쫓겨난 성녀는 개종하기로 했습니다 23화
돌아온 성녀 09
*본 작품은 어한오 팀의 오리지널 창작 작품입니다. 무단 도용 및 배포 등은 법적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본 작품은 포스타입, 글리프(전 펜슬)에서 동시 연재 중에 있습니다.
돌아온 성녀 09
루블, 보쓰, 히즈
그레이스는 안정된 숨소리를 내며 잠든 아트레우스의 곁에 있는 의자에 앉았다. 당연히 멀쩡할 게 분명하지만 그 순간에는 그런 당연한 사실조차 떠올리지 못할 정도로 놀랐었다. 그녀는 세상 모르게 평온히 자는 제자를 내려다 보았다. 제 놀란 속도 모르고 편히 자는 놈이 괜스레 얄미웠다.
“굳이 날 감쌀 필요는 없었다. 어차피 나 역시 무사했을 것을······.”
얄미운 마음에 진심도 아닌 말이 먼저 튀어나왔다. 듣지도 못할테니 누군가에게 하는 말이라기 보다는 혼잣말에 가까웠다.
알고 있었다. 어차피 헬레니온의 능력으로 변형된 것은 단순한 외형 만이 아니다. 그의 능력은 골격, 근육 등을 변형시켜 아예 구조를 바꿔버렸다. 없는 것은 그가 만들어 내기도 했다. 그의 능력이 닿지 않는 범위라면 사라져버리는 점이 유일한 한계였다.
없는 것을 만들어내는 힘은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것과도 같다. 헬레니온의 능력은 그 활용이 무궁무진했다. 신체 일부를 잃거나 부상으로 인해 과다출혈이 발생한 경우에도 제 때 그의 힘이 닿기만 하면 당장 죽어가던 사람도 살려냈다.
그는 단순히 변장에 그치지 않고 그의 힘을 이용해 아녹스의 사람들을 보호해왔다. 그가 차기 수장의 후보에 가장 가까운 것은 그의 능력도 한 몫을 했다. 그레이스에게 헬레니온은 마치 아들같은 존재였다. 단순한 스승과 제자, 상급자와 부하의 관계를 넘어 애착을 느끼는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최근엔 변했다.
다름 아닌 예로케리의 수장격인 여자 하나 때문에.
하지만 그레이스는 잘 알고 있다. 그를 아들처럼 여기긴 하지만 그렇다고 헬레니온이 그녀의 아들은 아니다. 그러니 그녀가 이래라저래라 참견할 주제가 못 된다. 알고는 있다. 알고 있지만······.
‘이대로 두고 보고 있어야만 하는가? 그분께 해가 될 것이 뻔히 보이는 것을······.’
원래 그레이스는 성녀의 신성력만 제대로 봉인되어 있다면 헬레니온이 바라는 대로 그녀를 곁에 두는 것을 눈감고 넘어가려 했다. 그러나 결국 신성력은 봉인을 깨고 나왔다. 그토록 강대한 신성력을 지닌 자를 그의 곁에 두었다간 두 힘의 충돌로 인해 큰일이 벌어질 수 있다. 마치 아까 전의 아트레우스처럼. 지긋이 눈을 감는 그레이스의 미간이 깊게 파여갔다. 주름지는 만큼 고민도 깊어만 갔다.
평소와 다르게 주변을 예리하게 볼 틈이 없던 그레이스는 그래서인지 살금살금 방 앞을 가로지르는 기척을 감지해내지 못했다.
몰래 상단 건물을 빠져나온 아마데아는 무작정 걸었다. 아무리 그녀의 고향이라지만 수도는 매우 넓었다. 대성당 아우레티움 주변에서 벗어날 일이라고는 전장에 나설 때 뿐이었으니 아무리 둘러봐도 낯설기만 했다. 평민 복장을 입고 불안한 눈으로 주위를 마구 살피며 걷는 아마데아를 눈여겨보는 무리가 있었다. 그들은 으슥한 골목길에 숨어 저들끼리 뭐라 주고받으며 낄낄거렸다. 그러다 무리 중 한명이 골목길을 벗어나 아마데아를 향해 똑바로 걷기 시작했다.
“거기 아가씨. 뭘 그리 찾아. 바쁜 일이라도 있나?”
갑작스레 어깨에 얹어진 손에 깜짝 놀란 아마데아가 멈춰섰다. 남자는 한쪽 입꼬리를 당겨 비열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아무래도 길을 잃은 모양이네. 내가 알려줄까?”
어깨에 얹힌 손에서 느껴지는 무게감이 불쾌했다. 떨쳐내려 몸을 비틀었으나 도리어 어깨를 꽉 잡고는 그대로 그녀를 고정시켰다. 강압적인 손길이었다.
아마데아는 무심코 신성력을 끌어올리려 했으나 이내 신성력이 잠겨있다는 걸 기억해냈다. 아까 전 아트레우스를 상처입힌 건 어떻게 해낸건지 모르겠으나 지금은 신성력이 다시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반응하지 않는 신성력과 씨름하는 사이 어느새 남자들에게 둘러싸였다. 눈치챘을 때는 이미 늦었다. 차라리 빠르게 주변에 도움을 청하는 편이 낫겠다 판단하고는 아마데아는 목소리를 높였다.
“도와주세요! 아무나 좀 도와주세요!”
아마데아의 돌발행동에 남자들의 얼굴이 험악해졌다. 아마데아를 붙잡으려는 손길을 탁, 매몰차게 쳐냈다.
“꺼져라! 내가 누군줄 알고.”
무의식적으로 내뱉은 쌀쌀맞은 대꾸에 남자들은 낄낄거리더니 그대로 아마데아를 질질 끌고가기 시작했다. 다시 소리치려는 그녀의 입을 틀어막아 더는 도움 요청도 할 수 없었다. 하필이면 사람이 자주 오가지 않는 거리인지 주변엔 흔한 행인 한 명 보이지 않았다.
‘안 돼!’
이대로 끌려갔다간 무슨 일을 당할 지 알 수 없다. 알고 싶지도 않았다. 이러려고 헬레니온에게서 도망친 것이 아니었다. 아마데아는 온 힘을 다해 제 입을 감싼 남자의 손을 물어뜯었다.
“악!”
입에서 비릿한 피 맛이 느껴졌다. 하지만 일일히 반응할 틈이 없었다. 자신을 붙들고 있던 남자의 품에서 벗어난 아마데아는 골목길 밖으로 몸을 던졌다. 그러나 그 순간.
“!”
포위하고 있던 남자 중 하나가 발목을 걸어 넘어뜨렸다. 볼썽사납게 넘어지면서 무릎에 피가 비쳤으나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다시 도망쳐야만 했다.
“어딜 가려고.”
남자들은 아마데아를 포위한 세 명이 끝이 아니었다. 골목길 밖으로 가는 길목에서 남자 하나가 추가로 모습을 드러냈다. 아마데아의 얼굴에 절망이 드리웠다. 보란듯이 도망쳐서 보란듯이 제 자리로 돌아가고 싶었다. 이렇게 어딘지도 모를 곳에서 끝날 것이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저절로 눈가에 눈물이 고였다.
“이봐! 여기 잡았어!”
남자들이 우르르 몰려오는 소리가 났다. 개중에 자신에게 손을 물린 남자가 씩씩대며 달려오고 있었다. 그러나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아마데아는 눈물을 억지로 삼켰다. 포기하지 않고 바닥에 엎드린 자세로 모래를 손으로 긁어모았다.
“감히 내 손을 물어? 아무도 건드리지 마! 내가 손 봐줄 거니까!”
잔뜩 화가 난 남자가 동료들에게 엄포를 놨다. 아마데아는 포기한 척 엎드린 채로 있다가 모래를 뿌릴 준비를 했다. 남자가 자신을 때리려는 순간. 그 순간을 노린다. 다가올 고통에 대비하며 이를 악물고 있었다. 그러나 기다리던 고통은 없었다.
“아가씨. 많이 다쳤나요?”
아마데아를 둘러 쌌던 4명의 사내가 모두 사라졌다. 마치 처음부터 그 자리에 없던 것처럼. 아마데아는 등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몸이 굳었다.
증오해 마지않는 그녀가 쫓겨난 원인, 에메로스의 목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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