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성야담집(2부)

[중혁독자] 경성야담집2.불가살이(2)

이 글은 픽션입니다. 실재의 인물, 단체, 시대, 국가와 관련이 없습니다.

이 글에 차용된 각종 민담 및 요괴들에 관한 내용은 필요에 의해 각색되었을 수 있습니다.

이 글은 전지적 독자 시점의 2차 창작으로 원작의 내용과 무관하며, 어떤 영리적 목적도 취하지 않았습니다.

京城夜談集

不可殺伊

-2-

“…….”

“희원 씨?”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훅 불어온 바람이 희원의 앞머리를 흔들어 놓고 지나갔다. 그 바람이 불어오는 곳을 향해 고개를 돌렸던 희원이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분명 멀찍이서 불길한 기운들이 일렁거렸는데…. 별 이유 없이 자신을 따라오던 유중혁과 김독자가 다른 쪽으로 가버린 후에 벌어진 일이니, 짐작컨대 멋대로 나돌아다니다가 또 이상한 일에 엮인 것이겠거니 싶었다. 뭐…, 쉽게 적에게 잡힐 위인들은 아니니 걱정할 필요는 없겠지만….

“…뭔가 기분 나쁜 바람이네요.”

현성이 찡그린 얼굴로 중얼거렸다. 희원의 눈이 놀라움으로 커다래졌다. 분명 바람에 섞인 것은 불길한 기운이었지만 그렇다고 보통 사람이 느낄 수 있을 정도의 날것도 아니었다. 보기와는 달리 감이 예민한 모양이었다.

아니면….

불현듯 얼음덩이를 삼킨 듯한 감각이 엄습했다. 그렇게 시의적절하게, 자신이 힘든 순간 눈앞에 이 남자가 나타났다는 것이, 과연 우연이었을까?

갑자기 심장이 거세게 뛰기 시작했다. 희원은 현성의 순진한 얼굴을 다시 바라보았다.

‘…아니지, 너무 앞서가서 생각할 필요는 없어.’

이전의 경험 때문에 괜스레 예민해진 것일 테다. 자신의 영적 자질을 정확히 모르는 채 살아가는 사람은 아주 많았다. 이현성도 그런 사람 중 하나일 뿐이리라. 그는 생각나는 대로 대꾸했다.

“…그러게요. 아직 그런 계절도 아닌데 한기가 서린 것처럼….”

“희원 씨도 그렇게 생각하시는군요. 실은 가끔 이런 느낌이 들면 꼭 안 좋은 일이 생겨서요…. 근데 이게 무슨 근거가 있는 것도 아니라서, 사람들이 잘 믿어 주지 않더라구요.”

“저도 비슷한 경험이 있어요.”

“수년 전에 경성에서 귀신 소동이 일어났다는 이야기 들어 보셨나요? 저는 그 말 믿거든요. 그 즈음 너무 을씨년스러워서 제가 몸살이 난 줄 알았어요.”

…귀문이 열렸던 날을 말하는 것이다.

수많은 사람들을 희생시켜 만든 주물呪物인 만인혈석滿人血石의 힘을 빌어 이계로부터 온갖 괴물들을 불러들여 일망타진하려는 음모를 세운 이가 있었다. 이 땅의 괴물들은 악마가 아니고, 그저 인간처럼 선한 자도 악한 자도 존재한다는 사실을 등한시한 광신적 그리스도교인의 짓이었다. 희원도 그날의 사건을 잘 알았다.

“…저도 기억나요.”

“그때 경성에 계셨나요?”

홀린 듯 중얼거린 대답에 현성이 의아한 얼굴을 했다. …있었느냐고. 물론이다. 희원은 그때…. 그 모든 소란의 한복판에 있었다. 그저 귀문을 닫을 힘을 얻기 위해 혈석을 흡수했을 뿐인 김독자를 멋대로 악으로 규정했던 자와 검을 맞대고 싸웠다.

“네, 어쩌다 보니…. 워낙 급하게 들러서 그때는 현성 씨 얼굴도 못 보고 갔네요.”

“연락 주셨어도 제가 아파서 누워 있느라 못 뵈었을 거예요. 그래도 아쉽네요…. 아무튼 순간이지만 방금 느낀 한기도 비슷했던 것 같거든요.”

희원이 우뚝 멈췄다. 갑자기 손발이 식고 가슴이 서늘하게 가라앉는 것 같았다. 불길한 예감이 예감에만 그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자꾸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그날, 그자의 공격으로 김독자는 죽었다.

유중혁이 그를 저승에서 끌고 나왔다.

…그 뒤 혈석의 힘이 어떻게 되었는지 김독자는 말해 준 적이 없었다.

그리고….

“희원 씨, 위험해요!”

정신을 차리기도 전, 현성의 거대한 그림자가 희원의 시야를 가렸다.

 

 

 

 

“신세를 졌습니다.”

“별말씀을.”

김독자가 깍듯이 고개를 숙였다. 그의 인사를 받은, 취객 모습을 한 남자가 가볍게 손사래를 쳤다. 사내는 여전히 흐트러진 옷차림에 술 냄새를 풍기고 있었지만, 거리의 취객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그의 전신에서 강한 위압감과 함께 금빛 기운이 흘러나오고 있었던 까닭이었다. 사내를 아래위로 훑어본 중혁이 낮은 음성으로 질문을 던졌다.

“…희랍希臘 주술인가?”

“오, 알아보네? 난 디오니소스. 여기서는 파극사巴克斯라는 이름을 쓰고 있지. 미추홀에 우리 집에서 운영하는 호텔인 ‘올림포스’가 있어서 관리차 와 있어. 김 군하고는, 우리 호텔을 처음 지을 때 토지신 문제로 알고 지내게 되었거든. 유 군도 기회가 되면 놀러 오라고.”

가면을 비스듬히 올려 머리 위에 걸친 유중혁이 삐딱한 자세로 중얼거렸다. 남자는 씩 웃더니 명랑한 목소리로 묻지 않은 말들을 늘어놓고는 품에서 한문으로 적힌 명함을 꺼내 중혁에게 내밀었다. 중혁은 한쪽 눈썹을 까딱했을 뿐 명함에는 손도 대지 않았다. 디오니소스는 어깨를 으쓱하더니 돌아서서 김독자에게 명함을 건넸다.

“미추홀이 근거지인데 여긴 무슨 일로 왔지?”

“현지 사업 확장을 위한 답사라고 해 두지. 자, 유 군, 계속 서 있지 말고 이만 앉지.”

고풍스럽고 이국적인 응접실에는 이미 간단한 안주와 포도주가 준비되어 있었다. 디오니소스를 따라 자리에 앉은 김독자와는 달리 중혁은 여전히 경계하는 얼굴로 의자 곁에 서 있었다. 김독자가 고개를 끄덕이고 나서야 남자는 그의 곁에 걸터앉았다. 디오니소스는 술병을 기울여 두 사람의 잔을 채워 주었다.

“한 잔씩들 해. 김 군 자네 건 무알코올이니 걱정 말고.”

김독자가 머쓱한 얼굴로 잔을 받았다. 마지못한 얼굴의 중혁까지 잔을 들어 올려 다시 건배했다. 이번에는 종이컵이 아닌 고풍스러운 와인 잔이었다. 희랍 신의 이름을 가진 남자는 과연 그 이름대로 애주가인 모양이었다. 포도주스를 들이킨 김독자가 웃었다.

“임장을 오시면서 저부터 찾아오시다니 이거 영광이군요.”

“내가 김 군에게 배운 게 있는데 당연히 그대부터 찾아야 하지 않겠어? 그리고 겸사겸사 다른 용건이 있기도 했고….”

“다른 용건이요?”

“실은 뭐, 내가 말을 꺼내기 전에 이미 이상한 놈을 마주쳐 버려서 대충 짐작할지도 모르겠어.”

“아까 그 괴한을 말하는 건가.”

중혁이 나직이 말했다. 디오니소스가 마뜩잖은 티를 잔뜩 내는 것과는 별개로 진중한 태도였다. 장난기 어린 표정으로 일관하던 디오니소스의 표정도 사뭇 진지해졌다.

“그래. 아다시피 나는 장사꾼이고, 특히나 여관업을 하다 보니 이런저런 소문에 밝거든. 그래서 나름 이게 뜬소문이 아니란 걸 확인하자마자 달려온 건데, 이미 좀 늦었는지 벌써 자네에게 수배령이 내렸더군.”

“…역시, 보기 좋게 걸려든 모양이네요.”

김독자가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흰 얼굴 위 표정은 차분히 가라앉아 있었다. 그는 가만히 빈 잔을 바라보며 침묵했다. 분한 기색을 숨길 생각이 없는 듯했다. 묵묵히 김독자를 지켜보던 디오니소스가 입을 열었다.

“조심해, 김독자. 네 목숨을 노리는 놈들이 아주 많아. 나는 이 땅에 와서 만난 이들 중 그대가 가장 마음에 들어. 부디 오래 볼 수 있으면 좋겠군.”

“영광입니다.”

“미리 경고하는데 올림포스 사람도 믿지 말도록.”

“…그건 네놈을 포함하는 말인가?”

“이렇게 서운할 데가….”

디오니소스가 상처받은 표정으로 눈가를 문지르는 시늉을 했다. 그러나 중혁은 그의 장난에 조금도 어울려 줄 생각이 없다는 듯 깔끔하게 무시했다. 김독자를 보며 눈짓으로 욕을 한 디오니소스가 큼큼, 목을 가다듬었다.

“올림포스는 대기업이라 각자 생각이 달라. 나 개인은 김 군이 잘 되길 바라지만 남들까지 보증 서 줄 수는 없어.”

“파 선생님께서 제 편인 것만으로도 든든합니다.”

“여전히 말 잘하는 친구라니까.”

디오니소스가 씩 웃었다. 그가 손뼉을 치자, 각자의 앞에 놓인 잔이 다시 채워졌다. 잔을 움켜쥔 디오니소스가 일어나며 한 팔을 들어올렸다.

“자, 건배. 거 인상 쓰지 말고. 막잔은 하고 가야 안 서운해.”

“이거 원, 조선 사람이 다 되셨군요.”

“나중에 내가 술 마시고 한 곡조 뽑는 것도 보여주지. 조선의 음주가무도 아주 재미있더군.”

웃는 얼굴로 김독자의 말을 받아친 디오니소스가 술잔을 탁자의 가운데로 옮겼다. 다시 한번, 세 개의 잔이 부딪혔다.

 

 

 

 

“아쉽다. 좋은 술인데 나만 못 즐겼네.”

“…술도 잘 못 마시는 게 별걸 다 부러워하는군.”

“치.”

김독자가 입술을 비죽거렸다. 중혁의 고요한 시선이 김독자를 향했다. 불평을 늘어놓는 것 치고 김독자의 걸음은 비틀거렸다. 고작 한 잔에 취한 것이다. 저런 주제에 샘을 내기는…. 제법 어질어질할 텐데도 내색하지 않으려 애쓰고 있는 것 같았다. 그는 김독자의 손을 가볍게 쥐었다. 그러자 흔들거리던 김독자가 우뚝 멈추어 중혁을 보았다. 중혁은 그 빛나는 눈동자에 담긴 일몰을 바라보았다.

“…중혁아.”

“뭐지?”

“아까 그거.”

“…주화입마에 빠진 자의 허튼 소리일 뿐이다.”

김독자는 ‘그것’이 무엇인지 언급하지 않았지만, 유중혁은 그의 걱정을 읽어낸 듯 단호히 대답했다. 김독자는 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돌아가지.”

어느덧 해가 저물고 있었다. 뉘엿거리며 서편에 걸린 해를 등진 사내가 조용히 말했다. 진중하고 낮은 목소리였다. 김독자는 천천히 눈을 깜박였다. 사내의 등 뒤로 쏟아진 황금빛의 광휘가 그의 주위로 찬란한 테를 그렸다. 그 빛에 김독자가 저도 모르게 눈가를 찡그렸다. 그는 잠시 시선을 내려깔았다가 손으로 차양을 만들어 중혁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

전신에 황금빛 광채를 두른 사내를, 그는 할 말을 잊은 것처럼 한동안 빤히 바라보았다. 마침내 그가 고개를 숙이며 가볍게 웃었다. 빗방울 같은, 또는 문을 두드리는 소리 같은, 그 웃음소리는 늘 중혁의 심장께를 근지럽게 했다.

“……응.”

김독자의 대답을 들은 중혁이 안심한 듯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남자가 살며시 김독자의 손을 잡아끌었다. 사내는 부드럽게 딸려 온 몸이 흔들리지 않도록 붙들었다. 다시 걸음을 뗀 그들이 대로로 빠져나왔을 때였다. 허공을 맴돌던 부적 하나가 김독자를 향해 날아왔다. 반사적으로 검을 뽑으려는 중혁을 제지한 김독자가 손을 뻗었다. 그 부적은 김독자의 손끝에서 가루가 되어 흩어졌다.

“독자 씨!”

“…무슨 일이에요?”

다급한 목소리가 뒤따랐다. 잠시 부적이 사라진 곳을 보고 있던 김독자가 나직이 물었다. 그가 고개를 돌린 곳에는, 부적을 따라 달려 온 희원이 거친 숨을 헐떡이며 서 있었다. 그는 당혹감 가득한 얼굴로 등에 자신보다 두 배는 덩치가 커 보이는 한 사내를 업고 있었다.

“도와줘요. 이 사람, 나 대신 저주에 맞은 것 같아요.”

 

 

 

 

“나 때문이에요. 내가 좀 더 정신 차렸어야…. 아니 애초에 경성에 온답시고 들떠서 이 사람을 만나는 게 아니었는데….”

인적이 드문 산속까지 현성을 옮기고, 저주를 풀 의식을 준비하는 동안 희원이 연신 창백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김독자는 참을성 있게 그에게 질문을 던졌다. 경황이 없는 희원에게서 제대로 된 정보를 얻어내기는 몹시 힘들었지만, 대략적인 정황까지는 파악할 수 있었다. 갑작스럽게 날아든 저주를, 잠시 넋을 놓고 있던 희원보다 먼저 알아챈 이 남자가 막고 쓰러진 뒤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다고 했다.

“저주를 날린 이들은….”

“미안해요, 놓쳤어요. 현성 씨가 쓰러지는 바람에 제정신이 아니어서….”

“괜찮아요. 주흔呪痕을 추적하는 방법도 있으니까….”

창백한 얼굴의 희원이 중얼거림에 가까운 음성으로 대답했다. 김독자는 부드러운 음성으로 희원을 달래고서 부적 여러 장을 꺼내 현성의 주변과 이마, 배 위에 늘어놓았다. 꿇어앉은 자세에서 일어난 그가 합장 자세를 취했다. 그러자 옆에 서 있던 유중혁이 사발에 담긴 검붉은 액체를 내밀었다. 김독자는 그것을 끙끙거리는 현성의 주위에 뿌리고, 바닥에 조금 남은 것을 제 손끝에 묻혔다.

“자, 어디.”

그가 두 손을 모아 합장하더니 천천히 수인을 맺었다. 그리고서는 품에서 흰 부채와 작은 방울 다발을 꺼냈다. 그가 부채를 펼치고 가벼운 걸음으로 드러누운 현성의 곁을 오갔다. 마른 몸에 두른 흰 도포 자락이 장단을 타는 몸짓을 따라 펄럭거렸다.

“영정 가망에 부정 가망, 시위를 하소사

벌높은 처소에 수많은 인간에

가지는 각성에 열에는 열명이요,

옷자락 깃자락 날아든 영정에 묻어든 부정이요,

내처소 내행랑 외처소 외행랑 은하수 곡성소리 상문부정,

해묵은 영정에 달묵은 부정이요

산에 올라 산머구리 들로내려 들머구리

땅머구리 날짐승 들버러지 살생도 부정이요,”

둥, 중혁이 두드린 북에서 둔중한 소리가 났다. 잠시 멈추었던 김독자가 현성의 머리 위쪽에 무릎을 꿇었다. 그는 허공에 대고 방울을 흔들고서 두 손을 모아 절을 하듯 상체를 숙였다 들고 남은 가락을 읊었다.

“우마부정 대마부정 열부정 뜬부정

선후에 부정을 실실히 물리어 주시고,

관재구설 만인구설 제쳐주고

가리제사 요물사물 수사난것 다 제쳐 주소사.”*

“윽…!!”

탁 소리가 나게 접힌 부채의 끝이 현성의 이마를 툭 하고 건드렸다. 그러자 현성이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발버둥 치기 시작했다. 버둥거리던 남자는 말피에 젖은 흙들을 걷어차 댔다. 당혹스러운 표정의 김독자가 뒤로 물러섰다.

“잠시만, 해주解呪가 되질 않는데….”

“…간이 결계도 안 먹히는군.”

멀리 흩어진 검붉은 흙들을 일별한 유중혁이 나직이 말했다. 김독자가 굳은 얼굴로 다시 수인을 맺었다. 그 순간, 현성의 전신에서 은빛의 광채가 흘러나오더니 온몸이 단단한 금속처럼 변화하기 시작했다.

“…이건.”

“현성 씨…!”

“…진정해라, 정희원. 놈은 전혀 위험한 상태가 아니니까.”

놀라 달려들려는 희원의 어깨를 움켜쥔 중혁이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다. 식은땀을 흘리던 현성의 얼굴이 점차 편안해지는가 싶더니, 그가 인상을 찌푸리며 눈을 떴다.

“…여긴.”

“현성 씨! 괜찮아요?”

“희, 희원 씨…? 윽…, 이, 이건 대체….”

아직도 전신이 금속처럼 번들거리는 남자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경악에 찬 눈으로 금속으로 변해 버린 제 팔을 내려다 보았다. 김독자는 잠시 복잡한 표정으로 남자를 바라보다가, 작은 목소리로 진언을 읊조린 후 그의 이마에 손가락 끝을 툭 가져다 댔다.

“거칠게 굴어서 미안합니다. 그런데 이쪽이 시간이 없어서요.”

“…….”

현성의 눈이 허공을 향해 흔들렸다. 김독자는 조용히 그의 머리 위에 떠오른 책자처럼 생긴 것을 바라보았다. 펼쳐진 책자의 판면 위에 젊은 부부의 모습이 나타났다. 그들은 가마솥 바닥에서 조그만 무언가를 주워 들었다. 그것은 아주 작은 아기처럼 보였다. 밥풀을 뭉쳐 놓은 것 같던 아기는 삼 일 만에 쑥쑥 자라 보통의 아기들만큼 자랐다. 아이는 자신이 밥풀에서 태어났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 채 자랐다.

부부는 아이에게 현성이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다.

“…윽, 싫어!”

“…큿…!”

격렬한 거부반응에 김독자가 이마를 짚으며 비틀거렸다. 파직거리는 전류처럼 보이는 것이 김독자의 주변을 흐르고 있었다. 현성은 공포에 찬 시선으로 헐떡이며 그들을 바라보았다. 그의 몸에서도 김독자의 주위로 흐르는 것과 유사한 전류가 흘렀다.

“나에게 무슨 짓을 하는 거예요!”

“…아무 것도 안 했어요…. 이현성 씨. 진정하시고 감정을 가라앉혀 보세요.”

“지금 제가 진정하게 생겼….”

“현성 씨, 괜찮아요. 날 믿고…, 저 사람도 믿어 줘요.”

희원이 조심스레 그에게 다가갔다. 공황에 빠져 있던 현성이 혼란스러운 눈으로 희원을 바라보았다. 희원은 침착하게 현성에게 손을 내밀었다. 머뭇거리던 현성이 희원의 손을 꽉 잡았다. 희원이 약하게 눈살을 찌푸렸다. 금속덩어리가 된 현성의 팔은 차갑게 식어 있었다. 사내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천천히, 머릿속으로 평소 자신의 모습을 떠올려요. 그리고 감정을 가라앉히고…, 네, 잘하고 계십니다. 네…, 천천히 내쉬고, 다시 눈을 떠 보세요.”

“아.”

제 손이 원래 모습대로 돌아온 것을 확인한 현성의 입에서 안도의 한숨이 터져나왔다. 희원도 휴, 하는 나직한 숨을 내쉬었다. 현성은 아직도 믿기지 않는다는 듯 제 손을 내려다보며 주먹을 쥐었다 펴기를 반복했다.

“방금 그건 뭐였죠? 제게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겁니까?”

“설명하자면 조금 깁니다만…. 혹시 불가살이不可殺伊에 대해 들어 보셨나요?”

“불가살이요? 그건 옛날 이야기지 않습니까.”

“그렇죠. 옛날 이야기죠. 머리로 종을 쳐 은혜를 갚은 까치 이야기나, 의붓엄마와 언니에게 괴롭힘을 받다 신비로운 동물들에게 도움을 받고 원님과 혼인하는 처녀에 대한 이야기 같은….”

“하시고 싶은 이야기가….”

“어느 정도 짐작하시는 것 아닌가요? 선생님께서는 남에게 보이지 않는 것이 보이고 들리지 않는 것이 들리시지요. 이런 경우 이유는 두 가지 중 하나입니다. 선생님께서 그것들과 교감할 힘을 가진 영능력자이거나, 아니면 선생님 본인이 그것들 중 하나인 경우지요.”

“제발 알기 쉽게….”

“온갖 문헌 속 괴물과 영물들은 실존합니다. 그리고 이 선생께서도 그것들 중 하나이십니다.”

“그런 황당무계한 말을….”

“방금 겪으신 일은 황당무계하지 않으셨나요?”

“…….”

김독자의 지적에 남자가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시선을 떨궜다. 김독자는 조용히 남자가 고개를 들 때까지 기다렸다. 현성은 여전히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로 중얼거렸다.

“제가 업둥이라는 건 알았습니다. 하지만…. 부모님께서는 그저 누가 집 앞에 저를 버리고 갔다고만 하셨어요.”

“혼란한 시대니까요. 선생님께서 비범한 운명을 타고났다는 걸 아마도 부모님께서는 모르게 하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그럼 제가.”

“예, 가마솥의 밥풀에서 태어난 괴물이라면 필시 선생님은 불가살이입니다. 불가살이에 대해서는 설화가 두 가지가 내려오는데, 쇠붙이란 쇠붙이는 모두 먹어 치우는 이 괴물은 무엇으로도 죽일 수 없었고 오로지 불火로써 죽일수 있다 하여 불可殺, 또는 불을 붙여도 죽지 않고 돌아다녀 결국 영험한 스님의 법력으로 조그맣게 만드는 데 그쳤다 하여 不可殺이라고도 합니다.

조금 전 선생님께서는 희원 씨를 감싸려다 그에게 누군가 날린 저주, 보통 살이라고도 하죠. 그걸 대신 맞으셨습니다. 사실 보통 사람이면 그대로 죽기도 합니다. 선생님께서 영력을 가졌을 뿐 보통의 인간이었다면 역시 스스로 해주하지 못해 얼마 못 가 죽습니다. 하지만 제가 저주를 풀기 위해 치성을 올렸을 때 이미 선생님의 몸은 저주를 이겨낸 상태이셨던 걸로 보이는군요. 그건 선생님께서 어떤 저주도 통하지 않는 육신을 이미 지니셨기 때문입니다. 깨어나지 못하고 괴로워하셨던 건 저주 때문이 아니라 잠자던 능력이 일시에 개방되어 몸이 이에 따르지 못하셨던 것이지요.”

기나긴 말을 혀 한번 씹지 않고 한 번에 다 뱉어낸 김독자가 부채를 접어 소맷부리에 집어넣었다. 현성은 얼이 빠진 얼굴로 김독자를 바라보며 눈을 깜박였다. 김독자가 쏟아낸 정보의 양을 감당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다시 말하자면 선생님께선 불가살이라는 요괴이시라 희원 씨 대신 저주에 맞으셨지만 몸에 아무런 이상도 없고 괜찮으시다는 말입니다.”

“……그럼 전 이제 어떻게 해야.”

“바뀌는 건 없습니다. 어차피 사바세계에는 생각보다 많은 사람 아닌 것들이 돌아다니고 있죠. 평소와 똑같이 지내시면 됩니다. 인간이든 괴물이든, 어차피 세상 사는 이치란 비슷하니까요. 어려운 자는 돕고, 악한 자는 징벌하고, 아이와 노인은 보호하고.”

한참 뜸을 들이던 남자가 물었다. 김독자의 차분한 대답에 현성은 얼이 빠진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김독자도 다른 두 명도 그가 모든 사실을 받아들일 때까지 묵묵히 기다려 주었다. 퍼뜩 고개를 든 현성의 시선이 유중혁과 김독자를 지나 희원에게 닿았다.

“혹시 그러면, 희, 희원 씨나…, 당신들도? …대체 누가, 왜 희원 씨를 공격한 거죠? 뭔가 위험한 일에 연루되신 건가요?”

“…네놈이 자세히 알 필요는….”

허둥지둥 질문을 쏟아내는 현성을 향해 중혁이 위협적인 표정을 지으며 으르렁댔다. 중혁의 기세에 움찔한 현성이 반 발짝 뒤로 물러났다. 짧게 한숨지은 김독자가 중혁의 어깨를 가볍게 건드렸다.

“중혁아.”

“…….”

중혁은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으면서도 김독자의 말에 입을 닫았다. 온화한 표정의 김독자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 현성을 바라보았다.

“이쪽의 유중혁 씨는 영력을 지닌 인간입니다. 저와 희원 씨는, 네. 세상에서 흔히 요괴라 부르는 존재들이죠. 따지자면 선생님과 동류라 할 수 있습니다.”

“그, 저. 아까부터 말씀드리고 싶었는데 그냥 편히 이름으로 부르셔도 됩니다. 그….”

“네, 그럼 현성 씨라고 부를게요. 그리고 제 이름은….”

김독자의 시선이 희원과 중혁의 얼굴을 스쳤다. 유독 사나운 표정의 중혁이 뭐라 말하고 싶은 기색이 가득한 얼굴로 김독자를 쏘아보았다. 싱긋 웃은 김독자가 다시 현성을 보았다.

“…김독자입니다.”

산뜻한 음성에 중혁이 인상을 와락 구겼다.

 

 

 

 

-사실 제가 퇴마사 사무소를 하고 있거든요. 사정이 있어서 지금은 임시 휴업입니다만, 나중에라도 깨우치신 능력에 대해 관심이 생기신다거나, 저번 저주를 날린 자가 궁금해지신다거나, 다른 어려운 일이 생기신다거나 하면 방문하세요. 참고로 이 명함에는 주술이 걸려 있어서 용건을 적고 영력을 주입하면 제게 날아오도록 되어 있으니 절 찾으실 걱정은 안 하셔도 됩니다.

“그나저나 이현성 씨한테는 다행스러운 일이지만 우리에겐 아쉽게 되었네. 체내에서 해주가 다 되어버려서 술사를 추적할 방법이 없어져 버리다니.”

“경솔했다.”

은신처에 도착한 김독자가 한숨을 푹 쉬며 종알거렸다. 유중혁은 대답 대신 참아 왔던 말을 툭 내뱉었다. 신과 겉옷을 아무렇게나 벗어서 던져 두고 편한 자세로 누울 준비를 하던 김독자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소리가 난 쪽을 돌아보았다. 마루에 올라서기만 했을 뿐 평량갓조차 내려놓지 않은 유중혁이 팔짱을 낀 채 우뚝 서서 그를 보고 있었다.

“음?”

“지금 네놈을 찾는 방이 경성 거리마다 나붙었는데 저자의 뭘 믿고 명함을 건네고 이름을 알려 준 거지?”

“뭐, 내 얼굴을 알았다면 정신이 들자마자 지명수배 이야기부터 했겠지?”

“태평하기 짝이 없군.”

“우리 중혁이~ 나 걱정하는 거야?”

김독자가 장난기 어린 얼굴로 실실 웃으며 중혁에게 다가가 팔짱을 꼈다. 대부분 유중혁의 짜증은 이런 실없는 장난과 애교로 무마해 온 김독자였다. 그러나 익숙하다는 듯 짜증 어린 한숨을 쉬는 대신, 유중혁은 갑자기 화가 머리끝까지 오른 얼굴로 우뚝 서서 김독자를 노려보았다. 놀란 김독자가 멈칫하는 사이 그를 벽으로 밀어붙인 유중혁이 쾅 소리 나게 벽을 짚었다.

“네놈은…, 대체 날 뭐로 보는 거지?”

“응? 그, 그야….”

…유중혁으로? 실없는 말이 나가려는 것을 얼른 삼켰다. 그런 소리를 뱉었다가는 정말로 유중혁이 자신을 가만 놔두지 않을 것 같은 직감이 들었다.

“내가 연인의 몸이나 취하고 걱정도 하나 안 하는 한심한 놈으로 보이냐는 말이다.”

“무…, 뭐?”

유중혁이 으르렁대며 김독자에게 한 발짝 다가섰다. 또 유난히 얼굴이 붉어진 김독자가 주춤거렸다. 벽에 등을 딱 붙인 그가 바보처럼 입술을 뻐끔거렸다.

“여, 연…, 연인, 이라니, 그런.”

“…이제 와 무슨 소리지? 먼저 사랑한다고 말한 건 네놈이다.”

“그, 그건 맞지만….”

중혁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짙은 눈썹이 분노로 꿈틀거렸다. 김독자는 할 말을 찾지 못하고 우물쭈물했다. 유중혁의 말이 맞다. 그의 말대로 둘은 서로에게 사랑을 고백했고, 서로 사랑을 나누는 사이였다. 세상에 존재하는 어떤 단어로 이 관계를 정의해야 한다면, ‘연인’이라는 단어보다 더 적절한 단어가 있을 것 같지 않았다.

…그럼에도.

‘부끄럽다고….’

연인. 그 단어는 김독자에게 지독히도 낯간지러운 울림을 주었다. 그 단어 하나로 자신이 유중혁의 무엇이라도 된 것처럼 설레었고, 동시에 유중혁에게 겨우 김독자의 연인 같은 직함을 주어도 되는가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고개 들어, 김독자.”

“…….”

“내 눈 피하지 마.”

“…중혁아, 내 말은…, 읍….”

날 선 명령조의 목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김독자가 망설이는 사이, 중혁은 엉뚱한 오해를 하고 있는 것 같았다. 김독자가 해명하기 위해 고개를 든 순간 사내가 거칠게 입술을 부딪혀 왔다. 말을 하기 위해 벌어졌던 김독자의 입술은 그대로 두터운 사내의 입술에 잡아먹히듯 삼켜졌다. 구태여 따진다면 짐승에 가까운 것은 김독자일 텐데도, 김독자는 자신이 거대하고 사나운 짐승에게 집어삼켜지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흐읍, …응, ……흣.”

입맞춤은 길게 이어졌다. 뒷골이 울리고 다리가 후들거릴 정도로 거칠고 노골적인 입맞춤에 김독자가 비틀거렸다. 그러나 완전히 벽에 등을 댄 상태로 중혁이 어깨를 잡아 누르고 있어 주저앉을 수도 없었다.

“…네놈은 어떨지 몰라도.”

“…….”

“나는 연인이 아니면 이런 짓 안 한다.”

중혁이 물러섰다. 이글거리는 시선을 김독자에게 고정한 채였다. 사내가 물러남과 동시에 몸에 힘이 풀린 김독자가 풀썩 주저앉았다. 그는 흥분으로 물기가 어린 눈가를 훔쳐내는 김독자를 묵묵히 바라보았다. 가늘게 떨리는 몸만 봐도, 남자는 김독자에게 어떤 신체적 반응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손바닥 보듯 알 수 있었다. 평소였다면 기꺼이 흥분한 연인을 취했을 것이다. 한 치의 의심도 없이 자신과 김독자가 같은 감정을 나누고 있다고 확신했을 것이다.

…사내는 눈을 가늘게 떴다.

요동치는 감정을 가라앉히기 위해, 그는 손바닥을 쭉 폈다가 다시 주먹을 쥐었다.

“잘 생각해 보는 게 좋을 거다.”

그 말을 남기고, 중혁은 오두막의 싸리문을 닫고 나가버렸다.

 

 

 

 

잡념을 없애버리기 위해, 유중혁은 달렸다. 분노로 끓어오른 머리가 지끈거렸다. 결계 가장자리를 세 바퀴나 돌고서 아무 나무 둥치에나 걸터앉았다. 머리 위로 쏟아질 듯 빛나는 별들을 올려다보며 나이테 위를 짚고 있던 손에 힘주어 주먹을 쥐었다. 핏줄이 불거진 주먹으로 죽은 나무를 내리쳤다.

정리되지 않은 감정들이 뒤죽박죽 들끓었다. 지끈대는 통증이 내면을 울렁거리며 돌아다녔다. 니르바나를 만난 이후, 중혁의 내면에서는 가라앉혀 두었던 과거의 기억들이 두서없이 떠오르며 그를 괴롭히고 있었다. 김독자에게서 되찾은 전생의 기억은 분명 자신의 것이었음에도 낯설게만 느껴졌다. 때로 그것이 논리적으로 모순임을 알면서도 그는 전생의 자신을 향해 격렬한 질투심을 느꼈다. 가끔 김독자의 애정 어린 시선이 정확히 어디로 향하는가에 대해 의구심이 들기도 했다.

본래 인간에게는 허락되지 않는 긴 세월 동안 축적된 감정은 사내의 정신이 버텨내기 힘들 정도로 무겁고 거대했다. 유중혁은 늘 조바심이 났다. 김독자와 잠시라도 떨어져 있으면 불안감이 그를 엄습했다. 그는 자신이 가지지 못한 김독자의 시간들을 욕망했다. 밤하늘의 별처럼 반짝이는 그 눈동자가 비추는 자신 외의 모든 것을 질투했다. 그 시선에 담기는 것이 오로지 자신뿐이기를 바랐다.

…정상이 아니다, 이런 것은.

사내는 손바닥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조금 전 김독자가 보인 모호한 태도로 촉발된 분노와 불안은 가라앉을 줄을 몰랐다. 이성은 김독자의 태도가 분명해질 때까지 그에게 혼란을 주는 행위를 하지 말아야 한다고 말했지만, 그의 본능은 그 어느 때보다도 김독자를 원했다. 그를 제 품에 안고 엉망이 될 때까지 안아 그 가녀린 몸을 제 흔적으로 가득 채워야만 내면에서 드글거리는 불안감이 사그라들 것 같았다.

“제길….”

그는 이를 갈며 일어섰다. 손등에 힘줄이 돋을 정도로 강하게 주먹을 움켜쥐었다. 발밑을 스멀거리는 어둠을 떨쳐내려 애쓰며 다시 은신처로 걸음을 돌렸다. 시커멓고 끈적한 것이 구두 밑창에 들러붙은 것처럼 다리가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김독자, 아까는.”

이미 불이 꺼진 오두막은 조용했다. 그는 낮은 한숨과 함께 오두막 안으로 들어섰다. 그 좁은 공간의 묘하게 가라앉은 위화감을 깨닫는 데는 수 초도 걸리지 않았다.

중혁은 텅 빈 오두막을 뛰쳐나왔다.

“김독자!”

당혹과 불안이 뒤섞인 음성이 어둠 속으로 퍼져나갔다.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한양선거리 부정거리 중 일부 변형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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