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에 있었다.

03. 흐르는 시간 속에서

제천독자

제천독자 by 도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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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일찍부터 미리 한명오에게 연락했다. 입원 치료를 받아야 하는 상황이 돼서, 앞으로 출근하지 못할 것 같다고. 죄송하지만 인수인계도 어렵게 됐다고. 그러자 한명오는 잠깐 침묵하더니 일단 회사 올 수 있는지 물었다. 그리고 손제천과 만나 함께 도착한 회사는 여전히 높고 굳건했다. 여기 들어오려고 진짜 용썼는데. 씁쓸하게 웃고 익숙한 로비를 지나 QA팀으로 들어서자 한명오가 기다렸다는 듯 김독자를 향해 걸어왔다.

 

“그동안 수고 많았어. 몸조리 잘하고.”

“예, 감사합니다.”

“이따가 인사팀이랑 잠깐만 만나서 면담하고, 어. 그러면 바로 퇴사 처리될 거야.”

“예.”

“그래, 자리에서 짐 챙기고 있어 그럼.”

 

한명오에게도 마지막 남은 인성이라는 게 있었는지, 생각보다 사람답게 김독자를 위로했다. 의외네. 어느새 손제천은 김독자의 자리에 가 있었다. 이미 옆자리의 윤대리와는 말을 튼 것 같았다. 한명오가 사무실을 나서자마자 김독자와 손제천에게로 관심이 몰려들었다. 독자씨 아프다며? 괜찮은 거야? 퇴사한다고? 오늘 바로? 옆에 같이 온 분은 누구셔? 아이고, 참 잘생겼네. 김독자는 얼띤 얼굴로 애매하게 웃었다. 부서 사람들이 이렇게 수다스러웠나? 그래도 하나하나 친절히 답변했다. 입원 치료를 하게 돼서 퇴사하게 됐어요. 그리고 같이 온 사람은 제… 애인이고요. 그러자 주위가 일순 침묵했다. 예상한 반응이라 놀랍지 않았다. 뭐가 됐든 손제천은 무척 기분 좋아 보였으니까. 그래서 김독자도 그냥 어깨 한번 가볍게 으쓱이고 제 자리에서 짐을 챙겼다. 척척 짐을 챙기는데, 다시 슬금슬금 사람들이 다가왔다. 그냥 좀 놀라서 그런 거야, 알지? 서투른 다정함이 우스워서 그럼요, 하고 대꾸했다.

 

“김독자씨, 면담실로 좀 와볼래.”

“아, 네! 제천아 남은 거 부탁해.”

“응, 다녀와.”

 

손제천이 웃으며 손을 살래살래 흔들었다. 문에서 저를 기다리고 있는 인사팀장과 짧게 인사를 나누고 면담실로 들어가는 와중, 어느덧 손제천에게 무한한 관심을 표하는 직장 동료들의 목소리를 듣고 작게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

 

 

“독자씨, 그동안 수고 많았어. 들어가 봐.”

“그래, 얼른 나아서 다시 봐요.”

“감사합니다, 다들 잘 지내세요.”

 

먼저 손제천을 보내고, 김독자는 동료들과 마지막 인사를 나눴다. 다시 보자는 말이 기꺼웠다. 사무실 밖으로 딱 두 발자국을 나오자, 그새 분위기가 가라앉았다. 익숙한 공간에서 드는 낯선 기분이 이상했다. 뒷머릴 긁적이며 건물을 나섰다. 손제천이 트렁크에 기대고 서 있었다. 김독자를 발견하고 환히 웃었다.

 

“더 실을 건 없어?”

“응. 별로 없다니까. 같이 와 줘서 고마워.”

“뭘, 애인이라고 거들먹대는 거밖에 안 했는데.”

 

자연스럽게 운전석과 조수석에 나눠 타며 다시 병원으로 향했다. 점심 즈음이라 차가 하나도 안 막혔다. 시원하게 도로를 내달리며 둘은 아무 말이 없었다. 그러다 갓길에 차를 세우고 손제천이 침묵 끝에 물었다.

 

“… …괜찮아?”

“응?”

“들어갔을 때, 엄청 좋아했잖아.”

“아, 그치.”

“나라면 좀 아쉬울 것 같아서.”

 

관둔 사람보다 더 생각이 많네. 김독자가 대수롭잖게 생각했다. 실제로 김독자는 별생각이 없었다. 굳이 말로 꺼내자면 그런 감정이 없는 건 아니긴 했지만 심각할 정도도 아니었다. 그냥 밥 한번 먹고 내려버릴 감정이었다. 하지만 손제천은 그렇게 생각 안 하겠지. 김독자가 입을 뗐다.

 

“2년 가까이 다녔으니까, 섭섭하긴 한데…”

“한데?”

“내일부터 출근 안 한다고 생각하니까, 괜찮은 것 같아.”

“그건 그렇네.”

 

그러다 또 침묵이 이어졌다. 출발 안 하냐. 김독자가 재촉하고 나서야 손제천이 정신을 차리고 다시 차를 몰았다. 그 뒤로 두런두런 대화하긴 했지만, 영 손제천의 마음이 딴 데 가 있는 것 같아 김독자도 저절로 마음이 답답해졌다. 두 사람은 병원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이수경이 기다리고 있는 병원 앞 감자탕집으로 향했다. 이수경은 먼저 자리를 잡고 앉아 있었다. 감자탕 세 개 주세요. 하나는 특으로. 입장과 동시에 주문을 끝내고 두 사람도 마저 자리에 앉는데, 이수경이 조금 망설이다 말했다.

 

“…독자야, 괜찮니?”

 

아이고. 탄식이 절로 튀어나왔다. 이 착해빠진 양반들이 진짜. 김독자는 어이가 없어서 푸슬푸슬 웃었다.

 

“어머니까지 왜 그러실까.”

“…”

“정말 괜찮아요. 손제천 너도 같이 들어. 저, 얼른 나아서 재취업할 때 역경 극복 사례로 이거 쓸 거거든요.”

 

그제서야 손제천의 얼굴이 조금씩 펴지기 시작한다. 김독자가 없는 말을 부러 몇 번씩이나 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기에 안도감이 들었다. 이수경은 손제천의 반응을 흘깃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감자탕 일반 두 개랑 특 하나 드릴게여, 뜨거우니까 조심하세여. 그새 김이 펄펄 나는 감자탕이 세 사람 앞에 턱턱 놓아진다.

 

“…그래. 얼른 나아서, 엄마랑 같이 쇼핑 가자. 우리 아들 옷 한 벌 제대로 사준 적이 없어서 늘 미안했으니까……”

“아 왜 또 갑자기 분위기를 잡고 그러세요.”

“말도 못 하니? 누굴 닮아서 저렇게 까탈스럽대.”

“…”

“알았다. 무슨 얘기 하려는지 잘 알겠으니 조용히 하고 밥이나 마저 먹으렴.”

 

이수경은 싸늘히 말하며 한술을 떴다. 김독자는 별 신경도 안 썼는데, 손제천은 땀을 뻘뻘 흘리며 김독자의 장점들을 하나하나 나열하고 있었다. 어떤 점은 수경을 닮았고, 또… 하여튼 나불대느라 정신이 없어 보였다. 김독자는 아이러니하게도 이 모든 풍경에서 느껴지는 평화에 그만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맑고 청량한 웃음이었다. 그래서 이수경도 따라 웃었다. 손제천도 함께.

 

김독자에게는 아주 오래도록 기억될 한 장면이었다.

 

 

***

 

 

본격적인 치료가 진행되면서 김독자의 안색은 나날이 나빠졌다. 그의 병을 치료할 수 있는 몇 없는 약 중 가장 독한 약을 썼기 때문에 조금의 음식물조차 받아들이기 힘들어했다. 뇌종양 증상과 겹쳐, 심할 때는 빈속일 때마저 울렁거린다며 심심찮게 위액을 게워내곤 했다. 그럼 손제천이 묵묵히 손으로 그 토사물을 받아냈다. 자리를 정리하고 손을 깨끗이 씻은 후 김독자의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땀과 들러붙은 머리칼을 떼어주며 수고했다고 속삭였다. 작게 입 맞췄다.

 

음식을 잘 먹질 못하니 김독자의 마른 팔에는 갈수록 링거 바늘이 늘어났다. 팔다리에 놓을 곳이 모자라면 쇄골 아래에다 할 수도 있다는 걸 처음 알게 됐다. 김독자가 신기하단 듯이 바람 빠지는 소리로 말하면 손제천은 거칠거칠해진 입술에 립밤을 발라주고 웃었다. 할 수 있는 게, 할 줄 아는 게 웃는 것밖에 없다는 사실이 못내 괴로웠지만, 그 웃음이야말로 김독자가 가장 원하는 것이었기에 충실히 해내자는 마음이었다. 김독자는 저 자신보다 딱 세 배는 더 괴로울 테니까. 김독자와 손제천, 그리고 이수경의 괴로움을 모조리 떠안았을 김독자의 마른 등을 볼 때마다 손제천은 속으로나마 겨우 울음을 삼킬 수 있었다.

 

“나, 나 지금… …조, 금. 벼, 별로지?”

“너 까까머리일 때 어땠을지 궁금했는데, 이렇게 보게 되네.”

“하여튼 소, 손제천…”

 

항암치료와 방사선 치료를 병행하다 보니 머리가 뭉텅이로 빠지기 시작했다. 아이씨, 이러다 탈모 오는 거 아냐? 김독자가 장난스럽게 말하면 손제천이 대머리인 너라도 좋다며 수줍게 말했다. 그럼 김독자가 지금 저주 하는 거냐고 정색했다. 이수경은 아빠 유전자에 탈모가 없어서 괜찮을 거라고 슬쩍 말했다. 그리고 며칠 뒤 의사는 검사지를 들고 이제 더는 늦출 수 없다고, 수술 일정을 확실히 잡자고 했다. 어차피 수술할 거였다면 진즉 밀 걸 그랬다고, 잘된 일이라며 김독자는 그날 삭발을 했다. 그리고 그날 밤 숨죽여 내내 울었다.

 

“항암치료랑 방사선 치료 병행하면, 나아질 거라고 하셨잖아요 선생님.”

 

김독자의 수술 날짜가 정해지던 날 손제천은 의사를 붙잡고 눈물을 뚝뚝 흘렸다. 의사가 차가운 목소리로 대꾸했다.

 

“그렇게 치료가 가능한 사례도 있다고 말씀드렸을 뿐이에요. 하지만 김독자 환자분은 아닙니다. 입원하고 두 달간 좋아진 것보다 나빠진 게 더 커요. 이젠 꼭 수술 하셔야 합니다.”

 

그리고 안경 너머로 조금은 안타깝다는 듯한 눈빛을 하고 돌아섰다. 손제천은 사라지는 하얀 가운을 하염없이 눈으로 좇다 이수경에게 연락했다. 어머니, 저 잠시 어디 좀 다녀올게요. 오후가 다 지나서야 돌아온 그의 품에는 김독자가 좋아하던 꽃이 한 아름이었다. 혹시라도 해가 될까 봐 차마 가까이 다가서지도 못하고 병실 문가에 서서 한 송이씩 꽃을 보여줬다.

 

“이건 히아신스, 그리고 이건 안개꽃, 이건… …”

 

환히 웃으며 종알종알 설명한다. 김독자도 잘 움직여지지 않기 시작한 얼굴로 따라 웃었다. 이수경의 볼을 타고 조용히 눈물이 흘렀다. 진통제를 맞은 김독자가 잠들고 나서야 병실을 나온 이수경이 꽃을 만지작거리고 있는 손제천의 손을 꼭 붙잡았다.

 

“고맙다, 제천아.”

“이거, 병실에다 둘 수 있을까요? 독자가 좋아하는 꽃들인데.”

“내가 물어볼게.”

“감사해요.”

 

혼자가 아니라는 위안이 두 사람을 따스하게 감쌌다. 절대로 무너지지 말자고, 말하지 않아도 전해지는 의지를 함께 나눴다.

 

 

***

 

 

시간이 흐르고 수술을 목전에 두자 김독자의 상태는 더 나빠져만 갔다. 이전보다 말을 더 심하게 더듬기 시작했다. 의사는 뇌종양의 대표적인 증상이라고 했다. 그러니까 너무 무리해서 뇌압을 높여선 안 된다고도 덧붙였다. 아무리 숨을 고르고 말을 멈춘 후 다시 시작해도, 침착하게 말을 이어보려 해도 어쩔 수 없었다. 꼭 제 혀가 아닌 것 같았다. 오른손 약지는 잘 움직이지 못하게 됐다. 말도 더듬는 주제에 김독자는 의연하게 왼손 약지가 아니라 다행이라고 말했다. 그 손제천조차도 그 순간만큼은 도저히 웃어 보일 수가 없었다. 웃어야 하는데, 그래야 하는데. 입꼬리를 억지로 끌어올렸다가 다시 내리고, 천장을 한 번 쳐다봤다. 그리고 김독자를 보며 눈을 휘어 웃으려고 했다. 바르르 떨리는 입가가, 눈꼬리가 지나치게 서글펐다. 차라리 통곡을 한대도 이보다는 덜 비참했을 것이다. 김독자는 생각했다.

 

“소, 손제천. 모, 모, 못생기게… 웃을, 거면. 차, 차라리… …울어주라.”

 

깡마른 팔을 덜덜 떨며 기어코 들었다. 손제천의 뺨에다 제 손을 척 붙이고선 하는 말이 고작 그거다. 차라리 웃지 말라고 해주지. 못생겼으니까, 웃지 말고 가 버리라고. 그렇게 말해주지 그랬어. 손제천이 무너져 운다. 침대에 얼굴을 박고 꺽꺽 울었다. 김독자가 다 굳어가는 손으로 손제천의 머리칼을 헤집었다. 쓰다듬었다. 김독자도 함께 울었던가.

 

침대보를 다 적시고 나서야 고개를 든 손제천은 알 길이 없었다.

 

 

***

 

 

마침내 수술 전날 밤이 됐다. 아홉 시부터 이미 병실의 불은 꺼졌는데, 도무지 잠들 수 없어 숨만 내뱉는 밤이었다.

 

“… …독자야, 자?”

“…아, 아니.”

“얼른 자. 의사 선생님이 푹 자야 한댔어.”

“떠, 떨리니까…어쩔 수 어, 없잖아.”

“하긴, 나도 떨려서 잠이 안 오네. 수술은 네가 하는데.”

“그, 그, 그러니까… 어이 어, 없네.”

“입만 살아가지고. 얼른 주무세요, 왕자님.”

 

손제천은 보조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이불을 목 끝까지 꼼꼼히 덮어주었다. 다정히도 가슴께를 도닥였다. 달빛에 비친 미소가 환했다. 김독자가 몽롱하게 그 얼굴을 바라보다가 따라 웃었다.

 

“제, 천아. 우, 우리… 진, 짜로 오, 오래 지냈다. 그, 치?”

“… …응. 진짜로. 벌써 5년이 코앞이네. 네가 내 번호 안 땄으면 어쩔뻔했냐.”

“내, 내 인생 처, 처음이, 자 마지마, 막…요, 용기였을지도…….”

“김독자의 처음이자 마지막을 가져가는 영광을 누리다니…제천이는 기뻐.”

 

김독자가 소리를 내 웃었다. 다 일그러져 제대로 움직이지도 않는 왼쪽 얼굴 근육을 힘겹게 쓰면서 내색 하나 않고 크게 소리를 내서 웃었다. 그러다 지쳤는지 몇 번 토해내듯 기침을 하다가 겨우 잘 자라는 인사 하나를 내뱉고 까무룩 지쳐 잠들었다.

 

길고 고요한 밤을 오롯이 지켜낸 것은 손제천 혼자였다. 색색 김독자의 숨소리에 간헐적으로 올라오는 울음을 삼키며. 머잖아 아침이 밝는다. 손제천은 뜬눈으로 날을 샜고, 김독자는 아침 회진을 온 의료진들에 의해 억지로 잠에서 깼다.

 

 

***

 

 

“…독자야.”

“저 아, 안 죽어, 요. 그러니까, 어, 어, 어머니도 너무 걱, 정 말아요. 제천이 너, 너도.”

“나야 당연히 걱정 안 하지. 울 자기가 얼마나 센데. 잘 이겨내고 나오기다?”

“그, 그래.”

 

힘없이 이동 침대에 몸을 뉜 김독자가 수술실 너머로 사라질 때까지 손제천은 웃는 얼굴을 하고 애교스러운 몸짓을 했다. 텅 하고 수술실 문이 닫히고 나서야 손제천은 서서히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제 의지대로 주체할 수 없는 것처럼 몸이 무너져갔다. 주저앉아 차가운 바닥에 이마를 붙이곤 김독자 이름 석 글자를 토해내는 그 모습에 이수경은 쓴 입맛을 다시며 손제천의 너른 등을 쓸어주었다. 그러다 알게 됐다. 그새 살이 많이 내렸다는 걸. 팽팽했던 티셔츠가 조금 헐렁해졌다는 걸 말이다. 독자야, 엄마에게도 기회를 줘. 해준 것 하나 없어 미안하기만 했던 아들이 무사히 고행길에서 돌아오길 바라며 억겁과도 같은 시간을 차디찬 복도에서 흘려보냈다.

 

 

***

 

 

“김독자씨 보호자 분?”

“여, 여기요.”

 

여덟 시간이나 꺼질 줄 모르던 수술실의 불이 드디어 사라졌다. 손제천은 핏발 선 눈으로 수술실 문이 열리길 고대했다. 문을 열고 의사가 나오자마자 벌떡 일어서서 홀린 듯 다가갔다. 이수경은 그 옆에서 손제천의 팔을 꽉 붙잡고 있었다. 고된 수술에 잔뜩 지친 듯한 의사가 마스크를 내리며 희미하게 웃어 보였다.

 

“예후를 지켜봐야 확실히 알겠지만, 우선 수술은 잘 됐습니다. 아마 하루 이틀 뒤면 깨어날 거예요. 자세한 설명은 이따 자세히 드릴 테니까, 한숨 돌리고 계세요.”

“가, 감사합니다. 정말로 감사합니다…”

 

다리에 힘이 풀린 이수경이 크게 비틀거렸다. 손제천은 그런 이수경을 단단히 받치고 연신 꾸벅거리며 인사했다. 의사는 홰홰 손을 젓더니 발길을 옮겼다. 잠시 후에 김독자가 고요히 눈을 감고 수술실을 빠져나왔다. 손제천은 그때서야 이 꿈만 같은 현실을 믿을 수 있었다.

 

김독자는 살았다.

 

그 사실 하나만이 머릿속을 부유했다. 어느새 기운을 좀 차린 이수경이 손제천의 뺨을 쓸어줬다. 그래서 손제천은 자신이 울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 다정한 손길이 김독자와 똑 닮아서, 사무치게 그리웠다.

 

“우리, 독자 보러 갈까?”

“먼저 가세요. 저는 화장실 좀 다녀올게요.”

“그래, 그러렴.”

 

이수경은 군말 없이 손제천을 보내줬다. 홀로 김독자가 잠든 병실 앞에 앉아 찬찬히 생각에 잠겼다. 그가 자의로, 타의로 놓쳤던 아들의 수많은 나날을 곱씹었다. 그리고 앞으로 함께 할 수많은 나날을 그려나갔다. 넘치진 못해도 모자람 $없는 시간을 보낼 수 있길 간절히 바랐다.

 

“아, 어머니. 이제 독자 제가 지킬 테니까, 눈 좀 붙이세요.”

“꼴딱 밤샌 너도 안 자는데 내가 왜 자겠니. 됐고, 여기 앉으렴.”

 

제 옆자리를 탁탁 두드리며 바라본다. 손제천은 냉큼 옆자리에 앉아서 아이, 어머니. 제가 일부러 밤샌 게 아니고요… 하고 변명을 시작했다. 아니, 시작하려고 했다.

 

“누가 먼저 고백했댔지?”

 

갑자기 이수경이 매서운 눈초리로 물었다. 손제천은 절로 군기가 바짝 들었다. 이거 혹시… 미뤄왔던 남친 검증? 침을 꼴깍 삼켰다.

 

“제가 먼저 했어요. 물론 번호는 독자가 먼저 물어보긴 했는데.”

“그럼 그때부턴가 보네.”

“네?”

“갑자기 애가 밝아졌었거든. 꽃 얘기도 자주 하고…”

 

회한에 젖은 눈동자가 추억으로 물들어간다. 항상 소설 얘기로 면회 시간을 채우고 나갔던 아들이다. 암묵적으로 서로의 근황 같은 것도 묻지 않았다. 그러다 뜬금없이 꽃 얘길 했다. 요즘은 히아신스가 예쁘게 핀대요.

 

“나는 해줄 말이 없었어. 그래서 잠자코 듣기만 했지. 그런 나를 앞에 두고 독자는 매번 고집스럽게 얘길 하고 갔단다. 참 많은 이야길 들었어.”

“…독자가 생각보다 수다스럽죠?”

“…그렇더라고. ……독자가 깨어나기만 하면, 이젠 내가 그렇게 해줄 텐데. 우리 독자, 깨어나기만 해준다면…”

 

말꼬리가 점점 뿌예졌다. 눈물로 얼룩진 음성이 옅게 떨렸다. 작고 여윈 등을 다급히 굽혀보지만 터져 나오는 흐느낌을 막을 길이 없었다. 해준 것 하나 없는 아들. 덮어 놓고 사랑만 주기엔 지은 죄가 너무도 커서, 얼굴 한 번 보기가 미안해서. 앞으로 많은 날이 있을 거라고 합리화하며 용기 한번 내지 못하고 보내버린 시간이 미치도록 후회스러웠다. 쉽게 포기했던 그 하루하루가 얼마나 가치 있었는지 이제야 알게 된 것이 분했다. 손제천은 그 무거운 자책감을 슬픈 눈으로 바라봤다. 위로할 길이 없었고 감히 위로할 수도 없었다. 그건 손제천이 해줄 수 있는 게 아니었으니까. 독자야, 얼른 일어나. 어머니 우시잖아.

 

작은 창 너머로 김독자가 깨끗이 잠들어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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