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에 있었다.

01. 세상이 뒤집히던 날

제천독자

제천독자 by 도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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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com/playlist?list=PLy97-Wso6bnzxGxoqYYIPXXg4ArI1wjOD&si=hnH-QF9we8eE6CdD

플레이리스트와 함께 감상하실 수 있습니다.


김독자는 대한민국의 흔하디흔한 직장인 남성이었다.

 

월요일의 오전 6시는 혐오하되 금요일의 오후 6시는 사랑하라는 말을 그 누구보다 착실히 따르고 있는 아주 보통의 직장인 김독자씨의 삶은 대체로 평범하고 흔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단 한 가지 흔치 않은 점이라고 한다면 동성의 애인을 두고 있다는 점이었으나 요즘은 워낙 더 큰 대한민국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보니 별다른 흠도 아니라고 말할 수 있다.

조금은 특별한 동성의 애인 손제천씨는 꽃집을 운영하는 자영업자다. 덕분에 김독자와 손제천이 함께 사는 집에서는 언제나 계절에 맞는 풋풋하고 상그러운 향기가 가득했다. 햇수로 꼬박 사 년이 되는 시간을 보내며 늘 좋을 수만은 없지만 안 좋았던 순간이라곤 단 한 번도 없이 소중하고 두터운 사랑을 겹겹이 쌓아나갔다.

 

평소와 다를 것 하나 없는 월요일이었다.

 

일어나기 싫다며 침대 속으로 파고드는 김독자를 손제천이 어르고 달래 끄집어내고, 밥을 먹였다. 죽상이 된 얼굴에 몇 번이나 입 맞추며 여보, 나 먹여 살려야죠. 하고 장난스레 불쌍한 척을 하면 어느새 의젓해진 걸음걸이를 하고선 비장해진 채로 셔츠를 고르고 있었다. 마지막까지 손제천의 다정한 손길을 받으며 집을 나선 김독자는 만원 지하철에 콕 박혀 이리저리 치이다 간신히 내려야 할 역에서 내릴 수 있었다. 꾸역꾸역 5번 출구로 나와 눈부신 하늘을 한 번 쳐다보고, 그 옆에서 위용을 뽐내고 있는 미노 소프트 건물을 또 한 번 쳐다봤다. 그리고 걸음을 옮겼다. 아니, 옮기려고 했다.

 

어.

 

한순간이었다. 급작스레 전신을 감싼 어지러움에 몸을 크게 휘청이고, 하늘과 땅이 뒤바뀌던 모습을 마지막으로 눈을 감았다. 김독자가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욱신거리는 온몸과 주변에서 느껴지는 써늘한 기운에 쓰러져서 병원에 왔구나, 하는 사실을 짐작케 할 뿐이었다. 지금이 몇 시지? 쓰러지면서 부딪쳤던 건지 금이 간 스마트폰 액정을 툭툭 치자 10시를 2분 넘긴 시간이 김독자의 시야를 가득 채운다.

 

“좆됐네.”

 

이미 알림창에는 부재중 전화가 다섯 통이나 쌓여 있었다. 발신자는 전부 ‘한명오 부장’. 오늘 오전까지 최대한 빠르게 넘겨줘야 하는 파일이 있는데 무단으로 결근을 했으니 지금 열이 오를 대로 올랐을 것이다. 다급해진 마음에 허둥지둥 침대를 내려가는데 때마침 지나가던 간호사가 그를 만류했다. 마침 잘 됐다 싶어 열심히 제 사정을 주절거렸다. 요약하자면 빨리 가야 하는 상황인데 혹시 직장에 제출할 서류도 함께 발급받을 수 있냐 하는 것이었다. 그러자 간호사는 익숙한 듯 고개를 끄덕이며 김독자를 다시 침대로 돌려보냈다.

 

“필요한 서류가 있으시면 발급해드릴 수 있는데요, 신고자분 말씀 들어보니까 갑자기 쓰러지셨다고 하셔서요. 맞으세요?”

“네, 맞아요.”

“평소에 자주 쓰러지시는 편인가요?”

“아뇨, 처음입니다.”

“그럼 혹시 모르니까 추가 검사까지 하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네? 아뇨, 괜찮아요. 멀쩡한데요, 뭐.”

“멀쩡하던 분이 갑자기 쓰러지시는 게 더 큰 일인 거 아시죠?”

“…넵.”

“우선 응급실 수납 먼저 도와드릴게요. 수액 다 맞고 나면 저쪽에서 수납하시고 대기실 가서 기다리시면 돼요.”

“넵.”

 

단호한 눈빛에 깨갱 꼬리를 말았다. 에휴, 내 팔자야. 그는 간호사가 떠난 자리를 허망하게 바라보다 휴대폰 화면을 꾹꾹 눌렀다. 몇 번의 신호음 끝에 엄청난 고성이 터져 나왔다. 김독자씨 지금 어디야!! 미쳤어!! 그 뒤로 온갖 욕설이 쏟아져나오다 결국 그가 제풀에 지칠 때쯤 김독자도 입을 열 수 있었다. 예에, 부장님. 다름이 아니라 제가 지금……

 

“아휴, 씨. 내 월찬데 쓰기 한번 드럽게 힘드네……”

 

그래도 아프다니까 좀 양심은 찔렸나 보지. 통화 내내 ‘의사의 권유’, ‘회사 건물 앞에서 크게 쓰러져’라는 말을 강조한 덕분에 막판에는 제법 유해진 목소리로 몸조리나 잘하라고 말했던 것을 떠올렸다. 그나마 오늘 오전에 넘길 건만 빼면 바쁠 일이 없어서 다행이기도 했다.

 

“김독자님 수납 도와드릴게요.”

“네. 아, 근데 MRI까지 해야 하나요? 빨리 받을 수 있는 검사만 하고 필요하면 추가적으로 더 하고 싶은데요.”

“그럼 CT 촬영 우선적으로 도와드릴게요. 수납 끝나셨고요, 본관 1층에 있는 CT실 가시면 바로 접수 가능하세요.”

“감사합니다.”

 

다행이다. MRI 그게 돈이 얼만데… 속으로 크게 안도하며 주섬주섬 가방과 겉옷을 챙겼다. 제천이한테 연락해야 하나. 어수선한 복도를 거닐며 곰곰이 생각했다. 지금이 오후 두 시니까, 이따 연락하자. 결과 듣고 하면 되겠지, 뭐. 피식 웃음을 흘리며 제 나름의 결론을 지었다. 어디 연예인의 SNS에 소개돼서 요즘 한참 장사가 잘되고 있는 터였다. 괜히 걱정을 끼칠지도 모르겠다는 판단이었다.

 

십 분 정도를 헤매다 도착한 본관은 어쩐지 응급실보다 훨씬 정신없는 느낌이 들었다. 접수하려고 하는데요. 네, 성함이요. 김독자입니다. 네,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휠체어를 타고 돌아다니는 사람부터 링거대에 의지해 가만히 서 있는 사람. 누군가는 졸린 듯했고 또 누군가는 울고 있는 아이를 달래고 있었다. 어쩐지 넋이 나간 채로 오도카니 의자에 앉아있는 사람도 있었다. 그는 다양한 생과 사의 모습을 무감하게 바라보느라 제 이름이 몇 번이고 불렸을 때야 허둥지둥 자리에서 일어날 수 있었다.

 

“김독자님, 안 계세요?”

“아! 죄송합니다, 제가 깁독잡니다.”

“네, 따라오세요.”

“네, 네.”

“이제부터 CT 촬영하실 건데요, 액세서리 착용한 거 있으시면 다 빼시고, 이걸로 갈아입고 나오세요.”

“네.”

 

차례로 셔츠와 바지를 벗고 대충 개켜 사물함에 쑤셔 넣었다. 간호사가 주고 간 촬영용 병원복으로 꿰입으며 이거 입고 자면 불편하려나. 같은 감상이나 했다. 쭈뼛거리며 탈의실을 나오자 간호사는 따라오라는 듯 먼저 걸음을 옮겼다.

 

“여기 누우시고, 움직이지 마세요. 촬영 끝나면 나가셔서 옷 갈아입으시고 한 층 올라가시면 있는 진료실 쪽 대기실에서 기다려주세요.”

“넵.”

 

저 간호사는 하루에 몇 번이나 저런 말을 할까? CT 촬영하는 사람은 대체 하루에 몇 명이나 되려나. 시답잖은 생각을 하며 이리저리 자세를 바꾸다 보니 어느새 방 건너편에서 끝나셨습니다, 하는 음성이 들려왔다. 옷을 갈아입고, 억겁의 시간을 기다려 엘리베이터를 탔다. 그리고 고작 한 층을 올라갔다. 김독자는 진료실 근처 의자 아무데나 주저앉아 생각했다. 앞으로 건강검진 열심히 받아야지. 한참의 기다림과 의도치 않은 병원 투어 덕분에 새로운 깨달음을 얻었다. 제때 건강을 챙기지 않은 직장인은 불시에 피 같은 월차를 써서 휴식 같지도 않은 이런 검진을 진행해야 한다는 것을…… 어느새 오후 세 시가 다 되어가고 있었다. 할 것도 없는데 괜스레 휴대폰을 만지작거렸다.

 

“김독자님, 진료실 들어가실게요.”

 

너무 심심한 나머지 게임이나 하나 다운받을까 하던 순간이었다. 간호사는 고저 없는 목소리로 말하곤 김독자보다 꼭 한발을 앞서 걸었다. 큰일이야 있겠어. 그래, 오늘은 그저 평소와 다름없이 흘러가는 하루 중 일어난 독특한 사건에 불과할 것이다. 그는 변함없을 내일을 굳게 믿으며 부지런히 발걸음을 옮겼다. 대기실에서 진료실로 향하는 복도가 유독 길었다.

 

도착한 진료실에서 자리를 잡고 앉은 의사는 곧장 무미건조하게 몇 가지를 물었다. 식사는 했는지, 날이 참 좋지 않은지. 그런 걸 묻듯 참 일상적인 어조였다. 그래서 김독자도 편안한 마음으로 답했다. 일정한 키보드 소리가 이어졌다.

 

“두통이 있다고 하셨는데, 얼마나 오래되셨나요?”

“몇 년 정도요. 안 그래도 그것 때문에 병원을 다니고 있어요. 신경성 두통이라고…”

“그럼 구토는 자주 하시는 편인가요?”

“아, 스트레스에 좀 예민하다보니까. 가끔 머리가 너무 아프면 울렁거리긴 하더라고요. 철분 수치가 낮으면 그럴 수 있다고 하는 걸 들었는데 정말인가요?”

“네. 그러실 수 있습니다.”

 

오늘부터 쇠라도 씹어먹어야겠네. 벌써부터 귓가에 손제천의 잔소리가 맴도는 기분에 미간이 절로 찌푸려졌다. 의사는 잠시간 침묵하더니 다시 질문을 이어나갔다.

 

“이번에 쓰러진 것 말고도, 기절하시거나 쓰러지신 적 있나요?”

“아뇨, 쓰러진 건 이번이 처음이에요.”

“팔다리가 저리고 마비되는 듯한 감각은요?”

“왼쪽 다리가 가끔… 근데 그건 제가 회사원이라 자세가 안 좋아서 그런가 보다 했는데. 다들 그러지 않나요? 심각한 것도 아니잖아요.”

 

귓가에 누군가 북을 크게 치는 것처럼 둥, 둥. 하는 고동이 울려 퍼졌다. 의사의 질문은 여전히 짧고 간결한데, 김독자의 변명은 점점 길어졌다. 사뭇 공격적이기까지 한 어투로 말을 맺었다.

 

“가끔씩 앞이 잘 안 보인 적은 있으세요?”

“…… …. 정말 가끔요.”

“환자분. 이게 환자분 검사 결과거든요. 뇌 CT 결과지예요. 여기. 보이세요? 하얀 게 종양입니다. 약물로 치료할 수 있을지 어떨지, 어디까지 퍼져있는 건지 더 자세한 건 MRI 봐야 알 것 같거든요. 근데 일단 종양 생긴 게… 우선 최대한 빨리 보호자 분께 연락해주세요.”

 

숨이 턱 막혔다. 지금 무슨 말을 들은 거지. 의사는 예상한 반응이라는 듯 한 치의 변화도 없이 담담히 김독자를 쳐다봤다. 김독자만이 이질적으로 세상을 부유하고 있었다.

 

“……뇌종양이요?”

“네. 확실한 건 봐야 아는 거니까 일단은 너무 겁먹지 마시고, 보호자 분이랑 연락되시면 앞쪽에서 접수하세요. 바로 MRI 촬영하러 가시면 됩니다.”

“아, 알겠습니다.”

 

그는 쫓겨나듯 나온 진료실 앞에서 한참을 멍하니 서 있다, 비척비척 걸음을 옮겼다. 그러다 몇 발 되지 않아 벽에 기대 미끄러지듯 주저앉고 말았다. 몇 분을 그렇게 찬 복도에서 마음을 가라앉히자 다시 일어설 기운이 났다. 확실한 건 봐야 안다잖아. 겨우 진정한 가슴을 끌어안고 아까보다 진료실에서 한 칸 멀어진 의자에 앉아 휴대폰을 꾹 쥐었다. 연락해야겠지. 몇 번의 심호흡 끝에 떨리는 손끝으로 자판을 꾹꾹 눌렀다.

 

“… …”

“…여보세요? 독자니?”

“어머니, 저…”

“그래, 무슨 일이기에 전화를 다 하고.”

“…… 혹시 지금 시간 되세요?”

“시간이야 있다만……. 무슨 일이라도 있니? 목소리가 너무 안 좋구나.”

“… …”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거의 연을 끊다시피 하고 살아온 모자 관계다. 뻔뻔하게 도움을 요구하기도, 그렇다고 슬피 울며 말하기도 애매한. 김독자가 입술만 가만히 달싹이는 사이 건너편에서는 한층 초조해진 목소리가 그를 재촉했다.

 

“여보세요? 독자야, 무슨 일이야. 지금 어디 있니? 응?”

“저 지금… 성운대학교 병원이예요. 병원에서 보호자가 필요하다고 해서…”

“지금 가마. 늦어도 이십 분 안에는 도착하니까, 맞춰서 입구로 나와주렴.”

 

긴장으로 끝이 얼룩져있었다. 통화가 끝나기 무섭게 힘없이 팔이 떨어졌다. 도통 이해도 되지 않고 당혹스럽게만 느껴지는 현실이 꼭 남의 것처럼 느껴졌다. 뜨끈해진 눈가 위로 팔을 꾹 얹고 가만가만 숨을 내뱉었다.

 

제천이한테 뭐라고 말해야 하지.

 

다시금 숨이 막혀왔다. 많이 걱정할 텐데. 언뜻 비친 휴대폰 액정 너머로 손제천에게서 온 연락이 쌓여 있었다. 전부 다정함으로 꽉 차서 불안이라곤 한 글자도 새길 공간이 없었다. 문득 찬 느낌에 제 손을 보니 끝이 보라색이었다. 몸 구석구석 차디찬 감각이 점차 퍼져나갔다. 춥다. 김독자는 몸을 웅크리고 나오지 않는 울음을 억지로 삼켰다. 십 분여가 지나고 나서야 몸을 서서히 움직일 수 있었다. 일단 어머니를 만나자. 그리고 검사받으면 돼. 별거 아니겠지. 요즘 치료 못 하는 병이 어디 있다고. 최대한 침착히 마음을 먹고 다리를 움직였다.

 

어머니를 맞이하러 도착한 1층은 아까와 사뭇 다른 느낌이 들었다. 비슷한 풍경이지만 분명 다른 기분이었다. 김독자는 결연한 표정으로 휴대폰을 꾹 쥐었다. 손바닥을 타고 흐르는 온기를 느꼈다. 오 분 정도가 지나자 익숙한 인영이 익숙하지 않은 모습으로 저 멀리 뛰어오는 게 보였다. 머리가 다 헝클어진 채 숨을 가쁘게 내쉬는 어머니의 모습이 낯설었다. 불안한 눈빛으로 저를 찾느라 주변을 두리번대고 있었다.

…매번 대꼬챙이보다도 더 뾰족하고 빈틈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독자야!”

 

어머니, 이수경이 저를 발견하고 스스럼없이 달려들어 품에 꽉 차도록 김독자를 끌어안았다. 덜덜 떨리는 그 손길이 제 머리칼을 헤집어 더듬고, 등을 토닥였다. 그제야 실감이 났다. 김독자는 바보가 아니었다. 의사는 절대 괜한 말을 하지 않는다. 거진 서른이 다 된 성인에게 보호자를 불러오라는 것도, 증상을 듣자마자 당연하다는 듯이 어떤 병명을 읊는 것도 결코 확신이 서지 않았으면 하지 않았을 것이다. 되려 마음이 차분해졌다. 김독자는 이수경의 품속에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아버지가 종양으로 돌아가셨죠?”

“……유전되는 게 아니라고 했는데.”

 

이수경이 제 입을 틀어막았다. 가정폭력을 일삼던 아버지의 최후는 비참했다. 산처럼 거대하고 괴물보다 무섭던 그 아버지를 죽인 병마가 얼마나 대단했는지는 그도 똑똑히 봐서 알고 있던 터였다. 김독자가 눈을 깜빡이다 정신을 차리고 희미하게 웃어 보였다.

 

“별거 아니겠죠. 위층으로 올라가요, 접수해야 하니까.”

 

그러자 이수경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네가 별거 아닌 일에 왜 나를 부르겠니. 독자야, 나는 네 엄마란다.”

 

당연하게도, 이수경 역시 바보가 아니었으니까. 떨리는 손으로 김독자를 쓰다듬으며 비슷하게나마 웃어 보이더니, 이내 먼저 등을 돌려 엘리베이터를 향해 걸어갔다. 한참이나 작아진 등이 잘게 떨리고 있었다.

 

 

***

 

 

어느새 이수경은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뻣뻣한 모습으로 돌아와 능숙히 진료를 접수하고 짐을 들어주었다. 김독자가 MRI 촬영을 끝내고 나온 후에도 흐트러짐 없는 얼굴을 하고선 말없이 곁을 지켰다. 따뜻하고도 어색한 침묵이 이어졌다.

 

“김독자님, 진료실로 들어오세요.”

 

아까보단 조금 친절하지만 건조한 음성이 귓가에 박혔다. 엉거주춤 몸을 일으킨 김독자를 단단히 붙잡는 작은 손이 있었다. 두 사람은 함께 진료실로 향했다. 팔뚝에 느껴지는 온기가 낯설었다. 정말 이상한 하루라고, 이미 너무 지쳤으니 얼른 집으로 돌아갔으면 좋겠다고 김독자는 생각했다.

 

“악성 종양이네요.”

 

그러나 현실은 언제나 상상할 수 있는 것보다 더 잔인한 법이다.

 

“조영제를 맞고 다시 해 봐야 더 정확히 알겠지만, 지금으로서는 크게 두 군데가 보여서요. 작은 종양도 몇 개 있는 것 같고…. 반드시 입원하고, 치료받으셔야 합니다. 수술 일정도 잡고, 먼저 방사선 치료와 항암치료로 작은 종양들을 없애보죠.”

“…그러면 나을 수 있나요?”

 

김독자가 희미하게 웃으며 물었다. 의사는 쓰고 있던 안경을 벗어서 내려놓고 김독자와 시선을 마주하며 다시 말을 이어나갔다.

 

“일단 악성 종양은 환부를 얼마나 제거하는지가 관건입니다. 그러니까 최대한 빠르게 치료를 시작할수록 나을 확률도 높아지고요. 가장 좋은 치료법은 단언컨대 수술입니다. 악성 종양 수술 부작용을 떠나서, 수술은 뇌종양 치료의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에요.”

“알아보니까, 수술은 부작용이 좀 심하던데 최대한 다른 치료로 효과를 볼 순 없을까요?”

“솔직히 저는 수술을 가장 추천해 드리긴 하지만…… 보호자 분, 악성 종양은 보통 1에서 4등급을 매기는데, 김독자 환자분은 교모세포종이라는 4등급 종양이에요. 발병 속도도 빠르고 진행 속도도 아주 빠릅니다. 전조 증상들이 특별한 게 아니라 발견하는 것도 더딘 편이고요. 게다가 수술을 한다고 해도 생존율이…”

“아뇨. 저, 생존율보다, …완치는 어려울까요, 선생님?”

 

이수경이 빠르게 말을 잘랐다. 김독자의 손을 꼭 쥐었다. 생존율이라는 숫자가 감옥처럼 저들을 둘러쌀까 봐 겁이 났다. 완치라는 열쇠가 필요했다.

 

“완치까지는… 확답을 드릴 수는 없습니다. 재발을 최대한 막기 위해 노력하다 보면, 완치에 가까워질 수 있겠죠.”

“…알겠습니다. 더 말씀하실 것도 없어요. 입원하겠습니다.”

“어머니.”

“조용히 하렴. 너는, 너는 그냥… …”

“… …”

 

뒤를 차마 잇지 못하는 목소리가 바람 앞의 촛불처럼 떨리고 있었다. 그럼에도 김독자의 손만큼은 무슨 일이 있더라도 놓치지 않겠다는 것처럼 단단하게 움켜쥐었다. 진료실에 들어오는 길 내내 팔뚝을 단단히 잡아 주었던 그 작은 손, 어느새 주름이 져버린 그 손에서 느껴지는 온기가 지나치게 뜨거워서, 꼭 델 것만 같았다. 김독자는 고개를 푹 숙인 채 저절로 고이는 눈물을 뚝뚝 흘려보냈다. 방울진 눈물이 손등 위에서 금세 깨지고 흘러내렸다.

 

고작 스물아홉이었다.

하고 싶은 것도, 꿈꾸던 것도 많은 그저 그런 평범한 스물아홉 살.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할 수많은 나날을 그리던, 가장 보통의 존재.

 

머리가 어지러웠다. 텅 빈 속을 게워내고 싶었다. 그리고 이수경은 그런 김독자를 대신해 한참을 더 의사와 이야길 나누더니 김독자의 어깨를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독자야, 가자. 간호사 선생님 따라서, 입원실로 가렴. 응? 엄마가… 엄마가 다 알아서 할게. 우선 누워서 좀 쉬고 있어.”

 

어머니의 따스하고 서툰 위로에 고개만 겨우 끄덕였다. 간호사를 따라 입원실로 향하는 길이 잔인하다고 생각했다. 도착한 곳은 1인실이었다. 그제야 억지로라도 웃음을 지을 수 있었다. 어머니 돈 많이 깨지셨겠네. 쓸데없는 걱정이었지만, 쓸데없는 생각이라도 해야 숨을 쉴 수 있을 것 같았다. 침대 위에 곱게 개켜져 있는 환자복으로 탈의하자 가뜩이나 낯선 이 모든 상황이 더욱 멀게만 느껴졌다. 조금 쉴까. 조심스레 침대 위에 누워 멍하니 천장을 쳐다봤다. 눈알을 조금 굴리자 어느새 다섯 시 삼십 분을 가리키고 있는 시계가 보였다.

 

퇴근까지 한 시간도 안 남았네. 빌빌거리며 아껴 썼던 연차가 떠올랐다. 이제는 쓸 수 없다고 생각하니 아깝다는 생각이 제일 먼저 들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펑펑 쓸걸. 진작에 제천이랑 좀 놀러 다니고. 아니, 이럴 줄 알았으면…

 

“멍청한 새끼.”

 

이럴 줄 알았으면, 진작 병원을 좀 올걸. 더 빨리 검사받았으면 한참 전에 발견했을 종양을 뭐 한다고 무식하게 키웠던 걸까. 손쉽게 제거할 수 있을 때가 분명 있었을 텐데. 그때 수술받았으면 지금쯤……

 

나는 원래 예민한 성정이니까, 두통은 항상 달고 지내던 거니까. 다리가 저린 건 워낙 자세가 안 좋으니까 당연하지. 구구절절 늘어놨던 변명이 쌓이고 쌓여 결국 걷잡을 수 없을 만큼 불어나 한순간에 인생을 휩쓸었다. 안일하고 오만했던 과거의 판단이 지금의 불행을 낳았다.

 

“보고 싶어…… …”

 

이런 순간에조차 크고 따스한 그 손이 그리웠다. 특유의 낮고 다정한 음색이 듣고 싶었다. 그 음성이 다 괜찮을 거라 말해주고, 너른 품으로 안아줬으면. 김독자는 저절로 뜨거워지는 눈시울에 몸을 동그마니 웅크리곤 숨죽여 울었다. 네모나고 작은 고철 덩어리가 뭐라도 되는 것처럼, 꽉 쥔 채로. 한참을, 한참을 그렇게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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