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화요수] 하극상과 반려조 납치사건
열화요수 엽서북 《선령세상유람기》 참여 원고│w. 유성
제나라 배경의 샤오선령. 황실 관련 설정은 전부 날조.
중국사는 삼국지밖에 모르고 역사는 대체역사물밖에 안읽어본 사람이 쓰는 짭사극 궁정판타지
이름, 병아리샤오통. 연령, 불확실. 지위, 일인지하 만인지상(일지도 모름!). 현재 상태, 매우 심심해서 이름을 심심이로 바꿔야 할지도 모름. 인황의 유일무이 반려조, 무제 성소의 지배 권역 아래 가장 높은 둥지를 차지한 주작검령은 어느 날 텅 빈 처소에서 생각했다.
이상하다. 왜 령연은 매일 바쁜데 난 이렇게 심심하지? 물론 영민한 통은 이유를 모르지 않았다. 인족의 희망으로 황위에 오른 성소는 매우 바빴고, 그를 따라다니며 이것저것 보고 겪을 일이야 많았으나 정치나 경전을 익히는 일은 영 제 관심을 끌지 못했다. 그러니 성령연을 내버려 두고 궁을 산책하는 게 할 일의 전부 일 수밖에. 하지만 혼자 논다고 재미가 있었으면 왜 그가 하루 종일 성령연의 뒤를 쫓아다니며 말을 걸었겠는가?
하지만 심심함이 도를 넘어선 샤오통은 생각했다. 이게 다 령연 탓이야. 령연이 매일 일하느라 바쁘다고 나중에 놀아준다고 해놓고 놀아주지 않아서 그렇잖아? 그렇다면 이 무정한 황제의 관심을 끌려면 더 이상 착한 아이처럼 기다리기만 해선 안 된다. 하지만 어떻게? 산책을 같이 가자고 할까? 아니면 일을 못 하게 마구 시끄러운 노래를 불러서 집중하지 못하게 할까? 가뜩이나 매일 바쁜 인황의 업무를 방해하자니 피곤한 성령연을 더 피곤하게만 하는 건 아닐까? 이 선량한 검령은 대체 어느 때에 성령연이 정무를 내팽개치고 (맹세하건데 성소는 자기 일을 방치하는 황제는 아니었으나) 저를 따라 나올지 고민했다. 그는 제법 그럴싸한 꾀를 냈다.
그래. 성령연을 탈취하기 위한 수단은 반역, 오로지 반역뿐이다.
하극상과 반려조 납치사건
W. 유성
다음 날, 평소와 같이 정무를 보러 입궁한 성령연은 무소불위의 권력을 상징하는 황제의 옥새를 찬탈했다고 주장하는 그의 천마검과 마주치게 되었다. 그즈음에 있다는 기척은 분명 느껴졌으나, 대체 무슨 생각인지 황제의 거처 한복판에서. 그것도 황궁 안에서 옥새를 찬탈한 반란군의 수괴가 되었다는 주장은 무슨 소린지.
'일하지 마. 안 돼. 아무튼 안 돼! 령연이 조건을 들어주기 전까지 안 돌려줄 거야. 난 지금 반란군의 수장이거든!'
너 반란이 뭔지 모르지? 의기양양한 목소리가 성령연의 귓가에 들려왔으나, 이 침착한 황제는 태연히 책상에 앉아 우선하여 황제의 인가가 필요한 문서를 선별하기 시작했다. 물론 제나라는 여전히 곳곳에서 크고 작은 전쟁과 반란이 일어나곤 했으나, 대체로 무제 성소의 출정 아래 잘 진압되었다. 그때 반군이 하던 소리를 아무거나 주워듣게 한 게 문제였나. 그렇다고 천마검을 두고 출정할 수도 없고, 성령연은 새삼 애를 키울 땐 보고 듣는 게 중요하다는 어느 신하의 푸념을 이해해버렸다.
'어어, 가져가지 마! 내가 가지고 있으니까 이건 내 점유물이야. 내가 밟고 있는 거 안 보여?'
안 보이지. 당연히. 그러게 진작 수련 좀 열심히 하라고 했잖니. 성령연은 속으로 반박하며 천마검이 통이 밟고 있다고 주장하는 옥새를 가져와 도장을 찍기 시작했다. 그의 검령이 옥새를 따라 이리저리 주변을 오가는 기척이 느껴졌다.
"그래, 일단 이것부터 하고. 조건은 말해보렴. 들어는 볼 테니."
성령연은 잠시 후 차를 한 모금 삼키며 이 말은 하지 말아야 했다고 후회했다. 그의 병아리가 한이라도 맺힌 것처럼 지난 몇 주간의 일을 줄줄이 나열하기 시작했다. 저번 주의 아침엔 뭘 안 해줬고, 며칠 전에는 퇴궐하고 바로 자버려서 대화도 안 해줬고, 식사할 때 왼쪽 접시에 있는 걸 더 먹고 싶었는데 들은 척도 안 해줬고, 수련하라고 잔소리했으면서 칭찬 안 해줬고, 그래 놓고 매번 나랏일 봐야 한다고 바쁘고, 조금 한가해졌나 싶으면 어디서 또 문제가 생겼다고 다시 바빠지고. 이것이 약 한 식경쯤 이어진 병아리의 분노 성토였다. 나중에 가서는 그동안 아량 넓은 천마검이 그냥 넘어가 주었지만 사실 마음속에 옹졸하게 품고 있던 성령연이 일 끝나면 뭐 하고 놀까 온종일 고민한 108가지 이야기 같은 수다도 섞여 있었다. 반군의 수장치고 참 하찮은 사유가 아닐 수 없었다.
"요컨대, 매번 그랬던 것처럼 놀아달라고 떼를 쓰는 셈이로군."
'너 지금 내가 생떼 부린다고 생각했지!'
"아니, 말로 했단다."
하여튼, 뿔이 난 샤오통은 일이 얼마나 쌓여있건 반란이 일어나면 친정하러 간다고 다른 일 제치고 떠나던 것을 떠올렸다. 이는 그만큼 사안이 중대하기 때문이었으나, 조금 단순한 논리회로를 획득한 샤오통은 반란>정무. 라는 공식을 대신해 반란=공무를 안 해도 됨. 이라는 법칙으로 이해하고 말았다. 그의 병아리는 성령연이 일을 안 해도 될 이유를 만들어 저와 놀 시간을 획득하기 위해 반란을 계획했다. 비록 그게 옥새 위에 올라서서 황제의 재보를 훔쳤으니 쓰지 말라고 억지를 부리는 일이었지만. 조잡하게 계획된 천마검 반란 사건의 경위란 이토록 사사로운 욕심의 발로였다.
"하지만 네가 밟고 있다고 해도 짐이 옥새를 갖지 못할 이유가 없을 텐데."
이 긴 사연과 분노의 성토에 대한 성령연의 감상은 간단했다. 성가시군.
하지만 가끔 황제에게 이 단어는 이렇게도 바꿀 수 있다. 귀엽게 구는군.
'그럼 내가 너 납치할래! 이제부터 내가 가라는 곳만 따라와야 해!'
이것이 무정하고 바빠죽겠는 일상을 보내던 황제 성소가 친히 납치당해주신 까닭이다.
어쨌거나, 급한 일은 처리했으니 토라진 병아리를 달래주는데 한나절 정도를 낭비해도 된다. 여유시간과 자기 역량 사이의 계산을 마친 성령연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무엇보다 지금 놀아주지 않으면 삐진 게 얼마나 갈지 모른다는 직감도 들었다. 나중에 다른 일에 신경 쓸 수 없을 때 검령과 싸우느라 심력을 낭비할 생각은 없다. 성령연은 옥새를 품에 넣고 내관들을 뒤로하고 밖으로 나갔다.
"지금부터,"
따르는 이들을 물리려다가, 다른 생각이 들었다. 기왕 어울려줄 거 제대로 놀아줘야 나중에 딴소리를 안 할 것 같기도 하고. 항상 어른스럽고 근엄했던 청년 황제의 입가에 소년을 닮은 옅은 미소가 살짝 올라갔다 사라진다.
"짐은 납치된 상태이니 따르지 말거라. 필요하면 다시 부르겠다."
예? 뭐요? 차마 황제에게 무슨 헛소리냐고 반문할 수 없었던 내관들만 어리둥절할 소리였다. 물론 이 하극상의 주범, 천마검령은 성령연의 대답이 너무도 마음에 들어 까르르 웃으며 황제를 따라 나왔다. 령연 정말 납치된 거야? 내가 납치하면 따라올 거야? 난 그럼 밖에 나가고 싶어. 쫑알쫑알 말도 많은 병아리가 아까의 투정 부리는 말투는 온데간데없고 잔뜩 간지러운 목소리로 말을 걸어왔다.
"그래서, 언제 돌려보내 줄 생각이니? 당사자를 납치했으니 몸값도 나에게 받아야 할 텐데."
'오늘 하는 거 봐서.'
샤오통은 그간의 한을 풀겠다는 듯이, 하루 만에 해야 할 일을 줄줄이 읊기 시작했다. 황제 납치범치곤 소박하기 그지없는 요구 조건들이었으나, 바라는 게 많기도 했다. 어쨌거나 납치당한 황제는 순순히 샤오통이 원하는 일을 같이해주었다. 오전의 해가 차올라 기울어지는 방향을 따라 걸으며 궁 안을 산책도 해주었고, 산책하는 동안 통의 수련 상태를 점검하며 원하던 대로 칭찬도 해주었다. 정오에는 낮것을 들며 통이 좋아하는 반찬을 조금 더 고르게 해주었다. 오후에는 같이 주사위 놀이를 해주곤, 정원에서 오수를 즐기며 여유를 만끽했다. 황궁에 온 이래, 둘만의 시간은 제법 오랜만이란 생각이 들었다. 여전히 화가 덜 풀린 척하느라 자꾸 토라진 소리를 내는 병아리는 제법 번거로웠지만, 전지적 황제 시점에 따라 원래 좀 성가신 남자는 귀여워 보이는 법이다.
'령연 너 누구 거야.'
"난 내 거란다."
'아니이이익~! 지금 내가 납치했잖아?!'
"알겠어 병아리."
'다시 할 거야. 너 누구 거야? 해봐.'
"너 누구거니?"
'난 당연히 네 거, 가 아니라아아아아아…! 령연 바보야!'
물론 황제를 납치하는 일이 샤오통의 생각만큼 수월하진 않았지만……. 유서 깊은 전통적인 공식에 따라 바보야, 는 다른 말로 치환할 수 있다. 이를테면 사랑해 라던가, 네가 너무 좋아 라던가. 결국 야사에 한 줄의 기록만 남은 정체도 모르고 범인도 알려지지 않은 황제 납치사건은 현대에 이렇게 해석할 수 있다. 황제도 부부싸움은 칼로 물 베기, 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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