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에 있었다.

07. 말하지 않아도

제천독자

제천독자 by 도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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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술등에 초록 불빛이 들어왔다. 호흡기를 매달고 평온히 눈을 감은 채로 들어가던 마지막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했다. 손제천은 먼젓번 때와 달리 의젓한 모습이었다. 저는 언제나 살고 싶었던걸요. 삶에 대한 김독자의 의지는 신도 막을 수 없을 것이라고 자신할 수 있었다. 이수경과 번갈아 가며 쪽잠을 자고, 밥을 챙겨 먹었다. 김독자가 눈을 떴을 때 그 큰 눈망울에 걱정이 담기지 않았으면 좋겠기에, 저 혼자만 생각하기도 벅찬 주제에 남들의 짐까지 짊어지려 하는 게 보고 싶지 않아서. 이번 수술로 인해 앞이 보이지 않을 수도 있다는 말에 김독자는 어떤 표정을 지었던가.

 

마, 만지고… 느, 끼는, 건…… 괜, 찮죠?

네, 그쪽은 아직 손상이 없어서 괜찮습니다.

그, 럼… 괘, 괜찮, 아요. 누, 눈 까짓, 거…, 조, 좀 안, 보이면, 어때요.

 

그래, 그렇게 말하며……. 김독자는 태연하게 웃어 보였었다. 손제천의 손을 꽉 쥐고, 이 온기만큼은 느낄 수 있어 다행이라는 듯, 그렇게….

 

열여섯 시간 만에 수술이 끝났다. 수술에 들어가기 전, 의사는 무미건조한 말투로 김독자의 뇌 상태를 꼼꼼히 설명했다. 이번에 중심으로 제거할 종양은 이전에 뇌부종이 생겼던 부위에 자라난 것이라고 했다. 신경과 직접적으로 맞닿은 곳에 자라는 바람에 시각 손상의 위험이 있지만, 그 모든 걸 감수하고 제거하기만 한다면, 앞으로의 시간을 꽤 확보할 수 있다고도 덧붙였다. 이번 수술이 최대 고비일 겁니다. 비장하게 말했었다. 등이 꺼진 걸 알아챈 이수경이 방금 막 겨우 잠든 손제천을 흔들었다. 다행히 온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던 터라 금세 자리에서 일어날 수 있었다.

 

“선생님.”

“…후, 우선 자리 옮기실까요?”

 

마스크를 벗으며 의사가 희미하게 웃는다. 수술이 성공한 것이다. 그들은 피곤도 모두 잊고 의사의 뒤꽁무니만 열심히 쫓았다. 살아만 있다면, 뭐든 괜찮았다. 어떤 방식이든 전부 좋았다. 김독자는, 괜찮을 것이다. 괜찮지 않다면, 꼭 그렇게 만들어주고야 말겠다. 뭐 그런 다짐을 속으로 삼키며 천천히 의자에 앉았다. 의사는 그새 옷을 갈아입고 와서 예의 사무적인 표정으로 둘을 번갈아 가며 쳐다보고 설명을 시작했다.

 

“혈관과 맞붙은 종양을 제거하느라 시간이 오래 걸렸습니다. 방사선 치료로 제거할 수 있을 것 같긴 했지만 워낙 증식 속도가 빠른 세포다 보니까 수술로 제거했고, 전에 말씀드렸던 후두엽 쪽 종양을 거의 없앴습니다. 이 부작용의 경우는 환자분이 깨면 다시 살펴봐야 할 문제지만, 지금으로서는 일단 큰 고비를 넘겼네요.”

 

비장하게 수술에 임했던 의사였다. 장시간의 수술 끝에 잔뜩 찌들어버린 모습을 하고서도 목소리가 밝았다. 잠시 헛기침을 몇 번 하더니 계속해서 말했다. 낮은 목소리였다.

 

“이런 말씀, 저도 정말 드리고 싶지 않았지만……. 지금의 기술로 김독자 환자분의 완치는 어렵습니다. 완전히 종양을 제거하기도 어렵고, 혹시라도 뇌척수액을 타고 다른 장기로 전이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기 때문에…. 물론 그렇게 된다면 일이 더 어려워지고요. 최대한 재발을 방지하면서 치료를 계속해보는 게 최선일 것 같네요.”

“…한국에서 완치할 수 없는 건가요?”

“아뇨, 아마 세계 어디를 가도……. 악성 종양 중에서 이렇게 교모세포종이 자라난 케이스는, 원래 세계적으로도 5년 생존율이 10퍼센트밖에 되지 않습니다. 김독자 환자분만 그런 게 아니에요.”

“알겠습니다. 항상 감사드려요.”

 

이수경이 말을 잃었다. 넋이 반쯤 나간 그를 손제천이 일으키며 꾸벅 인사했다. 부축하며 진료실을 빠져나온다. 김독자가 누워있는 병실 앞으로 함께 걸었다.

 

“…어머니.”

“…”

“독자, 이겨낼 거예요. 어머니가 이렇게 무너지시면 어떡해요.”

 

다 흐트러진 머리칼이 힘없이 흔들렸다. 주름진 눈가를 타고 눈물이 쉼 없이 쏟아져 내렸다. 손제천이 이수경을 앉히고 담요를 둘러줬다. 그리고 진정될 때까지 손을 토닥였다. 울음이 진정될 때쯤 이수경이 물었다.

 

“…이젠 안 우는 거니?”

“그럼요.”

“…”

“사실 안 우는 건 어렵고, 대신 덜 울려고요. 그게 맞는 것 같아서.”

“…그래, 그렇구나.”

“어머니도 얼른 기운 차리세요. 김독자, 은근히 어머니 신경 많이 쓰거든요.”

“…고맙다.”

 

손제천은 씽긋 웃곤 작은 창 너머 잠들어있는 김독자를 한참이나 쳐다봤다. 얼른 뽀뽀하고 손잡고 싶다. 그러니까 이번엔 빨리 일어나야 해? 어쩐지 김독자의 대답이 들려온 것만 같았다. 아, 이… 변태야. 큭큭 작게 웃음을 흘린다.

 

 

***

 

 

다음날 한수영과 유중혁이 찾아왔다. 둘 다 노트북을 야무지게 챙겨온 걸 보니 작정한 듯했다. 어쨌든 그 틈을 타 손제천도 편안히 밥을 먹으러 갈 수 있었다. 갈 힘이 없다는 이수경을 억지로 일으켜 세워 같이 식사했다. 요양원에서 보호받는 느낌이야. 깨작대며 밥을 먹던 이수경이 던진 말에 손제천은 마시던 물을 죄다 뿜고 한참을 웃었다.

 

밥을 다 먹고 나서는 오랜 친구들이 정성들여 마련한 식후 쇼가 이어졌다. 주제는 김독자의 인생. 이수경은 아들의 쏟아지는 흑역사에 어머, 어머, 하고 연신 감탄사를 내뱉으며 아주 흥미롭게 이야기를 들었다. 손제천도 예외는 아니었다. 귀를 쫑긋 세웠다.

 

잠시 뒤 지친 이수경은 휴게실로 가 쪽잠에 들었다. 그사이 비좁은 복도 의자에 앉아 손제천은 책을 읽었고 유중혁은 휴대폰으로 게임 실황을 봤다. 한수영은 분노에 찬 손길로 키보드를 두들겼다.

 

타다다다다

타다닥

……탁.

 

“야, 손제천.”

“누누이 말하지만 내가 너희보다…. 됐다, 왜?”

“어어, 그게.”

 

답지 않게 한수영이 우물쭈물했다. 결국 손제천이 읽던 책을 탁 소리 나게 덮고 눈치를 주자 항복 자세를 취하며 한숨을 크게 내쉰다. 이 죽일 놈의 호기심. 혀를 쯧 차고 심드렁하게 말했다.

 

“너희 안 헤어졌네?”

“뭐?”

“…아니, 김독자라면 분명히 헤어지자고 했을 것 같아서.”

“…”

 

정곡을 찔렸다. 순간적으로 표정 관리가 안 된 그를 보고 유중혁이 그럼 그렇지, 하며 고갤 끄덕거렸다. 손제천은 십년지기는 아무나 하는 게 아니구나, 하는 이상한 감상에 젖었다. 한수영이 종알거렸다.

 

“걔가 먼저 헤어지자고 그랬지? 근데 어떻게 아직 사귀고 있는 거야?”

“…네 말대로 독자가 먼저 헤어지자고 했어. 근데 붙잡기도 독자가 먼저 붙잡았거든.”

“뭐? 김독자가? 와, 유중혁. 들었냐?”

 

고갤 끄덕이는 유중혁의 검은 눈동자에 약한 배신감이 일렁였다. 아니, 그 정돈가? 손제천이 머쓱한 듯 뒷머릴 긁적거린다.

 

“…손제천, 김독자한테 잘해. 진짜로 잘해야 해, 너는.”

“안 그래도 노력하고 있어.”

“거의 십년지기인 우리한테도 수술 직전에야 연락하는 놈인데…”

 

그렇게 말하는 한수영의 목소리에 섭섭함이 잔뜩 묻어있었다. 김독자를 잘 아는 만큼 서운했다. 이런 상황이 닥치면 모두와 연락을 끊고 잠적 탈 놈이라고 말하긴 했지만, 막상 그게 진짜로 실현되자 욕부터 나온 것도 사실이다. 이 줏대 있는 얼빠 새끼. 다시 묵묵히 휴대폰만 보던 유중혁도 말을 얹었다.

 

“손제천, 네가 더 잘 알겠지만 김독자는 티를 잘 안 내. 그래서 우리도 모르고 넘어갈 때가 종종 있었다.”

“…”

“…그래도, 네가 있어서 안심이군.”

 

여전히 시선은 휴대폰에 고정되어 있었지만, 툭 내뱉은 무뚝뚝한 위로에 어쩐지 위로받아버려서, 쓰게 웃었다. 유중혁과 한수영은 객관적으로도, 주관적으로도 좋은 친구들이었다. 그러니 사람을 잘 가리는 김독자와 이토록 오랜 시간을 함께 지낼 수 있었겠지. 천천히 시선이 창문 너머의 김독자에게 향한다. 너, 다 듣고 있지? 얘네가 너 엄청 생각해. 그러니까 얼른 일어나서, 고맙다고 해.

 

뺨이 간지러워 텅 빈 복도에 바람이 부는 듯한 착각이 일었다.

 

 

***

 

 

그 뒤로도 한수영과 유중혁은 매일매일 출석 도장을 찍었다. 이수경과 단둘이 있을 때보다 더 힘이 된 건 사실이었기에 말리지 않았다. 딱 일주일째가 되던 날, 김독자의 손가락이 미세하게 움직이는 걸 본 유중혁이 의사를 불러왔다. 우르르 들어간 의료진이 다시 우르르 나올 때까지 손제천은 진땀을 흘렸다.

 

“보호자 분?”

“네, 네.”

“좀 있다가 다시 검사 들어갈 거고요, 환자분 깨어나셨으니 일반실로 곧 옮길게요. 이따 부르면 진료실로 와 주세요.”

“…감사합니다.”

 

꾸벅꾸벅 인사를 하고 익숙한 네모 창으로 김독자를 본다. 실눈을 뜨고 미약하게 손을 움직이며 인사하고 있었다. 그래서 손제천도 마주 인사했다. 안녕, 독자야. 안녕, 제천아. 그렇게.

 

 

***

 

 

“왼쪽 눈이… 영구결손이네요. 오른쪽은 괜찮고요. 근데 이제 다리를 아예 못 쓰실 거예요. 신경 반응 검사 때 무릎 아래로 감각이 완전히 안 느껴진다고 하시더라고요. 아마 앞으로 마비되는 부분이 더 많아질 겁니다. 항암치료는 계속하고, 중간중간 방사선 치료도 병행하죠. 수술은… 방사선 치료로 해결이 안 되는 것만 해결하는 걸로 하고……”

 

주먹을 꽉 쥐다가 독자와의 약속을 떠올린다. 퍼뜩 손을 펼치고 무릎에 얹는다. 떠들어대는 말이 전부 다 거짓말 같았다. 신은 어디로 갔나. 쏘아 올린 수많은 기도는 하늘에 구름이 되어 비로 내리나. 김독자의 시간 한 가닥이라도 훔쳐본 사람이라면 이토록 잔인할 수 있었을까. 손제천은 답해줄 이 없는 물음으로 가슴을 난도질했다.

 

“…알겠습니다.”

 

어영부영 진료실을 나온다. 무슨 말을 들었는지 기억이 다 휘발되어서 아무것도 기억이 나질 않았다. 이수경이 등을 가볍게 두드려줬다. 그제야 길게 호흡했다. 제 뺨을 철썩철썩 치고 큼직한 발을 뗀다.

 

“의사 쌤이 뭐래? 이제 괜찮다지?”

“…”

 

김독자의 곁에 꼭 붙어있던 한수영이 벌떡 일어나 달려왔다. 손제천은 입술만 달싹였다.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김독자를 본다. 호흡기를 달고 있느라 직접적으로 말할 수 없는 그가 눈이라도 겨우 웃어 보이고 있었다. 나 괜찮아. 꼭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한수영이 재촉했다. 왜 말을 안 해. 불안해 보였다. 손제천은 한수영의 어깨를 몇 번 두드리고 김독자에게 걸어갔다. 이수경은 문가에 서서 팔을 꽉 붙잡고 겨우 서 있었다.

 

“어머니까지 왜 그래요, 별거 아니잖,”

“왼쪽 눈은 실명이고, 오른쪽은 괜찮대. 다리도… 이젠 완전히 못 걸을 것 같다고 했어.”

“…”

“치료는…… 일단 계속할 거라고 했거든. 독자야, 괜찮지?”

 

땀 때문에 이마에 들러붙은 머리카락을 조심스레 떼어주며 웃었다. 김독자는 미약하게나마 고개를 끄덕였다. 이수경은 끝내 울음을 참지 못하고 병실을 나섰다. 김독자의 시선이 불안하게 그 끝을 좇고 있다는 걸 알아챈 유중혁이 깡마른 손을 한 번 쥐었다 놓고 이수경을 따라나섰다. 한수영은 무력함에 고개를 떨어트렸다. 주먹을 말아 쥔다.

 

“그래도, 그래도 완치는 할 수 있잖아.”

“…”

 

무심하게 던진 말이었다. 곧바로 당연하지, 라는 대답이 돌아올 줄 알았는데, 한참이나 대답이 돌아오질 않았다. 불안하게 고갤 들었다. 손제천이 웃고 있었다. 정말로, 예쁘게.

 

“…김독자, 손제천이 나 꼬시는 것 같은데, 합리적 의심 아니냐?”

 

떨리는 목소리로 간신히 말을 돌렸다. 손제천이 울고 있었다. 웃고 있었지만 분명. 김독자의 눈이 더욱 휘어졌다. 둘 모두에게 안심하라는 듯, 억지로 눈을 휘고 있었다.

 

“나, 나 잠시만 나갔다 올게.”

 

치밀어오르는 감정을 도저히 참을 수 없어진 한수영이 다급하게 문을 열고 뛰쳐나갔다. 흰 병실에 남은 것은 다정한 한 쌍의 연인뿐이었다. 손제천은 김독자의 손에 천천히 깍지를 꼈다.

 

“…일주일 만에 깼어.”

“…”

"이게 제일 궁금했지?"

“…”

“그리고 매일매일 수영이랑 중혁이가 와 줬고, 덕분에 제천이는 아주 잘 먹고 잘 잤어.”

“…”

“완치는, 의사 선생님이, 그, 어렵다고…하셨는데.”

“…”

“솔직히, 내 생각에는 외국으로 가면 될 것 같거든?”

“…”

“있잖아, 우리 외국으로 가서 아예 결혼도 해버릴까?”

“…”

“그렇잖아, 동성끼리 결혼할 수 있는 데가 많으니까. 외국은. 나도 당당하게 보호자 서명란에 내 이름 적고 싶은걸.”

“…”

“아 겸사겸사지 뭐. 너 치료도 하고, 나랑 웨딩마치도 올리고.”

“…”

“…이거 설마 프로포즈냐고? 당연히 아니지. 반지 없는 청혼이 어딨어?”

“…”

“반지, 가져와서… 내가 꼭 멋지게 프로포즈 할 거니까. 기다려줄 거지?”

“…”

“안 늦게 할게. 꼭 기다려줘야 해. 꼭 나 책임져주는 거야, 알겠지. 지금 약속해 나랑.”

 

상대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데, 손제천 혼자서 목이 쉬도록 떠들어댔다. 둘은 분명 대화하고 있었다.

 

“아.”

“…”

“그러고 보니까 이제 여름인데, 우리 바다나 갈까?”

“…”

“왜, 허락 맡고 가면 되지.”

“…”

“우리 여름이면 항상 바다에 갔잖아. 작년엔 제주도였는데, 올해는 어디로 가고 싶어?”

“…”

“동해?”

“…”

“척하면 딱이지, 바보야. 난 다 안다니까.”

“…”

“재수 없다는 말은 좀 너무하지 않아?”

“…”

“호흡기 답답하지. 그래도 해야 해.”

“…”

“음… 언제까지 해야 하는지는 이따 선생님께 여쭤볼게.”

 

그러자 김독자는 스르르 눈을 감았다. 많이 지친 듯했다. 손제천은 끝까지 꼼꼼하게 김독자를 살피고 조심스럽게 병실을 나섰다.

 

“와씨, 깜짝아.”

“안 놀랐으면서.”

 

문을 열자마자 한수영이 쭈그리고 앉아 있었다. 무릎에 얼굴을 묻고 작게 웅얼거렸다. 목소리가 물기가 한가득하다. 한수영의 옆으로 이수경과 유중혁이 쪼르르 있었다. 다들 들어오지도 못하고 계속 울고 있었던 게 분명했다.

 

“아이고, 다들 그만 좀 울어요. 밥 먹으러 가야지, 이제.”

“…쫌만 더 울자. 나 솔직히…… 아직도 안 믿겨.”

“…”

“그냥, 그냥… 꿈 같다고. 왜 하필 쟤야…….”

 

작은 몸이 한껏 움츠러든다. 언젠가 김독자에게 들은 적이 있었다. 그렇게 안 보여도, 셋 중에서 가장 마음이 여린 게 한수영이라고. 독해 보이는 순간이 제일 많지만, 그래도 한수영만큼 섬세한 사람이 또 없다고. 그러다 쓴웃음을 지으며 아마 실제로 가장 이기적인 사람은 자신일 거라고도 덧붙였다. 그래서 손제천은 김독자가 자신보다 세 살이 어리다는 걸 실감했다. 이기적인 게 뭔지 잘 모르는구나, 싶었다. 조용한 복도가 스산했다. 여름이 시작되었는데도, 왜 항상 이곳은 춥기만 할까. 그 순간, 한수영이 코를 먹었다. 손제천은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다 울었냐?”

“…시끄러워. 나 화장실 다녀올 테니까, 뭐 먹을지 정해 놔.”

“엉, 기다리고 있을게.”

 

후다닥 사라지는 희고 작은 얼굴이 새빨갰다. 정말 많이도 울었구나 싶었다. 손제천은 설렁설렁 유중혁의 옆으로 가 털썩 앉았다. 이쪽도 장난 아니구만. 이수경뿐만이 아니었다. 김독자가 깨면 유중혁도 눈이 붓도록 울 줄 안다고 얘기해줘야겠다고 생각했다. 오 분 정도가 지나자 물기로 축축해진 한수영이 척척 걸어왔다. 손제천이 슬쩍 웃으며 말했다.

 

“밥 먹으러 갑시다. 많이 울었으니까, 배 채워야죠.”

 

 

***

 

 

“병원 근처라서 좋겠다.”

“응?”

“이런 맛대가리 없는 감자탕을 팔아도 손님이 끊임없이 오잖아.”

 

식당에서 나오는 길에 한수영이 진심으로 부럽다는 듯 말했다. 몇 술 뜨지도 못하고 배부르다고 하더니 맛이 없었나 보다. 그러자 유중혁이 담담한 목소리로 되받아쳤다.

 

“그럼 너도 해라.”

 

참고로 유중혁도 서너 숟갈 정도 먹고 물만 줄창 들이켰다. 가만 생각해보니 김독자도 얼마 안 먹고 식사를 끝냈던 것 같다. 손제천은 왜 이들이 친한지 다시 한번 느꼈다.

 

“어이없네, 너도 있는데 내가 왜 하냐? 프로게이머 관두고 열면 내가 홍보차 글은 써준다.”

“웃기지 마라.”

“너는 지랄하지 마.”

“정말 질리지도 않고 싸우는구나. 독자도 같이 싸웠니?”

“쟤네 일상이에요.”

“대단하네.”

“들었냐? 나한테 시비 좀 작작 털어라, 유중혁.”

“사돈 남 말 하는군. 앞으로 말 걸지 마라.”

“야야, 이제 쉿.”

 

병실 앞까지 오는 내내 싸웠다. 그런 둘을 이수경은 재밌게 지켜봤고, 손제천은 쪽팔린다는 듯 앞서 걸었다. 꽤 부산스럽게 문을 열고 들어오는데도 김독자가 여전히 눈을 감고 있다.

 

“독자 깨려면 시간 좀 걸릴 것 같은데, 너희 당분간 못 온다고 했나?”

 

잘 정리된 이불을 괜히 한 번 털어줬다. 보조 의자에 털썩 앉는다.

 

“어, 나 사실 오늘도 미팅 째고 왔거든. 담당자 지랄 미쳤어.”

“나도 이젠 리그 일정이 있어서 시간 내기가 좀 어렵군.”

“알았어, 그럼 가 봐. 와줘서 고맙다. 올 때 연락해주고.”

 

“…오냐. 독자야, 누나 간다. 깼을 때 안 울고 잘 기다리면 또 올게.”

“가겠다, 김독자. 잘 있어라. 그리고 손제천, 김독자 깨면 꼭 연락해라.”

“어어, 잘 가.”

 

이수경은 로비까지 둘을 배웅해주겠다며 따라나섰다. 시끌벅적한 분위기가 가시고 고요함이 내려앉자, 김독자가 슬쩍 눈을 뜨고 손제천의 옷자락을 붙잡는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손제천이 그 손을 가져가 쪽쪽 입 맞췄다.

 

“나 잘했지?”

“…”

“늦어서 미안해. 최대한 빨리 갔다 오려고 했는데….”

“…”

“아냐, 내가 안 괜찮아서 그래. 앞으로는 눈 뜨는 순간 바로 옆에 있을게.”

“…”

“아, 감자탕 먹었어. 수영이가 이런 맛없는 감자탕을 잘도 판다고 엄청나게 툴툴거리더라.”

“…”

“그럼. 중혁이 요리 잘하는 거야 알지.”

 

김독자가 입을 달싹거리며 벙싯댄다. 너 어떻게 다 알아들어? 그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손제천도 이 사실이 웃기고 신기했다. 정말로 눈빛만 봐도 다 아는 지경에 이를 줄이야.

 

“아 맞다. 호흡기는 내일 아침에 회진 돌 때 한 번 보시고 결정하겠대.”

“…”

“싫어도 어쩔 수 없어. 폐가 안 좋다고 했단 말이야.”

“…”

 

정말로 싫은 건지 미미하게 인상을 구긴다. 그 모습마저도 사랑스러워 죽을 것 같았다. 손제천은 말랑한 귀를 조물거리며 작게 속삭였다.

 

“그래도 약 좀 먹으면 나아질 수 있는 정도라니까, 조금만 더 참자. 응?”

“…”

“나도 더 노력할게.”

“…”

“음… 그러게. 뭘 더 노력하지? 하여튼 힘내볼게.”

 

실컷 귀를 만지작대고 나니 동그랗고 예쁘게 생긴 이마가 귀여워 살살 쓸어본다. 몇 년을 봐도 도저히 질리지 않았다. 나한테 뭔 짓을 한 거람. 손제천은 몸을 일으키고 이마에 입술을 부볐다.

 

“피곤할 텐데 얼른 자. 사랑해.”

“…”

“응, 그래도 내가 더 많이 사랑해. 응응. 잘 자.”

 

은은한 조명 하나만 켜 두고 불을 껐다. 천천히, 김독자의 호흡이 고르게 울려 퍼진다. 색색거리는 숨소리가 병실 전체를 채울 때쯤에야 손제천도 안심하며 보조 침대를 펼치고 몸을 뉘었다. 작게 삐걱거리는 소리가 났다.

 

4개월.

 

김독자가 쓰러지고, 헤어지자는 말을 하고, 다시 사랑한다는 연락을 하고 쓰러져선. 첫 수술을 받고, 재수술을 받았다. 그리고 다시 세 번째 수술을 받아 무사히 눈을 뜰 때까지 걸린 시간이 고작 4개월 하고도 반.

 

아직도 이 상황이 믿기질 않는다던 한수영의 말이 생각났다. 손제천이라고 다르지 않았다. 하루 이틀 정을 준 사람이 아니었다. 오 년 가까이 살을 부대끼고 살아왔는데. 바로 곁에서 지켜보고 있어도 도저히 믿기지 않는 순간순간이었다. 가끔 잠들기 직전 그런 상상을 했다. 지금 눈을 뜨면, 풋풋한 풀냄새가 나는 집에서 함께 침대에 누워있을 것 같다고. 하지만 그럴 때면 누군가 이쪽이 현실이라고 알려주기라도 하듯 김독자가 고통에 찬 신음을 내뱉고 끙끙 앓았다. 찬물을 뒤집어쓴 것처럼 퍼뜩 정신을 차리면 삐걱거리는 침대에 누운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제아무리 견뎌내 보려 해도, 가혹한 현실이 버거울 때가 있었다. 하지만 그도 사람인지라 힘에 부칠 때가 있었다. 그러면 지난 추억을 꺼내 봤다. 빛바랜 기억이 하나도 없었다. 빛이 바랠 만큼 오래도록 내버려 둔 기억이, 추억이, 단 하나도 없었다. 매일매일 반짝반짝 윤이 나도록 닦아서 뒀다. 그만큼 소중했다. 아름다웠고,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김독자는, 손제천에게.

 

그러게. 왜 하필 너여야 했을까.

 

이런저런 생각과 일정한 숨소리가 뒤섞인 밤이 흐른다. 손제천도 스르르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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