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씨가 흐려집니다

비 올 때 사념파가 기억 안 나..

이상하게 질긴끈이 잘 만들어졌다. 풍년가의 지속시간도 끝났는데 말이다. 무심코 하늘을 올려다보니 비가 내리고 있었다. 운이 좋았다. 잘하면 물물교환 재료 수에 딱 맞출 수 있겠어.

작은 행운에 기뻐하며 열심히 물레를 돌리고 있으니, 다난들이 서둘러 걸음을 옮기거나 빨래를 걷으려 애쓰는 소리들이 귓가에 스쳤다. 그들은 변덕스러운 날씨에 맞추어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는 종족이었다.

 

그러고보면 이제는 아득한 옛날, 에린에 도착한지 얼마 되지 않아 아직 모든 게 익숙하지 않던 그때는 비가 내리면 나도 지붕 처마 밑으로 달려가곤 했다.

가지각색의 차림새를 한 밀레시안들이 그런 나를 보며 ‘쟤 이제 막 왔나봐~’ 하며 웃을 때는 왜 저 사람들은 비를 피하지 않는 걸까 생각했다. 그들은 그 예쁜 옷과 머리카락이 젖는 것도 마다하지 않고 비를 맞으며 밀과 보리를 베고, 실을 잣고 옷감과 실크를 만들었다. 때론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기도 했다. 비가 오는 사실을 모르는 것도 같았다.

 

그러한 모습들을 눈에 담으면, 문득 궁금해졌다.

나는 강물에 비친 내 얼굴조차 낯선데, 비를 맞지 않으려는 ‘습관’은 어디서 생긴 거지? 아직 습관이란 게 생길 만큼 오래 존재하지도 않았건만. 소울스트림을 넘어오기 전의 영혼이 하던 행동을 답습하는 걸까? 내 영혼은 왜 비를 피하고 싶었던 걸까?

그런 호기심에 언젠가는 처마 밑에서 한 걸음 내딛어보았다.

 

차가운 빗방울이 얼굴을 타고 흘러내렸다. 젖은 옷이 피부에 달라붙었다. 약한 한기가 으슬으슬 올라왔다.

 

흠. 그리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물이 닿으면 젖는 건 당연하다. 어차피 비는 곧 그칠 테고 머리카락도 옷도 금방 마를 테지. 여신이 빚어낸 이 육신은 이 정도 비 따위로 병에 걸릴 만큼 나약하지도 않고 말이다.

 

그날 이후 난 비를 피해 도망가지 않았다.

 

찰박이는 가벼운 발소리가 가까워진다. 광장에서 놀던 아이들이 의류점과 잡화점 지붕 아래로 달려오고 있었다. 나는 걸음을 약간 옮겨 의류점 처마 밑의 자리를 비워주었다. 아이들은 오는 내내 웅덩이를 훌쩍 뛰어넘어 피하거나 일부러 밟아 친구에게 흙탕물을 튀기며 놀았다.

겨우 도착한 지붕 아래에서는 더 좋은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아웅다웅 일어난 소란이 발터의 엄한 목소리에 키득거림과 함께 잦아들었다.

 

세찬 빗소리와 함께 물레 돌아가는 소리가 이어진다.

저들끼리 팔과 다리를 툭툭 치며 놀던 아이들은, 곧 내게로 시선을 돌렸다.

 

“누나! 이 밑에서 해요! 그럼 안 젖을 텐데.”

“맞아. 감기 걸리면 어떡하려구요?”

“바보. 밀레시안은 감기 안 걸려.”

“그래도! 춥잖아. 그쵸?”

 

아이들은 좁은 공간에 서로를 꾹꾹 밀어내며 물레와 가장 가까운 자리를 비워냈다.

다정함에 기꺼워하며, 나는 춥지도 않고 감기도 걸리지 않으니 안심하라고 말했다.

몇 번이나 거절한 끝에 아이들은 다시 원래대로 늘어섰다. 가장 끝으로 몰려 비를 맞던 아이는 내심 안심한 눈치였다. 나는 그 아이를 보지 못한 척하고 제안해줘서 고맙다고 했다.

 

재잘거림과 웃음소리를 배경음악 삼아 다시 물레를 돌렸다. 가족들이 우산을 들고 마중나와 하나둘씩 아이들이 집으로 돌아가 다시 조용해졌을 무렵엔 비도 그쳤다.

 

언제부터였는지, 비가 오는 걸 의식조차 하지 못하는 때가 많아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도 이제 제법 밀레시안답군. 그리고 이제는 사라진 습관을 떠올렸다. 다난들과 같았던 그 습관 말이다.

 

밀레시안이 되기 전의 나는 어쩌면 다난이었을지도 모른다. 혹은, 모리안이 자신이 사랑하는 존재와 빼닮은 영혼을 선별했던 걸까?

그래서 ‘밀레시안’다워진 나를 이젠 그다지 애정하지 않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나는 계속 물레를 돌렸다.

구름 속에 가려졌던 팔라라가 다시 고개를 빠끔 내민다. 따뜻한 햇살이 젖은 머리카락과 옷에 내려앉기 시작했다.

제작에 실패해 버려지는 실뭉치가 많아졌지만, 뭐. 그래. 이것도 괜찮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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