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웰린과 티타임

진짜 함.

“시간 괜찮으시면 저랑 티타임을 갖지 않으시겠어요?”

 

나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내게 한 말이냐고 되물었다.

  

“여기에 밀레시안 님 말고 누가 또 있는데요?”

 

내 얼떨떨한 표정이 우스웠는지 그는 풋, 소리와 함께 작게 웃었다.

 

“그래서, 시간은 괜찮으신가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모두에게 언제나 그랬듯이.

 

 

***

 

 

예쁜 꽃들로 장식된 온실. 말로만 듣던 신시엘라크 저택…에서 조금 떨어진 아름다운 정원에 테이블이 준비되었다.

 

시종들을 모두 물린 르웰린은 절제된 동작으로 직접 차를 따랐다. 나는 그에게서 배어나오는 기품과 우아함에 감탄하는 와중에도 비현실감에 정신을 못 차렸다.

 

“아까부터 궁금했는데, 왜 그런 표정으로 보시는 거예요?”

 

나는 아주 솔직하게, 정말로 너와 티타임을 갖게 될 거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

 

 “아예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니, 지난번에 대접하겠다고 분명 말씀드린 적 있지 않나요?”

 

그건 그랬다. 하지만… 그런 건 예의상 으레 하는 말이 아니었단 말인가?

 

“‘예의상’이요. 밀레시안 님께서 제게 예의를 논하시는 날이 오는군요. 그런 거 신경 쓰시는 분인줄은 몰랐네요.”

 

르웰린의 눈빛과 어조가 꽤나 익숙한 느낌으로 바뀌었다. 예전에 이따금 알터에게 보였던 그것과 비슷했다. 나는 난감함을 애써 감추며 그에게 사과했다.

 

“오히려 제 쪽이 미안하죠. 너무 오래 기다리시게 했나보군요? 상황이 마땅치 않아 차일피일 미루다보니 이렇게 되었네요. 아까 그 말은 농담이니 그렇게 안절부절못하실 필요는 없어요.”

 

농담이었구나, 다행이다. 르웰린은 어른스럽지만 아직 어린 구석이 있어서 상처를 주었을까봐 걱정되었었다. 여느 때와 같은 미소를 짓는 르웰린을 보며, 나는 안심했다.

 

“그보다 대체 언제부터 저를 양치기 소년으로 보셨는지가 궁금한데요?”

 

취소.

 

 ***

 

 타이밍 좋게 나타난 시종이 새로 가져온 디저트를 맛보고, 갖가지 향이 나는 차의 설명을 듣고, 마시고, 감탄하고…

그러고 나서 르웰린은 다시 아까의 화제를 다시 꺼냈다. 아직 마음이 풀리지 않은건가 싶어 심장이 서늘해졌지만 르웰린은 날 안심시켰다.

 

“그저 궁금해서 묻는 거예요. 그만큼 기다렸다면 한 번쯤 제게 물어보지 그러셨어요?”

 

나는 잠깐 고민하다 대답했다. 네가 그 말을 잊었을 거라고 여겼다고.

 

  “허 참. 아까는 ‘예의상’ 한 말일 거라고 하셨잖아요. 그 예의를 잊을 정도로 제가 허술해보였나요?”

 

나는 황급히 부정했다. 우리의 시간은 다르고, 그 격차에서 생겨나는 망각은 누구도 어쩔 수가 없는 것이었다. 나는 너의 말이 그 망각의 영역에 속했을 것이라 여겼을 뿐이라고 말했다.

 

“분명 밀레시안과 다난의 시간은 다르죠. 기억에도 차이가 있다는 걸 알아요. 하지만… 저는 당신을 잊지 않는걸요.”

 

 안다. 하지만 그것과 다르다.

 나는 아름다운 호수가 펼쳐진 도시를 지키는 누군가를 떠올렸다. 그는 때때로 나를 기억했으나, 대부분 순간에는 그렇지 않았다. 만날 때마다 초면의 상대를 대하는 것만 같은 깍듯한 인사에 언젠가부터는 그에게 가는 걸음을 줄였다.

 대륙 곳곳을 함께 돌아다니며 에린을 지켰던 알반 기사단의 경우는 조금 달랐다. 그들은 나를 기억했다. 나와 만나기도 전부터 나를 인식했으며 스토킹… 비슷한 걸 했다. 정보 수집이 목적이었다지만, 사실 언제나 나를 기억해준다는 게 기쁘기도 했었다.

 하지만 그들도 모든 걸 기억하지만은 않았다. 중요한 순간은 당연히 기억하지만, 음, 말하자면 무척이나 사소한 대화들을 잊었다.

예를 들어, 가끔 만나서 선물을 건넬 때, 늘 처음 받는 것처럼 기뻐했다. 너희는 자신이 좋아하는 음식을 어떻게 알았느냐고 놀라곤 했는데, 그럴 때의 내 대답은 영 궁색했다.

 나는 늘 그러했던 것처럼 많은 도전을 했을 뿐이다. 매번 거절만 당하다 끝내 그것을 받아주던 순간의 기쁨은 어제처럼 생생하지만, 한편으론 서서히 흐려져갔다. 내 같은 행동에도 너흰 늘 새로운 기쁨을 얻을 것이다. 나는 그게 좋기도, 슬프기도 했다.

 

내가 어물쩍 대답을 피하자 르웰린이 물었다.

 

“혹시 제가 잊은 것 중 중요한 것도 있나요?”

 

 나는 고민하다가 잘 모르겠다고 답했다. 시간은 다난들에게서 분별없이 기억들을 앗아갔고, 때때로 예상치 못한 것을 남겨두기도 했다.

지금 이 순간도 시간이 기준 없는 아량을 베푼 결과였다.

 

  “과거에 저와 무언가 약속하셨다면 반드시 말씀해주세요. 지금의 제가 기억하지 못할지라도요. 저는 약속을 어기는 게 싫어요. 어쩔 수 없는 거라고 해도요. 그러니 꼭이에요.”

 

나는 이것 말고는 없었으니 안심하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다행이고요.”

 

르웰린이 살풋 눈웃음 지었다.

그리고 내 찻잔을 가져가 차갑게 식은 차를 비우고 따뜻한 것으로 새로 채웠다. 르웰린은 자신의 것도 똑같이 하고서 향을 음미했다.

 나는 그를 따라 다시 찻잔을 들고 입술을 축였다. 향긋한 차 내음이 코를 찌른다. 다과도 적절하게 달콤했다.

 이제 즐거운 이야기를 하자며, 르웰린이 귀족들의 유머와 가십을 몇 가지 들려주고 이따금 소리를 낮추어 알반 기사단의 소식도 전했다. 나는 맞장구만 쳤다. 말주변이 없는 나를 배려한 건지 아니면 원래도 그가 이러한 방식으로 대화를 이끌어나가는지 잘 모르겠지만, 내가 억지로 말을 짜내지 않아도 즐거웠다. 중간중간 찾아오는 정적은 어색함의 증거라기보다는 잠시간의 휴식과 여유였다.

 

말로만 듣던 ‘신시엘라크 식’ 대접은 이런 거였구나. 나는 기쁘게 지금을 즐겼다.

 

사실 나는 이 순간이 지금까지 너와 했던 수많은 티타임 약속, 그중 어느 것의 연장인지 잘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그 약속 전부를 네가 지켰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정말이지 완벽한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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