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에 있었다.

04. 잠자는 병실의 왕자님

제천독자

제천독자 by 도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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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독자는 그로부터 나흘 후 눈을 떴다. 우습게도 매시간 병실을 드나들며 온갖 검사를 진행한 의료진보다 먹지도 자지도 않으며 병실 앞의 작은 창에 온 신경을 곤두세웠던 손제천이 가장 먼저 그 사실을 알아챘다. 쪽잠에 든 이수경을 조심스레 흔들어 깨우고 복도를 뛰어갔다. 다급하게 근처에 있던 아무 의사를 붙잡고 정신없이 말했다. 병원에서 뛰면 안 된다는 주의를 같이 듣긴 했지만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버렸다.

 

“…분.”

“… …”

“환…분, …요?”

“…”

“동공… …고, 며… …제대로… …겁니다.”

 

시끄러워. 천천히 눈을 떴던 김독자가 내린 첫 감상평이었다. 뿌연 안개가 낀 것처럼 눈앞이 잔뜩 흐렸다. 색만 겨우 구분할 수 있었다. 머리가 아예 멍했다. 그러다 문득 피곤해져 눈을 감았다. 어차피 잘 들리지도 않는데, 애쓰지 말자. 눈을 뜬 걸 보니 수술은 잘 됐을 것이다. 손제천의 얼굴을 못 본 게 조금 아쉬웠지만 금세 정신을 차릴 수 있을 거라고 스스로를 달래며 정신을 스르륵 놓았다.

 

 

***

 

 

“도, 독자는요?”

 

손제천은 의사와 함께 병실을 나온 이수경을 붙잡고 급하게 물었다. 의사는 고개를 까딱이며 마저 갈 길을 갔다. 이수경은 손제천을 의자에 앉히고 어깨를 가볍게 두드려주었다. 힘없이 웃는다.

 

“독자 괜찮대. 몸이 많이 약해져서 깨어나는 데 좀 오래 걸린 것 같다더구나. 원래 이런 건 사람마다 천차만별이니까, 너무 걱정 하지 말라고도 했어. 동공 반응도 정상적이니까, 제대로 휴식 취하면 금세 괜찮아질 거야. 곧 일반 병실로 옮길 수 있대.”

 

이수경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손제천의 눈에서 눈물이 후두둑 떨어졌다. 혹시라도 수술이 잘못되었으면 어쩌나, 독자가 눈을 떴는데 의사가 뭔가 잘못됐다고 한다면? 그 모든 불안과 걱정이 눈 녹듯 씻겨 내려갔다.

 

“… …너도 좀 쉬어야지. 독자 깼을 때 놀라겠다. 내가 요 앞에 바로 지키고 있을 테니까, 얼른 집에 가서 푹 쉬고. 응?”

 

지금 손제천은 좋은 말로도 사람 꼴이 아니었다. 병실에 파리하게 누워있는 김독자의 안색이 더 좋았다. 거무죽죽한 얼굴에는 생기가 아예 꺼져있었다. 손제천은 잠시 고민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독자가 얼마나 아꼈던 얼굴인데, 이렇게 다루면 안 되지. 짐 몇 가지를 간단히 챙기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럼 진짜, 진짜로 금방 다녀올게요.”

“다녀오지 말고 쉬다 오래도.”

“이따 봬요.”

 

희미하게 웃으며 꾸벅 인사하고 간다. 가만 보면 독자보다 더 고집이 세다니까. 이수경은 작게 한숨 쉬었다.

 

 

***

 

 

중간중간 필요한 짐을 찾으러 잠시 들렀던 걸 제외하면 거의 두 달 하고도 반 만에 마주하는 집안 꼴은 정말로 엉망이었다. 물건을 찾느라 헤집는 바람에 이리저리 굴러다니는 잡동사니나, 한가득 쌓인 먼지 같은 게 아무리 봐도 사람 사는 집 꼴은 아니었다. 매일같이 윤이 나도록 관리했던 게 다 무색했다. 손제천은 우선 묵은 빨래를 돌렸다. 쓸고 닦았다. 쓰레기를 처리했다. 땀을 뻘뻘 흘리며 청소했더니 어느새 말끔해졌다. 그러다가 문득 이 집에서 가장 더러운 게 본인인 걸 깨달았다. 시계를 흘긋 보고 안도한다. 욕실로 뛰어들었다.

 

꼼꼼하게 온몸을 씻고 나와 단정한 집을 둘러보자 큰 숙제를 끝낸 것처럼 마음이 가벼워졌다. 오랜만에 깨끗이 씻고 나니 잔뜩 노곤해진 몸이 물먹은 솜처럼 무거웠다. 욕실 바로 앞에 있는 안방 문이 마침 열려 있었다. 침대가 꼭 팔을 벌리고 유혹하는 것 같았다. 딱 삼십 분만 잘까? 분명히 주저했던 것 같은데 어느새 너른 침대에 벌러덩 드러눕고 있었다. 눈이 뻑뻑해서 깜빡이다 보니 이때만 기다렸다는 듯 수마와 같은 잠이 꾸역꾸역 몰려왔다. 손제천은 금세 코를 골며 곯아떨어지고 말았다.

 

 

***

 

 

헉.

 

갑자기 등줄기를 따라 소름이 쫙 돋았다. 번쩍 눈을 떴다. 창문으로 보이는 바깥이 이미 어둑해지고 있었다. 정신없이 휴대폰을 확인하자 여섯 통의 부재중 전화가 떠 있었다. 손제천은 더 볼 것도 없이 겉옷만 챙겨 들고 총알같이 집을 뛰쳐나갔다. 애써 가라앉힌 불안이 발끝부터 기어오르고 있었다. 무슨 정신으로 시동을 걸고 차를 몰았는지도 모르겠다. 그냥 무작정 밟았다. 20분이 좀 넘는 거리를 십 분 만에 도착했다. 주차장에 차를 대고 무작정 뛰었다. 엘리베이터를 잡으려다 그냥 비상구 문을 열고 계단 위를 달렸다. 김독자의 병실이 있는 칠 층 비상구 문을 열고 토할 것처럼 헉헉대며 숨을 내뱉다 문득 꾸질꾸질해진 맨발이 눈에 들어왔다. 비틀대며 병실로 향했다. 김독자가 눈을 떠서 병실에 있길, 제발 별일이 아니기를. 하지만 작은 창 너머에는 김독자가 없었다. 손제천이 미끄러지듯 벽을 타고 털썩 주저앉았다. 퍼들퍼들 떨리는 손으로 휴대폰을 들어 이수경에게 전화를 걸었다. 통화음이 두 번도 가지 않고 바로 연결됐다.

 

“제천아, 어떡하면 좋니. 독자가… …”

 

사위가 캄캄히 물든다. 뒷말을 차마 듣지도 못하고 휴대폰을 떨어트렸다. 이수경의 물기 서린 목소리가 모든 상황을 대변했다. 손제천은 이 모든 상황이 꼭 소설의 한 장면 같다고 생각했다. 페이지를 넘기고 책을 덮어버리면 끝나버릴 허무한.

 

귀에서 삐이, 하고 이명이 들렸다. 복도를 지나가던 간호사가 손제천을 발견하고 뭐라 말을 거는데, 한 마디도 들리지 않았다. 메말라가는 눈알이 뻑뻑했지만 깜빡여야 한다는 사실도 잊고 한참을 있었다. 그러다 누군가 등을 세게 쳤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깜짝 놀라 고개를 들자 이수경이 무서운 얼굴을 하고 손제천을 노려보고 있었다.

 

“어, 어머니.”

“너… …발은 이게 또 뭐야, 너까지 속을 썩이면 어떡하니.”

“…죄송해요.”

“가자, 일단 내려가서, 앉자.”

 

비틀대며 일어섰다. 이수경의 부축을 받아 걸음을 옮겼다. 어쩐지 부끄러웠다. 맨발을 꿈지럭대자 이수경이 등짝을 한 대 더 세게 쳤다. 아주 끼리끼리 만나셨어. 짓씹듯 말한다. 띵, 칠 층입니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두 층을 내려가는 동안 둘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오 층입니다.

 

네모난 고철 상자 안보다 더 싸늘한 복도를 마주한다. 김독자는 지금 이곳에 있다. 손제천이 삐걱거리는 고개를 돌려 주위를 살폈다. 수술실이라는 글자가 가장 크게 다가왔다. 이수경이 복도에 있는 의자로 손제천을 데려갔다. 곁에 따라 앉는다.

 

“너 가고 나서, 두 시간이 좀 안 돼서 눈을 떴어. 전화를 안 받길래 자는구나 싶었고.”

“…”

“몇 마디 얘길 나누다가, 검사를 받으러 가는데… 갑자기, 갑자기 발작을 일으켰거든.”

“…발작, 을요.”

“그래. …진정제를 놓고 검사를 해 보니까 수술 부위에 출혈이 좀 생겼다고 해서, 그래서….”

 

말을 채 끝내지도 못하고 흐느낀다. 모든 게 다 제 잘못 같았다. 약하게 낳아서, 낳아놓고 정작 오래 키우지도 못해서, 살갑게 말 한 번 제대로 붙이질 못해서. 조용히 눈물을 훌쩍이다 문득 너무도 고요한 공기에 기시감을 느끼고 고개를 들었다.

 

이수경이 손제천을 알게 된 건 고작 삼 개월이 채 안 되는 시간에 불과했다. 하지만 눈앞의 청년이 그간 자신이 알던 이가 맞는지 무섬증이 돋을 정도였다. 손제천의 얼굴이 지나치게 침착했다. 다 죽은 눈알 아래로 시커먼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꼭 깊은 어딘가로 꺼진 것처럼. 이수경은 우는 것도 잊고 다급히 손제천을 끌어안았다. 등을 마구 두드렸다. 제천아, 손제천. 다급히 부르는데도 미미한 동요조차 없었다. 눈 한 번 깜빡이질 않고……

 

“… …제, 제 잘못인가 봐요.”

 

한참이나 꾹 다물려 있던 입이 벌어졌다. 쩍쩍 갈라져 나오는 목소리가 흉했다.

 

“독자가, 진짜 외로움을 많이 타는데. 아닌 척해도, 어두운 것도 사실은 싫어하고, 혼자 있으면 문자도 되게 빨리 읽고…….”

“제천아.”

“저는 다 알고 있었는데, 근데, 그런 주제에 제가,”

“손제천!”

“죄, 송해요. 죄송해요 어머니, 제가 집에 가지 말 걸 그랬어요. 독자가 눈을 떴을 때 제가 있었어야 했는데, 그러면…”

 

횡설수설 말을 지껄이는 손제천을 이수경이 강하게 붙들었다. 천천히 고개를 올려다보는 손제천의 두 눈 흰자위가 죄다 새빨갰다. 억지로 울음을 참는 기색이 역력해서, 이수경은 막막한 숨을 토해낼 수밖에 없었다. 어떡하면 좋을까, 너희 둘을. 안타까운 마음으로 손제천의 뺨을 천천히 쓸어줬다.

 

“제천아, 독자에 대한 사소한 것들은 네가 더 잘 꿰고 있겠지. 하지만 내가 엄마로서 알 수 있는 딱 한 가지는… 독자가 절대로 널 원망할 리 없다는 거란다.”

 

손제천이 눈을 휘둥그레 뜬다. 그러다 온 얼굴을 찌그러트리곤 아이처럼 소리 내 통곡한다. 그토록 사랑하는 사람이 그 긴 수술을 견디고, 나흘이란 시간 동안 깨기 위해 달렸다. 마침내 눈을 뜨고 의식을 차린 그 순간에 곁에 있어 주지 못했단 사실이 그를 시커먼 자책의 구렁텅이로 밀어 넣고 있었다. 독자가 절대로 널 원망할 리 없어. 그 말 한마디가 손제천을 살렸다. 김독자가 보고 싶었다. 왼쪽 약지가 아니라 오른손 약지에 마비가 와서 다행이라고 재미없는 장난을 치던 김독자가. 이상한 소설을 읽느라 걸핏하면 드러누워 휴대폰만 부여잡고 살던 김독자가, 못생기게 웃을 거라면 차라리 울어 달라던…

 

“…괜찮겠죠?”

“당연한 소릴 하는구나. 우리가 알고 있는 독자라면 괜찮을 거야, 분명.”

 

두 사람의 시선이 동시에 초록 등으로 향한다. 그 너머의 공간을 응시했다. 버티고 있을 누군가의 무사를 기도한다.

 

 

***

 

 

열 시간 째 접어든 수술에 피가 바짝바짝 마르는 기분이었다. 예정에 없었던 일이기에 더욱 그랬다. 수술 후 부작용이 있을 수 있다고 들었지만 실제로 겪는 건 다른 문제다. 손제천은 두 손을 모으고 속으로 온갖 신을 불렀다. 무사히 살아나게만 해준다면 천금이라도 바치겠다고. 삼십 분이 더 흘렀다. 저 착하게 살아왔잖아요. 우리 독자도 되게 착하게 살았는데, 이번 한 번만 좀 봐주시면 안 될까요? 심장에 벌레가 달라붙는 것처럼 초조했다.

 

열한 시간 째. 마침내 초록 등이 꺼졌다.

 

이수경도, 손제천도. 모두 섣불리 움직이지 못했다. 숨을 쉬는 것조차 까먹었다. 문이 열리기까지가 너무 길었다. 마침내 문이 열리고 의사가 그들을 불렀을 때 형을 선고받은 죄인처럼 퍼드득 몸을 떨었다.

 

“서, 선생님. 어떻게 됐나요?”

 

침착하려 했던 게 다 말짱 꽝으로 돌아갔다. 이수경이 말을 더듬으며 물었다. 손제천은 그저 우두커니 서 있었다. 의사는 피곤함이 그득 낀 채로 마른세수를 했다. 두 사람을 번갈아 가며 바라보다 천천히 입을 뗐다.

 

“…수술은 잘 끝났습니다. 출혈도 제거했고, 뇌부종도 무사히 해결 했어요.”

“그럼 이제 괜찮은 건가요?”

“우선 영상 보면서 같이 설명해 드릴 테니까, 따라와 주시죠.”

 

주먹을 꽉 움켜쥐느라 뼈마디가 다 하얗게 도드라진 손제천의 두꺼운 손을 이수경이 부드럽게 감싸 쥐었다. 절로 손에 힘이 풀렸다. 통하지 않던 피가 갑자기 돌아서 손끝이 찌릿찌릿했다. 의사는 이미 저만치나 앞서 나가고 있었다. 초록 등, 초록 수술복. 손제천은 초록색이 미웠다.

 

“이게 수술 전 모습인데요. 여기 앞쪽이랑 옆쪽에 각각 종양이 크게 자리했는데 뇌 조직 안까지 이미 침투한 상황이라 신경에 무리가 가지 않는 선에서 최대한 제거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아까 출혈은 이쪽에서 생겼습니다. 간질 발작 때문에 뇌압이 올라서 뇌부종까지 생겼고, 그게 바로 여기 뒤쪽.”

 

의사의 손끝을 따라 손제천의 눈동자가 바삐 움직였다. 저 조그만 게 김독자를 죽이려고 했단다. 기가 찼다. 이수경이 마른 입술을 뗐다.

 

“……그럼 혹시, 재발 확률은…”

“솔직히 말해서 현재 환자분의 상황에서는 계속해서 재발할 거라고 말씀드릴 수밖에 없습니다. 기존 종양도 다 제거하질 못한 상황이니까요. 하지만 예전에도 말씀드렸다시피 악성 종양은 환부를 얼마나 제거하느냐의 싸움이고, 최악의 상황이 오지 않게 저희가 항상 최선을 다하고 있으니까 보호자 분들도 저희를 믿고, 환자분과 함께 잘 견뎌 주세요.”

“감사합니다, 선생님. 앞으로도 잘 부탁드려요.”

 

손제천은 의사에게 연신 꾸벅거리면서 어쩔 수 없이 생긴 갈 곳 없는 원망을 무형의 신에게 풀었다. 정말로 살아만 있게 해주셨네요. 제가 공짜로 빌어서 그러세요? 부글거리는 속을 간신히 가라앉혔다. 어쨌든 한시름을 덜긴 했으니 감사하긴 했다. 정말로. 이수경도 한결 밝아진 얼굴로 미소 지었다. 손제천의 어깨를 두드렸다.

 

김독자와 닮은 그 희미한 웃음이 손제천에게는 가장 큰 위안이 된다는 걸 안다는 것처럼.

 

 

***

 

 

“세포 증식 속도가 너무 빠르네요. 할 수 있는 치료는 다 해보겠지만….”

“잠시만요. 선생님, 그게, 그게 무슨…”

“다시 수술 일정을 잡는 게 좋겠습니다. 환자분 깨어나시면 바로 수술 들어갈 수 있게 맞춰 보기로 하고.”

 

눈앞이 분노로 새하얗게 물들었다. 내가, 살려달라고 했잖아요. 살려는 줄 수 있잖아요. 마음이 도통 주체가 안 됐다. 어떻게 이럴 수 있어요. 회복도 다 못한 애를 왜 자꾸 괴롭혀요, 왜. 꽉 깨문 입술 새로 피가 주르륵 흘렀다. 그를 알아챈 이수경이 손제천을 진료실 밖으로 내보냈다. 머리 좀 식히렴. 문이 탁 소리를 내며 닫혔다. 한 걸음도 뗄 수가 없어서 고작 문에서 한 걸음 옆에 있는 벽에 등을 기댔다.

 

“… …씨발, 진짜…”

 

손제천의 시야가 금세 낮아진다. 다리에 힘이 풀려 주르륵 미끄러지듯 주저앉자 차가운 바닥이 느껴졌다. 욕이라도 하지 않으면 도저히 견딜 수 없었다. 불쌍했다. 그냥 이 모든 상황이 불쌍하기 짝이 없었다.

 

“…보고 싶어.”

 

맑고 새까맣던 눈동자가 사무치게 그리웠다. 부끄러울 때면 티를 내지 않으려 하지만 저절로 발개지던 사랑스러운 귀 끝을 김독자는 평생토록 모를 것이다. 옅은 떨림이 그의 몸뚱어릴 집어삼킨다. 그리울수록, 사랑할수록 심장 전체가 넝마 조각이 되어서 바닥을 까끌까끌하게 굴러다녔다. 내가 너를 조금만 덜 사랑 할 걸 그랬나 봐. 너도 나를 조금만 덜 사랑했으면 좋았을 텐데. 불가능한 가정으로 존재할 수 없는 미래를 상상했다. 그랬으면 우리는 지금쯤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김독자가 곁에 있을 때는 단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던 것들을 계속해서 그렸다.

 

그 어떤 망상에서든 김독자는 언제나 손제천과 함께 웃고 있었다.

 

그래서 손제천은 다시 맨 처음으로 돌아가 서로를 덜 사랑한다는 가정이 얼마나 부질없는 것인지를 깨달았다. 그리고 그 깨달음마저 얼마나 부질없는 것인지도. 김독자가 넘어지고도 다시 일어나 달리고 있는 이유는 선명했다. 세 사람의 괴로움을 짊어진 이유도 명확했다. 거창하지만 쥘 수 없는 것,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것. 오직 김독자만이 줄 수 있는 것 때문에라도 그는 다시 손제천에게, 이수경에게 돌아와 줄 것이 분명했다. 그 사실 하나만을 굳게 믿기로 했다. 주변을 둘러싼 모든 것들이 변수였다. 김독자의 사랑이라는 상수만을 제외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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