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성야담집(2부)

[중혁독자]경성야담집 2. 불가사리(1)

이 글은 픽션입니다. 실재의 인물, 단체, 시대, 국가와 관련이 없습니다.

이 글에 차용된 각종 민담 및 요괴들에 관한 내용은 필요에 의해 각색되었을 수 있습니다.

이 글은 전지적 독자 시점의 2차 창작으로 원작의 내용과 무관하며, 어떤 영리적 목적도 취하지 않았습니다.

京城夜談集

不可殺伊

-1-

이것은 밥알에서 태어났고 쇠붙이를 삼켜 거대해졌다.

누구도 이것을 죽이지 못하니 不可殺이라 하였다.

한 승려가 불로써 이것을 물리치니, 불可殺이라 하였다.

“진짜 반요가 있을 줄이야. 떼돈 벌었군.”

“야. 반항하지 마. 팔다리 하나 잘리기 싫으면.”

사냥꾼 차림을 한 거친 인상의 사내들이 낄낄거리며 피투성이가 되어 쓰러진 소년을 발로 툭툭 건드렸다. 하악거리며 거친 숨을 몰아쉬는 소년은 공포와 고통에 찬 시선으로 자신을 둘러싼 남자들을 바라보았다. 온통 흉악한 인상의 남자들은 각자 섬뜩한 날붙이들을 손에 들고 있었다. 컥컥대는 숨이 턱까지 차오른 채, 아이는 연신 입술을 달싹거렸다. 저희들끼리 시시덕대기 바쁜 남자들에게는 전해지지 않을 미약하고 작은 목소리였다.

“제…, 발…. 살려….”

아이는 빌었다. 소용없었고, 또 소용없을 것을 알면서도 빌었다. 눈물범벅이 되어, 그리고 얻어맞아 퉁퉁 부어 제대로 보이지도 않는 눈을 뜨려고 노력하면서. 그가 밧줄에 묶인 몸을 버르적대며 어떻게든 포박을 벗어나려 애썼다. 그러나 그때마다 밧줄은 더욱 강하게 보잘 것 없는 몸을 죄어올 뿐이었다.

“근데 이런 걸 사다가 어디에 쓰는 거야? 돈 많으신 나리들은.”

“글쎄, 워낙 희귀해서 애완동물처럼 기르는 사람도 있고, 또 고기를 먹으면 불로장생한다는 소문도 있던데? 맛도 좋다고 하고.”

“호오. 요괴는 팔을 잘라도 다시 난다지?”

“어이, 꼬마. 진짜냐?”

살벌한 이야기를 나누던 사내들 중 몇이 흥미롭다는 듯 뚜벅뚜벅 걸어왔다. 이미 수십, 수백 번 들어 본 내용이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공포와 분노가 사라지지는 않았다.

“한번 해 볼까?”

“아서라. 상품 가치 떨어뜨리지 마. 반푼이라 안될지도 몰라.”

공포에 질린 소년이 헐떡였다. 그는 어떻게든 도망치려 발버둥쳤다. 사냥꾼 무리가 그 모습을 보고 웃음을 터뜨렸다. 아이는 수치를 느낄 여유조차 없었다. 그것을 압도하는 공포가, 그리고 그 공포조차 일순 압도할 만큼 강한 분노가 그의 내면에서 흘러넘쳤다.

…어째서?

…나는 너희에게 아무것도 잘못하지 않았는데.

……나도, 너희와 똑같이 고통을 느끼는데…….

시커먼 그림자가, 소년의 주변에서 넘실거렸다.

“야, 이, 이거 뭐야?”

“으, 허, 어, 으아아악!”

넘실대던 그림자는 점점 커졌다. 그것은 곧 아가리를 벌린 거대한 짐승처럼 변했다. 그것이 그 큰 입을 쩍 벌려 남자들을 삼켜 버렸다. 그들은 제대로 싸워 보지도 못하고 어둠 속으로 삼켜졌다.

어둠은 그대로 웅크린 소년의 주위를 감싸고 맴돌았다.

 

 

 

 

“현상수배라.”

“어디 보자, 또 치안유지법 위반이군.”

“어이구, 이 청년은 훤칠하구만 어쩌다 이런 신세가 되었누.”

“옆의 이 남자는 영…, 그림으로는 누군지 전혀 모르겠는걸?”

순경이 새로 붙이고 간 벽보 주위로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치안유지법을 위반해 사이비 종교로 조선인들을 현혹하다 체포당하게 되자 순경을 공격하고 달아난 두 사기꾼을 잡아 오면 거액의 현상금을 준다는 내용이었다. 벽보 속 이인조 중 한명은 누군가 언급한 대로 부리부리한 눈매에 짙은 눈썹, 우뚝 솟은 코에 굳게 다물린 입술을 가진, 백 리 밖에서도 이목구비가 보일 듯한 절세의 미남인 반면, 다른 한 명은 먹이라도 번진 듯 흐물흐물한 생김새로 얼굴을 알아보기가 어려웠다.

“그러고 보니 저번에 체포된 이들은 어찌 되었소? 윤 선생이라 하였던가? 아주 촉망받던 젊은이도 있던데.”

“어찌 알겠소? 요즘 들어 체포된 이들은 모두 소식이 묘연하오.”

“시절이 참으로 수상하군.”

“안 형도 몸조심하시오.”

“민 형이야말로 살펴 가시오.”

벽보를 앞에 두고 이러쿵저러쿵 이야기를 나누던 사람들은 이내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체포된 이에 대해서 두런거리다가 가볍게 혀를 차며 다시 흩어졌다. 한 몸집 큰 사내가 인력거를 끌고 그들의 곁을 지나쳤다. 힘차게 달리는 남자는 사람들이 나누는 이야기도, 벽보의 얼굴들도 보지 못했다. 남자의 머릿속에는 그저 얼른 지금 태운 손님을 내려주고 퇴근할 생각뿐이었다.

‘얼마 만에 보는 희원 씨인지.’

그는 제 가슴 속에 품은 편지 봉투를 떠올리곤 뺨을 붉혔다. 희원을 만나지 못하는 동안 고심해서 적은 것이었다. 작년 우연히 정희원을 길에서 마주쳤을 때부터 현성은 강한 그에게서 강한 이끌림을 느꼈다. 평소의 그였다면 말을 건넬 생각도 하지 못했겠지만, 이상하게도 그날은 무슨 용기가 났는지 대뜸 그에게 말을 걸었다. 초면인 현성에게 희원은 뜻밖에도 웃음으로 화답해 주었다. 그때 그들은 서로의 주소를 나누어 가졌고, 이따금씩 편지를 주고 받았다. 희원이 무슨 일을 하는지 현성은 잘 몰랐지만 그는 늘 바빴기 때문에 시간을 맞추기 쉽지 않았고, 직접 만나는 것은 처음 만난 날을 포함해도 이번이 세 번째밖에는 되지 않았다. 만날 약속을 잡고서는, 직접 편지를 건네야겠다는 생각에 평소 주고받는 편지 외에 한 통의 편지를 더 썼다. 그것이 지금 그의 외투 주머니에 들어 있었다.

‘빨리 만나고 싶다.’

걸음을 재촉하며, 현성은 가볍게 미소했다.

 

 

 

 

벽돌로 지어진 역사驛舍 앞에서 희원은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경성을 드나들더라도 보통 주술로 이동을 했기에 경성역의 지리는 그다지 익숙지 않았다. 역은 굉장히 넓었고 길이 복잡하게 얽혀 있어서 길을 찾아 돌아다니기가 주술을 쓰는 것보다도 피곤했다. 하지만 오늘, 그에게는 부러 보통 사람들처럼 경성을 방문해야 할 이유가 있었다. 분주히 도로를 오가는 사람들 속에서 익숙한 얼굴을 찾은 희원이 밝게 웃으며 크게 손을 흔들었다. 남들보다 머리 하나는 큰 사내는 이리저리 두리번거리다가 그를 발견하고 활짝 웃었다.

“희원 씨!”

멀리서 커다란 손을 붕붕 휘두르며 달려오는 남자를 희원은 부드럽게 웃으며 바라보았다. 이현성은 순박하고 다정한 사람이었다. 가끔 융통성 없이 굴기도 했지만 기본적으로 강직하고 심지가 굳었다. 경성 외곽에 살고 있는 희원은 그를 자주 만날 수 없었지만, 그럼에도 현성의 우직한 성격은 희원에게 안정감을 주었다. 자주 만날 수 없는 대신 그들은 자주 편지를 주고받았다. 미사여구도 없이 투박한 남자의 편지에서는 소박한 진심이 묻어났다.

희원은 미사여구로 가득한 편지보다도 이현성의 편지가 좋았다. 아름답게 꾸며진 줄글로 환심을 사려는 사내라면 진력이 났다. 그런 편지를 보내고, 근사한 태도로 자신을 대하다 돌변한 사람이 생각나서였다. 신사인 척하던 남자는 다점의 여급이었던 그를 억지로 취하려던 무뢰한이었다. 정희원은 그들을 베었다. 후회나 반성은 하지 않았다. 그들은 요괴인 희원을 짐승 보듯 하며 범하려 했고, 그 살인으로 정희원은 살아남았기 때문이다. 아직도 희원의 내면에서는 그들을 향한 살의가 문득문득 피어올랐다.

이현성을 다시 만나기 전까지만 해도 더는 누구에게도 마음을 주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그렇게 다짐했던 마음은 이상하게도 현성을 만나자 눈 녹듯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신기하게도, 그가 보낸 편지를 읽고 있자면 그의 내면에 자리한 불안정한 감정들이 사그라드는 기분이 들고는 했다.

“많이 기다렸어요?”

“나도 방금 왔어요.”

두 사람은 수줍게 미소하며 인사를 나누고 나란히 서서 걷기 시작했다. 현성은 연신 곁눈질로 희원의 얼굴을 살폈다. 희원과 함께 걷고 있다는 사실이 실감 나지 않았다. 늘 꿈꿔온 일이었지만, 오랫동안 상상만 했을 뿐 이루어진 적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제 커다란 손을 어색하게 쥐었다 펴며 심호흡을 했다. 긴장 때문에 같은 쪽 손발이 나가거나 할 것만 같았다. 심장 소리가 들릴 것 같았고, 말을 더듬거나 실없는 소리를 늘어놓을 것 같아 입도 떨어지지 않았다. 그의 걱정거리는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인력거꾼인 현성은 경성 지리에 빠삭했다. 근사한 찻집, 유명한 극장, 사람들이 많이 찾는 유원지까지 모르는 곳이 없었다. 하지만 그가 아는 것은 위치일 뿐, 인력거꾼에 불과한 현성은 그런 곳에서 뭘 어떻게 해야 근사한 시간을 보낼지 알지 못했다. 오늘도 좋은 다점을 안다고 큰소리를 쳐놓기는 했으나, 그는 요즘 그리 잘나간다는 가배탕咖啡湯 한 번 마셔보지 못했다.

“…씨. 현성 씨.”

“헉, 허, 헉, 네!”

“…뭘 그렇게 놀라요? 무슨 생각을 하길래 불러도 못 듣고.”

“아, 아뇨, 하하…, 제가 너, 너무 긴장을 해서….”

저를 툭툭 건드리는 희원의 손짓에 겨우 정신을 차린 현성이 뻣뻣하게 고개를 돌리며 이상한 소리를 질렀다. 열이 올라 목덜미 뒤쪽까지 홧홧하니 뜨거웠다. 의아한 표정으로 눈을 깜박이던 희원이 이내 피식 미소지었다. 그가 쭈삣거리는 현성의 손을 낚아채듯 잡았다.

“우리, 손잡고 걸을까요?”

그가 싱긋 웃었다.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현성이 머뭇거리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서로의 손을 꼭 쥐고서 걸음을 재촉했다.

 

 

 

 

“정말인가요?”

“네, 당분간은 경성에 머무를 예정이에요.”

“저, 그럼 혹시 많이 바쁘시지 않으면….”

“저도 자주 보고 싶어요.”

희원의 대답에 현성의 표정이 눈에 띄게 밝아졌다. …뭐, 사고 아닌 사고를 쳐서 수배된 누구누구의 뒤치다꺼리가 주목적이지만…. 희원은 마음속으로 이 자리에 없는 어떤 여우 반요의 흉을 보았다. 이전 겁탈당할 뻔한 자신을 도와줬던 김독자에게 마음의 빚이 있는 희원은 김독자의 일이라면 발 벗고 나서는 편이었다. 이번에도 그래서 만사 제쳐놓고 경성으로 달려온 참이었다. 지명수배로 대외적인 일을 처리할 수 없게 된 김독자 대신 이런저런 일들을 하기 위해서였다. 김독자를 돕는 일 자체에 어떤 불만이 있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것이 자신의 역할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수배될 정도로 위험한 일을 하고 다니는 김독자에게 걱정 어린 불만을 가지는 것은, 그에게 가족 같은 애정을 품은 사람이기에 오히려 당연한 일이었다.

‘이수경 씨도 참, 알다가도 모르겠다니까….’

이수경은 애정을 티 내는 유형은 아니었고, 그래서 김독자도 잘 모르고 있는 것 같았지만, 그가 보기에는 아들을 상당히 아끼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아무리 아들이 적임이어도 그렇지, 그런 위험한 일을 의뢰하다니. 갑자기 구원교도가 된 사람들이 걱정되기는 하지만 그들도 다 제 앞가림을 할 성인들이었다. 굳이 아들을 위험에 빠뜨리면서까지 구해와야 할 사람들인가 싶었다.

‘이기적인 생각일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었다. 모든 사람을 다 구하며 살 수는 없다.

희원은 이런 일에 있어서 우선순위가 분명한 편이었다. 구할 수 없는 사람까지 구하려 무리하다 소중한 사람을 잃는 것은 사양이었다. 하지만 이수경은…, 늘 말은 그렇게 하면서 제 곁에 있는 사람은 한 명도 낙오되지 않기를 바라는 사람 같았다. 그런 면이 김독자와 비슷해서, 속일 수 없는 핏줄이구나 싶었다.

“희원 씨?”

“아, 미안해요. 잠깐 딴 생각을….”

희원이 어색하게 미소하며 가배탕을 한 모금 마셨다. 그는 이 따뜻하고 씁쓸한 음료를 제법 좋아했다. 차와는 다른, 나름의 색다른 향과 매력이 있었다. 아직 그리 대중적이라고만은 할 수 없었지만, 다점의 여급으로 일했든 희원에게는 제법 친숙한 음료였다. 반면 현성은 영 가배의 맛이 익숙지 않은 모양이었다. 남자는 희원을 따라 주문한 검은 물을 한참 의심스럽게 바라보다가 약이라도 마시는 것처럼 잔뜩 인상을 쓰고 들이켰다. 그러나 곧 구겨진 얼굴로 그 검은 소태탕 같은 것을 노려보는 것이었다.

“쓰면 설탕을 좀 넣어 드세요.”

희원이 탁자에 놓인 설탕 그릇을 현성의 앞에 밀어주었다. 그제야 머뭇거리던 남자가 설탕을 수북이 떠서 잔에 넣고 휘저었다. 턱을 괴고 그 모습을 지켜보던 희원이 빙긋이 웃었다. 자신도 처음 가배 맛을 보았을 때 너무 써서 우유나 설탕을 듬뿍 넣어 먹고는 했던 것이 떠올라서였다.

“왜, 왜 웃으세요.”

“아뇨. 저도 처음에는 써서 잘 못 마셨거든요. 그게 생각나서. 마침 저도 피로해서인가, 단 게 당기는데 괜찮으시면 곁들일만한 걸 주문하고 올게요.”

희원은 말을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나, 계산대 앞에 놓인 메뉴판을 집어 들고 책장을 넘겼다. 낯선 이름의 후식과 간결한 그림들을 훑어보는 그의 머릿속에는 금세 다른 생각이 가득 차버렸다.

…김독자가 수배당하긴 했지만, 좋은 쪽으로 생각할 여지는 있었다. 독자 씨는 너무 쉬질 않으니까, 이럴 때라도 강제로 쉬는 것도 괜찮을 것이다. 겉으로 농땡이나 피우며 다니는 것 같아도 김독자는 사실 많은 일을 한꺼번에 하고 있었다. 그는 제가 거둔 두 아이를 늘 직접 찾아가서 가르쳤고, 누가 의뢰하지 않아도 자신이 봉인한 괴물들의 터를 주기적으로 찾아 점검하고 보강했다. 아이들뿐 아니라 제가 거두어 수경에게 맡겨 둔 다른 요괴들에게 도움이 될 만한 물품들을 어디선가 구해 보냈다. 김독자는 벌써 수백 년은 묵은 요괴였고 그가 봉인한 것들이 경성에만 몇십은 되었으니, 주에 한두 군데씩은 꼭 점검할 곳이 있었다. 영력이 강하다고 해서 체력이 좋은 것은 결코 아닌데 김독자는 원체 몸 단련을 싫어해서 약골이었다. 그런 주제에 별 돈도 안 되는 일들은 잔뜩 하고 있으니 늘 골골댈 수밖에 없었다. 차라리 나다니지 못하게 된 김에 좀 쉬는 것이 나을지도 모른다. 문제는 남의 걱정이라고는 귓등으로도 안 듣는 그 남자가 또 무슨 일을 벌이고 다닐지 모른다는 건데….

“나는 이게 맛있더라고요.”

문득 흰 손이 쑥 뻗어 나오더니 그중 하나를 짚었다. 익숙한 기운에 희원이 놀라서 고개를 들었다. 낯선 이목구비에 흰 얼굴을 가진 남자가 그를 보며 씩 웃고 있었다. 둥근 안경 너머 싱글싱글 웃는 눈이 묘하게 얍삽하다고 해야 하나, 얄밉다고 해야 하나, 그런 인상의 남자였다. 벽돌색 양장 차림의 남자가 능청스레 한쪽 눈을 찡긋해 보였다. 희원이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입을 떡 벌렸다. 얼굴은 낯설지만, 이 기운은 분명…,

“독,”

“지금은 이학현이라고 불러줄래요?”

“…학현 씨. 여기서 뭐 해요?”

“숨어만 지내자니 좀이 쑤셔서. 여우는 둔갑이 특기잖아요.”

그가 낮게 속삭이더니 이내 키득거렸다. 이 태평한 양반이…. 희원이 뭔가 쏘아붙이기도 전에 그는 가볍게 손을 흔들더니 구석진 자리로 살랑살랑 걸어갔다. 그쪽에는 잔뜩 기척을 죽인 누군가가 앉아있었는데, 저승사자 마냥 검은 양복을 두른 걸로 보아 누구인지는 안 봐도 뻔했다. 꼴에 변장인지 새카만 가면으로 코 위쪽의 얼굴을 가리고 있었는데 그런다고 특유의 위압감이 가시는 것이 아니어서 더 험악하게만 보였다. 저 인간은 말리지는 못할망정 같이 따라 나온 거야? 희원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팔짱을 끼고 김독자를 쏘아보는 모습으로 보아 유중혁도 달리 원해서 나돌아다니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았고, 아마도 김독자의 미친 짓에 못 이겨 따라 나온 걸 테지만…, 그건 정희원의 알 바가 아니었다.

그는 두 사람을 한 번씩 쏘아보아 준 후 김독자가 주문한 메뉴를 시키고 자리로 돌아갔다. 그사이 이미 묘한 기류를 알아챈 현성이 유중혁과 김독자가 있는 쪽을 흘끔거렸다.

“아시는 분이신가요?”

“네…, 예전에 같이 일한 적이 있어서 면식만 있는 정도예요.”

희원이 손사래를 쳤다. 그는 연신 구석의 두 사람에게 신경을 곤두세우는 현성의 눈을 돌리기 위해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김독자의 둔갑술이나 유중혁의 위장술이 민간인에게 그렇게 쉽게 파훼되리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어쨌든 남에게 관심을 끌어서 좋을 것도 없었다.

“현성 씨는, 경성에선 혼자 지내시나요?”

“아, 네에…. 부모님은 고향에 계세요. 원래는 정착하면 모시고 오려고 했는데, 마음처럼 되질 않네요….”

그가 순박하게 웃으며 고개를 긁적였다. 이현성을 닮은 부부를 상상하니 절로 웃음이 번져나왔다. 살짝 옆으로 고개를 기울여 턱을 괸 희원이 물었다.

“가족들도 현성 씨랑 비슷한가요? 제 말은, 다들 이렇게 착하시냐는 말이에요.”

“아, 가족들은 저랑 그렇게 닮진…, 않았어요. 제가 사실 업둥이라서…. 그래서 더 부모님께 잘해드리고 싶은데 쉽지 않네요. 아! 죄송합니다. 이런 이야기 부담스러우실 텐데….”

“어머, 아니에요. 저야말로 섣불리 말 꺼내서 미안하네요.”

대화가 어색해진 찰나, 김독자가 추천하고 갔던 후식 케이크가 내어졌다. 희원은 얼른 그것을 한조각 떼어내 현성에게 내밀었다. 부드럽게 포크에 썰린 케이크에는 젤리와 비슷한 탄성이 있었다.

“자요. 이거 강력 추천 메뉴라고 하더라고요.”

“어….”

머뭇거리던 현성이 벌게진 얼굴로 조심스레 입을 벌렸다. 희원은 냉큼 벌어진 입에 케이크를 넣어 주었다. 얼떨떨한 표정으로 그것을 입에 물고 우물우물 씹던 현성의 눈에 점점 생기가 돌았다.

“맛있네요! 희원 씨도 얼른 드세요. 자요.”

그가 케이크를 포오크로 떼어내 희원에게 내밀었다. 자연스레 받아먹은 희원이 생긋 웃었다.

“어머, 이거 진짜 새콤달콤하고…. 씹는 식감도 독특하고…. 맛있네요.”

맛있는 음식을 먹어서일까, 두 사람의 입가에 슬며시 미소가 피어올랐다. 그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배시시 웃음을 터뜨리며 서로를 바라보았다.

 

 

 

 

“왐마야.”

“네놈은 그런 말투를 어디서 배우는 거지?”

“관찰을 게을리하지 않는 거지. 인간사는 끊임없이 변화하는 듯하면서도 언제나 큰 궤는 변하지 않는 점이 재미있거든.”

또 영문을 알 수 없는 소리였다. 김독자는 숟가락으로 가배에 얹어진 크림을 휘휘 저으며 웃었다. 달달한 비엔나 커어피-하지만 비엔나에는 이런 가배가 없다고 해. 그러면 이건 사실 대한커어피라고 불러야 맞지 않을까? 안 그래?-를 한 모금 들이킨 김독자의 입가에는 크림이 잔뜩 묻어 있었다. 중혁은 아무렇지 않게 손을 뻗어 칠칠치 못한 남자의 입가를 닦아냈다. 그는 제 손에 닦여 나온 흰 덩어리를 망설임 없이 입에 넣고 삼켰다.

“달군.”

“단 가배니까 당연하지.”

그는 여전히 입가에 흰 크림을 묻혀가며 가배를 홀짝였다. 그러면서도 연신 모든 신경이 정희원과 이현성이 앉아있는 테이블에 쏠려 있었다. 애초 오늘 난데없는 나들이를 하게 된 것도, 희원이 들뜬 표정으로 안 입던 원피스를 입고 나서는 걸 본 김독자가 따라가 봐야겠다며 수선을 피운 탓이었다. 남이사 누구를 만나든 말든 관심 없는 유중혁은 굳이 호들갑을 떨며 위험을 무릅쓰는 이유에 공감할 수 없었지만, 김독자 혼자 나가는 건 위험했기 때문에 그를 따라서 희원의 뒤를 밟았다. 기척을 누르고 변장까지 하고는 있었지만 그래도 기감이 예리한 자가 있다면 금세 그들을 알아챌 터였다. 특히 그 니르바나라는 녀석은 둘을 알아볼 것이 분명했다.

“우리에게 죄를 뒤집어씌운 게 니르바나라면 어차피 숨어있어도 별 소용은 없어. 그 녀석은 우릴 찾을 수 있으니까. 차라리 여기저기 쑤시고 다녀 보는 게 정보전 측면에서는 더 나을걸.”

“그런 것 치고 며칠간은 은둔 생활을 만끽했지 않나.”

“그거야 당연히 안 나가니까 좋아서 그런 거지.”

유중혁은 불만 어린 눈으로 김독자를 쏘아보았다. 지금 그의 눈앞에서 알랑대는 미소나 짓고 있는 녀석은 낯선 얼굴을 하고 모르는 이름을 쓰고는 있었지만, 분명 김독자였다. 오랜 세월을 사는 영물들 중 사람들 틈에 섞여 사는 것들은 사람들에게 의심받지 않기 위해 주기적으로 이름과 모습을 바꿨다. 김독자도 마찬가지여서, 가끔 그는 유중혁이 전혀 모르는 얼굴로 둔갑하고 나돌아다니기도 했다. 그에게는 말하지 않고 위험할 법한 일을 하고 돌아오는 경우도 많았다. 반요라고 해도 수명이 길고 조금 더 목숨줄이 질길 뿐이지 불로불사도 아닌데 녀석은 늘 저렇게 태평스러웠다.

“괜찮아. 이번 생에서의 죽음이 영원한 끝이 아니잖아. 생명은 순환하고, 우리는 계속해서 다시 태어날 거야.”

“그딴 이야기를 하자는 게 아니다.”

유중혁이 김독자의 손을 힘주어 잡았다. 김독자의 손이 금세 새하얗게 질렸다. 그래도 그는 손아귀에서 힘을 빼지 않았다. 잠시라도 놓치면 김독자가 모래알처럼 빠져나갈 거라고 믿는 사람 같았다. 김독자는 억지로 팔을 비틀어 빼지 않고 희게 질린 손끝을 물끄러미 보고만 있었다.

“중혁아.”

“쓸데없는 소리 할 거면 말하지 마라, 김독자.”

“우리는 경성을 구할 수 있다, 알지?”

“갑자기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리지?”

“잘해 보잔 거지.”

그가 다시 헤실거리며 웃었다. 중혁은 불안이 실린 눈으로 김독자를 쏘아보았다. 하지만 김독자는 다시 혀가 녹을 것처럼 단 가배를 홀짝이기만 할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K대 앞의 번화가는 예로부터 갖바치들이 모여있던 곳이기도 하여, 모오단부터 안티크까지 온갖 파숑을 취급하는 상점이 많았다. 희원과 현성은 오래된 목조 건축물로 이루어진 점포들을 하나하나 구경하며 시간을 보냈다. 그들을 따라다니던 김독자는 이내 질렸다며 딴청을 피워댔고, 결국엔 놓치고 말았다. 애초 이제는 몰래 뒤를 밟는 꼴도 아니었으니 대놓고 미행하는 것도 멋쩍은 일이었다. 김독자는 둘을 놓쳐 놓고도 태평히 온갖 것에 정신을 팔았다.

“아, 이것 좀 봐봐.”

“김…, 이학현. 지켜볼 생각이 없다면 이만 돌아가는 게.”

“너랑 잘 어울릴 것 같아서.”

김독자의 걸음은 한참 어느 시계방 앞에서 멈춰 있었다. 홀린 듯 가게로 들어섰던 그가 한참 나오지 않자,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중혁이 문을 열었다. 가게 안에 있던 김독자는 제 손에 들고 있던 정교한 세공의 회중시계를 중혁의 포켓 위에 대어 보더니 싱긋 웃었다. 중혁이 이마를 찡그리며 김독자를 빤히 바라보았다.

“…이런 걸 사고 있을 여유가 없다.”

“그게, 이미 사버렸어.”

김독자가 혀를 빼꼼히 내밀며 웃었다. 그는 중혁의 눈치를 슬며시 보다가 회중시계를 사내의 포켓 안으로 미끄러뜨렸다. 그리고는 그 시계와 연결된 금속 사슬 끝의 옷핀을 포켓에 고정해 주었다. 금색으로 빛나는 핀과 사슬이 그의 가슴팍에서 가볍게 흔들렸다.

“…네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지?”

“그냥. 너 주고 싶었어.”

“허튼 생각 하지 마라.”

“내 순수한 마음을 매도하는 거야?”

김독자의 장난기 섞인 미소에 중혁은 아무 말 없이 그를 끌고 시계방을 나섰다. 다소 거친 걸음걸이에 끌려가는 꼴이 된 김독자가 어어 소리를 내며 휘청거렸다.

“화났어?”

“아니다.”

“화났는데.”

“아니라고 말했….”

칠엽수 아래까지 걸어온 중혁이 우뚝 걸음을 멈추고 돌아섰다. 그는 무언가 말하려다 그대로 멈칫했다. 김독자와 마주친 사내의 눈동자가 잠시 흔들렸다. 남자는 천천히, 하지만 분명한 모양으로 움직이는 김독자의 입술을 주의 깊게 바라보았다. 아주 짧은 순간 굳어진 표정이 그의 눈가를 스쳤을 뿐, 사내의 표정은 금세 침착하게 가라앉았다. 그는 완전히 김독자를 향해 몸을 돌렸다. 그리고는 턱을 살짝 들어 올리더니 거만한 시선으로 김독자를 내려다보았다.

“내가 화난 것 같으면 풀릴 만한 행동을 해 봐라.”

“으응?”

갑작스러운 중혁의 행동 변화에 당황한 김독자가 눈동자를 굴리며 그를 바라보았다. 중혁은 김독자-지금은 이학현의 얼굴을 하고 있는-를 똑바로 바라보며 목을 꽉 죄고 있던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어냈다.

“내가….”

“어, 어?”

중혁이 의중을 알기 어려운 미소를 지으며 한 걸음을 성큼 다가섰다. 갑작스러운 사내의 행동에 얼굴이 붉어진 김독자는 슬금슬금 뒷걸음질 치다가 나무 줄기에 등을 부딪혔다. 중혁은 자연스럽게 나무 위로 팔을 뻗어 손을 짚고는 김독자를 내려다보았다. 졸지에 유중혁과 나무 사이에 갇힌 김독자가 육식동물 앞의 사냥감처럼 꼴딱 침을 삼키며 그를 올려다 보았다.

“…화가 풀릴 만한 행동을 해 보라고.”

그렇게 말하며, 남자가 오른손으로 김독자의 턱을 잡아 들어 올렸다. 김독자의 눈이 이리저리 흔들렸다. 시선을 어디에 두어야 좋을지 모르는 사람 같았다. 중혁이 다가오지 못하도록 양 손을 들어올린 그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종알거렸다.

“이, 이, 이건 무슨 상황일까….”

중혁은 아무 대답 없이 대뜸 얼굴을 들이밀었다. 자신을 똑바로 보는 시선을 이기지 못한 김독자는 있는 힘껏 고개를 숙이려 애썼지만 턱을 움켜쥔 악력을 이겨내지 못했다. 마지못해 눈만 굴려 시선을 저 구석으로 던지고 있던 그는 엄습하는 그림자 앞에서 결국 눈을 질끈 감고 말았다.

“거 뭣들 하는 거요? 미라보 다리 앞 입맞춤이라. 그대들은 조선의 기욤 아폴리네르와 마리 로랑생인가?”

입술이 막 닿으려는 순간 한 남자가 건들거리며 그들에게로 다가왔다. 그는 한손에 보랏빛이 도는 액체가 담긴 술병을 들고 있었고, 넥타이는 반쯤 풀어 헤쳤으며, 얼굴은 상기되어 있었다. 누가 보아도 만취한 모습으로 걸어오는 남자를 중혁이 경계 어린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우리는 한창 사랑하는데 어찌 이별한 연인들의 이름을 대시는 거요?”

멈칫한 중혁을 후다닥 밀어낸 김독자가 웃는 얼굴로 대꾸했다. 중혁과 달리 별로 경계하는 기색은 없었다. 단호한 반격에 취객의 눈썹이 크게 들썩였다. 이내 다시 느물느물 웃는 얼굴이 된 남자가 다시 입을 열었다.

“거참, 그 유명한 시구만큼 둘이 아주 로맨틱했다는 말이지. 이봐, 낭만적인 커플 양반. 내게 혼자 마시기 아까운 술이 있는데 같이 들지 않겠어?”

“우리가 왜 그래야 하지?”

중혁이 적대감 가득한 얼굴로 으르렁거렸다. 상당히 위협적인 행동이었음에도 술에 취한 남자는 조금도 놀라거나 겁먹지 않았다.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유중혁과 김독자의 앞에까지 다가와 선 남자는 싱긋 웃기까지 했다. 경계심 가득한 눈으로 자신을 쏘아보는 중혁에게, 취객은 의뭉스러운 미소로 답할 뿐이었다.

“자. 자. 그러지들 말고.”

그가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중혁의 어깨를 툭툭 쳤다. 여전히 의심 어린 표정으로 자신을 노려보는 사내를 아무렇지 않게 웃으며 바라보던 남자의 표정이 일순 진지하게 변했다. 그의 검은 눈동자가 어둡게 빛나는가 싶더니, 남자가 조용히 말했다.

“들자고.”

그는 병 위에 덮어놓았던 종이컵을 유중혁과 김독자에게 하나씩 쥐어주었다. 그리고는 그대로 술을 기울여 잔을 채우기 시작했다.검정색에 가까운 액체가 흘러나오며 짙은 포도주 향이 풍겼다.

“자, 건배…, 건배하세나. 그대들의 영원한 사랑을 위해.”

그가 실실 웃으며 잔을 들었다. 무슨 생각에서였는지 김독자가 그를 따라 잔을 들어올렸다. 잠시 불만스러운 얼굴을 했던 유중혁이 마지막으로 잔을 들었다. 세 사람의 잔이 마주쳤다. 중혁은 망설임 없이 술을 쭉 들이켰다. 낯선 취객도 마찬가지로 술 한 잔을 그대로 마셨다. 김독자만이 술을 반쯤 마시다가 켁켁거리며 입을 떼었다.

“어우, 엄청 독주인데요.”

“네가 술이 약한 거야, 친구.”

“어우….”

“이리 내놔라.”

망설임 없이 김독자의 잔을 빼앗은 중혁이 술잔을 비웠다. 그 모습을 지켜본 취객이 휘유, 소리가 나도록 휘파람을 불었다. 아주 사내다운 친구야. 그가 칭찬하며 다시 중혁의 어깨를 두드리려는 듯 손을 들어 올렸다. 그러나 이번 독려는 행해지기 전에 중혁에게 막히고 말았다. 중혁이 사내의 손을 잡아 뿌리쳤던 것이다.

“쌀쌀맞기는.”

“자, 친구.”

다소 상기된 얼굴의 김독자가 입을 열었다. 그는 이미 이 낯선 취객과 친구라도 된 마냥 말을 편히 한 것도 모자라 정답게 팔짱까지 끼고 있었다. 중혁이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김독자의 어깨를 감싸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김독자는 개의치 않고 남자와 유중혁을 잡아끌었다.

“좋은 술을 대접받았는데 사례를 아니 할 수 없지. 좋은 술을 파는 곳을 아는데 같이 한 잔 어떠신가?”

“이 친구 마음에 드는군.”

취객이 큰 소리로 웃으며 김독자의 어깨를 팡팡 두들겼다. 그의 마른 몸이 힘을 이기지 못하고 휘청였다. 넘어지려는 김독자의 어깨를 힘으로 붙잡아 일으킨 사내가 험악한 표정으로 취객을 노려보았다. 그러나 사내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싱글벙글 웃기만 했다. 그는 눈치라고는 없는 사람처럼 김독자의 손을 쥐고 붕붕 흔들기까지 했다.

“자, 안내하시게나, 젊은 친구. 어디 보자, 이름이?”

“…이학현입니다.”

“그래, 이 군. 어서 가자고.”

“예, 잘 따라오십시오.”

난데없는 공격에 비틀거리면서도 김독자는 웃었다. 이내 그가 앞장서서 걸음을 떼었다. 두 사내가 그의 뒤를 바짝 따라 걸었다. 김독자의 걸음은 그리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았다. 그는 별로 서두르는 기색 없이 낮은 돌담들을 끼고 골목을 따라 걸었다.

그렇게 어느 정도 걸었을까.

그림자가 진 골목 아래에서 슬며시 빠져나온 남자는 방금 세 사람이 들어섰던 골목으로 발을 들였다. 그리고 곧 그의 얼굴에 당혹감이 스쳤다. 그는 창백한 얼굴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분명 이 골목으로 들어갔던 것 같은데….

“어, 어딜 갔지…?”

남자가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리고 그때,

“네놈이군.”

낮게 가라앉은 음성이 들렸다. 그가 반응하기도 전, 막다른 골목 너머 나무 위에서 새카만 그림자 하나가 달려들었다. 제대로 저항하기도 전에 머리를 바닥으로 처박혔다. 사내의 팔을 뒤로 돌려 포박한 검은 옷의 남자가 그대로 그의 뒷목을 틀어쥐었다. 붙들린 남자는 발버둥치며 중혁을 밀어내려 애쓰다가, 그게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는지 그대로 몸에서 힘을 뺐다.

“니르바나가 보낸 놈인가?”

남자의 목소리가 싸늘하게 울렸다. 불편한 자세로 등 뒤를 노려보던 사내가 낄낄대며 음산한 웃음을 터뜨렸다. 그가 광기에 가득 찬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곧…, 그날이 올 거야….”

“묻는 말에나 대답해라.”

사내가 남자의 목 뒤를 힘주어 눌렀다. 끄으윽, 중혁의 밑에 깔린 남자가 고통 어린 신음을 내뱉었다. 허공을 향해 흔들리던 그의 동공이 날렵한 모양의 구두를 발견한 순간 크게 확장되었다.

“킥…! 크힉…!”

“…….”

어느덧 둔갑을 푼 김독자가 동그란 안경 너머로 눈을 가늘게 떴다. 혐오감이 담긴 시선이 아래를 향해, 수상한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갑자기 그가 그물에 걸린 물고기처럼 펄떡이기 시작했다.

“구원의 마왕…!!”

“뭐, 뭐야.”

“크하하학, 하학, 하…!! 커헉, 컥!”

김독자가 주춤거리며 물러났다. 그러나 그 경악에 찬 반응이 오히려 상대를 흥분케 한 것인지, 이제 남자는 미치광이처럼 웃어대기 시작했다. 김독자는 질색하는 얼굴로 손사래를 쳤다. 살짝 미간을 찡그린 중혁이 고개를 박고 엎어진 남자의 뒤통수를 주먹으로 내려쳤다. 남자는 몇 대를 맞고서야 조용해졌다.

“…뭐야? 이 자식, 기분 나쁜데.”

“쿨럭, 크, 흐…. 구원, 의, 마왕….”

“니르바나가 보낸 놈이냐고 물었어. 대답해.”

“겁, 도, 없이…. 피의, 돌, 을, 삼, 킨, 자여….”

“…….”

“너는, 사, 랑하는, 이에게, 목, 숨을, 잃을, 것이다.”

순간 김독자의 미간이 좁혀졌다. 거의 동시에 유중혁의 입매도 꿈틀거렸다. 손톱에서 피가 나도록 맨바닥을 긁으며 버르적거리던 그것의 몸에서 연기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중혁이 으르렁거렸다.

“네놈, 허튼 수작 부리면….”

“…이봐, 물러나는 게 좋겠는데.”

“중혁아, 손 떼!”

사태를 관망하고 있던 취객이 조용히 말했다. 그와 거의 동시에 김독자가 중혁의 어깨를 잡아당겼다. 사내를 움직이기에 충분히 강한 힘은 아니었지만, 유중혁은 기꺼이 김독자가 끌어당긴 쪽으로 몸을 틀었다. 어느새 남자의 몸에서는 쉭쉭거리는 소리까지 나기 시작했고, 피어오르는 연기는 새카맣게 변해 있었다. 중혁이 몸을 물리며 김독자를 감쌌다.

곧이어 피어오른 새카만 연기와 함께 그것은 완전히 자취를 감추었다.

* 미라보 다리(1912): 기욤 아폴리네르가 연인 마리 로랑생과 이별한 후 지은 시. 박인환의 시 《세월이 가면》에 영향을 주기도 했다.現 마로니에공원이 있던 곳에는 본래 대학천이라는 작은 하천이 흘렀는데, 경성제국대학생들은 대학천을 세느 강, 그 위의 작은 다리를 미라보 다리라고 불렀다.

* 업둥이: 집 앞에 버려진 아이. 주로 자식이 없는 집 앞에 버려지며 보통 그 집에서 키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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