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에 있었다.

09. 여름에 있었다

제천독자

제천독자 by 도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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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제천과 연락이 끊긴 지 나흘이나 됐다. 휴대폰을 아예 꺼 두었기 때문에 그저 잘 있겠거니 하고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제천이는 괜찮을 거예요. 김독자가 대꾸했지만 이수경으로서는 손제천과 김독자 모두가 걱정됐다. 치료는 이제 관두기로 했다. 김독자씨, 할 수 있는 건 다 해도 모자랄 판에 치료를 그만두시겠다뇨. 계속해서 수술을 집도했던 담당의가 못내 안타까운 듯 말했다. 그냥요, 누가 바다를 갖다준다고 해서 이젠 괜찮아졌거든요. 영문 모를 소리만 하는 김독자에게 담당의는 한숨을 쉬고 다시 설득하려 애썼다. 그 노력이 가상해 약물치료는 계속하기로 했다. 큰 성과 없이 김독자를 놓아주게 된 의사가 병실을 나서며 말했다.

 

“삶에 대한 의지를 포기하지 마세요.”

 

그러자 김독자가 씽긋 웃으며 밝게 대답했다.

 

“저, 저는…언제, 나 사, 살고…싶, 었던, 거, 걸요.”

 

손제천과 함께했던 네 번의 바다를 기억한다. 하얀 모래사장 위로 유치하게 손제천 하트 김독자. 이런 글귀도 써봤고, 신나게 물장구도 쳤다. 밤바다를 거닐다 앉게 된 바위 위에서 숨 가쁜 입맞춤을 나누기도 했었다. 당일치기로 다녀오자고 호기롭게 나섰다가 차가 끊겨서 어쩔 수 없이 주변의 허름한 방을 잡고 사랑을 나눈 적도 있었다.

 

김독자는 지금, 손제천이 가져올 둘만의 다섯 번째 바다를 기다리고 있다.

 

 

***

 

 

손제천이 떠난 지 일주일째 되는 날 밤이었다.

 

밤 열한 시 오십이 분. 평소 눈을 감고 머리만 대면 잠이 쏟아졌는데, 오늘은 침대에 누운 지 벌써 세 시간 째 뒤척이고 있는 터라 짜증이 불쑥 났다. 오늘 아침에 눈을 뜬 순간부터 기분이 미묘하게 들뜨기 시작해서 정오가 될 때쯤에는 최고조를 찍었다. 그러다 서서히 기분이 가라앉기 시작했다. 손제천이 돌아오지 않아서라는 걸 모두가 알고 있었다. 천하의 한수영조차 눈치를 봤다. 원래도 없던 입맛이 똑 달아나 저녁을 물렸다. 이수경이 걱정하는 걸 느끼긴 했지만 도저히 먹고 싶지 않았다. 먹기도 전에 게워낼 게 틀림없었다. 김독자의 기분이 어찌나 가라앉았는지, 원래 같았으면 보조 침대에서 잤을 이수경도 오늘만큼은 따로 자자며 슬쩍 발을 뺐다. 차라리 잘된 일이었다. 괜히 화풀이하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저녁 여덟 시부터 혼자인 채로 쭉 병실에 있다 보니 갑자기 눈물이 핑 돌았다. 멍청이, 멍청이 손제천. 왜 안 와. 금방 온댔잖아. 오늘이 무슨 날인지 알면서. 한참을 훌쩍이다가 문득 정신을 차리고 눈물을 닦았다. 그만 울자. 여기서 더 울면 호흡기 차야 해. 급하게 감정을 가라앉히기 위해 속으로 손제천 욕을 신나게 했다. 그러다가 또 눈물이 나올 것 같아서 그냥 손제천의 시옷도 꺼내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보니 벌써 열한시 오십사 분이 다 됐다. 하긴, 일주일 만에 어떻게 다 하겠어. 혹시 몰라 꼭 쥐고 있었던 휴대폰을 내려놓으며 누우려던 찰나, 조심스레 문이 열렸다. 살금살금 누군가 들어오다 눈이 딱 마주쳤다.

 

“아, 안 잤어?!”

“이, 이…, …야!!”

 

손제천이었다. 김독자는 냅다 베개부터 던졌다. 제대로 날아가지도 못했지만, 손제천에게는 큰 타격이었다. 아악 독자야, 미안해, 미안해! 큰 덩치가 사사삭, 빠르게 움직여 김독자의 손을 꼭 잡고 애교를 피웠다. 내가 진짜, 잠을 깨우려고 한 게 아니라…… 어쩌고저쩌고 한참이나 변명을 늘어놓는 모습에 김독자도 씩씩거리며 화를 조금씩 가라앉혔다.

 

“…왜. 왜 이, 이제 왔, 어.”

“미안해, 앞에 기차가 문제가 생겨서 세 시간이나 꼼짝없이 앉아 있었어.”

 

티셔츠를 훌렁 벗어 병실에 구비해둔 편한 옷으로 갈아입더니 성큼성큼 다가와 가방을 풀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널 만나는데 안 씻고 올 수도 없으니까. 어쩐지 빳빳한 비누 향이 난다 했다. 어둠에 익숙해진 눈으로 가만히 보니 머리가 푹 젖어 있었다. 마음이 말랑말랑해진다. 시선이 마주쳤다. 손제천이 눈썹을 팔자로 휘며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많이 기다렸지, 미안해.”

“아, 안, 기다렸, 어.”

“…응, 그래도 한 번만 용서해 주면 안 될까? 늦게 온 건 사실이잖아.”

“…”

“제천이 한 번만 봐주세요, 응?”

“…히.”

“어, 웃었다. 지금 웃었지?”

“뭐, 뭐래…”

 

저도 모르게 픽 웃음을 흘렸는데 귀신 같이도 알아챈다. 덩치 큰 강아지처럼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며 애교를 피운다. 이 정도면 돌부처도 돌아볼 것 같았다. 김독자는 크흠, 크흠. 헛기침을 두어 번쯤 하고 새초롬히 물었다. 그래서, 지금 나랑 뭐 하자고? 손제천은 대답 대신 가방을 뒤적거렸다. 짜잔. 노트북을 꺼내더니 밝게 웃었다. 화면을 켜서 바탕화면에 있는 파일을 하나 가리킨다. 세 시간이나 되는 영상이었다.

 

“바다 가져왔어, 독자야.”

“…”

“엄청 많이 가져왔어. 네가 하나를 잊더라도 괜찮을 만큼, 정말로 많이.”

 

김독자의 입이 서서히 벌어졌다. 어깨를 들썩이며 운다. 기껏해야 바닷물을 떠 오거나 모래나 담아왔을 줄 알았다. 사진을 좀 찍어 오려나 생각했다. 손제천이 몸을 기울여 품에 김독자를 넣고 등을 도닥인다. 시간 많이 늦었는데, 내일 볼래? 그러자 김독자가 고개를 도리도리 흔들었다. 결국 한숨을 폭 쉬고 말했다. 그럼 잘 봐야 해. 고개를 끄덕끄덕한다.

 

“잘 봐뒀다가, 네가 제일 마음에 드는 곳으로 가자.”

“…응.”

“울지 말고. 제천이가 가져온 바다 봐야지, 뚝.”

“……뚝.”

“착해.”

 

손제천은 보송보송한 수건으로 잔뜩 얼룩진 얼굴을 꼼꼼히 닦아주고, 이동식 책상을 끌어와 김독자의 코앞에다 노트북을 뒀다.

 

[우리의 다섯 번째 바다]

 

바탕화면에 띄워진 파일 하나. 김독자는 떨리는 손을 움직여 영상을 재생했다.

 

… · … ‥ …영상 잘 나오나?

 

시작부터 풉 하고 웃음이 튀어나왔다. 바다를 잘 담다가, 갑자기 우당탕탕 하고 화면이 거꾸로 뒤집히더니 손제천의 얼굴이 함지박 하게 나온다. 그러다 치지직, 화면이 꺼졌다. 삼십 초가 지나서야 아 됐다. 하는 목소리와 함께 다시 화면이 바로 보였다.

 

여기는… 우리가 갔던 첫 번째 바다입니다! 어딘지 알죠? 와, 이제 휴가철이라 그런지 사람이 바글바글하네. 우리도 그랬는데. 월급쟁이 누구씨 덕분에 딱 이맘때 와서……

 

삼각대를 세워두고 촬영했는지, 안정적인 화면에 손제천의 전신이 보이고, 배경으로는 바다가 들리고 있었다. 그러다 카메라로 천천히 다가왔다. 곧이어 화면이 덜컹거리며 움직였다.

 

이건 제천이의 귀여운 발입니다. 파도가 간지러워.

 

젖은 모래 위를 꿈지럭대는 익숙한 발 위로 하얗게 파도가 부서졌다. 삽시간에 쓸려나가는 모래알이 반짝이며 사라진다.

 

아직도 물이 좀 차네. 저는 튼튼해서 괜찮지만, 어디 사는 월급쟁이 누구씨는 몸이 약해서 금세 감기에 걸릴지도?

 

장난스러운 목소리로 큭큭 웃더니, 화면을 위로 올린다. 끝을 알 수 없을 만큼 넓게 펼쳐진 바다가 화면을 가득 채운다. 쏴아아, 솨아아……. 바다가 들린다. 꽤 소리를 키운 영상에서 사람들의 수다 소리가 은은하게 깔린 채, 파도가 피고 지는 소리가 병실을 가득 채운다. 김독자는 눈을 천천히 감았다. 쏴아아, 솨아아……. 소리를 듣는데 짜디짠 바다 내음이 났다. 발끝이 시렸다. 꼭 파도를 직접 맞고 있는 것처럼.

 

멀어지는 파도 소리에 다시 눈을 뜨자, 바뀐 화면이 조금씩 흔들리고 있었다. 어디론가 걸어가고 있는 것 같았다.

 

저랑 제 애인의 특별한 추억이 담긴 장소로 가고 있습니다. 근데 밤에 갔던 거라 이 길이 맞는지 잘 모르겠네…

 

모래 위로 성큼성큼 걸었다. 김독자도 따라 걷고 있었다. 더 이상 움직일 수 없는 다리인데도, 분명.

 

여기 맞는 것 같은데? 어, 맞아. 여기다. 어때, 기억력 좋죠? 저는 김독자랑 관련 있는 건 다 기억하거덩요. 어디 보자, 그 바위도 찾을 수 있으려나……

 

카메라가 납작한 바위들을 하나씩 비췄다. 바위마다 손제천의 코멘트가 이어졌다. 그러다가 어떤 바위를 꽤 오래 바라보고, 앉아도 보면서 끙끙거리다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이거 맞네. 내 엉덩이가 기억하고 있어. 좋아, 겨우 찾았네요. 다음번에 헷갈리지 않기 위해서 뭐라도 해놓겠습니다.

 

손제천은 카메라를 잠시 근처에 올려놓고 다시 돌아와 바위 주변에 뭔갈 흩뿌렸다.

 

씨앗 넣었어요, 씨앗. 모래나 바위틈에서도 잘 자라는 녀석이에요. 자라면 좋고, 사실 안 자라도 괜찮아요. 이제부터는 자주 올 거니까…

 

맑은 웃음이 화면에 한 번 걸렸다. 금세 바다로 전환됐다. 오 분 정도를 미련 가득한 시선으로 서 있다가, 다시 걸음을 옮기는 게 보였다.

 

이번에는 좀 이동해서 다른 바다로 가 보려고요. 사실 부산에 오면 야시장을 가야 한다고 해서 거기까진 못 가봤거든요. 첫 번째 기념일이라 엄청 들떠서…

 

삑, 버스카드를 찍는 장면에서 화면이 잠시 멈추었다가 다시 재생될 무렵에는 저 멀리 바다가 또 보였다.

 

바로 바다 앞에서 내리는 게 아니라, 두 정거장 전에 내려서 걸어가면 좋은 산책 코스라고 해서, 그렇게 하려고요.

 

또 잠시 화면이 멈추고, 선글라스를 끼고 손에는 아메리카노를 든 그가 화면에 크게 비친다.

 

크, 얼굴 좋고.

 

자화자찬하기가 무섭게 누군가 말을 걸었다. 저기… 누군가 조심스럽게 휴대폰을 건네는 모습이 고스란히 찍혔다. 손제천이 크게 당황하면서 화면이 엄청나게 흔들렸다.

 

“…”

“아니아니, 끝까지 봐, 아니! 나 째려보지만 말고!!”

 

김독자가 정색하고 손제천을 보자 억울하다는 듯 화면을 가리키며 난리였다. 때마침 당혹스러워하지만 단호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저, 사귀고 있는 사람이 있어서요. 지금 영상 찍는 것도 그 사람 주려고 찍는 거거든요? 미안합니다.

 

“…너, 너는 무, 슨…저, 저, 저런, 것까지…말, 하냐?”

“이잉, 당연하지. 우리 독자 주려고 찍는 건데!”

“…”

“화 안 낼 거지?”

 

손제천의 애교에 금세 기분이 풀렸다. 얼굴에 풀린 건지, 하여튼. 몇 년간 손제천이 참 착실히도 길들인 게 분명했다. 곧바로 빠져들 듯 영상에 집중하는 모습에 슬그머니 웃음이 나왔다.

 

 

***

 

 

… ‥ …이곳을 끝으로! 이제 우리나라 바다는 전부 제천이 거예요. 곧 독자한테 줄 거니까, 얼마 안 가서 주인이 바뀔 거고요.

 

영상 속에서 손제천이 밝게 웃는다. 일주일이나 되는 강행군을 달리면서도 변함없이 밝았다. 설렘에 가득 차서, 눈에 사랑을 담뿍 담고. 언제나 김독자를 볼 때처럼.

 

보고 싶어.

 

목소리가 조금 가라앉는다. 그렇다고 해서 파도 소리에 묻히지도 않았다.

 

지금쯤 보고 있겠지? 너도, 나도…

 

희미한 떨림이 묻어나고 있었다. 김독자는 힘이 잘 들어가지 않는 손으로 손제천의 손을 꽉 쥐었다.

 

…마지막이니까, 유치한 거 하나 해야겠다.

 

화면이 잠시 깜빡거렸다. 다시 켜진 화면에는 이리저리 빨빨대며 움직이고 있는 손제천의 뒷모습만 나왔다. 그리고 흙투성이가 다 된 손으로 헐레벌떡 뛰어와 카메라를 들고 마구 뛰었다. 이게 지금 뭐 하는 거야? 김독자가 물었다. 손제천은 씩 웃으며 구준표 놀이. 하고 답했다. 뭐? 알아듣기 힘든 대답에 미간을 찌푸리자 제 입술에 검지를 붙이고 쉿, 하더니 화면을 콕 집어 가리켰다. 타이밍 좋게 화면 속의 손제천이 다시 말을 시작했다.

 

헉… …허억……. 아, 안 지워졌, 겠죠? 으허억…… 너무 힘들다.

 

흔들리던 화면이 바로 잡혔다. 특정한 곳을 향해 화면을 죽 당긴다. 뭔갈 찾는 것처럼 조금 버벅대긴 했지만 오디오를 가득 채우던 거친 숨소리가 가라앉을 무렵, 확실하게 비치는 어떤 전경이 있었다.

 

…짜잔.

 

“짜잔.”

 

두 손제천이 동시에 말했다. 파도가 밀려와도 지우지 못하는 모래 위 편지였다. 김독자의 텅 빈 왼쪽 눈에도, 반짝이는 오른쪽 눈에도……

 

[우리의 다섯 번째 바다. 나의 여름 김독자, 사랑해!]

 

“쩝. 끝에 느낌표 말고 하트를 붙일걸.”

“…유, 유…치해.”

“그런가?”

 

영상이 점점 까맣게 물들다가, 이내 꺼진다. 김독자가 툴툴거렸다. 손제천은 어깨를 으쓱이며 김독자의 다 젖은 볼을 두 손으로 슥슥 문질러 닦았다.

 

“지, 진짜… 유, 치해.”

“어쩌겠어, 원래 사랑은 유치한 거래.”

 

하얀 이를 드러내며 씩 웃는다. 닦아준 보람도 없이 곧장 눈물을 뚝뚝 떨어트리는 김독자를 품에 넣고, 도닥거렸다. 사랑해, 진짜로 사랑해 독자야. 너와 함께한 몇 년의 기억으로 내가 얼마나 오랜 시간을 보낼 수 있을지, 너는 상상도 못 할걸. 그러니까 우리 그만 울기로 해. 남은 시간은 전부 웃자, 사랑해. 아이 참, 그만 울고. 대답은요? 무지 재촉했다. 김독자도 결국 품에서 몸을 슬쩍 떼고 새빨개진 얼굴로 손제천을 바라본다.

 

“제, 천아. 나, 도…… 사, 사랑, 합니다.”

“한 번 더 말해주세요.”

“…사랑, 해.”

“나도. 나도 사랑해.”

 

울어서 부어오른 눈가를 손가락으로 부드럽게 쓸어주며 입 맞춘다. 질척한 소리와 함께 타액을 얽었다. 키스가 짜, 독자야. 어쩌라고, 넌 나 좋아하잖아. 키득거리는 웃음이 귓가에 윙윙거렸다. 손제천이 정말로 바다를 가져왔다. 그리고 모두 넘겨받았다. 이제 김독자의 바다가 온 사방에 깔려있었다.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샐샐 웃음이 나왔다.

 

“피곤하지.”

“으, 응……. 조, 조금.”

“내일 봐도 되는데, 하여튼 고집 하고는.”

“… …가, 같이, 자자.”

“그럴까?”

 

노트북을 닫고 책상을 치우며 차곡차곡 정리했다. 깨끗한 수건으로 김독자의 얼굴을 꼼꼼히 닦은 뒤에야 손제천이 침대 위로 올라온다. 두 사람 모두가 나란히 눕기에는 좁은 침대였지만 종이 한 장 들어갈 틈 없이 한 몸처럼 꽉 껴안은 채 누운 두 사람에게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해가 뜨는 창밖으로 여름을 담은 바람이 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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