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에 있었다.

02. 마음을 마주할 때

제천독자

제천독자 by 도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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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실을 나섰던 이수경은 십오 분이 채 되지 않아 돌아왔다. 그리고 옹송그린 채 또 울고 있는 김독자를 아까보단 익숙해진 손길로 토닥여줬다. 또 어색한 침묵 끝에 부스럭대며 검은 봉지에서 사과를 꺼내 깎기 시작했다. 그나마 할 게 생긴 이수경과 달리 연락도 못 하고 어색함도 견뎌야 하는 김독자는 그야말로 죽을 맛이었다. 다 깎은 사과를 가지런히 일회용 접시에 놓아두며 이수경이 말문을 텄다.

 

“친구한테 연락 안 하니?”

“누구요? 한수영? 아님 유중혁?”

 

와삭와삭 야무지게도 사과 먹는 소리가 고요한 병실을 채운다. 김독자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대꾸하며 데룩데룩 눈알을 굴렸다. 연락해야겠지, 아무래도. 몇 없는 친구니까. 사실은 몇 없는 친구가 아니라 단둘뿐인 친구긴 했지만 너무 자세한 건 파고들지 않기로 했다. 하여튼 김독자는 고뇌에 빠진 채로 열심히 사과를 씹었다.

 

“말고, 너랑 같이 산다는 그 친구.”

“…해야죠.”

 

와삭.

와삭와삭.

 

잠깐의 침묵 끝에 다시 부지런히도 먹었다. 사과 한 개를 다 먹어갈 때쯤 이수경은 또 다른 사과 한 개를 깎기 시작했다.

 

“지금 하는 게 어떨까. 원래 이런 건 한시라도 빨리,”

“어머니. 언제 가세요?”

“불편하니? 인제 와서 챙기는 것 같고?”

“… …”

 

때론 말보다 더 답이 되는 침묵도 있다. 정신없는 상황 속에서 그나마 감춰뒀던 불편이 스멀스멀 애매한 웃음과 함께 얼굴에 피기 시작했다. 이수경은 그런 김독자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다, 조용히 웃었다.

 

“…독자야. 나도 참 나지만, 너도 참 너구나.”

“그게 무슨…”

“몇 년을 연락 한 번, 모습 한 번 비추지 않다가 어떻게 이런 일로 이 엄마를 부르니. 어떻게…”

“…”

 

김독자는 끝이 잔뜩 갈라진 이수경의 목소리를 들으며 고개를 푹 숙였다. 단정한 손끝을 문질렀다. 엄마. 아주 어릴 적 이후로는 한 번도 불러본 적 없는 다정한 두 글자가 이수경의 입에서 툭, 툭. 아무렇지 않게 튀어나올 때마다 속에서 뜨거운 응어리가 울컥울컥 기어 올라왔다. 이 얼마나 부드럽고 그리운 단어란 말인가.

 

“내가 무정하다고 생각하겠지. 피치 못할 사정이 있었다 해도 그 오랜 세월 너를 버려두고, 채 한 번 제대로 찾질 않았던 이 어미가 인제야 너를 챙기려는 모습이 가증스럽게 느껴지겠지. 다 안다, 응. 그래. 다 알아.”

 

단단했던 음성이 점점 흐려진다. 곧 비가 올 것 같았다.

 

“하지만 독자야.”

 

김독자는 숨을 들이켰다. 그리고 내뱉지 못했다. 비가 내릴까 함부로 나갈 수가 없었다.

 

“그래도 내가, 네 엄마야.”

“…”

“자식이 죽을지도 모른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대체 세상 어떤 엄마가…”

 

귓가에 척척히 박혀오는 한 음절 음절마다 울음기가 번지자, 퍼뜩 고갤 들었다. 그렇게 마주한 이수경은 김독자의 어린 기억보다 훨씬 주름진 얼굴을 하고 있었고, 그 주름마다 눈물이 잔뜩 껴서 축축해진 모습이었다. 나이가 들어버린 어머니는 차마 시선을 마주하지도 못하고 아들의 손끝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생전 처음으로 부모의 날 감정을 정면으로 목도했다. 어쩐지 목이 메고 치솟는 설움이 눈으로, 입으로 새어 나왔다.

 

“죄, 송해요. 죄송해요, 엄마……”

 

먼저 다가간 건 김독자였다. 마냥 낯설기만 했던 이수경의 마른 몸을 제 품에 안아 엇박자로 투박하게 도닥거렸다. 그 손길에 이수경의 흐느낌이 통곡으로 변했다. 김독자 역시 어린 애처럼 엉엉 소리 내어 울기 시작했다. 뜨거운 눈물이 무정했던 세월을 씻어내리고 있었다.

 

머쓱한 듯 먼저 몸을 뗀 건 이수경이었다. 김독자가 자신보다 작아진 어머니의 품이 어색했듯, 이수경 역시 아직은 자신보다 커진 아들의 품이 어색했다.

 

“엄마는, 밖에서 바람 좀 쐬고 올게. 아까 말했듯이 그 친구에게는 얼른 연락하렴.”

“……걔랑 말할 용기가 안 나요.”

“독자야, 내가 지금 이 자리에 있을 수 있는 건, 오늘 네가 한 연락을 받고 네게로 달려가기로 용기를 냈기 때문이란다.”

 

용기를 낸 사람은 이렇게 멋있어지나. 떳떳하고 밝아 보였다. 시름도 걱정도 남들보다 딱 하나 정도는 더 내려놓은 것 같았다. 이수경의 꼿꼿한 자세가 그를 방증했다. 맹한 얼굴을 한 아들에게 이수경이 설풋 웃어 보였다. 서른이 다 되어도 여전히 이수경보다는 두 배나 어리다. 의젓해져도, 이만큼이나 컸어도, 아직도.

 

“그러니까 너도 용기 내서 연락해. 예전에 네가 무척이나 소중한 사람이라고 그랬잖니.”

“……저, 어머니. 사실 말씀드릴 게 있는데요.”

“응?”

“사실 저…… 걔랑 사, 귀고 있어요.”

 

나름의 자극이라도 받았는지 김독자는 비장한 얼굴로 내지르듯이 말했다. 이제 막 한 발을 뗀 관계에다 자신이 던진 폭탄 탓에 혹시 금이라도 가지 않을지, 두려움에 눈을 꽉 감고선.

 

“…그러니?”

 

다급히 숨을 들이켜는 소리라든가, 꽤 오랜 침묵이라든가. 그런 건 하나도 없었다. 아주 짧았던 침묵 끝에 이수경은 아까와 별반 다르지 않은 담담한 음성으로 답했다. 되려 놀란 건 김독자였다. 안 놀라세요? 둥그런 눈으로 물었다. 이수경은 옅게 웃었다.

 

“놀랄 게 뭐 있어. 그동안 소개도 안 해준 게 더 섭섭하지.”

“…네?”

“사귄 지는 얼마나 됐니? 어림잡아도 4년쯤 된 것 같은데.”

“맞, 맞아요.”

“그래, 이따 저녁 먹으면서 소개해주렴. 엄마는 의사 선생님께 뭣 좀 여쭙고 올게.”

“어? 네, 네. 다녀오세요…?”

 

부은 눈으로 쌩긋 웃으며 병실을 나가는 이수경에게 김독자는 세상에서 제일 멍청한 얼굴을 하고선 등신같이 대답했다. 이게 뭐지? 머리를 벅벅 긁으며 다시 벌러덩 드러눕는데, 정말 든 자리는 몰라도 난 자리는 안다고. 한 명이 사라졌을 뿐인데 이 새하얀 공간이 막막하고 외롭게 느껴졌다. 김독자는 다시 몸을 옹송그리며 무릎에 얼굴을 묻었다. 도무지 용기가 나질 않았다. 그 다정한 음성에 걱정이 먹구름처럼 끼고, 애정으로 가득한 매끈한 얼굴에 슬픔이 비처럼 내릴 생각을 하니 가슴이 시렸다.

 

지잉.

 

갑자기 울린 진동 소리에 깜짝 놀라며 벌떡 일어나 휴대폰을 보자 미리보기로 띄워진 몇 개의 메시지가 눈앞에 주르륵 나타났다.

 

[독자야, 점심 맛있게 먹어! 나…] 11:49

[울 자기 오늘은 왜 연락이 없…] 14:07

[많이 바쁜가 보네!! 나도 오늘…] 17:34

[아직 퇴근 못 했으면 내가 데…] 18:35

 

겨우 가라앉혀둔 감정이 다시 터져 나왔다. 지독한 다정이 가까스로 그러모았던 용기를 갉아 먹었다.

 

차라리 손제천과 헤어지고 싶었다.

 

평범히 살아왔던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불행이 아니었다. 치료를 받고 수술을 하며 추하게 일그러져 갈 자신을 견뎌달라고 할 수 없었다. 설령 손제천이 함께해 준다고 하더라도 그 모습을 보고 있을 자신이 없었다. 도망치고 싶어. 김독자는 조금씩 제 안으로 침잠했다. 그러자 틈을 주지 않겠다는 듯이 휴대폰이 세게 울리기 시작했다. 김독자는 화면을 확인하지 않고 곧장 전화를 끊었다. 조금의 시간을 두고 다시 전화가 울렸지만, 이번엔 저번보다 빨리 전화를 끊어버렸다. 그러자 이번에는 문자가 폭탄으로 날아왔다. 아, 젠장. 김독자가 손제천을 잘 아는 만큼 손제천도 김독자를 잘 알았다. 두 번째로 연락하기 전 잠깐의 시간을 둔 것은 분명 피치 못할 사정이 생겨 전화를 끊을 때면 기본 메시지를 남기는 자신의 버릇을 배려한 것이었을 텐데. 받기 싫다는 마음 하나만으로 끊어버린 게 처음이라 완전히 잊어버리고 말았다. 아마 손제천은 김독자의 목소리를 듣기 전까지 문자든 전화든 연락을 멈추지 않으리라.

 

걱정 많이 하겠지.

 

한참을 울리던 휴대폰이 마침내 멎을 때쯤 김독자도 느릿하게 눈을 감았다 떴다. 검은 눈알이 다 죽어있었다. 한 번 심호흡했다. 주저 없이 화면을 켜고, 손제천과의 채팅방에 들어가 일말의 머뭇거림도 없이 자판을 쳤다.

 

[헤어지자. 이제 너랑 그만하고 싶어. 내 물건은 다 버려도 돼.]

 

전송 버튼을 누름과 동시에 휴대폰을 건너편 소파에 던졌다. 손제천의 연락을 단 한 글자라도 더 읽거나 조금이라도 지체했다간 울며 고백할까 두려웠다. 멀쩡한 네 인생 나 때문에 망쳐달라고 비굴하게 매달릴까 봐, 그래서 달아났다.

 

소파 위로 날아간 휴대폰은 어디 한 군데 고장 난 데도 없이 멀쩡히 울리기 시작했다. 보나 마자 손제천이겠지. 듣고 싶지 않아서 귀를 막았고, 보고 싶지 않아서 필사적으로 베개에 고개를 처박았다. 한참을 울리더니 결국엔 배터리가 다 닳아 꺼져버린 휴대폰을 허망한 눈길로 바라봤다.

 

“… … 미안해…”

 

힘이 다 빠져선 낮게 되뇐다. 모순적이게도 자신은 저 울림이 영원하길 바랐는지도 모른다. 먼저 손을 놓아버린 자신을 손제천이 계속해서 붙들어주었으면 좋겠다고, 그렇게 마음 깊은 곳에서 음침하게 기도했던 거다. 전원이 꺼진 휴대폰에 연락이 올 리가 없다는 걸 알면서도 시선을 떼기가 힘들었다. 눈앞이 흐려진다.

 

“미안해… 미안해, 미안…”

 

바다에 아무런 준비 없이 뛰어든 사람처럼 먹먹함이 귓속을 파고들었다. 바보처럼 미안하다는 말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그럴 사람이 아닌 걸 아는데, 그런데도, 흉하게 변할 자신을 그가 떠난다고 상상만 해도 숨을 쉬기 버거울 정도로 가슴이 죄여 들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저 자신만 걱정하는 게 역겨웠다. 차라리 처음부터 혼자인 편이 좋았다.

 

독자야, 내가 지금 이 자리에 있을 수 있는 건

 

불현듯 머릿속에서 이수경이 말을 걸었다. 시름도, 걱정도. 남들보다 딱 하나 정도 더 내려놓은 모습으로.

 

용기를 냈기 때문이란다.

 

내가 무슨 짓을 한 거야.

 

웅크린 몸이 바들바들 떨리기 시작했다. 죄책감이 무겁게 가슴을 짓눌렀다. 김독자는 침대에서 뛰어내리다시피 황급하게 움직였다. 벌벌 떠는 손으로 전원이 꺼진 휴대폰을 꾹꾹 누르다 문을 열고 달려 나갔다. 뿌연 시야 너머로 보이는 풍경에 의지해 짧은 복도를 오래 뛰었다. 김독자는 언제나 다시 용기를 낼 수밖에 없었다. 손제천이 김독자를 그리 만들었다. 그에게 있어서 손제천은 저 자신보다 소중한 것이다. 반짝반짝 닦아서 가장 잘 보이는 곳에다 놓아두었던 예쁜 마음이다.

 

허겁지겁 계단을 내려가 접수처로 향했다. 저를 발견하고 눈이 커진 간호사에게 우그러진 얼굴로 헐떡이며 물었다.

 

“여, 여기, 헉, …충전, 기. 있어요?”

“네, 저기 왼쪽에 있는 충전 스테이션 가시면 돼요.”

 

숨을 고를 틈도 없었다. 힘이 다 풀린 다리를 질질 끌었다. 급속 충전이라 적힌 곳의 선을 빼내 휴대폰에 꽂는다. 새까맣던 화면에 제조사 화면이 뜨고 전원이 켜지는 그 찰나의 시간에도 김독자는 쉴 새 없이 불안했다. 완전히 휴대폰이 켜지자 부서질 것처럼 알림이 밀려온다. 모든 알림을 지우고, 손이 저절로 기억하는 열한 개의 숫자를 입력한다. 신호는 한 번을 채 가지 않았다.

 

“김독자!!”

 

연결되자마자 노염과 걱정을 담은 음성이 귓가에 크게 닿았다. 둑이 터지듯 후회를 흘리기 시작했다.

 

“…제, 천아.”

“……어디야, 지금. 연락은 왜 안 받았,”

“제천아, 손제천……”

“후… …응, 왜 독자야.”

“있잖아, 다 거짓말이었어. 나 그냥 네가 너무 보고 싶어서, 그래서 나……”

“독자야?”

 

해주고 싶은 말이 있어. 네가 내게 보여줬던 관심의 크기만큼이나 다정한 언어로만 말해주고 싶었는데. 혹시라도 네가 상처받았으면 어떡하지. 다 거짓말이었는데, 그건 그냥 내가 약해서. 내가 많이 약한 사람이라…… 흘러넘치는 감정과 쏟아지는 말들이 모두 속에 고여 엉망으로 뒤엉켰다. 참고 참았던 몸에 과부하가 온 듯, 호흡이 점차 날아가고 세상이 깜빡인다. 김독자가 몸을 크게 휘청였다. 휴대폰만큼은 손에 꼭 붙든 채로. 주변에 앉은 사람들이 엉거주춤하게 일어나 김독자를 바라봤다. 괜찮아요. 고개를 꾸벅이며 인사했다. 식은땀이 흐르고 있었다.

 

“여보세요? 독자야?”

“응, 제천아.”

“어디 있는지 가르쳐줄래? 내가 지금 갈게. 나 지금 현관이야.”

 

침을 꿀꺽 삼킨다. 마지막까지 흘리지 못한 후회가 목구멍에 가시처럼 뾰족이 남았다. 이미 머리가 뜨끈뜨끈했다. 김독자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나, 나한테 화 안 낼 거지?”

“내가 언제 너한테……알았어, 어딨는지 알려주면, 화 안 낼게.”

“여기가… …성운…대”

 

시야가 하얗게 명멸한다. 천장이 거꾸로 뒤집히고, 차가운 바닥이 볼에 닿는다. 마저 말 해줘야 하는데. 병원이라고, 내가 많이 아파서 너를 먼저 떠나버릴 것 같다고. 귓가에 웅웅대는 손제천의 목소리와 주변의 다급한 소리를 마지막으로 무거운 눈꺼풀이 닫혔다. 보고 싶어. 갈 곳을 잃은 단어가 혀끝에서 쓰게 맴돌았다.

 

 

***

 

 

“… …손제천?”

 

갓 눈을 뜬 새끼동물처럼 바르르 눈꺼풀을 들어 올리자 익숙한 인영이 보였다. 뒤이어 손에 두터운 온기가 느껴졌다. 빡빡한 눈을 억지로 감았다 뜨며 흐릿한 시야를 닦았다. 손제천은 안도한 모습이었다. 그러다 미미하게 표정이 굳었다. 덜컥 겁먹은 김독자가 애처로이 묻는다.

 

“화, 났어…?”

“화났어.”

“…진짜?”

“농담이야. 화 안 났어.”

 

손제천은 퉁퉁 부은 눈으로 씩 웃어 보였다. 김독자의 머리를 큰 손으로 다정히도 쓸어올리면서, 어떻게든 웃어 보이고 있었다. 다 알게 됐구나.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머리칼을 쓰다듬던 손이 귓가를 매만지고, 뺨을 더듬었다. 애정이 홈빡 묻은 손길이었다.

 

“미안해 제천아, 나는…”

“나, 어머니랑 먼저 저녁 먹고 왔어. 너 여섯 살 때까지 이불에 지도 그렸다며.”

“야!!!”

 

미안함과 부끄러움으로 얼룩진 얼굴로 잔뜩 눈치 보는 김독자에게 손제천이 부러 장난을 쳤다. 한층 밝아진 목소리로 부끄러웠던 과거를 줄줄 읊었다. 야 이 미친놈아. 김독자는 시뻘게진 채로 베개를 잡더니 손제천을 퍽퍽 쳤다. 그래, 나 미쳤다, 어쩔래. 질세라 손제천도 베개를 빼앗아 씩씩대는 김독자의 이마에 작게 딱밤을 때렸다.

 

“어딜 먼저 도망치려고. 나랑 벽에 똥칠할 때까지 살아야 해, 너는.”

“제천아.”

“회사에는 내일 아침에 사표 내고 짐도 빼러 가자. 내가 같이 가 줄게.”

“헤어지자는 거 아직도 유효해. 그러니까,”

“김독자.”

“…”

“마음에도 없는 말 하지 마.”

 

김독자의 입이 딱 다물렸다. 손제천의 목소리에 불안과 슬픔이 볼품없이 넘실거리고 있었다.

 

“그 조그만 머리로 무슨 생각을 했는지, 다 알겠거든. 근데 너도 알잖아. 네가 진짜로 내 생각 했던 거라면, 너 그러면 안 돼.”

 

엄한 목소리로 꾸짖는다. 그러더니 이내 푸스스 웃었다. 그 미소에 오히려 숨이 턱 막혔다. 걷잡을 수 없이 눈물이 흘렀다. 너는, 너는 어떻게 그럴 수 있어. 너는… 마른기침을 토해내며 쉴 새 없이 볼을 척척하게 적시는 김독자의 모습에 이윽고 손제천의 눈시울마저 붉어졌다. 우리 인제 그만 울자 독자야. 나 너랑 웃고 싶어. 끝이 미미하게 떨리는 목소리로 꼭 다짐하듯 되뇄다. 김독자가 그토록 원했던 너른 품으로 꽉 안아주며, 제 가슴팍이 젖어 가는 것 따위는 신경도 쓰지 않고. 그래서 김독자도 제 어깨가 축축해져 가는 걸 모른척했다. 둘은 서로를 부둥켜안고, 아주 오래도록, 그렇게 다짐했다.

 

 

***

 

 

“아유 어머니, 제가 할게요.”

“손도 두툼한 게 뭘 한다고, 가만히 있어요.”

“뭘 모르시네, 제가 얼마나 섬세하게 꽃을 다듬는데요.”

 

둘 다 사과 하나 깎는 걸로 아주 유세다. 김독자는 단지 손제천이 사 온 참치 죽을 다 먹고 상큼한 게 당겼을 뿐이다.

 

“그거 세척사과 아냐? 그냥 먹을게.”

“안 돼!”

 

투닥거릴 땐 언제고 말 한마디에 이렇게 합심해서 사람을 쪼아대다니. 김독자는 문득 인생이란 얼마나 무상한가 느끼며 힘없이 손을 떨어트렸다. 그래, 얌전히 있자. 어쨌든 사과는 예쁘고 깔끔하게 잘 깎여 김독자의 앞에 나타났다. 냠냠 잘도 받아먹는 모습을 손제천은 뿌듯하게 지켜보다가 더 먹고 싶은 건 없는지, 요모조모 물었다. 어색한 모자지간에 능구렁이 하나가 더해지니 삭막했던 병실에도 제법 웃음꽃이 폈다. 시간이 어느덧 여덟 시가 다 됐다. 손제천은 어, 벌써? 하며 침음을 흘리더니 주섬주섬 겉옷을 챙겼다. 김독자의 머리를 헝클며 싱긋 웃는 것도 빠트리지 않았다.

 

“독자야, 그럼 아까 말한 거 말고 더 필요한 건 없어?”

“응.”

“진짜?”

“응.”

“왜 난 필요하다고 안 해……?”

“어머.”

“…제천아 여기 우리만 있는 거 아니라고……”

“힝.”

 

아들의 낯부끄러운 연애 현장에 이수경은 입을 틀어막았다. 김독자는 평소 입단속을 시키지 않고 좋다고 맞장구 쳐줬던 과거를 후회하며 토마토가 됐다. 손제천은… 진심으로 섭섭했다.

 

“아, 빨리 가. 짐 챙기고 내일 아침에 봐.”

“이따 집 도착해서 전화할게?”

“응, 쉬어.”

“제천아, 조심해서 가고.”

“네, 어머니. 어머니도 푹 쉬세요.”

 

손제천은 아까 황당한 애교를 피우며 여유 부릴 땐 언제고 꽤나 서둘러 병실을 나갔다. 앞으로 꽤 오래 병실 생활을 할 김독자 때문에 손제천도 처리해야 할 일이 많았다. 우선 김독자의 짐을 챙겨와야 하고, 겸사겸사 집도 치우고, 가게도 잠깐 닫아야 했다. 다 알기에 의연한 얼굴로 보내주었지만, 생각보다 너무 산뜻하게 가버린 손제천 때문에 이번엔 되려 김독자가 더 섭섭해졌다. 단정한 손끝을 문지른다. 고작 하루 떨어지는 건데……. 아프면 원래 이렇게 어리광이 느나. 머쓱해진 기분으로 고개를 들자 이수경과 눈이 마주쳤다.

 

“섭섭하니?”

“예?”

“안 그런 척하더니 네가 더 하는구나.”

“아니 어머니, 무슨.”

“쉬렴. 엄마도 잠깐 집에 다녀올게.”

“아니……”

 

이수경은 장난스럽게 씩 웃더니 단정히 개어둔 겉옷을 입으며 옷매무시를 다듬었다. 무슨 일 있으면 바로 연락하고. 휴대폰을 살짝 흔들며 제 주머니에 넣었다. 다녀오세요. 김독자의 조그만 목소리에 이수경이 다시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탁.

 

아까의 떠들썩하고 환한 분위기는 어디 가고, 금세 적막이 내려앉았다. 김독자는 발가락을 꿈지럭대다가 조심스레 침대를 빠져나와 소파에 앉았다. 앞으로 얼마나 더 살아갈 수 있을까. 토도독. 자판을 두드렸다.

 

[뇌종양 생존율]

 

그러자 파란색으로 강세까지 주며 한 문장이 제일 처음으로 떴다.

 

[신경초종은 94%, 뇌수막종은 95%, 뇌하수체 선종은 97%다.]

 

무슨 말인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자신 있게 나타난 높은 확률에 가슴이 조금씩 뛰었다. 악성 종양이네요. 누군가 머리에 찬물을 부은 것처럼 정신이 번쩍 들었다. 다시 떨리는 손으로 화면을 꾹꾹 눌렀다.

 

[악성 뇌종양 생존율]

 

인터넷 강국답게 일말의 로딩 현상도 없이 곧장 결과가 떴다. 아까처럼 파란색으로 강세가 주어진 문장이 있었다.

 

[악성 뇌종양의 5년 생존율은 평균 22~33%이다.]

 

휴대폰 전원을 꾹 눌렀다. 악성 뇌종양의 5년 생존율은 평균 22~33%이다. 캄캄한 화면에 김독자의 얼굴이 비쳤다. 울음은 나오지 않았다. 다만…… 김독자가 무릎을 세우고 얼굴을 파묻었다. 혹시라도 누가 들을까 겁이 난 사람처럼 작게 속삭였다.

 

“죽기 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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