 하지만 성령연은 인터넷 심연 같은 건 볼 것 같지 않았다. 그게 알페스 글이라면 더욱 그럴 것 같았다. 하긴, 메신저 단체 채팅방부터가 성령연을 대신해 여러가지 케어를 해주는 것 같았다. 역시 대형 소속사가 좋긴 좋구나. 이게 아니고. 아무튼 그럼 결국 성령연이 그런 글을 찾아달라고 했던 건가? 성령연이? 나랑? 우우우우우리는 키스씬까지밖에없는데???

때마침 띠롱, 하고 쉬엔지의 휴대폰 SNS알람이 울렸다. 알림 등록을 켜놓은 성령연의 공식계정 알람이었다.

SLY

(쉬엔지와 성령연의 촬영장 셀카)

(둘이 커피마시는 셀카)

#열화요수 #촬영장에서 #귀여운후배 #선기령연

🩷🗨️↗️
fuddustkfkdgo 님 외 여러 명이 좋아합니다.

SLY 배우 성령연입니다. 열화요수 시즌2도 많은 사랑 부탁드립니다.

태그가 왜 이래? 쉬엔지는 습관적으로 사진을 저장하다가 해시태그를 보고 머리가 폭발했다. 내가 귀여워? 저 귀여워요? 왜 해시태그를 선기령연으로 달았어요? 선배 제발 답을 알려주세요! 만약 지금이 새벽 3시고 쉬엔지가 조금만 더 이성이 없었다면 쉬엔지는 곧장 성령연에게 DM을 보냈을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쉬엔지는 그러는 대신 휴대폰을 집어던지고 이불을 걷어차며 비명을 질렀다.

"으아아악!"

"잠좀 자자 미친놈아!"

옆 방에서 샤오정이 벽을 주먹으로 쾅쾅 두드려댔지만 쉬엔지의 달아오른 머리는 식지 않았다. 망했어. 완전 망했다. 잠은 다 잤어! 내일 성령연을 어떻게 보지? 다음 촬영장에선 또 어떡하냔 말이야? 선배! 제발! 저랑 뭘 생각하시는 건지 가르쳐주세요!

우리 사이는 대체 뭐가 되는 거야?!

그렇게 무언가 시작되기까지...

To Be Continue...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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