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스

파도는 박제되지 않는다

밍님 트글내글

우토의 사진첩은 새파란 것이 한가득이다. 밀물, 썰물, 튀어오르는 파도와 부서지는 포말에, 갯벌. 새파란 것이 한가득한 사진첩은 대체 언제부터였더라? 우토의 취미 중 하나로 사진에 풍경을 담아내는 것을 가졌다고는 해도 비정상적으로 파도와 바다가 많다. 이게 다 파이브 때문이야, 라며. 작은 중얼거림을 내뱉는 것은 아마 실로 그가 옳기에. 새파란 바다를 닮은 새파란 녀석. 어울리다 보면 항상 바다로 가곤 하던 녀석. 하여 종착지인 바다의 앞에서 우토는 줄곧 사진기를 꺼내들 수 밖에 없었다. 호흡을 멈추고 타이밍을 기다렸다가, 아름다운 찰나다 싶은 것을 폴라로이드로 인화해서 찍어내는 것. 찰칵 하는 소리는 언제나 파도소리와 뒤섞여서 우토의 귀를 간지럽혔다.

그런 일련의 과정 도중에서 파이브는 홀로 바다를 바라보곤 했다. 사진을 찍는 우토를 보거나, 그가 인화한 사진을 샥 낚아채가서 이거 왜 바로 안보여? 하고 묻기도 하고. 그런 생활을 영위할 수 있는 것은 그들이 바닷가 마을 태생이라는 것도 컸다. 이렇게 바다를 사랑하는데 바다에서 태어나서 망정이지, 아마 파이브가 내륙 출신이었다면 바다를 시름시름 앓다가 죽어갈지도.

3학년 졸업식에서도 파이브는 바다로 갔고, 우토는 차마 갈 수 없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우토는 잠깐 바다를 내려놓아야 했으니까. 제가 지망했지만 고등학교는 제법 고된 걸로 유명했다. 내륙과 도시에서 이겨먹으려면 이정도는 해 줘야 한다고 얼핏 들었던 것 같다. 그런 말에 묘한 공감이 일었는지, 우토는 그렇게 잠시 파도를 버렸다. 파이브의 곁에서 바다냄새가 날 때마다 묘한 죄책감이 들어서 파이브랑도 조금은 멀어졌을지도 모른다. 그 모든 것을 파이브는 존중했다. 모두가 원하는 것을 이룰 수는 없는 법이니까.

파이브는 파도를 좇았고 우토는 땅을 좇았다. 그저 그뿐이다.

생각보다 저번 시험이 너무 쉬웠다. 미쳐 날뛰는 등급컷의 변별력 때문에 굉장히 어려울 것이라고 못박은 시험을 대비하며 문제집을 풀기도 잠시. 어지러운 문제들에서 시선을 회피하고자 둘러본 반의 풍경은 어수선하다. 시험까지는 한 달 남았고 저번 중간에서 너무 열심히 준비했다며 오히려 번아웃이 와버린 친구들의 풍경. 에어컨의 옅은 바람을 맞는 우토는 시선을 천천히 천장으로 옮겼다. 와 삼투압 와 뭐시기 현상 와 보일러 등식. 지금 풀고있는건 미적분일텐데 입에서 흘러나오는 것은 무슨 이상한 것들만. 의자에 목을 기대어 머리를 젖히면 다 엎어진 책상 위로 부스스하게 일어나는 파이브가 있다. 하품하고, 기지개 켜고, 몸 좀 돌리다가 그의 시선이 바다를 쫒는다. 창밖에서 파도가 크게 쳤는지 들리는 철썩 소리가 퍽 귓가를 때려서.

우토는 문득 회의감이 들었다. 내가 지금 이걸 하고 있는게 맞을까? 그냥, 파이브처럼. 바다를 보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다 싶었다. 우토가 목에 걸고 다니던 폴라로이드 카메라, 그냥 이야기하다 보면 마주하는 새파란 수평선, 후각에 걸리는 짠내. 카메라를 들고 멈추던 호흡과 찰나를 박제하는 과정. 아, 파도랑 바다.

파이브.

나지막하게.

학교 탈출이라니, 중학교 시절에는 가끔 하기도 했던 일탈을 다시 하는 것은 묘한 흥분감을 불렀다. 걸어가는 발걸음에 속도가 붙고, 파이브는 묘하게 기분이 좋아 보이고, 담을 넘어가는 몸놀림이 가볍다. 물론 이는 해서는 안 될 짓이라는 것을 안다. 그렇지만 8교시 정도면, 딱히 감시도 없는 자습시간 정도라면 괜찮지 않을까? 그래, 그러니까 우토는 나쁘지 않다. 굳이 책임소재를 찾자면 자율로 진행될 8교시까지 남게 하는 학교이고, 괜시리 중간고사를 쉽게 내버려서 어렵다고 못박아버린 탓이고, 이딴 좋지않은 것들을 가르치는 학교라. 그러니까 우토 무죄! 땅땅땅!

우토의 발걸음에 더 속도가 붙는다. 이미 앞에서 저를 버리고 먼저 간 파이브가 멈춰 서 있었다. 모래사장을 밟자마자 훅 불어오는 것은 바다의 짠 향기. 파이브가 항상 몰고 다니던 신선한 파도의 향취가 우토를 감싼다. 우토는 그 냄새에 코를 잠깐 막았다가 천천히 떼며 저 철썩이는 파도를 향해 간다. 신발을 벗고 양말도 벗고, 맨발이 마주하는 것은 모래를 좀먹는 파도의 서늘함이다. 발가락 사이사이마저 다 파고들어서 이내 전신을 찌르르 울리는 이 느낌. 우토의 입가에 웃음이 머물렀다.

어느새 방파제 위로 올라간 우토는 목에 걸린 사진기를 들었다. 카메라에 눈을 대고서 풍경을 조준하고, 호흡을 멎게끔 꾹 입을 다물고서, 셔터를 찰칵 소리나게 눌러버리고 싶은 검지의 충동에 꼼지락거리고. 밀물이 온다. 사장을 좀먹으면서. 게걸스레 해치우면서. 새파란 것의 끝에는 항상 하이얀 물거품을 달고서.

철썩, 물이 튀었다.

찰칵, 파도가 잠겼다.

카테고리
#기타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