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LISIUM

리퀘로그 1

834194 by 경위

케일럽은 낮은 단상 앞에 앉아 사람들을 보고 있었다. 색색의 옷을 입은 캐피톨의 사람들이 마찬가지로 알록달록하게 포장된 선물 상자를 나누어주고 있는 모습을. 캐피톨과 구역 시민들이 뒤섞인 광경을 목격할 때면 꼭 물과 기름을 보는 듯했다. 혹은 4구역의 해변과 모래라든가, 12구역의 탄광과 숲. 태어나기를 각자의 땅에 묶여서 영영 같아질 수 없는 것들. 어쩌면 우승자들 또한 어느 순간 변질하였을지도 모른다. 상자가 소진되기 전 자신의 몫을 받아내기 위해 왁자하게 엉키는 구역의 사람들 사이에 다시 끼어들어야 할 일은 없을 테니까. 이유 모를 상념에 빠져들다가 촬영 팀이 손가락을 튕기는 소리에 케일럽은 현실을 자각한다.

렌즈로 눈을 돌리며 캐피톨의 팬들을 향한, 기계적인 감사의 메시지를 읊었다. 저를 잊지 않아 주셔서 기뻐요. 매해 엄청난 우승자들이 탄생하고 있는데도 말이에요. 음, 그리고요……. 제 소중한 가족들을 위해 따로 마련해주신 선물도 잘 받았어요. 이건 제가 직접 전달하도록 할게요. 말을 마치고 쑥스러운 듯 앞머리를 매만지다가 쓸어 넘긴다. 그리고 짧은 웃음. 옆에서 카메라와 조명을 들고 이 광경을 찍고 있던 캐피톨의 카메라 팀과 리포터는 경쾌한 동작으로 오케이 사인을 내린다. 앳되게 띄었던 웃음이 금세 사그라든다. 눈가를 매만지던 손은 바닥으로 떨어진다. 오늘따라 피로가 극심했다.

우승자를 배출한 구역이 한 달에 한 번 수령할 수 있는 ‘선물’ 은 간혹 그 우승자를 사랑하는 스폰서의 입김을 받을 때가 있었다. 그리고 케일럽 윈터는 용케도 몇 년간 가느다랗고 꾸준한 관심을 받았다. 모든 사람에게 배타적일 것 같은 얼굴, 무정한 손속, 선득할 정도의 제육감. 그럼에도 가족에게만은 애정이 가득한 소년의 모습을 내보인 까닭이었다. 한때에는 그 캐피톨조차도 가족애에 동질감이나 친숙함을 느끼는 것이 신기했다. 물론 이제는 그 캐피톨이기에 품 안의 핏줄과 판엠의 어린아이들을 동치시킬 수 없음을 안다. 전달식은 아직 한참이었으나, 케일럽은 가벼운 눈인사만을 남기고 광장을 떠났다.

원칙적으로, 우승자와 우승자의 가족은 새로이 지급되는 우승자 마을의 주택에서 지내야 한다. 그러나 윈터 가족은 실질적으로 케일럽의 주택에 발 한 번 들이지 않았다. 별장이라는 이름 아래 구역의 중심부에 지어진 집에서 나갈 마음이 없는 사람들이었다. 그곳은 8구역의 시장과 평화유지군의 장교, 의사와 공장주들이 사는 거리였기 때문에. 케일럽은 양손에 커다란 선물 상자를 든 채로 기차역을 지나쳤다. 그러니까, 지나치는 중이었다. 낯선 사람과 맞닥트려 든 것들을 모조리 떨어트리지만 않았다면. 오, 이런. 짧은 탄식이 들려 왔다. 상대에게서는 남의 실수와 마주쳤을 때 갖곤 하는 미약한 불쾌감이 느껴졌으나 당황스러워 보이지는 않았다. 시야가 넓은, 주위에 예민한 사람 같았다. 그런 사람은 종종 타인의 실수를 예측해내곤 했다.

“내가 곤란하게 만들었어요?”

그런데도 상대는 선뜻 말을 건네며 떨어져 열린 상자를 주워들었다. 자상하여지고자 한 것이 아니라 그런 태도가 일찍이 몸에 밴 사람 같았다. 멍한 정신을 뒤늦게 가다듬고, 그건 아닙니다, 따위를 말하며 케일럽이 무릎을 굽혔다. 남은 상자들을 하나둘 줍고, 조금 뒤에는 일어나 상대가 내민 상자를 받아 들었다. 그렇게 상대가 베푼 호의를 받고서야 케일럽은 선물 안의 물건들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사탕, 초콜릿, 바스락거리는 비닐 포장지와 종이꽃 장식. 설탕이라면 모를까 사실 이런 것은 물자라고 할 수 없었다. 케일럽은 아연해졌다. 고맙다는 말을 전하기도 전에 상대가 웃었다. 허탈한 듯, 숨을 탁 뱉는 소리였다. 마찬가지로 내용물의 정체를 알아챈 모양이었다. 그제야 상대의 이름이 떠올랐다. 12구역의 타냐 트윙클. 빛나는 금빛 눈의 짐승.

“이런, 산타클로스라도 되나 봐요. 때아닌 사탕 바구니라니.”

“이건… 스폰서로부터 온 선물입니다. 이곳까지는 어떻게 오셨습니까?”

“어딜 가냐, 왜 가냐. 우리가 이런 질문을 받을 사람들은 아니잖아요.”

케일럽은 쉽게 긍정했으나 타냐는 간략한 용건을 덧붙였다. 친구에게 부탁을 받아 잠시 들른 길이라고 했다. 상자를 갈무리하며 고개를 끄덕였지만 한 번 열린 상자는 좀처럼 입을 다물지 않았다. 덩달아 허둥지둥하는 손을 물끄러미 보고 있던 타냐가 손을 까딱였다. 이리 줘요. 어디까지 가는데? 뜻밖의 짧은 동행이었다.

***

다행인지 불행인지 윈터 가의 별장에 가족은 없었다. 어딘가의 술집이나 공장주들의 놀이판에 끼어들어 있으리라 짐작할 뿐이었다. 거실의 테이블을 끌어다 상자를 정리하고 구겨진 종이꽃을 펼쳐 두었다. 먼지 한 톨 없이 깨끗한 백색과 미색의 이 공간을 케일럽은 좋아할 수 없었다. 케이브. 하다못해 네 아버지가 내 숙부라도 됐으면 핏줄을 핑계로 캐피톨로 죄 보내버렸을 거야. 자기들이 입 안으로 밀어 넣는 빵이 어디에서 뜯어낸 살인지도 모르는, 지긋지긋한 인간들……. 간혹 어둠 속에 주저앉아 중얼거리는 라리에나는 꼭 캐피톨이 못 박아둔 법률조차 거스를 수 있는 사람 같았다.

오랜 기억에 젖어 리본을 이지러트리는 동안 타냐 트윙클은 느리게 주변을 배회하고 있었다. 그 뒷모습으로 시선을 돌린 케일럽이 무언가 대접할 거리를 찾아 부엌에 다녀오는 동안, 탐색하는 발걸음은 벽난로 앞에 멈추어 섰다. 곧이어 물잔을 들고 돌아와 하나를 내민다. 타냐는 그것을 받아 들지 않는다. 대신해서 어느 한 곳을 가리킨다. 낡았지만 잘 닦인 나무 액자는 벽난로 위에 방향제와 함께 가지런히 놓여 있다. 말끔하게 다듬어진 청년의 외관 위에도 언뜻 상념이 맴돈다. 케일럽으로서는 아마도 그 또한 가족을 떠올리는 것이리라 막연히 짐작할 뿐이다.

“당신이 없네요. 가족에게 끔찍하다고 들었는데.”

“…어릴 적에는 제 몸이 좋지 않아서요. 다른 곳에 머물렀지만, 가족 모두 제게 잘해주셨습니다.”

날카로운 금빛과 다시 눈이 마주친다. 이해되지 않는 것을 바라보는 시선에 문득 몸이 굳는다. 입에 붙은 대답에 문제는 없었다. 가족에 관해 묻는 사람들—그들은 대개 캐피톨의 인터뷰어였고 프로그램 사회자였으며 때로는 팬을 자청하는 사람이기도 했다. 가끔은 스폰서가 되기를 희망하는 사업가의 비서일 때도 있었다—에게 동일한 대답을 할 때마다 그들은 대체로 미담을 들었다는 것처럼 웃으며 화제를 넘기곤 했다. 그러나 타냐 트윙클은 그들 중 하나가 아니었다.

“케일럽 윈터. 왜 굳이 거짓말을 하죠? 여기는 캐피톨이 아니에요.”

“어떤 이유로 거짓말이라고 생각하시는지가 더 궁금한데요.”

“잘해 주다, 못해 주다. 가족은 그런 방식으로 돌아가지 않으니까.”

그 목소리는 마치 목이나 폐부보다 깊은 곳, 뼈와 살을 파고들어 강렬하게 새겨진 언어를 되풀이하는 것처럼 들렸다. 케일럽은 마땅히 반박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케일럽 윈터의 ‘윈터 가’ 는 어떤 이상적인 가족상이었고 굳이 그 안을 들여다보는 사람은 없었다. 어린 소년이 혹독한 시련 속에서도 살아남아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는 이야기. 청자가 캐피톨의 누구고 간에 딱 그만큼이 필요할 따름이었다. 타냐 트윙클 역시도 케일럽의 속내를 열어 보고자 한 말은 아니었으리라. 다만 필요 이상으로 벼려진 사람이었을 뿐이다. 여느 우승자들이 그러하듯, 더없이 소중할 누군가를 지키기 위해 비일상적으로 날랜 눈빛을 지니게 된 사람들.

“…그렇다고 한들 제가 솔직한 답을 드릴 이유도 없는 것 같고요.”

“날 못 믿는군요. 흔한 캐피톨의 앞잡이보다는 나은 삶을 살고 있다고 자부하건만.”

“또 모르죠. 흔한 우승자들과는 다른 방식으로 동생 분들을 지키고 계실지.”

“…이봐요. 나랑 싸우고 싶어요?”

“저도 감추고자 하는 것이 있다는 말입니다.”

일렁이는 눈빛들이 지긋하게 부딪히다 이내 떨어진다. 짧게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렸고, 케일럽은 들고 있던 물컵을 액자 앞에 내려놓았다. 타냐 트윙클은 그것을 보다가 손대지 않고 거실을 나선다. 그래요, 이건 내가 실언했다고 치죠. 다음에 보자고요. 질린 듯한 목소리가 울리고, 발걸음이 아주 멀어질 때까지 케일럽은 그 뒷모습을 바라보며 서 있었다.

그는 곧 쓸모없던 컵을 치우고, 묵직한 광택이 도는 커튼으로 완전히 창을 가렸다. 어둑해진 거실 안에서 탑을 이룬 사탕 상자들만이 세상모르고 천진했다. 마치 작은 아이의 생일이라도 기념하는 것처럼 반짝거렸다. 케일럽 윈터는 차마 자신이 소중히 여기는 단 한 명의 가족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가 잃은 많은 목숨도, 그로 인해 영영 지고 갈 슬픔과 회한도. 케일럽은 여전히 가족을 지키고 싶었다. 그러니 캐피톨은 ‘윈터 가’ 의 형태에 집착하는 편이 좋았다.

케일럽 윈터가 긴 한숨을 내쉴 수 있을 때까지는 더 오랜 시간이 걸렸다. 체념과 피로가 과할 때마다 꼭 하나의 후회가 탄생한다. 기실 어떤 사람도 타인이 어떤 마음으로 가족을 이고 살아가는지, 어째서 그 손을 그토록 꽉 붙들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타냐 트윙클이 그랬고, 케일럽 윈터 또한 영영 그럴 것이다. 그와 재회하는 그 순간이 되도록 최악의 최악만은 아니길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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