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성야담집(2부)

[중혁독자]경성야담집 1. 황연의현

에쏘휘핑 by 더블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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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픽션입니다. 실재의 인물, 단체, 시대, 국가와 관련이 없습니다.

이 글에 차용된 각종 민담 및 요괴들에 관한 내용은 필요에 의해 각색되었을 수 있습니다.

이 글은 전지적 독자 시점의 2차 창작으로 원작의 내용과 무관하며, 어떤 영리적 목적도 취하지 않았습니다.

京城夜談集

恍然依現

-1-

방황하는 목숨들이여,
‘지금’ 과 같이
황홀하게 빛날지어다.

그해 경성은 퍽 소란하였다.

그리 많은 귀신을 본 것은, 경성 제일가는 이야기꾼도 처음이라 하였다. 필경 귀문鬼門이 열린 것이라, 내로라하는 무당조차 도망가고 숨기에 바빴다. 시커먼 아가리 같은 구멍에서 끝도 없이 삿된 것이 쏟아져 내리니 서양 오랑캐들이 떠들고 다닌 종말의 날이 이것인가 하였다. 아비규환과도 같던 재앙은, 그러나 하루 만에 진압되었다. 용감하게 밖을 내다보았던 이들은 검은 날개에 흰 옷을 입은 자를 보았다 입을 모아 말하였으나 아무도 그가 누구인지를 몰랐다. 사건이 갈무리되어도 충격까지 사라지지는 않는 법이라, 시민들의 마음에 생겨난 공포심은 상상력을 양분 삼아 끝없이 자라났다.

그리하여 경성 바닥에는 종말론이 파다하니 퍼졌으며,

그 중에서도 구원교救援敎라 하는 것이 위세를 떨쳤으니,

지난 ■■년의 일이었다.

 

 

 

 

“근심이 많으시군요.”

인자한 목소리였다. 낡은 도포를 가볍게 팔락이며 걷던 청년이 걸음을 멈췄다. 흰 도포 안에 서양식 정장을 차려입은, 묘한 차림의 남자는 천천히 몸을 돌려 소리가 난 쪽을 보고 눈을 깜박였다. 도포 빛깔에 지지 않을 만큼 흰 손이 제 얼굴을 가리킨다. 저를 부른 것이 맞느냐고 되묻는 듯이. 천진한 빛으로 반짝이는 남자의 눈을 응시하며, 인자한 목소리를 가진 남자가 입을 열었다.

“당신에게 곧 큰 어려움이 닥칠 거예요. 저에게는 보인답니다.”

“…….”

“당신의 근심과 절망, 마음 속 고민들…. 모두 털어놓고 기도하세요. 그러면 고난을 피하실 수 있을 겁니다. 큰 재앙이 오고 있지만…, 기도하면 구제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미륵불께서는 우리 세상을 굽어살피고 계시답니다. 나무아미타불.”

합장을 한 남자가 음성만큼이나 인자한 미소를 띄운 채 작은 종이조각을 건넸다. 모로 고개를 기울였던 청년의 흰 손이 그 종이쪽지를 받아들었다. 그가 그것을 받아쥔 자세 그대로 합장을 하며 고개를 숙였다.

“나무아미타불. 그런데 선생님, 어찌 미륵을 기다리시는 분께서 아미타불을 찾으십니까.”

“예…예?”

“미륵께서는 석가모니 부처님이 떠나시고 56억 7천년뒤에 오시는 분이시지요. 이 56억 7천년이란 숫자는 뭐 말 그대로로 보기도 합니다만 으레 옛 문헌이 그러하듯 그저 큰 숫자를 말함이고 먼 미래라고도 할 수 있음입니다. 이미 석가모니께서 열반하신지도 수천 년이니 사바세계가 어지럽거든 미륵께서 아니 강림하시리란 법도 없지요. 하지만은 아미타불을 따라 극락정토로 가시게 되는 것과 미륵불께서 강림하신 세계에 재생하기를 바라는 것은 다른 일이니, 한 번의 생에 모두를 이루시기는 어렵다고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예….”

한번 물꼬를 트자, 청년은 청산유수로 말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그저 누군가 말 걸어주기만을 기다려 온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그는 누가 끼어들 틈도 주지 않고 요청받은 적 없는 강의라도 하듯 미륵과 아미타에 대한 이야기를 주절주절 늘어놓았다. 인자하던 표정의 남자가 조금 질린 표정을 짓는 것을 보고서야 남자는 자신이 실수했다고 생각했는지 난처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아이고 이거 실례했습니다. 그저 저는 걱정이 되어…. 아미타불과 미륵불도 분간하지 못하는 자가 혹여 자기가 미륵의 환생이라며 혹세무민이라도 하는 것은 아닌지….”

“…….”

“요즘에 그런 사이비들이 성행이라고 하지요. 특히 그날, 귀신 세계의 문이 열리고 하늘에서 요괴가 쏟아진 그 날 이후로 종말이 온다며 겁을 주어 사람들의 돈을 갈취하는 무뢰한들이……, 아, 선생님께서 그러하시다는 말씀은 아니오니 염려 마십시오.”

“…….”

“아이고, 선생님, 제 보기에는 선생님께서 더 안색이 나쁘신데, 혹여 무슨 우려가 있으십니까? 혹시 어떤 사이비에게 위협당하고 계신 것은 아닙니까? 저야 미륵의 화신도 아니옵고 그저 글만 조금 보는 서생이지만 저라도 도움이 되신다면 당장 경찰서로 함께 가서 진술을….”

“아니, 아니오! 내가 바쁘신 선생을 붙잡고 실례했소이다! 가던 길 가보시오!”

남자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했다. 청년은 여전히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눈을 꿈벅거리기만 했다. 그 눈빛은 천진한 듯도 했고 그저 장난기로 가득한 듯도 싶었다. 청년의 눈빛 앞에서 어쩔 줄 모르고 허둥거리던 남자는 경찰서 이야기가 나오자 결국 줄행랑을 놓고 말았다. 남자가 모퉁이를 돌아 사라질 때쯤, 청년은 구깃한 갓을 삐뚜름히 기울이며 혀를 쭉 내밀었다.

“감히 누굴 등쳐 먹으려고.”

“그렇게 쫓아내기만 해서 언제 단서를 잡으려는 건가?”

어두운 골목 안쪽에서, 기척도 내지 않고 걸어 나온 사내가 팔짱을 끼고 물었다. 어둠 속에서 걸어나온 남자는 기척을 지웠던 것이 신기할 정도로 강한 인상을 가진 미남이었다. 청년과는 달리 온통 검은 옷으로 몸을 휘감은 장신의 사내는 넓은 보폭으로 그를 향해 뚜벅뚜벅 걸어왔다.

“어차피 꽝이야. 봐. 아까랑 같은 지라시라구.”

흰 도포를 입은 남자-김독자는 한숨을 내쉬며 아까 사내가 건넨 종이조각을 흔들었다. 그의 사무실에 벌써 스무 장은 모여 있는 것과 같은 전단이 이리저리 나부끼며 팔락팔락 소리를 냈다. 김독자는 입술을 비죽거리며 전단지를 아무렇게나 접더니 못생긴 비행기를 만들어 던졌다. 구깃구깃한 비행기는 제대로 날지도 못하고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길에 쓰레기 버리지 마라.”

“질렸어~. 우리 맛있는 거 먹으러 가자.”

유중혁이 널브러진 종이를 집어 들어 품에 넣으며 잔소리했다. 입술만 빼족거리며 딴청을 부리던 김독자가 중혁의 단단한 팔뚝에 매달려 칭얼거렸다. 중혁은 한심한 것을 보는 눈빛으로 김독자를 쏘아보았다.

“네놈. 의뢰비를 선금으로 받은 걸 잊었나.”

“그러니까~. 이미 돈은 받았으니 슬렁슬렁 하면…….”

“될 거라고 생각하나?”

중혁의 얼굴이 와락 구겨졌다. 되살아난 뒤로 거짓말처럼 다시 놈팽이가 된 김독자는 부잣집에 들러붙은 잔챙이 요괴를 요란스레 퇴치하고 거액을 뜯어내는 등 사기꾼 같은 짓을 일삼고 다녔다. 사무실에 몽둥이 들고 달려오는 사람이 없는 게 기적이었다. 이번 의뢰인은 무려 제 어머니였는데도 그는 아무렇지 않게 거액의 사례금을 요구했다. 놀라운 점은 이수경이 김독자가 부른 돈을 일시에 선금으로 지불했다는 사실이었다. 선금을 받은 김독자는 평소보다도 더 빈둥거리며 일을 하는 둥 마는 둥 하고 있었다. 하여튼 별난 데가 있는 모자였다. 중혁은 제게 들러붙은 김독자를 떼어내고 냉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성실하게 일해라, 김독자.”

“당과 하나만 먹고.”

“길에서 파는 음식 먹지 말라고 했을 텐데.”

“아, 하나만.”

“야참으로 만들어 줄 테니 참아라.”

애원하는 눈빛을 보내는 김독자를 빤히 노려보던 유중혁이 낮게 한숨지었다. 그러나 유중혁이 한 발 물러 주어도 김독자는 불만스레 볼을 부풀리더니 터진 입을 종알거렸다.

“어허, 무릇 가두미식街头美食에는 가두미식만의 맛이 있거느으으으….”

“까불지 마라.”

“끄브는근 느즈…. 으른블뜨그으므흐는그으으아!”

쫑알대는 김독자를 보다못한 유중혁이 그의 뺨을 잡아 늘였다. 그러나 김독자는 양 볼을 붙들려서도 쉴새없이 입을 나불거렸다. 중혁이 손을 놓자, 쭉 잡아당겼다 놓은 말랑한 볼은 단숨에 제자리로 돌아가며 벌겋게 부어올랐다. 양 뺨이 붉어진 김독자가 낑낑대는 것을 가만히 보던 유중혁의 입가가 작게 실룩거렸다. 저게 지금 비웃어? 찔끔 새어나온 눈물을 닦아낸 김독자가 중혁을 향해 눈을 흘겼다.

“비유야. 아빠 볼의 원수를 갚아다오.”

[바아!]

김독자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그의 손가락 끝에서 조그만 솜뭉치 같은 것이 포르르 날아올랐다. 점점 부피를 키운 솜덩어리는 금세 축구공만한 크기가 되었다. 눈살을 찌푸린 중혁이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아기 도깨비를 치우려 손을 뻗었다. 그러나 그의 손보다도 커진 도깨비는 어느새 중혁의 상체를 감싸듯 덮쳐버렸다. 도깨비의 복슬복슬한 털 너머 혀를 쑥 내민 김독자의 얼굴이 보였다. 중혁이 이마를 찌푸렸다.

“비유, 쓸데없는 수작 부리지 말고 비켜라.”

“바앗! 바아앗!”

뒷걸음질로 밀려난 중혁이 짜증 섞인 투로 말했다. 사내는 한손으로 비유를 밀어냈지만 손바닥에는 전혀 힘이 들어가 있지 않았다. 유중혁이 비유와 실랑이하는 사이 가까운 노점으로 쪼르르 달려간 김독자는 잠시 후 싱글거리며 설탕을 바른 과일 꼬치를 양손에 쥐고 돌아왔다.

“기어이 사 왔군.”

“뭐야. 너도 먹으려고? 자. 아~해봐. 아~.”

비유에게 하나를 건네 주고, 제 몫의 과일 꼬치를 날름거리던 김독자가 얄밉게 히죽거리며 중혁에게 제가 먹던 꼬치를 내밀었다. 잠시 미간을 찡그리고 김독자를 보던 사내가 한발을 성큼 김독자에게로 내디뎠다. 뭐야, 진짜로 먹게? 너 이런 거 잘 안 먹으니까 안 산 건데 먹고 싶음 말하지…. 실없는 소리를 쫑알거리는 김독자의 옷깃을 잡아챈 중혁이 그대로 반들거리는 입술에 제 입술을 겹쳤다. 깜짝 놀란 김독자가 버둥거렸지만 잡아먹을 듯한 입맞춤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다.

“읍…, 응…, 윽!”

중혁은 반대쪽 손으로 김독자의 한쪽 팔을 움켜쥔 채 진득하게 혀를 얽었다. 중혁의 기세에 밀려난 김독자가 벽 쪽으로 뒷걸음질 쳤다. 인적이 드문 골목에서는 점막이 마찰하는 소리가 유독 크게 들렸다. 가쁜 숨을 할딱이며 발버둥 치던 김독자의 몸은 어느 순간 힘이 쭉 빠져나간 것처럼 축 늘어졌다.

“…달군.”

“…너…, 애 보는 데서 뭐 하는 거야.”

[바아아~ 바앗~~ 바아아아~]

태연한 표정으로 입가를 혀로 쓸어내는 중혁을 향해, 귀까지 새빨개진 김독자가 물기 어린 눈을 흘겼다. 겨우 중심을 잡은 그가 옷소매로 입가를 훔쳐 냈다. 비유는 이상한 노래를 부르며 약간 떨어진 곳에서 딴청을 부리고 있었다. 그러나 김독자의 핀잔에도 유중혁은 태연한 표정이었다.

“저 녀석도 알 거 다 아는 나이다.”

“우리 비유 아직 세 살이거든?”

“도깨비는 세 살이면 성체다.”

“웃기지 마! 우리 비유는 아직 아기라고.”

김독자가 유중혁의 지적을 부정하며 도리질을 쳤다. 김독자가 귀를 막는 바람에 세로로 가늘어진 비유가 작은 비명을 질렀다. 둘을 한심하게 바라보던 중혁이 한숨을 툭 내뱉고 어깨를 으쓱했다.

“어쨌든 더 낭비할 시간이 없다. 단서를 찾아야….”

순간 중혁이 말을 멈췄다. 묘한 불안감을 느낀 그가 굳은 표정으로 김독자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아니나다를까, 김독자는 특유의 기분나쁜 미소를 실실 흘리며 키득키득 웃고 있었다. 대번에 사내의 표정이 굳어졌다. 저런 표정을 할 때면 어김없이 김독자는 괴상한 계략을 떠벌거리고는 했다. 불길함을 느낀 유중혁이 빠르게 입을 열었다.

“미리 말해 두지만….”

“단서라고 했지.”

히죽 웃은 김독자가 품에서 꼬깃꼬깃 접힌 종이를 꺼냈다. 불안으로 굳어진 중혁에게 그가 싱글거리며 그것을 내밀었다. 의심 가득한 시선으로 종이를 받아든 중혁이 그것을 펼쳤다. 전단의 내용을 확인한 사내의 표정이 살짝 일그러졌다.

“여기.”

신도大대모집. 모여라, 어여쁜 衆生중생이여, 大慈大悲대자대비하신 涅槃니르바나님께서 인도하는 樂園낙원으로-. ■■년 ■월 ■일 正午정오 塔谷公園탑골공원 八角亭팔각정 앞에서 救援敎구원교 大法會대법회 開催개최.

김독자의 흰 손가락이 누릿한 종이 위를 가로질러 일시와 장소를 명기한 작은 글씨를 지나 구원교라는 세 글자 위에 멈췄다. 짙은 눈썹을 한데 모은 유중혁이 차분한 음성으로 물었다.

“이건 어디서 났지?”

“아까 그 당과 가게에서. 포장지로 쓰고 계시길래 집어 왔지.”

독자가 당과를 입안에서 굴리며 씩 웃었다. 포장지는 손님들이 알아서 쓰도록 놓여 있었고, 사장은 누가 포장지를 얼만큼 집어 가든 말든 관심도 없었다. 누군가 종이가 필요하지 않냐며 버리다시피 떠안기고 갔다고 그는 말했다.

“생각할 수 있는 건 두 가지. 정말로 이런 식으로 자연스럽게 전단을 퍼뜨리는 사람이 거기에 종이를 두고가서 우연히 점주가 사용했거나….”

“…그 점주가 교주로부터의 연락책이거나.”

“응. 일단은 대법회 전에 한번 구경이나 가볼까 하는데.”

중혁은 김독자의 손에서 반 정도 먹은 당과를 잡아챘다. 사내는 김독자가 돌려달라고 손을 뻗기도 전에 남은 것을 전부 이로 잡아뜯다시피 해서 입에 털어 넣고는 와작와작 씹어 삼켰다.

“뭐 하는 거야! 내 당과!”

“이상한 건 안 넣었군.”

“딱 봐도 말단인데 그런 짓까지 하겠냐고! 아~ 내 당과~.”

“네놈은 더 먹으면 또 밥을 적게 먹을 테니 안 된다.”

울상이 된 김독자를 가볍게 무시한 남자가 빈 꼬치를 길가의 휴지통에 던져넣었다. 사내는 큰 보폭으로 성큼성큼 사무소 쪽으로 향했다. 툴툴거리며 뒤따라오는 김독자를 확인하며, 남자는 머릿속으로 저녁 메뉴를 생각했다. 점포가 장사를 접으려면 저녁은 되어야 할 것이고, 그 전에 간단하게 식사를 해서 배를 채워 둘 필요가 있었다. 역시 이럴 때는 만두인가…. 미리 빚어서 차가워지도록 주술을 걸어 둔 것이 있으니 간단하게 찌기만 해도 괜찮은 식사가 될 것 같았다. 좋아하는 음식을 먹을 생각에 즐거워진 사내의 입꼬리가 가볍게 꿈틀거렸다.

 

 

 

 

“구원교요?”

김독자는 시큰둥한 눈으로 맞은편에 앉은 여자를 바라보았다. 기본적인 이목구비는 김독자와 몹시 닮은, 그러나 무표정할 때의 김독자보다도 훨씬 서늘하고 냉랭한 얼굴을 한 여자가 맞은편에 앉아 있었다.

“그래. 네 도움이 필요해.”

“제게 도움을 다 구하시고, 별일이시네요.”

이수경은 예의라고는 찾아보기 힘든 아들의 태도에 토를 달지 않고 차를 한 모금 들이켰다. 투박해 보이는 다기에 담긴 찻잎은 꽤 상등품이었다. 입에 들어가는 것이라면 물 한 방울도 허투루 하지 않는 유중혁이 골라 둔 것이겠지. 얼핏 김독자가 건성으로 우린 듯하던 우롱차는 향기로웠고, 찻잔은 아직 따뜻했다. 차를 우리는 요령이나 끓인 물로 컵을 미리 데우는 행동을 김독자가 스스로 터득했을 것 같진 않았다. 아마도…, 이 또한 유중혁이 만든 김독자의 습관이겠지.

상념을 떨쳐내기 위해 이수경은 눈을 감았다가 떴다.

“보수는 원하는 만큼 줄 테니 걱정 말고.”

“… 미리 말해 두지만, 가족 할인 같은 건 없어요. 본거지만 찾아 드리면 되는 거예요?”

“찾아 주면 나머진 내가 알아서 하마.”

서운함조차 비치지 않는 얼굴이었다. 김독자가 이런 식으로 나올 줄 이미 알았던 사람 같았다. 미지근한 수경의 반응에 김독자가 뚱한 얼굴로 고개를 기울여 낡은 전단을 바라보았다. 근래 각종 사적 모임에 대한 단속이 심해지면서 종교단체라고 불릴 만한 것들은 전부 어디론가 사라져 버린 상태였다. 자신에게 찾아왔다는 건…, 이수경이 이끄는 ‘방랑자’들의 힘만으로는 무리였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렇다면….

“교주가 정신오염을 시키나요?”

“…….”

이수경은 묵묵히 김독자를 바라보았다. 김독자는 무응답을 긍정으로 이해했다. 하긴…, 정신오염을 시키는 부류라면 김독자가 아니고는 상대하기 힘들 것이다. 김독자는 태생적으로 세뇌나 침식 같은 부류의 저주에 강했다. 그 능력의 유래는 누구도 알지 못했다. 요괴와 인간의 혼혈이라는 특이한 태생으로 인해 육체와 정신, 영혼 간의 연결이 요괴와도 인간과도 같지 않기 때문일 것이라고 막연히 추측할 뿐이었다. 교주의 능력이 어느 정도인지는 아직 모르지만, 김독자라면 그에게 대항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방랑자들’에 이탈자가 생겼어. 사실 그 이탈자 자체야 종종 생겼지만…. 이번엔 그 수도 많고 정황도 이상해. 모두 하루아침에 사람이 변한 것처럼….”

“굉장히 광범위하고 지속적인 저주를 쓸 수 있는 부류인가 보군요. 그건 확실히 성가시네요.”

말을 마친 김독자가 잠시 입을 다물었다. 그는 무언가 고민하는 듯 잠시 침묵했다. 김독자가 아무 말이 없자 이수경 쪽에서 먼저 입을 열었다.

“…역시 이건 너라도 어려운 거니?”

“아뇨. 그저 위험수당을 얼마나 매길지 생각 중이었어요.”

건성으로 대답한 그가 몸을 일으켰다. 사무용 책상으로 걸어간 그가 책상에 놓인 수첩과 만년필을 집어 들었다. 그는 잠시 무언가를 끄적이더니 휘갈긴 글씨가 적힌 페이지를 아무렇게나 찢어 이수경에게 내밀었다.

“전부 선불로.”

“……내일까지 준비하마.”

“좋아요.”

이수경은 군말 없이 김독자가 내민 종이를 받아 챙겼다. 그리고는 김독자가 축객령을 내리기도 전에 먼저 일어났다. 잘 지내렴. 다시는 돌아보지 않을 사람마냥 인사를 건넨 여인은 그대로 사무실 문을 열고 사라져 버렸다. 김독자는 닫힌 문을 한참 노려보다가 얼굴을 양 손바닥에 파묻었다.

“…젠장.”

잠시 후 고개를 든 그의 표정은 일그러져 있었다. 복잡한 생각들이 수 초 만에 머릿속을 마구 헤집고 돌아다녔다. 이수경은 정 없이 구는 김독자를 타박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제 쪽에서 먼저 보수 이야기를 꺼냈다. 그리곤 나가란 말도 꺼내기 전에, 자신이 불편한 사람인 걸 안다는 양 나가버린다. 본래 사대문 안이 근거지였으면서 김독자가 경성에 머무르게 되자 아무 말 없이 산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김독자라고 해서 딱히 그가 곁에 있길 바란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그저 그는 이 여성이 불편해서 어쩔 줄을 몰랐다.

이수경이 김독자를 혼자 둔 것이 고의가 아니라는 사실은 김독자도 잘 알았다. 오히려, 그의 행동은 김독자를 지키기 위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을 알기에 더욱 김독자는 이수경이 껄끄러웠다. 애초에 출산 때문에 요력이 약해지지만 않았어도 그가 그런 남자에게 매여 살 필요도 없었고 봉인 당할 일도 없었다. 그러니, 이수경이 봉인된 것은 전적으로 김독자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 봉인 때문에 김독자는 어린 나이에 혼자 떠돌면서 갖은 고생을 했다.

그가 봉인에서 풀려나고도 수십 년이 흘렀지만 여전히 김독자는 이수경에게 온전한 감사도 온전한 원망도 가지지 못한 채 삐거덕대기만 했다. 그리고 그런 김독자에게 이수경은 아무것도 바라는 게 없는 사람인 양 굴었다. 이렇게 김독자에게 무언가를 부탁하러 나타난 것 자체가 거의 처음 있는 일이었다. 어머니의 부탁이니 흔쾌히 받아들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수경은 애초에 그런 건 기대도 하지 않았다는 듯 먼저 선을 그었다. 오기가 나서 높은 사례금을 불렀지만 아무런 불만도 표현하지 않았다. 시세의 몇 배는 되는 금액이라는 걸 그가 모를 리 없었다.

“생각이 많군.”

김독자는 감았던 눈을 떴다. 어느 틈엔가 안쪽에서 나온 유중혁이 다기를 정리하고 있었다. 유중혁은 늘 이수경이 나타나면 자리를 비웠다. 그가 여러 번 환생하는 동안 이수경은 내내 봉인된 상태였고, 겨우 두 번째 대면이니 그도 나름 불편함이 있는 모양이었다. 이수경은 이수경대로 항상 얼마간의 서먹함을 가지고 유중혁을 대했다.

“너도 같이 들어도 상관없는 얘기였는데.”

“너희 어머니께선 내가 별로 마음에 들지 않으시는 것 같아서.”

“또 그런 소릴.”

유중혁은 전에 던졌던 실없는 농담을 다시 입에 올렸다. 김독자는 가볍게 중혁의 말을 웃어넘겼다. 설령 이수경이 이제 와 유중혁을 마뜩잖아 한들 어떻단 말인가. 김독자가 누구와 만나 어떤 관계를 맺든 그것은 이수경이 상관할 바가 아니었다. 김독자도 그런 간섭을 받을 나이는 지나버렸고, 김독자의 인간관계에 대해 첨언할 만큼 이수경이 살가운 어머니도 아니었다. 애초에 이수경이 김독자를 키웠다고 볼 수 있는 건 김독자의 생에서 아주 짧은 기간뿐이었다.

“김독자. 이수경은….”

“어머니는 내가 제일 잘 알아.”

“…….”

단호한 말투에 뭔가 말하려던 중혁이 입을 다물었다. 가라앉은 표정이 된 김독자가 휭하니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중혁은 가만히 그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낮은 한숨을 내쉬었다.

 

 

 

 

두 사람은 기척을 죽인 채 노점을 정리하고 어디론가 향하는 상인의 뒤를 밟았다. 점점 으슥하고 외딴 지역으로 나가던 남자는 경성의 외곽에 이르더니 하염없이 산길을 올랐다. 그리고는 마침내 허름한 주택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승복처럼 보이는 옷을 입은 사람들이 그를 맞아 주었다. 합장으로 인사를 나눈 남자는 오두막 안으로 사라져 버렸다. 다 쓰러져 가는 듯한 그 오두막의 뒤편은 깎아지른 절벽이었고, 주변으로는 사람 허리 높이까지 오는 울타리가 빙 둘러져 있어 문을 통하지 않고는 들어가기가 녹록지 않아 보였다. 문지기 역할을 하는 듯한 승복 차림의 남자들은 노점상 주인이 들어가고 나자 싸리문을 닫고 빗장을 걸어버렸다.

“수상한 냄새가 풀풀 나는데~.”

“어디로 보나 낙원과는 거리가 멀어 보이는군.”

김독자가 동의의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올라타 있던 나무에서 뛰어내린 두 사람은 잠시 더 주변을 서성거려 보았다. 따로 개구멍 같은 게 보이지는 않았다. 김독자가 살짝 이마를 찌푸리고서 오두막 위의 하늘을 노려보았다.

“결계가 쳐져 있어. 위에서 잠입하기도 어렵겠어.”

“어차피 들어간다 해도 교주가 있을지는 알 수 없다.”

“응. 오늘은 이만 돌아가야겠어. 보신각 법회인지 뭔지 하는 걸 구경가야겠는걸.”

중혁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둘은 미련 없이 돌아서서 그 자리를 떠났다. 풀숲을 밟는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멀어지고 나서야 누군가 그 오두막을 빠져나왔다. 해가 떨어져 제법 스산한 날씨였으나 그의 차림새는 헐벗은 것에 가까웠다. 미려한 몸선이 그대로 드러나는 이국적인 옷차림에 중성적인 외모를 가진 남자는 깊은 어둠에 잠긴 숲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와 주었구나. 유중혁.”

그는 조용히 중얼거렸다. 아름다운 얼굴에 살며시 미소가 피어올랐다. 상기된 얼굴을 한 남자는 잠시 그대로 어둠을 응시하다가 요요한 걸음으로 유중혁과 김독자가 사라진 반대 방향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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